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07:36:54

AC 페루자 칼초

페루자 칼초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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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B / 2024-25 시즌 참가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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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 페루자 칼초
AC Perugia Calcio
<colbgcolor=#ed1c24><colcolor=#fff> 정식 명칭 Associazione Calcistica Perugia Calcio S.r.l.
별칭 Grifoni (그리핀들)
창단 1905년 6월 9일 ([age(1905-06-09)]주년)[1]
소속 리그 세리에 C 그룹 B (Serie C)
연고지 움브리아페루자 (Perugia)
홈구장 스타디오 레나토 쿠리 (Stadio Renato Curi)
(28,000명 수용)
구단주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마시밀리아노 산토파드레 (Massimiliano Santopadre)
단장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마우로 멜루소 (Mauro Meluso)
감독 공석
역대 한국인 선수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안정환 (2000~2002)
공식 웹사이트 파일:AC 페루자 칼초 로고.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우승 기록
세리에 B
(1회)
1974-75
세리에 C
(3회)
1945-46, 1966-67, 2020-21
UEFA 인터토토컵
(1회)
2003
1. 개요2. 역사
2.1. 요약
3. 주요 선수4. 우승
4.1. 국내 대회4.2. 국제 대회
5. 스폰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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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페루자를 연고로 하는 프로 축구 구단.

AC 페루자라는 이름이었지만 해체되었다가 2005년에 페루자 칼초라는 이름으로 재창단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자금난으로 3부리그인 세리에 C로 강등당했었고, 여기서도 강등당해 4부리그인 세리에 D로 내려가는 등 나락을 경험했던 구단이다. 2011년 이후로는 반등에 성공해 차근차근 올라와 다시 2부리그인 세리에 B까지 올라온 구단이다.

일본 축구팬들에겐 나카타 히데토시의 활약 덕에 '국민구단' 대우를 받았지만, 대한민국 축구팬들에겐 안정환이 뛰었고, 안정환을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방출한 구단주의 기행으로 악명 높은 구단이다.[2]

2. 역사

이 구단은 강성 구단주가 많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축구에서도 둘도 없을 괴팍한 회장 루치아노 가우치가 1991년부터 집권한 이래 부흥과 몰락을 동시에 겪은 격동의 팀이다.[3]

1905년 창단 이래 수십년간을 하부 리그에서 머물다가 안토니오 체시리니, 피에를루이지 프로시오 등의 활약으로 1975년에야 세리에 A로 승격했다. 1978-79 시즌에는 세리에A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패 준우승을 달성하며 UEFA컵에 진출하는 대성과를 누렸지만, 무패 준우승의 주역들이 승부조작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며 승점 5점을 감점당하는 바람에 1980-81 시즌에 15위로 세리에 B로 강등당한 이후 줄곧 하부 리그를 떠돌다가 1996년에 세리에 A로 다시 승격하면서 1997-98 시즌을 빼고 거의 1부 리그에 잘 안착해 파비오 그로소, 마르코 마테라치, 파브리치오 프란델리, 나카타 히데토시 같은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기도 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특히 나카타의 활약으로 연고지 페루자에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찾아와 때 아닌 '일본 특수'를 누렸다. 2000년에 나카타가 AS 로마로 간 것도 선수 본인의 실력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가우치 회장이 로마의 주식 일부를 소유한 터라 가능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유스 출신인 젠나로 가투소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임대 돌리다가 이적시켰고, 마테라치도 역시 영입했다가 제대로 못 쓰고 보냈던 것을 다시 재영입한 것이다. 나카타는 일본에서라면 몰라도 이탈리아에서는 완전히 무명이었다가 로또가 터진 것이고, 그로소는 2006년 독일 월드컵 이전에는 듣보소리 들었다. 그외에는 크로아티아 국대였던 밀란 라파이치 정도? 아래 언급되는 안정환의 위치는 이런 팀 상황 때문에 성립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눈길을 받은건 스타 선수들이 아닌 바로 가우치 회장의 기행이다. 그는 여성 선수를 기용하겠다고 땡깡을 부리는가 하면[4]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5]의 셋째 아들인 무아마르 알 사디를 영입하기도 했다. 물론 오래가지 않아 방출되었다. 평가는 3부리그 수준이라는 평까지 받았다. 오죽하면 카다피 돈이 많이 들어온 유벤투스조차도 테스트하곤 영입을 포기했을까? 거기에 약물 도핑까지 걸려 출전 정지당했다. 아무도 막지 못한 선수로 유명했는데,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막강해서? 아니다. 아예 막아 볼 기회조차 없었다. 워낙 기행이 심한 구단주였지만, 벌어먹고 살아야 되는 프로팀 특성 상[6] 어쩔 수 없다는 반응도 많았다. 이 때문에 후일 횡령 사실이 드러나기 이전까지는 페루자 서포터에게 많은 지지를 받기도 했다. 횡령 사실이 드러나고부터는 금지어가 되었지만. 풋볼 매니저 시리즈에서도 횡령 이후 하위 리그로 떨어진 페루자 팀을 찾아서 관계를 살펴보면 적대도 100에 영구 옵션이 끼어있다.

2000년에는 중국 선수 마밍위를 영입했는데 당시 나이 30살에 선수 경력도 중국 리그에서만 10년동안 활약한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게 없어서 세리에 서포터들도 대체 왜 들여오냐고 어이없어 할 정도였다. 결국 페루자에서 9경기 나와서 그야말로 듣보잡 활약하여 벤치 멤버로 전락하더니만 2001년 방출당했고 중국 팀으로 돌아가 뛰다가 2003년 은퇴했다. 2000년 초반, 페루자 홈페이지에서 중국인들은 안정환이나 나카타보다 더 활약하리라고 마밍위에 대해 기대했으나 나온 경기에서 그야말로 듣보잡이 되어서 홈페이지에서 현지 서포터들에게 나카타는 커녕, 안정환보다 훨씬 못한 중국 선수에 뭘 기대했냐는 글이 도배되었다.

같은 해에 안정환도 부산 아이콘스로부터 임대 영입됐으나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제2의 나카타 효과'를 재현하지 못했고, 그의 경기를 보러 오는 한국 축구팬도 한 명도 없었으며 출전을 제대로 못했다. 축구해설가 서형욱도 2005년에 낸 저서 <유럽축구기행>의 경험담에서 밝히길, 그는 2001년 2월 라치오전을 관전할 당시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현지 토박이 노신사로부터 '나카타 넘버 원'이란 소리를 들으며 일본인으로 오해를 받았고, 경기가 끝난 후 돌아가는 길에서 어린이들에게 '원숭이'라 멸시받으며 돌을 맞을 뻔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이자 한국 축구팬들에게도 유명한 사건은 2002 한일 월드컵 16강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는 이유로 안정환을 방출한 일.[7] 게다가 그걸로도 부족해서 그래 "이탈리아 일용직 노동자도 안되는 월급을 받고 한국 듣보잡리그에서 뛰던 놈이 감히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을 넣어?"라고 말했다가 아시아 축구 연맹로부터 아시아 축구를 얕잡아본다고 앞으로 페루자에 아시아 선수 진출을 금지하겠다는 말까지 들었고, 이탈리아 유력 언론들은 안정환이 한국에선 받던 돈은 유럽 중상위권 리그 주전 이상급이 받던 돈[8]이라며 언제부터 이탈리아 일용직 노동자들이 이리도 많이 받았냐면서 구단주를 비꼬았을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한달도 안 돼 아들인 알레산드로 가우치 당시 부구단주가 사커리지와의 인터뷰에서 안정환은 골든 골 때문에 방출된 것이 아니라며 사태의 발단은 이탈리아 언론의 과장보도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해명했고, 당시 팀 감독이던 세르세 코스미도 가우치 구단주의 전날 발언과는 달리 방출 결정을 되돌릴 수 있다고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안정환을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선수로 보고 있다. 구단이 안정환과 다음 시즌까지 계약을 연장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면서 방출도 구단주 마음대로 한 것이라고 털어놓았을 지경이었다.

이 사건으로 가우치 구단주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으며, 외국에서도 이 사건을 안정환 게이트라고 부르면서 페루자 하면 안정환 방출 사건이 꼭 따라오게 된다. 해외 일간지에서도 한국 축구 영웅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고 쫓겨났다는 문구가 1면에 실렸다. 안정환의 골든골도 해외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월드컵 20대 충격골(20 Goals That Shook the World)에 나온다.

이런 기행이 반복되면서 구단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면서 얼마 안 가 망해버렸다. 02-03 시즌 9위였던 팀[9]이, 03-04 시즌에는 15위로 강등[10] 당한 것. 2005년에 재창단되면서도 돈이 없어 하위 리그부터 시작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그리고 가우치 구단주는 횡령 및 여러 죄가 드러나 구단주에서 쫓겨나고 이탈리아 경찰은 그의 아들 알레산드로, 리카르도와 함께 파산 사기 혐의와 관련하여 그를 조사하였다. 가우치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주했다. 협상을 통하여 파산사기와 세금포탈에 대해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가우치는 4년간의 도피생활 끝에 2009년 3월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두 아들은 이 파산 및 횡령죄 말고도 다른 범죄가 드러나 구속되어 이미 복역 중이었고 가우치도 결국 이탈리아로 돌아와 3년동안 복역하고 2012년에 출소했는데 그 이후로 은둔생활을 하다 2020년 2월 2일에 사망했다. 물론 이 인간의 행보가 워낙 막장이다보니 사망 소식이 알려졌을때도 댓글창엔 명복은커녕 조롱하는 고인드립만 있었다.

아무튼 구단주가 이렇다보니, 2009-10 시즌 클럽이 재정파탄으로 4부리그인 세리에 D까지 강등당하였다. 2009년 이 팀과 깊은 인연이 있던 나카타가 이 팀을 산다는 기사가 국내 스포츠뉴스로도 보도된 바 있지만, 흐지부지 되었다.

결국 2010년 여름 새로운 구단주가 선임되고, 재정 문제가 해결되며 재창단하였다. 2010-11 시즌 세리에 D에서 우승하며 레가 프로 세콘다 디비시오네로 승격하였다. 2011년 여름 클럽 이름을 AC 페루자 칼초로 개칭하였다. 2011-12 시즌 레가 프로 세콘다 디비시오네에서 우승하며 레가 프로 프리마 디비시오네로 승격하였다.

2012-13 시즌 2위를 차지하였으나 승격 플레이오프 4강에서 피사에게 총합 스코어 3:4로 패배하면서 승격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 3부리그 우승으로 2부리그로 승격했다.

14-15 시즌 초반부에 2부리그 1위까지 올라와서 1부리그 승격 희망까지 있다. 비록 7차전까지 성적이며 7위랑 승점 3점차라서 언제라도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지만. 결국 나중에 갈수록 밀리더니 최종 6위를 기록, 승격 플레이오프로 나갔으나 페스카라에게 2-1로 밀려 탈락했다.

15-16 시즌은 리그 10위로 마무리하여 16-17 시즌도 여전히 세리에 B에서 뛰고 있다. 10라운드까지 3위를 기록 중이지만 10위랑 승점 차가 3점이라 언제라도 추락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꾸준히 상위를 유지하며 리그 4위로 승격 플레이오프에 참가했다. 그러나, 베네벤토 칼초에게 덜미를 잡혀 탈락했다. 17-18 시즌은 전번 시즌과 달리 18라운드까지 10~14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중.

18-19 시즌은 14승 8무 14패 승점 50점으로 9위를 기록하여 8위까지 진출하는 승강 PO 진출에 실패하는듯 보였지만 US 팔레르모가 회계 규정을 위반하여 순위가 한 계단씩 올라가면서 극적으로 승강 PO에 진출하였다. 승강 PO 상대는 5위 엘라스 베로나 FC다. 그러면서 한광성 대 이승우의 남북대결이 성사되었다. 결과는 엘라스가 연장전 끝에 4:1로 이기고 승강플레이오프 준결승 진출..그리고, 승강플레이오프 1위로 세리에 A로 승격한 반면에 페루자는 그대로 세리에 B에 남게 되었다.

19-20 시즌은 리그 16위를 기록했으나 강등 플레이오프에서 페스카라 칼초한테 합계스코어 3:3으로 비겼으나 승부차기 접전 끝에 패하며 세리에 C로 강등되었다.

2020-21 시즌 세리에 C - 그룹 B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1년만에 다시 세리에 B로 승격하였다.

21-22 시즌 리그 8등으로 백투백 승격권에 놓였지만 브레시아에게 패배하며 2부에 잔류한다.

2.1. 요약

  • 1부/세리에 A: 1975-1981, 1996-1997, 1998-2004 (13시즌)

3. 주요 선수

4. 우승

4.1. 국내 대회

  • 레가 프로 프리마 디비시오네 B 1회
    • 2013-14
  • 레가 프로 세콘다 디비시오네 B 1회
    • 2011-12
  • 세리에 D 1회
    • 2010-2011

4.2. 국제 대회

  • UEFA 인터토토컵
    • 2003

5. 스폰서 목록



[1] #[2] 안정환 본인도 이 사건 때문에 이탈리아에 못 가겠다고 했을 정도다.[3] 사실 이 가우치 양반은 한 경주마의 현역 시절의 마주였으며 그 말을 일본의 샤다이 그룹에 종마로 매각하고 얻은 자금원으로 구단주가 된 거다. 참고로 그 한 경주마는 1988년 개선문상 우승마인 토니 빈.[4] 그 선수는 독일의 전설적인 여자축구 선수 비르기트 프린츠이다. 그러나 어쨌든 여자 선수의 신체적 한계가 남성 프로 선수를 넘을 수 없는 건 자명할 뿐더러, 여자 선수들도 남자 팀에서 뛰라는 제의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는 게 현실이다.(이런 제안에는 여성부를 독립된 리그로 보는 게 아니라 남자부 리그의 하위 리그로 보는 시선이 담겨있다고 여기기 때문.) 당장 여자 축구를 검색하면 나오듯이 세계 랭킹 5위이던 호주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이 호주 중고교 팀에게 7-0로 참패한다든지 한국 여자 국대팀도 같은 나이 성인 실업팀도 아닌 고교팀이랑 연습경기를 해도 압도하지를 못한다. 당연히 프린츠는 이 제안을 거절했고 이 일은 지금도 유럽축구 사상 역대급 기행 중 하나로 남아있다.[5] 그가 이탈리아 축구팬인지라 이탈리아 축구계에선 유명하다. 그는 유벤투스 FC 팬으로 알아주기에 유벤투스가 리비아로 가서 친선경기도 벌이는가하면, 아예 유벤투스를 살려다가 실패한 적도 있다. 여하튼 유벤투스에 돈을 많이 줘서인지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2002년 세리에 A 슈퍼컵을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열기까지 했다.[6] 거기다 세리에 A는 적자도 심한 리그다. 거기서도 페루자는 중하위권 수준.[7] 본래는 타 팀으로 이적료 받고 보낼려고 했다. 그러나 구단주의 언론플레이와 현지 훌리건들의 난동이 겹치며 안정환은 팀 복귀를 거부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페루자의 이적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소송이 걸렸다. 그리고 거기서 패소하여 안정환은 400만 유로의 빚을 지게 되었다.[8] 축구팬들에겐 당연한 상식에 속하는 얘기지만 K리그의 급여 수준은 전혀 낮은 게 아니다. 브라질, 동유럽 출신 수준급 용병들이 굳이 K리그행을 택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루마니아 리그 팀 ASC 오첼룰 갈라치에서 뛰다가 팀의 열악한 재정 악화로 결국 돌아온 안산 그리너스 FC 감독 김길식이 쓴 글을 봐도 자신이 한국에서 받던 돈 이야기를 하니까 서로들 한국에 올려고 할 정도였고 그 정도 돈이라면 한국에 있지, 왜 여기로 오냐며 팀 동료들이 이상하게 여겼을 정도다.[9] 페루자의 세리에 A 성적은, 14-10-11-8-9-15이다. 중위권 안착은 가능해보이던 팀이 단방에 폭망했다.[10] 재정 문제로 3부로 내려갔던 ACF 피오렌티나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