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02:58:14

오산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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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투 전 상황3. 전투 경과4. 여담

1. 개요

북한군의 남진이 한창인 1950년 7월 5일 미 제24보병사단 21연대 1대대가 경기 화성군 오산면 외삼미리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상대한 전투로, 고개 이름을 따서 '오산 죽미령 전투'로도 불린다.

미 제24보병사단 21연대 1대대는 지휘관인 찰스 B.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로 많이 불리운다.

2. 전투 전 상황

한반도의 정세가 일촉즉발이 되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6월 30일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에 일본에 주둔중인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해
북한군이 남진중인 경부국도로 북상하였다.
이때 북한군은 7월 2일 영등포를 함락시킨후 7월 4일 수원을 점령하면서 쾌속 남진을 하고 있었는데 평택에 있던 스미스 대대도 7월 4일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이동하게 된다.
스미스 중령은 출발하기 전 오산 갈곶리에 있는 17연대에게 같이 북상을 권유했지만 이때 17연대는 미 공군의 오폭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라 17연대는 이를 거절한다.
하는 수 없이 스미스 대대는 단독으로 북상하게 되었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징발한 운전사들이 도망치게 되어 출발이 늦어지게 되었고 경부국도가 피난민들로 가득차는 바람에 7월 5일 새벽 2시 30분에서야 겨우 죽미령에 도달하게 된다

3. 전투 경과

7월 5일 새벽 2시 30분경 오산 북방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대대는 B중대와 C중대에게 경부국도 양옆 능선에 진지공사를 시킨후 75mm 무반동총 4문, 4.2인치 박격포 4문을 포함하여 모두 406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는데, 이들을 미 52포병대대가 지원하기로 했다. 이 무렵 이들은 북한군이 자신들을 보면 '미군이 참전했다' 며 물러설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전 7시경 쏟아지는 비 속에서 이들은 수원 부근에서 북한군을 목격했고[1], 이후 8시경 북한군 4사단 보병들과 107전차연대 전차(T-34)들이 이들이 있는 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죽미령으로 이에 관측장교가 포격 요청을 해 오전 8시 16~18분 경 포탄 두발이 선두 전차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전차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 전진해 오고 있었고 이에 스미스 중령은 적 전차가 700 야드 내에 들어오자 무반동총 2문과 바주카포를 집중적으로 사격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주카포 소대를 지휘하는 코너 소위는 바주카포 22발을 전차 후방에 모두 명중시켰지만 해당 전차가 멀쩡히 기동하는것을 보고 경악했다. 결국 미군 포병들이 105mm포 직사포격으로 2대의 전차를 조준사격하고 나서야 선두 전차 2대를 멈춰세울수 있었다. 2대의 전차는 후속 전차를 위해 길가에서 벗어났는데 이중 한대에서 튀어나온 승무원들이 항복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미군 기관총 부사수 두명을 쏴죽였다. 이는 한국전쟁 최초의 미군 전사자다. 이때 인민군 전차가 미군 진지를 공격해서 야포 1문을 파괴했고[2] 후속 전차들은 이들을 무시하고 남진했으며, 이렇게 총 33대의 전차가 미군 방어선 밑으로 남진했다. [3]
이 과정에서 미군은 약 2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북한군 전차를 요격할수있는 대전차 포탄 6발을 모두 소모한다.

이 와중에 진지 내의 미군들은 여전히 "아마 저 친구들이 우리들을 못봤기에 지나갔지, 미군이 왔다는 걸 알면 되돌아 갈 것이다." 는 희망 속에서 후방의 포병에게 적 전차가 우리 진지를 지나갔다고 알려 주었다.[4] 이어서 미군 포병들은 포병진지를 그냥 통과해버리는 북한군 전차대열을 공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선두 전차에 바주카포 공격을 가해서 전차 포탑을 명중시켰고 이어서 두번째 전차의 궤도를 파괴해 멈춰세우긴 했으나, 안에서 튀어나온 승무원들에 의해 밀러 O. 페리 미 52포병대대장이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이후 첫번째 인민군 전차 행렬이 통과하자 죽미령 일대가 잠시 고요해졌다. 10분뒤 북한군 두번째 전차 행렬이 포병 진지를 통과하자 긴장한 미군 병사들이 모조리 도주하는 참사가 발생하였는데, 다행히 장교들이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직접 전차 1대를 파괴하자 병사들이 다시 진지로 복귀하였다.

오전 11시경 북한 4사단의 주력이 전차 3대와 함께 죽미령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이에 미군들은 박격포와 기관총을 선두 트럭에 집중해 트럭 안의 보병들을 살상시켰다. 그러나 뒤따라오던 전차 3대가 가세해 3시간 가량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후방의 포병대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고,[5] 탄약까지 고갈되고 북한군이 옆 92 고지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동측방 능선을 타고 기어 올라 대대를 사실상 포위하자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스미스 대대장은 오후 2시 30분 경 C중대부터 황급히 철수시켰으나, 철수가 워낙 다급하게 진행된 탓에 B중대 1소대는 철수 명령을 듣지 못했으며, 전장에 남겨진 낙오자와 부상병들은 그대로 북한군의 공격에 전사했다.

한편 스미스 중령은 포병대대장과 합류, 패주병들을 수습했으나, 남쪽 오산 시내가 점령당한 걸 알고 안성을 거쳐 7월 6일 천안까지 내려갔으며, 이 과정에서 보병 540명 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05전차사단 문화담당 부사단장인 안동수 대좌를 포함한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고 북한군 전차 7대가 완파또는 반파됐다 .그리고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군이 진격을 멈추리란 맥아더와 미 24사단장 딘 소장의 기대 또한 이 전투로 깨졌다.

또한 남쪽의 미 34연대와 상급부대인 미 24사단은 이들로부터 연락이 두절되자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 다음날 6일 잔존병들에게 전해듣고서야 상황을 알게 되었으며, 곧바로 평택-안성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4. 여담

  • 이 당시 미 24사단은 2차 세계대전 후 군축의 영향으로 우리의 향토/동원사단 수준으로 쪼그라든 상태였고, 그 밑에 있던 스미스 대대 역시 완편 상태가 아닌 B, C중대 두 개 중대만 있었다.#
  • 게다가 이들은 개전 초기 국군 내 미 고문단과 마찬가지로 대전차 로켓을 너무 과신했고,[6] 이는 이 전투의 패배에 한 몫을 했다.#
  • 오산 죽미령 전투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기록되어 있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는 역사적으로 미군에게 교훈을 주는 전투들이 기록되어 있다.
  • 유엔군이 최초로 참전한 전투였던 오산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오산 전투 터인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7]에 2013년 4월 유엔군 초전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유엔군 초전기념비, 스미스평화관 등이 함께 있다.
  • 이 전투는 6.25 전쟁에서 미군이 첫번째로 참전한 전투이자 처음으로 패배한 전투로 기록되었는데 패인은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산악이 많은 생소한 지형, 둘째는 7월 남한의 무더운 날씨, 그리고 결정적으로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과거 일본군처럼 생보병으로 반자이 돌격이나 하고 소총탄에도 뚫리는 고물전차나 운용하는 수준으로 봤지만 소련제 T-34를 몰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고 한다.
  • 전투중 스미스 대대가 놓친 전차들은 계속 남진해서 오산 갈곶리에서 국군 17연대와 전투를 벌인다 자세한 내용은 갈곶리 전투를 참고하자


[1] 수원은 전날 함락되었다[2] 북한군 전차들은 4대가 1묶음이 되어 남하했다[3] 이들 전차들은 계속 남진해 오산 시내를 통과한후 갈곶리에서 국군 17연대를 공격해 격퇴한다[4] 하지만 이 희망도 후속 전투에서 북한군들이 미군임을 알고도 쏴제낌으로서 깨어진다.[5] 사실 이는 앞서 지나가던 선두 전차들이 전화선을 뭉개고 가는 바람에 끊어진 것이다.[6] 정확히 말하면 경사장갑 때문에 신관이 작동하지 않고 그대로 미끄러지거나 부족한 관통력 때문에 뚫지 못했다. 참고로 T-34의 전면장갑은 정면에서 봤을 때 LOS 80~90mm 수준이라 바주카로는 간당간당했으며, 측면은 LOS 64mm 수준이었으나 경사각 때문에 마찬가지로 착탄각이 좋지 않으면 신관이 작동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7] 경기도 오산시 경기대로 742 (외삼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