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4:49:43

개연성

1. 개요2. 문학적 개연성3. 유사 개념
3.1. 개념의 혼동
4. 중요성5. 주의점6. 의도된 파괴
6.1. 독자 중점적 파괴6.2. 코미디 장르의 경우6.3. 호러물의 경우6.4. 현실 사정상 발생하는 불가항력적 사태
6.4.1. 외부적인 스토리 변경
6.4.1.1. 웹툰6.4.1.2. 영화
6.4.2. 출연진의 사정
7. 예시
7.1. 갑자기 등장해 사건을 해결하는 키: 데스노트의 예7.2. 장르적, 표현적 맥락에 대한 약속: 도라에몽의 예7.3. 현실성과 개연성의 차이: 복권을 산 남자에 대한 이야기7.4. 갑작스럽지만 강렬한 장면을 위해 치밀하게 짜여진 플롯: 기생충조커의 예7.5. 그 외의 예
8. 개연성이 깨지는 비교적 흔한 예시들9. 오용
9.1. 예시
10. 개연성 밈11. 관련 문서

1. 개요

개연성([1], plausibility[2])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을 말한다.[3] 문학에서는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루는, 문학의 보편성을 가리킨다.[4]

전통적인 논리학에서는,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는 추상적인 가능성을 구체화하여 셀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하여, 이를 '개연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쉽게 말한다면, 그냥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등의 작품의 경우 그냥 현실로 비유 해보면 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아파트 10층 높이를 단신으로 점프를 해서 올라갔다고 하면 현실에서는 절대로 불가능 하지만 작품 내에서 설정에 있는 스킬이거나 주인공한테 초능력이 있어서 가능하다는 설정이 있는 경우 개연성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무런 설정이 없었는데 저럴 경우에는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듣는다.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확률(確率), 또는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확실성(確實性)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문맥에 따라 '확률' 또는 '확실성'으로 해석해도 된다. 핍진성, 사실성이나 당위성과는 구별된다.

2. 문학적 개연성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작중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인과가 들어맞으며 앞뒤가 이어지는지에 대한 것이다. 문장 속에서 A라는 설정이나 원인이 등장했는데 B라는 행동이나 결과가 나오는가를 따지는 말이다. 이러한 인과관계가 짜임새 있게 서술된 글을 '개연성 있는 글'이라고 한다. 흔히 말도 안 되는 인과관계가 등장하는 플롯을 두고 "개연성이 없다"는 평가를 한다. 좀 더 가볍게 말하자면 독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설정이 갑자기 등장하여 이야기의 중요 요소를 차지하는가, 그리고 행동이나 인과관계가 앞뒤가 맞는가 아닌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판타지 작품에서 마왕에게 가족을 잃은 용사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가족의 복수를 하겠다고 칼을 갈던 사람이 갑자기 뜬금없이 마왕의 편에 붙어버린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혹은 용사에게 마왕을 물리칠 수 있는 전설의 검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이 검을 놔두고 노송나무 봉을 들고 마왕과 싸우다가 패해서 죽어버린다. 행동이나 결과의 인과관계가 이상해져 버린 것이다.

작품에서의 개연성은 독자의 시선이 주체가 된다. 작가가 어떻게 상상의 날개를 펼치든 간에, 독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독자의 눈에 비추어지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리 숨겨진 설정을 미리 준비해놨다 하더라도 독자가 이야기를 보던 도중 이 실마리 자체를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면 개연성이 없다고 평론된다.

개연성은 독자와의 약속이며, 암묵적으로 독자들에게 "다음 장면에 이러이러한 장면이 나올 수 있을 겁니다."라며 미리 약속하는 것과도 같다. 장르가 액션물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액션을 보여줘야 하고, 러브스토리라면 끝까지 러브스토리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그런 기분을 구매하러 작품을 관람하기 때문에 개연성은 약속 안에서 독자에게 제공하기로 한 감정을 최대한 제공해야만 한다. 만약 중간의 내용이 부실해 독자들이 감정이입하지 못했다거나, 결말이 사람들이 기대한 방향성이 아니어서 자신이 원하는 감정을 이입하지 못했다면 다음날 평론은 분명 개연성부터 언급하게 될 것이다. 개연성은 작품에 있어서 핵심 주제이며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약속이다.

지금까지 앞에서 설명한 것을 예시로 다시 정리하자면, 두 경우에는 이렇게 개연성이 적용되는 것이다.
  1. 마왕에게 가족을 잃은 용사의 경우, 정말 아무 설명도 없는 상황에서 마왕의 편에 섰다면 개연성이 깨진다. 독자들은 상식적으로 복수귀를 보며 마물들에게 복수하는 장면을 떠올리지, 갑자기 마물 편에 빌붙는 장면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개연성을 챙기고 싶다면, 관련한 부연 설명으로서 "알고보니 진짜 원흉은 따로 있었고 마왕도 피해자였다.", "마왕이 용사에게 마법으로 수작을 부렸다"는 등의 내용을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한다. 물론 이런 설명은 중요한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끝마쳐져 있거나 미리 복선을 던져놓아야 한다. 장면이 이미 지나간 뒤에 뒤늦게 보여줘봤자 독자는 속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2. 전설의 검으로 죽일 수 있는 마왕과 싸우는 용사가 아무 이유 없이 노송나무 봉을 들고 싸우다 죽었다면 개연성이 깨진다. 이 경우 전설의 검을 드는데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다는 등 적절한 이유를 넣는다면 개연성이 깨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냥 평범한 검 놔두고 노송나무 봉을 들었는지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여기에 또 개연성을 위해 추가 설정을 넣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적지라서 보급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챙겨온 모든 무기가 격전으로 망가졌다든지.

캐릭터들의 성격, 성향캐릭터 해석에 한정되었을 경우 캐릭터 붕괴, 줄여서 캐붕이라고 부른다. 입체적 인물이라면 의도적으로 제작 사이드에서 성격에 변화를 줄 수도 있지만, 그 개연성이 부족하거나 너무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면 캐붕 취급을 받게 된다.

시나리오 및 스토리 업계에서는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 때 에니어그램을 주로 쓰는데, 에니어그램이 등장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 개연성있게 예측하고 움직이게 할 수 있고, 이 결과 캐릭터의 성격의 변화가 개연성이 있어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공식에 대입하듯이 성격을 만들게 되어 너무 전형적이 된다는 비판도 많다. 그래서 숙달된 스토리텔러들은 같은 유형의 실존 인물을 바탕에 두고 에니어그램을 참고하여 실존 인물이 실제 삶에서 성장과 퇴보에서 어떤 양상을 보였는지를 살펴보거나, 에니어그램에서도 세부 분류로 들어가면 각 유형별로 아주 세세한 세부 유형들이 있기에 그 세부 유형들을 참고하여 어디서 본 듯한 캐릭터를 피해서 만들기를 권한다.

3. 유사 개념

혼동하거나 착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기본적으로 개연성은 사실성, 현실성과 전혀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

애초에 현실은 온갖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 개연성이 별로 없다. 괜히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5] 가령 에어푸르트 변소 사고는 귀족들이 한 곳에 모여있다가 바닥이 무너져서 똥통에 빠져죽은 아주 말도 안 되는 사건이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인데, 이런 걸 소설로 쓰면 황당하다며 비판받을 게 뻔하다. 다만 후술하듯이 관찰자에 따라 개연성이 달라지므로 실제로는 개연성 있게 벌어진 현실 사건이라 해도 그 이유를 사람들이 잘 모르면 개연성이 없어보인다. 선술한 에어푸르트 변소 사고도 바닥의 나무 판자가 낡고, 바닥 위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하중 때문에 부서졌다는 이유가 있다. 그런 이유가 현대에 와서도 드러나지 않으면 미스터리가 된다.
  • 핍진성: 작품 세계 내의 현실감과 관련된 개념이다. 핍진성은 현실성과 관련이 있으며, 사실성과는 다른 단어이다. 현실성은 예를 들어 좀비라는 존재는 현실에 '실재(實在)'하지는 않지만, 이야기 내에서 좀비에 대한 설정이 일관되게 유지가 된다면 관객들은 좀비를 이야기적 '현실'로써 받아들일 것이다. 즉, 일관적 현실성(핍진성)은 이야기 전체적으로 설정이 일관되게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 사실성(事實性, Actuality): 사실성은 현실에서 벌어진 일들이 작품에 반영된 정도를 뜻한다.
    한편 현실성(Realistic)은 현실에 벌어진 일은 아니어도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일인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즉, 현실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이므로) 사실적이지는 않으나 현실적일 수는 있다.
    종종 현실성(Realistic, 리얼리스틱)과 혼용(내용 일부)되는 경우가 있다. 현실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를 뜻하고, 사실은 실제로 일어났거나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을 가리키는데, 이는 일반 대중들이 사실과 현실이라는 단어를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단어를 혼용하는 것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아예 둘 모두를 뜻하는 것을 Reality(리얼리티)라고 쓰기도 한다.
    창작물의 반영 오류(구 고증오류)는 현실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현실성과 사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이를 구별하기 위한 좋은 예시로 아래의 이미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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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짤만으로 이해가 안된다면 이렇게 구분해보자. 현실성과 핍진성, 개연성은 각각의 주체가 다르다. 현실성은 물리학에 중점을 둔다. 핍진성은 그 세계의 물리학에 중점을 둔다. 개연성은 그 세계의 인물들과 규칙 등, 인과관계에 중점을 둔다.
  • 현실에선 현실성을 무시할 순 없어도 개연성이 무시될 수 있다. 다윈상은 멍청한 유전자를 스스로 제거하여 인류 진화에 기여한 공로한 상인데 실제로 해당 내용을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방식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다. 개연성이 없는 방식으로 사망했으나 현실성엔 문제가 없다.
  • 가상의 세계에선 현실성이 무시될 수 있어도 그 세계의 물리법칙을 무시할 수 없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머글이 마법을 부릴 순 없고, 원피스같이 신체 자체가 어지간한 흉기에도 쉽게 죽지 않고, 부상을 입어도 회복이 쉬운 세계에서 고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한다면 현실성이나 개연성에 문제가 있다 보긴 힘들지만 핍진성엔 문제가 있다.
  • 배경이 가상의 세계든 현실의 세계든 거기에 소개된 등장 인물이 법을 어기거나 규칙을 어길 수 있다. 그러나 빌런의 목숨까지 동정할만큼 선한 마음을 가진 히어로가 도시 안에서 빌런과 전투를 하면서 정작 자기가 지켜야 할 도시가 파괴될 걸 걱정하지 않고 필살기를 남발해서는 안된다. 물리적으로 말은 되기 때문에 현실성, 핍진성에 문제가 있다 말하기 힘들지만 개연성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핍진성과 개연성 모두 작가가 설정하는 것이므로, 두 개념 모두 아우러서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이론이 바로 장폴 사르트르의 '소설적 자유'다.

그렇기에 개연성은 설명하는 방법과 인과에 더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세계가 전제하는 설정 안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며 앞뒤가 맞기 때문에' 납득이 되는 묘사라면 개연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전달할 때에도 추후에 일어날 일을 설명하기 위해 그 일이 전제될만한 설명을 충실히 묘사해 주거나 인과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개연성은 단순히 작품 내에서의 논리를 따지지 않는다. 작품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따진다. 앞뒤 이야기가 맞고 나름대로 흥미로울법한 구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재미없는 작품이 존재한다거나, 비사실적인 묘사로 가득 차 있지만 재미있는 작품이 존재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독자가 아닌 작가의 입장에서 따진 경우고, 후자는 독자들의 시선에서의 논리를 따진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작가가 창작을 할 때 개연성을 너무 공들여 신경 쓸 필요 없이 독자의 눈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논리를 맞추면 되겠다. 하지만 큰 줄기에서까지 개연성의 법칙을 간과한다면 깊이를 내기 힘들어 독자들에게 혼란이 오고 이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작가 스스로 만들어 둔 큰 줄기 상의 개연성이 무엇인지 신경 쓸 필요는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앞뒤가 다소 맞지 않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스토리텔링 기법에 전제하여 논리의 중요성을 감추면 작품의 질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흔히 클리셰라 부르는 것들은 이러한 기법이 수도 없이 노출된 것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너무 남발하면 진부함만큼은 감추기 힘들 것이다. 이 때문에 각종 창작물에서는 비사실적인 일들이 많이 나오지만, 작가의 설명과 독자들의 이입을 방해하지 않는 개연성이 충분하다면, 기본적으로 독자들이 수긍을 한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현실 반영을 열심히 고려하면서 창작하다 보면 분명히 창작에 도움이 된다. 스토리가 그만큼 풍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연성'이라는 말을 '그럴 듯하다, 있을 법하다'라고 핍진성과 유사한 것으로 풀이하면 현실 반영이 섬세할수록 현실성과 개연성이 크게 증가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현실 반영이 작품의 질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의 부피를 너무 늘리지 않는 선 안에서만 그리한다. 다시 말해 스토리 라인에서의 현실 반영은 스토리 라인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만 한해서 작품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뜻. 충분한 개연성을 담보할 수 있으면 현실 반영이 없어도 작품의 질은 우수할 수 있다. 반대로 스토리 라인에 직접 영향이 없음에도 현실 반영에만 집착하거나 현실 반영이 오히려 스토리의 개연성을 저해하면 현실이 잘 반영되었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설정과 개연성은 분명히 다르다. 설정은 세계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법칙이다, 현실의 물리법칙같은 것으로 절대 변하지 않는다. 개연성은 할 법한 행동을 하지 않거나 할 리 없는 행동을 한다는, 어색함과 위화감 정도의 수준이다. 절대 법칙 수준까지는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현실 사회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어떤 선한 등장인물이 갑자기 헤까닥 맛이 가서 밑도끝도 없이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자. 이는 개연성 측면에서는 정말 어이없는 수준의 결점이다. 그러나 사람이 갑자기 성격이 변하는 것이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설정 오류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설정이 어긋난 경우는 문학적 핍진성에 더 가깝다.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설정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으로, 설정에 오류가 발생하면 반드시 개연성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설정 오류를 별것 아닌 경우로 치부하는 경우 대부분이 창작물이니 허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데, 반박하는 쪽의 입장에서는 사실 허구성이나 오류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설정 오류로 인해 발생한 개연성과 핍진성의 하락을 지적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로간의 의사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이다.

아래에는 유사개념 사례가 여럿 포함되어 있는 삼국지 관련 야사 중 하나이다.
삼국시대에 관우의 부하인 주창은 적토마를 타고 다니는 관우를 항상 보좌하면서 그가 필요할 때마다 청룡언월도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주창은 평소에 천리를 간다는 명마 적토마와 같은 속도로 달리기를 할 수 있었고 이 능력으로 관우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관우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이유를 묻자 주창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 발등에는 비모(飛毛)라 하는 털이 한가닥 있는데 이것 때문에 적토마와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관우가 비모를 뽑으라고 명령하자 주창은 망설이다가 털을 스스로 뽑아버렸으며 이후 빠르게 달리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현실성, 핍진성, 개연성을 따지자면 아래와 같이 된다.
  • 현실성: "사람이 말과 같은 속도로 달린다"라는 소재는 현실적이지 않다. 다만 세간의 민담에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워낙에 많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 사람들은 크게 반감을 갖지는 않는다. 세상에 대한 사회/과학적 상식 수준이 낮았던 과거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도 비현실적인 을 즐겨 듣거나 더 나아가 신봉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 핍진성: "비모가 있으면 빨리 달릴 수 있다"라는 (현실성은 떨어지는) 설정이 있고, "비모가 있으면 빨리 달린다고 했는데 비모가 없어지자 보통 사람과 같은 속도를 갖게 되었다"라고 설정에 따라 전개가 이루어져 핍진성이 지켜졌다.
  • 개연성: 이 설화는 이 부분에서 다소 이상하다. 관우가 비모를 뽑으라고 하는 것은 자기 부하를 약하게 만드는 일인데, 일반적인 상황에서 상관이 부하의 편리한 능력을 없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상관으로서 부하가 상관을 능가하는 것이 두려웠다든지 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으나, 이 가능성 역시 "주변에 감히 대적할 자가 없는 성향"이라는 관우라는 인물 캐릭터 해석을 감안하면 개연성이 떨어진다.
    옛날 사람들도 이 부분이 이상하다는 것은 느꼈는지 적의 계략에 걸려서 비모를 잃는 것으로 수정된 판도 있다. 뜬금없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부하의 능력을 없애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강대한 능력을 가진 적의 능력을 없애려고 계략을 쓰는 것은 말이 되기 때문. 아니면 관우 대신에 원래부터 말도 안 되는 짓을 많이 하는 성격의 인물을 배치하면 '그 사람이니까 그럴 만하다'라고 납득할 수 있다. 예컨대 관우의 부하가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동료들과 병사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가 관우에게 오히려 혼이 난다면 아랫 사람에게 관대한 관우의 캐릭터성과 어긋나므로 개연성 문제지만 상관이 관우가 아니라 여포였다면 말이 되는 식이다. 아래 개연성 밈 문단에서 소개하는 "캐릭터 존재 자체가 개연성"인 것 중에는 이러한 케이스도 있다. 다만 그런 전개는 이 짧은 일화 하나만으로는 성립하기 어렵고 캐릭터를 설명할 더 많은 이야기가 앞에 더 있어줘야 한다.

3.1. 개념의 혼동

이런 개념의 혼동이 있다보니 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데도 일부 작가들이 문제 의식이 없거나 혹은 그 작품을 선호하는 팬들로부터 쉴드를 받을 때 개연성이나 다른 문제로 인해 몰입을 방해하는 걸 핍진성, 현실성이나 설정 개념을 끌고와서 억지로 쉴드를 칠 때가 있다. 이 경우 왜 독자들이 괴리감을 느끼고 불편함을 느끼는지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개연성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고민하지 않은 케이스다. 즉 개연성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가 있는데 개연성이 있다고 우기거나 반대로 개연성이 없는 걸 다른 문제를 가져와서 억지로 옹호하려는 것. 예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개연성과 현실성
    Q: 작품 내내 주인공과 척을 지던 인물인데 아무런 사건도 없이 갑자기 아군으로 전향하는 게 말이 되느냐?

    A: 현실에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뾰족한 귀를 가진 종족도 없다. 이건 말이 되고 적이 갑자기 아군이 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현실성을 따진다면 전자에 대해 이미 따졌어야 하는 거 아니냐.

    현실성과 개연성을 구분하지 못한 대표적인 오류이다. 마법이나 초능력 등이 나오는 건 작품에서 이미 독자들이 그런 게 있다고 합의한 부분이고 적이 갑자기 아군이 된다거나 하는 건 억지로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 인과관계도 없는 사건을 부여한 것인데 전자에 합의했다고 후자에도 합의했으리라 잘못 생각한 것이다. 당연히 비현실적인 판타지, 초능력이 난무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라도 스토리를 지닌 작품으로서 기본적인 개연성은 갖추어야 한다. 애초에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가 비현실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미만 있으면 비현실적 요소도 매우 쉽게 받아들인다. 개연성의 정도는 장르마다 약간은 다르다. 어떤 장르는 개연성을 좀 덜 지켜도 되는 편이고 어떤 장르는 개연성에 엄격하다. 여하간 그 정도성이란 게 현실성의 정도와는 무관하다. 또한 이러한 오류들을 지적하는 것은 감상하는 입장에서 작품에 몰입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일종의 의사표현이다. 인과관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창작물이라는 이유로 모두 넘어가줄 수는 없는 것이다.
  • 슈퍼맨의 예: 주인공이 '외계인 초능력자' 라는 설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 이것은 슈퍼맨의 기본적인 설정이며, 모두가 슈퍼맨은 외계에서 온 초능력자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런 전제가 존재하는 이상, 슈퍼맨이 손가락 하나로 트럭을 묵사발 만들어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슈퍼맨이 아침에 출근하다가 자동차와 정면으로 충돌해서 교통사고로 전치 5주의 부상을 입는 장면이 나왔다고 생각해 보자.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장기 치료가 필요할 만한 부상을 입는 것 자체는 현실의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현실적이지 못하다'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트럭을 묵사발낸다는 설정의 인물이 고작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었다면 그 전까지는 어떻게 트럭을 부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설정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작품의 기본 설정이 어긋났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더 이상 슈퍼맨 이야기에 몰입할 수가 없다. 왜 슈퍼맨이 부상을 입을 수 밖에 없었는지 추가적인 설명이 더 나오지 않는다면,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된다.
    이후 이런류의 비판을 여러 제작자들이 의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사실 ON/OFF스위치로 슈퍼맨의 몸 상태와 평범한 일반인의 몸 상태를 왔다갔다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설정을 추가하는 관례가 생겼다. 이런 관례도 전술한 엄청난 비판이 있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다른 예: 인기 작품들을 예시로 들면 '원피스의 아카이누가 마그마가 불보다 상위에 있다고 하는데 억지 아니냐?', '드래곤볼에서 초사이어인까지 된 손오공이 총에 부상을 입는 게 말이 되느냐', '스타워즈 오리지널 삼부작에서 굉장히 정의롭게 묘사된 루크가 왜 스타워즈 시퀄 삼부작 중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술에 쩔어있는 귀차니즘 쩌는 할아버지가 된거냐' 등등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 '그래서 악마의 열매가 현실에 존재하느냐?', '사람이 날아다니고 별을 부수는 건 말이 되는가?', '우주선이 나오고 외계인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그런 걸 따지느냐?'는 식으로 반박하는 것 역시 지적한 사람은 개연성을 지적한 것인데 반박한 사람은 "현실성이 없으니까 괜찮다"라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오류로 볼 수도 있지만 제작진이 일부러 복선이나 떡밥으로 이런 것들을 집어넣기도 한다. 다만 이런 것들은 뒤에서라도 반드시 떡밥 회수를 해야 한다.
  • 개연성과 핍진성
    Q: 이 기술은 성공 확률이 10% 미만이라면서 주인공이 300번을 넘게 시도했는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성공 확률이 10%가 맞는가?

    A: 확률이 매우 낮을 뿐이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기술에 실패하다 죽어버리면 작품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쪽은 개연성보다 핍진성을 해친 경우이다. 이런 식으로 주인공이나 특정 인물에게만 연속해서 좋은 일만 일어나거나 연속해서 낮은 확률이 일어나는 등의 사건은 주인공 보정, 극의 흥미를 위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확률이 매우 낮다는 작품 내의 규칙을 전달했으면서도 연속해서 성공하니까 보는 사람들로서는 해당 세계의 규칙이 그저 선언만 됐을 뿐 작품 전개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 현실감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 차라리 처음부터 확률을 너무 낮게 설정하지 않는 게 나았을 것이다. 핍진성을 잃어버린 사례를 개연성이 있다고 주장한 케이스다.
  • 유사 예: 몇억분의 1의 확률로 아주 지극히 낮은 확률로 나타나는 초능력자가 작품 내에서 너무 많은 숫자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확률의 문제일 뿐이므로 개연성을 심각하게 해친다곤 볼 수 없지만 설정을 무리하게 짰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용자왕 가오가이거파이널 퓨전은 성공률이 1%도 안 되는 굉장히 위험한 기술이라 장관 승인이 필요할 정도의 기술인데 작중 매번 파이널 퓨전을 시도하고 승인하는데다 그걸 승인하는 장관조차 아무런 위기감 없이 승인을 내린다... 이쯤되면 확률이 너무 낮다는 설정을 괜히 넣어놔서 저런 위험한 짓을 고민도 없이 승인해버리는 장관이 이상하게 느껴지므로 핍진성을 해친 경우이다.
  • 개연성과 설정 오류
    Q: 예전에 이 장소에는 선량한 사람이 아니면 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명백히 악인인 A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진입한건가?

    A: 그 규칙은 굉장히 예전에 나온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면 규칙이 바뀔 수도 있다.

    이것은 설정 오류가 반드시 개연성 파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설정이란 건 결국 작가가 짜는 것이므로 "설정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다른 설정이 있을 것이다" 등으로 무마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변명할 거였으면 중간에 규칙이 바뀌었다고 말을 하거나 처음부터 이 규칙은 절대적이란 건 아니란 식으로 밑밥을 깔아뒀어야지 나중에야 그렇게 말하면 욕을 먹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아니면 그 설정을 점점 언급하지 않으면서 독자가 까먹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반대로 이런 설정 오류를 영리하게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 적극 권장되기도 하는데 이 절대적 규칙이 깨짐으로 인해 반전이 일어나 흥미를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옴니버스나 에피소드같은 시리즈물의 경우 아주 맨 처음부터 이러한 일이 생겨버리고 이 규칙이 깨지는 거대한 사건을 중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위에서 나온 예시인 선량한 사람이 올 수 없는 장소에 명백한 악인이 A가 들어오는 사건 자체가 시리즈 이야기의 처음에 발생한다 생각해 보자. 그러면 등장인물들은 왜 그런일이 발생했는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 이고, 이 문제가 일어난 이유와 이곳에 들어온 악인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주인공들 이야기에 집중해서 귀 기울일 것이다. 즉, 규칙을 파괴할 땐 등장인물들 역시 그 절대적 규칙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이야기의 핵심 매력이 된다면 괜찮다는 것이고, 파괴함으로서 생기는 중대함을 고려해 내러티브를 만들고 다루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 닥터후 시리즈의 예: 닥터후 시리즈에서 닥터의 입으로 타임로드 종족은 모두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타임로드 종족은 모두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의 전쟁에 빠져 타락할 대로 타락한 악의 세력이 되어 닥터 스스로 타임로드 종족이 죽었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모든 팬들이 납득할만한 전개도 아닐테거니와, 시리즈의 상영 기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설정변화로부터 생기는 모순과 개연성이 파괴되는 부분들을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상업물로서는 나쁘지 않은 에피소드로서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이 덕에 카닥에서 그 유명한 "heaven Sent"에피소드가 탄생할 수 있었다. 특정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규칙을 함부로 파괴하지 말라는 이야기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작품 안에서 해당 규칙이 중요하면 중요할 수록 왜 깨지는지를 반드시 보여줘야만 하지 작가가 트위터 등으로 대충 설정구멍을 떼워버리거나 독자들이 자신의 추론으로 이야기 사이를 채워넣게 만들어 놓고선 이해가 가지않아 의문을 제기하는 팬들에게 닐 드럭만처럼 되려 가르치려 들면서 팬들을 생각없는 사람들로 치부해버리고 입을 막아버리는 행위는 이미 망한 작품을 더 망치는 상황이나 다름없다.

4. 중요성

독자, 시청자, 관객처럼 작품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은 작품을 보면서 추론, 공감한다. 사람들은 작품을 볼 때 이야,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이런 걸 이렇게 해볼 텐데. 어? 내 생각이 그대로 나오네. 공감되네 혹은 이야,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일이 진행이 되지? 놀랍고, 갑작스럽긴 해도 설명이 딱딱 들어맞잖아? 난 왜 이런 추론을 하지 못한 거지? 재밌다!!라는 생각을 곧 잘 한다. 그러한 마음을 속 시원하게 잘 긁어주면 개연성이 높은 작품, 그러한 마음을 작품이 방해하면 개연성이 망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내러티브(narrative, 서술 혹은 서사)'의 주된 정의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도 개연성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주된 요소 중에 하나인데, 이런 개연성을 효과적으로 확립시키기 위해선 복선이나 떡밥이 중요하다. "술 마시고 운전하다가 결국 일을 내버렸다."라는 전개를 예로 들자면, "술 마시고 운전하다가"라는 행동들이 훗날 일을 내는 복선으로 작용되어 결국 일을 내고야 마는 것이고, 이를 통해 이 전개의 개연성은 확립이 되는 것이다.

중등교육과정에서 다루는 바와 같이 개연성 있는 전개는 근대 문학의 상징과도 같다. 흔히 고전 문학의 특징으로 우연성을 자주 드는데, 이는 개연성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구성했음을 의미한다. 기사. 현실도 우연적이기는 매한가지이지만, 근대 문학에서는 이를 얼마나 '말이 되게'(개연성 있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하다.

주인공 및 주변 인물들의 내면 묘사도 중요하다. 이 심리 상태 묘사도 작가필력이 떨어지면 내용이 지루해지고, 독자들에게는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이 생각만 하느라 전개를 질질 끌어 웹소설이나 웹툰이라면 페이지에 쓴 돈이 아까울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내면 묘사는 개연성과 인물의 특징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하게 한다.

아크플롯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인과성에 맞춰서 사건을 선택하고 배열해야 한다. 동기가 부여되어 있는 하나의 행동이 어떤 극적인 효과를 유발시키고, 이렇게 유발된 효과가 또다른 효과의 원인이 된다. 이처럼 인과관계로 연결된 사건들 간의 연쇄 작용을 통해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도록 주도하는 것이 인과성이다. 아크플롯에서는 이야기의 작은 부분부터 거대한 요소까지 모두가 하나의 인과적 사슬로 연결되어, 제대로 파악할 경우 인물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과성의 네트워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야 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매체에서는 인식 때문에 일반 매체보다 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식의 무성의함이 은근히 보인다. 예를 들어 어린이 영화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전개가 많다. 주시청자층인 어린이들이 그러한 점을 잘 집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무성의해 보이는가도 중요한데, 권선징악이나 성선설을 기반으로 희망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함에도 등장인물들이 전반적으로 다소 지나치게 선량하게 그려지는 건 어른들 입장에선 황당하고 어이없다고 받아들여지기는 좋아도 무성의하다고 해석하지 않는다. 아이들 작품에서도 인기있는 작품들은 보통 주제가 보편적이고 1차원적이더라도 메세지 전달에 충실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반공 영화나 반공 드라마가 자주 만들어지던 시절에는 교훈과 정의를 중요시하는 당시 검열이나 심의 덕에 전혀 개연성이 없이 내용이 진행되는 영화나 드라마가 많았다.

성인물에서는 목적부터가 성적 판타지 욕망 추구라는 특성상 개연성 없이 작품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완성도나 재미조차 무시한 채 과도한 서비스신과 성적 코드를 이용해서 화제를 사려고 하는 작품이 많은데 사람들이 이를 뽕빨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성인물도 개연성이 있는 게 작품성이 더 좋다보니 성공하기도 한다. 한국의 성인 웹툰은 한국 특유의 성적 억압에 따른 규제와 개연성을 중시하는 한국 서브컬처의 경향이 합쳐져 일본 상업지에 비해 비교적 스토리를 중시한 것이 해외에서도 먹혀서 그런지 2020년대 들어 Manhwa에서 따온 Pornhwa(폰화)라고 불리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도 한다. 어반 딕셔너리(번역, 번역 2)

아무리 상영시간을 줄이거나, 검열을 했거나, 쓸데없이 늘어진 부분이 있거나, 흥행 때문에 촬영분을 잘라낼 수 밖에 없다지만 감독판이나 확장판의 늘어난 분량을 보면 생략된 몇몇 자잘한 장면을 살린 것을 넘어서서 몇 장면이 캐릭터의 개성을 살리거나, 훗날 복선떡밥이 될 만한 것까지 있어서 이것이 상영판에 있어야 개연성이 있다며 팬들이 쓴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런 것은 보통 영화 오리지널이 아닌 원작이 따로 있는 것을 영상화한 것에 많다. 물론 미디어 믹스화마저도 거부하는 극렬 원작주의자 정도는 아니더라도 원작을 중시하는 팬들은 개연성이 있냐 없냐 정도가 아닌 늘어지는 내용이더라도 원작에 그 내용이 있으면 추가하면 좋다는 의견을 내기도 하고, 감독이 팬인 경우를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원작을 베껴낸 듯한 영화는 평론가에게 개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고, 루즈한 장면 등 때문에 팬이 아닌 일반 관객도 반응이 좋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영화의 감독판은 아니더라도 소설(웹소설) 원작 만화(웹툰)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웹소설 원작 웹툰의 경우 보통 웹소설 2~3화(글자수 10000자~15000자)를 웹툰 1화(5000자) 정도로 압축하다 보니 복선떡밥을 삭제해 버려 나중에 떡밥 회수를 하는 부분에서 웹소설과 달리 웹툰의 경우에는 뜬금없어 보여 소설을 먼저 본 독자들에게 원작과 다르다는 비판을 듣는 경우가 있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설정을 현실적으로 짜고 사건의 개연성을 갖추면 운이 좋은 경우 현실을 예견한 작품이 되어 뜻밖의 높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5. 주의점

소설 뿐만 아니라 만화영화를 비롯, 스토리 등의 서사를 다루는 그 어떤 창작물에서도 개연성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고, 또 보다 높게 평가받는다. 문학 뿐만 아니라 다른 법학이나 의학(병리학이 특히 그렇다) 등 기타 다른 분야에서도 개연성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개연성은 그 자체로 논리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개연성은 곧 논리와 직결되는 것이기에, 그 논리적인 부분의 차이가 차원이 다른 몰입감과 감정이입 등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개연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감이 있다. 이른바 떡밥 회수라는 것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떡밥을 잘 뿌려서 잘 회수하면 스토리에 대한 평이 좋아지고, 반대로 떡밥을 잘 안 뿌리거나 떡밥을 많이 뿌려놓고 회수를 못하면 평가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실 떡밥이나 복선 회수 안한, 또는 개연성이 맞지 않는 작품을 졸작으로 판정하는 문서가 많은 이 나무위키 포함 한국 서브컬처 팬덤 전반이 떡밥 회수나 복선이 드러나는 것, 개연성이 맞는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강하며 사이다가 유행하게 되면서 이 성향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창작자가 여러 해석을 열어두기 위해서 은유나 상징으로 한 연출이나 문장을 보고 "떡밥이네" 하고 단정지어서 생각했다가 나중에 구체적인 설명이 안 나오면 "떡밥 회수를 안 했다."라고 항의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또한, 영상 매체 같은 경우에는 스토리가 글과 글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출과 이미지, 음향으로 설명되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단순히 대사로만 따라가다 개연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경우는 일반적인 관객일 경우에 2회차, 3회차를 거듭하면서 해소되곤 한다.

떡밥복선을 미리 제공해 지속적으로 개연성을 확보했더라도 연출을 못하면 떡밥 및 복선이 다른 전개 쪽으로 오해하기 쉬워져 본래 정한 전개대로 갔을 때 개연성이 없어 보일 수가 있다.

재미가 있다면 개연성을 조금 희생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창작물을 더욱 즐기기 위해 개연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때그때의 연출과 전개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을 무시하고 작중에 표현된 바가 개연성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작품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때문에 작품성은 좋은데 개연성 오류가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상황이 많다. 설정에 무리가 있는 부분이 생기더라도 독자들이 크게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상관이 없는데도 무리하게 파고들어 개연성 오류라고 지나치게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나 연재 중인 작품에서 중간중간 예상할 수 없는 전개마다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개연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작품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무조건 개연성이 없다라는 말을 오남용하는 것의 영향이다. 엄밀히 말해서 떡밥(복선을 포함한다)이 미리 투척되는 것은 개연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추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원인이 설정되어 있고, 그 원인이 나중에 드러난다면 그 사건은 완벽하게 인과적이고 개연적인 사건이다. 단지 독자가 예상할 수 있게 미리 그 원인을 '보여주지' 않았을 뿐, 작중에서 그러한 사건은 이미 일어난 것이다. 작중에서 주인공이 화장실에 가는 장면이 묘사되지 않았다고 해서 생리적 현상을 처리하지 않았으니 개연성이 없다고 하지 않듯이 말이다. 다만 흔치는 않아도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이런 게 나오지 않았냐면서 해당 작품의 개연성이 없다고 일부러 잘못 지적하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화장실에 들어온 이후의 행적이 공백으로 남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여 예상치 못했던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수단을 써서 반전을 만드는 식 등의 서술 트릭을 쓰기가 쉽다. 정말 개연성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큰 것은 미리 떡밥이 제공되지 않았을 때가 아니라 뿌려진 떡밥이 회수되지 않은 경우이다.

떡밥이 미리 제공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문제점은 순수하게 작품 자체의 논리적, 과학적인 차원의 개연성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독자의 감성 및 본능, 그리고 장르의 관습 때문이다. 진화론적, 뇌과학적으로 인간은 이야기, 서사에 대해 특정한 본능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것을 인과적으로 예측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미리 원인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것은 미리 예측을 하여 급격한 변화와 충격을 감소시키려는 인간의 본능과도 연관된다. 게다가 오랜 세월 축적된 장르적 관습으로 인해 특정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있다. 현대의 창작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할리우드의 영화이고, 할리우드 영화에는 많건 적건 미스터리 장르의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만화, 소설 등 여러 매체에서는 미스터리적 요소가 많이 개입되어 있고, 미스터리 장르의 특성상 미리 단서를 주고 감상자가 능동적으로 짐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가 미리 전개를 예측할 수 있는 떡밥을 제공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떡밥에 의한 예측은 논리적인 경우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꼭 본격추리소설 수준의 장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대부분의 스릴러 영화는 영화의 특성상 완전한 추리가 불가능하다. 단지 약간의 느낌을 미리 가질 뿐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추리소설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조차도 완전히 미리 추리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는 논리와 별개의 관습이나 창작물 자체의 한계에 의한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범죄물에서 너무 범인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초반부터 나오거나, 로맨스물에서 초반에 이미 누군가와 결혼을 하려는 여주인공이 비춰진다면, 그 상대방은 범인/남주인공이 아닐 것이라고 누구나 짐작하게 된다. 관습적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고, 또 그게 정답이라면 이미 시작하자마자 끝난 이야기라서 이야기로서 팔아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창작자의 특정한 의도가 있다면 이런 법칙마저 깨뜨릴 수 있다.

어쨌든 이런 태도는 지양하는 것이 좋다. 개연성과 떡밥이란 것은 작품 전체를 놓고 판단할 문제기 때문이다. 추리하길 좋아하는 복선덕후, 설정덕후들이야 사전에 설명이 무조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사후 설명만으로도 작품의 개연성은 충분히 챙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용사를 보필하던 충신이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리고 난 후 본색을 드러내 새로운 마왕이 되고자 한다는 줄거리의 작품이 있다고 하자.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리기 전에 복선이나 설정을 깔아놓지 않더라도 이 충신이 왜 용사를 도왔는지, 이제까지 자신의 정체를 꽁꽁 숨긴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숨겼는지 등 설명을 차후에 충분히 하면 개연성을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배신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할 독자들에게 사후 설명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작품의 완결성 내에서 설명이 제대로 된다면 작품의 개연성은 깨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순차적으로 서술이 되어있지 않다 하여 개연성에 대한 시비를 남발하는 것은 옳지 못한 자세다. 개연성에 대해 진지하게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다면 작품이 완결된 후 논하자. 그 이전에는 지나친 반전으로 몰입도가 떨어진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6. 의도된 파괴

위에서 보듯 설정을 너무 꽉 짜여지게 짜면 개연성 있는 전개의 가짓수가 매우 적어지기 때문에 스토리 진행의 유연성을 위해 일부러 설정을 헐겁게 짜놓곤 한다. 또한 이미 짜여진 설정 역시 무시해도 큰 문제가 없도록 가끔씩 개연성을 파괴하기도 한다.

장르문학이 대개 그렇듯 장르의 경계선을 정하기란 어렵지만, 대체로 후술할 공포물이면서도 코미디 성향이 강한 작품들은 코미디 공포물이라고 한다. 특히 둘 다 개연성과 명확한 결말이 없어도 되는 장르라서 '호러와 코미디는 사실 종이 한 장 차이다.' 라는 말도 있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공포물을 개그로 느끼고 웃음을 터뜨린다거나, 블랙 코미디를 보고 공포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추구하는 분위기 외에는 공통점이 많기도 하다. 두 장르를 동시에 번갈아 만드는 창작자도 꽤 많다.

이외에도 아방가르드 예술(전위예술)은 개연성과 핍진성을 그냥 대놓고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6.1. 독자 중점적 파괴

독자 시점에서 개연성이 충분히 확보 되면 나머지 정보들은 불필요해지는 상황이 생긴다. 이 때는 당연해 보이더라도 과감하게 가지치기 해야만 독자들이 몰입할 수 있게된다.

가령 게임 더 워킹 데드 시즌 1에선 리와 클레멘타인의 인연을 보여주는데 이후 후속작에서 클레멘타인이 리를 그리워하는 묘사가 종종 드러난다. 하지만 엄격하게 생각해 보자면 아무리 리와 인연이 길다 해도 1에서 클레멘타인이 보여 줬던 것 처럼 부모님을 더 그리워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신경쓰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묘사를 리 이상으로 하는 건 쓸모없는 정보를 독자에게 주는 셈이 되버린다. 독자가 기억하는 건 리 에버랫이다. 작가 내면의 세계에서 클렘이 여전히 부모님을 그리워 하더라도 독자들에게 부모님 정보가 거의 주어지지 않은 이상 리 이상으로 회상하는 연출을 해선 안된다.

또한 좋은 예로 영화 리뷰어 라이너는 영화 극한직업 평론 당시 "왜 이무배 일당은 마봉팔을 붙잡고도 핸드폰을 부숴버리지 않았나" 하는 부분에 개연성이 박살나는 장면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무배의 부하 홍상필이 애초부터 마봉팔을 역 이용해 추적에 혼선을 주려 했었기 때문에 핸드폰을 부수거나 말거나 애초부터 별 상관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아무리 정보들을 나열하고 길게 이야기 하고 풀어 설명하더라도 어쨌든 범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범죄 조직이 경찰의 핸드폰을 처분하지 않는 게 말이나 되냐란 지적 자체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무엇보다 이런 장면에서 몰입이 깨지는 관객들도 있을 수도 있고, 이들을 무시하란 얘기도 절대 아니다. 다만 중요한 건, 이러나 저러나 해도 극에서 크게 중요한 개연성은 결코 아니란 얘기다.

보통 소설적 자유를 집요하게 챙길 수록, 그만큼 제작 시간과 더불어 작품 자체가 지루해지기 쉬워진다. 개연성과 소설적 자유는 몰입을 위해 지켜야만 하는 다리의 기둥과도 같다면, 작품에 대한 몰입은 다리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 일단 안전하게 통과를 할 수 있는 다리를 만들었다면 다음 요소들을 챙기는 것이 낫지 빈틈없이 다리 기둥을 박는다고 이미 안전한 다리가 더 안전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기둥을 달아도 기둥이 없어서 불안해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들을 무시해서 안된단 얘기를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대상의 소비자가 내 작품 안에 들어와 있느냐와 혼동해선 안된다. 최 우선 고려사항은 내 작품을 보여 줄 소비자가 몰입할 수 있느냐다. 소설적 자유는 필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몰입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렇기에 이미 대다수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이 놓치거나 버린 개연성을 이미 알고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대다수 이런 디테일이 담긴 컷 들은 삭제씬 등에서 이미 촬영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쏘우10 에서도 존 크레이머가 눈빛만으로 자신에게 사기친 의사가 택시기사와 동일인물임을 알아채는 장면이 있는데, 본편에선 삭제된 씬에선 존이 택시기사를 납치해 의사 마스크를 억지로 씌워 눈빛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진행방식은 직쏘의 성격을 제대로 보여주는 본편이 더 매끄럽다. 이렇듯 설명하기엔 중요도가 낮은 정보가 기존의 개연성 만으로도 추측이 여러방면으로 어느정도 가능해지거나 그냥 생략해도 큰 무리 없다 판단되어 빼버리는 경우 역시 독자적 관점에서의 개연성 파괴에 속한다.

현대에는 거의 사장된 독자 시점의 개연성 파괴 연출방식도 있는데, 그건 바로 제4의 벽을 깨고 정보를 알게 되는 인물들이다. 독자 시점으로만 알 수 있는 정보까지 어느새 다 꿰차고 있는 조연들을 본 적 있을 것 이다. 주로 비중이 다소 낮은 조연들에게 보이는 특징이며, 이런 기법이 주로 쓰여 온 이유는 극 중 해당 인물이 그 일을 알게되는 장면까지 굳이 필요 없는 경우 그 설명의 속도를 줄이고 극의 에너지에 더 집중하기 위함이였다. 그러나 그 조연이 절대로 알 수가 없는 정보들 까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경우까지 생겨 몰입을 방해하는 경우까지 생기는데, 이 역시 중추적인 개연성 상 해당 조연이 알아선 절대 안되는 정보인 경우가 많아서 이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자면, 가령 주인공의 진짜 능력 혹은 그 심성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있는 선한 조연이 중반부터는 중요도가 떨어져 극에서 퇴장해 있다가 피날레에 모든 등장인물이 한 자리에 모일 때 같이 등장해 주인공의 결실을 축하해 주는 클리셰는 누구나 다 한번쯤 봤을 것 이다. 연극의 커텐콜과 흡사한 느낌의 연출이다. 그러나 이러한 엔딩을 그릴 때, 이 자리에 일찌기 퇴장한 조연이 다시 등장하려면 해당 사건을 어느정도 알고 있어야 말이 되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이다.

그래서 해당 정보를 알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러 있다거나, 해당 정보가 특정 사건 이후로 지나치게 유명해졌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연출해 그냥 넘어가버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위화감이 들지 않게끔 연출법이 매우 다양해졌다. 그럼에도 이러한 커튼콜 느낌의 연출 자체가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어 진부해졌기에 현대에 들어선 거의 사장되었다.

사자에상 시공 역시 개연성이 파괴되기 좋은 환경이다. 특히 시간적으로 말이 안되는데, 짱구나 도라에몽 등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당히 많은 횟수의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하지만 성장하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지난 설정들이나 인물들 역시 쉽게쉽게 잊혀지고 떄로는 아예 이전에 보여준 설정과 정면으로 엇갈리는, 개연성이 완전히 무시되는 설정이 자주 나온다. 사실 이렇게 사자에상 시공을 채택한 작품들은 장기연재되는 특성상 작가나 독자나 예전 설정 잊어먹는 경우가 부지기수라서 딱히 지킬 이유가 없는 것. 이런 경우 작품의 핵심적인 개연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재미를 위한 개연성 희생이 더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작 중에서 거의 불가능하다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주인공이 지나간 캐릭터들과 자꾸 얽히게 된다든지, 지나치게 살인사건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든지, 죽는 게 당연한 상황에서도 살아 돌아온다든지, 작품을 보는 독자 입장에선 수 년 동안 열심히 읽어야 할 만큼 사건들은 미어 터지는데 고작 작품 안에선 날짜가 하루도 안지났고, 이 수년의 연재 시간 때문에 작 중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오랫동안 만나 온 캐릭터에 대한 존재는 완전히 잊혀지고 그 하루 동안 같이 한 캐릭터와의 사연이 더 깊어진다든지.그러나 이런 경우들 역시 모두들 장르들 특성상, 묘사적 특성상 약속된 더 큰 개연성이 있기에 이런 경우들 역시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개연성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합리적이다. 독자가 잊어먹었으면 더 이상 그 정보는 중요하지 않고, 시리즈 물에서 작품을 보여주기 위한 지나친 우연을 보여주는 건 그리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개연성, 더 크게 소설적 자유의 핵심은 엄밀히 말해서 그 세계가 아니라 독자다. 독자가 더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면 개연성도 핍진성도 지나치게 따지는 건 좋지만은 않다. 내러티브 속의 핵심적인 개연성을 챙겼고 대다수의 독자가 납득했다면 좋은 작품인 것 이다.

6.2. 코미디 장르의 경우

개연성이 파괴되도 작품의 완성도에 영향을 잘 끼치지 않는 장르도 존재한다. 개연성의 파괴는 정보의 변질 혹은 변화를 의미한다. 당연히 작품에서 큰 일이 나면 그 일이 이후에 일어날 스토리에 영향을 미쳐야 하지만 누가 봐도 정말로 큰 일이 대놓고 벌어져도 앞으로 이야기에 크게 영향도 잘 미치지 않고, 독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 잊어버리는 장르가 바로 코미디이다. 개연성을 잘 파괴하면 그 부조리함이 사람들에게 희극으로 다가온다. '어처구니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매체에서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에게 헛웃음이 들게한다. 다만 해당 작품이 너무 헛웃음만 나오게 하면 억지 코미디라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가장 좋은 예시로 짱구는 못말려가 배경이 현실임에도 짱구의 성희롱적 발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에 딴지거는 사람들은 없다. 심슨 가족에서 호머가 지각한 벌로 방사능 폐기물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은 장면과 크로스오버 특별편에서 패밀리가이의 피터 그리핀과 싸울 때 방사능으로 슈퍼 히어로 능력을 부여받은 장면은 확연히 모순되며, 작품에서 한 번 소개된 설정이 뒤집어지는 일이지만 이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개그물은 애초부터 큰 사건이 일어나도 가볍게 다루어지거나 그 장면 순간에만 의미가 있다는 약속이 어느 정도 전제되어 있다. 또한 여러 작품들을 유쾌하게 비틀어 대거나 현실을 비트는 게 역설적 약속이며 때로는 내러티브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 역시 패러디와 풍자를 전체 맥락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것(구 고증 오류)도 마찬가지이다. 심슨 가족에서 호머 심슨의 눈알이 튀어나와도 호머 심슨의 안구가 탈구된 걸 떡밥으로 받아들이는 시청자는 없다. 이런 것은 특히 만화라면 만화적 표현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가 개연성을 어느정도 미리부터 파괴한다는 약속이나 다름이 없어서 역설적으로 개연성을 성사시키는 셈이며, 따라서 장르가 코미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객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매우 쉽게 받아들인다. 재미만 있다면 말이다.

물론, 코미디 장르라 하더라도 시종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로만 채우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대부분의 훌륭한 코미디 영화는 가볍더라도 기본적인 커다란 서사 자체는 존중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코미디적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장면과 서사적 의미가 중요한 장면이 구분이 안되면 다시 개연성 측면에서 지적받을 수 있다. 가령 패러디를 통해 재미를 주던 작품이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패러디 요소인 의 수명이 다 되었다는 것 등 때문에 제 구실을 못하면 그에 묻혔던 스토리의 단점들이 드러날 것이다.

대표적인 코미디 영화 극한직업에선 개연성이 파괴될 수 있는 설정을 영리하게 사용한다. 주인공들은 나름대로 사력을 다해 범인을 추격하지만 결국 놓치고 마을 버스가 범인을 치여 체포하는 장면이 초반에 나오는데 이 장면만 봤을 땐 그 이전까지의 추적의 의미를 모두 허무하게 만들기 좋은 장치며, 일종의 개연성을 파괴하기 쉬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적인 해결 장면이다. 이 장면을 어떻게 활용했는가가 정말 중요한 포인트인데, 영화에서 형사들의 노고를 마을버스가 부수는 듯이 보이지만, 이 장면이 강력반에게도 영화 중반 다시 한 번 반복되면서 이 범인잡는 버스 요소는 인생사 새옹지마를 상징하는 동시에 마약반을 무시하던 강력반도 충분히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변한다. 해결 방식이야 데우스 엑스 마키나스러울지는 몰라도 오히려 이러한 해결 방식이 전달하는 의미를 살려 작품을 구성하는 일부 요소로 차용해 하나의 인생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만들어 배치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는 극한직업의 전체적인 작풍과 주제와 잘 어울린다.

그런데 만약 이 범인잡는 버스 장면이, 최종 보스인 이무배를 잡는데에 쓰였다면? 위에서 말했듯 최종 목표인 이무배를 잡는 결과는 이야기에 가장 중요한 핵심 서사다. 당연히 범인잡는 버스는 여태껏 여정들의 의미까지 전부 잡아먹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된다. 수단이나 그 방식이 코믹할 뿐이지 영화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서민들을 상징하는 형사들을 배치하여 형사에게 부여된 진정한 목적, 범인을 잡는다는 그 삶의 목표를 성취함으로서 엔딩에서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해방되는 것이 중요한데 마지막 순간을 범인잡는 버스가 해결한다면 결국 사람들의 고생은 하등 쓸모없고 전부 운에 맡겨야 한다는 결말이 되어버려 영화가 내내 목표까지 달려온 장면들을 전부 희생시켜 버린다. 코미디 영화라 하더라도 핵심적으로 극을 이끄는 에너지 만큼은 무시해선 안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서사도 딱히 없고 개연성따윈 무시하는 코미디 영화가 없는 건 아니다.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쿵퓨리병맛이라 불리는 B급 영화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특성이다. 또한 우연으로만 점철된 영화 특근이나 예술영화, 연극 중 부조리극이 주로 차용하는 안티플롯 장르, 부조리 코미디도 그렇다. 다만 자극이란 것이 그렇듯, 처음부터 끝까지 코믹함과 이해 안됨으로 채워지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자극에 익숙해져 극이 진행될수록 웃긴 장면도 안 웃게 되는 사태를 대비할 수단이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개연성을 영리하게 파괴해야 하는 장르인 만큼, 오히려 개연성과 작품에 대한 이해가 충실해야 영리하게 클리셰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이해가 동반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코미디 영화를 만들 수 없다.

6.3. 호러물의 경우

호러물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을 다루는 장르의 특성상 현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기사. 뭔가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찜찜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그 찜찜함을 이끌어내는 기법이자 장르가 호러다. 이렇게 정보(떡밥)를 의도적으로 주지 않아 아이러니하게 공포적 개연성을 성립시키는 장르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명되지 않음과 기존의 이야기들을 파괴하여 얻는 공포감이 무척 중요하다.

그러므로 호러물은 기존 정보들을 어떻게 파괴시키냐,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아예 안 보여줄 수도 있고, 대놓고 보여주지는 않되 전체적 맥락상 관찰자, 관람객 혹은 독자들이 일관적으로 개연성 있게 묘사하여 전체적인 형태를 흐릿하게라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핍진성과 개연성이 중요하지 않은 호러물은 없다. 호러물에서도 소설적 자유를 일정부분 지키되, 독자들이 알고싶어 하는 정보를 일부러 제공하지 않음으로서 상상력을 유발해 공포감을 주는 것이지, 소설적 자유가 무시되어선 절대 안된다. 개연성의 파괴의 의의는 갑작스런 기존 정보의 변질에 있지 해명되지 않음이 아니다.

다만 오인을 하게 되는 요인은 아무래도 해석의 여지가 갈리는 열린 엔딩 등의 기법을 자주 활용하기 때문일 것 이다. 그 안의 정보들이 왜곡되어 개연성을 해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소비자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하여 작 중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 전체적 맥락의 소설적 자유에는 개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파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호러물로 데뷔하는 아티스트들의 실수나 허점들이 보여도 그러려니 넘어가기도 하고, 그냥 장르 특성상 내버려두기도 하는 게으름도 종종 보이기도 하는 것 이다.

따라서 호러물 명작들 중에서 핵심적인 소설적 자유을 놓치고 있는 작품은 사실상 없다. 소설적 자유의 핵심을 놓쳤다는 건 아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말하는데, 그런 작품이 명작이 될 수 있다는 자체가 넌센스다.

그러므로 최소한 작가는 가급적 설명되지 않은 정보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정하고, 숙지해야만 한다. 만약 그러지 않고 이야기를 그려 나간다면 등장인물들이 무엇을 어떻게 두려워하는지, 소비자가 어떤 부분에서 무서워할 지 작가 스스로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작업이 되기 때문에 전체적 형태가 어그러지고 순간 순간에만 메달리는 어설픈 작품이 된다.

이토 준지의 만화로 예를 들어보자. 토미에 시리즈에서 토미에는 설명하기 힘든 존재다. 그러나 토미에에겐 일관적인 핍진성과 개연성이 부여되어 있다. 사이코패스 기질에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관심 받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리고 그런 토미에에게 사랑에 빠진 사람은 대개 토미에 명령에 복종하게 되고, 사랑하는 동시에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사망하여 토막이 나거나 곤죽이 되면 초자연 현상으로 또 다른 여러 토미에가 만들어지고, 이렇게 만들어진 토미에는 대개 다른 토미에를 죽이거나 괴롭히고 싶어하는 욕망이 생긴다. 여기서 토미에의 성격이나 매력 등은 개연성에 속한다. 토미에 시리즈에선 토미에가 유혹하지 못하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하며, 다섯손가락 이야기에선 잘린 토미에 손가락들이 토미에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새끼손가락을 괴롭히느라 다른 네 손가락끼리 죽이려 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개연성이 어긋나는 듯 보이는 상황에도 결말엔 토미에의 개연성을 완성시킨다. 토미에가 유혹하지 못한 남자조차 자신의 옛 연인과 숲속을 거니는 꿈 대신 토미에와 숲속을 거니는 꿈을 꾸는 저주가 걸렸고, 다섯손가락 이야기에서 역시 주인공 막내 추남은 토미에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끝끝내 토미에는 네 손가락들이 새끼손가락을 죽어라 괴롭히는 쇼까지 하면서 이 추남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게 만들었다. 즉, 전체적인 맥락에 있어서 토미에의 공포적인 성격을 내러티브가 잘 설명한다.

호러물에 자주 쓰이는 클리셰 중, 살아있던 사람들이 원래는 죽은 유령이였다더라 하는 식의 연출이 정말 많다. 알 포인트, 디 아더스, 식스 센스, 장화, 홍련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연출은 시점에 따라서 소설적 자유가 파괴되는 것 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런 특징들을 가진 영화들은 대체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쳐해있는데, 만났던 인물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무척 중요하다. 그들의 죽음이 확인되는 순간 고립이라는 공포감이 몰려온다. 그렇기에 확인시켜주지 않으면? 고립이라는 정체성이 흐릿해져서 무언가에 홀려있거나 갇혀있다는 느낌을 줄 수 없다. 그렇기에 영화가 끝난 뒤 그들의 정체를 궁금해 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냥 관심조차 가지지 않게된다. 인상이 깊지도 않은 작품을 가지고 논하는 관객은 드물다.

클리셰의 변형 중 하나는 내가 알던 사람들이 원래는 다른 존재였더라, 혹은 점점 다른 존재에게 잠식되어 괴물이 되어가거나 하는 식의 연출이다. 겟 아웃, 기생수, 알 포인트, 이블 데드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클리셰들은 위와는 조금 다른데 오히려 줄타기를 하면서 정말 미지의 존재인지 내가 알던 사람인지를 헷갈리게 하여 공포감을 조성하는 경우가 있다. 전개에 따라서 밝힐 필요가 없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 미지의 존재 였을 때 보일 수 있는 일관성, 개연성만큼은 가져가야 한다. 결국엔 시점에 따라선 밝히는 셈이 되긴 하지만 중요한 건 일관된 메세지로 그 미지의 존재가 흐릿하게나마 보여야 한다는 거지 작위적인 정보를 전달하게 되버리면 산만한 작품이 되어 뭐에 무서워 해야될 지 모르게된다.

그렇기에 만약 쏘우 시리즈에서 누가 진범인지 끝끝내 밝혀지지 않고 끝난다면 어떨까. 의견이 분분해질 순 있어도 완성도를 해쳤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 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는 직쏘라는 자와 주제, 일관된 범죄 형태에 대해선 분명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흐릿하긴 해도 무서워야 할 대상이 정확하게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이후 시리즈가 비판 받은 이유는 바로 이 두려워 해야 할 형태가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일렬의 사건들이 진행되면서 진범 철학이 무시되어 무고한 사람들이 죽기도 했고, 살아 나올 수 없는 트랩에 갇히게 되기도 하며, 심지어 희생자 스스로 생존을 선택할 수 없는 트랩에 갇히기도 한다. 심지어 진범의 의도인지, 그 뜻을 이을 생각이 없는 후계자의 의도인지 분명하게 묘사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정보들이 산만해지고, 결과적으로 관객들은 진범을 왜 무서워 해야하는지 모르게 된다.

사실 이 점은 다른 공포물들 역시 겪는 문제다. 1편에선 그 흐릿한 인상으로 남을 수 있지만 후속작이 나올 수록 그 정보들을 영리하게 숨기는 게 상당히 힘들어지기 때문에 계속 악수만을 반복하게 되는 것 이다. 일관성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엔 정체도 뚜렷해지고 관객들은 공포에 적응이 된다. 심지어 이 공포의 주체는 거의 사실상 먼치킨, 메리 수 영역에 있기에 후속작으로 가면 갈 수록 비슷하거나 무리수를 두는 이야기 정도 말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는 것 이다. 그래서 결국 시리즈가 거듭될 수록 소설적 자유를 지키는 게 거의 불가능해지고 창작에 한계가 뚜렷해지며 하던 얘기 반복하게 되는 것 이다. 그래서 매체가 다소 다르긴 하지만 이런 면에 있어서 이토준지의 토미에는 정말 보기 드문 사례다.

어쨌거나, 공포물은 그 특성상 공포의 정체가 지나치게 또렷히 보일 필요가 없다는 그 특성 때문에 작가의 실수로 개연성이 파괴되거나, 맥거핀으로 남아버려도 관람객들이 잘 눈치채지 못한다. 잘 못 다루면 개연성이 박살나도 관람객들이 추측으로 채워넣기 때문에 질이 나쁜 작가들은 이걸 악용해 내러티브를 교묘하게 설계하기 보다는 이야기 진행의 편의를 위해 심령현상 자체를 모든 일의 원인으로 떼워버리는 게으름을 부릴 수 있다.

가령 옥수역귀신의 경우 초반 장면에서 원래 원작이 되는 웹툰에선 당시만해도 지하철 스크린 도어가 전국적으로 설치되지 않아 지하철로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질락 말락하는 귀신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현재는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어 있어 원작 그대로 갈 수가 없었다. 때문에 감독은 이 느낌을 살리기 위해 그 스크린 도어만 열려있는 것 으로 처리해 버렸다. 그런데 왜 그 스크린 도어만 열려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걸 개연성 없다 따지기는 어려운 디테일이다. 관람객들은 그냥 심령현상 때문에 열려있다고 생각하고 넘겨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초반에 그 유령을 목격하는 남자는 인터넷의 글만 읽고 호기심에 스크린 도어 밖으로 목을 내밀곤 갑자기 문이 닫히며 사망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당연히 공감할 수 없지만 남자의 행동이나 스크린 도어가 닫히는 현상 모두 심령현상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 관람객 상상력에만 의존하는 매우 게으른 장면이다. 차라리 그 남자가 그 유령에 홀리는 듯한 묘사를 넣어 기이한 연출을 하거나, 유독 그날따라 스크린 도어들이 망가져 모두 공사중인 상황이였다면? 완성도 면에서 훨씬 매끄러웠을 것 이다. 앞뒤가 맞지 않아 위화감이 드는 상황을 활용하여 공포를 그려내는 것과, 무서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상황을 작위적으로 만든 건 차이는 매우 크다.

이렇듯 공포물은 직접적으로 정보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포인트를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모든 설명을 이질적인 사건들을 통해 은유적, 감정적으로 보여주며 좋은 공포 영화는 가까히서 봤을 때 분명한 윤곽이 보이지 않을 뿐,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땐 일관성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해결하면 대개는 SF가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닥터 후가 있다.

또, 공포장르 특성상 장르적 개연성을 적용할 수 있는데 가령 이토 준지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인물들에게 한 가지 비현실적인 일관성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현상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는 인물들이다. 달팽이 저주를 받은 학급 친구를 학교에서 기르자 결정하거나, 거대한 풍선 얼굴들이 사람들의 목을 조르려 달려드는 기현상에도 주인공의 아버지는 출근을 강행한다. 사실 이 역시 작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장르가 스포츠물이고 주제가 꿈과 노력이라면 조연을 포함한 주연 인물들 모두 꿈과 노력이라는 주제를 받치고 있어야만 한다. 장르가 피카레스크고 주제가 사회의 부조리라면 등장인물들을 그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들로 설정해야 한다. 인물들의 성격이 암묵적인 장르적 개연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 만큼은 개연성과 핍진성을 잘 이해하고 다뤄야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온다. 어기는 것 처럼 보여도 보여주지 않을 뿐이지 그 맥락은 확실히 존재하며, 가급적 하지 않는 편이 좋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개연성을 심령현상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떼워버리면 되는 편리함이 있어서 초보 아티스트가 만들어도 만듬새가 그렇게까지 이상해지지 않는 것 이다.

6.4. 현실 사정상 발생하는 불가항력적 사태

6.4.1. 외부적인 스토리 변경

6.4.1.1. 웹툰
자유롭게 혼자서 제작하는 작품에선 현실을 이유로 불가항력적인 오류를 내버려 두는 일은 없다. 그러나 협업을 하거나 계약을 하게 된 매체는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이야기를 만드는 건 마치 독특한 퍼즐을 끼워 맞추는 것 만큼 어려운 일 이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십 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기본적인 뼈대를 맞추고 그 안에서 조립을 해 나아가면서 이야기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을 정해진 기간 안에 조건에 맞춰서 뽑아내야 한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아무리 천재적인 아티스트라 해도 각종 제약이 걸린 현실 속에서 좋은 작품을 만들기는 결코 쉽지 않다.

가령 주간 연재를 해야 하는 만화의 경우 완벽한 설계를 하고 투고하기엔 작가로서 리스크가 너무 크다. 떨어지면 커리어도 안되고 대개는 준비한 세월이 날아가 버리니까 일단 빠르게 자극적인 소재들로 설정을 지르고 본 뒤 계약 후 이야기를 끼워 맞춰 나가다 보면 당연히 소설적 자유나 개연성, 핍진성을 고려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이 올 수 밖에 없다.

특히 웹툰의 경우 한국에서는 기획투고가 타국에 비해 대단히 어려운 축에 속하며, 대체적으론 많은 작가들이 스마트폰 사이즈에 글자 크기를 맞춰야 하는 조건을 요구받기 때문에 넣을 수 있는 대사량조차 한정되어 있어 비슷한 규모의 이야기조차 쉽게 늘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좋은 템포를 유지하기 어려운 축에 속한다. 특히나 매일 연재 같은 경우에는 기껏 개연성을 계산해서 넣어버려도 돈을 쓰지 않고는 몰아서 작품을 보기 어렵다 보니 얼마 안 가 독자들이 설정을 잊어버려 개연성이 깨졌다고 받아들이기도 쉽다.

또한 웹툰이나 만화나 둘 다 인기가 저조하면 판을 갈아 엎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웹툰의 경우 사실상 온라인에서 공개한다는 조건 때문에 투자 리스크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기에 적당히 조회수만 나와도 방치하는 경우 역시 있지만 투자비용이 클 경우 연재 종료나 방향성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다. 만화나 웹툰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 지난 연재 회차분에서 흥미로운 갈등관계가 보일 듯 싶다가 갑자기 모종의 사건으로 배경이 완전히 바뀌어버려 흥미로웠던 설정들이나 등장인물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대체적으로 더 이상 기존 이야기로는 가망성 없다 생각되어 경로를 틀어버린 흔적들이다.
6.4.1.2. 영화
영화, 특촬물,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의 경우는 배우나 감독, 투자자 등이 작품 외적 요인으로 인해 마찰이 빚어지거나 사고가 생겨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어른의 사정이다.

영화 감독, 애니메이션 감독 등의 감독의 경우, 감독 신변에 문제가 생겼거나 혹은 투자자 등과의 갈등 등으로 하차해 감독이 바뀌었을 경우 기존에 만들어 놓았던 다른 감독 스타일과 조화되지 못해 망작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의 경우라면 기존 감독과의 계약을 해지한 후 재계약한 감독이 기존 드라마를 잘 이끌어나갈 실력이 부족해 이후 시즌부터 망작이 나오는 경우도 상당하다.

특히 감독처럼 작품 만들기도 까다로운 직종이 없는데, 감독은 압박 받는 요건들이 기상천외하게 많다. 이미 시나리오와 콘티는 완성되었는데 투자자가 갑자기 제 멋대로 자사 상품 PPL을 넣어달라 압박한다거나, 인기는 많지만 연기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인물을 캐스팅하라고 압박하는 경우도 많고, 배우들 역시 현장에서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대단히 크다보니 별 것 아닌 일에도 마찰 빚는 일이 부지기수다.

또한 감독은 말 그대로 모든 걸 총괄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일을 의뢰한 업체의 완성물도 꼼꼼하게 살펴야 하며 스태프나 배우들이 현장에서 마찰을 빚지 않도록 중재해야 하기도 하고, 배역에 힘들어서 감독에게 항의하는 배우들을 달래거나 설득할 수 있는 힘도 필요하다. 또한 모든 감독들이 예산을 넉넉히 할당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산안 안에서 퀄리티가 나오는 작업물을 내 놓아야만 한다. 그게 넘어가 버려서 대출을 하거나 자산을 팔아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 그래서 생각보다 많은 감독들이 적당히 돈만 잘 벌리면 좋은게 좋은거다는 식으로 넘어가며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 이런 상황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감당이 안되기 때문이다. 좋은 감독들은 이런 상황들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면 개연성이나 핍진성이 박살나버리는 장면들이 잘 나오게 되고, 통제하지 못하는 감독은 그저 스탭과 배우들이 잘 해주기만 바라며 기도하는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어지간하면 감독은 현장에서 상당한 대접을 받는다.

6.4.2. 출연진의 사정

성우를 포함한 배우의 역할 역시 개연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촬영 도중 심각한 물의를 일으켜 사회가 배우를 거부하거나, 더 나아가 징역살이를 하게 되거나, 촬영이 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사망하는 경우 아예 작품이 엎어질 수 있다. 차라리 시리즈 물이면 갖은 이유라도 대든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은근슬쩍 배역을 바꿔버리기도 하지만 영화는 대개 필름 자체가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주연 얘기지 이야기에 비중이 훨씬 적은 조연들의 경우 그렇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조연 때문에 작품이 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화라면 해당 씬만 재 촬영하는 걸로도 충분한 경우가 많고, 시리즈물의 경우라면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해당 극 중 배역이 죽었다던가 떠났다던가 하는 식으로 떼워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연 역시 이야기에 주요 역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주 조연 할 것 없이 이런 하차 사태가 발생할 경우 충실히 캐릭터의 퇴장에 서사를 쌓지 못하고, 도중에 캐릭터가 쌓아온 서사가 증발하면서 개연성을 고칠 방법이 아예 없어져 버리기도 하는 것 이다. 이렇게 사태가 수습이 안되면 아예 조기종영이나 필름을 폐기해버리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한편 닥터후처럼 시리즈의 장기 존속을 위해 재생성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주역 교체를 작품에 주요 개념으로 도입하여 이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작품들도 더러 있다.

배역의 안타까운 사망 등으로 이런 일이 생긴 경우라면 관람객들 역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죽은 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뭐 해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시를 들자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수 많은 시리즈가 거대한 이야기 하나가 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극 중 히어로인 트찰라의 경우 담당 배우인 채드윅 보즈먼의 사망으로 작중에서는 원인불명의 병으로 사망한 걸로 처리했지만 트찰라는 오버 테크놀로지가 결집된 와칸다의 국왕이다. 그런 와칸다가 병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개연성 파괴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사실 이건 배우 교체를 하면 해결할 수 있지만 담당 배우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바꾸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이 예도 이에 속한다. 팬들도 이 의도에 공감하는 편이기에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평가 문서의 해당 항목에서도 트찰라의 사망과 관련된 개연성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다. 또 기계전대 젠카이저의 악역인 게게의 경우 담당 성우의 불륜 논란으로 인해 강판되면서 벙어리가 되었고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게 다였고 정작 이지루데는 이걸 다 알아듣는다. 그럼에도 둘 다 제작진의 역량 및 개연성 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았다. 창작물의 반영 오류(구 고증 오류)에서도 이 대목을 다룬다. 같은 이유로 작품이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부분이 생겼어도 이런 이유라면 시청자들은 지적을 삼가곤 한다.

또한 소품 역시 개연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얼마 안되는 소품이면 몰라도 상당한 고가로 제작 된 소품일 경우 어떤 역할을 하냐에 따라서 작품 자체가 엎어져버릴 수 도 있다. 특히 배경 소품이나 탈것, 생물체 등이 그러한데 다시 만들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근래엔 그래도 CG로 조악하게나마 떼우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소품들 자체가 애초부터 제작에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 가뜩이나 돈이 부족한 인디 영화들 경우 이런 일들 자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런 요소들이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시나리오 자체를 쓰는 단계부터 돈을 들이지 않게끔 창작하는 경우가 많고, 마찬가지 맥락으로 돈을 투자하기가 어려운 감독들은 자본이 많이 들지 않는 호러물과 드라마물로 커리어를 시작하곤 한다.

이렇듯 감독들 역시 개연성 파괴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고, 특히 투자자에게 심하게 압박받는 감독이나 편집사의 과도한 요구를 받는 작가의 경우 스스로가 나쁜 작품을 만든 걸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는 방법 말곤 없기 때문에 억울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하소연 할 수도 없이 작품이 망가진 데에 있어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손해를 보는 입장인지라 이런 현실적인 사정은 생각보다 창작자에게 굉장한 스트레스를 안긴다.

7.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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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개연성에 대한 몇 가지 예시들이다.

7.1. 갑자기 등장해 사건을 해결하는 키: 데스노트의 예

데스노트의 핵심 요소인 데스노트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존재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를 수긍한다. 만일 라이토가 L을 총으로 쏴죽이거나 때려 죽인다면 그 방법 자체는 현실적이겠지만, 개연성이 별로 없기에 이를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을 죽이는 노트로부터 이야기가 출발하기 때문에 그 전제를 받아들인 독자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이 비현실적인 전제에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또한 데스노트라는 물건이 파워 밸런스가 꽤 잘 맞춰져있어서 독자의 흥미를 끌기 좋다. 적인 L에게도 대항할 여지가 충분히 있고, 이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데스노트가 무적이었고, 라이토가 L이고 니아고 간단하게 이겼다면 독자들은 어이가 없어서 읽는 걸 그만뒀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토는 작중에서 매우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기에 독자는 라이토가 비이성적이고 과격한 방식을 동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게 되고 수긍하지 않는 것이다. 뒤끝없이 죽일 수 있는 노트가 있는데 굳이 총이나 둔기를 쓸 이유가 없는 것. 물론 노트를 쓸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총이나 둔기를 쓴다거나 역으로 총이나 둔기로 죽여버림으로서 자신이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간계라면 문제는 없다. 오히려 작중 라이토의 천재성이나 냉철함을 부각시켜 더 큰 인상을 줄 수 있고,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한 라이토의 심경 변화나 후회하는 모습을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캐릭터의 심경 변화를 약속하는 연출이라 볼 수 있는데, 만약 연출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경우 개연성이 깨지게 된다.

이번엔 데스노트에서 데스만년필 같은 비현실적인 요소가 개연성을 해친다고 가정하자. 작품 특성상 이런 물건은 충분히 있을 법 하다. 그러나 만약 이 물건의 존재로 개연성이 깨지게 된다면 데스만년필에 대한 설명이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으로 이해해보자. 가령, 류크가 1권에서 라이토 옆에서서 라이토의 정의 집행을 구경하던 도중 갑자기 아무 종이에다 이름을 써서 사람을 죽이고 데스만년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이야기 도중 데스만년필의 존재가 드문드문 언급이 된 다음 마지막 최후의 장면에서 라이토가 죽기 직전 류크로부터 훔쳐낸 데스만년필로 땅바닥에 경찰들의 이름을 적어 죽여버린다면 개연성이 깨지는 일이 아니다. "아, 데스만년필이란 게 진짜로 있었고 라이토가 그걸 어떻게든 찾아내서 갖고 있었구나!"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테니까. 독자에 따라 반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묘사 하나도 없이 최후의 장면에서 데스만년필을 꺼내 경찰들을 죽여버리고 갑자기 라이토가 데스만년필에 대해 설명한다면? 독자들은 그 설정을 받아들일 수도 없을 뿐더러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는 편의주의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 작품 전개에서는 스테판 제반니갑툭튀한 인간 복사기라며 이와 유사한 비판을 받는다.

역설적인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만약 1권에서 류크가 한번 데스노트 이외의 사람을 살해할 수 있는 사신의 물건은 없다.라고 공언해 둔다면? 이는 작가가 독자들에게 앞 이야기를 위해 미리 던져놓는 정보로 작용된다. 한 번 이렇게 설정되었다면 끝까지 이 설정은 지켜야만 한다. 스토리 라인에 영향을 미치는 물건이 부정될 법한 설정이나 묘사의 존재감이 클수록 개연성도 크게 깨지게 된다. 어떠한 설정에 대해 작중 인물의 설명으로 '이 설정은 어떠어떠하다'라고 공언을 했다면 이후 그 설정을 크게 어긋나는 전개나 또 다른 설정이 생겼을 때 어떤 이유를 붙이더라도 개연성이 깨지는 걸 피할 수 없다.

개연성은 늘 앞으로 이어져 나아갈 이야기를 약속한다. 그러므로 설정의 존재감이 작다면, 스쳐지나갈 정도로 별 의미가 없다면 약속도 그만큼 작은 것이며 독자들도 잊어버릴 확률이 크기 때문에 개연성은 그렇게 크게 깨지지 않는다. 데스만년필이란 설정 때문에 독자는 쓸모없는 정보를 얻은 셈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높은 확률로 이 정보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되어 전체 흐름에 집중 못하게 될 공산이 더 크다.

7.2. 장르적, 표현적 맥락에 대한 약속: 도라에몽의 예

온갖 기상천외한 판타지가 다 등장하는 《도라에몽》에서도 어디로든 문이나 대나무 헬리콥터처럼 뚱딴지 같고 참 말도 안 되는 물건 같더라도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도구가 나오고 진구와 친구들 얘기가 나오며, 가족과 친구들간의 갈등을 그려내고 어린이를 위한 교훈을 담아준다는 조건을 충족하고 작품의 분위기를 깨지 않는다면 개연성을 해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엔 현실적인 상황 설정으로 개연성이 깨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1. 평소처럼 진구가 사고를 치고, 울며불며 도라에몽에게 달려간다.
  2. 도라에몽은 어떤 도구를 꺼낸다.
  3. 진구는 그 도구로 장난을 친다.
  4. 이후 진구가 자신이 친 이 장난으로 인해 골탕을 먹고 돌아온다.

이건 충분히 도라에몽스러운 일일테니 진구가 장난을 치는 세 번째 장면부터 끊어서 설명을 해보자.

진구가 도구를 사용하며 장난을 치던 도중 미래의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시간경찰에게 잡혀간다. 미래의 판사는 진구 앞에서 도라에몽이 들고 다니는 미래 도구가 법률적으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때 특정 상황에 어떻게 위배되는가를 읊조리면서 진구를 변호하는 미래의 변호사가 나오고, 진구를 고발한 검사도 등장해 역전재판보다도 현실적인 재판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 상황에 맞춰 주인공들도 진지하고 어른스럽게 재판에 임한다고 생각해보자. 이건 전혀 도라에몽스럽지 않다.

이와 같은 전개는 이미 아동용임이 약속된 도라에몽이라는 프랜차이즈에선 약속되지 않은 전개다. 분위기가 바뀜에 따라 캐릭터들이 늘 보여주는 성격에서 벗어나 버리기 매우 쉬운 상황이 조성되며 개연성이 파괴되기 매우 좋은 상황이 구축된다.

물론 이런 외전적인 시도는 있을 수 있다. 어른들을 위한 도라에몽이 새롭게 그려지고, 해당 물건을 진지하게 고찰하는 법정 드라마를 그린다면 스핀오프 개념으로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는 건 이러한 시도가 어떻게 개연성을 해치는가이다. 작품 내외적으로 이러한 시도가 예고되지 않고, 이번 주에 방영된 도라에몽 1기 1화를 본 아이들이 다음주에 다시 모여 1기 2화를 봤을 때 이런 내용이 나온다고 가정한다면 이건 개연성을 해치는 시도가 된다.

도라에몽같은 시리즈물은 단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만큼 서로간에 분위기를 약속하는 개연성이 확립된다. 이미 어디로든 문이나 대나무 헬리콥터같은 진지하지 않고 어떻게 작동되는 지 궁금하기만 한 아이템들은 이 작품이 이미 그렇게 진지하지 않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따라서 도라에몽을 보는 그 누구도 뒷 내용이 법률 이야기처럼 딱딱하고 무거운 이야기일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구 사용으로 인한 오용이 설정 중 등장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가족&친구관계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 요소를 뒷받침해주는 선에서 끝나야 한다. 현실적으로 충분히 있을 만한 이야기를 했음에도, 도라에몽에서 등장한 캐릭터들과 도구들이 충실히 어필해 온 아동용 작풍의 분위기를 꾸준히 이어나간다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개연성이 깨진 것이다.

이는 초보들이 설정놀음을 해선 안 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겠다. 독자들의 시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섣불리 "독자들이 이 부분을 이해 못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빠져 가볍게 넘어가도 될 법한 설정에 이야기를 달고 늘어뜨려 이야기 스타일과 화법이 바뀌어버리는 실수다. 사람들은 이야기 그 자체가 말하는 주제와 스타일에 관심이 있지 작가들의 치밀한 설정놀음엔 별 관심이 없다. 작품 전체가 전달하는 의미와 주제를 먼저 생각하고, 설정에 대한 설명은 나중으로 미뤄라. 설정에 대한 설명은 설명문에 가깝다. 소설의 문법과 설명문의 문법은 다르기에 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몰입을 해칠 만큼의 핵심적이지 않은 설정 설명이 있다면 과감히 전부 다 잘라버려라. 설명이 안 되더라도 이야기 전반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요소가 아니면 설명을 생략해야 한다. 그래도 정 그런 중요하지 않은 설정을 설명하고 싶다면 작품 후기,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면 애니판 진격의 거인 등과 같이 아이캐치 같은 공간을 이용해 따로 쓰는 것도 방법이다.

7.3. 현실성과 개연성의 차이: 복권을 산 남자에 대한 이야기

현실은 때때로 개연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을 일들이 곧잘 일어난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해당 사건의 당사자, 혹은 이야기를 관찰하는 사람 관점에서 느낄 수도 있는 감정이지, 그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만큼은 존재하는 상황이 뒷받침되어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친다면 번개를 관찰한 사람 시점에선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겠지만, 이미 하늘에서는 수 시간 전부터 번개 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갑자기 유성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유성을 본 사람에게 있어선 갑작스럽지만 유성 자체가 날아온 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캐릭터에게 일어나는 일은 갑작스러워도 독자(관찰자)가 읽을 때 그 일이 개연성이 깨지는 상황으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려면 이런 전지적 시점에서의 관찰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복권에 당첨된 남자의 이야기로 예를 들어보자. 만약 현실에서 A라는 남자가 재미삼아 복권을 하나 산다면 보통 당첨될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현실에는 당첨자가 엄연히 존재하기에 정보를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없고, 남자가 가능성이 없다시피한 일을 겪게 되었다고 즉각 연상하게 된다.

여기서 이야기를 좀 더 황당무계하게 이어보자. 이 A라는 남자는 원체 소심해서 돈을 어디에 쓸지 고민했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집을 사기로 했다. A는 높은 산 위 홀로 자란 나무 옆 작고 아담한 집을 원했다. 그런데 A가 처음 이사 간 날 하필이면 날씨가 매우 좋지 않아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비가 심하게 쏟아지자 A는 이사 도중 급하게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려 뛰어가는데 하필이면 남자는 저 멀리서 들리는 천둥 소리에 놀라 넘어져 돌부리에 머리가 부딪혀 죽었다고 해보자. 결국 현실성이 매우 낮은 일화가 되겠지만 이야기로서의 구성에는 별 다른 하자가 없다.

이 이야기는 확률 없는 일화를 겪은 남자의 이야기이며,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확률성을 주제로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이 설명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몇 가지 단서를 듣고 이 남자가 번개에 맞아 죽을 것을 기대하며 들을 것이다. 날씨도 안 좋고, 하필이면 남자가 있는 곳이 높은 산 위 홀로 자란 나무 옆이란 단서를 들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듣고도 복권과 더불어 확률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번개를 연상하기 쉽다. 동시에 비가 오고 있어서 땅이 미끄러웠으며, 소심한 남자라는 단서도 있었기에 천둥 소리에 놀라 넘어져 머리에 돌이 부딪혔다는 결말까지 충분히 단서가 주어졌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반전을 받아들이기도 어렵지 않다. A 입장에서는 갑작스레 150억 복권에 우연찮게 당첨되었다가, 갑작스레 울린 천둥 소리에 놀라 넘어져 죽어 굉장히 황당무계하다 느끼겠지만, 이 이야기 전체를 보는 전지적 시점에서는 약속된 주제가 있기 때문에 황당한 이야기로 볼 수는 있어도 앞뒤가 안 맞는 얘기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 이 일화를 이렇게 요약해보자. "150억을 가진 남자가 천둥소리에 놀라 자빠져 죽은 이야기". 몇몇 설명이 빠진 상황이다. 하지만 이렇게 짧게 축약한 설명은 전혀 개운하지 않다. 한 남자가 천둥소리에 놀라 자빠져 죽은 이야기인데 왜 150억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작 중요한 확률이란 주제도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복권이란 정보가 150억이란 정보로 바뀌어 버리니 개연성에 전혀 도움 안되는 정보로 변질된 것이다.

현실 그 자체는 그 형태가 얼마든지 유동적이다. 그러나 최소한 특정 이야기를 상대에게 전달해야 할 때에는 관심 가져야 할 만한 이유를 화자가 충분히 파악한 뒤에 듣는 상대방에게 들려줘야 하는 주제를 파악하고, 그 주제에 합당한 정보들로 짜 맞춰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현실성과 개연성의 차이며, 현실의 있는 일을 이야기 할 때에도 개연성을 신경써 줘야 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7.4. 갑작스럽지만 강렬한 장면을 위해 치밀하게 짜여진 플롯: 기생충조커의 예

훌륭한 두 영화의 예시를 한 번 들여다 보자. 만약 설명이 서툰 누군가가 이 두 영화의 피날레를 설명하려 든다면 정말 개연성 없다고 느끼기 좋을 만한 클라이막스를 가지고 있는 영화들이다. 기생충에서 기택은 오랜 세월 지하에서 살아온 근세의 냄새를 맡고 코를 막는 박사장의 모습을 보고 박사장을 살해한다.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그렇게 염원하고 존경해 왔던 쇼 진행자 머레이에게 초대되어 토크쇼에 오르게 되었으나 이내 잠깐 말싸움을 하고 격분해 머레이를 살해한다.

만약 이 장면을 극 중 등장 인물 시점에서 본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기생충에서 박사장 아들 생일 잔치에 초대된 지역 주민이다. 그런데 갑자기 살인사건으로 난장판이 일어난 와중, 사람 좋아보이던 그 집안의 운전수가 갑자기 박사장을 살해하는 장면을 봤다면 기택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예측할 수 없는 살인을 일으킨 기택에게서 엄청난 공포감만 느낄 것이다.

조커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머레이 쇼에 초대된 관객이다. 마침 그 날 게스트로 얼마 전 형편없는 개그를 하고 자기 개그에 미친듯이 웃었던 남자가 초빙되어 광대 분장을 하고 쇼에 올랐다. 이 남자는 갑자기 나이 많은 패널에게 키스를 하고, 돌연 요즘 굉장히 많이 보도된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 자백한다. 이런 남자를 보고 머레이가 차분하게 비난하며 남자를 쇼에서 내쫒으려 들자 이 남자는 갑자기 품에서 총을 꺼내 아무런 일면식 없는 머레이를 살해한다. 마찬가지로 아서 플렉을 이해하기보다는 예측할 수 없는 살인을 일으킨 이 미친 남자로부터 공포감밖에 느낄 수 없다.

현실에서는 개연성이 염두되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가 이런 살인을 쉽사리 이해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또한, 이런 뉴스같은 장면을 작품이랍시고 영화에 아무런 설명 없이 박아둔다면 개연성 없다고 욕먹기 매우 좋다. 만약 기생충을 다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기우와의 러브스토리를 그려 나가는 청춘 드라마처럼 연출했다면? 만약 조커를 소피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딸과 힘겹게 살아가지만 그래도 평범한 삶을 그리는 다큐 드라마처럼 연출했다면? 이 사건들 자체가 뜬금없는 요소들이 있어 다른 이야기를 전부 잡아먹을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기에 주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전개한 이야기들 자체가 잡아먹히게 된다.

따라서 만약 다혜나 소피를 중점으로 한 스핀오프가 원작 없이 제작되었다면 기택의 살인 동기인 냄새라는 요소 설명이 생략될 가능성이 높고, 아서 플렉 역시 머레이로부터 당한 부당한 입장에 대한 설명이 생략될 것이며 그 두 주인공이 사건으로부터 받은 여파가 더 집중 조명될 것이다. 두 인물들에게 그 사건들 자체의 세세한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장면이며, 동기 자체가 표면적으로 봤을 땐 이해가 불가능한 살인이다. 이 이해 불가능한 살인을 관객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러닝타임 동안 치밀하게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다.

만약 좋은 장면이 떠올랐다면 그 장면이 가진 힘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그 장면이 위 영화들과 달리 아이디어는 좋은데 다른 장면들까지 잡아먹는 힘을 가졌다면 가지치기해서 이목을 지나치게 끌지 않도록 조정하여 극의 주제를 보조할 수 있는 정도에 그쳐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주제와는 별 상관없는 이러한 사건들은 독자들의 시선만 잡아먹고 따로 설명할 시간을 요구하게 될 것이며, 주제와 상관없을수록 독자들의 집중은 흩어질 수밖에 없다. 설명을 한 만큼 지루해지고, 설명을 하지 않은 만큼 개연성이 파괴되는 것이다.

7.5. 그 외의 예

김성모 작품에는 전반적으로 개연성 깨지는 설정들이 별다른 전제설명 없이 도중도중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사실, 상당히 흔한 사례다. 한국에서 작품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큐 사인 들어가는 경우가 좀처럼 없고, 일단 저질러보고 나니까 인기가 있어서 연재가 시작되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작가가 이전 설정을 잊어먹거나, 혹은 사건을 좀처럼 해결할 수 없어서 무리하게 전개하면서 생기는 일이다.

드라마 카지노(드라마)에서도 개연성 결핍을 찾아볼 수 있는데, 1시즌 2화에서 국세청의 집요한 조사를 피해 처자식까지 버리고 해외로 도주했던 주인공이 3화에서는 당당하게 제 발로 국세청에 자진출석하여 성실히(?) 조사에 임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부과된 세금의 90% 를 깎는 장면이 나온다. 해당 장면에서 주인공이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지사장을 내세워 본인이 사업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안남기려고 철저하게 대비해왔고 따라서 국세청에서도 주인공을 실제 사업주로 특정할 만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사정이 그러했다면 앞서 2화에서 주인공이 처자식까지 버려가며 굳이 해외도피를 선택했던 것은 개연성을 잃게 된다. 해외도피 장면을 걷어내고, 국세청의 압박 → 하지만 미리 대비했으므로 걱정없이 당당하게 대응 → 세금감면 순으로 진행되었어도 극 진행에 아무 문제가 없다.

또한 작가가 미리 설명했다 하더라도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면 개연성 없다고 받아들여지는 일도 종종 있다. 가령 1권에서 나온 설정이 한 번의 언급 없이 현실 시간 10년 후 쯤 4~50권 쯤에 다시 등장하는데, 무척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치자. 만약 이 작품의 팬덤이 충분하고, 팬들이 1권에 나온 그 설정을 계속 언급했다면 별 상관이 없지만 그리 운이 좋은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설정을 독자들이 잊어먹고 개연성 없이 받아들이기 좋다. 나중에 가서 1권을 다시 보면 "아, 여기서 나오기는 했구나" 이럴 순 있겠지만 말이다.

8. 개연성이 깨지는 비교적 흔한 예시들

  • 정의감으로 마왕에 맞서던 주인공이 마왕에게 죽을 위기를 맞았는데 갑자기 내리친 번개에 마왕이 맞아 죽고, 주인공은 살아나며 갑툭튀한 번개에 여정 의미를 부여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 고전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예로, 주로 반공만화라든지 프로파간다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형식이다. 이런 경우 번개의 포지션은 특정 정치인이나 종교인이 되어 작품 내 정의를 상징하게 된다. 한국에선 김청기의 똘이장군이 대표적인 케이스.
    전지전능한 캐릭터나 설정을 함부로 등장시키면 안 되는 이유인데 전지전능이 워낙 초월적인 개념이라 이야기에서 단순히 언급만 됐던 존재가 사실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하고 있었다거나 모든 등장인물이 전지전능의 놀이감에 불과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져서 개연성에 엄청난 혼란을 주기 때문.
  • 이야기 내내 사람들을 괴롭혀 오던 빌런과, 그 빌런 세력에 심판을 내리던 주인공이 도시의 운명을 걸고 최후의 한판승부를 벌이는데 갑자기 등장한 히로인이 이 싸움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외치면서 빌런과 히어로가 화해하며 작품 내내 말해오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가 스토리에 부여되고 끝이 난다. - 이야기 스스로 보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결말과 전혀 다른 의미와 상황을 부여하며 스토리가 갑자기 끝나는 상황. 초중반과 다르게 후반부에 과하게 의미 부여하려다 이도저도 아닌 결말이 나는 상황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조금 변형된 버전이기도 하다. 등장만으로 갈등을 즉시 끝내버린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위의 번개를 히로인으로 바꾸면 된다. 어른의 사정으로 검열 때문에 후반부 상황이 짤려서 이렇게 되어 당대에 평가받지 못한 명작들도 꽤 된다. 물론 아예 대놓고 이런 작품이 없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알드노아. 제로. 반대로 신기동전기 건담 W같은 작품은 작중 히로인의 행동이 일관적이기 때문에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 이야기 중반까지 계속 코믹스러운 일만 벌어지다 인물이나 사건의 성질 및 성격이 갑자기 바뀌고 점차 현실적인 시련이 닥치면서 엔딩 종장에선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 장르 이탈. 이러한 흐름이 무조건 개연성을 해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개연성이 해져지기 쉬운 환경이 조성된다. 주로 코믹성으로 시선을 잡고 드라마로 깊게 들어가는 작품들에서 이런 상황이 잘 연출되는데, 중반까지는 말도 안되는 재밌는 상황만 나오다 나중에 갑자기 극 전체의 의미가 전환되는 식이다. 선생 김봉두인생은 아름다워에서처럼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을 이야기할지 분명하고, 캐릭터성과 배경도 일관되게 연출되면 독자들이 작품과 함께 천천히 걸어가면서 비극을 받아들이며 개연성도 해치지 않고 독자는 주제에 젖어들어가 좋은 작품이 되지만, 영웅 강철남처럼 계속 재미있는 이야기만 계속되다 아무런 예고 장치도 없이 캐릭터성이 바뀌며 비극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더 많다. 안 좋은 작품들은 이 뜬금없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작품 외적으로는 감독이 교체되었다든가 제작진이 교체되었다든가, 배급사의 요청 등의 이유로 이런 경우가 많고, 주로 캐릭터 성격들이 크게 변화해 개연성이 깨지게 된다. 위의 영웅 강철남 외에도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나는 친구가 적다같은 라이트 노벨이 이런 예에 해당된다.
  •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두 남녀 주인공. 알고 보니 이복 남매였고, 그를 극복하여 사랑을 선택하려 하나 더 자세히 알아보니 서로 배 다른 부모의 원수였다. - 매 편 부여되는 의미가 달라지는 막장 드라마가 만드는 상황. 이야기의 중점적인 부분이 계속 바뀌어 매 편 궁금하고 자극적이기는 하나, 개연성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개연성은 주제와도 큰 연관성이 있다.
  • 이 외의 문서들은 설정 오류, 캐릭터 붕괴 문서 참고. 사실 개연성 오류 부분이 설정 오류 문서의 예시 문단에 써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9. 오용

이 문서에서 설명된 대로, 개연성이란 즉 독자가 상황을 따라 올 수 있게 유도를 했냐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다만 사실성, 현실성(핍진성) 등과 혼동되어 오용되는 사례가 매우 많으며, 사이다 시대가 온 후로는 단지 '맘에 안 드는 전개' 에 대한 전가의 보도로 오용되는 횟수가 굉장히 많이 늘었다. 즉 구체적으로 어떠한 점에 문제가 있다고 설명하기 힘들 경우 '개연성이 없다'는 두루뭉술한 설명으로 퉁 쳐버리는 식으로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흐름과 전개가 모든 독자에게 마음에 들 수는 없다. 개연성이란 핍진성과 달라서 주관적인 개념이다. 아무리 충분한 사전 정보가 있었더라도 독자 개개인이 원하는 방향성과 어긋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이다가 터지는 장면에서는 아예 개연성을 신경쓰지 않으면서, 고구마 장면에서는 개연성을 칼같이 따진다. 이 때문에 작품에서 강한 주인공이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다 때려부수는 막장 전개로 치달아 대충대충 스토리를 전개시키거나, 주인공에게 도덕적 우위를 제공하기 위해 척 봐도 강한 주인공에게 시비를 거는 바보들만 적으로 나오게 되고 질적 저하가 일어나 그냥 사이다만 보여주는 작품이 나온다. 별 이유 없이 상대방을 죽여도 그것은 속이 시원하기 때문에 호평을 하지만 불편한 장면에서는 억지스럽게 개연성을 호도하는 장면은 웹소설 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또한 개연성이 유행어가 되면서 극단적으로 상황에 대해서 '말이 되나' 만을 따지는 사람들도 생겨났는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작품의 재미나 연출, 영상미, 액션, 아이디어 등은 등한시한 채 작품을 비판하기 때문에 종종 '개연성충'이라 비판된다. 주로 게임과 영화 관련으로 흔히 발견된다. 여기에 대해서 이동진은 장르영화에서의 개연성의 역할은 적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링크. 또한 그 링크의 댓글에서 서술한 것처럼 다큐멘터리도 사실성·현실성이 높지만 선술했듯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연성이 많고 개연성이 적어 감독 및 편집자의 의도가 개입해 진실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평론가처럼 인문학적인 지식을 끌고 와서 해석하려는 노력보단 유튜브에서 작품을 비판할 때 이런 개연성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는 사이다류 비판이 많다, 나무위키에서 비판 목록을 보면 주로 개연성이 주를 이루는 걸 알 수 있다. 누군가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을 개연성 하나로 물고 늘어지면 캐릭터를 사이코패스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대표적으로 히치콕 감독이 의도적으로 개연성을 신경 쓰지 않고 만든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같은 걸작이 있다. 게다가 히치콕은 "난 논리에 관심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효과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작품성에서 개연성이란 비중은 상대적이거나 작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봉준호 감독조차 기생충의 모스부호 장면에서도 누군가 확인해 보지 않겠냐 질문에 상식선에 머물면 영화를 못 만든다라고 말한 적 있었다.

픽션은 기본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 당연히 핍진성과 개연성은 세세하게 분석할수록 어긋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중요한 것이 바로 연출인데, 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묘사하냐에 따라서 설득력이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9.1. 예시

아주 완벽한 작품도 소설적 자유를 칼같이 따지면 성립이 가능한 작품들이 사실상 거의 없을 것 이다. 그럼에도 완성도 있다 하는 이유는 바로 주제의식에 포함되어 있는 소설적 자유만큼은 확실히 지키고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하단 예시는 소설적 자유에서 설명 되어야 옳고, 본 항에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어 있으나 소설적 자유를 개연성과 혼동하기 쉬운 소비자들을 위해 이 문단에도 다른 예시로 작성한다.

가령, 위 항에서 언급된 도라에몽의 경우 시간에 대한 해석이 너무나도 변동적인데 초기엔 분명 진구의 손자가 진구 운명이 바뀌어도 자신에게 별 해악이 없고, 자신은 결국 태어날 것 이라고 설명하지만 이후 진구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못 만나게 되는 운명에 처하자 진구가 사라질 뻔 한다. 소설적 자유핍진성이 박살나는 예시다. 그러나 이 핍진성 상위엔 도라에몽은 아동용 만화이며, 작품 전체적인 맥락에 약속된 개연성 자체부터 전체적인 서사가 따로 없으며 사자에상 시공을 채택하는 에피소드 중심의 이야기라는 특성이 암묵적으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핍진성이 박살난다 해서 작품의 완성도에 별 영향을 받지 않기에 이러한 비난을 받지 않는다.

역전재판에서도 마찬가지로 제작진이 공언을 한 바가 있는데 다른 부분에 대한 비판들은 괜찮지만, 작품의 주 요소 중 하나인 영매로 손 쉽게 사건 해결을 하려들지 않는가에 대해선 비판하지 말아달라 하였다. 물론 작품에서도 어느 정도 주요 요소로 다루며, 왜 그러면 안되는지도 어느 정도 설명하지만 그럼에도 영매를 통해 한 번에 사건을 해결하지 않는 것이 납득이 되는 이유는 영매는 어디까지나 작품의 부가적 요소일 뿐이며 영매라는 장치를 통해 추리를 보다 쉽게 경험하는 것이 핵심이기 떄문이다. 현실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가상의 배경에서 누구나 다 추론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로만 사용되어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고 있으며, 게임의 본래 목적인 추리를 즐긴다는 면에 있어선 제 역할을 하고 있기에 전체적 맥락을 딱히 해친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게임이란 장르는 지금도 내러티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게임은 이야기의 개연성보다도 게임 플레이라는 수단으로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작품 향유자에게 작품 속 세계의 체험을 시켜주기 때문이다.

즉, 소비자층이 선호하는 대전제 맥락에서 벗어나는 핍진성과 개연성은 완성도에 크게 상관 없다. 소설적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다 할 수 있어도 결국 중요한 건 작품을 관람할 때 방해 되느냐 마느냐의 여부이며 나머지 잔가지들은 상품의 성격과 소비자의 성격에 따라서 중요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예를 들어 SF의 팬층은 소프트 SF와 하드 SF 팬 층으로 나뉘는데, 해석을 제대로 하기엔 복잡하기에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소프트 SF는 비교적 설정이 좀 느슨해도 드라마를 좀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고, 하드 SF팬들은 철저하게 현실을 반영하길 원할 것이다. 소프트 SF 팬층이라면 닥터 후 등의 SF를 선호할 수 있고, 하드 SF 팬층은 202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마션 등을 선호할 것 인데 당연히도 하드 SF팬들은 소프트 SF를 SF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작품의 소설적 자유가 소비되는 주 대상, 장르, 주제 상 납득이 가게끔 지켜지고 있다면 좋은 작품이라 말할 수 있기에 과도한 오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어쩌면 소비하는 당신에게 맞지 않는 작품일 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10. 개연성 밈

뚜렷한 이유 없이 단지 "매력이 있어서 그랬다" 식으로 전개되는 상황을 두고 주인공의 얼굴이 잘 생겨서라는, 즉 얼굴이 개연성이라고 부르는 이 있다. 기사, 예시. 여기서 파생되어 그냥 얼굴이나 외모 자체를 개연성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동서고금 수려한 외모는 사람의 마음을 사기 쉽기 때문에, 스토리가 잘생긴 사람 위주로 진행되어도 "그 사람의 매력에 끌려서 그런 행동을 했다" 라는 식으로 설명이 잘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식으로 표현하곤 한다. 단적인 예로 타이타닉의 경우 갑부 약혼자를 둔 귀부인이 배에서 우연히 마주친 3등칸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있기 어려운 일이지만, 남주인공이 잘생겼기 때문에 그럭저럭 가능한 이야기가 되었다.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외모가 정말로 개연성으로 작용한 셈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인어공주(2023)는 여주인공 역의 배우가 그리 예쁘지 않은데 남주인공이 첫눈에 반했다는 줄거리로 인해 개연성 박살난 전개라는 평을 받는다(...)

좀 다른 예로 기행을 많이 저지르는 정신 나간 캐릭터가 활약할 경우, 그 캐릭터의 행동이라면 앞으로 무슨 전개가 나오든 말이 된다면서 팬들에게서 걸어다니는 개연성(이자 핍진성) 취급을 받는다. 핍진성 문서에서는 유희왕 프랜차이즈카이바 세토워크래프트 시리즈일리단 스톰레이지를 예로 든다. 위 유사 개념 문단에서 잠시 설명했듯이 '개연성이 떨어지는 행동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는 특정 인물의 캐릭터로 인해 개연성이 보충되는 것이다. 현실에 별 이유 없이 즉흥적인 발상으로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창작물에서도 그러한 면면들을 이전에 잘만 묘사한다면 핍진성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현실성 대입을 하게 어렵게 만드는 특수한 설정이 있다면 이러한 해석이 저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마을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의 사람들만 모여있다" 따위의 설정이 있다면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 그 마을에 존재한다는 것이 잘 납득이 안 될 것이다. 트러블 메이커 류의 캐릭터 역시 별 이유 없이 사건이 터지는 것을 설명해주기 위하여 자주 쓰이는 편이다.

가끔 개연성을 진짜 '개' 연성으로 해석해 이 작자를 띄워놓기도 한다.

11. 관련 문서



[1] 한자가 조금 특이한데, '개'는 뚜껑 개・덮을 개() 자이다. 이 한자는 예전에는 '대개 개()'자와 혼용되어 '대개', '아마도'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개연'이란 '아마도 그렇다'라는 의미.[2] 논리학에서는 'probability(가능성, 확률)'를 많이 쓰고, 문학이나 예술 분야의 플롯 비평에서는 'plausibility'를 쓴다.[3] 표준국어대사전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4] 표준국어대사전 '문학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루는, 문학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개념. 문학은 개개의 역사적 사건보다는 있음 직한 일을 다루므로, 그 과정에서 보편적 진실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5] 한국 뿐만이 아닌 일본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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