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로 스키아비오의 수상 이력 | |
{{{#!folding ▼ | 1934 FIFA 월드컵 실버슈 [1]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이름 | 안젤로 스키아비오 Angelo Schiavio | |
출생 | 1905년 10월 15일 이탈리아 왕국 볼로냐 | |
사망 | 1990년 4월 17일(향년 84세) 이탈리아 볼로냐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포지션 | 센터포워드 | |
신체 | 178㎝ | 69㎏ | |
소속 | <colcolor=#fff> 선수 | 볼로냐 FC 1909(1922~1938) |
감독 | 볼로냐 FC 1909(1933~1934) 볼로냐 FC 1909(1946)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위원회(1953~1958) | |
국가대표 | 21경기 15골(이탈리아 / 1925~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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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및 감독.2. 선수 경력
2.1. 클럽
21-22 시즌까지 볼로냐 유스에서 활약, 프로 데뷔는 1923년 1월 18일 유벤투스 FC를 상대로 했다. 데뷔 초 11게임 6골 활약으로 알베르티의 빈자리를 꿰찼고, 볼로냐 FC 1909를 북부 리그 결승전에 진출시켰다.이후 볼로냐 FC에서 계속 활약해 24-25 시즌 첫 스쿠데토를 차지, 해당 활약으로 이탈리아 유니폼도 입게 됐다. 25-26 시즌엔 23게임 26골, 28-29 시즌엔 29게임 29골을 기록했고 31-32 시즌엔 25골로 카포칸노니에레, 32-33 시즌엔 28골로 보렐에 이어 골 수 2위를 차지했다. 1932, 1934년엔 미트로파컵 우승도 차지했다.
36-37 시즌엔 2게임 출전에 그쳤고, 37-38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
2.2. 대표팀
1925년 11월 4일,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을 상대로 알레만디와 데뷔해 더블로 2:1 승리를 주도, 이후 리보나티과 대회를 분담 출전했다[2].2.2.1. 1934 월드컵
1934 월드컵에서 포초 감독에 의해 센터 포워드로 낙점, 미국전 해트트릭[3] 포함 4골로 골 수 2위를 기록했고, 대표팀 은퇴 경기였던 결승전에선 결승골을 기록해 우승했다.3. 감독 경력
33-34 시즌 볼로냐 FC 1909의 선수 겸 감독이었고, 45-46 시즌에 감독이 되기도 했지만 시즌 종료 전에 해고됐다. 이후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 위원회 소속으로 대표팀을 이끌었다.4. 플레이 스타일
볼로냐 전체 우승의 반[4]을 이룬 선수이자 볼로냐 FC 득점 1위[5], 출장 9위[6]. 기량이 웬만한 선수보다 한 수 위였고 특히 드리블과 힘이 좋았다. 커리어 절반에 가까운 7시즌이 세리에 이전이라 세리에 A 기록은 많이 손해를 봤지만 세리에 이전 기록까지 합치면 그의 위엔 3명[7]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기당 골도 0.69골로 노르달[8]에 이어 세리에 100골 이상 득점자 중 2위다.5. 기록
5.1. 대회
5.1.1. 클럽
5.1.2. 대표팀
- 중유럽 인터네셔널컵: 27-30, 33-35
- 월드컵: 1934
5.2. 개인
- 카포칸노니에레: 31-32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2
6. 기타
- 몬티와의 악연이 유명하다. 몬티의 세리에 이적 이전인 1929년 8월 15일, 아르헨티나로 투어를 간 볼로냐 FC 1909는 산 로렌소와 경기를 했고 해당 경기에서 스키아비오와 몬티는 몇 번 말싸움을 벌였다. 이후 몬티의 세리에 A 이적으로 이들은 1932년 5월 1일 다시 맞붙었고, 전반 44분 몬티가 스키아비오를 때려 스키아비오는 기절했다 30분 후 깨어났다. 이후 이들은 대표팀 감독 포초의 노력으로 화해한다.
- 카스트로, 메시와 함께 월드컵 우승팀의 첫 골과 마지막 골을 기록한 선수다.
- 1983년 루이스 몬티 사망 후 1934 월드컵 우승 멤버 중 최고령 생존자가 됐고 스키아비오 사망 후 귀도 마제티가 최고령 생존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