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26 22:26:11

LG 트윈스/1990~2008년

LG 트윈스 시즌별 성적
MBC 청룡 인수 1990~2008 시즌 2009 시즌

1. 팀 창단과 같이 찾아온 첫 우승과 뒤이은 개편(1990~1992년)2. 이광환-천보성이 이끈 신바람 야구의 전성기(1993~1998년)3. 암흑기의 조짐과 프런트의 월권 행위로 말아먹은 시절(1999~2003년)4. 본격적인 10년 암흑기의 시작, 6668587667의 전반부(2004~2008년)

1. 팀 창단과 같이 찾아온 첫 우승과 뒤이은 개편(1990~1992년)


1989년 말 MBC 청룡을 럭키금성그룹이 인수, 구단명을 LG 트윈스로 바꾸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감독은 이전 청룡시절 영입한 백인천을 유임시키고, 신인 선수로 김동수, 이병훈을 영입, 1990년 1월 OB 베어스와 트레이드로 김상호를 내주고 최일언을 데려오면서 시즌을 준비했다.

그러나 시즌 시작 전에 이광은이 교통사고로 빠져버리고, 김건우는 기약없는 재활을 해야 했기에 팀은 큰 전력누수를 안고 시작했으며, 5월까진 6연패와 7연패를 연달아 당하며 OB랑 7위를 다툴 정도로 꼴지로 쳐저있었다. 그러나 6월 초 해태 타이거즈 3연전을 모두 잡으면서 분위기가 돌변, 이후 귀신같이 8연승을 기록하며 5할을 맞췄고 상승세를 이어나가며 올스타전이 끝난 7월 14일 단독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대전 원정 19연패를 찍으며 빙그레 원정 4연전을 다 내주며 3위로 내려갔고 8월을 마쳤을 때 선두 빙그레와 5경기 차 3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빙그레가 김영덕 감독의 계약 문제로 인해 무너지면서[1] 다시 선두를 탈환했고, 매직넘버를 LG쪽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갑자기 3연패를 당하며 해태에게 잠시 선두를 빼앗겼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며 선두를 탈환했다. 그러던 중 9월 28일 최종전이었던 대 OB 전에서 김동수가 끝내기 홈런을 치며 1대0 승리를 거뒀고 몇 시간 뒤 해태가 태평양과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패하며 마침내 사상 처음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 1위로 직행한 LG의 상대는 삼성 라이온즈였고 시리즈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팽팽한 접전을 예측했지만[3] 결과는 4전 전승으로 LG의 창단 첫 우승과 삼성의 감독 정동진의 해임이었다. 상세한 내용은 1990년 한국시리즈 참고.

불행하게도 1990년 우승은 곧바로 LG의 전성기로 이어지지 못했다. 프런트는 백인천과 계약 연장 문제[4]를 두고 대립했으며 일단 연말에 1991년에도 같이 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다음해인 1991년 중반부터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5], 계약이 끝나가는 백인천 감독의 레임덕 현상으로 무너지면서 신생구단인 쌍방울 레이더스와 공동 6위를 기록했다. 8월에 급격한 DTD를 겪으며 포스트시즌에서 멀어지며 추락하던 시즌 막바지 백인천은 시즌 종료 후 떠나겠다고 선언했고 구단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LG로 팀명 변경 후 최다연패인 10연패를 찍었다.

후임은 이광환 감독으로 결정되었고, 이와 동시에 김재박과 이광은에게 은퇴를 종용, 이광은은 받아들였지만 김재박은 이를 거부하고 트레이드로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했다. 그리고 1992년 시즌의 결과는 7위로 마감하면서 더 안좋아졌다. 거기다 이광환은 그해 6월달에 태평양에 윤덕규-박준태 트레이드를 하면서 팬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윤덕규는 3할이 가능한 타자였고, 박준태는 백업이었기 때문에 비난이 가중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확이 없던 건 아닌데 송구홍이 20-20을 기록하고 김동수도 20홈런을 치는 등 젊은 선수들이 빈 자리를 메우기 시작하였고, 이는 신바람 야구로 이야기되는 전성기의 시작을 예고하였다.

2. 이광환-천보성이 이끈 신바람 야구의 전성기(1993~1998년)

LG 트윈스 구단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뜨겁고 신바람이 넘쳐났던 리즈 시절이자 6년 사이 포스트시즌 5번, 한국시리즈에 3 진출하며 신바람 야구가 꽃피우던 시절로 이 때만 하더라도 LG 트윈스의 전성기라고 할 수 가 있다.

1993년의 개막전은 해태 타이거즈와 하는 광주 원정이었는데, 이 경기를 잡으면서 4월 내내 승리 행진을 계속하면서 상위권을 찍었다. 특히 4월 30일의 잠실 해태 타이거즈 경기는 한국프로야구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불리는데, 3연전 내내 만원관중을 동원하면서 본격적인 관중 몰이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4월의 상승세는 계속 이어져 쭉 2~3위권을 지켰고, 그해 7월 23~25일의 잠실 삼성 라이온즈 4연전(더블헤더 1경기 포함)은 평일임에도 전 경기 만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지만 8월달 '대구 대회전'으로 불리는 삼성과의 3연전을 다 내주고 9월달에 부진을 겪으며 4위로 내려갔지만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은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준플레이오프는 OB 베어스랑 붙게 되었는데, 치열한 투수전 끝에 3차전을 잡으며 2승 1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 삼성과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어 초반 2패로 밀리는가 싶더니 이상훈정삼흠이 3~4차전을 승리로 이끌어 동률을 이루지만 마지막을 넘지 못하고 탈락한다. 덧붙여 이 플레이오프에서는 윤찬김선진[6] 의 전설로 남을 뇌주루가 나오고 저 경기를 모두 날림으로서 아쉬움이 두 배가 되었다.

시즌이 끝난 그해 12월 1일 LG와 해태 팬들을 놀라게 한 일이 일어났는데, 바로 김상훈+이병훈한대화+신동수+허문회+김봉재 간 2:4 트레이드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미스터 LG로 불리던 김상훈을 하락세 조짐이 보이던 한대화와 바꾸자 프런트가 미쳤다는 소리가 나왔지만… 결과는 LG의 완승으로 끝나게 된다.

위에서 설명한 트레이드와 송구홍의 군 문제 이탈로 인해 1994년에는 포스트시즌 진출이 쉽지 않다고 대부분 전문가들이 예측했지만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신인 3인방과 대폭발한 이상훈, 꾸준한 모습을 보여준 김태원, 정삼흠과 마무리 김용수, 노장 한대화노찬엽의 활약은 팀을 정규시즌 1위로 올려놓았고, 태평양 돌핀스와 대결한 한국시리즈도 4전 전승으로 초살시키며 1994년 시즌의 지배자로 올라섰다. 이해 한국시리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94년 한국시리즈 참고. 그리고 신인왕 유지현을 베출하고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도 5명[7]이 수상하면서 개인기록으로도 풍년을 맞았다. 참고로, LG 트윈스의 1994년 페넌트레이스 성적은 전 구단 상대전적 우세이다. 긴 연승은 없었으나 단 한 번도 3연전 스윕패를 기록하지 않았다. 이 기세를 모아 1995년에도 초반 선두를 달리던 OB를 잡고 9월 초까지 단독 1위를 달렸지만 이광환의 잘못된 운영 때문에 2위로 시즌을 마쳤고 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2승 4패로 탈락하게 된다. 그해 이상훈은 순수 선발로만 20승을 따내는 괴력을 보여주었고, 이는 2007년 다니엘 리오스가 22승을 거둘 때 까지 깨지지 않은 기록이 되었으며 토종 좌완 선발투수 기준으로는 2017년에 양현종이 20승을 기록할 때까지 그 누구도 넘보지 못했다. 당연히 KBO 골든글러브도 획득.

그러나 이광환의 이상한 운영이 다음해 시즌까지 지속되면서 1996시즌은 7위로 추락하게 되었고, 이광환은 올스타전 직후 경질되었으며 천보성이 감독을 잇게 되었다. 마운드가 부상과 노쇠화[8]로 무너지면서 김용수의 선발 재전환과 심재학의 성장이 유일한 볼거리였다.

천보성을 감독으로 임명하고 맞은 첫 시즌인 97년,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4강에 못 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비웃듯 초반에 10연승을 찍으며 선두로 치고 나가게 된다. 그러나 해태 타이거즈의 추격이 시작되고 삼성 라이온즈까지 가세하자 3위로 밀려났다가 막판에 힘을 회복하면서 2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 다시 삼성을 만났고 혈투 끝에 3:2로 삼성을 잡지만 힘을 다 써버린 나머지 해태에게 1승 4패로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1997년 한국시리즈 참고. 이 시기에 등장한 선수가 이병규로 그해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손혁, 임선동, 최향남, 신국환 등 천보성이 키우거나 외부에서 데려온 선수들은 팀의 돌풍을 이끌었다.

하지만 1998년 시즌 전 이상훈이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하면서 투수진은 약해졌고, 외국인 선수 제도가 시행되었음에도 마무리 앤더슨만 뽑는 등 특이한 행보를 보였던 98시즌은 김용수가 다승왕을 하고, 시즌 중반에 버닝하면서 간신히 3위로 마감했다. 그러나 포스트시즌이 되자 완전히 달라지는데, 엔트리에 부상중인 서용빈을 꺼내든 강수가 적중하고 8월에 영입한 주니어 펠릭스가 포스트시즌 내내 날아다니며 OB 베어스삼성 라이온즈를 박살내고 2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만, 상대는 현대 유니콘스였고 전적에서 앞섰지만 정민태김수경을 위시한 투수진과 박재홍에게 농락당하며 또 준우승을 하고 만다. 1998년 한국시리즈 참고.

3. 암흑기의 조짐과 프런트의 월권 행위로 말아먹은 시절(1999~2003년)

결국, 1998년의 준우승의 후유증은 팀을 기울어가게 만들었고 그 다음 해인 1999년 시즌 양대리그제가 시행되어 매직리그 3위, 전체 6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마무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마운드에서는 선발투수 손혁[9]과 마무리로 재전향한 김용수[10]가 분투했지만 그 뒤를 받쳐야 할 김광삼, 김상태[11]가 부진했고, 이에 투수진 보강을 위해 중심타자였던 심재학을 어깨가 강하다는 이유로 투수로 전향시키는 무리수를 두는데 투수진 강화는커녕 부상으로 신음하다가[12] 막판에 다시 타자로 돌아오는 등, 구단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투수진 강화는커녕 선수 본인과 구단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반대로 야수진은 이병규30-30 클럽과 최다안타 역대 2위 기록을 쓰며 맹활약했고 김재현유지현도 잘 받쳐주었지만, 서용빈이 병역비리로 인해 구속되며 전년도에 이어 시즌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98년 후반기에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던 펠릭스와 99년 시즌을 앞두고 영입한 외국인 타자 케빈 대톨라는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3]

1999 시즌의 부진은 천보성 감독의 사퇴를 불러왔고, 후임 감독으로는 MBC 청룡-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이광은이 새롭게 감독자리에 올랐다.[14] 이광은은 이전 천보성이 상당부분 진행시킨 리빌딩보다는 다시 한 번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을 내보이며, 2000년 시즌 개막 직전 해태에서 트레이드 매물로 풀린 양준혁을 손혁을 내줘가면서까지 데려온다.[15][16] 허나 주전 포수 김동수가 FA로 삼성 라이온즈 행을 선택하고 투수 전향 관련으로 인해 구단과 사이가 틀어진 심재학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하면서 전력은 이전보다는 약해졌다.[17]

어찌하여 이광은 체제로 개막한 2000년 시즌. 이광은 감독은 기존 자율야구 대신 선수들을 엄하게 통제하는 스파르타식으로 지도하게 되며 기존 자율야구에 익숙해져 있던 선수들의 반발을 불렀다. 팀 최고참이던 김용수가 항명하기도 했고,[18] 서용빈이 팀을 이탈할 정도로 선수단 장악에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성적만으로만 보면 매직리그 1위, 전체 4위를 기록하면서 나름 괜찮았다고 평가를 하는 쪽도 있지만, 이는 양대 리그 제도의 허점으로 인해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2000년 시즌을 앞두고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가 서로 리그를 바꾸면서 양대 리그 체제가 바뀌었고, 그 중 매직리그는 약체팀들의 집합소가 되어 버렸다. 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여 LG는 매직리그 1위가 되었지만 승률은 불과 0.515였으며 99두산과는 반대 케이스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 2승 4패로 패하고 만다. 여기서의 압권은 6차전으로 이광은 감독은 9회 2사까지 잘 막고 있던 김용수를 내려버리고[19] 장문석을 등판시키는 등 이해되지 않는 투수교체를 했고, 결과는 장문석이 안경현심정수에게 홈런을 맞고 패배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고 만다.[20] 이 때문에 단장 신교식이 짤리고 최종준이 다시 단장이 된다.

이렇게 되자 LG는 2001년 시즌 우승을 위해 모든 강수를 던지니 2001년 시즌 첫 먹튀 홍현우[21]를 FA로 영입하고 한화 이글스에서 나온 댄 로마이어를 업어오는 데[22] 성공하며 타선은 그야말로 사기가 되었지만[23] 문제는 투수진. 김용수가 2000 시즌 후 은퇴하며 공백이 생겼고 전년도에 17승을 찍으며 특급 성적을 낸 외국인 투수 데니 해리거도 부진하게 된다. 이 때문에 2001년 시즌 초반 9승 25패라는 눈 뜨고 못 볼 OME급 성적을 찍자 그해 5월 이광은을 해임시키고 수석코치 겸 투수쪽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김성근을 감독 대행[24]으로 앉힌다. 김성근신윤호중무리기용불안한 투수진을 안정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팀을 4강권까지 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마지막 2%가 부족해 6위로 마감하게 된다. 참고로 시즌 마지막인 한화 이글스전에서 지면 꼴찌를 찍는 상황이었지만 이기면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8888577의 암흑기를 선사해주게 된다.[25]

2001년 시즌이 끝나면서 구단은 중반부터 팀을 잘 추스른 김성근을 정식 감독으로 앉히고, 단장도 유성민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FA가 된 양준혁을 잡지 않았고[26] FA 보상마저 보상선수가 아닌 보상금으로만 받으면서 전력 보강의 기회마저 날려버렸다. 거기에 신인 지명에서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지명으로 인해 팜을 보강하기는커녕 오히려 삽질을 하고야 말았다. 내야를 보강하겠다고 실업팀을 거쳐 상무에서 뛰던 20대 후반의 김우석을 2차 1라운드 지명권을 써가면서 지명하였는데[27] 문제는 김우석을 지명하려고 거른 선수들이 바로 고영민조동찬이었다는 거다.

추가로 프런트 주도로 핵심 선수들의 연봉을 대거 깎아내기 시작하면서 유지현, 김재현, 이병규가 연봉조정 신청을 냈다. 결과는 유지현은 승리, 김재현은 삭감, 이병규는 동결로 끝났다.[28]

그리고 2002 시즌, 팀은 시즌 초 삼성에서 데려온 매니 마르티네스[29]가 부상으로 결장하고 현대에서 풀려서 영입한 톰 퀸란은 무안타 행진 끝에 방출[30], 간판 타자 이병규가 김성근 감독과 타격폼 문제로 갈등을 빚고 부진까지 겹쳐 2군으로 내려가는 등 난국에 빠지며 5월까지 중하위권을 전전[31]했고 김성근에 대한 반대 여론이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깨 부상에 시달렸던 유지현이 부상에서 복귀했고 미국에서 이상훈을 다시 영입하고, 대졸 신인 박용택과 불펜의 이동현, 장문석엄청나게 굴려서기용하면서 여름부터 상승세로 전환하며 3~4위로 뛰어올랐다. 마지막에 위기가 있었지만 최종전 하루 전날 두산 베어스SK 와이번스역전패하며 극적으로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리고 준플레이오프에서 현대 유니콘스를 2승으로 일축, 플레이오프 KIA 타이거즈전에서 1승 2패의 상황에서 4차전 심성보의 결승타, 5차전 무등야구장에 관중들이 을 지르게 만든 박용택의 활약으로 전문가들의 악평을 무색케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의 상대는 삼성 라이온즈.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6차전까지 끌고 왔지만 9회말 이승엽의 역전 3점포와 마해영끝내기 홈런으로 패하면서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2002년 포스트시즌의 선전으로 김성근의 입지는 탄탄해질 줄 알았지만, 11월 말 구단은 김성근을 해임시켰다.[32] 표면적인 이유는 김성근과 구단의 야구관이 맞지 않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정규시즌 초반의 부진으로 구단 수뇌부에서는 불만이 있었으며, 뒤에서는 한화 감독에서 물러난 이광환[33] 이미 내정해 김성근을 해임하려고 하였고 한국시리즈 준우승은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팬들 사이에서도 김성근을 두고 여러 갑론을박이 오갔으며 그 결과 다수 올드팬들과 김성근 추종자(노리타들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볼 수 있는)들이 팀을 떠나게 되었다.[34]

2002년 한국시리즈의 선전에도 프런트는 김성근을 해임하고, 동시에 사장 최종준도 사임하게 된다. 이를 메우기 위해 임명된 감독은 이광환, 사장은 어윤태였다.

이광환 감독 체제로 바뀐 2003년 시즌이 시작되고, 초반에는 군입대한 서용빈[35]을 제외한 지난 시즌의 전력이 고스란히 유지되긴 했지만 SK 와이번스의 급성장, 여전히 강력했던 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 KIA 타이거즈에 밀려 중위권으로 밀려났고, 5월 29일에는 주축타자 이병규가 십자인대 부상으로 시즌아웃 판정을 받으며 전력에서 이탈했다[36]. 마운드에서는 선발 이승호가 두 자릿수 승수를 거두고 최다이닝, 탈삼진 1위에 올랐고, 불펜진에서는 류택현전승남이, 마무리는 이상훈이 버티며 투수진은 여전했지만 이동현장문석은 전년도 혹사[37] 여파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병규의 시즌 아웃으로 물방망이가 된 타선은 힘이 떨어졌고 전반기 때 간신히 지킨 4위 자리를 내주면서 8월부터 순위가 슬슬 내려가기 시작하였고 9월 들어 마무리 이상훈이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중순까지 SK와 4위 경쟁하면서 버텼으나 한화와의 4연전 피스윕 기점으로 8연패를 기록하며 그나마 지키고 있던 5위자리를 내주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여 순위는 다시 올라가지 못하며 6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여담으로 시즌이 한창이던 2003년 7월, 이광환 감독은 구단 윗선에서 고참들인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에 대한 결정을 통보받았는데 그 내용인 즉 이 셋을 다음 시즌 전력구상에서 제외하라는 것. 당연히 이광환은 이에 반발했고, 시즌이 끝나자 프런트는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국내에 귀국한 선동열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겠다는 영입을 빌미삼아 그를 2군 감독으로 보내버렸고, 선동열 영입이 실패하자[38]대신 이순철을 새 감독으로 내정하면서 LG 트윈스, 아니 한국프로야구 사상 포스트시즌 연속 실패기록인 비밀번호 6668587667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4. 본격적인 10년 암흑기의 시작, 6668587667의 전반부(2004~2008년)

새 감독이 된 이순철은 우선 이상훈진필중의 영입과 기타 사건 등 팀 분위기 저하 등을 이유로 2004년 1월 SK 와이번스에 양현석, 오승준을 받는 조건으로 보냈으며 FA 미아가 된 유지현 또한 SK로 이적시키려고 하였다. 2004년은 초반에 치고 나가며 줄곧 2위에 있었지만 6월부터 내팀내를 시작하며 추락하다 8월 후반에 8연승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4위싸움에 불을 지폈지만 4위가 걸린 9월 중순 5연전에서 SK와 KIA에 모조리 패한 기점으로 6연패에 빠지면서 순위 경쟁에서 나가 떨어지며 또 6위를 기록했다. 전년도에서도 중요한 시기에 연패의 늪에 빠지며 가을야구 못갔다. 그리고 유지현이 은퇴한 데 이어 김재현은 프런트의 고관절 부상에 대한 각서에 실망하여 FA를 통해 SK로 가고 말았다. 보상선수 선발과정 또한 뒷목을 잡게 만들었는데, 당시 SK에는 정우람, 윤길현, 고효준, 윤희상, 신승현 등 많은 투수 유망주가 있었고 언론에서도 투수가 약했던 LG가 김재현의 보상선수로 투수 유망주를 지명할 거라는 예상이 나왔지만 3루수 포지션 보강 겸 SK의 전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전략으로 안재만을 지명했는데 SK 전력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39][40] 또한 시즌 말 병역비리 파동이 일어나면서 김광수, 이동현, 심수창 등 많은 유망주 자원들이 이탈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이동현은 2001년~2003년 간 무지막지한 혹사로 인해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재활하게 되었으나, 이순철은 최소 1년 이상 재활을 필요로 하는 선수를 8개월도 안 되어 실전 투구를 지시하는 등 무리하게 당겨쓰려다가 재활은커녕 오히려 상태가 심각해졌고 이후 인대 재수술과 두 번째 토미 존 서저리를 받는 등 무려 5년간의 공백 끝에 돌아오게 된다.

2005년 또한 7월초에 잠깐 반짝하여 4위 탈환한걸 제외하고는 시즌 내내 중하위권에서 놀다시피하며 또 다시 6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나마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SK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초대형 고춧가루를 작렬하며 플레이오프 직행 티켓을 두산에 뺏기게 한 것 정도. 2005년 11월에는 KIA와의 3대 3 트레이드를 통해 마해영을 영입했는데, 문제는 기아로 가는 3인 중 불펜의 핵심 장문석이 있었다. 장문석은 떠나면서 구단을 디스했는데, 팀을 위해 뼈빠지게 던졌지만 돌아온 결과는 토사구팽이었으니 그런 말이 나왔던 것.[41]

이순철의 마지막 해였던 2006년, 시범경기에선 1위를 했지만 정작 정규시즌에서는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여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수많은 팬들의 분노를 불러왔고, 6월 3일 팬들의 대대적 시위는 그 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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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순철은 그라운드에 빠따를 던진 마지막 모습을 끝으로 6월 5일 해임되었고 남은 시즌은 양승호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었지만 이미 기운 팀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끝내 8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는 구단 사상 최초의 꼴찌였다. 이순철 시기 3년 동안 구단 프런트는 송지만, 심재학, 박재홍 등 외부로부터의 트레이드 제안을 씹으며 전력 강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고, 진필중을 제외하면 FA 또한 거들떠보지 않았다. 외국인 선수도 알 마틴이나 루 클리어를 제외하면 실패에 가까웠으며 관광객 매니 아이바아마우리 텔레마코는 그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신인 선발 또한 2003년과 2005년을 제외하면 항상 똥망이었으며, 기껏 뽑아놓은 박병호, 정의윤, 우규민, 이대형, 이성열 등의 출장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현장에서는 써 먹을 선수가 없어 베테랑 위주로 돌릴 수 밖에 없었으며 자연히 전력은 막장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LG의 선택은 현대 유니콘스김재박 사단을 일부[42]만 제외하고 통째로 빼오는 것과 박명환의 영입이었다. 그러나 간판 타자 이병규주니치 드래곤스로 보내며 타선이 더 약해졌고 그 결과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2007시즌 LG를 유력한 꼴찌 후보로 찍었다. 그러나 시즌 결과는 5위로 8~9월달의 부진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4강에 들 수 있었기 때문에 큰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대형이 등장하면서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나름대로의 실적도 있었다.

이렇게 성적을 힘들게 끌어올렸다면, 그 다음은 전력을 더 올리기 위해 과감한 투자가 필요했지만 LG는 아니었다. 2007년의 선전에 안주해 프런트는 2007년의 전력 그대로 4강권에 도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눈에 띄는 전력 보강은 없었다. 결국 2008년 시즌에 앞서 보강을 소홀히 한 대가는 2년만에 최하위라는 불명예스러운 성적으로 돌아왔다. 봉중근, 크리스 옥스프링을 빼면 선발투수진은 전멸했고 정재복정찬헌을 갈아넣은 불펜진은 이 둘의 선수 생명까지 같이 갉아먹고 말았다. 타선 또한 안치용과 시즌 중 들어온 로베르토 페타지니만 빼면 막장이었다.

이 때문에 구단 내부는 시즌 중 대대적인 감사를 받았으며 온갖 치부들이 밝혀졌다. 몇몇 자리만 빼고 대부분의 구단 직원들이 잘려나간 시기가 이 시기의 일. 새롭게 바뀐 프런트의 선택은 FA시장 영입이었으며 그 결과 이진영정성훈을 영입하면서 2009년을 대비했다.


[1] LG의 휴식일 사이 빙그레가 해태와의 홈 4연전에서 스윕패를 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2] 다만 MBC 청룡 시절에도 1983년 후기리그 우승과 함께 전후기 통합 승률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단일리그 체제에서 정규시즌 첫 우승은 맞다.[3] 그해 포스트시즌은 모든 시리즈가 스윕승이었고 휴식일이 길어 체력적인 영향은 덜 받았다. 다만 상대전적에서 LG의 13승7패 절대우세로 LG의 우세가 조금 더 예상되었다.[4] 백인천의 증언에 따르면 MBC 시절 맺은 감독 계약은 표면상으로는 2년이었지만, 실제로는 1+1 계약이었다고 한다. 백인천 본인은 첫 해 통합우승을 차지했으니 당연히 좋은 조건에 재계약할 줄 알았는데, 프런트 직원에게 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1+1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는데도 프런트는 사태를 무마시키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백인천이 미국인 코치 영입에 반발해서 깽판친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고...[5] 투수쪽에서는 전년도 선발의 축들이었던 김태원과 문병권이 부진했으며 정삼흠, 김용수, 김기범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심했다. 그리고 시즌 중 정삼흠은 빈볼시비로 10경기 출장 정지를 먹기도 했다. 타선에서는 윤덕규와 노찬엽 정도만 분투했을 뿐 나머지는 기대 이하였다. 특히 불과 전년도 신인왕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김동수는 1할대로 부진했다.[6]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나온 이 뇌주루로 인해 방출대기명단에 올랐지만 1년뒤에 그 한타석에서 보여준 엄청난 한방 덕분에 그때의 뇌주루는 묻혔으며 기억하는 팬들 또한 많지 않다. 그리고 선수생활도 몇년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7] 포수 김동수, 1루수 서용빈, 2루수 박종호, 3루수 한대화, 외야수 김재현[8] 특히 1997년에는 504 대참사가 일어났다![9] 팀내 유일한 10승 투수.[10] 당시, 40 가까이가 될 무렵인데도 불구하고 20세이브 이상을 거뒀다.[11] 1차 지명으로 뽑은 신인 선수여서 기대가 더 컸으나 최종 성적은 147⅓ 이닝 9승 15패 방어율 6.17로 망했다.[12] 애초에 타자가 쓰는 어깨 근육과 투수가 쓰는 어깨 근육 부위 자체가 다르다고 한다. 평소에 쓰지 않았던 근육을 쓰게 되니 부상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 실제로 뒤늦게 투수로 전향한 권준헌 역시 투수 전향 초반에는 어깨가 싱싱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부상으로 고전하며 얼마 가지 못했다.[13] 둘 다 20홈런 이상 치지 못하였다.[14] 아이러니하게도 전임 감독 천보성과 후임 감독 이광은은 2012년 입시비리 당시 혐의가 드러나면서 나란히 연루되고 만다.[15] 당시 양준혁을 상대로 해태에 트레이드된 손혁은 이에 반발하면서 트레이드를 거부,(당시 김응용 감독이 있던 해태의 쌍팔년도식 덕아웃 문화와 열악한 인프라 등으로 인해 해태로 트레이드되는 걸 거부했다는 말이 있다.) LG와 해태 양쪽 구단에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결국 해태에서 임의탈퇴 공시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야구를 쉬다가 2001년 김성한 해태 감독의 요청으로 인해 임의탈퇴가 해제되며 해태로 복귀했으나 이미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두산으로 트레이드된 뒤 얼마 안 되어 3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만다. 어찌보면 트레이드 하나가 선수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셈.[16] 이광은의 이러한 정책 때문에 피를 본 것은 안상준 등 한창 자리잡고 있던 유망주들이었다.[17] 이후 심재학은 현대로 떠나 두번째 우승에 일조했고 2001년 두산으로 건너가 3할 4푼대 타율과 골든글러브를 찍는 등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고, 2년 연속으로 우승을 맛보게 된다. 반면 심재학의 맞트레이드 상대였던 최원호는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인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마해영에게 역사적인 끝내기 홈런을 맞은 투수라는 임팩트가 큰 데 이어, 이후 LG에서도 2005년을 제외하면 별 활약을 하지 못하게 된다. 거기에 현대 또한 심재학을 1년간 잘 기용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했고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두산에서 심정수를 받아오는 등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현대의 압승으로 끝나게 된다.[18]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용수는 기량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시즌 후 은퇴하고 만다.[19] 여기에는 두 가지 정설이 있는데 첫번째는 이광은 감독과 김용수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잘 던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내려버렸다는 것과 두번째는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장문석의 사기를 복돋아 주기 위해 그랬다는 설이 있다. 이후 김용수가 2000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하게 됨에 따라 이 경기는 김용수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20] 특히 심정수는 2차전까지 부진 했는데 심정수가 때린 홈런은 모두 승부를 짓는 홈런들이였다.[21] 이 때 까지만 해도 LG는 그가 해태에서 했던 만큼은 아니여도 그래도 평타 이상을 해줄거라 믿고 영입을 했다. 작년도 신규 창단팀이였던 SK가 돈을 더 많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단지 팬이 있어야 야구를 즐기고 싶어서 LG를 선택하였다. 또한 부진 하였을 때 잠실에서 출장하면 스트레스가 잘 풀리기에 좋았다 라고 언급했지만 그 결과는...[22] 당시, 유승안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에 따르면, 로마이어가 아예 혼자 선수들 타격 지도까지 했다고... 로마이어가 그만 두지 않으면 유 수석코치 본인이 그만 두겠다고 응수를 했었다.[23] 이 당시 언론에서는 양혁-로이어-김현-홍우 네명의 이름 두번째 글자만 따서 '준마재현'이라고 부르며 타선만큼은 우승권이라고 평가했다. 게다가 상위타선에는 발빠르고 정교한 유지현과 이병규도 있었고. 그러나 막상 시즌 들어가니 양준혁만 대활약을 했고 김재현도 평타 이상으로 쳤지만 로마이어는 코칭스태프와의 불화로 시즌 중반 퇴출됐고 홍현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4] 하지만 김성근은 리그 전반기 시점에 홈런에서 10위권 및 타점 1위를 찍던 로마이어를 퇴출한 우를 범했다.[25] 여담으로 2001년 롯데의 승률은 0.457이며 KBO리그 역대 최고 승률의 꼴찌이다.[26] 다만 이것은 양준혁이 선수협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과 본인이 LG와 우선협상을 하던 중 LG가 제시했던 금액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불러버려 협상을 진작에 파토내버린 것도 있다. 김성근에 따르면 구단이 양준혁을 꼭 잡아야 한다면서 내치지 말라고 그렇게 반대를 하였다.[27] 2000년까지 삼성 2군 감독을 했었고 2001년 초까지 LG 2군 감독을 했던 김성근이 상무에서 군 복무 중이던 김우석을 높게 평가하면서 강력하게 뽑아 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문제는 김우석이 수비는 높게 평가받았으나 타격은 2군 무대에서도 좋지 못한 편이라서 2차 1라운드에서 뽑힐 정도는 아닐 수준이었다는 것.[28] 유지현은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연봉조정신청에서 선수가 구단을 이긴 케이스이지만, 이로 인해서인지 구단에 찍혀 반 강제성 은퇴를 하고야 만다. 김재현은 이 후 고관절 부상과 각서 사건으로 인해 아시다시피... 이병규는 훗날 FA가 되자마자 뒤도 안돌아보고 NPB 러브콜에 LG와 협상도 제대로 하지 않고 주니치 드래곤즈와 계약해버린다.[29] 외국인 최초 사이클링 히트를 쳤었고 발 느린 그 전 해 삼성 선수들 중 팀 도루 1위였다.[30] 이 선수는 현대에서 제계약 거부 당시 은퇴 준비였는데 LG 수뇌부에서 그의 파워를 보고 1시즌을 같이 하자고 불렀었다. 명백한 LG 프런트의 삽질.[31] 이병규에게 있어서 생애 첫 2군행.[32] 그러나 이후 10년 암흑기원인누구였는지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정이었다.[33] 이 당시 한화 감독을 맡고 있었던 이광환은 성적에 상관 없이 다음 시즌인 2003년부터 한화 구단이 차기 감독인 유승안을 내정하려는 사실을 알게 되자 2002년 후반기에는 거의 태업에 가까운 경기 운영을 보여주었다.[34] 이상훈이나 김재현 등의 선수들이 이순철 감독 시절 감독 및 프런트와 갈등을 빚다 팀을 떠나면서 잠시 그들이 자리잡았던 SK 와이번스로 올드팬들이 어느 정도 이탈했다가 김재박 재임 시기 돌아오기도 했다. 단, 김재박호 시절에는 FA 영입이 잦고 유입이 많았지만, 대신 개인 성적들은 좋고, 성적이 별반 다름 없어서 팬들이 고통을 받았었다.[35] 이 때, 한국 나이 32살로 매우 늦게 입대했다.[36] 98년 2년차 징크스를 제외한 역대 시즌에서 가장 불운한 커리어 로우였다.[37] 둘 다 김성근 감독의 눈에 걸려 죽어라 던졌다. 중간 계투에도 불구 하고 100이닝을 돌렸으니...[38] 이 당시 잠실 라이벌 팀 두산 베어스도 선동열을 차기 감독으로 영입하기 위해 9년 간 두산 감독을 맡아서 두 번의 우승을 이뤄낸 적 있던 김인식 감독을 사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선동열은 스승 김응용이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로 가게 되며 결론은 두 구단 모두 애꿎은 감독을 내쳐버린 셈이 되었다.[39] 오히려 SK는 안재만을 LG에 내주자 롯데에서 FA 미아가 되어 나온 전천후 내야수 김태균을 사인 앤 트레이드 방식으로 영입하여 3루수 공백을 메웠고, 이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최정이 3루수 자리를 차지하였다.[40] 당시 LG가 지명할 거라고 예상했던 투수들인 정우람, 윤길현, 고효준, 윤희상, 신승현은 알다시피 몇 년 후 SK의 주축 투수가 되었고, 반면 안재만은 LG에서도 부상 등으로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얼마 안 가 은퇴하고 말았다.[41]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장문석은 KIA로 이적한 후 팬들로부터 팀 분위기를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으니… 특히 김진우의 방황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까였다.[42] 김시진, 이명수, 염경엽이 현대에 남았고, 염경엽은 현대 해체 후 LG로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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