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6 00:06:21

부여 서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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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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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008080>
扶餘 徐氏
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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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8080><colbgcolor=#008080> 관향 충청남도 부여군
시조 부여융(扶餘隆)
파조 관호당공파, 만호공파, 교위공파
직장공파, 소호공파, 정의공파
참의공파, 통정공파, 석선공파
만죽공파, 학생공파
집성촌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평안남도 덕천군 풍덕면 율곡리
인구 17,145명(2015년) | 국내 280위
링크 서씨일가연합회

1. 개요2. 역사
2.1. 백제 왕실과의 연관성
3. 항렬표4. 인구 분포5. 집성촌6. 유명인

[clearfix]

1. 개요

백제(百濟)의 국성(國姓).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태자 부여융(扶餘隆)이다.

2. 역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는 부여 서씨의 시조를 서존(徐存)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부여 서씨 세보(扶餘徐氏世譜)는 백제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을 부여 서씨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후 부여융은 당나라로 끌려갔는데 이때 당고종(唐高宗)에게 서씨(徐氏)성을 사성받고 백제의 구지에 설치된 통치기구인 웅진도독부[1]의 장관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된 후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다만 현 중국 허난성 뤄양시 북망산에서 발견된 부여융의 묘지명에는 당 고종에게 사성받았다는 기록이 없어서 문헌의 신뢰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중국 측 기록을 실은 바이두 백과의 설명에도 부여융이 성(姓)을 고쳐 서씨(徐氏)로 했다고는 나오나 당고종이 사성한 것인지 여부는 설명이 없다. # 더군다나 웅진도독부는 나당전쟁이 터지고 신라군에게 당나라군이 패전하자 676년 한반도에서 축출당했고, 이후 부여융도 당나라에서 지내다 생을 마감한 것 자체가 명백한데,[2]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신라의 통치권을 뒤흔들 수도 있었던 당대의 중심인물인 부여융이 사성을 받은 상태로 백제 왕족을 엄중히 경계하던 신라 정부의 감시하에 있던 한반도로 돌아가 후손을 남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하다.[3] 그래서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가설들이 나오기도 했으며, 자세한 건 아래의 단락에서 서술.

그러다 보니 시조 이후의 세계(世系)를 실전해 몇백 년간의 계보는 알 수 없다가 부여융의 먼 후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서수손(徐秀孫)을 11대손으로 기록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후에 후손들이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 있었던 부여를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 중기부터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서익(徐益)은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를 지냈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다. 지우(志友)였던 이이(李珥)와 정철(鄭澈)이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시조를 잘하여 명망이 높았다. 자신의 청탁을 거절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에게 앙심을 품고 훗날 파직시키는데 일조한 흑역사도 있다. 서익의 아들 6형제 중 장남 서용갑(徐龍甲)은 선조 때 영양현감과 덕천군수를 지냈다. 그 뒤 광해군 때 사색당파의 하나인 대북파가 일으킨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넷째 아우인 서양갑(徐羊甲)과 함께 화를 입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현종 때 직간(直諫)을 잘하여 이상진(李尙眞) 등과 더불어 <오직(五直)>으로 불렸던 서필원(徐必遠)은 서용갑의 손자이다. 서필원은 목민관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명 관리였다. 호남에 대동법을 확대 정착시켜 백성을 도탄에서 구했다. 바른 말 잘하고 청렴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다보니 고관대작이 됐으면서도 경신대기근 때 굶어죽었다. 영의정 김육이 살아생전 아끼고 인정했던 사람이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서필원의 아들로 목사(牧使)를 역임했던 서경조(徐敬祖), 의금부 도사 서정훈(徐鼎勳), 사헌부 감찰 서계훈(徐啓勳), 돈녕부 도정 서운휘(徐雲輝) 및 서석조(徐錫祚) 등이 유명하다. 호조정랑 서규달(徐逵達), 현감 서진문(徐鎭文), 공조참판 서무덕(徐武德) 등도 등용되었다.

2.1. 백제 왕실과의 연관성

상기했듯이 백제 태자 부여융의 후손이라는 기록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들이 나와 있다. 예를 들자면 시조가 고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경우, 보통 모화사상에 따라 아예 중국의 유명인들과 시조를 연관 짓는 게 조선 중후기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는데, 굳이 백제 왕실과 관련된 전승이 내려온 것 자체는 무언가 연관성이 강하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성씨가 바뀐 것의 경우에도 부여씨(扶餘氏)의 부(扶)자를 생략하고[4] 여(餘)자를 변형하면 서(徐)자가 되기에 상황에 따라 변성을 자주 행했던 당대에는 이상할 게 없는 변성 방식이기도 했다.[5] 그리고 부여융의 후손이라는 부분은 부여융 자체도 의자왕이 아주 늦게 왕위에 오른 만큼 장성한 상태에서 태자가 되었기에 백제 멸망기에 자손이 있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는 점과 더불어 부여융 자체가 아닌 부여융의 자손들이 한반도에 남아서 대를 이었던 것이 부여융 본인이 아예 한반도에 돌아간 것으로 와전되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6] 또한 의자왕에게도 자손이 아주 많았던 점 및 굳이 의자왕의 자손이 아니라도 백제의 긴 역사에 따라 여타 방계 왕족들도 매우 많았기 때문에 여타 백제 왕족의 후손들이 그래도 당대의 유명인이자 정통 후계자였던 부여융의 후손을 칭한 게 전해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여러가지의 추정이나 가설들이 제시되어 있다.

부여 서씨 외에도 백제 왕실과 관련 있는 성씨로는 이천 서씨의령 여씨가 있는데, 이천 서씨의 경우 부여 서씨와 비슷한 논거로 백제 왕실과의 관련성이 주목되고 있고, 의령 여씨의 경우에는 백제부흥운동을 이끌며 웅진도독부의 부여융과 대립했던 왕자 부여풍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구 서씨의 경우에는 서씨이긴 하나, 애초에 다른 서씨들과 연관이 있는가의 여부 자체부터 분명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아 관련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된다.[7]

3. 항렬표

부여 서씨 항렬표
세(世) 26 27 28 29 30 31
항렬자(行列字) 진(鎭) 록(祿) 영(榮) 훈(勳) 기(基) 선(善)
세(世) 32 33 34 35 36 37
항렬자(行列字) 승(承) 식(植) 형(炯) 배(培) 현(鉉) 창(昶)
세(世) 38 39 40 41 42 43
항렬자(行列字) 석(晳) 유(裕) 세(世) 용(鎔) 윤(潤) 수(秀)

4. 인구 분포

년도 가구 인구 인구 순위
1985년 3,032가구 13,041명 -
2000년 4,486가구 14,312명 259위
2015년 - 17,145명 280위

5. 집성촌

6. 유명인


[1] 고구려 멸망 후 설치된 안동도호부의 하위기구였다.[2] 상기했듯이 부여융은 묘지명까지 발견된 인물이다.[3] 한때 동맹관계였음에도 삼국시대 후기에 들어 백제와 신라는 아예 원수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신라는 당나라에 대항하여서는 동맹이 되어주기도 했던 고구려 유민들보다는 백제 유민들을 훨씬 경계하였다.[4] 당대에도 부여씨는 그냥 여(餘)씨로 축약되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5] 사마(성씨)(司馬)씨가 풍(馮)씨로 축약한 방식과 거의 비슷하다. 餘와 余는 동자로 통하는데, 余 앞에 扶를 대체한 변을 붙이면 딱 徐가 되기 때문. 고대에 그렇게 자주 등장하던 사마씨는 고대 말~중세쯤에 들어서부터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는데, 서진동진의 황성이었으니만큼 국가의 멸망으로 인한 탄압을 피해 변성을 행한 걸로 추정된다. 또한 백제의 조상국이 되는 부여선비족 모용부에 대대적으로 털려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적이 있는데, 그래서 모용선비가 세운 나라인 전연이나 후연에서는 부여 유민 출신의 인물들이 종종 등장하며, 특히 부여에서 따온 여(餘)씨 성을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 중 여암(후연)이란 인물은 서암(徐巖)이란 이름으로 기록되기도 했다.[6] 실제로 백제 멸망 후 백제의 그 많던 왕족, 귀족들은 대부분은 그냥 한반도에 남아 호족이나 평민으로서 살아가다가 후삼국시대에 들어 재건국된 후백제에 편입되었다고 여겨지는데, 백제 멸망기부터 후백제대까지의 가문의 행적이 고스란히 기록이 남은 경우도 드물게 있다. 외국으로 떠났거나 아예 숨어들은 게 아닌 이상 보통은 여타 왕, 귀족들도 별다를 건 없었다고 평가된다.[7] 서(徐)씨 자체는 중국에도 있는 성씨라 귀화계로 기록된 서씨들도 있고, 또한 토착계라 해도 고려시대의 호족들이 성씨를 처음으로 칭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유명한 성씨를 도입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냥 우연의 일치로 같은 성씨를 쓰게 된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명백한 기록이 남은 게 아닌 이상 연관성을 섣불리 추정하기는 힘든 게 한국의 성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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