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18년 야쿠티아에서 일어난 사하인들의 반란.2. 역사
1917년 10월 혁명 도중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 야쿠트족 거주 지역들도 볼셰비키령이 되었다. 사하인(야쿠트인)들은 이에 반대하며 야쿠트 위원회를 자치 지역 행정부 중 하나였던 "혁명 수호를 위한 야쿠트 위원회"로 합쳐졌다.러시아 혁명에서 러시아 내전으로 발발된 이후인 1918년 1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사하인들도 이에 대한 반발로 '야쿠티아'로 독립을 선언했다. 2월에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야쿠티아에서 정치적으로서의 자체 지역 위윈회 조직을 구성했다.
2월 26일,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시베리아 소비에트의 새로운 중앙 집행위원회, 시베리아 인민 위원회가 선출되었는데, 이 기관들에서부터 동시베리아까지 정치적 권한을 확대하고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전 러시아 중앙 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3월 21일, 야쿠츠크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선거가 실시되어 멘셰비키가 소련 지도부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면서, 일부는 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이에 야쿠트 독립 세력들은 백군과 코사크 잔존군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러시아군들은 6월 이르쿠츠크로부터 출발해서 야쿠티아의 여러 소도시들을 점령 및 장악했다. 러시아군의 개입으로 인해 야쿠츠크에서 3시간 간의 전투가 발발했고,[1] 결과는 러시아군의 승리로 인해 방어가 허술했던 야쿠츠크가 점령되면서 야쿠티아의 독립 세력들은 5개월 만에 허무하게 진압되었다. 전쟁 중 사망자는 90명이었다.
3. 여담
야쿠티아가 독립할 때 썼던 국기 중 하나로, 독일 제국과 똑같은 흑백적 삼색기를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외국 신문의 오보로 인한 잘못된 정보로, 실제로는 야쿠티아에서는 딱히 이렇다할 깃발을 쓰진 않았다.[1] 6월 30일 밤 10시부터 7월 1일 새벽 2시까지 전투가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