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30 19:20:29

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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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려의 왕실 용어

1. 개요

소군(小君)은 역사적 용어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제후아내', 다른 하나는 '고려시대에 왕후 이외의 몸에서 태어나 승려가 된 왕자를 이르던 말'이다. 전자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후자는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니 지칭하는 대상이 완전히 다르다.

2. 고려의 왕실 용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소군' 항목

고려왕조에서는 왕 또는 왕족과 정식으로 혼인관계에 있는 후궁·첩(妾)이 아닌, 궁녀천민 출신인 폐첩(嬖妾)[1]의 자녀라면 모두 사생아로 취급하여 왕족 신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2] 남성 사생아는 승려로 출가(出家)시키고 머무는 사찰의 이름을 따와 '○○소군(小君)'으로 호칭했고, 여성 사생아는 장애가 있어 공주로 책봉되지 못하는 왕녀의 예에 따라 궁궐 밖의 집을 주어 그 집의 이름을 따온 '○○택주(宅主)'로 불렀다. 이때 쓰이는 소군과 택주는 봉작이 아닌 칭호다.

고려 전기에는 적실왕자(嫡室王子)를 칭할 때 종종 대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모든 적실왕자를 대군이라고 부른 것은 아니었으나, 적실왕자를 대군이라고 칭한 것에 대조하여 사생아는 소군이라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에서는 궁녀천민 출신 시녀가 왕의 자녀를 낳으면 후궁으로 승격되어 신분을 보장받게 되었고, 그 소생 또한 사생아로 취급되지 않고 서자녀로 대우받았고 종친의 서얼도 일단은 왕족으로 대우했던 것과 대비되는데, 이는 고려와 조선의 상속 제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성리학적 종법 질서가 확립된 조선에서는 정실장자 상속이 확고한 원칙이므로, 서얼을 차별하더라도 승계 구도에서 굳이 배척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딸의 상속도 인정되어 형제자매의 균등 상속이 일반적이었고, 왕위 또한 형제 승계가 가능했기에, 정식 혼인관계 외의 자녀는 철저히 배제하기 위해 사생아로 취급한 것이다.[3]

사생아를 출가시켜 후계 구도에서 배제하는 것은 당시 고려 지배층의 보편적인 관행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최우와 창기 출신 천민 소생인 최항은 최우의 후계구도에서 배제되는 것을 목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송광사로 출가당해 강제로 승려 생활을 했다. 물론 이렇게 사생아로 취급되어 출가당한 이들은 비록 승려가 되었어도 그들의 출생과정 자체가 세속성을 내포한 것이라, 정상적인 수행 생활을 하지 않고 생부의 배경을 믿고 온갖 행패를 부려 악명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무신정권기에는 신분제의 동요가 사생아 출신 승려들이 직·간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도 하여 많은 폐단을 남겼다.

왕의 사생아만 소군으로 불렸던 것은 아니고, 다른 왕족의 사생아 또한 출가하여 소군으로 불렸다. 이들은 왕의 친아들이라도 왕족 신분이 아니었으며, 이에 따라 작위를 받을 수도 없었다. 또한 정식 왕족이 출가하면 받는 '국사(國師)' 또는 '왕사(王師)' 칭호도 주어지지 않아서, 소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호는 삼중대사(三重大師)였다.

소군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 훗날 현종이 된 신혈소군[4]이 있다. 현종은 안종헌정왕후 사이의 간통으로 인해 태어난 사생아였다는 점이나, 승려로 출가해 소군이라고 불렸던 점에서 《고려사》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소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종은 어머니가 궁인이나 폐첩이 아니라 태조의 손녀이며, 경종의 계후였던 헌정왕후였다는 점에서 신분의 기반은 사실 매우 탄탄하여 다른 소군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때문에 예외적으로 왕족 신분이 유지되었고, 혈통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광종의 직계 후손이 단절되는 상황까지 겹쳐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1] 혼인관계에 있는 첩이 아니라 오늘날 정부(情婦)라는 의미에 가깝다.[2] 특히 천민 출신 폐첩 소생이면, 당시의 신분 제도인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태생적으론 아예 천민 신분이다.[3] 고려와 조선 왕실제도의 이러한 차이점을 잘 이해하면, 공민왕이 죽은 뒤에 명덕태후가 왜 친손자인 모니노의 즉위를 반대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왕실 예법상 모니노는 사생아로 취급되어야 했으나, 공민왕은 모니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왕실 예법을 무너뜨려 모니노의 어머니인 궁인 한씨를 후궁으로 들였고, 한씨의 3대조를 부원군으로 봉작해 신분을 사대부로 세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왕실의 여론은 모니노의 신분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왕실의 이런 반응 덕택에 후일 신진사대부들은 모니노가 신돈반야의 자식이라는 이른바 '폐가입진' 여론 공작을 수월하게 펼칠 수 있었다.[4] 신혈사에 있는 소군이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