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7 14:39:40

에른스트 기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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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바이에른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2.5.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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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육군 원수. 일명 '라우돈 남작'으로 불리며, 7년 전쟁레오폴트 요제프와 함께 황제군의 대들보로서 활약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라우돈 남작은 스웨덴군에서 중령으로 복무하다가 은퇴한 오토 게른하르트 폰 라우돈과 소피 엘레노어 폰 보네만 아우프 트레펜호프의 아들이었다. 그의 가족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374년 마테우스 폰 라우돈이 리보니아로 이주한 이래 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곳에서 기반을 다졌다. 라우돈 남작은 어릴 때부터 군대에 관심을 보였고 수학, 과학, 미술, 지리학에도 식견을 갖췄다. 1732년, 라우돈 남작은 프스코프스키 보병 사관생도로서 러시아 제국군[2]에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1733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프스코프스키 보병대가 폴란드로 파견되었다. 이후 1734년 러시아의 폴란드 정복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라우돈 남작은 러시아-작센 부대의 수장으로서 단치히 포위전에 참가했다. 그는 이 포위전 과정에서 벌어진 스톨젠베르크 습격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1735년, 라우돈은 프랑스에 맞서는 신성 로마 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라인강으로 진군한 러시아 군단과 동행했다. 그러다가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그의 연대는 크림 반도크림 타타르족과 싸우기 위해 베사라비아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1736년부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가했고 그해 5월 20일 부르크하르트 크리스토프 폰 뮌니히의 지휘 아래 페레코프의 오스만 제국군 요새를 기습 공략하는 데 한 몫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6월부터 전염병이 창궐한 데다 보급품이 부족해 많은 병사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자 러시아 제국군은 우크라이나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737년 7월, 라우돈은 뮌니히 장군의 군단과 동행하여 외쥐[3]의 오스만군 요새 포위전에 참가했다. 1738년 토트젠에 잠시 머물던 라우돈은 몰다비아 전역에 참가하기 위해 그의 연대와 합류했고 1739년 8월 호틴 요새 공략전 중에 중위로 진급했다.

1740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종결된 후, 라우돈 남작은 러시아 군 내에서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당하는 현실에 낙담해 러시아군에서는 더이상 출세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러시아군을 떠나 다른 국가에서 군직을 구하려 했다. 그는 먼저 스웨덴 국왕의 근위대장인 삼촌을 찾아갔다. 그러나 라우돈 남작은 러시아군에 복무한 경력을 불신한 스웨덴 국왕 프레드리크 1세가 거부하는 바람에[4] 스웨덴군에 들어가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삼촌의 집을 떠나 스톡홀름에 있는 커피 하우스에서 얹혀 살아야 했다. 1741년 봄, 라우돈은 리가로 가서 토트젠에서 며칠을 보낸 후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자신을 고용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인상이 보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라우돈 남작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프리드리히 대왕을 여러 번 만나 자신을 어필하려 애썼으나 끝내 프로이센군 장교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4년 빚에 쩌든 신세가 되어버린 라우돈 남작은 필리프 폰 우르시니 백작과 로젠베르크의 지원 덕분에 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4월에 오스트리아의 수도에 도착해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나기를 고대했다. 그때 한 무명 귀족과 홀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경력과 좌절의 나날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런데 그 무명의 귀족은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였다. 프란츠는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아내에게 라우돈 남작을 고용할 것을 권유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의 권유를 받아들여 라우돈 남작에게 대위 직책을 하사했다. 그 후 라우돈 남작은 프란츠 폰 데어 트렌크 장군의 자유 군단 장교로 배속되었고 1744년 6월 30일 트렌크 장군의 자유 군단이 쉬렉에서 라인강을 건널 때 함께 했으며, 알자스에서 자유 군단의 약탈과 살육 행위에 가담했다가 오른쪽 가슴 윗부분에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프랑스군에게 생포되었다. 프랑스 외관의에게 치료를 받은 라우돈 남작은 얼마 후 프랑스군을 몰아낸 자유 군단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서 그 해의 다른 군사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1745년 초, 라우돈은 니콜라우스 요제프 에스테르하지 장군의 군단에 배속된 트렌크 연대에 합류했다. 그해 5월 말, 에스테르하지 장군은 슐레지엔의 코젤 요새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라우돈 남작은 요새를 정찰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아돌프 니콜라스 폰 부크코프 대령에게 코젤 요새를 먼저 공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해 허락을 얻어낸 뒤 그날 밤 요새를 습격하여 가장 먼저 해자를 지나 성벽을 올라갔다. 라우돈 남작이 이끄는 트렌크 연대는 보루를 장악하고 여섯 개의 대포를 코젤 마을로 돌렸고, 결국 코젤 요새 수비대는 항복했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여러 소규모 전투에 참가해 경보병대 지휘관으로서 맹활약했다. 그러던 1745년 9월 30일 조르 전투에 참가한 라우돈 남작은 트렌크 연대와 함께 프로이센 진영을 급습했다. 그런데 트렌크 연대는 약탈에 눈이 먼 나머지 적을 공격해야 할 임무를 망각해 버렸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 틈을 타 병사들을 수습한 뒤 자신들을 습격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프란츠 폰 데어 트렌크 장군은 병사들의 비행을 저지하지 못해 조르 전투의 패전을 초래한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라우돈 남작은 이 재판에서 증언대에 서야 했다. 그도 처음에는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기에 겨우 혐의를 풀 수 있었다. 하지만 트렌크 장군은 라우돈 남작이 자신에게 고소인들과 원만한 합의를 이루라고 충고하자 격분해 라우돈 남작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아예 결투까지 벌이려 했다. 이 결투는 트렌크가 재판 직후에 체포되어 투옥되면서 이뤄지지 않았지만 라우돈 남작의 명예가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라우돈 남작은 트렌크 연대가 해산된 뒤 다른 부대에 배속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또다시 빚에 쩌들게 된 그는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걸 고려했지만 그의 친구들이 그를 열심히 설득했고 빈의 유명 음악가 살비아티가 그를 후원해준 덕분에 오스트리아를 떠나지 않았다.

1746년, 라우돈 남작은 마침내 변경 수비대인 칼슈테드터-리카너 그렌저 연대 대위로 배속되었다. 또한 그는 자신을 후원해준 살비아티의 친척인 클라라 폰 하겐과 결혼했고, 부부는 이후 10년 동안 칼슈타트 지구의 부닉에서 지냈다. 라우돈 남작은 이 기간 동안 군사학, 지리, 기하학을 공부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는 지도와 군사 계획을 대량으로 입수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며 교회를 세웠다. 일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때 라우돈 남작은 시간이 날때마다 떡갈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들이 몇십년 후 230헥타르에 달하는 떡갈나무 숲을 이뤘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 이 숲은 그의 이름을 딴 '라우돈 숲'으로 명명되었다.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 그렌저 연대가 재편성되어 정규 연대가 되었다. 이때 라우돈 남작은 자신이 속한 연대에서 비리를 저지른 이들을 고발해 7명을 처형시키게 했다. 그의 상관 페타치 장군은 그의 정직함을 칭찬했지만 동료 장교들은 그를 "동료를 배신한 놈"이라며 미워했다. 라우돈 남작은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빈으로 가서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빈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개신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페슈트 근처 훈련소에 주둔한 그의 연대와 합류한 뒤 소령으로 승진했다. 그 후 1753년 그는 중령으로 승진했으나 맏아들 안톤 페트루스와 둘째 아들 레오폴트 프란츠를 질병으로 잃어버리는 비극에 직면해야 했다.

2.3. 7년 전쟁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라우돈 남작은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동원된 장교들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에 라우돈 남작은 야전군에 들어가기 위해 빈으로 가서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 국무장관에게 자신을 성공적으로 어필하는데 성공했고, 카우니츠 장관은 그를 칼슈테드터-리카너 그렌저 연대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연대가 갖춘 무기가 매우 불량했기에 라우돈 남작은 빌헬름 라인하르트 폰 나이페르크 전쟁 평의회 부의장에게 새 무기를 지급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카우니츠 국무장관이 다시 나섰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나이페르크 부의장에게 라우돈 남작의 요구를 받아들여 줄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새 무기를 지급받은 라우돈 남작은 휘하 연대를 이끌고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 장군의 군단에 합류했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로보지츠 전투에 참가해 상당한 활약을 했지만 아군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브라운 장군은 전투 후 라우돈 남작의 자질을 높이 평가했고 그에게 몇 가지 독립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라우돈 남작은 브라운 장군의 신임에 힘입어 그해 겨울에 수차례의 게릴라 작전을 수행했는데, 특히 12월 말에 200명의 후사르 분대를 이끌고 나이세 강을 건너 오스트리츠에서 프로이센군을 습격해 적을 성공적으로 몰아냈다. 1757년 2월 지타우 근방의 히르슈펠트에 대한 습격전에서 또다시 공적을 세운 라우돈 남작은 3월 17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다가 라이헨베르크 전투에서 패한 쾨니히세크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이 보헤미아 왕국에서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라우돈 남작은 프라하를 향해 후퇴하는 쾨니히세크 군단과 합세한 뒤 5월 3일 프라하에 도착했다. 이후 5월 6일 프라하 전투에 참가해 3시간 동안 자신의 위치를 성공적으로 지켜냈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고 프라하 요새로 틀어박혀 요새 수비의 한 몫을 담당했다.

얼마 후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콜린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격파한 후 프로이센군이 철수하면서 프라하의 포위가 풀렸다. 라우돈 남작은 오스트리아군 원수 카를 알렉산더로부터 척탄병 4개 부대, 후사르 기병 600명, 그리고 그렌저 기병 2천 명을 부여받은 뒤 이들을 이끌고 프로이센군을 추격해 벨바른까지 이르렀다. 이윽고 오스트리아 주력군이 진격을 시작하자, 라우돈 남작의 분견대는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장군의 선봉대를 맡았다. 7월 24일, 라우돈 남작이 이끄는 칼슈테드터-리카너 그렌저 연대는 벨미나 근처에서 200명의 프로이센 신병들이 호위하는 보급마차들을 공격했다. 이 중 한 마차는 콜린 전투 때 부상당한 만슈타인 장군을 수송하던 중이었다. 만슈타인 장군은 항복하기를 거부하며 용감하게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고 나머지 병사들은 항복했다. 카를 알렉산더는 라우돈 남작의 공적을 기려 그에게 1,500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했으며 하디크 후사르 200명을 추가로 보내줬다.

1757년 8월, 라우돈 남작은 고틀루벤 근방에서 이젠플리츠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을 공격하여 많은 병사들과 4개의 대포들을 포획했다. 그러다가 적의 증원군이 도착하자 철수한 라우돈 남작은 소규모 프로이센군 부대를 몇차례 급습했다가 8월 20일 안개 속을 헤매던 중 프로이센 순찰대와 마주쳐 거의 잡힐 뻔했다가 후사르 병사들이 제때에 그를 탈출시켜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8월 25일, 라우돈 남작은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뒤 휘하 군단을 이끌고 에어푸르트로 진군해 란슬로 콤테 터핀 드 크뤼세 휘하의 프랑스군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라우돈은 에르푸르테에서 터핀 장군의 프랑스군과 만나지 못했고 대신 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자가 지휘하는 제국군에 배속되었다. 11월 5일, 라우돈 남작과 그의 부대는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좌익에 포진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너무 쉽게 와해되는 바람에 라우돈의 군단은 전투를 벌이지도 못한 채 퇴각했다. 그 과정에서 병사들의 숫자가 1,100명으로 줄어들자, 라우돈 남작은 척탄병 부대를 증원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의 요청은 거절당했고 코모타우로 보내진 뒤 한동안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참담한 대패를 당하자 라우돈의 군단은 적을 피해 본국으로 퇴각해야 했다.

1758년 3월 8일, 라우돈은 새로 재정된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이 모라비아를 침공해 올로모우츠 요새를 포위하자, 로이텐 전투에서 패한 뒤 물러난 카를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이 된 다운 백작은 적과의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소규모 기동대를 꾸준히 파견해 적의 보급로를 유린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4천대에 달하는 보급마차로 구성된 대규모 보급부대를 편성한 뒤 한스 요아힘 폰 치텐 휘하 3만 병사들에게 이들을 호위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다운 백작은 라우돈 남작에게 이 보급부대를 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라우돈 남작은 요제프 폰 지스코비츠 장군과 함께 12,0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출격해 돔슈테트 전투에서 적 보급부대를 격멸했다. 그 결과 4,000대에 달하는 보급마차 중 불과 250대 만이 올로모우츠에 도착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더이상 올로모우츠 포위전을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작센으로 철수했다. 라우돈 남작은 철수하는 적을 추격해 상당수의 포로를 획득하였고 7월 27일 중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하는 러시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작센 선제후국으로 진군하여 스프레임베르크에서 피즈 요새까지 행군해 소규모 요새 수비대를 항복시키고 대량의 탄약과 대포 40문을 포획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8월 25일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과 맞붙어 가공할 피해를 입은 뒤 본국으로 철수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가 접근해오자, 라우돈 남작은 렝겐브뤼크로 후퇴했다가 자신을 포위섬멸하려는 프로이센군의 추격을 가까스로 회피해 10월 초 호크키르히에 주둔한 다운 백작의 오스트리아 본대와 합류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진지를 치는 건 상책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적이 먼저 공격해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다운 백작은 이를 응하지 않았고 프로이센군의 거듭된 도발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에 10월 10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장군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운 백작의 진영과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위치, 즉 호크키르히 서쪽에 진을 쳤다. 이에 많은 휘하 장교들이 오스트리아군이 기습해올 것을 우려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이 소심한 사람이니 그럴 리 없다며 비웃었다.

사실 다운 백작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상대로 프로이센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경계해 함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우돈 남작 등이 적이 아군을 무시하며 완전히 방심하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기습을 감행할 호기라고 설득했고, 다운 백작은 고민 끝에 10월 13일 저녁 전쟁 협의회에서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3일 밤에서 10월 14일 새벽에 걸친 기습 작전을 수립, 집행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라우돈 남작은 탁월한 지휘를 선보여 프로이센군에게 큰 피해를 안겼고, 프로이센군은 더 이상의 공세 작전을 포기하고 수비에 전념해야 했다. 그 후 라우돈 남작은 병에 걸려서 한동안 요양 생활을 하다가 10월 말에 후퇴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선두에 다시 섰다. 그는 오베르-쇤브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남동생 프리드리히 하인리히가 이끄는 후위대와 맞붙어 300명의 병사를 잃고 적병 500명을 사살시켰다.

그 후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는 뢰벤베르크 근방에 진을 쳤고 라우돈 남작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11월 2일 프리드리히 대왕이 철수하자, 라우돈 남작은 뢰벤베르크로 진격해 100명의 프로이센 병사들을 포로로 잡은 뒤 적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필그렘도르프 근방에서 400대의 보급마차와 15개의 부교들을 포획했고 자스트로 중위와 120명의 포로를 생포했다. 이후 그는 적을 더 쫓아봐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보헤미아 국경지대로 물러나 군대를 겨울 숙영지에 투숙시킨 뒤 12월 4일 프라하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중 하나인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1759년 3월 5일, 라우돈 남작은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오스트리아 귀족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보헤미아의 쿠텐베르크 근처에 있는 클라인베츠와르의 유산을 하사받았다.

4월 초, 라우돈 남작은 동프로이센으로 진군하는 러시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18,500명(10개의 보병 대대, 8개의 척탄병 부대, 2개의 자유 보병대, 그렌저 5,700명, 기병 20개 대대)를 이끌고 트라우텐라우로 진군했다. 그 후 그는 6월 말에 작센을 향해 출격해 7월 27일까지 괴를리츠로 진군했다. 8월 초 표트르 살티코프의 러시아군과 합세한 라우돈 남작은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함께 프리드리히 대왕과 맞붙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전투에서 최악의 패배를 당한 뒤 자살이나 퇴위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보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이유로 철수해버렸고, 라우돈 남작은 살티코프 장군과 오랜 논쟁을 벌인 끝에 단독으로 보헤미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의 승리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11월 20일 라우돈 남작을 육군 대장으로 승진시키고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검을 그에게 하사했다. 그리고 12월 25일, 라우돈 남작은 보헤미아, 모라비아, 슐레지엔의 모든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전쟁평의회로부터 독립 지휘권을 보장받았다.

1760년 초, 라우돈 남작은 북부 보헤미아에서 그의 군단과 함께 대기하면서 러시아군과 합세할 기회를 모색했지만 러시아군이 좀처럼 호응해주지 않자 보헤미아에 주둔하고 있는 자신의 부대의 지휘권을 캄피텔리 장군에게 맡긴 뒤 모라비아와 슐레지엔에 주둔하고 있는 자신의 부대에 합류했다. 이후 3월 15일, 라우돈 남작의 군단은 4개 대열로 편성되어 슐레지엔을 향해 진격했다. 라우돈 남작은 슐레지엔 국경 지대에 군대를 숙영시킨 뒤 드레스덴에서 열린 전쟁 평의회에 참가해 다운 백작과 향후 작전을 논의했다. 6월 초, 라우돈 남작은 본격적으로 슐레지엔을 침공하였고 6월 23일 란데스후트 전투에서 슐레지엔에 주둔한 프로이센군을 괴멸시켰다. 라우돈 남작은 뒤이어 다운 백작의 군대와 합세하려 했지만 때마침 프리드리히 대왕이 드레스덴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한 다운 백작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작센으로 진군하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라우돈 남작은 그 대신 글래츠 요새를 공격하여 7월 26일 함락시킨 후 7월 30일부터 8월 3일까지 브레슬라우 요새를 포위 공격하다가 프리드리히 대왕이 근처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무찌르기 위해 포위를 풀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적군을 추적했다.

그러나 8월 15일 리그니츠 전투에서 라우돈 남작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에게 갑작스런 기습을 받았다. 라우돈 남작은 이에 맞서 분전했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고 퇴각했다. 이 전투 말미에 다운 백작이 이끄는 8만 대군이 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다운 백작은 이미 늦었다고 판단하고 철수했다. 이에 대해 라우돈 남작은 자신이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켜가며 맞서 싸웠거늘 근처까지 와놓고 철수해버린 것에 격노해 다운 백작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후 그는 군대를 글래츠와 쾨니헤그레츠에서 겨울 숙영지를 건설하게 한뒤 다음 전역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빈으로 향했다.

1761년, 라우돈 남작은 약 6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슐레지엔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려 했지만 빈의 전쟁 평의회로부터 러시아군의 도착을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좀처럼 오지 않는 바람에 합동 공격이 이뤄지지 않자,라우돈 남작은 단독 작전을 구상해 전쟁 평의회에 제출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던 중 프리드리히 대왕이 라우돈 남작을 견제하기 위해 시비드니차 요새에 주둔했다가 오스트리아 주력군이 베를린을 향해 진군해오자 이를 막기 위해 떠나자, 라우돈 남작은 이 틈을 타 9월 30일에 시비드니차 요새를 습격해 10월 1일에 함락시켰다. 그는 콜로넬 중위를 빈으로 보내 승전보를 전하게 했다. 그러나 전쟁 평의회는 라우돈 남작이 자신들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행동했다며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카우니츠 수상과 프란츠 1세가 중재에 나섰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두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쟁 평의회의 처벌 요구를 묵살하고 10월 10일 라우돈 남작에게 요새 공략에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라우돈 남작의 군대는 겨울이 일찍 찾아오자 슐레지엔의 겨울 숙영지로 돌아갔고 라우돈 남작은 다르겐타우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겨준 뒤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1762년 2월, 라우돈 남작은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슐레지엔의 모든 오스트리아군 지휘권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3월에 계획이 변경되어 다운 백작이 이끄는 주력군이 슐레지엔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라우돈 남작은 다운 백작의 지휘하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라우돈 남작은 리그니츠 전투의 앙금을 해소하지 못해 다운 백작과 번번이 갈등을 빚었고, 다운 백작은 그런 그를 껄끄럽게 여겨 작전 회의에서 배제시켰다. 7월 21일, 라우돈 남작은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아군 중앙의 일부 부대를 지휘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고, 프로이센군은 여세를 몰아 시비드니차 요새를 포위한 뒤 요새를 구원하려는 오스트리아군을 라이헨바흐 전투에서 격파하고 10월 11일 요새를 함락시켰다. 다운 백작이 작센으로 돌아가자 라우돈 남작은 본군과 동행하는 걸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허락받지 않았고 슐레지엔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 후 그는 병이 들어서 7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더이상 군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2.4. 바이에른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

1763년 7년 전쟁이 끝난 뒤 다운 백작이 군 통수권자가 되었다. 이때 다운 백작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라우돈 남작은 소외되었다. 그러다가 1766년 다운 백작이 사망한 후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가 전쟁 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하자, 라우돈 남작은 그해 3월 24일에 보병 감찰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라우돈 남작은 라시 장군 사이에서도 갈등을 빛었고, 라시 장군과 친밀한 사이였던 요제프 2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자 쿠텐베르크 근처의 자신의 소유지에 은거했다. 1769년 8월 라우돈 남작은 요제프 2세와 라시, 그리고 몇몇 장군들과 함께 나이세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회담에 참석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 전쟁 때 라우돈의 활약상에 대해 찬사를 표했다. 일설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라우돈 남작에게 "Herr Feldmarschall(원수님 만세)"라는 인사말을 건넸다고 한다.

1769년 11월 13일, 라우돈 남작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중재에 힘입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3년 동안 맡았다. 그러다가 1775년 쿠텐베르크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라우돈 남작은 쿠텐베르크 근처에 있는 자신의 소유지를 모조리 청산하고 빈으로 이주하기를 원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직접 그의 재산을 넉넉한 조건으로 구입해줬고, 라우돈 남작은 그 덕분에 빈의 저택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으며 1776년에 빈 근처에 있는 헤더스도르프 영지를 사들이고 그곳에 성을 쌓았다.

1778년 2월 27일, 라우돈 남작은 마침내 제국군 원수에 임명되었다. 그 후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라우돈은 라시 장군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라이헨바르크와 엘베 강 사이의 보헤미안 국경 지대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군대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집중되는 동안 빈에 남아 있다가 4월 4일에 프라하에 도착했다. 그후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과 대치했으나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 사이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제프 2세에게 전쟁을 끝낼 것을 촉구했고, 결국 1779년 5월 13일 테센에서 양측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778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였다. 이때 라우돈 남작은 자신이 야전 지휘를 맡을 수 있게 해주기를 희망했다. 요제프 2세는 그가 고령이라는 이유로 거부했으나 군대 지휘관 리히텐슈타인 공이 병에 걸리고 아군이 오스만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할 수 없이 라우돈 남작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라우돈 남작은 8월 18일 두비카 요새를 포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한 뒤 공세를 개시해 8월 26일 두비카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후 그는 9월 7일 노비 요새를 포위 공격해 한달 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10월 3일에 함락시켰다. 뒤이어 베르비르 마을로 진군하려던 라우돈 남작은 때이른 눈이 내리자 계획을 중단하고 군대를 겨울 숙영지로 돌려보냈다. 이후 그는 지휘권을 이양한 뒤 12월 9일 빈으로 돌아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1779년 초, 요제프 2세는 심각한 병에 걸려 다가오는 전역의 전반적인 지휘권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라우돈 남작이 총사령관이 되리라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안드레아스 그라프 하디크 폰 푸타크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라우돈 남작은 하디크와 친한 사이였기에 이에 대해 반발하지 않았고 크로아티아에 주둔한 군단의 지휘권을 맡았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지난 해에 날씨 때문에 점령하지 못했던 베르비르 마을로 진격했다. 6월 24일 베르비르 마을을 포위한 그는 포격을 개시했지만 병력이 부족해서 완전히 포위하지 못했다. 요새 수비대는 최선을 다해 맞섰으나 요새가 대부분 폐허로 변하자 7월 8일 오전 5시에 요새를 탈출했고 라우돈 남작은 베르비르 마을을 점거했다.

이후 요제프 2세는 하디크를 경질하고 라우돈 남작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벨그라드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라우돈 남작은 8월 30일 12만 대군을 이끌고 벨그라드를 향해 출격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3만 2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는 악재가 발생했고 벨그라드 수비대 역시 온 힘을 다해 그에게 저항했다. 전투 도중 막 점령한 벨그라드 교외를 순찰하던 라우돈 남작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게 발길질을 당해 들것에 실려나갔다. 병사들은 이에 동요했지만 그의 부상이 심각하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후방에서 쉬면서 부관들에게 자신 대신 지휘를 맡게 했고, 10월 8일 벨그라드는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연말에 오르소바 요새를 포위했지만 악천후로 인해 철수했다. 라우돈 남작은 1779년 12월 빈에 귀환해 요제프 2세의 환대를 받았고, 요제프 2세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훈장을 그의 가슴에 친히 달아줬다.

2.5. 최후

이후 말년을 편안하게 보내던 라우돈 남작은 1790년 프로이센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서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예상되자 오스트리아군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빈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후, 라우돈 남작은 1월 18일 침상에 누워있는 요제프 2세와 면대했다. 그 뒤 요제프 2세는 2월 13일에 붕어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레오폴트 2세는 라우돈 남작이 계속 총사령관을 맡는 걸 용인했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모라비아에 주둔한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5월 28일 출발했고 6월 21일 모라비아의 네우스타트에 마련된 군대 본부에 도착했다. 라우돈 남작은 6월 24일에서 26일 사이에 장군들과 동행한 채 슐레지엔과의 국경지대에 배치된 군대를 시찰했다.

시찰을 완료한 뒤, 라우돈 남작은 리흐노프스키 공자의 집에서 휴식을 취했으나 그곳에서 병마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돈 남작은 다음 날 말에 올라타 본부로 복귀하려 했으나 부관들의 만류로 도중에 중단하고 6월 29일 노비이친에서 자신의 개인 주치의인 쾨흐퍼트 박사에게 진찰받았다. 며칠 후 병세가 다소 회복된 라우돈 남작은 7월 5일 마차를 타고 군대 본부로 향했다. 그러나 7월 8일 그의 병세가 심각해지자 도로 침대에 누워야 했다. 곧 그의 사타구니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급속히 팽창해서 라우돈 남작은 소변을 볼 수 없었고 배변도 할 수 없었다. 몇몇 유명한 의사들이 그의 캠프에 소환되었으나, 그들은 단지 그의 고통을 완화시킬 뿐 종양을 제거하지 못했다. 라우돈 남작은 며칠 동안 고통으로 몸부림쳤고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다가 되찾기를 반복하다가 7월 14일 오후 7시경 노비이친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경애하는 원수를 상실한 것에 크게 슬퍼했다. 그의 시신은 제복을 입은 채 모든 훈장과 함께 네우티친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헤더스도르프로 옮겨져 그곳에 매장되었다.
[1] 왼쪽 가슴에 있는 십자가 모양의 훈장은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이다.[2] 리보니아는 스웨덴 영토였다가 대북방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3] 현재 우크라이나 오차키우.[4] 스웨덴은 대북방전쟁의 패전으로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 카리알라발트해 연안 영토를 러시아에게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