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30 00:56:23

부활절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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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영국(북아일랜드), 아일랜드(아일랜드 왕국, 아일랜드 공화국, 아일랜드 자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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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대기근, 북아일랜드 분쟁, 벨파스트 협정, 브렉시트, 북아일랜드 의정서, 윈저 프레임워크
아일랜드 독립운동
관련 인물 마이클 콜린스, 로저 케이스먼트, 에이먼 데 벌레라
관련 사건 영국의 자치권 이양, 부활절 봉기, 아일랜드 독립 전쟁, 아일랜드 내전
북아일랜드 분쟁
피의 일요일 사건, 아일랜드 단식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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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봉기
Easter Rising
Éirí Amach na Cásca
파일:The_shell_of_the_G.P.O._on_Sackville_Street_after_the_Easter_Rising_(6937669789).jpg
기간 1916년 4월 24~29일
장소 아일랜드, 더블린
결과 반란군의 무조건 항복[1], 반란 주동자 처형
피해 485명 사망(민간인 260명)[2]
교전국 파일:Irish_Republic_Flag.png아일랜드 공화국 파일:영국 국기.svg영국
아일랜드 의용군[A][4]
아일랜드 시민군[5]
피어너 에런[6]
아일랜드 여성평의회[7]
하이버니안 라이플즈[A]
영국군

결국 필요없는 죽음이었던가?
어쩌면 영국이 행했고 말했던 모든 것에 대해
신의를 지킬지도 모르니.
우리는 그들의 꿈을 안다;
그들이 꿈을 꾸었고 죽었다는 것을 알만큼 충분히.
그리고 지나친 사랑이, 죽을 때까지
그들을 당혹하게 한다고 한들 어쩌리?
나는 그것을 시로 쓴다.
맥도나와 맥부리아드
그리고 코널리와 피어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초록이 입혀진 곳이라면 어디든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
끔찍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Easter, 1916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1. 개요2. 배경
2.1. 아일랜드 정부법 19142.2. 얼스터 자원군
2.2.1. 레언 무기 밀수2.2.2. 쿠레그 군대 반란
2.3. 아일랜드 자원군
3. 봉기
3.1. 사형
4. 여담5. 참고 문서

[clearfix]

1. 개요

역사저널 그날 중에서[9]
1916년 부활절 기간에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으킨 봉기. 4월 24일부터 4월 30일까지 진행됐으며 압도적으로 우세한 영국의 화력에 의하여 결국 분쇄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아일랜드의 무장 독립투쟁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IRA의 끈질긴 항쟁 끝에 1922년 독립[10]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부활절 봉기는 아일랜드 독립의 도화선이었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배경

2.1. 아일랜드 정부법 1914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아일랜드/역사
, 아일랜드 대기근
, 영국의 자치권 이양
,
,
,

1909년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가 예산안 개혁을 선포했다. 인민의 예산(People’s Budget)이라는 계정안은 부자들의 세금증액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귀족으로 구성된 상원의 큰 반발을 가져왔다. H. H. 애스퀴스는 상원에 대응하기 위해 총선을 계시할려고 했지만, 9월과 10월에 치루어진 보궐선거들이 자유당의 참패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때 존 레드몬드(John Redmond)로 이루어진 아일랜드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Party)가 손을 뻗었다.

레드몬드는 자유당이 자치제(Home Rule)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표명하길 원했으며, 자유당이 입장표면을 얼버부릴시 리버풀, 렌케쉬어, 그리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아일랜드인들에게 자유당에 대한 투표를 금지할거라고 협박했다.
확실히 말해두건데 아일랜드의 자치는 자유당의 정책이 맞습니다. 영국 국회가 위에 있다는 철 지난 표현 빼고는 어떠한 제한이나 한계를 두지 않을것입니다.
Augustine Birrell, Chief Secretary of Ireland

이는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아일랜드 의회당이 로이드 조지의 예산안 및 상원의 거부권을 없네는 법안을 통과하게 만들었다. 자유당의 지원 아래 1912년에 소개된 아일랜드의 자치안은 거침없어 보였다.

2.2. 얼스터 자원군

하지만 제 3차 자치안이 하원의 소개되기도 전에 얼스터에 있는 연방주의자들이 반발을 하였다. 상원의 거부건이 1911년에 없어지자 크레가본에 연방주의자들이 모여 집회를 하였으며, 벨모어에서는 십만명이나 되는 연방주의자들이 북아일랜드 연방주의 국기를 들고 시위를 하였다.

얼스터 엄숙 동맹 및 서약(Ulster Solemn League and Covenant)은 무려 오십만명이나 되는 얼스터 연방주의자들의 서약을 받았으며, 얼스터 연방주의자 클럽(Ulster Unionist Council)은 얼스터 자원군(Ulster Volunteer Force)이라는 준군사조직을 조직했다.
우리의 양심에 따라 자치제가 얼스터와 아일랜드 전체의 물질적 안녕에 재앙을 초래하고, 우리의 시민적 및 종교적 자유를 전복시키며, 우리의 시민권을 파괴하고, 제국의 통합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우리는 얼스터의 남자들이며, 조지 5세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로서, 우리 조상들이 고난과 시련의 날에 자신 있게 신뢰했던 하나님께 겸허히 의지하여, 이 위기의 시기에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연합 왕국에서의 평등한 시민권이라는 소중한 지위를 지키고, 아일랜드에 자치 의회를 설립하려는 현재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 서로를 지키며 단결할 것을 엄숙히 서약합니다.
Ulster's Solemn League and Covenant

얼스터 자원군은 총 100,000명의 인원으로 조직되었고, 영국군의 장교들이 대거 이입되면서 군사조직으로 재정비되기 시작했다. 조지 리차드슨 장군과 헤켓 페인 대령은 얼스터 자원군을 영국군 모델로 재편을 했으나, 무장이 부족하여 한 대대당 리안필드 총기 하나를 들고있을정도로 열악했다.
45개의 총기는 변명이 될지 모르지만, 100,000명은 무고하지 않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Irish Government Law Officers

아일랜드내에서 민간군사조직이 형성되고 있는데 영국 정부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준군사조직의 교련이 합법이였다는 것이다. 1819년 불법 교련법에 의하여 교련은 “자신들의 권위와 자유”를 지키는 한에서, 그리고 2명의 행정장관의 허락이 있을시 합법이였던 것이다. 연방주의자들은 얼스터 지방의 고위조직을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얼스터 자원군은 자유롭게 훈련하고 북아일랜드를 누비고 다녔다.

이런 정부의 무능함은 에드워드 카슨이 1913년에 얼스터 임시정부를 조직했을때의 자신만만한 발언을 하게되는 게기가 되었다
정부가 불법이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훈련은 불법입니다. 자원군도 불법입니다. 정부도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정부는 감히 간섭하지 못합니다.
에드워드 카슨

2.2.1. 레언 무기 밀수

2.2.2. 쿠레그 군대 반란

2.3. 아일랜드 자원군

3. 봉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aster_Proclamation_of_1916.png

봉기 지도자 패트릭 피어스가 봉기 세력의 핵심 거점이었던 더블린 중앙우체국에서 낭독한 독립선언문.
POBLACHT NA hÉIREANN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정부가 아일랜드 민중에게 고함
남녀 아일랜드 인민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아일랜드 국민으로서의 오랜 전통과 깃발을 전해주며 자유를 위한 봉기를 소환한 돌아가신 선조들의 이름으로.

아일랜드는 자신의 인민을 조직하고 단련하여 왔다. 비밀리에 혁명을 조직한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당이 있으며 군사 조직으로서 아일랜드 의용군과 아일랜드 시민군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엄정한 규율아래 적당한 때가 도래하여 스스로를 드러내어야 할 때까지 인내하여 왔다. 이제 그 때가 되었다. 아메리카로 추방당한 아일랜드의 아이들이 지원하고 있으며 유럽 각지에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완전한 승리의 쟁취를 위하여 스스로 강인함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아일랜드의 주인은 아일랜드인임을 선언한다. 또한, 아일랜드의 양보할 수 없는 주권과 아일랜드의 통치권 역시 아일랜드인의 것이다. 외국인과 그들 정부가 벌인 오랜 세월의 착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권리는 소멸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압제는 결국 아일랜드인에 의해 종결될 것이다. 모든 아일랜드인은 주권과 자유로운 조국을 소유할 권리가있다. 이러한 권리의 쟁취를 위해 지난 삼백년간 여섯 차례에 걸친 항쟁이 있었다. 우리는 이를 계승하여 세계와 당당히 대면할 것이다. 여기 우리는 독립 주권국가인 아일랜드 공화국의 국민들이다. 우리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자유와 복지, 국가 번영을 위해 우리 자신과 전우들의 생명을 걸 것을 맹세한다.

우리는 이 선언을 통해 모든 아일랜드 남녀 인민이 충성을 맹세할 국가의 이름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명명한다. 공화국은 종교와 공민의 자유권과 평등권 그리고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기회를 보장한다. 또한 공화국은 국가 전역의 모든 분야에서 행복과 번영을 추구할 것임을 공표한다. 국가의 모든 아동은 평등하게 존중될 것이며, 단일하게 결성된 >정부에 의해 과거에 다수와 소수자로 나뉘어 있었다 할지라도 차별없이 보살핌을 받으며 양육될 것이다.

아일랜드의 모든 남녀 인민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표로 구성된 항구적인 국가 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적당한 시기를 우리의 군대가 획득할 때 까지, 공화국의 시민과 군사에 관한 정무는 인민의 신의를 바탕으로 이 선언서에 의해 집행될 것이다.

우리는 지엄하신 하느님의 축복이 우리의 군대를 가호하여 아일랜드 공화국을 수호하기를 기원할 뿐, 단 한 사람도 비겁하고 비인도적인 약탈자들에게 복종하는 불명예를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임시정부 대표로 서명됨:
토머스 J. 클라크
산 막 디어르마다 토마스 막 돈하가
F. H. 피어스 제임스 코놀리
에이먼 칸트 조지프 플렁킷[11]


1916년 4월 24일 1,000여 명 내외의 독립군이 GPO(중앙우체국)을 비롯한 더블린 시내의 주요 거점[12]을 습격하면서 부활절 봉기가 시작되었다. 당일 더블린 내부의 주요 거점들을 거의 다 장악하고 지도자 패트릭 피어스가 시민들 앞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In order to prevent the further slaughter of Dublin citizens, and in the hope of saving the lives of our followers now surrounded and hopelessly outnumbered, the member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present at headquarters have agreed to an unconditional surrender, and the commandants of the various districts in the City and County will order their commands to lay down arms.
이후에 벌어질 더블린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막기위해 그리고 압도적으로 열세이고 포위된 추종자들을 구출할 희망 아래 현 본부의 임시정부원들은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며 도시와 카운티에 있는 여러 지역의 사령관들이 무장을 해제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입니다.
패트릭 피어스의 항복 문서, 1916년 4월 29일
사전에 약속됐던 독일 제국의 무기 제공이 무산[13]된 데다 봉기에 참여한 각종 정파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명령이 뒤죽박죽이어서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이 더 엉망으로 운용되었다.[14] 덕분에 봉기세력은 더블린을 장악하기에 급급했다. 이와는 반대로 영국군은 이미 1차대전이 2년 동안 진행되던 상황이었던 만큼 병력 운용이 거의 만렙의 경지였다.[15] 결정적으로 더블린의 시민들 역시 전반적으로 봉기 세력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봉기세력에게 온갖 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 결국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진압을 시작한 후 봉기 세력은 무너지기 시작해 4월 30일 더블린 중앙 우체국이 영국군 포병대에게 신나게 맹폭당하는 것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3.1. 사형

파일:Irish_UK_election_1918.png
1918년 영국 총선(아일랜드) 결과[16]
진압 이후 영국군은 아일랜드의 무장투쟁 세력을 아예 뿌리채 뽑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패트릭 피어스를 비롯한 독립군의 주요 우두머리들은 그대로 총살됐고[17] 수천명의 단순 가담자들도 투옥된 것은 당연지사.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생디칼리슴 혁명가인 제임스 코널리는 봉기 도중 다리에 부상을 입어 제대로 설 수 없었다. 그러자 영국군은 코널리를 의자에 묶어서 총살시켰다. 이 정도로 무자비한 대응은 주동자들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프랜시스 쉬이 스케핑턴[18]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이 봉기 기간 중에 영국군에게 학살된 뒤 암매장되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자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부활절 봉기를 주도한 세력은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1918년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 의석의 대부분을 신 페인이 가져갔고 독립선언 후 아일랜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4. 여담

  • 부활절 봉기의 전장인 GPO(더블린 중앙 우체국)[19]은 전투로 인해 붕괴되었지만 복원 후 1929년에 아일랜드 우체국(An post)의 본사로서 재개장하였다. 현재는 건물 일부만 우체국으로 쓰고 나머지는 큰 규모의 부활절 봉기 기념 역사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전시 자료나 설명이 굉장히 충실하고 퀄리티도 높다. 영어가 어느 정도 되고 더블린에 방문할 기회가 있는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방문해 보자.
  • 에이먼 데 벌레라마이클 콜린스도 이 봉기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데 발레라는 미국 시민권자여서 무턱대고 죽여버리면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고 콜린스는 이 때 당시에는 그냥 단순 가담자였기 때문에 영국이 투옥하는 정도로 끝내 버렸다. 출옥 후 이들은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을 이끄는 두 거목으로 성장했다.
  • 당시 처형당한 독립운동가 중에 로저 케이스먼트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사람은 레오폴드 2세콩고에서 저지른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는 데 매우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인권조사에 대한 공로로 영국정부로부터 기사작위와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을 받았으나 취소된다. 그는 사형 판결을 받았고 아서 코난 도일을 포함한 영국의 정관계 유명 인사들이 감형 운동을 진행하였고 그의 인도주의적 치적 또한 여론의 반발을 야기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케이스먼트가 게이임을 증명하는 일기–일명 블랙 다이어리라고 한다–를 공개하였다. 대다수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보수주의 덕택에 그에 대한 사면 옹호 여론은 약화되었고 결국 사형당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가톨릭 아동 성범죄 논란을 거쳐 아일랜드 사회에 교회가 미치는 영향이 극적으로 약화됨에 따라 케이스먼트는 그의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독립운동가로서의 것과 연계되어 더욱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다.
  • WWE RAW의 아일랜드인 레슬러 핀 밸러의 피니쉬 1916[21]은 부활절 봉기가 일어난 년도에서 따 왔다고 한다.

부활절 봉기 100주년 기념으로 위 연설문을 읽는 동영상



5. 참고 문서


[1] 참고[2] 참고 자료[A] 출처에서 확인할 수 있음.[4]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은 비밀결사단체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름을 걸지 않고 아일랜드 의용군과 같은 무장단체를 조직해서 은밀하게 지원하는 형태로 주도했다. 아일랜드 의용군은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뿐만 아니라 신페인 당원 등도 있었다.[5] The Pooles of 1916 Documentary[6] Children of the Revolution[7] The Irish Revolutionary Women of Cumann na mBan[A] [9] 여기서는 영국 해군에 의해 독일 제국의 배가 격침됐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영국 해군에게 들킨 것까지는 맞으나 독일 제국의 선원들이 고의적으로 격침시켰다.[10] 명목상으로는 자치국으로 여전히 영국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허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일랜드가 명목상으로도 독립을 선언한 것은 1930년대의 이야기다.[11] 번역 출저. https://ko.wikisource.org/wiki/%EC%95%84%EC%9D%BC%EB%9E%9C%EB%93%9C_%EA%B3%B5%ED%99%94%EA%B5%AD_%EC%84%A0%ED%8F%AC[12] 더블린 캐슬 및 군병원. 현재는 IMMA로 현대 미술관으로 다시 개장했다.[13] 독일 제국 측이 독립운동가들에게 무기를 제공해 주기로 약속하고 노르웨이 국적으로 위장한 Aud라는 이름의 선박으로 배달해 주기로 했으나 봉기 이틀전 항행 중에 영국에게 딱 걸렸다. 무기라도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 선원들이 배를 고의적으로 격침시켰다. 그래서 로저 케이스먼트는 Aud를 보지 못하고 체포되었다.[14] 반란군 측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만 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사학자들의 연구결과 부활절 봉기 내내 동원된 아일랜드 측 군사력이 3,000명이 채 안됐다고 한다(...).[15] 1916년에는 이전까지 영국은 자원병으로 충당했던 병력보충(영국 드라마 아워월드워 2화에서 내용을 알 수 있으며 이곳도 참조할 것) 대신 본격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수백만명의 군대를 굴리고 있었다. 또 이 군대를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행정력과 병참력을 감안하면...[16] 선거 이후 독립선언으로 등장한 1919년 의회가 바로 아일랜드 제1대 하원 의회다.[17] 약 100여명 정도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 중 실제로 집행된 사람은 15명 정도고 나머지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18] 비폭력주의자였으며 봉기 기간 동안 봉기자들과 영국을 모두 비판했다.[19] 아카이브[20] 맥스웰 장군은 위험한 신페인을 체포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21]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블러디 선데이라는 이름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