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6 08:30:25

사모(슬라브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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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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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모(슬라브 왕).jpg[1]
이름 사모
(Samo)
출생 미상
사망 658년 또는 659년
재위 623년/624년 ~ 658년/659년

1. 개요2. 행적3. 사모 제국의 위치와 영역

[clearfix]

1. 개요

슬라브 부족들을 처음으로 통합해 실레시아에서 슬로바키아까지 이르는 제국을 구축했다고 전해지는 군주.

2. 행적

서기 9세기까지 슬라브 부족에 문자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시대 슬라브인이 쓴 사모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주요 출처는 7세기에 신원 미상의 작가가 프랑크 왕국의 역사를 다룬 <프레데가르 연대기>이다. 이에 따르면, 사모는 본래 “세노나고(Senonago)” 지역 출신의 프랑크인이라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세노나고가 파리 남동쪽에 있는 상스(Sens)라고 추정하며, 다른 학자들은 벨기에 에노주의 수니에(Soignies)일 거라고 추정한다.

현대 학계에서는 사모가 프랑크인이었다는 프레데가르 연대기의 서술은 신뢰성이 떨어지며, 슬라브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사모(Samo)라는 명칭은 "주인" 또는 "나의 통치자"를 의미하는 고대 슬라브어 호칭이라고 주장하며, 슬라브식 이름 사모슬라프(Samoslav)의 약어일 거라는 견해도 제기되었고, 히브리어 이름 사무엘(Samuel)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슬라브인들은 6세기경에 모라비아, 북부 로어외스터라이히, 북서부 보헤미아, 카린티아, 티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북부, 헝가리 등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다 6세기 말에 판노니아 평원에서 출발한 아바르 칸국에 정복된 뒤 아바르 칸에게 공물을 바치고 아바르족이 치르는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러다가 아바르 칸국이 동로마 제국과 기나긴 전쟁을 치르면서 쇠락해지자, 슬라브 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독립을 꾀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아바르족[2]은 슬라브인[3]들의 아내와 딸과 함께 잠을 자며 겨울을 보냈으며, 슬라브인들은 매년 칸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쳤다. 아바르족 아버지와 슬라브족 아내와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이 수치스러운 억압을 참을 수 없어 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사모는 본래 슬라브 부족의 영역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슬라브족이 아바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참여해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그들이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고,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슬라브인들에 의해 렉스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이때가 프랑크 국왕 클로타르 2세 재위 40년이었다고 기술했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서기 623년 또는 624년에 사모가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거라고 본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사모는 12명의 슬라브인 아내를 두고 22명의 아들과 15명의 딸을 낳았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아내들은 사모가 자신의 휘하에 들어간 12개 부족을 자발적으로 복종시키기 위한 정치적 결혼으로 맺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프레데가르 연대기의 저자가 이교도인 사모의 야만성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했을 거라고 본다. 또한 그는 장거리 무역에 전념해 상당한 부를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군사력을 강화했다.

630년경, 프랑크 상인들이 사모가 다스리는 영역을 지나가던 중 슬라브인들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프랑크 국왕 다고베르 1세는 이를 빌미삼아 사모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영토를 동쪽으로 확장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시카리우스(Sicharius)를 사절로 파견해 프랑크인을 학살한 것에 항의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당시 회담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사모는 자기 백성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는 단지 당사자 사이에 발생한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시카리우스는 사모에게 부적절한 말을 했으며, 심지어 사모와 그의 백성이 다고베르에게 예속될 의무가 있다는 위협까지 했다. 사모는 이에 격분하며 대답했다.
"우리가 소유한 땅이 다고베르의 땅이고, 그가 우리에게 평화를 유지하라고 명령한다면, 우리도 그의 땅을 소유할 것이다."
시카리우스가 말했다.
"하느님의 종인 그리스도인이 개와 친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모가 답했다.
“만일 너희가 하느님의 종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개라면, 너희가 계속해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동안 우리는 마음대로 너희를 이빨로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다."
그런 다음 사모는 시카리우스를 쫓아냈다.

회담이 결렬된 후, 다고베르 1세는 프랑스 왕국의 동쪽 분국인 아우스트라시아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했다. 그는 군대를 3개 부대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자신이 이끌었고, 알레만니인으로 구성된 2번째 부대는 흐로도베르크 공작이 이끌었으며, 랑고바르드족 출신 용병들이 세 번째 부대를 결성해 슬라브의 영역을 공격했다. 알레만니족과 랑고바르드족은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해 포로와 전리품을 확보했다. 다고베르가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군은 사모와 수행원들이 자리잡은 보가티스부르크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던 중 사모가 성문을 열고 병사들을 출격시켜 프랑크인에게 싸움을 걸었다.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크인들은 숙영지, 보급품, 전리품을 남겨두고 도주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이 패배는 슬라브인들이 특별히 용맹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고베르 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감을 품은 프랑크 귀족들의 배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모는 다고베르 1세를 물리친 뒤 프랑크 왕국으로 서진하여 튀링겐 일대까지 밀어붙이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동안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 지냈던 소르브 공작 데르반은 다고베르를 떠나 사모에게 복종했다. 다고베르는 보복 원정을 벌이려 했지만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에 쉽사리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631년, 슬라브인들의 서진으로 곤경에 처했던 색슨족이 다고베르에게 사절을 보내 슬라브인을 포함한 외적의 습격으로부터 아우스트라시아의 국경을 지켜줄 테니 공물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다고베르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클로타르 1세 시기부터 매년 500마리의 소를 바치는 관례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슬라브인들이 왕국의 영역을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는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결국 튀링겐 공작 라둘프는 프랑크 왕국이 슬라브인의 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사모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상에서 전해지지 않으나,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사모와 프랑크인과의 전쟁이 더이상 기술되지 않은 걸 볼 때 프랑크 왕국을 침략하지 않고 자국의 내정을 다지는 데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35년간 통치했다는 프레데가르 연대기의 기술로 볼 때, 사모는 658년 또는 659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후에 그의 아들들 중 누구도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볼 때, 그가 사망한 직후 슬라브 부족들은 도로 뿔뿔이 흩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바르 칸국은 사모가 사망한 후 신속하게 슬라브인들의 영역에 진입해 796년 카롤루스 대제에게 복속될 때까지 슬라브인들을 지배했다.

3. 사모 제국의 위치와 영역

파일:사모 제국.jpg

학계에서 '사모 제국'으로 통칭되는 그의 제국의 위치와 영역은 기록이 부실해서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학자들은 사모 제국의 탄생을 이끈 슬라브 봉기는 아바르 칸국의 북서쪽 가장자리인 브라티슬라바 일대에서 벌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반란을 주동한 이들의 아버지는 아바르족이고 어머니는 슬라브족이라고 밝혔는데, 아바르족과 슬라브 문화의 혼합이 주로 이뤄졌음이 고고학 연구를 통해 확인된 지역은 브라티슬라바 일대 뿐이었기 때문이다.

체코 학자들은 오늘날 모라비아와 이웃한 로어외스터라이히, 서부 슬로바키아였을 거라 추정하며,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 다고베르 1세를 물리친 사모에게 충성을 맹세한 데르반 공작이 이끌었던 소르브족의 영역은 서부 보헤미아 및 남서부 슬로바키아에 미쳤을 것이라 추정한다. 반면 슬로바키아 학자들은 남부 모라비아와 동부 로어외스트라이히에서 사모 제국이 탄생했으며, 오늘날의 체코에 해당하는 보헤미아는 사모 제국에 전혀 속하지 않았거나 630년대 이후가 돼서야 편입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잘츠부르크 대교구가 7세기 이후 바이에른인과 카란타니아인들을 상대로 행한 선교 활동을 다룬 라틴어 문헌인 <Conversio Bagoariorum et Carantanorum(바이에른인과 카라타니아인의 개종)>에 따르면, 사모는 카란타니아의 통치자였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사모 제국이 카란타니아까지 복속시켰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 카란타니아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사모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물리쳤다는 기록은 없기에 여기까지 세력을 펼쳤을 가능성은 없다며, 이 기록을 쓴 성직자들이 카르눈툼을 카란타니아로 오인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1] 체코 남부 모라비아 지역 두브나니의 나키오 언덕에 있는 사모 왕 기념 동상.[2]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훈족이라고 기술되었다.[3]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벤트인'이라고 기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