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7 15:38:29

마셜-길버트 공습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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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s-Gilberts raids

1. 배경2. 진행3. 의의 및 후일담

1. 배경

진주만 공습 이래 아직 미국은 일본에 대한 반격은 고사하고 공격받고 있는 필리핀 및 서태평양 지역에 대한 지원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태평양함대의 붕괴로 인해 미국의 모든 전쟁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사실상 일본군이 치면 얻어맞는 상황이었다.

새로이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런 상황을 용인할 수 없었다. 태평양함대가 사실상 괴멸된 상황이지만, 남은 전력으로 어떻게든 반격을 가하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군의 사기 문제였다. 일본은 남방작전을 전개하며 동남아에서 빠르게 확장 중이었고, 이를 저지하고자 한 연합국의 시도는 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웨이크섬에 일본군이 상륙했고, 필리핀에서는 힘겨운 항전을 이어가고 있었다[1].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의 도서지역은 물론 인도와 호주의 식민지까지 위협을 받게된 영국이 자체적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말레이 해전에서 참패를 당했고 영국은 그대로 서태평양 전선에서 이탈하게된다. 진주만의 충격은 여전했고 군과 국민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다. 비열한 기습에 대해 전미가 분기탱천하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달랐다. 진주만, 괌, 웨이크 섬, 그리고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전투 내내 미군은, 그리고 미국은 사실상 패전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이었던 만큼 아주 작은 승리더라도 1승을 챙길 필요가 있었고, 이 1승을 위한 패를 모으고자 대서양에서 유보트와 놀고 있던 요크타운을 태평양으로 다시 끌고 오는 등 준비에 나선다.

실전 경험 문제도 있었다. 이쪽을 사실상 1순위 목적으로서 보는시각도 있는데, 중일전쟁으로 실전경험을 쌓은 일본군 파일럿들의 기량은 대단한 수준이었고 그 역량은 비단 공중전 뿐이 아니라 대함 공격에 있어서도 충실했다. 그에 반해 일부를 제외한 미군의 실전 경험은 짧아도 20년 전 것이었고[2], 무기체계 또한 실전에서의 피드백으로 지속적으로 개량ㆍ발전된 일본의 그것에 크게 못 미치었다. 실제로 버팔로와 워호크는 절찬 칠면조로 전락중이었고 와일드캣에 와서야 겨우겨우 버티는 수준이 되었으며, 빌어먹을 어뢰는 뇌격기 파일럿[3] 뿐 아니라 잠수함 승무원 까지 괴롭히고 있었다. 이러한 부족한 기량과 장비는 공습 도중에도 드러났는데, TF8 소속 중순양함 USS 체스터는 항공폭탄의 직격으로 소소한 피해를 입었고 USS 엔터프라이즈 역시 항공폭탄의 지근탄으로 화재가 발생했으며 심지어 와일드캣 전투기 한 대까지 격추당한다.

그 외에 여러 설이 있는데 단순히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성 공격이었다는 설 등. 또, 일본의 서태평양 전선에서의 확고하기 짝이 없는 주도권을 바탕으로한 팽창을, 최외곽(far-flung)에 위치한 기지가 취약함을 드러내므로서 일시적으로나마 정지시키려 했다는 얘기도 있다.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Battle 360°에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다. 공습의 목적은 일본군의 하와이 침공에 대한 거부조치 였고, 이를 위해 활주로, 연료 저장고, 탄약고, 그리고 대공포대를 파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하와이 상륙은 현대의 관점에서 부감해보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으나, 당시엔 그에 대한 공포가 횡행했으므로 이에 대한 예방조치를 행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최소한 명분으로선 충분했다.

2. 진행

태평양함대는 항모 및 호위함을 둘로 나누어 TF 8과 TF 17로 편성했다. TF 8은 윌리엄 홀시 중장의 지휘하에 항모 엔터프라이즈가 배속되어 마셜 제도를, TF 17은 프랭크 플레처 중장(2번 항목)이 지휘하는 항모 요크타운이 배속되어 길버트 제도를 각각 공습하기로 하였다.

작전은 1942년 2월 1일 결행되었다. 두 기동부대의 공습[4]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TF 8은 콰잘레인을 중심으로 그 인근 환초들의 일본군 기지를 공습했다. 이 공습으로 카토리급 연습순양함 카토리가 소파되었고, 보조선박 3척이 격침, 소해함 1척이 중파, 항공기 15기가 격추 내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미군은 SBD 돈틀리스 5기와 와일드캣 1기를 잃었다.

TF 17은 성과가 미미했는데, 지상에 주기된 일본기 3기를 파괴하고 시설에 경미한 손해를 주었으나 대신 SBD 돈틀리스 3기, TBD 데버스테이터 4기를 잃고, 순양함에서 발진한 수상정찰기 1기를 추가로 잃었다.

현지 부대의 보고를 받은 대본영은 즉시 남방작전을 지원하던 함대를 일부 차출, 추격하려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판단하에 이를 취소한다.

3. 의의 및 후일담

군사적으로는 큰 성과가 없고, 주목할 가치도 별로 없는 소규모 공습이었다.

그러나 이 공습을 통해 미군의 항모기동부대는 귀중한 실전 경험을 얻을 수 있었고, 동시에 언제든지 일본의 방위선을 뚫고 펀치를 먹일 수 있다는 걸 입증하였다. 실전 경험의 의의는 상당했는데, 미합중국 태평양 함대의 전함 전력이 일소된 상황에서 남은 것은 항모기동부대 뿐이었고 이들은 후에 벌어질 일련의 전투의 핵심 전력으로서 기능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량을 길러낸 전투 중 하나가 마셜-길버트 공습이었다. 공습 후 진주만에 귀항한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과 비행대원들은 영웅의 환대를 받았으며, 비록 미 본토에의 영향은 이후에 있었던 둘리틀 공격대가 훨씬 컸으나 진주만의 해군 장병 및 간호사, 육군 장병들에게 있어서의 사기진작 효과는 이 공습도 결코 작지 않았다.

반면, 대본영은 외곽 방위선의 섬 몇 개가 자그마한 공습을 당한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만,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 공습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 자신이 진주만에서 격멸하고자 했던, 그러나 끝내 살아남은 미국의 항모들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고 자신이 구상한 전쟁주도권을 부술 위협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공습 규모가 너무 소규모여서 야마모토의 우려는 주변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나, 둘리틀 특공대가 도쿄를 공습함으로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미 항모부대의 반격과 도쿄 공습의 여파는 산호해 해전을 지나 미드웨이 해전으로 이어진다.


[1] 완전히 일본군의 손에 떨어진 것은 공습 이후다.[2] 엔터프라이즈의 정찰폭격대가 진주만 공습 당일 일본군 공격대와 조우했었는데, 그때 한 돈틀리스 파일럿이 한 말이 "씨X, 저 꼬리에 붙은 개X끼 좀 쏴버려. 쟤가 무려 실탄을 쏘고 있다고!" 라고....[3] 마셜-길버트 공습에 투입된 뇌격대의 전과도 전무했다.[4] 함재기에 의한 공격 외에도 순양함 및 하위함선의 포격 또한 이루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