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22 19:25:34

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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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유도.png   2019 정규시즌 경기에 대한 내용은 KIA 타이거즈/2019년/5월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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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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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기본 정보 현대자동차그룹 |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 | KIA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2군 |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 명단 선수단 명단
등번호 선수단 등번호
유니폼 KIA 타이거즈 유니폼
구장 1군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 | 월명 야구장 | 무등 야구장
2군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
타이거즈 히스토리 해태 타이거즈 역사 | KIA 타이거즈 역사 | 역대 감독
우승 기록 1983년 V1 | 1986년 V2 | 1987년 V3 | 1988년 V4 | 1989년 V5 |
1991년 V6 | 1993년 V7 | 1996년 V8 | 1997년 V9 | 2009년 V10 |
2017년 V11
현재 시즌 2019년 시즌
사건·사고 및 관련 신조어 사건 및 사고 | 타어강 | 엘롯기 | 헬로키티
팬덤 관련 정보 응원가 | KIA 타이거즈 갤러리 | 호랑이 사랑방 | V12 카페 | 호랑이가족한마당
지역 연고 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 광주진흥고등학교 | 광주동성고등학교 | 순천효천고등학교 | 화순고등학교 | 인상고등학교 | 고창영선고등학교
기타 타이거즈 러브투게더 | 호돌이 | 호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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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ATIGERS_1.png
KIA 타이거즈
KIA Tigers
창단 1982년 1월 30일
법인 설립 1982년 5월 29일
팀명 변경 2001년 8월 1일
법인명 ㈜기아타이거즈
모기업 현대자동차그룹
상장유무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대기업
구단명 변천 해태 타이거즈 (1982~2001)
KIA 타이거즈 (2001~)
연고지 전라남도[1]/전라북도 (1982~1989)
광주직할시/전라남도 (1990~1999)
광주광역시 (2000~)[2]
구단주 정몽구[3]
사장 이화원[4]
단장 조계현
감독 박흥식(대행)
주장 안치홍
홈 구장 무등 야구장 (1982~2013)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2014~)
제 2구장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 (1982~1989)
월명 야구장 (2001~2013[5])
2군 구장 전남 야구장 (2006~2011)
기아 챌린저스 필드 (2012~)
마스코트 파일:external/www.tigers.co.kr/20170209102036_sukrrztt.png
호연이&호걸이
킷 스폰서 파일:external/www.majesticathletic.com/mjst-logo.png
워드 마크 파일:external/8d3c91b4781f46c173d1c1c84857a8ba4659d314c02f6b7557e84e0ebc626346.png
홈페이지 파일:external/s20.postimg.org/kiatigershat.png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유튜브 아이콘.pn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
최종 우승 (11회 ) [6]
파일:external/oi67.tinypic.com/2wppm35.png 파일:external/oi64.tinypic.com/rsbl1h.png 파일:external/oi66.tinypic.com/o6n2gg.png 파일:external/oi68.tinypic.com/2qi9ymb.png
1983년 1986년 1987년 1988년
파일:external/oi63.tinypic.com/jj2wxk.png 파일:external/oi65.tinypic.com/2evuve0.png 파일:external/oi65.tinypic.com/2mdfqcx.png 파일:external/oi63.tinypic.com/9ase35.png
1989년 1991년[7] 1993년 1996년
파일:external/oi66.tinypic.com/1dyipl.png 파일:external/oi63.tinypic.com/244s6lk.png 파일:Tigers_2017_v11.png
1997년[8] 2009년 2017년
페넌트레이스 우승 (9회)[9]
단일 리그 1991년, 1993년, 1996년, 1997년, 2009년, 2017년
전·후기 리그 1983년 전기, 1988년 통합[10]
포스트시즌 진출
한국시리즈[11] -2 '''[[한국프로야구/1983년|1983년]]''', '''[[한국프로야구/1986년|1986년]]''', '''[[한국프로야구/1987년|1987년]]''', '''[[한국프로야구/1988년|1988년]]''', '''[[한국프로야구/1989년|1989년]]''', '''[[한국프로야구/1991년|1991년]]''',[br]'''[[한국프로야구/1993년|1993년]]''', '''[[한국프로야구/1996년|1996년]]''', '''[[한국프로야구/1997년|1997년]]''', '''[[한국프로야구/2009년|2009년]]''', '''[[KBO 리그/2017년|2017년]]'''
플레이오프 -2 '''[[한국프로야구/1987년|1987년]]''', '''[[한국프로야구/1989년|1989년]]''', [[한국프로야구/1990년|1990년]], [[한국프로야구/1992년|1992년]], [[한국프로야구/2002년|2002년]], [[한국프로야구/2003년|2003년]]
준플레이오프 -2 [[한국프로야구/1994년|1994년]], [[한국프로야구/2004년|2004년]], [[한국프로야구/2006년|2006년]], [[한국프로야구/2011년|2011년]]
와일드카드
결정전
-2 [[KBO 리그/2016년|2016년]], [[KBO 리그/2018년|2018년]]
프랜차이즈 팀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최고 승률 .659
1993년 126경기 81승 42패 3무
최저 승률 .392
2005년 126경기 49승 76패 1무
최다 승 87승
2017년 144경기 87승 56패 1무
최다 패 77패
2015년 144경기 67승 77패
최다 관중 1,024,830명
2017년[12]
최소 관중 69,830명
2000년[13]
최고 FA 계약 4년 100억 원[14]
2017년 최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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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팀의 역사
3.1. 구단 엠블럼3.2. 해태 타이거즈 시절3.3. KIA 타이거즈의 탄생
3.3.1. 감당하기 힘든 연봉3.3.2. 닥쳐온 경제 한파3.3.3. 팔고 팔고 또 판다3.3.4. 제발 저희 팀 좀 매입해주세요3.3.5. 탄생, KIA 타이거즈
3.4. 김성한 체제 3.5. 유남호, 서정환 체제3.6. 조범현 체제3.7. 선동열 체제3.8. 김기태 체제
4. 우승 경험5. 관련 기록들
5.1. 역대 사장(대표이사)5.2. 역대 단장5.3. 역대 감독5.4. 역대 주장5.5. 역대 은퇴식5.6. 역대 성적5.7.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5.8. 역대 등번호 리스트5.9. 역대 개인 성적
5.9.1. 통산 성적5.9.2. 단일 시즌
6. 선수단7. 응원단
7.1. 역대 응원단장7.2. 역대 장내 아나운서
8. 응원가9. 유니폼10. 마스코트
10.1. 호돌이&호순이 (1996~2016)10.2. 호걸이&호연이 (2017~ )
11. 인기도
11.1. 최악의 팬 서비스
12. 영구결번13. 외국인 선수 선발
13.1. 투수13.2. 타자
14. 이모저모
14.1. 선수 육성 체계14.2. 라이벌 팀
14.2.1. 전통의 라이벌, 삼성 라이온즈14.2.2. 인기 구단 라이벌, LG 트윈스14.2.3. 영호남 라이벌, 롯데 자이언츠14.2.4. 그 외
14.3. 신인왕 잔혹사14.4. 군기 및 징계14.5. 선수들의 충성심14.6. 노란 응원막대14.7. 잠수함 투수 전성시대14.8. 호랑이가족한마당
15. 홈 구장16. 지역 연고 학교17. 출입기자단18. 사건 사고19. 팬 커뮤니티20. 각종 이야깃거리21. 유명 타이거즈 팬22. 관련 문서23. 둘러보기



1. 개요

KBO 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광주광역시.

KBO 최고의 인기 구단 중 하나이자 KBO 한국시리즈 11회 진출-11회 우승의 진기록을 보유한 팀이며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사상 최다 우승을 자랑하는 명문 구단이다.[15]

2. 상세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align=center><table width=320><table bordercolor=#C70125> 파일:KIATIGERS_1.png -1 [[KIA 타이거즈|{{{#FFFFFF '''KIA 타이거즈'''}}}]]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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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기본 정보 현대자동차그룹 |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 | KIA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2군 |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 명단 선수단 명단
등번호 선수단 등번호
유니폼 KIA 타이거즈 유니폼
구장 1군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 | 월명 야구장 | 무등 야구장
2군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
타이거즈 히스토리 해태 타이거즈 역사 | KIA 타이거즈 역사 | 역대 감독
우승 기록 1983년 V1 | 1986년 V2 | 1987년 V3 | 1988년 V4 | 1989년 V5 |
1991년 V6 | 1993년 V7 | 1996년 V8 | 1997년 V9 | 2009년 V10 |
2017년 V11
현재 시즌 2019년 시즌
사건·사고 및 관련 신조어 사건 및 사고 | 타어강 | 엘롯기 | 헬로키티
팬덤 관련 정보 응원가 | KIA 타이거즈 갤러리 | 호랑이 사랑방 | V12 카페 | 호랑이가족한마당
지역 연고 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 광주진흥고등학교 | 광주동성고등학교 | 순천효천고등학교 | 화순고등학교 | 인상고등학교 | 고창영선고등학교
기타 타이거즈 러브투게더 | 호돌이 | 호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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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가 도시연고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명목상 연고지는 광주광역시로 국한되지만 실질적으로는 호남 지방 전체를 대표하는 구단이다.[16] 신인 지명에 있어서도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NC 다이노스가 지명권을 갖는 전주, 군산 제외)가 타이거즈의 지역연고선수 지명지역.

두산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LG 트윈스와 마찬가지로 KBO 리그 원년에 창단된 프로야구단 중 하나로 1982년 해태 타이거즈가 창단 당시의 구단명이었다.

창단 당시부터 2013년까지는 무등 야구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다가 2014년부터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를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준우승을 해본 적이 없는 팀. 다만 정규 시즌 2위는 꽤 있다. 1989, 1990, 1992, 2002, 2003년에 2위를 기록했다. 그 중 1989년에는 업셋 우승까지 했다. 이 중에서 우승한 것은 1989년이 유일하다. 이후로는 쭈욱 플레이오프 탈락. 1989년에는 정규시즌을 2위로 마감해서 플레이오프에서 '돌풍의 팀' 태평양 돌핀스를 제쳤고 한국시리즈에서는 빙그레 이글스를 꺾고 당시로서는 최초의 기록이던 한국시리즈 4연패에 성공했다. 1990년은 시즌 막판까지 LG 트윈스와 선두경쟁을 하다 결국 뒤집히면서 분위기가 꺾였고 결국 삼성 라이온즈에게 플레이오프에서 스윕당했다. 1992년에는 롯데 자이언츠와 만났는데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승 3패로 패했고 2002년에도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아쉽게 패했다. 이듬해에는 SK 와이번스에 완패했다.

팀 컬러는 창단 초기부터 막강 투수진과 일명 KKK[17]포라고 불리는 야수진의 조화로 우승을 경험했고, 선동열의 일본 진출과 이종범의 입단 이후부터는 투수에 중점을 두는 투수 위주의 팀으로 흘러가고 있다.

팀의 상징색은 빨강색이고, 세컨드 컬러로 검은색을 밀었다가, 2015년부터는 유니폼에 다크블루(감색)를 적용하면서[18] 점차 다크블루 사용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응원도구 색상은 빨간색, 감색 둘 중 하나도 아닌 노란색이다.[19]

해태 타이거즈의 경영 악화로 인해 당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인수하여 2001년 8월 현재의 이름으로 구단명이 바뀌었다. 굳이 기아라고 한글로 팀명을 표기하지 않는 것은 굶주린다는 의미의 기아(飢餓)가 연상되기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존재한다.[20][21] 물론 KIA는 Killed In Action의 약어로 사용되는데 어차피 여긴 영미권 국가도 아니고 애초에 내수시장을 염두한지라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찌되었든 한국어 기반인 기아는 로마자로, 영어 기반인 'Tigers'는 한글로 적혀있는 희한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2011년 모 기업이 새 CI 통합으로 인해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바뀜에 따라 팀명도 현대 타이거즈로 바뀔 수도 있다는 예상이 있었으나 루머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는 모기업 이름이 아닌 모기업의 계열사명 중 하나를 딴 셈이 됐다. 두산그룹을 모기업으로 하는 구단이 한때 두산이 아닌 OB라는 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슷한 셈. 이는 현대자동차그룹 내부의 '1사 1구단' 정책에 따른 것이다. 모기업 중 가장 중심에 있다고 볼 수 있는 현대자동차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밑에 설명하겠지만, 덕분에 기아자동차가 타이거즈 구단을 맡으면서 본래 기아자동차 밑에 있었던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농구단을 같은 계열인 현대모비스에 넘겨야 했다.

3. 팀의 역사

3.1. 구단 엠블럼

역대 엠블럼 변천
파일:tigersfirstlogo.jpg파일:KtFaXn9.jpg파일:32zZQzk.png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1982.1.6~1.181982~1995 1996~2001
파일:external/s20.postimg.org/KIAtigersold.pn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ia_Tigers.svg.png파일:Tigers_negative_logo.png
KIA 타이거즈 KIA 타이거즈 KIA 타이거즈
2001~2009 2010~2016 2017~

해태 타이거즈는 로고가 두 번 바뀌었고, KIA 타이거즈로 전환한 뒤에도 두 번 바뀌었다.

팀 창단 최초의 로고는 1982년 프로야구 개막 직전 만들어서 아주 짧게 사용했던 로고가 있다. 2017년 어느 블로거의 발견 글 1982년 1월 6일에 공개되었지만 같은 달 18일에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유명한 해태 타이거즈의 개막 공식 로고로 바뀐다. 저 최초의 로고는 영문으로 TIGERS가 찍혀있는데 2001~2009년의 로고의 글자체가 이와 가장 비슷하며, 2017년 이후 현재 로고도 매우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짧게 쓰인 탓인지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 내 역사 박물관이나 구장 곳곳에서도 이 로고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KIA 타이거즈 초기 로고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유사한 글씨체를 차용했다. 비록 꼴찌를 두 번 찍는 참담한 암흑기를 거치기도 했고 충격과 공포의 회색 원정 유니폼을 사용한 적도 있었지만, 이 로고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해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젊은 KIA 팬들에게는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로고이다. 실제로 KIA의 올드유니폼 데이(Go T09ether Day 등) 경기에서는 현재 로고 대신 2009년 이전까지의 로고가 표시된다.

우승 이후 2016년까지 사용했던 로고는 이전의 대칭형 로고에서 벗어나 비대칭형 로고를 채용하면서 역동적인 모습을 담아내려 했다. 다만 전반적으로 한화 이글스와 로고가 비슷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이 시기 KIA는 2011년 준플레이오프 진출과 2016년 와일드카드 진출을 제외하면 가을야구와는 연이 없었고, 특히나 KIA의 팜을 작살냈다는 평을 받은 선동열 감독의 부임시기와 맞물리면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시기가 되었다. 여담으로 이 시기부터 KIA는 팀의 얼터너티브 컬러로 감색(어두운 청색)을 내세웠다.

현재의 로고는 2017 시즌 시작 전 공개한 로고이다. 이전까지의 비대칭형 로고 및 원형 로고에서 벗어나 대칭형과 홈베이스를 상징한 것이 특징이며, 팀의 세컨드 컬러인 다크 블루(감색)를 본격적으로 밀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22] 당시 비슷한 시기에 현대글로비스 럭비단이 창단했는데, 이 로고를 응용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KIA 타이거즈를 시작으로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의 로고 및 유니폼 디자인이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팬들 사이에는 처음에는 어색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깔끔한 폰트체로 해태의 공식 첫 로고 이후 가장 좋은 평을 받고 있다.

3.2.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90년대까지의 역사는 해태 타이거즈 문서 참조.

3.3. KIA 타이거즈의 탄생

3.3.1. 감당하기 힘든 연봉

KIA 타이거즈의 탄생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1980년대의 야구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해태 타이거즈는 프로야구 초창기에 지역위주의 신인 선발[23]로 인해 당대 최고의 고교 야구팜중 하나인 호남팜을 모조리 휩쓸어 갈 수 있었고 이들을 지휘했던 김응룡 감독의 리더쉽, 그리고 열성적인 호남 지역 팬들의 응원등이 합쳐지며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다. 더구나 당시는 이름만 프로야구지 경기력, 리그운영, 신인육성, 피지컬 트레이닝, 스카우트 등 전반적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가 성적으로 꼭 직결되지는 않았다. [24] 거기에 FA제도도 없고 각 구단들의 담합에 따른 연봉인상제한[25] 등으로 각 구단별 예산의 격차가 크지도 않았다.

하지만 당시 재벌 중에서도 하위권이었던 해태그룹은 자금력 측면에서 다른 재벌 구단에 비해서 현저하게 뒤진게 사실이었고,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해태는 선수단 연봉을 지나치게 짜게 준다는 불만이 노골적으로 터져 나올 정도였다. 이에 관해서는 해태 타이거즈의 부실 지원 문제를 참고.

그리고 1990년대 접어들면서 프로야구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자금력이 취약했던 해태(그리고 쌍방울)와 여타 구단의 격차는 날이 갈 수록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야구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진원지는 당시 야구단을 창단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현대그룹이었다. KBO는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하면서 강원도 통천이 고향이었던 정주영 회장한테 인천·경기·강원 연고 프로야구단 창단을 제안하였지만 서울올림픽에 집중하고 싶다면서 거절당했다.[26] 그리고 인천경기 지역 연고에는 인천에 공장을 가지고 있던 삼미그룹이 자진해서 나서면서 결국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되었다.

하지만 프로야구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1990년대 들어서 현대도 프로야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던 다른 재벌들의 견제로 진입이 쉽지가 않았다.[27] 신생팀 제 9구단 창단도 힘들고, 다른 팀을 인수하려고 해도 신통치 않자 현대그룹은 현대 피닉스라는 실업야구단을 창단해서는 기존 프로야구단을 훌쩍 뛰어넘는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여, 당시 아마야구 유망주들을 말 그대로 싹쓸이 해버렸다. 프로에서 족히 4~5년은 뛰어 지명도를 얻어야만 가능했던 꿈의 액수라고 알려진 1억대의 연봉이 프로 데뷔를 하지 않은 젊은 선수들에게 뿌려지자, 타 구단들은 유망주들을 모셔오고자 현대의 에스컬레이터식 금액을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KBO구단들과 현대그룹은 정면충돌하였고, 아마야구계는 선수확보를 둘러싼 양자의 이전투구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결국 이 갈등은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서 현대 유니콘스로 이름을 바꾸는 방식으로 프로야구에 진입하면서 봉합되었다.[28] 즉, 이젠 대놓고 선수를 비싸게 살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리고 1996년 드디어 재계 서열 1위의 현대가 야구판에 등장하면서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라는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현대그룹삼성그룹은 야구판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기 시작한다. 두팀은 신인계약금과 선수단 연봉으로 고액을 책정했고, 그외에 승리수당과 각종 포상금으로도 어마어마한 거액을 뿌렸다. 거기에 2군전용 훈련장, 외국인 코치, 트레이닝 시설 등 시설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오직 우승을 위해서 현금 트레이드도 수시로 단행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다른 구단들도 최소한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계약금과 연봉을 훨씬 높여줄 수 밖에 없었고, 야구단 운영비가 치솟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프로야구에도 본격적인 머니게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자금력이 취약했던 호남 연고의 두 구단 해태 타이거즈쌍방울 레이더스는 야구단 운영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3.3.2. 닥쳐온 경제 한파

돈싸움은 시작 되었고 마침 1997년 외환 위기가 슬슬 터지려고 해서, 구단주인 해태 그룹의 경제가치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해태와 상당한 친분이 있던 대우그룹이 인수를 시도했지만, IMF로 사이좋게 재정위기가 오자 GG치고 포기하였다. 거기에 대우그룹 오너였던 김우중 회장은 대한축구협회 회장까지 지냈을 정도로 열혈 축빠였기 때문에 야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우가 한참 잘 나가던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에 삼성그룹LG그룹 등 다른 재벌기업이 프로야구단 운영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자 대우그룹 임원이 "회장님, 이참에 우리도 야구단 하나 만드시죠"라고 제안했지만 김우중 회장은 야구단 창단을 제안한 그 임원을 "뭐 이런 병X 같은 인간이 다 있나"라면서 거부한 적이 있을 정도. 결과론이지만 대우가 야구단을 창단했으면 얼마 안가 모기업이 망해 현대, 쌍방울의 길을 밟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대우도 광주 지역을 연고로 한 기업이나 하청이 있는 것도 아니라 창단하려 해도 KBO나 지역팬들이 그렇게 달갑지 않게 볼 수도 있다. 프로야구가 왜 창단되었는지, 또 정치인들이 이걸 어떻게 써먹었는지를 보면 이상할 것도 아니다.

3.3.3. 팔고 팔고 또 판다

팀의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해태가 선택한 방식은 선수의 재판매였다. 팀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선동열이종범일본에 팔아[29] 스카우트 머니로 어찌어찌 일년은 버텼지만 모기업인 해태그룹이 1998년에 부도가 나버려서 있는 선수, 없는 선수 모조리 팔아치우는 상황에 직면했다.

삼성 라이온즈가 이 시기에 선수를 대량으로 세트 덤핑구입을 하는 통에 '돈성'이란 이름을 굳히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FA가 생긴 이유도 돈으로 선수를 쉽게 사기 위한 삼성의 계략이였다. 당시 지역연고제가 아직까지 남아있었고, 트레이드의 경우 선수의 의견과 상관없이 기업이나 감독이 하는 거기 때문에 구단이나 감독이 " 나 얼마 이상 아님 이 선수 안줌" 이래버리면 그 선수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림에 떡이 된다. 그러나 FA가 시작되면서 선수가 가고싶은 구단에 갈 방법이 생겼고, 자금을 바탕으로 " 그 구단보다 이정도 더줄태니까 그냥 와라" 라고 하면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와서는 상황이 반대로 돌아가고있지만.

3.3.4. 제발 저희 팀 좀 매입해주세요

선수를 팔아 치워 정상적인 경기 운행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오자, 한국 프로야구가 4팀 2리그제로 운영된다는 사실이 대두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한 팀만 빠져도 전반적인 밸런스가 엉망이 되는 상황에 빠진다는 것인데, 프로야구 관계자들이 해태 타이거즈의 새 주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리그 판이 박살난 상태였고, MLB붐으로 인한 프로야구의 상징성이 약화되어 인수처는 나타나지 않았다.

포스코전라남도 광양시에 제철소를 가지고 있어 연고지 조건을 아슬아슬하게 갖추었기에 인수시도가 있었으나 포스코의 재정이 파탄난데다 포스코의 대주주들이 손해보는 행동을 하려고 한다며 업무상 배임으로 고발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기본적으로 포스코의 대부인 박태준 회장이 야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30] 프로야구 출범 시에도 대구·경북지역 연고구단으로 포스코가 거론되었으나 거부했던 역사가 있다.[31] 그리고 IMF 이후 외국 펀드들이 주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별다른 수익도 없고 생산재 기업으로 뚜렷한 홍보효과도 기대하기 힘든 프로스포츠 투자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32]

광주시민들은 광주를 발판으로 성장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인수하기를 원했으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프로리그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금호 역시 소비재 위주의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KBO 창설 때도 삼양사, 교보생명과 함께 호남권 구단 1순위 기업이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거부했고, 1997년에 서울을 연고지로 한 프로리그 팀을 찾아보다가 관두었다고 한다. 뒤에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을 창단하지만 투자는 하지 않았다. 결국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은 한국산업은행 산하 KDB생명으로 인수되어서 현재 구리 KDB생명 위너스가 되었다. 게다가 금호그룹은 본래 프로스포츠보다는 음악 등 문화 예술 분야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3.3.5. 탄생, KIA 타이거즈

파일:external/www.kia.com/img-Vs-2001.jpg

타이거즈의 새 주인을 구하느라 하루하루 속을 태우는 와중에 구원의 손길이 갑자기 나타났다.

2001년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 회장이 오늘 내일 할 즈음,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둘째 아들인 정몽구 회장이 현대카드,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등 일련의 계열사를 분리시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을 설립하는 속칭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는 금융법상 사소한 절차가 무시되었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는데 정부가 OK 사인을 내주어 왕자의 난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은 돌연 해태 타이거즈의 인수를 선언했다. 참고로 당시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기아차 측에서 인수를 거절했으나 이후 마음을 바꿔 인수하기로 결정 내린 사항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룹 설립 과정에서 사소한 절차가 무시된 것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정부에서 해태 타이거즈 인수를 요청했다는 카더라가 있지만, 실제로 정몽구 회장은 인천을 떠나 수원에서 유랑 생활을 하던 자신의 동생 구단인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려고 접근했다고 한다. 허나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는 그야말로 오늘 내일 하던 상황이라 인수 대금으로 현대 유니콘스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했을 때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었던 900억을 불렀는데, 이것에 정나미가 떨어진 정몽구 회장은 현대 유니콘스를 바로 포기하고 비교적 싼 가격을 부른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당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지불한 인수대금은 채권은행인 조흥은행에 180억 원, KBO 가입 기금 30억으로 총 210억 원이었다. 광주광역시기아자동차 공장(구 아시아자동차 본사)[33]이 있어서 지역 연고 요건을 갖추었다.[34] 이에 따라 1사 1팀 정책 때문에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농구단은 현대모비스로 이관되어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로 탈바꿈했고 현대자동차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만 전담하게 되었으며, 현대자동차 배구단[35]은 현대캐피탈로 이동, 현재의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로 탈바꿈했다.

일부팬들의 경우 KIA 타이거즈의 출범을 놓고 어째서 KIA가 해태의 V9를 가져가려고 하는거임? KIA가 우승하면 V1 아님? 이라는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KIA 타이거즈의 출범 경로는 SK 와이번스넥센 히어로즈같이 쌍방울 레이더스 현대 유니콘스처럼 해체된 팀의 선수들과 계약해서 신규 창단한 것이 아닌 과거 LG그룹MBC 청룡인수해서 창단한 전례를 따르고 있어,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계승한다.[36]

즉, KIA 타이거즈는 해체 후 신규창단이 아닌 인수 형식이기 때문에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가게 되는 것. 팀은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KIA가 V1이라면 MBC나 삼청태를 모조리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삼성의 경우 제일기획으로 팀의 의사결정이 이관되었지만 제일기획 역시 삼성그룹의 계열사이며, 아직 삼성전자가 삼성 라이온즈의 주주이기 때문에 다르다.

그런데 창단 30주년이 되는 2011년에 구단에서는 창단 10주년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했다. KIA로 이름이 바뀐 것만을 기념하면 10주년이 맞지만, 엄연히 해태를 계승한 구단이기에 의아하게 생각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MBC를 인수하고 홈페이지 역사관에서도 전신 시절 언급을 하지만 구단사를 가리켜 23년이라고 하는 LG와 같은 식이다.

3.4. 김성한 체제

캐치프레이즈
2001~2003년 꿈을 심는 KIA! 용맹스런 Tigers![37]
2004년 함께하는 KIA! 도전하는 Tigers!

2001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KIA 타이거즈로 출범하였다. 출범과 동시에 농구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서 경험을 쌓은 프런트를 대거 이동시키며 해태 타이거즈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훗날 타이거즈에게 최하위를 선사하고 해임된 정재공 전 단장이 처음 부임한 것도 이 시기.

그 다음 날 인천 도원구장에서 KIA 타이거즈의 이름으로는 첫 경기를 가졌다. 상대는 SK 와이번스. 그리고 이 경기는 이종범이 타이거즈로 돌아오는 경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채종범의 맹활약으로 2:6으로 패배했다. 덧붙여 지금 저니맨 외인구단의 구단주로 있는 최익성이 그날 홈런을 때리며 최익성은 해태를 제외한 KIA 구단 역사상 1호 홈런 타자가 되었다. 그리고 8월 7일에 KIA의 광주에서의 첫 경기 겸 이종범의 광주 복귀경기가 펼쳐졌고 이 경기에서 광주 구장이 2001시즌 첫 매진[38]되었다. 2001년 시즌은 유례 없는 4강전쟁의 해였다. 삼성, 현대, 두산의 3강은 일찌감치 굳혀졌고 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 5개 구단이 싸움을 벌이던 해였다. 타이거즈가 해태 유니폼을 입을 때는 6월까지 두산과 엎치락 거릴정도로 선전했으나 7월이후 급격히 힘을 잃었다. 장성호김종국. 그리고 해태의 마지막 4번타자 산토스에다 이종범이 돌아온 타선은 강했으나, 선수층이 얇았던 투수진이 과부하에 걸림으로써 10점을 내고도 11점을 내주며 지는 경기가 많아졌다. 결국 한화와의 마지막 2연전 중 첫 게임에서 패배, 그 다음 경기에서 이겼지만 0.5게임 차이로 한화에게 포스트시즌 티켓을 넘겨주며 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2002년부터 일본에서 돌아와 3할 20-20을 바라봤던 이종범, 한참 전성기에 돌입하며 타격왕에 오른 장성호,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그 시즌 도루왕을 했던 김종국 등이 팀의 주축이 되며 시즌 초반부터 상위권에 랭크되며 잘 나갔다. 투수진에서는 7억 신인 김진우와 용병 듀오 다니엘 리오스, 마크 키퍼, 암흑기 에이스였던 최상덕, 삼성에서 돌아와 타이거즈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한 이강철이 있었다. 4월부터 5년만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달리기며 계속 승승장구했으나 9월 들어 폭풍 연패를 하며 결국 삼성 라이온즈에 1위를 내주고 페넌트레이스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39] 무엇보다 투수진의 방어율이 전년 5.01에서 3.93으로 급감하였는데 이것은 무려 33승+13세이브를 올린 키퍼-리오스 원투펀치의 공이 컸다. 문제는 용병타자였는데.. 워렌 뉴선과 루디 펨버튼이 지명타자 또는 좌익수로 리그평균정도도 못하고 워낙에 민폐를 끼쳤다. 이전년의 산토스, 아니 이해의 LG의 매니 마르티네스가 기아에서 뛰면서 김창희를 대신했어도 정규시즌 1위는 KIA의 몫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던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패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당시 김성한 감독은 고질적인 마무리 문제 때문에[40] 선발 요원이었던 김진우를 마무리로 돌렸는데,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말았던 것. 11월 01일에 열렸던 마지막 5차전이 압권인데, 장성호의 투런으로 앞서가던 KIA는 김진우가 구원으로 올라와서 폭풍처럼 두들겨맞으며 패배한다. 김진우는 마운드에서 불을 질렀고,[41] 박용택에게 홈런 맞은 후에 열받은 KIA팬 아재들은 관중석에 진짜로 불을 질렀다.

2003년 시즌을 앞두고는 정성훈과 현금 10억을 현대 유니콘스로 보내면서 광주 출신의 박재홍을 영입하였고, 이 트레이드가 성사된 다음날 은퇴 파동을 일으킨 손혁김창희두산 베어스에 내주고 진필중을 영입하는 등 스토브리그의 큰 손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해는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어째 시즌 초반에는 엇박자를 내며 중위권에 랭크되었다. 재계약한 마크 키퍼의 부진이 두드러졌고, 박재홍 역시 시즌 초반에 당시 인조잔디였던 대구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며 썩 페이스가 좋지 못했던 것. 허나 반전이 일어났다. 마크 키퍼를 두산으로 넘기고 대체 용병으로 들어온 마이클 키트 존슨이 후반기에만 8승을 거두며 팀의 상승세를 주도했던 것. 그 덕분에 당시 승승장구를 달리던 현대 유니콘스를 잠시 제치고 1위를 하기도 했으나, 결국 0.5게임 차로 선두를 뺏겼다. 흔히 KIA가 이 시즌 막판에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해서 선두를 빼앗겼다고 아는 팬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시즌 자체가 순위는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를 택한 시즌으로 기아는 손해를 보았다.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SK전에서 승리하면 승률에서 현대를 앞설 수 있었지만 다승제였기 때문에 승리에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그해 전경기 출장이었던 이종범도 결장했다.[42]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했던 경기는 5월 27일 경기였다.[43] 오히려 막판에는 맹추격으로 올라갔으나 결국 반 게임차의 2위가 되어 버린 것.

그렇게 직행한 플레이오프에선 당시 신임 조범현 감독이 지휘하던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2승 무패로 관광보내 버리고 올라온 돌풍의 팀 SK 와이번스0승 3패로 쳐발리며 또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였다.(…) 이렇게 캐발린데에는 김성한 감독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한 몫을 했다. 김봉근 투수코치를 의견 충돌로 잘라버리자, 조범현 감독은 짤린 김봉근 투수코치를 낼름 영입했던 것. 그덕에 KIA 투수들의 약점이 속속히 조범현 감독에게 들어갔고 그 덕에 조범현 감독은 KIA를 농락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2004년에는 FA로 풀린 마해영을 영입하며 또다시 스토브리그에서 총알을 소비하여 팬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안겨줬다. 허나 마해영은 삽질을 거듭했고, 김성한 감독이 경질되는 등[44] 어수선한 시즌을 보내다 페넌트레이스 4위로 마감하고 가까스로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허나 준플레이오프에서 3위 두산 베어스에 2전 전패로 탈락했다. KBO리그 최대의 미스터리였던 전설의 빵 사건이 바로 그 해의 플레이오프에서 나온 것.

그러나 극악의 2차 암흑기가 도래할 줄 누가 알았으랴...

3.5. 유남호, 서정환 체제

캐치프레이즈
2005년 최강의 기아, 투혼의 타이거즈
2006년 신화창조! 도전 2006! 최강 기아 타이거즈
2007년 All For One! V10 Tigers!!

2005년 시즌 들어서는 팀 케미스트리를 저해하던 박재홍SK 와이번스로 보냈고, 2003년 시즌 후반기에 활약했던 마이클 키트 존슨을 다시 데려오는 등 의욕적으로 시즌을 맞이했다. 그리고 소소경과 이원식을 내주고 홍현우를 다시 데려오는 트레이드도 했는데, 이 트레이드는 훗날 KIA팬들이 LG팬들에게 사랑해요 LG라고 놀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홍현우 덤으로 껴온 선수가 바로 이용규.

하지만 시즌 초반부터 영 좋지 못하더니 결국 5월에는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FA로 영입했던 선수들은 죄다 실패작으로 남았고, 그나마 LG에서 트레이드 된 이용규와 전년도 부진(AVG 0.260)에서 벗어난 이종범이 3할-20도루를 하며 분전했지만 붕괴된 투수진은 어찌 막을 도리가 없었다.[45] 결국 유남호 감독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 서정환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2005년 시즌을 꾸려갔다. 이 와중에 다니엘 리오스를 두산에 넘겨주고 전병두를 받은 후 세스 그레이싱어를 새 용병으로 데려오기도 했다.[46]

팀은 개박살난 상황에 그나마 얻은 수확은 우익수 자리를 꿰찬 이용규, 중간에서 노예질을 하던 윤석민(투수)이었다.[47]

2006년 시즌엔 서정환 감독이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고, 서정환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골칫거리였던 마해영[48] LG 트윈스로 보내는 데 성공했으며[49] 10억 신인 한기주가 입단하는 등 나름대로의 기대를 품게 했다. 상대적으로 약한 공격력[50] 을 투수력[51] 으로 상쇄하며 시즌 내내 4, 5위를 왔다갔다 하다가 시즌 막판 두산 베어스와의 3연전을 모두 승리하면서 4강행 막차에 탑승했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 1승 2패로 패하며 탈락하였다.[52]

2007년 시즌에는 시즌 도중 메이저리그에서 최희섭이 돌아왔으나[53], 투수진의 줄부상과 공격력 약화로 인한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서정환 감독의 서머리그 우승이라는 무의미한 목표를 향한 선수 혹사 및 부상이 겹쳐, 최하위의 원인이 되었다. 대들보였던 장성호의 3할 커리어가 끊기는 등 경기 외적인 악재도 수더분하였으며, 이 당시 성난 팬들은 단장인 정재공의 퇴진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걸었다가 정재공 단장이 보낸 용역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기도 했다. 급기야 훗날 LG 프런트들이 쌍둥이마당을 닫아버린 것처럼 호사방을 폐쇄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저지르고 말았다. 2004년 이후 롯데가 4연꼴 사슬을 끊자마자 2년 간격으로 LG와 꼴찌를 나눠먹기 했는데, 결국 이로 인하여 야갤과 디씨. 엠팍에서는 엘롯기라는 고유명사가 생겼다.[54]
그야말로 한국프로야구 최다 우승팀으로서는 씻기 힘든 불명예. 결국 정재공은 2007년 시즌을 끝으로 경질당했고, 후임으로 김조호가 취임하게 되었다. 시즌 후 서정환 감독 역시 최하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이 시기의 성적은 848. 가을야구를 했던(2004년, 2006년 시즌) 이듬해에 최하위를 찍은 양상이 반복되었다.

정말로, 저 3년의 시즌동안 기아의 야구하면 이종범, 김종국(야구선수), 이용규, 이재주, 장성호, 김상훈, 윤석민(투수), 신용운, 한기주 이렇게 된다.

3.6. 조범현 체제

캐치프레이즈
2008년 New Start KIA Tigers! Go V10!
2009년 Team & Fan First! Go V10 Tigers!
2010년 Team & Fan First! Go Go V11
2011년 New Challenge! Let's Go V11!

2008년 시즌에는 서재응이 팀에 합류하고, 조범현이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나, 일찌감치 선수층이 무너져버린 터라 팬들도 좋은 성적보다는 리빌딩이나 잘 하길 기대하였다. 출발은 좋지 못했다. 시즌이 시작되자 최희섭이 뇌진탕 후유증으로 인한 두통으로 삽을 들었고, 장성호 역시 지난 시즌 무릎 부상의 여파로 인해 잔부상에 시달렸다. 게다가 김상훈 역시 큰 부상을 당해 차일목이 주전포수로 써야하는 등 팀에 먹구름이 잔뜩 꼈고, 팀은 5월 초까지 쭉 꼴찌를 달렸다. 하지만 5월 중순부터 최희섭을 대신해 이재주가 4번타자를 맡기 시작하고 윤석민이 에이스로 등극, 유망주 수준이었던 이범석이 호투를 펼치며 선발진에 진입하며 점점 순항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5월 말부터는 히어로즈LG 트윈스를 제치고 5-6위권을 형성했다. 심각하게 부족했던 공격력을 투수력으로 상쇄하는 야구를 펼치며 4위를 내다보나 했으나,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힘이 떨어졌다. 시즌 막판에는 무리한 4강 싸움 대신 1.5군을 돌리면서 경험을 주는 형태로 운영하였고 6위로 시즌을 마쳤다. KIA로 바뀐 이후 2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하지만 손영민, 양현종이 급부상했고 전반기에 부진했던 대졸신인 나지완이 후반기에는 맹타를 휘두르며 팀에 가세했으며 고졸신인 김선빈이 그간 공백이었던 키스톤 자리[55]를 메울 유망주로 기대받기 시작했다.

2008년에 무리하지 않고 유망주들에게 경험을 주는 식으로 시즌을 마무리한 다음, 2차 1지명으로 안치홍을 지명하고 구리본즈였던 김상현[56]을 트레이드로 데려오면서 전력이 급상승, 1997년 이후 12년, KIA 타이거즈로는 처음으로 7차전까지 간 끝에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2010년에는 16연패라는 수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4강을 놓고 다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011년에 윤석민이 투수 4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지만 전반기에는 전년도 1위 팀 2위팀 SK와 삼성을 제치고 리그 1위를 달성 했다. 그러나, 손영민[57]을 제외한, 유동훈,곽정철,박경태 등등 여러 불펜들이 불을 지르면서 후반기 4위에 그치면서 3위팀 SK에 1승 3패로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구단은 그 책임을 물어 조범현 감독을 경질하고 후임으로 전년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선동열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대재앙이 찾아오는데... [58]

3.7. 선동열 체제

캐치프레이즈
2012년 New Challenge! Let's Go V11!
2013년 Pitch Our Passion ! Catch Our V11 !
2014년 파일:attachment/2014_KIA_Slogan.png

조범현 감독이 16연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롯데와 4강을 두고 다투는 뒷심을 발휘한 반면, 선동열은 선수단을 아예 새로 짜는 수준의 개혁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암흑군주라는 평만 듣고 말았고, 재계약을 확정지었다가 팬덤에 밀려 3일 만에 자진사퇴했다.

3.8. 김기태 체제

캐치프레이즈
2015년 파일:attachment/2014_KIA_Slogan.png
2016년 파일:external/www.tigers.co.kr/Visual_2017.jpg
2017년
2018년
2019년 파일:challenge_newfuture.jpg

588이라는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선동열과 재계약을 추진하자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선동열 감독은 자진 사퇴라는 모양새로 퇴임하고, 그 자리에 김기태 전 LG 감독을 선임하였다. 첫해에는 7위를 기록하는데 리빌딩 시즌이라고 해서 순위는 다들 이해하는 분위기.[59] 그리고 2016시즌은 구단에서 이범호 잡아준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분위기이고[60] 2017시즌은 양현종 등 거물급의 FA가 기다리기 때문에 어차피 외부 FA를 못잡는 관계로 김기태 감독을 동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신인 드래프트에서 삽질을 거듭한데다 '합리적인 선' 운운하며 스토브 리그에서 손을 놔버린 프런트에 대한 팬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근접한 상황인줄 알았는데 무려 최형우 영입. 일본행이 유력했던 양현종까지 붙잡는 데 성공하면서 지금은 갓런트로 불리는 중.[61]

2016년 시즌은 양현종-헥터 외에는 사실 상 땜빵선발로 시즌을 치뤘다. 잘 던지던 지크가 날이 더워지며 난타당했고, 전반기 잘 던지던 홍건희도 후반기부터 폭락. 젊은 선수 위주로 구성된 불펜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최영필, 김광수 두 베테랑이 분전하며 승리를 지켰고 7월부터 가세한 41세의 임창용이 힘을 보탰다.

2016년 8월 31일, 4위로 9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잔여경기가 30경기도 채 남지 않은 상황. 남은 경기에서 5할 승률만 유지해도 높은 확률로 가을야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5일, 타지인 대구에서 삼성을 잡아내며 5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비록 와일드카드에서는 5위 핸디캡 때문에 1승 1패를 하고도 LG에게 밀려 탈락했지만, 히 드랍 더 볼로 한 경기만에 허무하게 끝나버린 작년 와일드카드와는 달리 1차전을 잡아내며 KBO리그 첫 와일드카드 2차전을 열었고, 두 경기 내내 수준높은 경기를 보여주며 팬들을 설레게 했다. 엠팍, 디씨 등 주요 야구 커뮤니티의 팬들 반응은 그야말로 장밋빛 물결. 서정환 감독 시절이나 조범현 감독 시절에도 하위권 팀이 다음년도에 바로 가을야구[62]에 진출했던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나 2군 선수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제공하면서 두터운 선수층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전임 감독들 시절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올 시즌보다 내년 시즌이 더욱 기대되는 팀이 되었다는 점에서 김기태 감독과 코칭스텝 + 프런트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듯.

또한 2020년까지 최고의 명문구단이 되자는 TEAM 2020이라는 계획을 선언했는데 당시 팬들은 비웃었지만 실제로 현대-KIA 자동차그룹에서 엄청난 지원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재평가 받기도 했다. 나유리 기자의 말에 따르면 모기업 지원이 엄청나서 현장에서 부담을 느낄 정도라고. 실제로 2015년에 1,2군 경기장에만 110억을 투자했으며, 기아 챌린저스 필드에 최첨단 재활센터도 건설했으며, 야간 경기가 가능한 신축 2군 경기장을 신설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다.

그리고 16시즌 종료 이후 FA에서 팬들의 우려와는 달리 프런트가 최형우를 영입하고 양현종나지완을 잔류시키는데 성공하면서 2015년까지 조용했던건 이 FA를 위함이었다는 프런트의 큰그림이라면서 팬들의 찬양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 FA로 인해 선동렬 시절 한화보다도 답이 없었던 팀이 드디어 팀 구실을 하게 되었다는 평이 많으며, 불펜진이 그렇게 좋진 않아서 우승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3~4위권에는 들거라는 예상이 많은 편이다. 그렇게 시작한 2017 시즌, 선발투수들의 연이은 호투와 조용하다가도 결정적일때 점수를 내는 응집력있는 타선, 탄탄한 수비가 더해지며 전반기를 1위로 마감했다. 이후 고질적 불펜불안에 선발진 붕괴로 위기를 맞지만 1위 자리는 놓치지 않았고 10월 3일 마지막 정규시즌 경기를 승리로 페넌트레이스 1위를 확정짓고 KS로 직행했다. 그리고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단 근본적인 습자지 수준 선수층은 나아졌지만 해결된 수준은 아니다. 2군 전력, 특히 타격이 약해도 너무 약하다. 기아에서 키운 선수들중에서 그나마 1군 가능성이 보이는건 류승현, 김석환, 최승주 정도고, 외야에서는 2군인데도 OPS 8할이 거의 전무하다. 뭐 2군 전력의 전부나 다름 없던 이정훈, 이진영, 황대인이 군대를 간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심각하다. 구단과 감독이 트레이드에 목매는 걸 알만도 한 상황. 그나마 투수는 조금 더 상황이 낫지만, 여기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 150km/h를 던지는 선수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150km/h를 뿌리던 원석들이 가득했던 2000년대 중후반 기아 투수 팜을 생각하면 참 한숨이 나오는 상황. 다만 유승철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황인준, 문경찬이라는 그래도 쓸모있는 투수가 나타났으며 임기준이 각성하고 김윤동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돌아온 박준표도 성장한 모습이 보여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김기태 감독 체제에 접어들면서 KIA 선수단에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최형우이명기, 김민식을 위시로 하는 좌타자를 많이 영입하고, 한국 유소년 야구풍토 역시 우투좌타 야수를 많이 양산하는 체제로 오게 되면서 수많은 좌타자들이 많이 양산되면서 과거 왼손 수난사에 시달렸던 해태 타이거즈 시절과 달리, 오히려 우타자 품귀현상이 심해지는 특징이 도드라지게 되었다. 이범호김주찬 등 노장 우타자의 자리를 채울 유망주들이 황대인을 제외하면 전부 좌타자이고, 외야의 경우에도 2019년 현재 나지완유재신, LG에서 영입한 문선재를 제외하면 전부 좌타자라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2017~2018 시즌에는 모든 주전 외야수들이 전부 좌타자로 도배되었을 정도였다.

4. 우승 경험

전신 해태 타이거즈 시절을 포함하여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11회 우승을 일군 팀이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우승은 선동열 효과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선동열 이전에도 1983년에 우승한 적이 있고, 선동열이 팀을 떠난 후에도 이종범 등 다른 선수들의 활약으로 인해 1996~1997년에 다시 2연패를 달성했고, 의외로 선동열은 한국시리즈에서 6승 1패 4세이브 72.1 이닝 1.74의 평균자책점으로 리그보다 부진(?)했다.[63] 다만 정규 시즌 경기에서는 선동열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선발로 하루 등판시켜서 며칠씩 쉬게 하느니 선발, 불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시키는 방식을 썼다. 선발이 일찍 무너지거나 무너질 기미가 보이면 바로 올려서 몇 이닝씩 던지게 하고 심지어 컨디션이 엉망인 날에도 상대팀 기죽이기를 위해 불펜에서 몸을 풀게 했을 정도. 실제로 선동열은 프로 통산 367경기에 출장했지만 선발로 출장한 경기는 109경기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 당시에는 에이스 투수고 나발이고 마구잡이로 굴리는게 관례였다.

역대 우승 연도는 1983년, 1986~1989년, 1991년, 1993년, 1996~1997년, 2009년 그리고 2017년에 우승했고,1986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한국시리즈 4년 연속 우승 기록은 깨지기 힘들 기록이라는 평을 받았었다. SK 와이번스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이렇게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3번 우승하며 이 기록에 도전하였으나 2009년엔 바로 KIA 타이거즈가 SK의 승리를 막으며 타이거즈의 V10을 찍었다. 그러나 결국 이 4년 연속 우승 기록은 후에 2011년~2014년까지 한국시리즈를 연속 우승한 삼성 라이온즈가 타이 기록을 세웠다.[64] 덧붙여 현재까지 인수/인계 경험이 있는 구단 중 인수 전후 모두 우승 경험이 있는 구단은 타이거즈가 유일하다. 현대삼청태 시절에 우승한 적이 없고, 트윈스청룡 시절에 한 적은 없다. 베어스이글스이름만 바꿨을 뿐 모기업이 바뀐 것이 아니다.[65]

2017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만 하면 한 번도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는 징크스가 있다.[66] 즉, 우승은 무려 11번이나 했는데 희한하게도 준우승이 한 번도 없다. 반대로 준플레이오프에선 이긴 적이 한 번도 없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의 상대팀은 LG[67], 삼성[68], 한화[69], 현대[70], SK[71], 두산[72] 등이며 롯데[73], 키움[74]과는 한국시리즈에서 한 번도 격돌했던 적이 없다. NC, KT와도 아직까지 한국시리즈는 물론 포스트시즌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5. 관련 기록들

5.1. 역대 사장(대표이사)

KIA 타이거즈 역대 사장
순서 이름 기간
초대 김익환 2001~2005
2대 조남홍 2006~2008
3대 서영종 2009~2010
4대 이삼웅 2011~2014
5대 박한우 2015~2017
6대 허영택 2018
7대 이화원 2019~

2018년 이전까지는 여타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과 비슷하게 기아자동차 국내 판매부문 사장이 KIA 타이거즈의 사장도 겸했다. 같은 산하 스포츠 구단인 전북 현대 모터스의 경우도 현대자동차 국내 판매부문 사장이 구단 대표이사도 겸하고, 나머지 현대자동차그룹 산하의 구단은 계열사 CEO가 구단주를 맡고 있다.[75]

하지만 회사 업무만으로도 업무량이 막중한 회사 대표이사 입장에서 회사 산하 스포츠구단의 운영에 간섭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과 관련해서 이사회에 2번 연속으로 KIA 사장이 불참한 것을 놓고 억측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사실 KBO 윈터미팅 등 오래전부터 KBO 이사회 관련해서는 한화 이글스 사장에게 결정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따라서 한화 이글스 구단의 의견 = KIA 타이거즈의 의견인 셈.

그러다가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전임 구단 대표이사를 두는 것으로 변경되어 KIA 구단의 의견을 적극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즉 전임 대표이사로서는 초대. 그 첫 타자는 바로 3대 단장이었던 허영택. 그리고 공석이 된 단장에 조계현 전 수석코치를 내정했다.

하지만 임명된 지 1년 정도가 지난 2019년 3월 말, 허영택이 물러나고 신임 대표이사인 이화원이 임명되었다.

5.2. 역대 단장

KIA 타이거즈 역대 단장
순서 이름 기간
초대 정재공 2001년 ~ 2007년
2대 김조호 2008년 ~ 2013년
3대 허영택 2014년 ~ 2017년
4대 조계현 2018년 ~

정재공 단장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적극적으로 프런트가 현장에 개입하도록 하는 스타일이었다. 이 시기에 모기업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많이 얻어내고 FA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등 구단 운영에 대한 열정만은 진짜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나친 현장 개입으로 김성한 전 감독이 알력다툼 끝에 옷을 벗는 일이 있었고 FA로 영입한 선수들이 먹튀가 되면서 평가가 급락하기 시작,2007년에 팬들과의 충돌과 사상 최악의 성적인 팀 창단이래 최초 꼴찌를 하게 되며 퇴진 압박을 받으면서 경질되고 말았다.

김조호 단장의 경우, 정재공과는 달리 현장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내부 행정에만 신경쓰는 스타일이라 비난의 목소리가 크지는 않은 편이다. FA 영입에 소극적인 편이지만, 현장에서 꼭 필요로 한다면 과감히 영입하고 있다. 다만 2013년 전라북도 연고지 문제[76]로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 2013년 시즌 종료 후 단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상근 자문직을 맡게 되었다.

기아자동차 슬로바키아 공장 관리직에 있었다 단장으로 들어온 허영택 기아자동차 상무는 2005년 10월부터 2007년 1월까지 타이거즈 부단장으로 있었던 임직원. 선동열 감독의 2014년 시즌 이후 재신임 관련 인터뷰에서 무책임한 발언으로 KIA 팬들의 미움을 사고 있어서 부단장 시절 정재공 단장에게 안 좋은 것을 배웠다는 반응이 거셌다. 게다가 정재공 단장 밑에서 배웠다면 적극적인 트레이드 시도나 FA 영입을 시도할 만 한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김조호 단장처럼 조용히 있다가 과감히 한 번씩 데려오는 스타일도 아니라 아무 것도 안하는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어서 팬들의 불만이 많다. 하지만 모기업 지원 하에 인프라 개선과 육성시설 강화에 힘을 쓰면서 팀 체질 개선에 힘을 쓰고 구단 비전 목표를 세우는 등 기조를 재건하려는 시도를 했고 2017 시즌 전에는 최형우를 데려오는 등 김조호 단장이 보여준 모습과 비슷한 행보를 걸었다. 그리고 2017 정규시즌 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시즌 후 구단 대표이사로 영전했다.

전반적으로 프런트의 영향력이 작은 구단으로, 좋게 말하면 터치가 적어서 현장과의 트러블이 적은 편이고 현장에서 추구하는 자유로운 팀 운영을 보장한다. 반면 나쁘게 말하면 프런트가 현장에 관심이 없어 현장의 운영 방향이 잘못됐어도 견제를 하지 않는다. 대신 결코 뒤지지 않는 모기업의 자금력에 힘입어 팀 성적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한 투자를 하는 편이다. FA 영입이나 인프라 구축(챔피언스 필드챌린저스 필드 건립, 재활센터 구축) 역시 현장의 강한 요구보다는 성적 및 기량향상을 목적으로 구단 모기업의 판단에서 추진한 사업이 강하다.

5.3. 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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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틀:KIA 타이거즈 감독|{{{#FFFFFF '''해태-KIA 타이거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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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50403 '''1대'''}}}
김동엽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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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조창수
-1 {{{#050403 '''2대'''}}}
김응용
(198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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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2001~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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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유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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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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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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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환
(2006~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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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현
(200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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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201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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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201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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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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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역대 감독
순서 이름 재임기간 성적 우승횟수
초대 김동엽 1982년[77] 5승 8패 -
2대 김응용 1983년 ~ 2000년[78] 1164승 934패 51무 9회
3대 김성한 2001년 ~ 2004년[79] 257승 212패 18무 -
4대 유남호 2005년[80] 60승 67패 2무 -
5대 서정환 2006년 ~ 2007년 130승 159패 4무 -
6대 조범현[81] 2008년 ~ 2011년 267승 254패 4무 1회
7대 선동열 2012년 ~ 2014년 167승 213패 9무 -
8대 김기태[82] 2015년 ~ 2019년 307승 310패 3무 1회
  • 감독 대행 체제로 시작해서 잔여 시즌을 마무리 했으나, 결국 정식 감독이 되지 못하고 다음 감독에게 감독직을 이양한 조창수 감독 대행의 성적은 기록하지 않았다.
  • 감독 대행 체제로 시작해서 정식 감독이 될 때까지 그 사이의 전적도 포함된 기록이다.
  • 김응용 감독의 장기 집권으로 코치나 2군 감독들이 기를 펴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실제로 김응용 감독이 코치와 2군 감독을 꽤나 돌봐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간에 한 감독이 징하게 오래한 건 사실이다.
  • 몇 경기만에 짤린 김동엽을 제외하곤, 우승을 11번이나 했지만 전부 비(非)타이거즈 출신 감독이 이뤄냈다. 오히려 해태 출신들은 김성한을 제외하곤 전부 성적이 좋지 않다. 김성한도 정규시즌 성적은 좋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항상 무기력했고[83], 폭력사건을 일으키는 등, 좋은 감독으로 기억되진 않는다.

5.4. 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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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틀:KIA 타이거즈 주장|{{{#FFFFFF '''해태-KIA 타이거즈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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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1984 1985~1987 1988~1993 1994~1997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A] 주장직 폐지 이순철
1998 1999~2001 2002~2004 2005 2006
이강철 이호성 이종범 김종국 이종범
2007 2008 2009 2010 2011
이종범장성호[B] 장성호김상훈[C] 김상훈 최희섭김상훈[D] 김상훈
2012 2013 2014~2016 2017~2018 2019~
차일목 김상훈 이범호 김주찬 김주찬안치홍[E]
[A]: 김일권 이후 긴 시간 동안 주장직을 폐지. 출처
[B]: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C]: 시즌 중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인한 주장 교체.
[D]: 시즌 초 선수단의 반발로 인한 주장 교체.
[E]: 2019년 5월 15일, 김주찬의 재활과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 ||


2007 시즌부터 2010 시즌까지 4년 동안 주장교체가 많이 이루어졌다. 우선 2007 시즌 이종범이 주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시즌 중의 부진으로 인해 장성호로 교체되었다. 참고로 장성호는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의 비 호남 출신 주장이다. 장성호는 2008 시즌까지 주장직을 이어갔으나,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김상훈으로 교체되었다. 김상훈은 2009 시즌까지 주장직을 수행하였다. 2010 시즌에는 최희섭에게 주장을 시켰으나 엄하게 군기를 잡는 스타일로 후배들의 반발이 있어서, 시즌 도중 다시 김상훈으로 주장이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종범이 주장을 제일 길게 했으며[84], 특수 포지션인 포수 김상훈도 주장을 길게 했다. 그 외에도 이적생 출신 최초로 주장을 맡은 이범호도 주장을 길게 한 편.

5.5. 역대 은퇴식

KIA 타이거즈 역대 은퇴식
이름 활약 기간[85] 날짜 비고
김성한 1982~1995 1995년 9월 24일 [86][87]
이강철 1989~1999
2001~2005
2006년 4월 12일 [88][89]
김종국 1996~2010 2010년 9월 15일 [90]
이종범 1993~1997
2001~2011
2012년 5월 26일 [91][92]
유동훈 1999~2014 2015년 6월 13일 [93][94]
김상훈 2000~2014
최희섭 2007~2015 2016년 5월 15일 [95][96]
서재응 2008~2015
  •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은퇴식이라는게 갖춰지지 않아서 초창기~90년대 초반에 선수생활을 마감한 김봉연, 김준환, 김종모 등 타 팀으로 트레이드 되지 않고 해태에서 현역 생활을 마무리 한 레전드 선수들도 은퇴식을 하지 못하고 바로 플레잉코치를 해야했다.[97]

5.6. 역대 성적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 경기수 승률
해태 타이거즈
1982 4위/6팀[98] 4위 80 38 42 0 0.475
1983 2위/6팀[99] V1 100 55 44 1 0.556
1984 5위/6팀[100] 5위 100 43 54 3 0.443
1985 3위/6팀[101] 3위 110 57 52 1 0.523
1986 2위/7팀[102] V2 108 67 37 4 0.644
1987 2위/7팀[103] V3 108 55 48 5 0.532
1988 1위/7팀[104] V4 108 68 38 2 0.639
1989 2위/7팀 V5 120 65 51 4 0.558
1990 2위/7팀 3위 120 68 49 3 0.579
1991 1위/8팀 V6 126 79 42 5 0.647
1992 2위/8팀 3위 126 71 54 1 0.567
1993 1위/8팀 V7 126 81 42 3 0.655
1994 3위[105]/8팀 4위 126 65 59 2 0.524
1995 4위/8팀 4위[106] 126 64 58 4 0.524
1996 1위/8팀 V8 126 73 51 2 0.587
1997 1위/8팀 V9 126 75 50 1 0.599
1998 5위/8팀 5위 126 61 64 1 0.488
1999 7위/8팀[107] 7위 132 60 69 3 0.465
2000 6위/8팀[108] 6위 133 57 72 4 0.442
KIA 타이거즈
2001 5위/8팀 5위 133 60 68 5 0.469
2002 2위/8팀 3위 133 78 51 4 0.605
2003 2위/8팀 3위 133 78 50 5 0.609
2004 4위/8팀 4위 133 67 61 5 0.523
2005 8위/8팀 8위 126 49 76 1 0.392
2006 4위/8팀 4위 126 64 59 3 0.520
2007 8위/8팀 8위 126 51 74 1 0.408
2008 6위/8팀 6위 126 57 69 0 0.452
2009 1위/8팀 V10 133 81 48 4 0.609
2010 5위/8팀 5위 133 59 74 0 0.444
2011 4위/8팀 4위 133 70 63 0 0.526
2012 5위/8팀 5위 133 62 65 6 0.488
2013 8위/9팀 8위 128 51 74 3 0.408
2014 8위/9팀 8위 128 54 74 0 0.422
2015 7위/10팀 7위 144 67 77 0 0.465
2016 5위/10팀 5위 144 70 73 1 0.490
2017 1위/10팀 V11 144 87 56 1 0.608
2018 5위/10팀 5위 144 70 74 0 0.486
KBO 통산 37시즌 V11 4627 2377 2162 88 0.524

삼성 라이온즈와 함께 KBO의 대표적인 강팀이다. 다만 리그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다시피 했던 8~90년대 해태 타이거즈와는 다르게 KIA 시절에는 2번의 통합 우승을 차지하긴 했으나 해태 시절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꼴찌까지도 해보는 등 전체적으로 기복이 심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그외 사항은 KBO 리그/역대 팀 스탯 문서 참조.

5.7.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

LG 트윈스 1983 KS : 4승 1무
1997 KS : 4승 1패
2002 PO : 2승 3패
2016 WC : 1승 2패[A]
WC 1패, PO 1패, KS 2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11승 1무 6패
삼성 라이온즈 1986 KS : 4승 1패
1987 KS : 4승
1990 PO : 3패
1993 KS : 4승 1무 2패
PO 1패, KS 3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12승 1무 6패
두산 베어스 1987 PO : 3승 2패
2004 준PO : 2패
2017 KS : 4승 1패
준PO 1패, PO 1승,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7승 5패
한화 이글스 1988 KS : 4승 2패
1989 KS : 4승 1패
1991 KS : 4승
1994 준PO : 2패
2006 준PO : 1승 2패
준PO 2패, KS 3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13승 7패
현대 유니콘스 1989 PO : 3승
1996 KS : 4승 2패
PO 1승,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7승 2패
롯데 자이언츠 1992 PO : 2승 3패
PO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 2승 3패
SK 와이번스 2003 PO : 3패
2009 KS : 4승 3패
2011 준PO : 1승 3패
준PO 1패, PO 1패,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5승 9패
키움 히어로즈 2018 WC : 2패[A]
WC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 2패

준플레이오프,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이긴 적이 없으나, 한국시리즈는 진 적이 없다. 준플레이오프 전패와 한국시리즈 전승은 KIA가 유일하다.

5.8. 역대 등번호 리스트

5.9. 역대 개인 성적

팀 역사상 최고의 통산 성적과 단일 시즌 최고의 기록을 정리한 문단이다.

5.9.1. 통산 성적

KIA 타이거즈 투수
부문 이름 기록 팀 소속 시즌
등판경기 이강철 575경기 1989~1999, 2001~2005
선발등판 양현종 264경기 2007~
완투 선동열 68완투 1985~1995
완봉 선동열 29완봉 1985~1995
평균자책점 선동열 1.20 1985~1995
승리 이강철 150승 1989~1999, 2001~2005
패전 이강철 107패 1989~1999, 2001~2005
세이브 선동열 132세이브 1985~1995
홀드 심동섭 67홀드 2010~
이닝 이강철 2138이닝 1989~1999, 2001~2005
탈삼진 이강철 1700개 1989~1999, 2001~2005
피안타 이강철 1694개 1989~1999, 2001~2005
피홈런 이강철 207개 1989~1999, 2001~2005
볼넷 이강철 770개 1989~1999, 2001~2005
사구 이강철 180개 1989~1999, 2001~2005
KIA 타이거즈 타자
부문 이름 기록 팀 소속 시즌
출장경기 이종범 1706경기 1993~1997, 2001~2011
타율 장성호 0.306 1996~2010
출루율 장성호 0.400 1996~2010
장타율 한대화 0.485 1986~1993
타석 이종범 6910타석 1993~1997, 2001~2011
타수 이종범 6060타수 1993~1997, 2001~2011
안타 이종범 1797안타 1993~1997, 2001~2011
2루타 이종범 340개 1993~1997, 2001~2011
3루타 이용규 34개 2005~2013
홈런 김성한 207개 1982~1995
타점 장성호 882타점 1996~2010
득점 이종범 1100득점 1993~1997, 2001~2011
도루 이종범 510도루 1993~1997, 2001~2011
볼넷 장성호 863볼넷 1996~2010
사구 나지완 154개 2008~
삼진 나지완 935개 2008~
병살타 장성호 128개 1996~2010

5.9.2. 단일 시즌

KIA 타이거즈 투수
부문 이름 기록 해당 시즌
등판경기 이강철 79경기 2004
선발등판 강만식 37경기 1985
완투 선동열 19완투 1986
완봉 선동열 8완봉 1986
평균자책점 선동열 0.78 1993
승리 선동열 24승 1986
패전 윤석민 18패 2007
세이브 임창용 34세이브 1998
홀드 심동섭 21홀드 2015
이닝 선동열 262.2이닝 1986
탈삼진 선동열 214개 1986
피안타 헥터 노에시 221개 2017
피홈런 곽현희 31개 1999
볼넷 이강철 105개 1994
사구 다니엘 리오스 28개 2003
KIA 타이거즈 타자
부문 이름 기록 해당 시즌
타율 이종범 0.393 1994
출루율 홍현우 0.453 1996
장타율 김상현 0.639 2009
타석 최형우 629타석 2017
타수 로저 버나디나 557타수 2017
안타 이종범 196안타 1994
2루타 이종범 43개 2003
3루타 김원섭 9개 2009
홈런 트레이시 샌더스 40개 1999
타점 김상현 127타점 2009
득점 로저 버나디나 118득점 2017
도루 이종범 84도루 1994
볼넷 트레이시 샌더스 105개 1999
사구 나지완 23개 2017
삼진 트레이시 샌더스 133개 1999
병살타 이순철 20개 1995

6. 선수단

7. 응원단

2019 시즌 KIA 타이거즈 응원단
파일:2019_kia_tigers_cheer.jpg
응원단장 서한국
장내 아나운서 김영호
치어리더 김소연, 김지민, 김지혜, 류세미, 송여름, 원민주, 이다혜, 이이슬, 임혜진, 장은송, 정가예

7.1. 역대 응원단장

파일:KIATIGERS_1.png
-1 [[틀:KIA 타이거즈 응원단장|{{{#FFFFFF '''해태-KIA 타이거즈 응원단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1px"
-1 {{{#050403 '''1대'''}}}
임갑교
(1982~1995)
-1 {{{#050403 '''2대'''}}}
김창규
(1996~2001)
-1 {{{#050403 '''3대'''}}}
조지훈
(2002~2003)
-1 {{{#050403 '''4대'''}}}
김주일
(2004~2014)
-1 {{{#050403 '''5대'''}}}
나윤승[A]
(2015~2016.6.4)
-1 {{{#050403 대행}}}
호돌이 & MC이슈
(2016.6.5~6.27)
-1 {{{#050403 '''6대'''}}}
서한국
(2016.6.28~)
-1 {{{#050403 }}}

-1 {{{#050403 }}}

-1 {{{#050403 }}}

[A] : 2016년 잠실 야구장 폭력 사태의 책임을 물어 사건이 터진 다음 날부터 구단에서 활동 정지를 지시했고, 결국 2016년 6월 14일 경질되었다.
}}}}}} ||

  • 임갑교 응원단장은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구단에서 공식으로 임명한 응원단장. 원래는 해태제과 직원이었고 부산 구덕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롯데의 원년 개막전에서 활동한 것이 응원단장 커리어의 시작이다.
  • 김창규 응원단장은 당시 팬들에게는 붐붐 아저씨 내지는 붐붐 단장으로 불렸다. 응원단장으로 있을 당시 원래 생업은 식당 운영. 광주지방법원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했다고 한다. 해태 타이거즈의 최후를 지킨 응원단장으로 2000년대 초 해태 살리기 운동에도 나선 바 있다.
  • 조지훈 응원단장은 지금이야 약 10년간 롯데 자이언츠 응원단장으로 일하다 보니 롯데 이미지가 아예 고정된 사람이지만 KIA에서도 혁혁한 공적을 쌓았다. 이종범장성호, 홍세완 등 2000년대 초반부터 KIA에서 뛰던 선수들의 응원가는 다 이 사람이 만들었다. 그야말로 응원가 제조 측면에서는 신계에 도달할 수준. 응원단장직을 내려놓고 입대했고 제대 후 롯데 응원단장으로 옮겼다.
  • 김주일 응원단장은 현재 KIA 타이거즈의 응원 체계를 구축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 덕에 10년 간 한 팀에서 장수 응원단장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다만 응원단장이라는 직업 자체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점도 있었고, 그 외에도 개인적인 집안 사정으로 인해 결국 kt 위즈 응원단장으로 옮겼다. 그렇지만, 완전히 타이거즈와의 연이 끊어진건 아니었던지 2017년 한국시리즈 때 서한국 단장에게 2009년 한국시리즈 당시 자비로 구매했던 약 100만원짜리 호랑이 가운을 빌려줬다! 바로 이 옷.

7.2. 역대 장내 아나운서

파일:KIATIGERS_1.png
-1 [[틀:KIA 타이거즈 장내 아나운서|{{{#FFFFFF '''KIA 타이거즈 장내 아나운서'''}}}]]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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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50403 '''1대'''}}}
MC이슈
(2014~2018)
-1 {{{#050403 '''2대'''}}}
김영호
(2019~)
-1 {{{#050403 }}}

-1 {{{#050403 }}}

-1 {{{#050403 }}}

}}}}}} ||

  •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개장 첫 해부터 전문 장내 아나운서를 고용하여 응원단장의 업무를 덜어주고 있다. 초대 장내 아나운서는 MC이슈. 2018 시즌까지 5년을 함께 했으며, 결혼 이후 가족에 집중하게 되며 사임했다. 기사
  • 2대 장내 아나운서는 치어리더로 활약했었던 최미진의 남편이자 프리랜서 MC로 활약 중인 김영호가 선임되었다. 김주일, 나윤승, 서한국 응원단장 밑에서 대리로 일한 경험도 있고, 그 후에도 개인 커리어를 쌓아올리며 2019 시즌부터는 대리가 아닌 장내 아나운서로 컴백.

8. 응원가

9. 유니폼

10. 마스코트

KIA 타이거즈의 마스코트는 2016년까지 호돌이, 호순이였으나, 2017년 시즌 전에 호걸이, 호연이로 교체되었다. 호돌이는 이제 없어져요?라고 팬들의 많은 질문이 들어와 기아 측에서 공식적으로 호돌이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실제로 호돌이는 공식 마스코트에서는 물러났지만 2009년 유니폼을 입는 경기에서 등장하고 있다.(이와는 별도로 장내에서 메인 마스코트로 활동중인 사람은 동일하다.)

10.1. 호돌이&호순이 (1996~2016)

호돌이(KIA 타이거즈) 문서 참조.

10.2. 호걸이&호연이 (2017~ )

파일:external/www.tigers.co.kr/20170209102036_sukrrztt.png

호걸이 문서로.

11. 인기도

파일:2016101002671_0.jpg
파일:0002928372_001_20170905203826684.jpg
파일:IGN9n0CQ9tHNX3AHkrxYb7hWg6M0.jpg
롯데 자이언츠와 쌍벽을 이루는 KBO 최고의 인기 구단. 시청률, 원정경기 팬수, 설문조사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LG 트윈스, 롯데 자이언츠와 더불어 인기도가 매우 높은 구단이다. 들쭉날쭉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인근 지역과 같이 서울-경기권 원정올 때마다 아무리 못해도 절반이 넘게 붉은 유니폼과 노란 막대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보면 KIA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실감할 수 있다.[111] 또한 기존 연고팀의 입김이 센 타 지방 구장에도 타이거즈 팬들이 원정석에 꽤 모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프로야구가 태동한 1980년대 5번의 우승을 거머쥐면서 성적과 흥행을 동시에 거머쥔 구단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한국 최초의 어린이 야구단/팬클럽 사업을 시작하는 등 철저한 팬 관리도 병행했다. 여기에 전국 각지로 진출한 연고지역[112] 출신 팬들은 물론 해태의 압도적인 성적과 아우라, 그리고 기라성 같은 스타들에 의해 유입된 비연고지 팬들까지 합쳐지며 전성기에는 원정에서도 결코 꿀리지 않는 관중버프를 등에 업고 경기를 펼친다.[113]

하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몰락시기와 이후 성적 침체기에는 당연히도 팬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국구 인기구단의 위상을 잃지는 않았으며, 잠실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엄청난 관중 동원을 보장하고 있다. 수도권 경기에서 기아팬이 50%는 구장을 채운다고 느끼는 팬들이 많다. 잠실의 경우 농담삼아 제2 홈구장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이고[114] 그 외에 고척, 문학, 수원에서도 공격 때 엄청난 응집력으로 응원열기가 홈팬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2015년과 2016년부터 각각 추가/변경된 수원, 고척 원정 역시 마찬가지. 한마디로 수도권 원정경기는 말이 원정이지 최소한 중립경기나 다름없다. 특히 2009년과 2017년처럼 성적 좋은 시즌의 잠실경기 정도 되면 전광판 빼고 모두 우리 것이라는 선수들의 호언장담이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이다. 2009년 후반기 승승장구하며 정규리그 우승 가능성이 가시권에 들어올 즈음의 잠실은 KIA 관중이 홈팀 LG/두산 관중의 1.5배 가까이 될 정도였으며 한국시리즈 잠실 중립 경기 때도 SK팬보다 최소 2~3배는 훌쩍 넘겼고, 2017년 시즌 막판 두산과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일 때 수원에서 kt와의 3연전이 마지막 일정이었을 때는 kt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위즈파크 3경기 연속 매진을 기록한다. 물론 KIA 관중들이 절대다수였던건 당연지사. 아니나 다를까, 2017년 한국시리즈두산 베어스가 진출하면서 잠실에서 3~5차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최근 우승을 차지한 시리즈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1~7차전 모두를 홈에서 치르는거나 마찬가지인 셈이 되었다.[115]

오히려 한동안 무등 시절에는 광주의 관중동원이 원정보다 적어 이것만 본 안티들이 홈도 못 채우는 주제에 무슨 인기구단이냐? 라는 이야기를 해왔다. 해태 시절부터 무등야구장 관중동원 실적은 어디까지나 원정에 비해 좋지 못한 편인 것은 맞다. 상대적으로 적은 광주광역시 인구와 규모도 작았지만 환경도 열악했던 무등구장의 취약함 탓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행정적으로 보면, 잠실이나 문학 등지를 가득 채우는 원정 타이거즈 팬들이 다 홈팀 관중으로 집계되는 집계 시스템 문제를 개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하겠다. 실제로 원정관중 동원은 2011년1위로 나타났다. 2016년에 진행한 한 여론조사에서도 서울에서 두산, LG 다음가는 인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박동희 기자가 쓴 기사라든가 여타 을 보면 기아가 프로야구 중계 시청률 1위를 달린다는 집계가 종종 등장한다.

이런 근거를 내놓아도 몇몇 어그로나 안티팬들이 여전히 상황을 부정하는 탓에, KIA 타이거즈 갤러리 같은 곳에서는 아예 스스로 비인기구단 드립을 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최근엔 안티들도 팬이 많다는 점은 인정하고 들어간다. 거기에 타종목인 K리그 광주 FC남기일 감독은 라이벌 팀을 꼽는 기자의 질문에 여타 K리그 팀이 아닌 기아를 언급할 정도로 같은 연고지에서 넘어야 할 산[116]으로 여기고 있다. 전라남도에 연고를 둔 전남 드래곤즈[117]도 사실상 마찬가지인 상황. 다만 최근에는 안티팬들도 거의 KIA의 인기는 인정하고 들어간다. 대신 그 인기가 광주지역을 홀로 다 먹어서라느니, 전라도 사람들이 서울에 많이 살아서(...) 그렇다느니,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지역 비하 발언을 일삼으며 어떻게든 KIA를 깎아내리려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안티팬들이 설친다는 것이 기아가 인기가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국적인 인기에서 예외가 있다면 놀랍게도 연고지역인 전라북도. 이는 전북에서 타이거즈에 대한 열기가 떨어진다기보다, KIA 타이거즈가 아니라도 도민들을 열광시키는 지역 축구팀 전북 현대 모터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전북연고 10구단 창단도 성공하지 못하고, 2014년 이후 도내에서 경기가 열리지도 않으며 전북 아마야구와 초창기 해태타이거즈의 심장이나 다름 없던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의 1차 연고지명권이 NC 다이노스로 넘어가는 등[118] 타이거즈 팬이라도 야구 관련해서 전북 지역엔 그간 좋은 일이랄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모터스의 경우 09년 이후 리그우승 6회에 아시아 프로축구의 왕좌를 가리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두 차례 거머쥐고 지역밀착 사업까지 착실히 수행하면서 그야말로 해태 타이거즈 시절이 돌아온 듯한 즐거움을 지역 팬들에게 주고 있는 것. 그 결과, 전북 현대의 2015년 평균관중은 17,000명을 넘겨 K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중요경기는 관중 3~4만 명에 육박하는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119][120]

2014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가 완공된 후 평균관중수 1위를 기록 중. 성적도 좋지 않지만 팬들이 이 정도로 몰린다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 그동안의 홈관중 동원 부진은 정말 옛 무등구장의 열악했던 시설과 환경 때문이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성적 하락에 가속화가 붙은 6월부터는 관중수 역시 줄었지만 66만으로 총 관중수 5위를 기록. 2016년에는 71만명을 기록하면서 기존 수치를 경신했다. 새구장도 있겠다 성적만 좋으면 80~90만도 가능할 듯. 허나 지역특성상 100(평관 14,000명)만은 인구수나 원정관중 버프가 없기 때문에 힘들듯 싶다. 구도라고 불리우는 부산도 인구 350만에서 100만 넘길려면 4강 싸움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는데 (우승권 들어가면 200만도 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한데 홈관중 전경기 매진시켜도 200만은 안된다는게 함정 아닌 함정) 150만 인구에 광주가 100만을 넘긴다면 뭐 더이상 할 말이 없다.

그리고 2017년, 기아는 초반부터 선두로 치고 나가며 또다시 수많은 관중들을 불러모으는 중이다. [줌업]중계방송 시청률이 말하는 KBO리그 최고 인기팀은 KIA 광주의 자존심 KIA, 꿈의 첫 100만 관중 보인다 암흑기였던 2012~2014년에도 관중동원은 꾸준히 했던 팀인데, 올해는 성적까지 좋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첫 100만 관중 기록을 달성했다.

관중 수 증가에 이은 또다른 호재는 바로 팬덤 연령대의 하향화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호남출신 노년, 중년 이상 연령층들이 주로 좋아하는 구단'이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이있다면 2008 베이징 올림픽 직후인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그리고 김기태 감독 부임 이후 팀 연령대가 낮아지고 팀컬러가 180도 달라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10~30대 젊은 팬층의 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당연히 2017시즌의 선전과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과정에서도 많은 젊은 팬층이 유입되고 있다.

2019년 갤럽 조사에서 인기 구단 순위 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가 떴다.

11.1. 최악의 팬 서비스

팬 서비스란 개념도 희미하던 시대인 과거 해태 타이거즈 시절이 오히려 팬과 선수, 구단 간의 유대감은 더 좋았단 소리가 나올 정도로, 팬 관리가 굉장히 서투르고 성의가 없으며 부족하다. 이것은 선수단 측면에서도, 구단 차원의 측면에서도 해당된다. 선수단이 팬을 외면하고 사인을 하지 않는 것이 공중파 뉴스로 다뤄지기도 했으며, 구단 유튜브 채널의 경우는 다른 구단과 비교하면 보수와 대우가 상당히 짜서 영상의 퀄리티가 낮다. 2018 시즌 들어서 좋아졌지만, 사실 이 동영상 편집 및 관리도 거의 열정페이 수준.[121] 거기에 구단은 팬들의 목소리를 잘 듣지 않는데, 이는 팬들의 의중을 무시한 정재공 단장 현수막 사건이나 선동열 재계약 사태, 김기태 사퇴 운동 시 보여주었던 사찰행동에서 잘 나타난다.

같이 팬 서비스가 나쁜 팀으로 손꼽혔던 롯데삼성은 선수 차원에서든 구단 차원에서든 개선 의지라도 보이지만[122] KIA는 팬 서비스 교육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더 문제가 크다. 오죽하면 야구선수의 팬 서비스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대표 사례로 KIA가 나오겠는가?

대부분의 팀들이 그러하듯이 KIA도 젊은 선수들은 투타 불문하고 팬서비스가 좋은 편이고, 투수조는 주축이 팬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한 양현종이고 최고참 임창용도 팬 서비스가 좋은 편이라 윤석민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팬 서비스가 무난한 편이지만 문제는 베테랑 야수조. 주전 야수조 가운데 팬서비스가 좋다고 내세울 수 있는 선수는 안치홍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주찬최형우는 전 소속팀에서부터 팬 서비스가 나쁘기로 유명했고, 인터뷰할 때마다 팬을 자주 언급하고 또 구수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이범호는 팬서비스가 당연히 좋을 거라고 사람들이 막연하게 착각하지만 실상 전혀 좋지가 않다. 또한 SK 백업 시절엔 늦게까지 사인을 잘 해줘서 절찬을 받았던 김민식은 KIA 이적 후 주전으로 도약하더니 김주찬, 최형우 수준으로 팬 서비스의 퀄리티가 추락했다. 그리고 신인 시절엔 나름 괜찮았던 김선빈은 상무 입대를 전후로 해서 극도록 나빠졌다.[123] 사정이 이러하니, 심지어 프로 야구 선수들 전체를 기준으로 보면 팬 서비스가 아주 나쁜 편에 속하는 나지완은 안 좋은 모습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고 또 그 동안 쌓아놓은 이미지가 별로라서 최악의 팬서비스를 보여주는 선수로 오인되지만 실제론 KIA 타자들 기준에선 중간은 간다는 평이 나올 정도다.

그리고 대부분의 팀에서 외국인 선수들은 팬 서비스가 상당히 좋지만 KIA는 외국인 선수들마저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다. 2018년 기준으로 팻 딘만 팬 서비스가 좋고 헥터는 외국인 선수치고 팬 서비스가 별로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버나디나 같은 경우는 2017 시즌엔 그럭저럭 좋다는 여론이 우세했으나 2018 시즌엔 평이 갈리는데 어쨌든 작년보단 안좋아졌다는 쪽으로 의견이 수렴된다.

또한 이전 기아에 소속되었던 선수들 중에도 팬서비스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선수들이 있다. 이용규, 강한울이 대표적이다. 특히 강한울은 삼성으로 이적해서도 평이 좋지 않다. 이용규는 그나마 한화에 가서는 기아 시절보단 조금 나아졌다는 말이 나오지만 여전히 보편적인 시각에선 별로다.

12. 영구결번

KIA 타이거즈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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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이종범



영구결번은 이종범의 등번호 7번선동열의 등번호 18번이 지정되어 있다.

선동열의 18번은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곤스 이적을 확정짓자 해태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현재까지 KBO에서 은퇴 전에 영구결번이 지정된 최초의 케이스.[124] 1996년 당시 기사 하지만 해태가 KIA에 매각되면서 눈치 없는 KIA 프런트가 해태 색 없애기의 일환으로 영구결번을 무효화하고 당시 유망주이자 신인 최고액 계약금을 받았던 김진우에게 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면서 결국 KIA에서도 영구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정작 18번을 잠깐 받았던 김진우도 구단이 주니까 받기는 했지만 부담이 되었던 눈치. 선동열 본인이 KIA 감독으로 복귀할 때 이 번호를 되살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영구결번의 취지를 살리고자 감독 선동열에겐 90번이 갔다.

이종범의 7번은 2012년 3월 31일, 본인이 은퇴를 선언함과 동시에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5월 26일에 은퇴식과 영구결번식이 동시에 거행되면서 타이거즈 역사상 두 번째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다만 영구결번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125]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타이거즈의 영구결번 기준이 너무 높은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오는 처지. 선동열이종범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앞으로 다시는 나오기 힘든 어머어마한 선수들이다보니... 특히 선동열의 경우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분업화가 자리잡기 전인 8~90년대에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기록한 성적이라 더더욱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지금이라도 김응용. 김봉연, 김성한, 조계현, 이강철 등의 레전드들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해 진입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의견이 꽤나 득세하고 있지만, 딱히 영구결번을 늘리거나 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프런트가 해태 시절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냐는 쪽이 중론인데, 가뜩이나 해태색 지우기에 이골이 난 기존 팬들 사이에서는 이런 데서까지 해태색 지우기냐며 성화.

13. 외국인 선수 선발

13.1. 투수

과거 해태 타이거즈의 팀 컬러였던 투수 위주의 팀 컬러답게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는 투수 용병을 잘 뽑기로 유명하다. 해태 시절을 포함, 투수 용병에 있어서는 게리 레스[126], 다니엘 리오스, 변화구 구사가 뛰어났던 마크 키퍼, 캐나다 국가대표 마이클 키트 존슨, 일본으로 건너가 더 좋은 활약을 한 세스 그레이싱어, 2009년 KIA 타이거즈의 V10을 이끌었던 아킬리노 로페즈릭 구톰슨 등 쟁쟁한 외국인 선수들이 많았다. 게다가 2010년 이후 야구계의 용병농사가 외국인 투수에 집중되면서 더욱 돋보인다. 타선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지 못해서 그렇지 매년 10승급 외국인 선수를 데리고 올 정도이다.

2012년에 아킬리노 로페즈를 포기하면서까지 데려온 앤서니 르루호라시오 라미레즈가 시즌 초반 부진하고, 결국 호라시오 라미레즈헨리 소사로 교체되면서 팬들을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이후 앤서니와 소사 모두 선발로서의 제 역할을 다해주면서 어느 정도 우려는 불식되었다. 하지만 팀 성적은 시망... 2013년에는 희대의 설레발 디버프로 본인들 성적마저 수직하락했다.[127]

2014년에는 NPB 다승왕 경력이 있는 데니스 홀튼을 선발 투수로, 마이너리그에서 수년간 마무리로 경험을 쌓았던 하이로 어센시오를 영입하였다. 홀튼은 시즌 초부터 선발진의 한 축을 이루며 좋은 성적을 낸 반면, 어센시오는 마무리로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기대보다는 불안한 피칭 내용을 보이며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그래도 시즌을 거듭할수록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제대로 망한 2013년을 제외하면 그래도 외국인 투수를 보는 스카우터의 능력은 좋다고 평가받나 싶었으나.. 데니스 홀튼은 7월이후 무릎연골이 찢어져 구위저하의 원인이 되었고 수술이 불가피해 방출통보를 받았다. KIA구단은 어센시오를 경험한 뒤 외국인 마무리투수를 뽑으면 안 된다는 인식의 흑역사를 가져다주었고 당시 활약하고 있던 브렛 필만 애꿎게 되었다[128]. 결국 팬들의 불만을 가져왔고 투수용병쪽에선 실패한 스카우트 사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2~2013년을 KIA에서 뛴 헨리 소사는 2014년 넥센에서 뛰다가 2015년부터 2018년까지 LG유니폼을 입고 뛰기도 했다.

다만 2012년 이후로는 투수 픽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 2009년 한국시리즈의 영향으로 타 팀에서도 수준급의 외인 선발투수를 오버페이까지 해오면서까지 데려오게 되었고, 선 감독의 고집으로 인해서 뽑아온 투수들은 딱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014년 타자 잔혹사를 끊음과 동시에 투수 픽은 흉작이 되어가는 현실. 2015년 외인 투수인 조쉬 스틴슨필립 험버 역시 피장타율이 높아서 2009년의 외인 콤비를 봐온 KIA 팬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지 못했다. 그나마 스틴슨이 나아졌지만 험버는 역대 KIA 외인투수 중에서 역대 최악의 투수가 되어버렸다. 조쉬 스틴슨은 2015년 9월 이전까지 10승투수가 되어 다음시즌 재계약에 청신호가 켜졌지만 9월 이후 어깨부상으로 1승밖에 추가하지 못했고 어꺠부상 이후 구위저하와 제구난조가 찾아와 재계약에 적신호가 켜져 다음시즌 재계약에 실패했다. 험버대신 대체용병으로 영입한 에반 믹은 초기엔 불펜의 핵으로 활약했지만 이후 팔통증과 부상으로 저조한 성적을 남겨 결국 이번시즌도 투수용병 뽑기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2016년 시즌에는 프런트가 각성하였는지 헥터 노에시, 지크 스프루일이란 최상급의 용병을 영입하였다. 헥터 노에시는 마이너리그에서 9시즌, MLB에서 5시즌을 보내왔는데, 마이너리그 통산 123G 98선발출전에 584.1이닝, 35승 28패 ERA 3.71 WHIP 1.16을 기록하였는데, 주목할 만한 기록은 삼진/볼넷 비율이다. 584.1이닝동안 삼진은 537개, 볼넷 126개를 던졌다. MLB 5시즌 동안 총 4개의 팀(양키스, 매리너스, 레인저스, 화이트삭스)을 거치며 107G 53선발출전 395.1이닝 12승 31패 ERA 5.30 WHIP 1.46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크 스프루일은 프리미어 12에서 미국전 선발대표로 나섰다. 한국 vs 미국 예선전에서 6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보여주어 KBO 스카우터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이너리그에서 8시즌, MLB에서 2시즌을 보내왔는데, 마이너리그 통산 191G 143선발출전에, 903.0이닝, 52승 60패 ERA 3.86 WHIP 1.30을 기록하였다. 승보다 패가 많지만 통산 ERA가 3점대로 준수하며, 이닝당 출루 허용률도 1점대로 굉장히 훌륭한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MLB에서 2시즌동안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활약하였는데 통산 12G 3선발출전 1승 3패 ERA 4.24 WHIP 1.56으로 크게 뛰어난 활약을 하지는 못하였다. 단순 MLB기록으로만 보면 위력적인 투수로 보이지는 않지만, 마이너리그에서 수차례 팀을 옮긴 것으로 보아 성장가능성이 매우 높은 투수로 평가되었다. 결과적으로 헥터는 예상대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지크는 결정구의 부재와 한국의 폭서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로 득점지원 덕에 간신히 10승은 거두었지만 높은 평균자책점과 날씨에 따른 심한 기복 등 세부적인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활약을 거두어 재계약에 실패하게 되었다.

17년에는 헥터와 재계약했고 지크와 헤어진 뒤 미네소타에서 뛰던 팻 딘을 90만 달러에 영입하였다. 16년에는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가며 보낸 투수. 좌완으로 140km대의 속구와 벌컨 체인지업을 비롯하여 몇 가지 변화구를 갖춘 투수로 메이저리그에서는 구속은 빠르지 않지만 정교한 제구력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의 투수였으나 140km대의 속구면 메이저에서는 느린 공이지만 한국무대에서는 파이어볼러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구속으로 빠른 구속에 제구력까지 갖춘 완성형 투수로서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헥터는 양현종과 더불어 32년만의 단일 구단 20승 콤비[129]를 결성했고, 펫 딘은 제구에 난조를 보이며 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후반기에 위력을 발휘해 팀의 정규시즌 우승에 한몫했다.

2018년에는 우승 공로로 작년의 외국인 투수 듀오인 헥터, 팻 딘과 모두 재계약하였으나 이것은 최악의 수가 되었다. 헥터는 등판할 때마다 꾸준히 3~4실점 정도는 하고 있고 팻 딘은 선발 성적이 너무나도 안 좋아서 2018년 후반기에는 불펜으로 강등되어 2018년 10구단 외국인 투수 WAR 꼴찌를 찍으며 외국인 원투펀치가 사실상 무너졌다. 사실 애초에 재계약 때부터 외국인 투수들이 2017년만큼의 활약을 해주기는 어렵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예상된 결과였다. 헥터는 너무 굴린 여파로 2017년 후반기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팻 딘은 떨어지는 구종이 없다는 약점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

2019년에는 제이콥 터너와 조 윌랜드를 새로 영입하면서 헥터, 팻 딘과 결별했다. 팻 딘은 워낙 부진했기에 누구라도 교체를 예상할 수 있었지만 헥터는 조금 의외라는 평이 있었는데 사실은 타이거즈측에서 재계약을 추진중이었지만 재계약 시 내야하는 많은 세금에 부담을 느낀 헥터측에서 재계약을 포기했다고 한다.

13.2. 타자

투수 쪽에서는 꾸준히 평타 이상을 쳐주는 반면 타자 용병은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뽑기운이 없었는데, 그나마 해태-KIA 역사상 제 몫을 해줬던 타자 용병이라면 1999년 해태에서 뛰었던 트레이시 샌더스, 윌리엄 브릭스, 2000년에 대체 용병으로 들어와 쏠쏠한 활약을 했던 준족의 똑딱이 헤수스 타바레스[130], 3할에 20홈런을 넘겼던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 그리고 2012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소유자인 2014년 외국인 타자 브렛 필, 2017년 2년 연속 20-20클럽에 가입한 로저 버나디나 정도밖에 없다.

이로 인해 이름이 로 끝나는 외국인 타자를 데려오면 성공한다고 말했지만 밑에 서술된 윌슨 발데가 그 전통을 깨뜨리고 말았다.

해태-KIA 타이거즈의 타자용병 잔혹사를 설명하자면, 실력 외에 애초에 해태의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잘할수가 없던 숀 헤어는 일단 논외로 두고, 2000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던 호세 말래브와 에디 피어슨부터 시작해야 할 듯 싶다. 호세 말래브는 입국 당시 총기를 소지하였던 것이 들통난 데다 실력마저 신통치 못해 시즌 시작도 전에 짐을 쌌으며 에디 피어슨은 1999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면서 실력은 검증받았지만 당시 해태의 열악하기 짝이 없는 대우에 실망해 자기 스스로 짐을 싸서 나왔다. 그 대체 용병으로 제이슨 배스와 일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뛰었던 내야수 아르키메데스 포조를 데려왔으나 제이슨 배스는 좀 하다 싶더니 부상으로 짐을 쌌고, 포조는 시즌 초반 부진하자 곧바로 쫓아냈다. 여담으로 포조는 해태에서 쫓겨난 후, 해태의 열악한 대우에 대해 자신의 에이전트를 통해 항의하기도 했다.

2002년 KIA 타이거즈로 바뀌고 첫 풀시즌을 치렀을 땐 멕시칸리그 홈런왕 출신 워렌 뉴선을 데려왔는데, 이 선수는 키는 엄청 작은데 거포스윙을 남발하다 폭삼만 당하며 결국 퇴출. 후임이었던 루디 펨버튼도 마땅한 수비 포지션이 없어 지명타자로만 나왔으나 성적은 썩 좋지 못했다.

2007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에서 홈런왕을 했던 래리 서튼을 영입했다. 나이가 많고 무릎이 좋지 않아 전년도엔 지명타자로 뛰었으나 KIA로 오면서 좌익수 수비에 들어갔고, 그나마 타율은 괜찮았으나 득점권 타율이 처참했고 장타력마저 떨어지면서 최희섭이 KIA에 입단하자마자 퇴출되었다. 서튼은 KIA 타이거즈를 끝으로 은퇴했는데, 2008년 시즌 종료 후 새로운 외국인 선수를 물색하던 KIA 타이거즈에 이 선수를 추천해줬다.

2008년에는 유격수 홍세완의 공백 때문에 메이저리그 경력이 있던 윌슨 발데스를 영입했다. 시범경기만 해도 빠른 발과 쏠쏠한 타격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똑딱이인 주제에 큰 스윙을 가져가고 수비마저 정줄 놓은 수비를 보여주며 일찌감치 퇴출되고 말았다. 이 선수는 KIA에서 퇴출된 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대체 용병으로 입단하였으나 거기서도 퇴출. 이후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거쳐 신시내티 레즈에서 활약하였다. 그냥 동양 야구와 안 맞았던 모양.

그런데, 2014년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가 3명 보유 2명 출장 및 타자용병 의무 영입으로 늘어나면서, 6년만에 타자 용병을 영입했다. 그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뛰던 브렛 필. 이전까지의 타자 외국인 잔혹사 때문에 의혹을 가지기도 했고 실제로 시범경기까지는 매우 부진했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 되자 OPS 0.894를 찍었다. 득점권 타율은 낮았지만 이것은 매 시즌 편차가 심하니 선수의 능력으로볼수는 없다. 중요한 시점마다 영양가 넘치는 홈런을 때려내며 기아 타선에서 돋보이는 타격능력을 보여주었고, 삼성 배영수의 공에 손등을 맞아 경기수가 부족해서 누적 기록은 마땅치 않았다.

재계약에 성공한 2015년에는 KIA의 소년가장 역할을 하였다. 예상 대로 득점권 타율이 평균으로 돌아오는지 아주 좋아졌다. 인성 좋고 성실하고 사고 위험이 없으며 잘생기고 잘하자 팬들 사이에서는 타리그로 다시 갈까봐 전전긍긍. 필은 이렇게 타이거즈 타자 잔혹사에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다만 2014~2015 시즌이 엄청난 타고시즌이라 1루수 포지션임에도 타 구단 외인타자들과 비교해서는 아주 특출나지 않다는게 문제. 나쁜공에도 스윙이 나가는 배드볼 히터라 출루율이 타율 감안하면 낮은 편. 미국에서도 항상 스타일이 비슷해서 이게 한계가 아닌가 하고 교체하자와 3번째 시즌을 같이하자는 의견이 충돌했지만 브렛필은 이번에도 재계약에 성공하며 타이거즈 역사상 최장수 타자용병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브렛 필 본인도 자신을 보는 외부의 시선을 신경쓰고 있는 듯 비시즌 기간 동안 웨이트로 몸을 키웠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2016 시즌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015년 종종 보여주던 팬들을 환장하게 하는 클러치히터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럭저럭 건실하던 수비마저 무너지면서 다른 의미로 환장하게 했다. 포털 사이트 등에서 '필까충 VS 필맘충' 이라며 팬들끼리 서로 비난해대며 싸우는 씁쓸한 광경도 흔히 볼 수 있었고, 이곳 위키에서도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사상 최악의 용병', '90만달러 거품' 이란 표현도 쉽게 볼 수 있었다.

6월 중순부터 잠시 살아나는 듯 했으나 다시 추락을 거듭하며 최종성적 20홈런 OPS .868로 마무리했다. 시즌 내내 1루만 전담했음에도 시즌 초 무상 트레이드로 영입된 OPS .882를 기록한 2루수 서동욱보다도 OPS가 낮다.게다가 두자릿수 병살+실책을 기록하며 수비에서도 안정감을 주지 못했으며 결국 시즌 후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2016년 12월 1일, 외야수 로저 버나디나와 85만 달러에 계약했다. 그리고 버나디나는 초반 타격에서의 끔찍한 부진으로 퇴출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김기태 감독이 특유의 동행 야구[131] 정신을 발휘해 끝까지 믿어준 결과 20-20을 달성하고 사이클링 히트를 치는 등 KIA 역사상 최고의 타자 용병이 되었다. 게다가 한국시리즈에서는 5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며 KIA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2018년에는 1번 타자로 주로 나와 테이블세터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3번이나 5번에서 클린업을 담당하기도 하는 등, 상위와 중심 타선에서 활약하였다. 2년 연속으로 20-20을 달성하고 3할도 달성했지만 많은 기록이 2017년보다는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넓은 수비범위와 도루 2위를 달성할 정도의 주루 능력, 타격 능력을 가지고 있어 재계약을 추진해야한다는 의견도 존재했는데, 결국 재계약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재계약을 하지 않은 이유에도 의견이 분분한데 버나디나의 적지 않은 나이가 큰 이유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에 기아 타이거즈는 2019년 대체 용병으로 제레미 해즐베이커를 영입한다.

14. 이모저모

14.1. 선수 육성 체계

일단은 KIA 타이거즈는 2010년부터 8개 구단 최초로 3군 체제를 시작한 팀이다. 하지만 창설 초기에는 무늬만 3군이라는 성격이 매우 강했다. 일단 2군 시설부터가 낙후되어 있던 상황이니 막 생긴 3군 시스템의 모습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12년 말에 완공된 함평 육성전용구장이 완공되기 전까지 함평 전남야구장#을 임대하여 2군 구장으로 사용하였던 기아 타이거즈 2군은 그야말로 이었으며 전용구장이 완공된 이후에도 함평군의 훈련시설이 아직 완공 전이라 육성체계가 완성되지 못한 탓에 2012년까지는 잔류군 및 재활군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선동열 감독 체제 이후로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신인들을 많이 뽑고 신고선수들도 많이 영입하여 3군 체계를 강화시켜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하면서 경쟁을 통해 훌륭한 팜 시스템을 구축하여 제 2의 이준호나, 넥센의 서건창 등을 발굴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12년 시즌 후반기에 고양 원더스 소속의 외야수 강하승을 신고선수로 영입한 것[132]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군 총괄코치가 3군까지 전체적으로 선수단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또한, KIA는 코칭스태프 체계에서 2군 감독이 따로 없고 1군 감독이 2군, 3군까지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따른다. 대신 2군 총괄코치라는 일종의 수석코치 및 감독대행을 두어 관리하는 체계. 그만큼 1군 감독이 2군과 3군까지 세밀히 점검을 하면서 모든 선수단의 운영을 관리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더욱이 선동열 감독 체제가 들어서면서 선수 육성에 대한 의미를 더욱 강조하면서 경쟁 시스템 구축이 가속화 될 전망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함평에 좋은 시설이 들어서고 무한 경쟁체제가 확립되어 좋은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야지만, 그리고 선동열 감독 이후의 코칭스탭진이 2군 및 3군 육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2012년 시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선 감독이었지만, 그의 부임 이후 육성군 체질 개선으로 2군이 좋은 성적은 얻은 것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133] 그리고 2014년 말 선동열 감독이 사퇴하고 김기태 감독 체제가 들어서면서 2군 감독 직책이 신설되었고, 2019년 5월 김기태 감독이 사퇴하면서 2군 총괄코치 직책이 부활했다.

일단 최초로 3군이라는 단어를 도입하고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산물이었던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가 완공되면서 선수 육성의 하드웨어는 갖춰진 상태이다. 챌린저스 필드 클럽하우스 완공이 늦어진 상태에서 2군 코치진들이 새로운 선수 발굴에 실패한 결과 2013년 시즌의 참담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과거 2군 시스템과 인프라는 어느정도 개선은 된 편이지만 별개로 재활시스템은 10개 구단중 최악으로 꼽혔다.[134] 2015년 12월 7일 홈구장인 챔피언스 필드 부지내에 재활센터를 만들계획이라고 한다. 완공이된다면 구단 자체 재활치료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KIA, 인프라 대확충...프리미엄 좌석, 3군 구장, 재활센터 건립 그리고 2016년 7월 13일 2군 경기장인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 옆 부지에 재활센터 개소식을 가졌고 10개 구단중 최악으로 꼽혔던 재활시스템은 이전보다는 나아졌다.

다만 아직 선수 육성능력은 좋게 봐도 중하위권에 불과하다.[135] 애초에 KIA는 퓨처스 시설이 첨단화된 지도 4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군문제 해결도 김기태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야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당장 성과를 바라기에는 조금 이른 상황. 또한 은퇴한 KIA 출신 선수를 코치연수도 시키지 않고 그대로 코치에 박아버리는 속칭 갸무원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래도 퓨처스에서 두각을 보였던 선수조차 드물었던 선동열 시절과는 달리 김기태 부임 뒤에는 그 선수들을 1군에서 쓸 수 있는지의 여부는 뒤로 하더라도 군경팀에서든 함평에서든 좋은 성적을 내는 선수들이 어느 정도 나오고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선수들이 대부분 1~2년차라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던 부류로 보이기 때문에 함평 교육시스템이 좋아서 이런 선수들을 배출한다고 보기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진영.[136]

14.2. 라이벌 팀

14.2.1. 전통의 라이벌, 삼성 라이온즈

삼성 라이온즈와는 원년부터 라이벌이었다. 상징부터가 호랑이 VS 사자에 유니폼 색깔도 빨강파랑[137], 각각 영호남을 상징하는 도시가 연고지인데다가 해태 버스방화 사건과 양 팀간의 설전과 정치적인 스탠스로는 진보 vs 보수 등으로 지역적인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

물론, 해태의 전성기 시절엔 삼성이 우승을 한 번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등 해태의 선수들을 영입한다거나, 혹은 임창용, 이강철처럼 돈으로 영입을 해가며 해태를 따라해보는 시도를 보여주었으나, 당시엔 우승 횟수가 워낙 차이도 났고 삼성은 항상 준우승 전문이라는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삼성이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2011~2014 시즌엔 4연속 통합우승을 일궈내며 V8까지 달성하면서, 이러다 '우리의 우승 횟수를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는 타이거즈팬들의 여러 우려[138]에 인터넷 상에서는 양 팀간의 설전이 계속 있었다. 하지만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발생하고 삼성의 암흑기가 시작되고, KIA는 공교롭게 FA로 삼성의 최형우를 영입하고 2017 한국시리즈에서 V11을 이룩하게 되며 다시 양 팀간의 상황이 미묘하게 되었다.

양 팀으로 VS놀이를 하면 항상 설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종범 vs 양준혁, 김선빈 vs 김상수, 챔필 vs 라팍, 양 팀 중 어디가 더 명문 팀인가 등 파이어가 나는 주제들이 많아서 항상 팬덤이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14.2.2. 인기 구단 라이벌, LG 트윈스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MBC 청룡이 해태 타이거즈를 꺾었다면 프로야구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당시 한국시리즈는 전·후기리그 우승팀이 맞붙는 방식이었기 때문. MBC는 후기리그를 1위로 마쳤지만 전기리그 챔피언 해태에 1무 4패로 패하며 홈구장인 잠실 야구장에서 원정팀 해태에게 우승을 내주게 된다. 한국시리즈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운 해태는 이후 1986~1989 시즌 4연패를 차지하는 강팀이 됐고, MBC는 우승은 커녕 한국시리즈에도 한 번 나가지 못하는 만년 중하위권 팀이 되고 말았다. 1989 시즌까지 MBC가 프로야구에 참가한 8시즌 동안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한 게 최고 성적. 당연히 두 팀 사이에는 딱히 라이벌 구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서울의 구성원들은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많고, 토박이가 적기 때문에 출신 지역이 다양하다. 덕택에 프로야구 원년부터 '서울팀=우리팀'이라는 인식은 미미했고 오히려 '고향팀=우리팀'의 인식을 가졌거나 본인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지방에서 상경한 부모님의 응원팀을 따라서 응원하거나 항상 이기던 해태의 야구 자체에 매료된 비연고성 팬층도 상당했다.

그래서 호남 출신 팬+호남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해태 자체를 좋아하는 팬[139]으로 해태의 잠실경기는 항상 북새통을 이뤘다. 더구나 포스트시즌 4차전 이후부터는 대개 잠실에서 치르도록 되어있는 중립구장 규정 탓에 가장 잠실에서 많은 빅 게임을 가진 팀도 다름 아닌 해태였고, 잠실은 해태의 보조 홈구장이라는 말도 통용되던 시절이었다.[140]

하지만 1990년, LG그룹이 야구단을 인수하며 모든게 달라졌다. LG는 그 해 8월 25일까지 53승 42패(승률 .558)로 3위, 해태는 47승 3무 41패(.533)로 4위였다. 두 팀은 잠실에서 이 날까지 주말 3연전 경기 중 두 경기를 치러 1승 1패를 주고받은 상태였고, 1990년 8월 26일 경기에서 그 유명한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이 터진다. 원래라면 구장관리 미흡으로 홈팀 LG의 몰수패를 선언해야 되지만, 원정팀 해태팬들이 난동을 피웠기에 심판들도 몰수패를 쉽사리 선언하지 못했고 결국 경기는 난동이 진정되고 1시간 뒤에 재개되어 해태의 1-13 대패로 경기가 끝나게 된다. 해태는 결국 페넌트레이스를 2위로 마쳤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3전 전패를 당한 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다. 거꾸로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LG는 여세를 몰아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에도 오르게 된 것.

또한, 1990년대 초중반부터 해태팬들이 LG를 놀리려고 만든 노래인 고래사냥이 탄생하게 된다. '자~ 떠나자~ LG 잡으러~' 라고 개사를 해서 잠실구장에서 떼창을 시작했고, LG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응원가가 되었다. 이 응원가는 그 이후 쭉 이어져서 부르다가 결국 2008 시즌을 앞두고 김주일 응원단장의 사과로 더 이상 공식 응원단에서는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응원단에서는 말리지만 일부 KIA팬들이 고래사냥을 부르는 모습이 포착되었고, LG팬들은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1990년 LG에 입단했다가 트레이드를 통해 1994년 해태로 팀을 옮긴 이병훈 전 해설위원은 "LG 시절엔 솔직히 해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재계 라이벌인 삼성이나 잠실 라이벌 OB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런데 해태에 가보니 'LG에는 지지 말자'라는 분위기가 확실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4년, 신바람 야구로 LG를 정상으로 이끌었던 이광환 전 감독은 "그 때도 지금처럼 LG는 인기가 대단한 팀이었다. 잠실에서 해태하고 맞붙으면 정말 힘든 경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지는 날에 팬 3000명 정도가 모여 '감독 나오라'고 외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감독으로서도 더 이기고 싶은 경기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출처

이 라이벌 의식이 절정에 달했던 건 1997년 한국시리즈였다. 당시에는 플레이오프 진출팀이 서울 연고팀일 경우 순위에 상관 없이 1, 2, 5, 6, 7차전을 잠실에서 열도록 하는 규정 때문에 해태는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고도 홈 어드밴티지 없이 경기를 치뤘지만, 승자는 해태였다. 마운드에서는 이대진, 타석에서는 이종범이 팀을 이끌며 V9를 이뤄냈다.

이후 2001년, 팀 이름이 KIA로 바뀔 때까지 더 이상 해태가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한 적은 없다. 결국, 해태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도 마지막 우승도 모두 상대 팀이 전신 MBC와 LG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해태 팬들 사이에서는 "잠실은 해태 안방 구장"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리기도 했다.

물론 LG라고 당하기만 했던건 아니다. 2002 시즌 페넌트레이스 4위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탔던 LG는 플레이오프에서 박용택의 활약과 김진우의 부진으로 3승 2패로 KIA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 후에는 2009 시즌 초 김상현, 박기남강철민 트레이드 덕분에 KIA는 V10을 이룩하게 됐고, '아낌없이 주는 LG'라는 놀림을 받게 된다. 하지만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KIA의 부진과, 2013 시즌에는 LG 김기태 감독의 활약으로 무등구장에서 602 대첩이라는 LG팬에게는 명경기, KIA팬에게는 치욕의 경기가 탄생하기도 했다.

2015 시즌부터는 김기태 감독이 KIA로 부임하며 다시금 양 팀 팬덤의 분위기가 뜨거워졌고, 2016 시즌에는 와일드카드에서 치열하게 맞붙기도 하며 라이벌 관계가 다시금 뜨거워지고 있다.

여담으로, 김상현 트레이드에 실패한 LG 프런트는 2009 시즌 이후로 KIA와 전혀 트레이드를 하지 않았으나 2019년 1월 중순 정용운을 받고 문선재를 보내주며 10년 만에 트레이드를 단행하기도 했다.

14.2.3. 영호남 라이벌, 롯데 자이언츠

롯데 자이언츠는 영남을 대표하는 도시인 부산을 연고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삼성처럼 라이벌 관계가 형성됐다. 게다가 선동열 VS 최동원[141] 그리고 해태제과롯데제과로 대립했었다.[142]

하지만 롯데의 성적이 계속 중하위권을 맴도는 반면에 해태는 우승을 계속 차지하고 인수 뒤인 KIA가 우승을 2번이나 차지했지만, 롯데는 1992년 우승을 마지막으로 우승을 쌓지 못하면서 성적으로는 라이벌 관계라고 보기에는 애매해졌다. 그래도 지역감정으로 형성된 영호남 더비로 보자면 양 팀의 큰 팬덤과 함께 굳건한 라이벌 관계다. 그래서였는지 해태-KIA와 롯데는 두 팀 간 선수교환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창단 초창기에 좌투좌타 내야수 백업으로 활약했던 김일환 정도. 그리고 약 20년이 흘러서, KBO 2차 드래프트로 선수를 데려오거나 김주찬을 KIA가 FA로 영입하면서 롯데에 보상선수로 홍성민을 내 준 것이 그나마 양 팀간의 선수 교환 사례다.

2018 시즌에는 한글날 대첩이라는 양팀간의 맞대결이 탄생하며 시청률은 지상파 2.8%, 케이블 4.8%로, 지상파로는 2018 시즌 중계 중 최고를 달성했고, 케이블로는 2014 시즌 이후의 포스트시즌을 포함한 모든 야구 경기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네이버 중계 동접자 수도 50만명을 넘으며 굳건한 양 팬덤 간의 저력을 과시하며 여전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 중이다.

14.2.4. 그 외

1988, 1989, 1991년으로 4년간 3번이나 계속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한화 이글스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광주와 가장 가까운 팀이고, 포스트시즌 횟수를 보면 빙그레/한화 이글스전이 가장 많다. 하지만 한화가 2008 시즌부터 암흑기가 시작되며 2018 시즌에 암흑기를 탈출하긴 했지만 라이벌로 보기엔 애매해졌다. KIA 인수 이후인 2001년부터 현재까지 한화전 성적은 승률 .562로 인수 후 상대팀 승률 중에 승률이 제일 높다. 해태 vs 한화 성적이나 해태 vs 빙그레 승률도 전부 .550을 넘을 정도로 전형적인 타이거즈의 강세.

SK 와이번스가 4연속 한국시리즈 제패할 뻔 했던 것을 막았던 2009년에 사제 간의 대결로 라이벌 플래그가 생성된 적은 있었다. 당시 SK 감독이었던 김성근은 당시 KIA 감독 조범현이 충암고 재학 당시 감독이었다.

14.3. 신인왕 잔혹사

의외로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1982년 리그가 시작된 이래 가장 최우수 신인왕과 연이 지지리도 없는 팀이다. 1985년 신인왕과 KBO 골든글러브를 거머쥔 이순철[143]이 배출된 이후 2019년까지 34년동안 타이거즈에서 신인왕을 배출해내지 못했다. 11번의 우승을 거머쥐는 동안에도 빼어난 신인이 나오지 못하거나, 그 해에 신인왕에 버금가는 활약을 했음에도 그 해에 더 괴물같은 선수들이 타 팀에서 나오면서 인연을 맺지 못했다.
  • 1989년에는 신인 이강철이 214.2이닝 15승 1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3.19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뒀으나, 태평양의 박정현이 19승 10패 2세이브에 평균자책점 2.15, 242.2이닝을 투구하며 신인왕 자리를 내주게 된다.
  • 1990년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이호성의 경우 그 해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준수한 성적을 보였으나 그 해 신인왕은 김동수의 차지였다.
  •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이종범의 케이스로, 1993년에는 걸출한 스타급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한 해였고 특히 삼성 라이온즈의 교타자 양준혁과의 라이벌 구도가 그려졌다. 결국 신인왕 투표에서 양준혁에 밀려 신인왕 타이틀을 놓치게 되었다. 대신 이종범은 그 해 한국시리즈 MVP와 이듬해 리그 MVP로 신인왕의 설움을 풀기는 했고 아들이 신인왕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뤘다
  • 2002년에는 김진우도 12승에 탈삼진왕을 차지하는 등 신인왕을 탈만한 성적이지만 더 뛰어난 현대 조용준의 등장으로 실패했다.
  • 2006년, 최고 계약금 10억을 쥐고 입단한 한기주의 경우에도 데뷔 후 선발 및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수준급의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 해에 혜성처럼 나타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거머쥔 괴물급 투수의 등장으로 묻혔다.
  • 2009년, 최연소 올스타전 MVP와 한국시리즈의 숨은 공신으로 활약했던 안치홍 역시 그 해에 유일한 순수 신인으로 신인왕에 도전했으나 후반기에 접어들어 약점이 노출되어 삽질을 거둔 끝에 0.235라는 멘도사 라인 급의 타율을 기록했고, 결국 중고 신인인 이용찬에게 자리를 내줬다.
  • 2012년에는 박지훈이 불펜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신인왕에 도전했으나 서건창이 등장하면서 실패했다.

14.4. 군기 및 징계

해태 타이거즈 시절과 2000년대 초반까지 KIA 타이거즈 군기는 악명 높았다. KIA로 트레이드 될 바에는 은퇴하는게 낫겠다고 옷 벗은 선수들도 있을 정도였는데[144] 이종범이 일본에서 돌아온 후 이대진과 함께 앞장서서 똥군기들을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종범 본인도 이 부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그런데 여전히 군기는 다른 9개 구단에 비해 강한 편인데, 김주찬의 경우 FA로 KIA로 이적한 후 한 인터뷰에서 "군기가 다른 팀에 비해서 센 편인거 같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145]

이것과 연관되어서 만일 구단 내의 선수가 사생활이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을 경우 내부 자체 징계를 세게 때리는 편이기도 하다. 무단 이탈을 한 김진우나 음주운전을 한 손영민, 구단물품과 관련되어 문제가 생겼던 한성구의 경우 임의탈퇴라는 강수를 거는 한편 SNS에서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여 팬들의 분노를 산 윤완주의 경우에도 KBO에서는 경고 정도로 끝난 부분을 구단 자체적으로 3개월 선수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린 사례가 있다.

14.5. 선수들의 충성심

강한 군기와는 별개로 타이거즈에 엄청난 충성심을 보이는 선수들이 제법 있다. 보통 해태 시절에 활약했거나 해태 야구를 보고 자란 연고 지역 출신 선수들에게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대표적으로 임창용의 경우 삼성으로 떠난 뒤에도 몇 번이나 '타이거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며 결국 돌고돌아 기아로 돌아와 활약했지만 김기태와 불화 끝에 방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방출 전 마지막 면담에서 어떻게든 좋으니 팀에 남고 싶다고 말했지만 결국 방출을 당했다. 이호준은 한창 SK와 기아가 대립했을 시절에도 인터뷰로 '기아가 좋은 성적을 냈으면 한다'고 말했고 주장 임에도 벤치 클리어링때도 그라운드에 나오지 않았다. 정성훈은 현대로 트레이드된다는 소식을 듣자 팀을 떠나기 싫다며 울었고 아예 올스타전때 현대 유니폼에 기아 헬멧을 쓰고 나오는 기행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며 결국 친정팀으로 다시 돌아왔고, 신종길은 한화시절 자신이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는 얘기를 듣자 구단에 'KIA가 아니면 안 가겠다'고 선언했다. 김상현LG로 트레이드될때 소주를 마시고 감독이 쉬던 숙소 방에 들어가서 '제발 타이거즈에 남게 해주세요'라며 무릎을 꿇고 감독한테 빌었다. 양현종은 광주 출신의 로컬 보이인데다 본인도 기아의 영구결번을 노린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팀에 애정을 보여주고있고, 안치홍의 경우는 신인 때 부터 타이거즈의 중심은 나라고 말하며 20년 동안 팀을 이끌겠다는 짤이 두고두고 회자 될 정도이다. 노수광의 경우 SK와 4대4 트레이드가 결정되고 눈물을 흘리고 감독에게 큰 절을 올리려고 했다고 한다. 트레이드 된 이후에도 자주 기아 덕아웃에 놀러오는 모습을 보여줬다. 서동욱도 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걸로 유명한데, 기아에서 다른 팀으로 넘어간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꾸 기아로 자신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고.[146] 넥센은 서동욱을 대체할 주전이 이미 충분했기 때문에, 딱히 활용법도 마땅치 않은 서동욱을 무상 트레이드로 기아에 넘겨주면서 서동욱은 11년 뒤 기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와 또 별개로 타팀에서 건너온 선수들도 팀에 대한 상당한 애정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군기가 점차 약해져갔던 2010년대에 들어온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80년대에는 대표적으로 서정환이 있고[147], 근래에는 이범호노수광, 최형우 등이 대표적.

14.6. 노란 응원막대

파일:기아노란막대.jpg

각 팀마다 팀 컬러를 반영한 응원막대를 판매하고 있지만, 빨간색과 감색을 팀 컬러로 내세우고 있는 타이거즈는 뜻밖에도 노란색 막대풍선을 쓰고 있다. 일부 KIA 팬들은 노란색 응원막대를 단무지라고 부르기도. KIA 타이거즈의 BI나 CI에서도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노란색을 찾기 힘들고 CI 변경 전에도 노란색 계열을 쓴 부분은 마찬가지로 호랑이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노란 막대풍선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LG 트윈스가 1990년대 초반 처음으로 막대풍선을 이용한 응원을 시작한 뒤 다른 프로야구 구단에서도 응원 막대풍선을 차용하기 시작했는데, KIA의 전신인 해태 타이거즈에서 막대풍선 색상으로 고려할 때 빨간색도 써봤지만 잘 보이지 않아서 시각적으로 빨간색보다 잘 보이고 부피도 커보이는 노란색 막대풍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KIA 타이거즈로 팀이 바뀌면서 2004년까지 빨간 응원막대로 바뀌기는 했지만 결국은 다시 노란막대로 회귀했다. KIA가 한 번 쓰다가 버린(?) 붉은색 응원막대는 훗날 팀 상징 컬러가 바뀐 SK 와이번스에서 쓰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좀 단순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해태 로고 중에도 노란색이 일부 있기도 하고 나름대로 호랑이 캐릭터에 노란색 계열이 들어가는 만큼 의외로 잘 어울리는 응원 막대풍선 색깔이 되었고, 노란 막대풍선은 타이거즈만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 덕분에 기아를 응원할 때 보면 빨간 베이스에 노란색이 강조되는 효과가 나온다. 특히 경기가 기아의 압승으로 흘러가기라도 하는 날에 그 기세는 더 말할게 없을 정도. 매우 우연의 일치지만,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과 컬러가 상당히 비슷해졌다.

일각에서는 호남에서 노란색이 정치적으로 남다른 의미를 상징하는 만큼 타이거즈의 응원색으로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한다.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대에 이끌었던 평화민주당의 상징색이 노란색이었고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탄생한 열린우리당도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썼다. 모두 호남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정당들이다. 현재는 정치색과 완전히 무관.[148]

현재는 일반적인 긴 모양의 막대풍선 외에도 호랑이발을 형상화시킨 막대풍선이나 탬버린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나오고 있다.

미스터 고에서 이런 걸 고려하지 않고 노란색 응원봉을 사용했다가 망했어요.

14.7. 잠수함 투수 전성시대

타이거즈에 대해 설명할 때 왼손잡이 선수 수난사와 함께 언급되는 특징으로 수준급의 옆구리 투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팀이라는 것. 이 중 왼손잡이 수난사는 수많은 우투좌타 야수가 배출되고 있는 현대야구의 추이와 함께 타이거즈 왼손투수의 기록을 속속 갈아치우고 있는 양현종의 등장으로 사실상 옛날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지만 수준급의 옆구리 투수의 배출은 기아자동차로 모기업이 바뀐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1989년부터 2012년까지 지속되었던 이강철-(박충식)-신용운-손영민의 등번호 19번 계보의 선수들이나 해태에서 뛴 적 있는 재일교포 선수 주동식, KIA 2009 시즌의 뒷문을 책임졌던 유동훈 등도 타이거즈를 대표했던 옆구리 투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이며, 해태에서 데뷔한 뒤 삼성에서 오래 선수생활을 하다 우여곡절을 겪고 KIA로 돌아온 임창용 역시 타이거즈가 배출한 KBO 리그 대표 사이드암 투수이다.

2012년을 끝으로 '등번호 19번 옆구리투수'의 계보가 끊겼고[149] 2010년대 초~중반 잠시 잠수함 투수의 기세가 줄어든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도 박준표, 박정수 등의 선수를 발굴해 냈고, 한화에서 데뷔했지만 상무에서 군 생활을 보낸 뒤 제대하여 KIA의 선발투수진을 꿰찬 임기영 역시 타이거즈 옆구리 투수 배출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14.8. 호랑이가족한마당

시즌이 끝나면 매년 실시하는 구단의 축제 겸 팬미팅. 자세한건 호랑이가족한마당 문서 참조.

15. 홈 구장

KIA의 홈 구장으로 사용중인 곳은 다음과 같다.

16. 지역 연고 학교

17. 출입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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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건 사고

그 외에도 롯데, LG와 더불어 팬 많기로 유명한 구단이기에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많은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KIA 타이거즈/사건사고 문서 참조.

19. 팬 커뮤니티

20. 각종 이야깃거리

  • 2012 시즌 들어 롯데 자이언츠넥센 히어로즈(현재 키움 히어로즈) 등 각 팀의 여성 경기보조요원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야구의 인기가 확대되면서 또 다른 구단의 인기요소가 되기 때문인데, KIA는 운영하지 않았다. KIA의 경우에는 경기 보조요원을 지역의 유소년 야구 선수들을 활용하는데, 구단 측에서는 유소년 야구선수들이 경기에 보조로 참여함으로써 선수가 되기 전 프로야구 경험을 축적하여 선수 생활의 바탕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유명한 야구 선수들을 직접 그라운드 안에서 보면서 선수로써의 꿈을 키우는 경험을 해준다는 차원에서는 나름대로 실속있는 방침이라 할 수 있을 듯. 보조요원으로 참여한 학생들에게는 소속 학교에 일 수당 5만원을 지급한다고 한다.. 하지만 2015 시즌부터는 유소년 선수 대신 다른 구단들처럼 배트걸을 쓰기 시작했다. 이 배트걸은 구단 치어리더들이 번갈아가며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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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11년 올드 유니폼 데이 당시의 이종범.)

* 2005년 이래 시즌 개막전 전패를 기록하면서 2012년까지 8연패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보니 초반에 팀 분위기가 꼬이는 경우가 계속 발생하였으며 그 분위기가 계속 진행되면 팀 운영에 차질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KIA 타이거즈의 개막전 승률이 2012년까지는 0.393으로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고. # 그러나 2013~15 시즌 개막전에서 모두 승리하며 3연승을 기록하며 개막전 승률을 어느 정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 구단 상품들이 정말 안습한 수준이다.## KIA 타이거즈의 유니폼과 상품은 10개 구단 중 삼성 라이온즈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영 좋지 못했다. 프런트에서도 인식은 하고 있다고.## 그래서인지 2017년을 끝으로 기존 사업자였던 비젼코리아와의 계약이 끝나자 마자 킷 스폰서인 마제스틱의 한국 판매를 담당하는 '케이엔코리아'와 상품 계약을 맺은 뒤 상품의 다양성이 증가되면서 점차 고객들의 의견을 만족하고 있다. 다만 아직 초기여서인지 몰라도 일부 상품의 마감이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은 있다.
  • 한동안 지나칠 정도로, 해태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을 선호하는 일명 해태순혈주의를 고집하였다. KIA 타이거즈 역대 감독들은 현재 김기태 감독, 조범현 전 감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태 출신이였다.[152][153] 하지만... 2009년 타이거즈에 12년 만의 V10을 안겨준 비해태출신 조범현감독은 2011년 전반기 1위를 했지만, 후반기의 16연패로 인해 빗발치는 팬들의 원성을 들어야 했고, 결국 정규리그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패배를 기록하며 조범현 감독은 이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를 한다. 그러나 구단과 팬들에게 이를 깨게 만든 장본인이 있었으니... 2012~2014년 3년간 감독을 맡은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전설 해태 출신인 선동열. 하지만 3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과 588이라는 처참한 성적은 감독이 꼭 해태 출신이 아니어도 된다는 해태순혈주의를 깨는 시금석이 됐다.
  •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인성이 좋고 실력이 좋은 선수라면 용병이든 누구든간에 차별하지 않고 섭섭하지 않게 대우 잘해주는 구단으로 정평이 나있는 편. 이를 증명하는게 2015년 7월 27일 외국인 타자 브렛 필의 딸 킨리의 돌잔치가 열렸는데,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외국인 선수가 한국식으로 돌잔치를 열게 된 건 처음이고, 돌잔치를 여는 과정에서도 구단은 이를 위해 많은 신경을 써준 것은 물론, 선수단, 코칭스태프, 구단 직원까지 참여를 하였다. 또한, 2015년 시즌 전반기에는 필의 가족을 초청하여 시구를 하는 시구자가 되었고 이후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신경 써주었다. 게다가 필의 은퇴 이후에는 외국인 선수의 북미지역 담당 스카우터로 채용하고, 한국시리즈에도 초청하는 등, 이러한 복지 면에서는 뛰어난 편이다.
  • 지방 연고 구단인 만큼 시구행사가 많은 편은 아니다. 다만 타 구단들이 유명인사를 시구자로 섭외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에 비해 KIA는 반대로 시구를 원하는 쪽에 돈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덕분인지 유독 광주/전남[154] 산하 기초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시구가 잦은 편이다. 해당 지역의 단체관람객 동원은 덤. 그러면서 구단 한 켠에(특히 외야 출입구 부 울타리) 해당 지자체의 지역 행사를 홍보하는 현수막이 걸리는 등 홍보의 장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KIA가 시구행사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러브 투게더 행사 등 자선단체 기부에 쓰인다.
  • 김기태 감독이 취임 후 2015년 시즌 선수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 홈팀 덕아웃인 3루 쪽에 고사를 지낸 뒤 덕아웃에 북어를 달았다고(!!!) 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선수들의 부상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김주찬 덕에 효과가 미미해진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북어는 현재까지 걸려 있다고 한다.
  • 구단 프런트가 야알못이라고 오랫동안 까였었다. 현대자동차 그룹의 방침상 사장이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한화 이글스 사장이 대신 결정권을 행사하며 오는 단장들 역시 순수하게 돈과 인프라 지원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재공 단장 이후 프런트가 구단 운영에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현장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야말로 지갑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2015년 이후로는 조금식 개선되는 모습이 보이는데, 현장의 요청이 있기 전에 박한우 사장을 필두로 한 구단 고위층이 2020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 재활센터를 건립하는 등[155] 구단 인프라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다.
  • KIA 협력병원에 안과병원이 있는데, 이 곳이 나름대로 시력교정 수술이 유명해서 KIA 소속 선수들이나 KIA를 거쳤던 선수들 중에서 이 곳을 통해서 안경에서 벗어난 선수들이 몇몇 있다. 양현종[156]이나 김종국, 노수광 등이 그 예이고, 장성호는 롯데 시절에 했음에도 KIA와의 연을 통해 안경에서 해방되었고 조영훈 역시 삼성 시절에 시력 문제로 고생했다가 KIA 이적 후에 안경에서 해방되었다.
  • 2017년 7월 5일 기준 한미일 사상 최초 8경기 연속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에는 5득점만을 기록하면서 연속 기록이 중단되었지만, 7월 9일 20득점을 하며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했다.[157][158]
  • '타이거즈(스)'를 구단 이름으로 하는 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합하면 전신이었던 해태 시절까지 포함한 11회 우승으로 최다이다. 두번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소속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4회의 우승 기록을 소유. 3위이자 맨 꼴찌인 일본대표 한신 타이거스고작 1회인데다가 그마저도 1985년 우승이다.
  • SK 와이번스가 가을야구 전문구단이라면 여기는 한국시리즈 전문구단이다. 전신이던 해태시절을 포함, 총 11번의 한국시리즈 진출 모두 우승으로 종결지었다.
  • 해태 아줌마가 올드팬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하다. 평소에는 껌이나 담배, 응원도구 등을 파는 행상인인데, 경기가 시작되면 특유의 한복치마 복장을 하고 응원단석까지 올라가 해태를 응원했다고 한다.[159] 반응은 꽤 괜찮았던 편. 팀명이 KIA로 바뀐 지금도 가끔 야구장을 찾으시는 모양이다.

21. 유명 타이거즈 팬

야구선수는 제외하고 적어주길 바람.

22. 관련 문서

2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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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 구단)
파일:KIATIGERS_1.png파일:GFC-_emblem3.png
KIA 타이거즈 광주 FC
전라권 연고 기타 구단 보기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
파일:Jeonbuk_hyundai_motors_6star(1).png 파일:KIATIGERS_1.png 파일:UHP logo.png 파일:Skywalkers_BI1.png
전북 현대 모터스 KIA 타이거즈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파일:Hillstate_logo_2.png 파일:Incheon Hyundai Steel Red Angels 6 stars.png 파일:Hyundai Steel Men's Archery Team.jpg 파일:Hyundai Mobis Women's Archery Team.jpg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인천 현대제철 레드엔젤스 현대제철 남자양궁단 현대모비스 여자양궁단
파일:Hyundai Glovis Rugby Team.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yundai_Motorsport.png
현대글로비스 럭비단 현대 모터스포츠



[1] 창단 당시 광주시(현 광주광역시)와 광산군(현 광산구)는 전라남도에 속해있었다. 분리는 1986년.[2] 연고지 제도 개편으로 인한 축소. 1차 지명은 여전히 호남지방에서 할 수 있다. 단 전라북도 지역 연고 학교 중 전주시, 군산시는 제외로 전주고, 군산상고NC 다이노스 보호권으로 편입되었으나 정읍시, 고창군인상고, 고창영선고는 1차 지명 대상이다. 그러나 NC가 군산상고, 전주고 선수들을 대상으로 1차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지 해당 지역의 제2구장 홈 경기를 치를 권리까지 준 것은 아니다. 이 둘은 별개의 사안이다. 당장 NC 다이노스가 1차 지명권을 행사하는 울산에서 제2홈구장 경기를 하는 롯데 자이언츠의 예가 있다.[3] 공식적인 구단주는 정몽구 회장이나, 실질적인 구단주는 정의선 부회장이 하고 있다.[4] 구단주 대행 겸임[5] 아직 홈구장 지위를 잃은 건 아니지만 2001년 ~2013년 까지 2014년 이후로 프로야구 제2홈경기가 없다.[6] 해태 시절 9회, 이후 2회.[7] SERIESSERISE라고 적어 놓았고, V6이니까 별이 여섯 개여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별이 일곱 개다. 모기업이 KIA로 바뀌면서 엠블렘을 재정리했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이 말이 맞다면 엠블렘을 다시 그리다가 실수로 별 개수를 착각한 듯하다. 자세한 경황을 아시는 분 추가바람. 현재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는 SERIES로 수정되어있지만 별은 그대로 7개다.[8] 여기서도 series가 아니라 serise라고 써있다.[9] 단일리그 6회 + 전후리그 3회[10] 전기, 후기 우승[11] KBO 역대 유일 한국시리즈 무패 기록 중. 11전 전승의 기록.[12] 포스트시즌을 제외한 정규시즌 기준. 경기 당 평균 14,234명.[13] 포스트시즌을 제외한 정규시즌 기준. 경기 당 평균 1,049명.[14] 계약금 40억 + 연봉 15억.[15]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챔피언결정전 최다 우승 기록이다. 2위는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10회, 공동 3위는 삼성 라이온즈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8회.[16] 다만 쌍방울 레이더스 해체 이후 프로구단이 사라진 전라북도는 팬 분포가 다양한 편.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팬이 여전히 많지만 바로 윗동네 팀인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는 팬들도 적지 않으며 과거 쌍방울 레이더스 출신 선수들이 있었던 SK 와이번스를 응원하는 팬들도 있다.[17] 혹은 여기에 김준환이 빠지고 김종모가 추가 될 수 있다.[18] 다크블루는 모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의 CI 컬러다.[19] 노란색 막대풍선은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지켜지고 있는 전통이다.[20] 이 소문의 가장 큰 배경은 해태 타이거즈의 말년과도 연계된다. IMF 한파 당시 모기업 해태제과가 부도를 맞았던 해태 타이거즈는 영광스러운 전성기에 비해 초라하고 가난한 말년을 보내야 했는데 후신 팀이 '굶어 죽는다'는 뜻의 구단명을 쓸 경우 부잣집으로 팀의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전신 팀의 가난 DNA가 전수됐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영어를 썼다고 전해진다. 이는 '해태와의 단절'을 추진했던 초창기 기아 프런트의 업무 마인드와도 맥이 통한다.[21] 참고로 기아자동차에서의 '기아'는 '아시아에서 일어나다.'(起亞)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단어인 Gear를 일본식 발음대로 옮겨적은 것이기도 하다. 자세한 사항은 기아자동차 문서 참고.[22] 로고의 상하단에는 기아자동차의 특징인 호랑이코 그릴의 모습이 담겨있는 것도 특징이다.[23]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는 각 구단들이 연고지의 지역연고 선수들을 무제한 지명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연고 1차지명은 점점 축소되지만, 신인육성의 개념이 없고 즉전감에 의존하던 90년대 초반까지는 지역연고의 최상위권 유망주들을 싹쓸이해서 해태 타이거즈는 정상권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24] 이때문에 전용훈련장 경산야구장 건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의 제휴, 미국 전지훈련 등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던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하지 못하고 오랜기간 콩라인에 머물러 있던 것이다.[25] 1990년대 초반까지는 KBO차원에서 매년 연봉인상률을 25%로 제한하였다.[26] 일단 정주영 회장 본인이 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유명한 농구애호가이며, 현대일가가 야구보다는 축구쪽에 관심이 많았다.[27] 여타 구단들은 당시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현대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28] 하지만 현대 유니콘스 창단 이후에도 기존 현대 피닉스 소속 선수들의 보유권을 인정하는 문제를 가지고 기존 구단들과 현대그룹이 또 충돌했다. 참고로 1982년 프로야구 출범때는 기존 실업야구팀들의 선수보유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어찌하던 이 문제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막강한 위세에 밀려서 어정쩡한 타협이 이루어졌고 롯데 자이언츠는 애초에 자신들의 연고 선수였던 문동환을 트레이드를 통해서 데려와야만 했다.[29] 김응용 감독의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의 명언(?)이 여기서 나왔다.[30] 박태준 회장은 축구를 선호했다.[31] 이때 포항제철 야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실업무대에 남았다.[32] 실제로 60%에 달하는 외국펀드 주주의 제동으로 포항 스틸러스에 점점 지원금이 줄어들고 행정도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더블을 달성한 황선홍이 놀라울 따름. 게다가 전남 드래곤즈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살림은 더욱 빠듯할 수 밖에 없다.[33] 아시아자동차는 1965년광주에서 설립되었으며 1976년에 기아산업에서 인수한 이후에도 줄곧 본사를 광주광역시로 적어 왔다. 오히려 모기업이 된 기아자동차 본사를 서울사무소 취급할 정도였다.[34] 기아는 광주에 공장과 출고 사무소를 두고 있다. 특히 공장의 영향이 크다.[35] 옛 현대차서비스 배구단.[36] 실제로 LG 트윈스의 1700승 기념 행사 역시 MBC 청룡의 역사를 따랐기에 가능했던 것.[37] 2001년 시즌 중에 팀 운영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전신 해태 타이거즈가 사용하던 캐치프레이즈를 썼고 2003년까지 옛 캐치프레이즈를 활용했다.[38] 참고로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그만큼 광주 야구팬들의 기아에 대한 기대감이 확실히 드러났던 경기였다.[39] 이 때 삼성의 김응용 감독은 KIA를 잡으려고 3선발 체제에 임창용을 그야말로 애니콜 체제로 투입했다.[40] 이때 KIA 불펜진에서 그나마 믿을만한 선수는 백전노장 이강철 뿐이었다.[41] 결국 그해 플레이오프에서의 부진 때문에 김진우는 고졸 신인으로 선발로테이션을 돌며 10승과 탈삼진 1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인왕을 대졸 신인이었던 조용준에게 내주고 말았다.[42] KIA가 현대에게 선두를 아깝게 빼앗긴것은 맞으나, 실제로 1위 결정전은 9월달에 있었던 광주 현대전에서 결정됐다. 초반부터 5-0으로 끌려다니며 현대의 투수진에 압도당하면서 싱겁게 끝났던 게임이었다. 사실, 2003년 당시 KIA는 전반기에 5위에 머물고 있다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연승을 달리며 현대를 잠시 제친 것이었고, 그 뒤 연승의 부작용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 1위를 내준 제일 큰 원인이다.[43] 당시 현대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선발로 올라온 정민태가 난타당하며 KIA에게 1회 6점 2회 4점을 헌납하며 10-1로 뒤진 상태였다. 그러나, 현대는 김동수의 연타석 홈런과 이숭용의 홈런으로 추격했고, 9회말에 진필중이 3점차를 지키려 올라왔지만 2점을 내준 뒤 심정수에게 15호 끝내기 장외 쓰리런을 맞고 그만 참고[44] 성적은 크게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 단장이었던 정재공과 선수단 기용을 놓고 트러블이 잦았다. 프런트의 수장인 정재공이 선수단을 장악하고 흔들며 현장의 권한인 선수단 기용에까지 손을 뻗치며 김성한 감독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 그러나 김성한 감독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SK에게 캐발린 것 때문에 뜬금없이 데이터 야구를 하겠다고 방동민을 줄창 올려서 불바다를 만든 것. 당시 KIA팬들은 진필중만큼이나 방동민이 올라오면 뒷목을 잡아야했다. 거기다 김지영폭행한 사건때문에 대외 이미지도 안좋았던 상황이였다.[45] 시즌 초에 유남호 감독의 구상은 리오스-김진우-존슨-강철민-최상덕 순의 선발진이었으나, 김진우가 스프링캠프에서 지나치게 체중감량에만 신경을 쓴탓에 훈련량 부족으로 1군에 오르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자 유남호 감독은 다니엘 리오스-존슨-강철민-최상덕4선발 체제라는 말도 안되는 선택을 했다가 선발진이 와르르 무너진 것. 5선발로 이동현을 투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안타깝게 최상덕은 저 이후로 다시는 1군에서 활약하는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불펜 난조로 이강철-조규제 듀오는 노쇠화와 부상으로 일찌감치 물러나고 신용운은 한남자의 실수가 트라우마가 되어 클로져를 못하게 돼버리는 총체적 난국이 도래했다는 거다. 상황이 이리되자 유남호 감독은 신인 투수 2명을 필승조로 삼았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윤석민이었다.[46] 당시 리오스가 KIA에서의 마지막 선발 등판 후 포수 김상훈과 포옹하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레이싱어는 2시즌간 나름 활약 후 NPB에 진출하여 꽤나 오랫동안 활약은 했다. 그 후 리오스를 일본으로 주선을 해줬다.그러나..[47] 첫 해 부터 80이닝을 던지고 이듬해도 100이닝에 근접한 투구까지 했으니, 그리고 후배 한기주와 결국, 쓴맛 단맛을 겪었다.[48] 이 당시 FA 계약으로 한 20홈런 정도는 쳐 줄꺼라는 믿으로 계약 했으니.... 1시즌 뛰었는데 그것도... 2할 7푼에 홈런 10개 꼬라지로 먹튀화가 진행 중에 팀의 필요한 로스터 자리 까지 차지하고 있었으니 골칫거리[49] 사실상 양 팀 전부 폐품 처리 트레이드라고 봐도 무방한 트레이드였다. 마해영과 최상덕은 2006년 시즌 후 전력 외가 되었으며, 그 때 낑겨간 유망주 서동욱은 백업으로 활동하다 2013년 최경철을 상대로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가 2016년 11년만에 다시 친정 팀으로 돌아왔다. KIA로 넘어온 장문석은 2006년 시즌 초반 마무리를 맡았으나 똥줄 세이브를 계속 보여주며 중반 이후 윤석민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주고 방황하던 김진우에게 노장진을 소개시켜주며 김진우가 팀을 이탈하는데 엄청난 공헌을 했다.[190] 장문석과 함께 KIA로 넘어온 한규식, 손상정 역시 별 활약 없이 조용히 팀을 떠났다.[50] 극단적인 상하위타선이 분리된 공격을 하였다. 이용규-김원섭-장성호-이재주가 버틴 상위타선은 2006년 시즌의 미친 투고타저를 감안할 때 리그 최상급 상위타선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5번을 맡아주거나 이재주를 밀어내고 4번을 차지했어야 할 용병이 전부 망했고, 이종범은 커리어 멸망의 신호탄을 쏘았으며, 그나마 손지환이현곤은 포지션 및 타순 대비 감내할 만한 수준의 성적을 냈다.[51] 2006년 시즌 기아의 젊은 투수진이 커리어가 폭발한 결과로, 그레이싱어와 장문석을 제외하면 30살이 넘는 투수를 찾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아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대들보들은 바로 다음 해에 감독의 혹사 및 무분별한 기용이 겹쳐 윤석민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가 박살이 난다.[52] 한기주의 10억 보크 사건이 바로 이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나왔다.[53] 여담으로, 홈 복귀전이 522 대첩으로 기억되고 있다. 9:10으로 KIA 승리.[54] 일단, KBO 내에서 팀 성적의 따라 이 팀들의 지분표로 인해 관중들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55] 당시 홍세완은 부상병동을 들락거렸고 김종국은 서서히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손지환이나 이현곤[191] 등이 키스톤 알바를 뛰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유격수 용병이었던 윌슨 발데스를 영입하기도 했으나 역시 리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출되었다.[56] 지금은... 선수의 이름 자체 흑역사가 되어버렸다.[57] 3년 내내 조범현의 남자로 불리며 많은 이닝을 굴렸는데 3년 연속 55경기 이상 출장 70이닝을 던지는 등 과부하가 일어났다.[58] 나중에 기아팬들이 조 감독과 선 감독의 행보를 보며 조 감독을 재평가를 했다는 썰이 있다. 한편, 조범현 감독은 신규 창단된 10구단 KT로 갔지만 팀의 최하위는 막지 못했다.[59] 애초에 기대도 안했는데 후반기 5위 싸움에 끼어들 정도로 팀을 이끈 것은 대단한 것이다.[60] 정우람박석민은 워낙 거액이어서 이 부분은 팬들이 이해를 많이 하고있다. 그런데 이번 FA시장에서 구단이 가만히 있었던건 아니다. 손승락을 잡아주라는 김기태 감독의 요청으로 손승락에게 60억 배팅을 하였지만 그 이상을 원하는 손승락이 거절하여 구단에서 그 이상은 무리라 판단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건 다른 FA선수들인 윤길현유한준조차 안 잡았다. 물론 윤길현은 기아와 안좋은 사건이 있었으니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으나 유한준은 아쉬운 감이 있었다.[61] 다만 2016년 밝혀지길 FA 투자 대신 선수 육성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중이라고 한다. 현장에서 부담스러워 할정도로 투자되고 있다고.[62] 심지어 09년엔 무려 우승을 했다.[63] 선동열의 프로 통산 방어율은 1.20 이며 0점대 방어율도 수 차례 했으니 부진이라고 하면 부진이라고 볼 수 있다(...)[64] 농담이 아니고 저 해태의 4연속 우승은 삼성 라이온즈가 큰 지분을 담당했다. 86년87년에 모두 해태에게 셧아웃 당했던 것. 뿐만 아니라 빙그레 이글스도 마찬가지로 1988, 1989년에 해태에게 연속으로 패했다. 4연속 우승 이후에도 삼성은 93년에 다시 한번 패하여 준우승, 빙그레도 91년에 패하여 준우승, 알고 보면 해태 왕조 건설은 이 두 팀의 희생이 컸다고 볼 수 있다.[65] NPB에서도 이런 사례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정도밖에 없다. 참고로 저 두 구단 전부 후쿠오카와 연관되어 있고(호크스는 현재 연고지, 라이온즈는 과거 연고지) 매각과 동시에 연고이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66] 7차전까지 가더라도 꼭 마지막에 이겼다. 2009년 한국시리즈 참조.[67] 1983년 한국시리즈, 1997년 한국시리즈. MBC 청룡 시절 포함[68] 1986~1987년 한국시리즈, 1993년 한국시리즈.[69] 1988~1989년 한국시리즈, 1991년 한국시리즈. 빙그레 시절에 3차례나 대결했다. 한화로 팀명이 바뀐 이후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70] 1996년 한국시리즈[71] 2009년 한국시리즈[72] 2017년 한국시리즈[73] 1992년 플레이오프에서 1패.[74] 2018년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1패.[75] 여담으로 이 부분에서 '사장=구단주'라고 표기돼 있었는데 배구단의 구단주는 정태영 부회장이다.[76] 1차지명이 부활하면서 지역연고 고교 5개를 선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시기 타이거즈의 뿌리와도 같은 군산상고가 빠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KIA에서 선정한 고등학교는 광주일고, 광주동성고, 광주진흥고, 순천효천고, 화순고. 프런트 측에서는 어떻게든 군산상고의 지명권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군산상고는 NC 다이노스가 가져갔다.(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1차지명 권한 행사와 제2구장 홈 경기는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KIA는 신생 야구단이 있는 전북 정읍의 인상고를 가져갔다.[77] 중도사퇴 후 조창수 코치 감독대행.[78] 무려 18년 동안이나 했다. 그중 9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 2000년 시즌 도중 사퇴로 잔여 경기는 김성한 수석코치 감독대행.[79] 중도사퇴 후 유남호 기아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80] 중도사퇴 후 서정환 기아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81] 김응용 이후로는 처음으로 비 해태출신 감독. 2007년 시즌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KIA 감독으로의 데뷔전은 2007년 시즌에 치렀다. 근데 본의아니게 타이거즈를 우승시킨 감독 3명 모두 비해태출신이고 해태출신 감독들은 모두 이렇다할 성적을 못냈다. 그나마 김성한이 2위 두번으로 선방했다. 자세한 내용은 KBO 슈퍼 한국시리즈 문서 참조.[82] 자진사퇴 후 박흥식 KIA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83] 도전 팀에게 지며 업셋당했다.[84] 특유의 리더십으로 국가대표에서도 주장을 여러 번 맡았다.[85] 현역으로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연도만 기록.[86] 유일하게 해태에서 치뤄준 은퇴식이자, 현재까지 타이거즈 역사상 유일하게 은퇴경기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대타로 출장하여 1타수 무안타.[87] 여담으로 '김성한 은퇴식 기념구'를 관중들에게 나눠주며 KBO 리그 최초로 은퇴식 기념구를 출시하게 된 선수가 김성한이다. 또한 당시 라이벌이었던 이만수가 김성한의 은퇴를 축하해주기 위해 자신의 경기를 뒤로 하고 직접 무등구장까지 찾아와서 축하해줬다.[88] 원래 4월 11일에 진행하려 했으나, 우천으로 하루 미뤄졌다.[89] KIA 인수 이후 처음 열린 은퇴식이다. 경기는 접전 끝에 4 : 4 무승부로 끝났다.[90] 서재응의 7이닝 1실점 호투와 신종길의 4안타에 힘입어 5 : 6으로 승리하며 은퇴식을 빛냈다.[91] 구단 최초 은퇴식과 영구결번식이 동시에 진행. 선동열의 경우에는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하자마자 영구결번이 됐다.[92] 은퇴식 날인 LG전에서, 기아 선수들이 전부 이종범 배번인 7번을 입고 뛰었다. 결과는 5 : 6으로 극적인 승리를 따내며 은퇴식을 빛냈다.[93] 구단 최초 합동 은퇴식.[94] 은퇴식에서 기아 K5 앞좌석 창문을 열어놓고, 유동훈이 그 사이로 공을 던지고, 공이 그 사이로 빠져나와 김상훈이 포구를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보기 그 날 경기 결과는 4 : 7로 승리하며 은퇴식을 빛냈다.[95] 구단 두번째 합동 은퇴식.[96]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입었던 홈 유니폼을 재현한 2009 챔피언스 저지를 입고 투수들은 서재응의 등번호 26번, 타자들은 최희섭의 등번호 23번을 달고 뛰었다. 경기는 7 : 8로 극적인 승리를 따내며 은퇴식을 빛냈다.[97] 더욱이 김응용 감독의 특성 상 선수의 가치가 떨어졌다 싶으면 바로 트레이드를 해서 타 팀으로 보내버리고, 구단에 돈이 없어서 트레이드로 보낸 경우도 많아서 타이거즈에서 은퇴를 한 레전드를 보기 힘든게 이유이다.[98] 전기리그 4위, 후기리그 4위[99]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4위[100]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3위[101]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3위[102]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103]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2위[104]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1위[105] 한화 이글스와 공동 3위.[106] 3위인 롯데 자이언츠와 3경기 이상 게임차가 벌어져 당시 규정에 의해 준플레이오프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4위를 기록하고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107] 드림리그 4위/4팀[108] 드림리그 4위/4팀[A] 정규시즌 5위로 WC 1패 적립[A] [111] 당장 잠실, 고척과 문학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으며 수원 kt 위즈 파크 역시 장성호 은퇴식 때만 봐도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한 kt 위즈 팬에 따르면 두산 베어스와 더불어 가장 원정팬이 많다고 한다. 두산은 서울 연고 구단이지만 KIA는 연고지가 광주이다. 두산 베어스 응원 영상(주말) 기아 타이거즈 응원 영상(평일)[112] 서울 내 호남 출생자만 해도 21% 정도로 적은 수가 아니며(자식, 손자는 포함하지 않은 값이다.), 그 외 수도권이나 부산 등지로 떠난 호남 출신도 많다.[113] 요즘처럼 상대팀을 응원하는 친구나 가족들이 나란히 앉아 사이좋게 관람하는 문화가 자리잡기 전인 80년대 사직 같은 곳에서도 해태 팬들은 열렬한 응원을 했을 정도.[114] 수도권 중에서도 특히 잠실의 KIA 경기를 보면 홈팀과 원정팀이 뒤바뀐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때문에 일부 KIA 팬들이나 금지어 응원단장잠실 기아 챔피언스 필드라고 부르는 경우까지 있었으나 기아팬들끼리만 모인 상황이 아니라면 이런 표현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잠실을 홈으로 쓰는 두산, LG 팬들은 이 표현을 매우 불쾌해하며, 애초에 충분히 무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표현이다.[115] 다만, 2017년 한국시리즈의 경우 잠실구장이 두산 홈이다 보니 2009년 한국시리즈 잠실경기에서 3분의 2 이상이 기아 팬이였던 때 보다는 상대팀 팬들 수도 꽤 많았다.[116]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시즌 개막전에 시구자로 나섰을 정도이다.[117] 전 경기가 광양과 순천에서만 치러지니 서부권인 목포나 나주 등지만 가도 존재감을 느끼기 힘들다. 최근엔 여순광 지역에서도 인기가 좋지않고 2부리그로 강등될 정도로 성적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118] 전주고까지 포함하여, 연고지 변경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지만 지역 유망주와 새로운 스타 육성, 이와 병행되는 야구 생태계 선순환에는 당연히 좋을 리가 없다. 지역의 심각한 문제인 유망주의 수도권 유출에 사실상 기름을 붓는 구조. 지역 축구팀이 국내 축구 유망주들이 전주로 축구유학 오도록 유스 시스템을 설계하고 육성사업을 병행하는 모습을 보면 더 명확하다.[119] 리그 핫 경기에서 3만을 돌파하거나 2만 5천대를 찍기도 하며 챔스 결승 정도되면 국가대표 경기 수준인 4만의 만석 수준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토너먼트 국제대회인 챔피언스 리그 관중이 리그 관중보다 많으며 징계로 챔스대회가 없던 2017년 관중동원은 리그 우승에도 예년보다 부진했을 정도.[120] 전주의 인구는 완주군까지 더해야 70만을 넘기는 실정이고 챔피언스필드는 시내 중심가에 있지만 전주월드컵경기장은 시의 가장 외곽인 고속도로 진출입로 인근에 위치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 비슷한 사례를 꼽아보자면 일본사이타마현이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라는 야구팀이 존재하고 있으나 인기는 축구가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다. 우라와 레즈는 일본 최고의 인기 축구구단이다.[121] 타 구단은 SPOTV에 외주를 맡긴다거나, 혹은 적당한 보수를 주는데 기아는 연봉 2,400에 포토샵+일러스트 자격증 소유자를 찾고 있다. 게다가 1명만 모집했고, 유튜브 편집자가 구단 홈페이지도 관리해야 한다.[122] 롯데는 팬서비스가 나쁜 대표적인 선수였던 이대호가 MLB 리턴 이후 팬 서비스가 어느 정도 괜찮아졌고, 삼성은 성적이 떨어진 2016~2018년에 거쳐 팬 서비스 교육이 강화되어 전체적으로 팬서비스가 나아졌다.[123] 2019년 5월 10일에는 '김선빈 팬서비스'로 실검에 오르기도 했다.[124] 이승엽도 NPB를 거쳐 다시 삼성으로 복귀한 뒤 복귀 시즌부터 영구결번 지정이 확실해진 상태에서 은퇴 시즌까지 커리어를 마무리 했다.[125] MLB, NPB 최다 우승팀인 뉴욕 양키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모두 소속 리그에서 가장 많은 영구결번을 가진 팀이기도 하다. 거기에 순혈에 골몰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조차 영구결번에는 순혈을 따지지 않는다.[126] 2001년에 대체 용병으로 해태에 입단했으나 정작 해태에선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다음 시즌 두산으로 이적해서 확 터졌다.[127] 앤서니 르루는 팀 사정상 마무리로 전환했다가 무너졌고(결국 시즌 도중에 퇴출되었다), 헨리 소사는 2012년에 비해 자주 난타를 당하였다.[128] 선발 투수용병이 등판하는 날이면 브렛필은 강제휴식이었다. 경기에 외국인선수는 2명만 출전할 수 있었다.[129] 1985년 삼성라이온즈의 김일융&김시진 이후 처음[130] 2000년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1년에도 재계약을 맺었는데, 발바닥 부상을 당해 퇴출되었다. 그런데 웃기는 건, 계약 내용 중 부상을 당해 퇴출되어도 잔금을 받지 못한다는 노예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131] 소위 믿음의 야구. 나믿가믿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132] 그러나 강하승은 타어강이라는 역대급 DTD이후 방출되었다.[133] 막상 12시즌이 끝나자마자 박철우 2군 총괄코치는 타격코치로 밀려나고 한화에서 잘린 한대화를 새 2군 총괄로 데려왔다.[134] 당장 기아시절에 혹사에 허덕이며 재활군에 있던 신용운이 삼성에서 다시 정상적으로 선수생활 하는것을 보면 어느정도인지 실감간다. 오죽하면 팬들도 안타깝지만 그래도 기아 나가서 천만다행이란 말을 할정도니.[135] 육성능력 보다는 애초에 조범현 말기~선동열 시절의 뻘픽으로 원석들이 극히 적은게 문제다.[136] 야만갑이라고 놀림을 받지만, 나이를 감안하면 엄연히 얘가 기아 외야수 유망주 랭킹 1위다.[137] 다만, 삼성은 원년에는 파랑색 유니폼이 아닌 빨강색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자세한 건 삼성 라이온즈/유니폼 참조.[138] 게다가 KIA는 2011 시즌엔 4위에 그쳤고, 2012년부터는 선동열 감독의 암흑기가 시작되어서 더 비참함을 느꼈다.[139] 보통 선동열의 투구와 이종범의 화려한 플레이로 해태팬이 된 경우가 많다.[140] 실제로 타이거즈의 포스트시즌 역사상 가장 승률이 높은 구장이 잠실이다.[141] 선동열은 광주 출신-고려대 졸업, 최동원은 부산 출신-연세대 졸업. 실제로는 선동열이 최동원의 후배이다. 으르렁 거리는 것도 없이 친한 형동생 관계로 지냈다고.[142] 당시에 라이벌 관계가 상당해서, 전라도에서는 해태제과와 관련된 식료품만 먹고, 롯데껌(이외 기타 식품)을 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반대로 롯데의 경우도 마찬가지.[143] 이 해 같이 데뷔한 선수가 바로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이다.[144] 해태 타이거즈 문서 참조. 대표적으로 손혁이 트레이드 이후 입단을 거부하다가 임의탈퇴로 은퇴했다.[145] 무한도전 타인의 삶 때 넥센 히어로즈의 이숭용과 역할을 바꾼 정준하도 녹화 당일 넥센의 경기 상대였던 기아 측 식당을 방문했는데, 선후배가 뒤섞여 이야기를 나누며, 심지어는 팀 내 최고참(의 대역 정준하)에게 농담도 치며 식사하던 넥센 식당 분위기와는 달리 기아는 대선배인 이종범이 혼자 독상을 하고 다른 선수들도 별 대화 없이 묵묵히 식사하고 있었다고 한다.[146] 사실 기아에 대한 충성심 보다는 그 당시 기아의 얇은 뎁스가 본인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기아행을 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도 그리 애정이 없는것도 아니지만.[147] 대구 출신임에도 "난 전라도 사람이여"라고 말할 정도로 팀에 애정이 많았다고 한다. 기아팬들도 감독으로서는 무척 싫어하지만 선수로서는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다.[148] 2019년 현재 노란색 정당은 정의당이며 지역 기반이라기 보다 계층/이념 기반 정당이다. 반면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인 민주평화당의 색깔은 연두색, 광주광역시를 포함한 호남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지지를 보이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파란색이다. 정치상황 변동에 따라 이제 노란색(정확히 말하자면 빨강과 노랑 조합)은 기아 타이거즈 고유의 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149] 2018년 손영민이 다시 이 등번호를 되찾음으로써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150] 2014년 이후로부터 경기가 없지만 아직 홈 구장 지위를 잃지는 않았다.[151] 군산상고와 전주고는 NC 다이노스의 1차지명 대상 학교로 편입되었다.(어디까지나 1차지명권을 행사할 권리를 얻은 것이지 제2구장 홈 경기와는 상관이 없다. 전주시,군산시 지역은 제외이고 정읍시,고창군은 지역 연고 학교이다.)[152] 김기태도 광주광역시 출신이라 사실 상 비연고지 감독은 조범현이 유일하다.[153] 아이러니하게도 위 비해태 출신 두 감독이 KIA 타이거즈의 유이한 우승 감독이다.[154] 전라북도의 경우 경기도 열리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그룹 계열사가 스폰하는 지역 축구팀이 리그를 탈탈 털며 왕조를 구축하다 못해 아시아의 정복자로 등극하고 있는 형편이라, 국내축구와 K리그의 전반적인 사정과 달리 지역내 위상과 축구 열기가 이례적으로 뜨겁다. 그래서 이 지역 지자체장들은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자주 볼 수 있고 지역 지자체의 날이나 홍보행사 역시 전주성에 집중되어 챔피언스 필드에서 볼 수 있는 전북권 정치인들은 정세균 국회의장처럼 전국구 헌법기관장 등으로 축소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단 이러한 현상이 전북 지역에서 타이거즈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다.[155] 현장의 요청 때문에 만든 게 아니라 그룹 고위층의 지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156] 경기를 할 때 안경을 쓰지만 도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2017시즌 전 팀 우승이 확정된다면 다음 시즌부터 안경을 벗고 던진다고 했으나 2018년 시범경기 첫 등판에서 안경 없이 나와 좋지 못한 기록을 남기면서 안경을 다시 쓰고 던지기로 했다.[157] 한미일 종전 기록은 뉴욕 자이언츠가 1929년 6월 20~23일까지 기록한 6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이다. 기간 동안 더블헤더 4경기가 포함돼 나흘 만에 이러한 기록이 탄생하게 되었다.[158] 타팀 팬들이 한미일 사상최초 혹은 메이저리그를 넘어섰다는 등의 수식어 때문에 리그 간의 수준차를 논하면서 이 기록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대로면 2003년 이승엽이 기록한 아시아 홈런 신기록도 종전 기록이 NPB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것 역시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종전 기록은 1929년에 뉴욕 자이언츠가 기록한 6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이다. 이 기록이 탄생한 해가 최근이라면 수준차를 논할 수 있었겠지만 1929년 탄생한 기록이기 때문에 수준차를 애초에 논하기 힘들다.[159] 잠실이나 인천(숭의야구장 시절) 원정때도 종종 따라 오셨다.[160] 부산 출신임에도 본인의 히트곡 남행열차가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국민 응원가로 등극하자 자신도 그 덕에 타이거즈 팬이 되었다고 한다. 그 덕으로 시구 행사에 초청되기도 했다.[161]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최원준의 유니폼을 입고 인증샷. 글 문구에는 가자 V12를 적은 것으로 보아 KIA팬 확정.[162] 과거 해태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이었다고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 인증한 적이 있다. 김유식 문서 참고.[163]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KIA 타이거즈 골수팬으로 유명하다. 2018년 7월 21일 광주 kt vs KIA 경기에서 절친이자 같은 기아팬으로 알려진 이현과 함께 시구도 했다.[164]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의 인물. 개인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서, KIA 타이거즈의 모자를 쓰고 먹방을 진행하기도 한다. 유튜브 블랙리스트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다.[165] 사회인 야구도 할 만큼 야구를 좋아한다고 전해진다.[166] 쌍둥이가 2명 다 KIA의 팬이다. 목동 야구장에서 KIA 시절 진해수의 유니폼을 들고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167] 전라남도 담양군 출신이다. 문희는 가수를 하기전 직관도 다니던 KIA 팬이었다고....[168] 그 유명한 랜디신혜 시구를 2006년 프로야구 준PO 2차전 한화 이글스KIA 타이거즈 광주 홈경기 시구에서 보여줬다.[169] 타이거즈의 연고지나 변희재의 고향이나 현재 성향으로 볼 때는 믿기지는 않지만... 다만 과거 80~90년대 해태는 잘 이기고 우승 많이해서 생긴 팬덤까지 더해져 전국구 인기를 자랑하긴 했다. KIA 타이거즈로 바뀐 뒤에도 타이거즈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170] 수업 내용에 따르면 KIA 타이거즈가 잠실로 원정을 올 때 보러 간다고 한다.[171] 프로야구 1억번째 관중의 주인공. 당시에는 야구에 대해 잘 몰랐지만 후일 야구에 눈을 떠 기아팬이 되었다고 한다.[172] 페미니즘 관련 기사로 유명하지만, 과거 야구 칼럼을 썼던 적도 있다. 본인의 트위터에서도 KIA 얘기를 자주 꺼낸다.[173] 과거 선동열의 팬이었으며 '타이거즈 키즈'라고 스스로 밝혔다. 그리고 2017년 8월 16일 NC 다이노스와의 홈 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기사 참조[174] 강심장에 당시 KIA 타이거즈 소속이었던 이용규가 출연했었을 때 KIA에 꼭 남아달라고 부탁하면서 KIA팬임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175] 2019년 4월 23일 잠실 KIA vs LG 경기에서 개그맨 김태원과 함께 직관 온 것이 중계화면에 잡혔다. 이때 이종범의 해태 타이거즈 시절 반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176] 전라북도 순창 출신이다. 2016 KBO 와일드카드 결정전 2차전에 잠실야구장에 출연했다. 다음 해 7월 2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는 시구까지 했다. 이때 정용운의 특유의 루틴을 따라하며 타이거즈 골수팬임을 인증하였다.[177]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팬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KIA 팬이 됐다고 한다. 얼마나 타이거즈 덕후냐면 최군과의 아프리카 방송에서 응원가는 기본이요 치어리더와 서한국 응원단장 이름까지 알 정도이며 김동재 코치 돕기 일일호프에서도 선수들과 인증샷 까지 남길 정도로 타이거즈의 덕후를 인증했다.[178]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시구한 적이 있다.[179] 최단신과 화순초-화순중 1년 선후배 사이라고 한다. 게다가 어렸을 때 둘이 같이 배드민턴을 치고 놀았다고 한다.[180] 광주광역시 로컬 보이이기도 하며, 나지완과 친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농구장과 야구장을 번갈아 직관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181] 채령도 17한국시리즈 직관 인증사진이 올라왔다.[182]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이다. 2017년 8월 19일 SK 와이번스와의 홈 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기사 내용 참조. 홈에서 시구하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183] 2017년 한국시리즈 2차전 시구자로 나왔고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조계현 단장의 열혈한 팬이라고 한다.[184] 충청도에서 태어났지만 전남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KIA 팬이 됐다. 안치홍과는 절친한 사이다.[185] 본인의 인스타그램에서 대놓고 인증하고 있다. 심지어 기념 굿즈가 새로 나올 때마다 그 때 그 때 다 수집을 할 정도. 흠좀무.[186] 배우자 이보영과 같은 KIA 타이거즈 팬이다. 그런데 2017년 두산 베어스의 시구자로 초청되어 시구를 한 적이 있다.[187]kt 위즈 선수이자 현 상무 피닉스 야구단 코치 박용근의 아내. 인스타그램에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최종전을 시청하는 모습을 올리고 기아가 우승한 것에 감격을 표했다.[188] KIA 타이거즈의 팬으로 유명하다. KBS N Sports에서 방영했던 "불야성"이란 프로그램에서 KIA 타이거즈 팬 대표로 출연했었다.[189] 양의지가 두산에 시구하러 왔을 때 물어봤다고 한다. 근데 양의지의 증언 영상에는 자막으로 광주 출신이라고만 나오고 KIA 타이거즈 팬이라는 말에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오해받기 좋게 나왔는데 혜리 항목에 나온대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해당 영상 2분부터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