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7-04-16 13:03:35

탐라국/역사

1. 신화시대

개척 설화로서 '삼을나'가 유명한데, 타 지역과 다른 3성(三姓) 신화의 형태이다. 이에 따르면 태고에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1], 부을나(夫乙那)라고 하는 세 신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 오늘날 삼성혈)이라는 땅에서 솟아 나와[2][3] 사냥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벽랑국(碧浪國)[4]에서 들어온 세 공주를 아내로 맞아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면서 제주도의 성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화 형태상 고구려, 백제와 동계인 부여계 신화의 영향이 있다고도 한다. 또, 성씨가 고씨, 양씨, 부씨이기 때문에 고씨는 고구려계, 양씨는 양맥족이 부씨는 부여계가 남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무려 기원전 2337년으로 단군조선보다 빠른 건국이라지만 신뢰하기는 어렵다. 이 때 세 씨족사회가 뭉쳐 고씨가 왕이 된건 인간세상이 생긴 후 900년 뒤라는 기록도 있다.

2. 삼국시대

탐라국이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하기 이전에,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주호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정황상 이들이 고대에 탐라를 지배한 세력으로 추정된다.

본토의 국가에 복속된 것은 백제 근초고왕 대라는 설이 있었으나 영산강 인근의 독자적인 문화권이 확인되어 나가면서 4 ~ 5세기 백제의 남방 진출에 대한 논란이 커졌다. 완전히 복속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성왕 때인 498년이다. 한편 중국 측 기록인 수서 백제전에는 '탐모라(耽牟羅)'가 등장하는데 백제의 부용국이었다고 한다.[5]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 한국 사서중 탐라국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단이다.[6]

2년(509년) 겨울 12월 : 남해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교통하였다,
《일본서기》 권17 계체기

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 (중략) … 其南, 海行三月有耽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을 평정하던 해에, 군선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때 백제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는데, 창(창왕)이 이 배를 후하게 지원하여 보내고, 사신을 같이 파견하여 진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표를 올렸다. … (중략) … 그(백제) 남쪽에 바다로 3달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 리이다. 제주도는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데... 게다가 1천리면 한반도 남북단 거리의 1/3이나 된다. 대체 어디를 보고 적은 거냐?[7][8] 이러니까 환빠들이 설치지 토산물로 노루, 사슴이 많이 나고 백제에 부용해 있다.
《수서》 백제전

신라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울 때의 아홉 나라(九韓, 구한)에도 탁라(托羅)가 들어간다. 이외의 8국은 일본, 중화(中華), 오월(吳越), 응유(鷹遊, 백제로 추정), 말갈, 단국(丹國, 거란), 여적(女狄, 여진), (濊貊, 고구려로 보임)이다. 구한(九韓)이라고는 하나 전혀 삼한의 범주 같은 것과는 상관 없고 그냥 주변국 다 싸잡아넣은 것.

3. 남북국시대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662년 탐라국주 좌평[9] 도동음률(徒冬音律)[10]이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당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679년에는 다시 한 번 신라가 탐라국을 경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서 662년의 항복은 형식적인 것이고 한반도의 정리가 끝난 679년에 신라가 여유가 생긴 뒤 본격적으로 속국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662년의 신라는 백제 부흥군 상대하랴, 고구려 상대하랴, 그리고 곧 나당전쟁 준비하랴 바빴기 때문에 탐라에 신경 쓸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이후 탐라국은 892년 육지에서 후삼국시대가 개막할 때까지 통일신라에 정기적으로 조공하였다. 보덕국이나 우산국처럼 일종의 신라의 번국이 된 것인데, 속국이지만 일단 독립국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어서, 당나라에 조천사를 보내거나 일본에서는 견탐라사(遣耽羅使)가 오가기도 했다.

신문왕 4년에는 고지창(髙支昌)을 신라에 보내 설총이두도입했다고 한다.

김헌창의 난 때는 신라 귀족들 일부가 탐라 땅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4. 고려시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2년여가 지난 938년 탐라는 고려에 굴복하고 태자 고말로를 보내 입조하였으며 이 때부터는 왕이 아니라 성주(星主)라고 불렸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耽羅志≫에 “신라 때 고후(高厚)·고청(高淸) 및 셋째가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하니 왕이 기뻐해 작호를 주었는데, 고후에게는 성주, 고청에게는 왕자(王子), 셋째에게는 도내(徒內)라 하고 국호를 주어 탐라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 태조 때 탐라왕 고자견(髙自堅)이 태자 고말로(髙末老)를 고려에 입조시켰고 이에 고려 태조는 고말로를 통해 탐라의 군주에게는 성주, 2등 권력자에게는 왕자(王子)라는 관작을 제수하였다.[11] 신라나 고려가 탐라의 군주에게 성주라는 관작을 제수한 것은 지방 호족세력이 한반도의 패권을 가진 중앙정부에 입조하여 탐라 지방의 지배력을 인정받았다(책봉)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성주란 명칭은 별의 나라외계인 국가인 탐라의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항로 지표로 별자리를 이용하였고 탐라에선 그 가운데 북두칠성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칠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을 쌓은 것이 칠성단인데 현재 속칭 칠성통이라 불리는 곳에 칠성단이 있었다.[12] 탐라지 등에 조선조 칠성단에서 제를 지냈는데 칠성은 하늘의 북두칠성이고 제의도 천제란 기록이 있다. 이렇듯 별을 중시하는 풍속이 명칭에 반영된 것이 성주라는 것이다.

고려 초기까지는 '탐라(耽羅)'라는 이름을 가진 사실상의 독립국이었으나 지방 호족을 고려의 지배체계에 편입시키며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탐라 역시 차츰 고려의 지방행정 단위로 편입되었다. 제주라는 명칭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고려 빈공과(貢科 : 외국인을 자국의 관료로 임용하기 위하여 치르던 시험.)에 합격한 탐라 학생 등,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고려와는 별개인 속국 취급을 받는 등 자치는 허용되었다.

1105년 숙종 시기에 탐라국은 탐라군으로 개칭되면서 사실상 속국 지위가 박탈되고, 본토에 있는 중앙정부의 통제권에 들어왔다. 다만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계속 허용되었다. 몽골 제국과의 여몽전쟁 시기에는 삼별초가 제주도를 점령하여, 최후 항전지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몽골 간섭기에는 말을 키우기 좋은 환경에 주목해 원나라의 직할령인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어 요양행성 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빼앗긴 충렬왕 시기에 일단 반환받았다. 공민왕은 몽골 이전 관례에 의거해서 자치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공민왕 때 목호의 난(牧胡)[13]말치기의 난이 일아나 최영 장군이 진압군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 반란은 원나라의 유배인들과 몽골인들이 고려의 친명반원 정책에 반발해서 일어났으나 탐라인들도 상당수 동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오랫동안 몽골인과의 혼혈이 적지않이 이루어졌으며 몽골 풍속 같은 것의 전래도 상당했기 때문.[14] 실제로 과거 제주의 풍습과 전통 몽골의 풍습 중에 적지 않은 부분이 같다고 한다.[15]소사만 설화 등 제주도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설화 중에 거란에서 자주 쓰이던 성씨인 소씨 성의 인물들이 많은 것, 그리고 제주도의 시조 설화인 3을나 설화에서 '을나'란 말이 북방 민족의 언어에서 쓰이던 단어라는 주장[16]을 고려해 볼 때, 제주도가 북방민족과 많이 얽힌 것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5.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선 1402년, 명칭이 제주도가 되었으며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髙鳳禮)가 삼국 시대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며 인부(印符)를 조선 조정에 반납했다.제주도판 판적봉환. 그래서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었고[17] 이로써 그나마 이름만 유지하다가 조선에 완전히 편입되어 전라도 관할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설치, 완전하게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는 행정구역으로 되었다.[18]

탐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탐라국 연표 참조.


[1] 양씨는 후에 良에서 梁으로 바뀜[2] 고조선, 고구려, 가야, 신라의 건국 신화에서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는 반대다.우루과이에서 왔나?[3] 맏이가 누군지에 대해 각각 다르다. 양을나가 맏이로 표기된 사료와 고을나가 맏이로 표기된 사료 둘 다 존재한다. 이는 당시 토착 세력 가운데 고씨와 양씨 두 세력이 탐라의 패권을 두고 경쟁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이 제주 구시가지에 정착해 세운 마을 이름인 일도, 이도, 삼도 너무 대충 지었다 중 일도가 양씨 마을이라 초기에는 양씨가 1위였다고 추정된다. 만년 3인자 부씨[4] 고려사일본국이라 되어 있다.[5] 남북 1000여 리, 동서 수백 리에 항해에 3달이 걸린다는 기록 때문에 섬의 크기나 생김새, 거리상 제주도가 아니라 지금의 대만 섬이라는 떡밥이 있으나, 군선이 대만으로 표류했다면 굳이 백제를 들러 중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또한 대만은 수서에 함께 기록된 유구국(流求國)이라는 설이 대세(다만 유구국에 대해서는 류큐설도 있긴 하다). 물론 가장 기본적으로 백제가 제주도 또한 완전히 영토로 편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만까지 원정을 나가는 뻘짓을 왜 했느냐, 그리고 했다면 관련 기록은 왜 없느냐는 비판 또한 들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수가 바다 동쪽의 여러 섬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로 보인다.[6] 다만 이 문단에서의 탐라국은 아래 기록의 처음으로라는 말 때문에 마한의 잔존세력으로 파악하려는 의견도 있다. 또 이 때는 막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시기였는데 그것을 알아차리고 제주도에서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7] 위에서도 말했지만 출전이 물 건너 중국의 수서기 때문에, 잘 모르고 대충(...) 들은 대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8]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백제) 남쪽에 바다로 3달, 남북으로 1000여 리 동서로 수백 리 기록은 (써 있는 대로 해석한다면) 거리로 보나 크기로 보나 제주도보다는 대만 섬에 가깝기 때문에 대만설도 실제로 있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제주도로 비정.[9] 백제관직이다. 탐라국은 상기했듯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들어오기 전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10] 제주 고씨의 족보에 따르면 처량왕(處良王)이 이 때 왕인데, 후대에 지어진 족보보다는 당대 기록 쪽이 당연히 신빙성이 높다.[11] 즉, 자견왕을 끝으로 최초의 성주는 고말로이다.[12] 칠성통과 그 주변 지역은 탐라 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제주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며 지가 역시 가장 비싼 곳이었다. 허나 제주도청과 시청, 법원 등 주요 기관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신제주와 광양 등지로 중심지가 옮겨가면서 점차 쇠락 중이다. 특히 제주대학병원이 산골아라동으로 이전한 것을 두고 호흡기를 떼 버렸다는 평가도 있다.[13]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들을 가리키는 말[14]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와 제주를 본관으로 하는 일부 성씨는 원나라 출신자가 제주로 이주한 것이다. 대원 양씨, 대원 강씨, 제주 초씨 등.[15] 하지만 정작 제주의 전통적인 지배자였던 성주와 왕자는 고려 조정과 함께 반란 토벌에 참여했다.[16]을나라는 단어의 유래는 부족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라고 파악하는 주장도 있다.[17] 앞서 양씨가 왕자를 세습했다고 적어놨지만 정작 마지막 왕자의 이름은 문충세(文忠世)였다. 오히려 왕자 작위를 세습한 성씨는 문씨가 더 많다. 이렇게 된 사연은 좀 길다. 탐라국은 명목상 고씨 성주가 왕이지만 사실상 서쪽 반만 성주의 영토, 동쪽 반은 양씨 왕자의 영토, 수도는 공동통치였다. 화산재 때문에 농사가 어려운 동부보단 서부가 항상 더 강했지만 성주들은 이에 만족 못하고 외국인 고려에서 과거를 보고 관직까지 얻을 정도로 조정에 협조해서 지원을 받는다. 조정은 덕분에 양씨와 고씨가 분열한 틈에 탐라를 속국화시켰고 고씨 성주는 탐라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얻은 윈윈 전략이었으나 이들에게 부림당하는 탐라인들과 토호들에겐 의문의 2패가 되었다. 그러다 무신정변으로 고려가 막장이 되니 성주는 반발하는 토호들을 찍어누를 수 없게 되었고 왕권유지를 위해서 육지 이주민 가문 문씨와 결혼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더더욱 혼돈 파괴 망각이 된 끝자락쯤 고려의 빽이 완전히 증발한 성주 고적을 왕자 양호가 끌어내리고 성주에 올랐다. 다수의 탐라인들과 성주 양호는 탐라의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삼별초 항쟁을 도왔는데 고씨와 문씨는 자신들 권력을 보장해줄 여·몽 연합군을 지원했다. 삼별초가 패배하면서 이때부터 양씨는 몰락했고 고씨가 다시 성주를 차지하면서 동맹인 문씨에게 왕자의 자리와 왕자의 영토인 섬 동부를 주었다. 그 문씨의 왕자 직위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18]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세습 제도가 한번에 폐지된 건 아니었고 1445년이 되어서야 좌도지관은 상진무(上鎭撫)로, 우도지관은 부진무(副鎭撫)로 명칭이 바뀌면서 비로소 선출 제도가 실시된다. 그 후 1620년경, 상진무는 진무(鎭撫)로, 부진무는 유향(留鄕)으로 개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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