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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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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
汪精衛 / 汪精卫 | Wang Jingwei
파일:1280px-汪精衛照片.jpg
<colbgcolor=#000095> 본명 왕자오밍(汪兆銘)[1]
정위(精衛)
출생 1883년 5월 4일
청나라 광둥성 삼수현
사망 1944년 11월 10일 (향년 61세)
일본 제국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現 아이치현 나고야시 쇼와구 츠루마이마치 65 나고야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왕징웨이 정권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기.svg
학력 호세이대학
직업 정치인
주석
재임 기간
광저우 국민정부 주석 1925년 7월 1일 ~ 1926년 3월 23일
왕징웨이 정권 주석[2] 1940년 3월 30일 ~ 1944년 11월 10일
행정원장
재임 기간
4대 1932년 1월 28일 ~ 1935년 12월 16일

1. 개요2. 생애
2.1. 일본 유학과 혁명의 길2.2. 호법운동에서 국민정부 수립까지2.3. 국민혁명반장전쟁2.4. 장왕합작 시기2.5. 혁명의 영웅에서 민족의 반역자로2.6. 비참한 말로
3. 사상4. 여담5. 매체에서6. 주요 경력7. 참고 문헌8. 관련 문서
8.1. 인물8.2. 사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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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왕자오밍(汪兆銘, 왕조명), 보통 사람들에게는 왕징웨이로 불렸다.

중화민국정치인. 국민혁명 기간 중 중국국민당 좌파 계열과 개조파의 수장이었으며 쑨원의 보좌관이자 정치적 후계자, 중국국민당의 주축, 장제스의 라이벌, 그러나 중일전쟁 중 친일 괴뢰국인 왕징웨이 정권의 지도자가 되어 미국의 베네딕트 아놀드, 한국의 이완용처럼 중국 근대사에서 한간(매국노)의 대명사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일본 유학과 혁명의 길

파일:external/pic.baike.soso.com/20130822123148-1520009357.jpg
1905년 도쿄 유학 시절의 왕징웨이
"그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사랑스럽다."
후스

1883년 3월 광둥성 싼수이 현(三水縣)에서 태어났다.[3] 4살 때부터 부친과 형에게서 경전 교육을 받았으며 18살이 되던 1901년 광동성 1, 2차 과거시험을 동시에 수석 합격하며 문장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1902년 주즈신 등과 군익학사(群益學社)라는 모임을 만들어 실학을 연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점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1904년 여름, 양광총독 천춘쉬안이 인재육성을 위해 선발한 56명의 일본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도쿄의 호세이대학 속성과에 2회 입학생으로 입학했다. 그와 같이 일본으로 파견된 사람으론 국민당 우파의 거물 이론가 후한민, 동맹회 회원으로 두각을 드러낸 주즈신, 구잉펀 등이 있었다.

1904년 가을 일본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1년 6개월 동안 중국인 통역이 있는 수업을 들으며 법학통론, 민법, 상법, 헌법, 행정법, 형법, 국제법, 경제법, 재정학 등 법학의 기본 과목들을 공부했는데 당시 교수진이 도쿄제국대학 법과의 교수를 겸직하는 우수한 인물들로 사실상 도쿄제국대학 법과의 축소판이라 할만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구적 학문, 사상, 제도를 접하여 국민주권과 공화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 때문에 반청사상과 공화혁명을 추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왕징웨이는 동기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어 1905년 4월과 6월에 치러진 1학기 시험에서 223명 중 1등을 차지했고 1906년 7월의 졸업고사에서 230명 중 4등을 차지했다. 이 당시 동기였던 후한민이 당시 그의 재능은 아무도 따라갈 자가 없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쑨원이 1905년 7월 중순 유럽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쑹자오런, 황싱, 천텐화 등과 함께 도쿄의 중국인 유학생들이 모여 구성된 흥중회, 화흥회, 광복회 등을 통합하여 1905년 7월 30일 도쿄 아카사카의 흑룡회 본부에서 중국혁명동맹회 창립 준비대회를 열게 이른다. 왕징웨이는 1903년 후난성 창사에서 설립된 화흥회 설립멤버였던 쑹자오런과의 인맥으로 인하여[4] 이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후이성 등과 함께 7월 30일 준비대회에 참석한 왕징웨이는 이후 중국혁명동맹회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 황싱, 천톈화 등 7인과 함께 동맹회 장정 기초위원이 되었으며 8월 20일 창립대회에서 평의부 의장이 되어 쑨원의 측근이 되기에 이른다.

한편 청국 유학생들의 정치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청나라 조정의 요청에 따라 일본 문부성이 1905년 11월 청국유학생취체규칙(淸國留學生取締規則)을 공포해 유학생의 행동을 제한하려 했다. 쑹자오런, 추진 등을 중심으로 동맹휴업과 귀국 운동이 벌어져 유학생들은 일본 헌법이 보장한 '행동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항의했으며, 2천여 명의 유학생이 귀국하고 그 외 수천명의 유학생들이 40일의 동맹휴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톈화는 자살로 항의하기까지 했다. 반대로 왕징웨이는 동맹휴업에 반대하고 후한민, 주즈신 등과 함께 '유학을 유지하자는 동지회'를 결성하여 학업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는데 결국 1906년 1월 일본의 정계에서 주거에 대한 규정을 완화시킴에 따라 협상에 성공한 동맹회 학생들이 학업을 재개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귀국파와 유학 유지파가 갈라진 내분 상황에서 왕징웨이는 쑨원의 든든한 측근으로 활약했다.

왕징웨이는 또한 연설에 능하여 연단에 오르기도 전에 관중이 꽉 찼고, 왕징웨이가 연단에 오르자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으며, 그의 연설 끝에는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후한민이 이후 20년동안 이처럼 연설에 능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논평했을 정도. 이후 중국동맹회의 기관지인 민보에서 청나라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혁명파의 일원으로 입헌군주제를 조건으로 청나라 유지를 주장하던 입헌파인 량치차오와의 논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혁명파의 토대를 견고히 하였다.[5]
파일:20대의 왕징웨이.png
1925년 4월 광저우의 왕징웨이

그러나 1908년 경부터 청나라입헌군주제를 시행하자 혁명파는 대중의 지지를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뚜렷한 중심이 없던 중국동맹회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왕징웨이는 암살단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쑨원, 황싱, 후한민 등이 여러 차례 말렸으나 그의 입장은 견고했고, 그는 죽음도 불사하며 후한민에게 "나는 혁명의 땔감이 될테니, 당신은 혁명을 위한 솥이 되어달라."라는 사실상의 유언을 남겼다. 한편 쑨원에게는 "지금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봉책으로는 불가능하며 모종의 적극적인 수단이 있어야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을 토대로 보면 왕징웨이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정체된 혁명파의 활기를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한 것으로 추측된다.

초반에는 아이신기오로 이쾅을 암살 대상으로 선정했으나 경비가 심하여 실패하였고, 이후 유럽에서 해군을 시찰하고 귀국한 아이신기오로 이후완의 아들이자 광서제의 동생인 재순과 재도를 노렸다. 왕징웨이는 다이너마이트가 가득 든 쇳주전자를 들고 기다렸으나 이들과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아 암살 대상을 구별할 수 없었고, 결국 다시 목표를 마꿔 1910년, 선통제의 아버지인 섭정 순친왕에 대한 암살시도에 가담하였으나 폭탄이 조기에 발견되어 실패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6] 이후 왕징웨이는 1911년 11월 6일 신해혁명으로 인해 석방되었으며,[7] 옥중에 투옥되던 당시 쓴 "칼을 맞아도 통쾌한데, 젊음을 저버리지 않겠다(引刀成一快 不負少年頭)"등의 시편들이 외부로 알려지며 그는 죽음도 불사하는 신화적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다만 풀려난 직후 혁명파와 함께하지 않고 북방 대표와 '국사공제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남북의 화의를 주도했기에 이 시기 청 황실의 포섭을 받아 이미 변절했다는 식의 비난과 위안스카이 정권 당시 위안스카이로부터 특별비를 받고 있었다는 의혹도 있었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임시정부에게서는 관직 제안, 위안스카이의 북양정부에게선 고등 고문으로 초빙하겠다는 제안, 광동의 세력가들로부터는 광동 도독이 되어달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자기 희생의 각오로 혁명에 참여한 사람이 혁명의 성공을 이유로 관직에 오르는 것은 혁명을 출세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모든 관직을 거부하였다. 이후 제2차 혁명이 시작되자 위안스카이에게 사퇴를 촉구하는 전화를 거는 등 혁명파를 지지했으나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파리로 떠나 리옹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시절에도 1917년 귀국하여 쑨원의 제1차 호법운동에 참여하여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 때 유럽으로 파견가서[8] 미국과 유럽 화교들을 대상으로 강연회와 연설, 일간지 창간을 계획하는 등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이 무렵 5.4운동에 참여, 파리에서 산동성의 일본 조차를 승인하는 베르사유 조약을 반대하고 조약 완성 이후에는 승인을 거부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국제연맹의 한계를 꿰뚫는 데는 실패했고, 언젠가는 산동성이 중국으로 돌아오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 선에서 그쳤다.[9] 다만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로서 결국 독일과 똑같으며 종국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하는 등 현실주의적 시각을 일부 보여주기도 하였다.

2.2. 호법운동에서 국민정부 수립까지

파일:1926년 1월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설하는 왕징웨이.png
1926년 1월, 중국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설하는 왕징웨이

1919년 중국국민당이 창설되고 국민혁명이 시작되자 왕징웨이는 중화민국 호법정부, 제2차 호법운동 등에 참여하며 쑨원을 보좌했고 영풍함 사건 직전에는 천중밍과의 화해를 주장하기도 했다. 쑨원은 점차 그에게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 등 여러 요직을 맡기면서 점차 후한민, 랴오중카이, 다이지타오와 함께 국민당의 주축 세력의 리더이자 장차 쑨원의 후계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1925년, 쑨원이 죽자 국민당은 본격적으로 권력 투쟁에 들어간다. 랴오중카이는 국민당 재정부장이자 국민당 좌파의 중요 인물로서, 중국공산당과의 지속적인 협력을 주장하여 제1차 국공합작 달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의 총애를 받았고 후한민과도 친한 사이었다. 후한민은 국민정부의 대리 대원수이자 중국동맹회 창단 멤버, 국민당 우파의 수장이었으며 여러 혁명활동에 참여하여 오랜 경력이 있으며 강경한 인물로 명망이 높았다. 반면 왕징웨이는 좌파이긴 했지만 중도파의 역할을 자처했으며, 당 내부의 분쟁을 조정하는 것으로 지지도가 높았지만 그만큼 자기 기반이 약했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고 그의 유서를 작성하며 쑨원의 마지막 후광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왕징웨이의 영향력은 앞선 랴오중카이, 후한민에 비하면 결코 앞서지 않았고 무엇보다 현실적인 힘인 군사력은 광둥군을 거느리는 쉬충즈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당군을 장악한 장제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이 왕징웨이를 지지해주어 그는 주석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왕징웨이는 광저우 대원수부를 개조하여 7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였고 같은 해 랴오중카이가 암살당하자 이를 구실로 장제스와 합작하여 정적인 군정부장 쉬충즈를 숙청하고, 외교부장 후한민도 그의 사촌동생 후이성이 암살에 관여되었다는 이유로 소련으로 추방함으로서 첫 번째 장왕합작의 시대를 열었고, 광저우 국민정부를 장악하여 왕징웨이는 국민정부 주석,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주석, 국민혁명군 총당대표 직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 정치적 경쟁자였던 후한민은 "보로딘이 기회주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왕징웨이를 이용하여 국민당 내 공산당의 세력확장을 꾀한 것"이라고 비난했고, 마링은 회고록에서 "광저우 국민정부는 표면상 왕징웨이가 주도했으나 실제로는 랴오중카이가 이끌었다"라도 썼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ang_Jingwei_and_Chiang_Kai-shek.jpg
중산함 사건 직전의 왕징웨이와 장제스

그러나 왕징웨이는 계속 장제스의 군사력에만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왕징웨이는 광동 세력과 접촉하다 장제스와 불화를 빚게 되고 중산함 사건 과정에서 믿었던 장제스가 정변을 일으키고 탄옌카이, 리지선, 주페이더 등 군사실력자들, 소련 고문들까지 모두 자신을 외면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다.

장제스는 쑨원의 후계자라기보단 그냥 신뢰했던 측근 중 한 사람으로 생각되었고 대권주자라기보단 그냥 군사실력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쉬충즈 숙청,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 좌파를 제압하고 당시 국민정부 주석이라는 명목상이나마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던 왕징웨이가 외유를 떠나 빈 국민당의 자리를 장제스가 영도하며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게 된다.

2.3. 국민혁명반장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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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국민당은 장제스의 주도 아래에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개시하였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당권과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우한, 난창,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를 잇달아 점령했다. 이에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던 왕징웨이를 추대하여 장제스를 견제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영왕운동이다. 이에 따라 왕징웨이는 1927년 4월 1일에 중국으로 귀국하였는데 이때 장제스는 왕징웨이에게 힘을 합쳐 국공합작을 끝내고 공산당을 몰아내면 자신은 정치에 손을 떼고 군사 업무만 관장하겠다고 합작을 제안했으나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그의 제안에 확답을 주지 않고 우한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결국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하여 독자적인 청당을 하여 공산당원들을 학살하고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장제스가 설마 군사정변까지 일으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왕징웨이와 우한 국민정부는 닷새가 지난 4월 17일에야 반격에 들어가 장제스를 출당시키고 장제스를 반역자이자 반혁명수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의 목에 25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 우한 쪽 인물인 탕성즈저우언라이는 난징을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나 미하일 보로딘 등이 북벌을 강력히 주장해서 일단 난징과의 대결은 접어두고 왕징웨이는 4월 19일 2차 북벌을 선포했다.
파일:1927년 7월 15일 이전의 왕징웨이.jpg
국공결렬 이전의 왕징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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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는 펑위샹과 동맹을 맺어 장쭤린의 공격을 저지하려 했고 더 나아가 장제스의 배신에 대처하려 했지만 도리어 펑위샹은 왕징웨이를 위협해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였다.[10] 거기에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당이 아예 국민당을 장악하기 위한 술수를 벌이는 것이 포착되자 경악한 왕징웨이는 1927년 7월 15일, 국공합작 파기를 결정하고 분공정책을 취하는데 이후 그는 장제스보다도 더한 반공인사가 되었다. 그가 훗날 일본에 붙은 이유 중 하나도 공산당과 합작하는 항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

한편 우한 정부 역시 재정적 곤란에 시달렸고 이로 인하여 여력을 상실한 왕징웨이는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를 합병하는 조건으로 장제스의 사직을 요구했는데, 마침 북양정부 장쭝창의 공격에다 우한 정부 탕성즈의 동정까지 겹쳐 궁지에 몰린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합쳐졌다. 하지만 서산회의파가 왕징웨이를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며 왕징웨이는 후한민, 탄옌카이, 차이위안페이, 리례쥔과 함께 국민정부 상임위원에, 차이위안페이, 셰츠와 함께 특별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다.

왕징웨이는 제대로 삐진 나머지 천궁보의 설득으로 우한의 탕성즈와 손을 잡지만, 세력 확장에 눈이 먼 탕성즈가 멋대로 안휘성을 침공하다 오히려 역으로 박살나자 왕징웨이는 탕성즈를 버리고 달아나야 했다. 다시 동맹자를 잃은 왕징웨이는 다시 장제스랑 손잡기로 결정, 그의 복귀를 도왔으나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고 1927년 12월 요양을 명목으로 다시 외유를 떠나고 장제스에게 이용만 당했다고 여겨 다시 반장을 외치게 된다. 이때 이론적으로 따로 노는 경향이 있던 간나이광은 좌파에서 이탈하여 미국 유학을 떠나버리는 등 세력에 타격이 있었다.
파일:1930년 옌시산과 왕징웨이.jpg
중원대전 중인 1930년 9월 9일, 베이핑에서 만난 옌시산과 왕징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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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국민당의 2차 북벌 이후 편견회의 과정에서 장제스와 사이가 틀어진 군벌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1929년 2월 광서파가 호남 사건을 일으키자 장제스가 토벌을 선포, 3월에 1차 장계전쟁이 발발했고 5월에는 펑위샹이 반란을 일으켜 1차 장풍전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이를 모두 진압했지만 서산회의파가 꾸준히 반장세력을 지원하면서 9월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켜 2차 장계전쟁이 벌어졌고 10월에 쑹저위안, 스여우싼 등 서북계의 잔여세력들이 봉기하여 2차 장풍전쟁이 일어났으며 12월에는 근성있게 재기한 탕성즈가 들고 일어나 장당전쟁이 일어났다. 왕징웨이는 이런 대혼란을 기회로 장제스에게 다시 도전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1928년 중 천궁보 등 측근들이 만든 국민당 개조동지회의 귀국 요청에 응하는 방식으로 1929년 10월 말 귀국하여 이들과 반장의 기치를 함께했다. 마침내 1930년 2월에 서산회의파쥐정, 셰츠, 쩌우루, 쉬충즈 등의 설득으로 펑위샹과 합작한 옌시산이 장제스 하야를 요구하며 반장 진영에 합류했고 4월에 중원대전이 발발했다. 왕징웨이는 8월의 확대회의에 참여, 9월 베이핑 국민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 옹호를 타전하고 나서면서 베이핑 국민정부는 11월 해체되었고 왕징웨이는 영국령 홍콩으로 달아났다.

1931년 탕산 사건이 발생하자 왕징웨이는 이번엔 개조파, 서산회의파, 광동파, 광서파를 모두 규합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장제스에 맞섰으나 얼마 가지 않아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뒤이어 영월합작이 성사됨에 따라 난징과 광저우는 협력하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자신을 무시하는 광동파에 빈정이 상해 아예 발상을 전환, 다시 장제스와 손잡기로 결정했다. 한편 이 시기 그는 군사력으로 외교적 노력이 좌절되는 사태를 여러번 목격하였고 결국 이로 인한 절망은 반제국주의를 추구하는 대신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방향으로 비틀어지고 말았다.

2.4. 장왕합작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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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ages.china.cn/00016c8b41770d0bcc285a.jpg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시절 타임지에 실린 왕징웨이

1932년 1월 자신을 무시하는 광동파에 불만을 품은 왕징웨이는 어제의 적인 장제스와 협력하여,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에, 자신이 행정원장이 된다는 조건으로 개조파-친장파 합작을 성사하여 장왕합작의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왕징웨이는 당권을, 장제스는 군권을 장악하고 1935년까지 두 사람이 난징 정부를 영도하였다. 하지만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크게 견제했기 때문에 합작이란 말이 무색하게 왕징웨이의 권력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자기 분야에 있어서도 장제스의 심복들에게 밀려 기를 펴지 못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나치 독일에 외교 방문을 하여 아돌프 히틀러와 친분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성향이 점차 극우적 성향으로 변하여 유럽 파시즘 계열의 극우파 세력을 새로이 조직하게 된다.
파일:1942년 1월 나치와 왕징웨이.png
1942년 1월 주중 독일 대사 게오르크 하인리히 슈타머(오른쪽), 주중 이탈리아 대사 프란체스코 마리아 탈리아니 데 마르치오(왼쪽)와 건배하는 왕징웨이

하지만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1933년 열하사변 등 일본의 도발이 연이어 이어졌고 일본은 화북분리공작을 벌이며 화북을 중국에서 독립시켜 괴뢰국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일본과 전면전을 벌일 능력이 없던 국민정부는 일본에 계속 저자세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국내에선 국민정부의 대일정책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었다. 왕징웨이는 1933년 8월 18일 외교부장 뤄원간당고정전협정에 불만을 품고 사직하자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부저항주의>, <항전준비론>, <일면저항 일면교섭> 등의 적극적인 대일 유화책을 전개하였다. 이걸 두고 공산당과 반장 군벌들은 국민정부의 친일성 운운하며 정치적인 공격 소재로 삼았으며 반일감정에 부풀어 오른 학생과 지식인들의 불만은 가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왕징웨이 뿐만 아니라 장제스도 동의하는 정책이었으며, 중국이 일본에 맞설 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일본이 국민정부의 반일 여론 감독을 감시하며 경제적,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었으니 국민정부가 표면상 반일 여론을 탄압하며 일본에 대한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32년 5월 감찰원이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 체결한 송호정전협정을 구실로 왕징웨이를 탄핵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명목상 "왕징웨이가 강화조약을 입법원 심의를 거치지 않고 행정원에서 일방적으로 체결했다"는 이유였지만 그 속에는 일본에 대한 왕징웨이의 유화적 태도가 탄핵의 계기였다. 탄핵 자체는 중앙집행위원회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왕징웨이는 친일파 이름을 뒤집어쓴 채 8월 초 행정원장에서 사직하여 다시 유럽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왕징웨이는 자신에게만 이런 오명이 씌어지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직서에 불만을 한가득 적어놓고 떠났다고 한다.[11]

이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1935년 11월 1일, 5기 6중전회 개막식에서 왕징웨이는 "일본의 침략에 묵인하는 국민정부를 징벌한다"라는 명분을 가진 전직 군인 출신 기자가 쏜 세 발의 총탄을 맞았고 신속히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은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당시 의료기술로 척추에 맞은 세 번째 총알을 빼낼 수가 없어 독일까지 가서 치료했으나 끝내 제거하지 못했고 결국 이것이 추후 골수종양으로 번져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후 그는 다시 요양과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이 사건의 배후로는 장제스의 수하인 남의사의 수장 다이리가 지목되었으나 알고 보니 광동파 리지선천밍수의 소행이었고 원래 암살 목표는 왕징웨이가 아니라 장제스였으나 그날 장제스가 불참하면서 왕징웨이로 목표가 수정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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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 직후의 왕징웨이

이후 시안 사건이 발생하자 권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서둘러 귀환했지만 왕징웨이가 귀국하기도 전에 장제스가 풀려나면서 일은 다 끝나버렸다. 싱가포르와 마닐라를 거쳐 1937년 1월 14일 독일 배를 타고 상하이를 통해 귀국한 이후 정계에 복귀,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에 추대되면서 외형적인 장왕합작이 복구되긴 했지만 시안 사건으로 돌아서 공산당과 합작하여 항일을 주장하려는 장제스의 국공합작 정책에 반대하며 기존의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고수했다. 이때부터 왕징웨이가 친일파로서의 길을 준비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12]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높은 직위에 앉혀는 주었으나 실권을 주지 않아 왕징웨이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훗날 천궁보의 말에 따르면, 군무는 장제스, 재정은 장제스의 처남 쑹쯔원, 당무는 장제스의 조직인 CC단 계열의 인물들이 모두 차지하여 왕징웨이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1938년 3월 우한에서 열린 국민당 임시전국대표대회에서 장제스가 국민당 총재, 왕징웨이가 국민당 부총재로 선출되었는데 왕징웨이는 자신이 총재가 되지 못한 것에 크게 불만을 표하였다. 이로써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관계는 더욱 악화하였다.[13]

2.5. 혁명의 영웅에서 민족의 반역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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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모 장징후이 왕징웨이 도조 히데키 완 와이타야콘 호세 P. 라우렐 찬드라 보스
버마국 수상 만주국 수상 왕징웨이 정권 주석 일본 제국 수상 태국 왕자 필리핀 제2공화국 통령 자유 인도 임시정부 주석
1943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회의에서 연설하는 왕징웨이
"형은 쉬운 길을 가십시오. 동생은 어려운 길을 가겠습니다."[14]
충칭을 탈출하기 직전, 장제스에게 남긴 편지의 말미.[15]

그러던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왕징웨이는 저조구락부[16]라는 단체에 합류해 줄곧 대일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트라우트만 공작 실패 직후인 일본 제국이 제1차 고노에 성명으로 중국 정부를 교섭 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국민정부를 말살하겠다)며 소통 창구를 닫아버리자 장제스와 함께 예문연구회[17]를 만들어 일본과의 접촉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난징 함락 이후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던 우한마저 함락되자 왕징웨이는 더 이상의 항전이 무의미한 걸 넘어 항전하는 것이 중국을 죽이는 길로 판단하였고[18] 일본과의 비밀협상 끝에 1938년 12월 18일, 장제스에게 청두로 강연을 하러 간다는 핑계로 충칭을 탈출하여 청두, 쿤밍을 거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하노이로 건너갔다.[19] 그는 그 곳에서 중일 평화회담을 주장하는 <염전(艶電)>[20]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없었던 국가적 위기에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공산당과의 합작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혼자 떠나 당과 국가를 돌보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혁명당원이 할 행동이 아니지 않은가? 비통하고 안타깝다. 오로지 자성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란다."
1938년 12월 21일, 장제스의 일기, 윈난성룽윈에게서 왕징웨이의 탈출 소식을 들은 후.[21]

왕징웨이가 하노이로 달아난 다음 이런 항일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자 국민정부는 그의 변절을 의심했고 왕징웨이에게는 국민정부 남의사의 수장 다이리가 보낸 암살단이 찾아왔다. 왕징웨이도 이런 일을 예상했던 것인지 컬럼비아 가의 3층 고급 빌라에 거주하며 외부인과의 만남을 최소화하고 있었는데, 왕징웨이 암살단은 미남계를 사용해 왕징웨이의 빌라에서 일하는 베트남 여성을 포섭하여 왕징웨이의 생활 습관, 빌라의 구조를 알아낼 수 있었다.

왕징웨이는 매일 아침마다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빵집의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였는데, 암살단은 이것을 이용해 배달부를 매수하여 빵에 독을 탔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그날따라 빵 대신 과일로 아침을 해결하여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 어느 날에는 빌라 화장실 수도관에서 물이 새자 암살단은 욕실 수리기사를 납치해버리고 대신 빌라의 화장실로 들어가 독가스 캔을 욕조 밑에 설치했으나, 이번에는 경호원이 화장실에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1939년 3월 20일 왕징웨이가 하노이 교외로 유람을 떠나자 암살단은 중간 지점에 매복해 왕징웨이를 기다렸지만 경찰의 경호가 삼엄해 다시 한번 실패하였다. 연이은 실패에 국민정부는 암살단을 닦달했고, 성급해진 암살단은 바로 다음날인 3월 21일 새벽, 수류탄, 경기관총, 도끼로 무장하고 빌라의 담을 넘어 직접 빌라를 공격하였다. 훈련받은 자객들은 경호원들을 손쉽게 처리한 다음 2층 4호실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잠옷 바람의 여성과 침대 아래서 무언가를 쓰는 남성을 발견했고, 그들을 암살했으나 그들은 왕징웨이 부부가 아니라 왕징웨이의 심복인 쩡중밍(曾仲鳴) 부부였다. 쩡중밍은 왕징웨이의 안전을 위해 매일 밤 왕징웨이와 침실을 바꾸며 잤는데, 당시 모든 자금을 관리하던 쩡중밍은 침실에서 수표에 서명을 하다 암살당한 것. 어쨌거나 그 덕에 왕징웨이는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22] 그러나 당시까지 확실한 매국행위를 한 적이 없음에도[23] 무력까지 사용한 국민정부에 왕징웨이는 경악하였고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관계도 끝장났다.
"내가 충칭에 있을 때, 국민당 부총재, 국방최고회외 부주석으로 이 기관과 함께 옮겨 다녀도 안전에는 별 문제가 없었고 (중략) 패전하여 죽더라도 사후에 이름을 얻을 터인데, (이런 내가) 왜 충칭을 떠났을까? 나는 20살 조금 넘어 혁명에 투신한 이후로 한 번도 나 자신을 위한 계산을 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지금은 이미 50여 세가 되어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망하는 것을 목전에 두고 있다."
1939년 3월 30일, 왕징웨이, 하노이의 아지트가 습격당한 직후 발표한 글인 <覆華僑某君書> 中.[24]

결국 1939년 5월 8일, 당시 일본이 점령 중이던 상하이로 가 저우포하이, 천궁보, 리스췬 등과 함께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여 정부주석 대리[25] 겸 행정원장에 오른다.[26]

한편 정부를 수립하기 직전, 왕징웨이는 화평을 통한 구국의 의지를 재확인했다.
我只會死,絕不會失卻自由。不但此也,我 時時刻刻準備着,以我的生命,換取同胞的 生命;以我的自由,換取同胞的自由。
나는 단지 죽을 뿐이지 결코 자유를 잃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항상 나의 생명과 동포의 생명을, 나의 자유와 동포의 자유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1939년 8월 9일, 왕징웨이, 광저우에서 발표한 <평화를 이루는 방법> 中.[27]
我們今日要為救國而死,不要只為殉國而死!
우리는 오늘 구국을 위해 죽을 것이지, 순국만을 위해 죽지 말아야 한다!
1939년 12월 29일, 왕징웨이, <염전서후> 中.[28]
일본을 방문한 왕징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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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와 회동하는 왕징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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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 정권 취임식에서 맹세를 낭독하는 왕징웨이

그의 <염전>과 더불어 이런 왕징웨이의 행보에 중화민국은 당연히 왕징웨이가 조국을 배반했다고 판단하였고, 1938년 6월 8일 왕징웨이의 체포를 수배하는 것에 이어 결국 1939년 1월 1일, 국민당 임시 중앙 상무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왕징웨이를 모든 공직에서 해임시키고 국민당에서 영구 제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어리석음과 천박함이 그 정도까지 추락할 줄을 미처 몰랐다. 그처럼 파렴치하고 퇴폐적인 인물을 가진 것은 당과 국가의 불행이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명망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자신의 선택에 동조할 것이라 주장했지만 장제스에 적대적인 군벌들조차 왕징웨이를 무시했다.[29] 일본은 왕징웨이를 내세워서 장제스 정부를 무너뜨리고 왕징웨이와 협상하여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화친파를 일소시켜 장제스 정권의 정통성만 굳건히 만들어 준 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같이 합류했던 가오쭝우 등 일부 인사들이 일본이 자신들을 괴뢰로 내세워 이용하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하여 홍콩으로 탈출해서 왕징웨이와의 일본의 협정을 공개하며 그의 비겁함을 규탄함으로 왕징웨이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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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반(反)왕징웨이 포스터[30] 왕징웨이의 사망 당시 중화민국 측 포스터.
당시 중국 입장에서 왕징웨이가 얼마나 경멸의 대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일본군과 화친하려고 한 이유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을 배반했다는 민족배반론(한간론), 충동적인 성격으로 판단을 그르쳤다는 실수론,[31] 일본의 무자비한 침략으로 민중들이 고통받는 것을 볼 수 없었다는 고육지책(자기희생)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자기희생론 등이 주어진다. 이 중 단순히 어느 한쪽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려우며 왕징웨이가 여러 번의 권력투쟁과 냉혹한 국제정세로 인하여 좌절하게 되면서 그의 민족주의가 변질되게 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대개 비판론이든 희생론이든 각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반영하며 실수론은 비판론이나 희생론에서도 상당히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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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1월 30일, 주중 만주국 대사 짱스이와 대화를 나누는 왕징웨이

2.6. 비참한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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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의 왕징웨이
1942년 왕징웨이의 신년사

왕징웨이는 일본군과의 화친이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 내에서의 파벌은 국민당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독했다. 여러 번의 혼란과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무책임함이 더해져 결국 정권 수립은 매우 어렵게 진행되었다. 우선 정권이 발족하고 수 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일본이 간신히 승인했고, 기존의 일본 괴뢰정권들은 왕징웨이에게 크게 반발했다.
"외부에서 누군가 우리들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우리가 일본인의 꼭두각시라고 비방하고 있는데, 여러분, 오늘 회의장에 일본인이 있는지 보세요."
1939년 8월 30일, 왕징웨이,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의 폐막사.
"중국과 같은 대국이 나 따위에 팔릴 나라는 아니다. 비록 내가 조인하더라도 그것은 내 몸을 파는 계약에 지나지 않는다."
12월 30일, 왕징웨이, <일화신관계조정요강>에 서명한 이후.

왕징웨이는 그의 정권이 자주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지만, 몇 차례의 권력 회복 시도는 모두 실패하였고 왕징웨이 정권괴뢰국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일본군은 그의 이름으로 점령지에서 무척이나 잔인한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유서라고 공개된 문서를 보면, 왕징웨이는 그래도 자신이 일본에 붙음으로서 점령지 민중들의 삶을 지켜냈다고 자부한 모양이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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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 적출 수술을 받는 왕징웨이와 적출된 탄환[33]

이러한 와중에 왕징웨이는 등에 박혔던 총알로 인한 통증이 심해져 1943년 12월 19일 난징의 일본육군병원에서 탄환 적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왕징웨이는 다리가 마비되었고 알 수 없는 발열 등에 시달렸다. 왕징웨이를 진찰한 일본 교수진은 척추골 압박에 의한 신경증상으로 판단하고 3월 3일, 일본으로 날아가 나고야 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급히 수술을 진행하였다. 최종 진단명은 다발성 골수종. 일본은 평소 왕징웨이가 좋아하던 꽃인 매화에서 딴 '매호'를 왕징웨이의 암호명으로 사용하였으며 매화나무 배지를 단 인물만 병동에 출입할 수 있는 등 철저히 극비로 치료하였다. 당시 일본은 물자 부족으로 석탄을 조달하기 힘들었는데, 왕징웨이 병실에는 특별히 석탄을 보급해주어 난방을 해주었다. 5월에는 냉방이 필요하자 규슈까지 가서 냉방기를 가져왔다. 일본은 최고의 의료진을 동원해 치료에 열중하였으나 왕징웨이는 결국 1944년 11월 10일 오후 4시 20분, 다발성 골수종으로 사망하였다. 왕징웨이의 시신은 이틀 후인 12일 난징으로 운구되어 그곳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왕징웨이의 장례식은 너무나도 인기가 없던 나머지(...) 참석자들에게 당시 1주일치 봉급인 20위안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죽은 이후 왕징웨이 정권의 주석 자리는 천궁보가 이어받았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일본이 항복하고 왕징웨이의 정부는 해체된다.
왕징웨이의 장례식[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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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 이전 왕징웨이의 무덤

왕징웨이는 본래 순친왕 암살 시도 당시 희생된 동지들과 함께 광저우에 묻히고 싶었으나,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단 유해는 쑨원의 곁에 안장한 후 전쟁이 끝나면 광저우로 옮겨 묻어 다시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왕징웨이 자신도 자기 무덤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는지 자신이 묻힐 묘역을 단단한 콘크리트로 조성해달라고 하였으나[35]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장제스허잉친에게 무덤을 폭파시키라고 지시했다. 1946년 1월 21일, 허잉친의 밀명을 받은 육군총부 참모장 소의숙, 육군 총공병부장 마숭륙, 74군 군장 구유달, 난징시장 마초준 등이 왕징웨이 무덤 폭파 계획을 집행하였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시신을 파내 청량산에서 불태우고 왕징웨이의 무덤은 다이너마이트 150킬로그램을 동원하여 2차례에 걸쳐 폭파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징웨이의 셋째 딸 왕문순이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따지자 허잉친은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답변하지 않았다. 이후 폭파에 참여했던 구유달은 왕징웨이의 망령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환상에 시달렸으며 국공내전 중 산동성에서 공산군과 교전하다가 갑자기 "왕 선생님!"을 연호하더니 권총으로 자살했다.

왕징웨이의 가족들도 처벌을 면치 못했는데 아내 천비쥔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상하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국민당 정권이 대만으로 도피한 후 공산당은 천비쥔에게 전향을 권유했지만 천비쥔이 거부하자 석방시켜주지 않았고, 1959년 6월 심장병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광동성장을 지낸 처남 진춘포는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괴뢰군 육군소장을 지낸 장남 왕문영은 사형이 예상되었으나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한 것으로 인정되어 징역 7년, 공권박탈 7년,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차남 왕문제는 광동교도총대 대대장을 지냈다가 이후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왕징웨이의 장녀 왕문성의 남편인 사위 하문걸도 징역 2년 6개월, 공권박탈 5년,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이후 왕문영, 왕문성, 왕문순, 왕문제는 모두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하였으며 차녀 왕문빈은 인도네시아에서 천주교 수녀가 되었다.

3.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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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

  • 오늘날 중국에서는 매국노의 대표격으로 간주된다. 간단히 말해 중국판 이완용인 셈. 국민당뿐만 아니라 공산당에서도 한간으로 간주한다.
  • 강력한 타국에 항복하여 괴뢰국으로도 평가받는[36] 비시 프랑스의 지도자가 된 필리프 페탱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하지만 페탱은 이미 본국인 프랑스가 패망 직전인 상태에서 비시 프랑스 정권을 설립했지만, 왕징웨이는 본국이 아직 항복하지 않은 시점에서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때문인지 페탱은 현재까지도 완전한 배신자였는지, 프랑스의 이익을 수호하려던 인물이었는지 논쟁이 있지만, 왕징웨이는 그냥 매국노 한간 취급 받는다.
  • 그래서인지 논문 등에서는 '왕징웨이(왕정위)'가 아닌 본명인 '왕자오밍(왕조명)'으로 쓰여 있는 경우가 적지 않게 보인다.[37] 중국에서 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본명으로 부르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의 친일행적 때문에 중국과 대만에서는 왕징웨이를 객관적으로 연구한 자료가 많지 않다고 한다.
  • 민국 시절에는 정가에서 손꼽히는 미남 중 한 명이었다. 후세에는 저우언라이, 매란방[38], 장쉐량 등과 함께 4대 미남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다만 후일 나이도 들고, 병도 들고, 상술했듯이 1935년에 얼굴에 총까지 맞아서 외모가 급격하게 망가졌다. 그래도 1943년 대동아회의 때 참석한 다른 외국인들로부터 놀라울 정도의 미남이라는 평가를 받는 등 죽기 전까지 젊을 때 명성을 떨쳤던 외모가 죽진 않았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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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오쩌둥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국공합작 시절인 1924년 마오쩌둥이 국민당 조직부장으로 일할 때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 조선경비대 창설인원 중 한 명인 이성가왕징웨이 정권의 군대인 화평건국군 출신이다. 건군기 과정에서 창군 준비단계인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110명의 군 경력자를 장교로 임관시켰다. 원래는 중국군(광복군 포함), 만주군, 일본군이 1:1:1 비율로 임관하려고 하였으나 중국군(광복군)계가 보이콧 하여 실제로는 딱 2명만 중국계였다. 그중 한 명은 오리지널 광복군 출신이고, 나머지 한 명이었던 이성가가 바로 왕징웨이계이다. 그는 이후 8사단장으로 6.25 전쟁 때 큰 공을 세웠다.
  • 1920년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를 다룬 역사서인 백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2명의 중국인의 서문이 실려있는데 하나는 이 왕징웨이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활동한 중국의 아나키즘 계열 운동가인 경정성(景定成)의 것이다. 국회도서관 소장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판본의 설명 중.
  • 매우 마이너한 밈으로 "Wang Jingwei Car"가 있다. 원박스카 위에 왕징웨이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붙인 것이 포인트. 실제 해당 차는 1941년 난징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에 등장한 차량이다.

5.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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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해혁명에 등장한 젊은 왕징웨이. 배우 여소군이 분했다. 여소군은 영화 건군대업에서도 왕징웨이를 맡았다.

대한민국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에서 등장인물로 나오는데, 배우는 정흥채.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 폴아웃3DLC오퍼레이션 앵커리지의 최종보스격 인물인 징웨이 중공군 앵커리지 전선 사령관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름의 한자 精衛도 똑같고, 왕징웨이가 친일파였다는 걸 감안한 건지 플레이어의 설득 스킬이 높을 경우 죽을 때 할복자살을 한다. 이건 뭐 일본군도 아니고...

Hearts of Iron IV에서 중화민국이 파시즘화되면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하는데, 명색이 한때 국민당의 영도자였고 쑨원의 후계자였던 사람인데 개인 초상화도 없이 웬 듣보잡 아시아 공통 인물 사진을 돌려쓰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해서 고유 초상화를 추가하는 모드도 나왔다. 중국을 중점으로 다룬 DLC Waking the Tiger가 나오면서 고유 초상화가 나왔다. 꼭 파시즘 쪽으로 가지 않더라도 시안 사건 이벤트에서 중공과의 협력이 아닌 전쟁을 선택한다면 장제스는 공산당의 처형대에서 살해당하고, 장제스를 대신해서 중화민국의 지도자가 된다. 다만 방어전시 안정도를 올려주는 유니크한 특성으로 이후의 중일전쟁에서 큰 도움이 되는 장제스와는 달리 아무 특성도 없기 때문에 전쟁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경우 일본은 중국의 해안가만 합병하고 내륙 지역에는 괴뢰정부를 수립하는데, 이때 중국 지도자로 나온다. 파시즘 일본에게 괴뢰화되면 당연히 파시즘 정부가 집권하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데 이때 국기가 북양정부 국기로 바뀌는 고증오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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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왕징웨이(Hearts of Iron IV Kaiserreich Anime Mod: Moereich!).jpg
카이저라이히에서의 모습[40] 모에라이히에서의 모습(...)

위 게임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독일 제국의 개입으로 국민혁명이 실패한 이후 프랑스 코뮌으로 망명했다. 국민혁명 직전에 랴오중카이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장제스후한민 등의 우파를 전부 숙청한 상황에서 그 장제스가 암살당하면서 국민당의 우파는 사실상 궤멸 상태에 들어갔고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등이 주도하는 국민당 내 좌파인 '민생파'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민당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 코뮌의 영향 때문인지 정치적 성향은 더욱 좌경화되어 급진사회주의로 분류된다. 쑨촨팡 사후 중국 남부가 아수라장이 되면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북벌을 시작한다. 게임 플레이 도중 중일전쟁이 터지면 하늘색 국민당군 군복을 입은 초상화로 바뀐다.

카이저라이히의 서브모드인 카이저라이히 아니메 모드: 모에라이히!에서도 어김없이 모에화되어 등장하는데, 이 모습이 사실상 인터넷 밈이 되어 컬트적인 인기가 있다. 모에라이히를 비롯한 씹덕 초상화 모드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데 카이저라이히 3차창작 여기저기서 왕징웨이가 저 모습으로 등장해서 다른 인물들의 씹덕 초상화보다 인지도가 높다. 국민당의 아이도루 중국발 이야기에 따르면 저 초상화가 쓰이는 이유가 밈 반, 본토의 검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는 이유 반이라고. 단 이 영상에서 왕징웨이가 두 번 나오는데 앞 부분에는 일반 초상화가 쓰인걸 보면 검열을 빡세게 조이는건 아닌 듯.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쑨원보다 좀 더 현실적인 인식을 가진 애국자이자 혁명가로 등장. 쑨원 사후 공산주의 좌파로 몰려서 만주국으로 몸을 피하고 그곳의 총리가 된다. 중국이 군벌과 경제 공황으로 쑥대밭이 나자 만주국이야말로 진정한 쑨원의 중화민국의 후계자라고 선전하지만 성장한 만주 국민들이 더러운 짱개같은 나라가 될 수 없다선통제를 옹립하자 실각. 노숙자나 다름없는 몰골로 만주국의 대원수가 된 남상덕에게 자신의 사정[41]을 하소연하고 역사에서 퇴장한다.

THE LAST EMPIRE에서는 장제스의 북벌이 실패, 국민당 좌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지도자가 된다. 장제스와는 어느 정도 화해해서 겉으로는 호형호제 하지만 여전히 갈등은 있는 상태로 나오며 한중전쟁이 터지면 지도자에서 물러난다. 이 세계에서 한간 대표 역할하는 것은 치셰위안이라서 매국노 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6. 주요 경력

광저우 국민정부 역대 주석
파일:대만 국장.svg
국민정부 수립 초대 상무위원제 실시
왕징웨이
1925년 7월 1일 ~ 1926년 3월 23일
난징 국민정부 역대 행정원장
파일:대만 국장.svg
3대 4대 5대
쑨커 왕징웨이
(1932년 1월 28일 ~ 1935년 12월 16일)
장제스[42]
난징 국민정부 역대 외교부장
파일:대만 외교부 로고.svg
7대 8대 9대
뤄원간 왕징웨이
(1933년 8월 18일 ~ 1935년 12월 12일)
장췬
왕징웨이 정권 역대 주석
왕징웨이 정권 수립 초대[43] 2대
왕징웨이
(1940년 3월 30일 ~ 1944년 11월 10일)
천궁보

7. 참고 문헌

8. 관련 문서

8.1. 인물

8.2. 사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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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식 독음은 왕조명.[2] 정확히는 주석대행으로 취임하였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주석으로 선출되어 취임한다.[3] 현재의 광둥성 싼수이 구이며 구이저우성의 싼수이 현(三穗縣)과는 한국어 발음만 같은 다른 행정구역이다.[4] 쑹자오런은 왕징웨이의 호세이대학 후배였다.[5] 다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량치차오의 우세라고 판단하고 있다. 애초에 입헌파의 상징이었던 신민총보에서는 량치차오 혼자 논쟁을 진행한 반면, 민보측에서는 장빙린(章炳麟), 왕징웨이, 후한민 세 명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정상적인 토론이 진행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한쪽은 한 번 의견을 개진하는데 세 번을 반복해야 하고 한쪽은 한 사람의 주장을 세 번 비판하니 토론이 진행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입헌파측이 견지한 '제국주의의 간섭'과 '대다수 국민들의 의식 부족'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해 결국 입헌파의 주장을 완전히 반박하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6] 사형이 선고되지 않은 이유는 민심을 안정화시키기 위함으로 추측된다.[7] 다만 동맹회 내에서 혁명으로 인한 석방이 아닌 위안스카이의 보석으로 인해 석방했다는 주장이 돌아 후술할 위안스카이에게 포섭당했다는 의혹을 키웠다.[8]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왕징웨이와 함께한 일행들은 자신들이 파리로 간 이유가 파리강화회의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왕징웨이는 극렬히 부정하며 그저 자신이 예전에 프랑스에서 만든 조직인 화법교육회를 정비하러 간 것이라고 말했다.[9] 당시 왕징웨이는 협상국을 공리로, 동맹국을 강권으로 보고 제1차 세계 대전을 "강권에 대한 공리의 승리"로 표현하며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들이 중국 편을 들 것이라는 이유 없는 희망을 품었는데, 이러한 무분별한 희망은 당시 중국 지식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했다.[10] 처음에는 왕징웨이가 펑위샹의 무리한 요구까지 들어주며 우한 정부에 대한 지지를 받아냈으나, 그로부터 약 10일만에 장제스가 제안한 더 달달한 조건에 넘어가 왕징웨이의 통수를 후리고 만다.[11] 주된 내용은 대일정책과 관련하여 장제스와의 갈등, 재정 문제와 관련하여 쑹쓰원과의 갈등, 장제스의 사조직인 CC단과 같은 장제스와의 합작에서 자신의 실권이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12] 왕징웨이가 아예 태초부터 친일 행각을 벌인 것은 아니고, 만주사변 당시에는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에게 찾아가 적극적으로 항전할 것을 권하였지만 장쉐량은 거부했으며, 결국 만주가 허무하게 넘어가는 것을 본 왕징웨이는 장쉐량을 호되게 질책하며 자결하라고까지 이야기하였다.[13] 사실 왕징웨이의 불만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 왕징웨이는 일본 유학 시기부터 쑨원과 함께한 그야말로 국민당 원로 중의 원로이다. 그런데 십 수년 전만 해도 자신의 발끝에도 못 미치던 장제스라는 자가 왕징웨이 자신의 정통성이 가득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국민당의 총재 자리까지 먹어버렸으니 왕징웨이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14] 장제스가 네 살 어리지만, 중국에서는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존중의 의미로 형이란 표현을 썼다. 예컨대 장제스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장쉐량을 한경(장쉐량의 자)형으로 부르곤 했다. 한국에서도 성인 남성들 사이에서 '김형', '이형' 하는 식으로 서로를 호칭하기도 하였는데 최근에는 보기 어렵다. 90년대까지 소설 등에서는 볼 수 있는 표현이었지만 이미 사회에서는 죽은 지 한참 된 표현이 되어있었다.[15] 이후 왕징웨이 정권에서 선전부장을 맡게 되는 린바이성은 왕징웨이와 장제스가 화평운동에 관해 얘기할 때, 장제스가 항전은 쉽고 화평은 어렵다고 하자 왕징웨이는 “당신이 쉬운 쪽(항전)을 맡고 내가 어려운 쪽(화평)을 맡겠다”라 대답했다고 말했다. 고로 왕징웨이가 장제스를 떠날 때 남긴 이 문구는 일종의 수미상관인 것.[16] 큰 소리를 내며 항일을 주장하는 항전파들에 반대해, 작은 소리로 화평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중일평화, 반공 성향과 함께 반장제스 성격도 있었다. 그러나 이 단체를 왕징웨이가 조직한 것은 아니다. 저조구락부는 루거우차오 사건 직후부터 생겼으며 가오쭝우, 메이쓰핑과 같은 왕징웨이의 측근들도 있었으나 타오시성, 후스 등 학계 인물, 심지어 천부레이, 저우포하이 등 장제스 측근들도 있었다. 이들은 국민당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왕징웨이가 자신들의 생각과 비슷하자 그를 중심으로 삼았다고 한다.[17] 국민당 중앙선전부(부장 저우포하이) 휘하에서 문화단체를 가장하여 1938년 1월 중순 한커우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창사, 청두, 광저우, 충칭, 시안, 홍콩에 분회를 두며 화평파의 또다른 거점이 되었다. 장제스의 자금 지원, 왕징웨이의 지도, 가오쭝우의 주도로 운영되었으며 일본과의 화평과 반공을 기치로 내세웠다.[18] 왕징웨이 자신은 광저우가 함락되고 창사가 성급한 초공작전으로 불바다가 되어버린 1938년 10월 최종 결심을 했다고 말하였다.[19] 장제스는 왕징웨이가 쿤밍에 도착했을 때 이 사실을 알았는데, 바로 운남성 주석 룽윈이 장제스에게 "왕징웨이가 다짜고짜 쿤밍에 찾아와 일본과의 화평 운운하며 협조를 요구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보았기 때문. 당시 전선 시찰을 위해 시안에 나가 있었던 장제스는 충격을 받고 곧장 충칭으로 돌아왔으며 룽윈에게는 왕징웨이에게 절대 협조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20] 1938년 12월 29일에 발표되었다. '염(艶)'은 중국에서 29일을 뜻하는 말로, 즉 '염전'은 '29일의 통전'이라는 의미이다.[21] 글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이때 장제스는 왕징웨이가 중국을 떠난 이유를 단순히 국공합작에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22] 이 사건으로 쩡중밍은 사망했으나 부인인 방군벽(方君璧, 1898~1986)은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다음에도 3번의 추가 암살 시도가 있었고, 왕징웨이는 총 일곱 번의 암살 위기를 넘겨야 했다.[23] 상술한 <염전>은 1938년 12월 22일 발표된 제3차 고노에 성명에 호응한 글로, 고노에 성명으로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고 국가의 생존과 독립이 항전의 목표라면 그 목표는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글이었다.[24] #. 얼핏 보면 왕징웨이가 스스로 충칭을 떠난 것을 후회하는 듯한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나는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충칭을 떠난 것이 아니며, 화평을 추구하는 길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불명예와 죽음까지 무릅쓰고 충칭을 떠난 것이다"라는 자기희생을 강조한 내용이다.[25] 명목상 정부주석은 기존의 주석이었던 린썬이었다. 왕징웨이는 린썬에게 충칭에서 난징으로 와서 주석에 복귀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린썬은 당연히 이딴 괴뢰정부 따위는 씹었다.[26] 이 과정과 왕징웨이의 선택을 찬양한 밀도 있는 르포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발표되었다. 그 르포를 쓴 사람은 바로 박태원이었다. 월북을 했기 때문에 이런 친일 수필은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27] #. 당시 광저우 역시 일본에게 점령된 상태였다.[28] #. 왕징웨이는 승산이 없는 중일전쟁에서 무의미하게 희생되어 순국하는 병사들 대신, 일본과 화평을 맺어 희생을 막고 나라를 구하는(구국) 선택을 뜻하는 듯하다.[29] 우페이푸, 돤치루이, 차오쿤의 경우 일본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했고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은 일본과 싸웠다. 중요한 건 이 6명 모두 장제스와 사이가 안 좋거나 안 좋은 적이 있었고 돤치루이의 경우 한때 일본의 지원까지 받았던 군벌이었다. 일본이 포섭할 수 있었던 인물은 기껏해야 재정부장이나 외교차장 정도를 지낸 잔챙이들 정도였다.[30] 왕징웨이는 화평구국(和平救國)이라고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으나, 거울 속에 비친 왕징웨이는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고 매국밀약(賣國密約)이라고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명목과 실상이 전혀 다른 왕징웨이 정권의 이중성을 질타하는 의미이다.[31] 실제로 <염전> 발표 직후 왕징웨이는 많이 불안했는지 하노이에서 가오쭝우를 만나 일본을 믿을 수 있는지 여러 차례 물었다. 가오쭝우는 "일본인이 말하는 것은 40%만 믿을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32] 왕징웨이의 유서 1편, 2편, 3편. 1964년에 알려졌지만 진위여부는 확실치 않은 듯하다. 관련 인터넷 글에 따르면, 유서에 적힌 필체와 문장은 분명 왕징웨이의 것이 맞고, 생전 그가 주장한 것과 일치했지만 주변인의 말로는 왕징웨이는 형식적인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는데(때문에 생일날에도 형식적인 축하가 있으면 무척이나 화를 냈다고 한다.) "유서를 '사후 20주기'에 공개하라"와 같은 문장이 있을 리가 없다고 의심했으며 그의 아내 천비쥔도 왕징웨이는 유서를 쓴 일이 없다고 증언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의문점과 가설이 제시되었지만, 진위여부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33] 탄환이 검은색에다 둘로 갈라져 있는데, 저격 후 약 1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34] 1분 19초에는 왕징웨이의 아내 천비쥔이, 2분 29초에는 왕징웨이의 측근 천궁보가 등장한다.[35] 심지어 아내 천비쥔의 조치로 왕징웨이의 콘크리트에 철강 조각을 자그마치 5톤이나 섞어 부었다고 한다.[36] 실제로 괴뢰국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37] 실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그는 왕징웨이로 더 유명할 뿐더러 같은 논문에서 장제스(본명 장중정)는 본명을 쓰지 않고 장제스라고 그대로 나온다.[38] 유명한 경극 배우이다.[39] 나이 든 사진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이연걸과 굉장히 닮았다. 그만큼 외모가 출중하다.[40] 카이저라이히 리워크 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초상화를 썼다.
파일:왕징웨이(Hearts of Iron IV Kaiserreich).png
호이4 원판(바닐라)에서는 본 문서 맨 상단에 있는 사진을 기반으로 한 초상화를 쓴다.
[41] 자신이 꼭두각시였다는 사실을 사실 만주국에 도착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자신이 한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부정했다고 한다.[42] 왕징웨이가 신병치료를 위해 12월 16일 정식 사퇴하기 이전까지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가 대행.[43] 엄밀히 말해서 충칭의 린썬을 주석으로 추대한 상황이었으나 린썬이 괴뢰정부의 주석으로 취임할 리 없으니 왕징웨이가 행정원장 겸 주석 대리로 정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