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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반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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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2fa7>
일본국 제42-43대 중의원 의장
오노 반보쿠
大野伴睦 | Ono Banboku
파일:오노 반보쿠.jpg
<colcolor=#c3c965>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1890년 9월 20일
기후현 야마가타군 타니아이촌
(현 기후현 야마가타시)
사망 1964년 5월 29일 (향년 73세)
도쿄도 신주쿠구
학력 메이지대학 법학부 (퇴학)
가족 장남 오노 아키라[1], 며느리 오노 츠야코[2], 손자 오노 야스타다
정당

의원 선수 13 (중)
의원 대수 17, 18, 19, 20, 21, 24, 25, 26, 27, 28, 29, 30[3]
지역구 구 기후 1구
약력 도쿄시 시의원
중의원 의원 (제17-21, 24-30대)
제7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제5차 요시다 시게루 내각)
자유당 총무회장
자유민주당 총재 대행
자유민주당 부총재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초기 정치 경력2.3. 정계의 중진으로2.4. 말년
3. 소속 정당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일본의 대표적인 당인파 정치인으로 유명하며 반짱(伴ちゃん)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널리 사랑받은 정치인이었다. 자민당을 창설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으며, 현재까지도 총리를 배출 하지 못한 기후현에서 총리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로 평가 받는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890년 9월 20일 일본 기후현 야마가타군 타니아이촌에서 상인인 오노 나오타로의 4남으로 태어났다. 오노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인 나오타로가 촌정의 발전을 위하여 힘썼기 때문에 쌓은 재산이 거의 없었고, 친척이나 지인들로부터 돈을 빌려야 겨우 먹고살만 했기 때문에 항상 부채문제로 인해 어렵게 자랐다.

이후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나고야육군학교에 들어가려 시험을 쳤지만 불합격했다. 1908년 도쿄로 상경해 1910년 메이지대학에 입학했지만 1911년 여름 충수염으로 입원해 휴학했다.

이후 호헌운동에 관심을 가져, 1913년 다이쇼 정변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고, 메이지대학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는다. 그 후 입헌정우회 본부에 들어가 정우회 비의원 모임인 원외단 회원이 되었고, 1922년 도쿄시 시바구[4] 구의원으로 당선 되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2.2. 초기 정치 경력

1930년 제1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정우회의 공천을 받고 기후 1구에 출마해 첫 당선되었고,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파에 속했다. 1939년 신체제운동으로 정우회가 분열되자 오노는 익찬의원동맹[5]에 반발해 1941년 하토야마를 따라 동교회의 결성에 참가했고, 1942년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비추천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자유당의 결성에 참가했다. 이듬해인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출마후 당선되어 국정 복귀에 성공하였으나 정작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하토야마 이치로가 공직 추방을 당하면서 외교관 출신인 요시다 시게루를 총재로 추대하였다.

1946년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수립되자 하야시 조지, 마스타니 슈지와 함께 당인파 3인방이라 불리며 총리인 요시다를 보좌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이 붕괴하자 우파사회당의 대표 니시오 스에히로가 연립 내각 참여를 권유하며 내무대신 취임을 요청했으나 오노는 "좌파사회당을 내치지 않는 이상 연립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해 니시오의 부탁을 거절했다.

민주자유당 고문을 지내던 1948년 6월, 정치자금문제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위원회의 증인환문을 받았고, 같은해 쇼와전공 사건에 연관되어 기소되었으나 1951년 무죄판결을 받았다.

1952년 8월 26일 중의원 의장으로 취임했지만, 이틀 뒤에 불시 해산이 이루어져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총선 이후인 10월에 다시 중의원 의장에 선출되었지만 이번엔 5개월 만인 1953년 3월 바카야로 해산이 이루어져 금방 물러나야 했다.

하토야마의 공직 추방 해제로 인한 복귀 이후에는 미키 부키치, 고노 이치로 등과 대립해 요시다파로 들어갔다. 특히 전전 입헌민정당 출신이면서 전시 중 익찬의회에서 하토야마와 접근해 그의 측근이 된 미키에 대해선 격렬한 반발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1954년 1월 14일, 제5차 요시다 내각의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으로 입각했다. 처음이자 유일한 입각이었다. 원래 관료 출신이 아닌 당인파라 입각 이전부터도 영향력이 막강했고,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도 장관 중에서는 비교적 한직이라 정치적 위상을 위한 입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땅한 인물이 없어 자리 채우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역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중에 가장 영향력이 막강했고 덕분에 재직 당시 어렵다던 토마코마이시 항구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자유당 총무회장 임명으로 6개월을 조금 넘긴 7월 27일에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짧은 임기 중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2.3. 정계의 중진으로

1954년 자유당 총무회장에 취임했고 서로 대립하던 일본민주당 총무회장 미키 부키치와 화해했다. 이후 보수합동을 추진했으나 오노를 포함한 정치인들은 어떤 인물을 통합 보수정당의 초대 총재로 추대하느냐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결국 신당 창당 후 선거를 통하여 총재를 선출하기로 결정하고 약속한뒤 자유당과 민주당의 총재, 총무회장인 오노 반보쿠, 오가타 타케토라(자유당), 하토야마 이치로, 미키 부키치(일본민주당) 등 4명이 총재 대행위원이 되기로 하고 1955년 11월 15일, 통합 보수정당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초대 총재에는 1956년 4월 총재선 선거 결과 하토야마 이치로가 초대 총재로 선출되었다.

자민당이 창당된 뒤 오노는 백정회(오노파)를 만들어 자신의 파벌을 꾸렸다. 파벌에는 약 40명 정도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백정회는 오노의 사후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후나다 나카의 일신회와 무라카미 이사무의 일양회로 분열되었다.

1957년에 초대 자유민주당 부총재에 취임했다. 또한 일본유족회 고문을 맡아 1958년 1월에 유족들로 구성된 진정단을 조직해 정부와 자민당에 대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요구했다.

1958년 2월 기시 노부스케가 자민당 총재로 선임되자 기시는 오노파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차기 총재에 오노를 세울것을 다짐하며 각서까지 썼으나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휴지조각이 되고말았다.

와타나베 츠네오[6]에 따르면, 1956년 자민당 총재선 당시 기시는 오노에게 자신을 지원해 달라는 도움을 요청했으나 오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이시바시 단잔이 총재로 추대된것에 대한 복수였다고 한다. 어쨌든 오노는 약속을 어긴 기시를 증오하게 되었고, 1960년 기시가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기 직전 우익 인사로부터 칼에 찔려 부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꼴 좋다, 그 허풍쟁이."라고 조롱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오노는 총리 취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어, 기시 내각이 총사직한 1960년 자민당 총재선에서 같은 당인파인 이시이 미쓰지로와 관료파 이케다 하야토와 맞붙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오노 지지를 표명하고 있던 가와시마 쇼지로가 "당인파가 분열하면 이케다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이시이로 단일화를 하는것이 좋다"라는 조언을 했다. 이 조언을 받아들인 오노는 후보직을 사퇴하며 이시이로 당인파 후보가 단일화 되었다. 그러나 가와시마는 "본래 오노를 지지하려 했지만, 사퇴했기 때문에 이케다를 지지한다." 라는 말을 하며 이케다 지지로 선회했고 결국 이케다가 총재로 선출되게 되었다.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본 오노는 "가와시마에게 속았다!" 라는 말을 하며 호된 눈물을 흘렸다.

2.4. 말년

이후 오노는 이케다의 측근으로 다시 부총재직에 올랐고, 1962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를 만나 회동을 가졌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도 김 부장의 방일때마다 만나며 한일수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처음에는 일본의 패망 직후 재일교포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적도 있어 한일수교에 부정적이었으나, 이후 찬성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물론 김종필등과의 친분도 있었겠지만, 재일 야쿠자등을 거쳐 정치자금등이 건너가면서 입장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는데, 이때 아들의 경사를 보러 오는 것 같다는 망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다만 살아생전 한일간 협상의 완결과 한일수교는 보지 못했다.

역도산과의 친분이 있어 일본에 밀항했다가 수감된 김일을 석방시키는데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김일은 역도산의 제자로 일본에서 활동한다.

부총재 재임 중인 1964년 뇌출혈 증세로 게이오기주쿠대학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 그해 5월 29일 심근경색으로 향년 7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64년 6월 14일 기후시민센터에서 열린 현민장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비롯해 각종 정계인사, 현의원, 현지 기업 경영자, 후원회 등 총 3천여명의 인사들이 모여 장례식을 치뤘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13 - 1940 입당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0 - 1941 정당 해산
동교회 1941 - 1945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정당 해산


1945 - 1948 창당


1948 - 1950 합당


1950 - 1955 합당


1955 - 1964 합당
사망

[1] 1928~1996. 운수대신, 노동대신, 9선 중의원 의원, 재선 참의원 의원 역임.[2] 1934~2021. 3선 참의원 의원 역임.[3] 재직 중 사망.[4] 현재의 미나토구 지역.[5] 이 파벌은 익찬정치회를 거쳐 대정익찬회로 발전한다.[6] 요미우리 신문 대표이사, 주필 출신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대표 이사 재직 시절 2004년 일본 프로야구 재편 시기 보였던 언행과 지나친 친교진 편향 행보로 인해 야구계의 독재자라는 별칭을 얻었고, 지금도 요미우리를 제외한 NPB 전 구단 팬들의 증오대상이 되고있다. 특히 이팀하고 이팀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