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6-05-30 23:47:00

병인양요/기타

상위항목: 병인양요
1. 의의2. 프랑스 측 관점3. 프랑스가 조선에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4. 영향

1. 의의

교과서에선 단순히 프랑스를 물리쳤다 정도로 서술하고 근대사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아예 거기 쳐들어온 적도 없는 프랑스 육군을 개발살내는 왜곡[1]을 보여주어 그냥 프랑스에게 이겼다 정도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병인양요 항목에서도 보았듯이 프랑스 해군을 대파하거나 하는 사건은 없었으며, 오히려 프랑스 해군의 공격을 받고 문수산성이 함락되면서 처참하게 개발살되고 성내 누각이 모조리 불타버린 등 역시나 피해가 막심했다. 다만 수백명의 병력이 섬멸되고 지휘관 어재연까지 전사한 신미양요와는 달리 병인양요에선 지휘관급의 피해는 없었고 사상자도 수십 단위를 넘지 않은 걸로 보고됐다.

조선군은 확실한 피해 집계는 전해지지 않으나 실제 피해는 막심할것으로 보이며 대략적으로 조선군 10,000명vs 프랑스군 600명의 싸움이었다. 프랑스 해군의 피해는 정확하지 않은데 양헌수는 최소 수병 6명을 죽였고 퇴각하는 프랑스 해군을 구경한 촌민들이 죽은 프랑스 군인들을 40명은 족히 보았다고 증언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로즈 제독은 전사자는 없고 부상자가 30여명이라 보고 했다. 영미권과 일본, 중국 등의 해외 저서들에서도 프랑스측과 비슷한 기록을 하고 있다.

2. 프랑스 측 관점

다만 전투를 치른 프랑스측에서도 이를 자신들의 패배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쥐베르의 글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 의사였던 마르탱이 1883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명백히 병인양요를 "패배"로 규정하고 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2] 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철수를 야반도주라고 불렀으며 장교 이하 병사들이 원통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즈 제독이 철수를 계획한 이유도 정족산성을 점령하려면 최소한 500명의 병력과 1개 포병 중대가 필요한데 현재 수준으론 뚫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공세종말점에 도달해서 더 이상의 작전도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거기에 프랑스가 조선 개항을 관철시키지 못했고 약탈품 외엔 얻은 것이 없으니 결국은 전략적인 패배. 실제 접전에서는 조선을 개발살낼수 있지만 이런다고해서 본인들이 이루려는 목적을 이룰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전반적인 서양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1870년에 일어난 중국의 텐진 교안도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3. 프랑스가 조선에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

그러나 프랑스가 병력의 운용실패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는 주장이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군제국주의 열강의 투톱이었다.[3] 무장이나 훈련도 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여러 식민지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 때문에 실전경험도 무척 많았다. 프랑스가 조선에서 비교적 빨리 물러난 이유는 군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세적인 것으로, 당시 식민지화에 힘을 쓰던 인도차이나 방면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원정대의 주력은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방면 등의 인도차이나에 원정 중이었고,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던 응우옌 왕조의 산발적인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에, 더이상 극동에 신경쓰기 힘들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화는 1880년대야 마무리되며, 프랑스는 베트남, 캄보디아의 저항세력 뿐만 아니라 베트남에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나라와도 전쟁(청불전쟁)을 치러야 했을 정도였다.[4] 마찬가지로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의 미국도 전후복구와 서부개발에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에 신미양요 이후로 딱히 조선에 진출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틈을 타서 조선에 무력도발하여 강제개항에 성공한 것이 일본이며, 이는 일본의 국력이나 군사력이 프랑스나 미국을 앞섰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나 미국이 조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영향

프랑스 측 지휘관 피에르-귀스타브 로즈 제독은, 이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해군소장(contre-admiral:영미의 rear-admiral에 해당)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여 보불전쟁에도 참가했으며, 1875년에는 지중해 분함대(Escadre de la Méditerranée) 사령관을 맡았다. 로즈가 중장으로 승진한 것이나 지중해 분함대의 위상을 따져본다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좌천설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쇄국정책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과 근대화는 더욱 더 멀어졌다. 그리고 약탈해 간 각종 문화재 및 서적들은 서양의 동양 역사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993년 방한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도서관 사서들의 반대[5]를 누르고[6] 반환을 약속하기도 했다.

딱 한 권 정상회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반환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외규장각 도서의 영구대여방식[7]으로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참고로 신미양요 때 미국에 빼앗겼던 어재연 장군기는 '10년 대여' 조건으로 되받아왔다.(현재 강화도에 있으며, 2017년에 대여기간이 끝난다. 빨리가서 보자.)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전리품인 러시아 해군순양함 바리야그 함에서 일본 해군이 노획했다 광복 후 우리 정부에 넘어갔던 해군기 역시 인천광역시가 소유하고 있다가 3년 자동임대 방식으로 러시아에 반환됐다.]으로의 반환이 양국 정상간에 합의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외규장각 도서 전체의 반환에 대한 세부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합의문비준을 눈앞에 두고 후임인 김대중 대통령의 비준거부(프랑스가 약속 엎은게 아니었다! 자세한 전후사정은 한불관계 참조.) 및 협상중단선언으로 외규장각 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때 프랑스측에 협상재개를 요청해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명박 정부가 프랑스와 교섭에 성공해 G20 회의 기간 중 외규장각 서적들을 프랑스로부터 돌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내법상 '반환'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못했으며, '영구 임대' 표현은 프랑스 도서관의 반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 형식으로 사실상 영구히 돌려받게 되었다. 이에 '실리를 택한 것이다', '소유권을 명확하게 우리쪽으로 돌리지 못했다'라는 논쟁이 일었다. 어찌되었든 외규장각 서적들은 10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만약 프랑스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한국전쟁 때 죄다 불태웠을 확률이 높다



[1] 국내에서 제작된 드라마는 죄 실제 침공해 온 프랑스 해군이 아니라 프랑스 육군만 나온다.[2]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3] 나머지 하나는 당연히 영국. 이 당시 세계는 영국과 프랑스가 다 갈라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4] 프랑스군은 보불전쟁 직후라서 사정이 말이 아니었지만, 조선보다 군사력이 월등했던 청나라군을 격파하고 베트남의 종주권을 탈취했다.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에서 물러난 것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5] 골때리는 건 이 당시 사서들 중에는 고문서를 복제해서 원본을 밀반출한 천하의 개쌍놈들도 있었다는 것. 나중에 프랑스 경찰에 체포가 되면서 알려졌는데, 복제하는 과정에서 훼손된 고문서도 많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들이 반대한 이유가 단순히 문화재 보호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범죄행각을 감추려는 목적이 아닌가 의심받기도 했다.[6] 우리는 일반적으로, '외규장각도서 반환 약속 이후에 사서들의 반대가 불거졌고 프랑스 정부가 그것을 빌미로 약속을 엎었다'고 알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름이 한국측 협상단장 등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사서들의 반대는 미테랑 대통령의 반환약속 전에 있었던 일이다.[7] 대여라는 명칭에 피약탈국으로서 아니꼬움이 폭발하지만, 현실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국/일본 등의 다른 국가들과 성사되었던 약탈문화재 환수사례들과 비교해 보면 프랑스 정부가 제시한 '영구대여'는 압도적으로 좋은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