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5 07:37:29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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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원군
덕흥대원군 이초 정원대원군 이부 전계대원군 이광 흥선대원군 이하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7px-The_Imperial_Seal_of_Korea_03.png 대한제국의 추존 왕 및 친왕
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 완효헌친왕 이선
興宣獻懿大院王
흥선헌의대원왕
파일:흥선대원군 영정.jpg 파일:흥선대원군 이하응.jpg
시호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
군호 흥선부정(興宣副正) → 흥선정(興宣正) → 흥선도정(興宣都正) → 흥선군(興宣君)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출생 1820년 12월 21일
조선 한성부 북부 안국방 소안동계 소안동 안동궁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사망 1898년 2월 22일 (77세, 28,188일)
대한제국 한성부 서서 용산방 공덕리계 염동 아소당[1] (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139번지 일대)
능묘 흥선대원군묘
본관 전주(全州)
이름 하응(昰應)
시백(時伯)
석파(石坡)
별칭 대로(大老)
부모 부친 남연군, 모친 여흥 민씨
왕비 순목대원왕비(純穆大院王妃)
1. 개요2. 가족 관계3. 생애4. 평가
4.1. 권력기반의 문제4.2. 재탕된 개혁 정책?4.3. 국방 개혁의 한계점
4.3.1. 흥선대원군 집권기 조정의 식견 수준4.3.2. 앞선 기술에 대한 안이함4.3.3. 반론
4.4. 대외무역 개념 부재4.5. 당백전 발행의 실패
4.5.1. 호포제
4.6.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쇄국정책-
4.6.1. 쇄국을 하게 된 계기와 경과4.6.2. 이에 대한 반론
4.7. 세도 정치 종결
4.7.1. 또 다른 세도정치의 시작?
4.8. 서원 철폐4.9. 경복궁 중건4.10. 그외의 비판과 주의해야 할 점
5. 호칭6. 일화
6.1. 석파란(石坡蘭)
7. 창작물에서
7.1. 만화7.2. 소설7.3. 사극(드라마,영화)
8. 낭설 및 오류9. 관련 항목10. 기타11. 둘러보기

1. 개요

본관전주, 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남연군의 아들이며 고종의 친아버지.[2] 조선조에 대원군으로 기록된 인물이 총 4명인데,[3] 이중 조선 왕조를 통틀어서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대원군이 되었다. 게다가 대원군의 지위를 받은 사람 중에선 유일하게 섭정까지 했기 때문인지, 그냥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7년에 대원왕으로 추존되고 헌의(獻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정식 시호는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다. 덩달아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모친인 부대부인 민씨도 함께 추숭되어, 부대부인 민씨의 정식 시호는 순목대원왕비(純穆大院王妃) 민씨.

한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풍운아이자,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굉장히 엇갈리는 정치인 중 한 명. 사실 평가가 엇갈리는 한국 역사 속 인물들의 대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도 섣불리 평가를 하기 매우 복잡한 인물로 이 점은 아들도 마찬가지다. 엇갈리는 평가야 어쨌든 인생 역정 자체는 대단히 파란만장한데다가, 세도정치 시대부터 대한제국의 성립기까지 조선 말기의 역사적 사건에 많이 관련된 만큼, 이런 의미로 보자면 조선 말엽의 거시적인 역사 그 자체. 또한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게 될 경우,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중요 역사 인물이다.

2. 가족 관계

본래 그는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후손이기 때문에 직계 왕통과는 꽤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 동생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왕실과 가까운 종친이 되었기에[4], 남연군과 그의 아들 흥인군, 흥선군 모두 명예직이나마 고위 벼슬을 지내며 조정의 예우를 받았다. 그런데 효종의 남자 후손들은 헌종이 즉위할 당시에 이미 많지 않아 절손 위기였기 때문에[5], 여차하면 그나마 혈통으로 가장 가까운 다른 인조 아들의 후손들 중에서 왕위 계승 후보가 나올 수 있었고, 정치적 문제로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여기서 사실상 제외된 상태였기 때문에 자기 몸 보신하기도 바쁜데 무슨 왕이야., 만약 직계 왕통이 단절된다면 실제 혈통으로는 인조 아들(효종의 사실상 유일한 남동생 인평대군)[6]의 후손이면서 은신군의 후사가 된 남연군의 자손 중에서 왕이 나올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던지라 간혹 이 집안을 경계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7]

흥선군의 장남은 흥친왕 이재면, 그사이에 서자 완은군 이재선이 있고, 차남이 다름 아닌 고종이다. 고종이 즉위한 후, 흥선군의 아들과 손자들은 왕의 생가 친척인 덕분에 대부분이 출세했다. 대놓고 왕실만 뽑아주는 특별 과거를 열어서 다 합격시켜버렸고, 이 사람들은 당연히 흥선대원군파로 활동했다.[8] 해당 항목들을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고종과 그의 일족들의 관계는 정말 끝장나게 안 좋았다. 그리고 언급된 이재면은 소극적 친일, 이준용은 적극적 친일파라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다.

흥선군은 형제들과도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그중에서 유독 셋째 형 흥인군 이최응과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9]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10]

참고로 외가, 처가, 사돈이 모두 여흥 민씨라는 기이한 기록을 갖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공조판서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의 어머니인 군부인 여흥 민씨(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좌의정 민정중의 후손인 민경혁의 딸)의 조카뻘(13촌)이 되고, 며느리인 명성황후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동생뻘(12촌)이 되며[11] 손자며느리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명성황후의 조카뻘(13촌)이 된다.[12]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그의 외외증손자가 된다. 이종찬의 외할머니가 바로 흥선대원군의 둘째 딸이었기 때문이다.

3. 생애

흥선대원군/생애 참고.

4. 평가

대원군이 살았던 시기는 한국사 최악의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던 시기이다. 당시 형세를 고려하지 않고 감정적으로만 서술하면 가독성도 떨어지고 편파적이므로 이 항목에서는 테마 별로 분류하여 다각도에서 보도록 한다.

주의할 점은, 나무위키는 여러 유저들이 서술하는 만큼 아래 서술에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서술도 있다는 점리다. 논란이 많은 인물인 만큼 후술할 내용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비판적으로 읽자. 더 자세한 내용은 관련 서적이나 논문을 찾아보길 권장한다.

4.1. 권력기반의 문제

흥선대원군이 개혁이건 섭정이건 뭘 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생부이지만, 조선 왕실과 법적으로 고종은 익종(효명세자)의 양자라는 명목으로 국왕이 된 것이다. 대원군은 말 그대로 대원군이지 상왕이 아니고, 살아있는 대원군은 흥선대원군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대원군에게 주어지는 권한 따위는 당연히 정해진 것이 없었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공식적인 것이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신정왕후 조씨가 법적 어머니의 위치에서 대비로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고, 일반적으로 조선왕이 성년으로 인정되는 15세가 되자 물러났다. 이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이 시기부터는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어야 했다. 흥선대원군이 여기에 낄 근거 따위는 전혀 없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강경 드라이브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이자, 동시에 한계가 여기에 있다. 공식적 지위와 권력의 범위가 없기 때문에, 뭐가 되고 뭐가 안 되고를 구별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마치 상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국정전반에 다 끼어들었고, 동시에 공식적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왕의 생부이기 때문에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는 이상한 위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모습은 소위 말하는 문정왕후와 같은 극히 일부의 대비들에게서 정말 가끔 보이는 요소[13]인데, 흥선대원군은 이걸 5년 이상 계속했고 고종이 20세가 된 시점에서도 자의적으로 물러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종과의 대립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일본 인세이로 인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던 모습이 조선에서 나타나는 것이다[14]. 국왕의 아버지라서 손을 못 대는 것이기 때문에, 국왕이 직접 나서서 몰아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공식적 지위가 없었던 대원군은 무슨 직위에서 해임한다는 소리도 없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다. 고종이 이 과정에서 급하게 자신의 측근세력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 외척인 여흥 민씨였다.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으로 5년 이상 집권하는 과정에서 조정을 흥선대원군판으로 짜놔서 여기 해당 안되는 사람을 찾다보니 외척이 나온 것이다.[15]

흥선대원군은 이전의 자신의 직위를 되찾기 위해서 다른 아들과 손자들을 동원한 쿠데타를 계속해서 시도하게 되는데, 단 한번도 자신이 직접 왕이 되겠다고 나선 적은 없다.

4.2. 재탕된 개혁 정책?

호포제 실시와 서원철폐는 이전부터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사창제의 실시와 의정부, 삼군부의 설치는 과거에 있었던 제도를 다시 쓴 것 뿐이기도 하므로, '흥선대원군만이 펼친 개혁'은 없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시대적인 면이나 주위 국가와의 상황, 기득권층의 입장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이 '당연해 보이는' 개혁들을 하지 못했던 것들이 세계 역사에서 하나둘이 아니다. 흥선대원군만의 개혁이 없다고 할지라도, 바로 앞 선대의 암군들과 달리 앞서서 나왔던 제도를 수렴하고 잘못된 관제를 바꾼다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강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특히 기존의 군포와 서원 철폐[16]는 그와 관련된 폐해가 오래 전부터 지적됐음에도, 조선 후기 200여 년간 세금 내기 싫어한 기득권층의 끊임없는 반대로 실행되지 못한 법이다. 그러면서도 각 지방의 유림들 중 지주였던 사대부 상당수는 공공연하게 농민들을 수탈하고, 기근이 들면 오로지 조정에서 모든걸 다 해결해 주기를 바랄 뿐, 제 곳간을 풀어 소작농들을 구휼하는 명망높은 지주는 손에 꼽혔다. 그에 더하여 지금의 국방의 의무와 같은 군역은 양반, 특히 지체 높은 문반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국방세로 볼 수 있는 군포를 내지도 않았다. 양반이라면서 거들먹거리고,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쥐잡듯이 잡아 작황이 나쁘면 굶기 일쑤인 조선 후기의 평민 이하의 백성들은 양반들에 대한 증오가 거세졌기에 아무런 희생도 양보도 하지 않는 지주들과 왕실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조선 말기는 상당히 많은 반란이 일어났으며 동학의 확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기득권층의 부패와 의무 회피, 왜곡되는 조세 형평성과 사다리 걷어차기 등 사회 구조상의 부조리를 혁파하는 것은 오래된 사회 체계를 가지는 집단에서는 늘 직면하는 과제였고, 이로 인해서 지도층이 바뀌거나 혁명이 일어났으므로, 체제를 유지하면서 기득권층의 양보를 강요하는 정책의 추진은 큰 용단이라고 평가할 여지도 있다. 이를테면, 루이 16세는 못한 일이고, 흥선대원군은 해냈다는 정도. 그러나 기대했던 조세 수입 증가나 신분간 갈등 완화 측면에서 그다지 도움이 안되었다는게 문제.

4.3. 국방 개혁의 한계점

흥선대원군 집권기 군사력 증강이 종종 과도한 고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흥선대원군의 군사력 증강은 병인양요를 계기로 하여 압도적으로 박살난 신미양요 이후까지, 병력을 증강하여 화승총병을 주력으로 하는 상비병 3만명을 유지한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서양은 이미 기존 전장식 소총의 무지막지하게 느린 연사 속도와 낮은 명중률을 보완하기 위해 보편화되었던 전열보병을 18세기까지 유지하다가 소총의 발달로 19세기 들어서는 폐기하고 있었고, 전장의 길이가 길어지자 비가시선 지휘(보고)와 단위제대의 전술지침 등을 일선 지휘관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사관학교가 보편화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대량의 면직물이 보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민지군을 시작으로 면직물 군복이 대량 지급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공세종말점을 연장하기 위해 공모를 통해 병조림을 개발하는 등, 유럽 열강은 한세기가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혁신하고 있었고, 조선처럼 유럽에 비해 수세기나 뒤쳐진 상태였던, 청과 일본은 늦긴 했어도 좌우당간 비슷한 시기에 개항(서구와의 무역), 산업화, 행정체계 개선, 군사기술 도입을 동시에 추진하였는데, 조선만 안한 것이다. 흥선대원군만 안한 것이다. 그리고 계속 안했다.

병인양요로 인해 프랑스군 등의 서양 병력이 대규모로 조선을 침략하는 걱정 정도는 한것 같은데, 겨우 5년 후 신미양요로 개박살이 난 이후로도 흥선대원군은 여전히 느낀게 없었고, 압도적인 신식 무기에 대응하여 구식 지휘체계와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것은 안그래도 경복궁 중건 강행과 스스로 일으킨 당백전으로, 조선 경제가 심각하게 안좋은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조세 부담으로 이어졌다.[17] 또한, 구식 병종이 서양의 군대를 맞아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알고도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미국이 강화도에서 조선군 수백명을 학살하듯 죽이고도, 자국 병사들의 목숨이 아까워 퇴각할 정도로 조선의 통상수교 매력이 심각하게 저평가되어 있었던 탓에 미군이 물러난 것을 두고, 흥선대원군과 고종, 그리고 보고하는 김병학 등은 안이하기 이를데 없는 말을 나누며 이후를 도모할 계기로 삼지 못했다.

4.3.1. 흥선대원군 집권기 조정의 식견 수준

신미양요미국에 대해서 고종과 흥선대원군 앞에서 김병학이 보고한 내용 중 일부만으로도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 대해 그리 잘 알지는 못했음은 분명하다[18]
“정황이 불측한 것으로 서양 오랑캐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미리견(彌利堅)은 부락만 있을 뿐인데, 그 중간에 화성돈(華盛頓)이라는 곳이 있어서 성지(城池)를 만들고 기지를 건설하여 해외의 양이(洋夷)와 더불어 서로 교통하고 있으며, 영국(英國)은 거리상 가장 가까운 듯하니 이는 《해국도지(海國圖誌)》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니, 상(고종)이 이르기를,
이들은 해적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그들이 경영하는 것은 오직 이익만을 좇는 것인데 바닷섬 사이를 오가면서 또한 겁탈하는 버릇도 많으니, 과연 해적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들이 소위 교역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해괴한 말입니다. 저들이 비록 이런 구실로 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나 일체 엄격히 막은 뒤에야 나라가 나라의 체모를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교역이라 하더라도 외국과 더불어 서로 교통해서는 안 된다. 만약 한 번이라도 서로 교통하게 되면 사학(邪學)이 반드시 치성해져 부자(夫子)의 도가 장차 폐지될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8년(1871년) 4월 20일

요약하면, 영의정 김병학이 보고하기를 1871년 당시 미국은 민가로 이루어진 부락만 있고, 그 중앙에 워싱턴이라는 동네가 요새로 만들어져 서양 오랑캐들끼리 교류한다 하니, 고종이 대뜸 해적과 다름없다[19] 하고, 김병학이 맞장구치며 교역은 해괴한 말이라고 하니, 다시 고종이 받아서 외국과 교역하여 소통하게 되면 천주교 같은 서양 종교가 득세하여 유교의 도리가 훼손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내용이다.

김병학은 안동 김씨 세도가 세력으로 흥선대원군이 중용하는 인물이었고,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인해 아버지의 의중대로 말하고 결정하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국방과 외교 분야의 모든 오판과 실책의 이유가 이 대화 한 번으로 다 설명이 된다. 이는 흥선대원군과 주요 대신들이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실체를 잘 알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김병학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아뢰는데
“선전관에 가서 보니, 선판(船板)이 파손되었다는 것은 정말 그랬다고 한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저들의 배가 감히 방자하게 날뛰는 것은 반드시 우리나라 사람이 종용하는 것이 있어서일 것입니다만, 굉음을 내는 포가 선판을 파손시켰으니, 저 추악한 무리들의 간담이 떨어졌을 것인바 이는 통쾌한 일입니다.”
하였다.
“저 선박 안에 우리나라 사람이 많다 하니, 더욱 통탄스런 일이다. 이런 무리들을 어찌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 다른 나라 선박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정상을 따져보건대 만 번 죽고도 남을 죄가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은 곧 금수만도 못하니, 어찌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손돌목을 지나갈 즈음에 어찌 우리나라 사람의 내응이 없었겠는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만약 내응하는 무리가 없었다면 저들이 어찌 감히 어려움 없이 엿보아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모두 사도(邪徒)들이 휩쓸려 호응해서 그런 것이니, 더욱 통탄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학(邪學)의 무리는 모조리 섬멸하는 것이 옳다. 지금 또한 나머지 무리들이 있는 듯하다.”

『승정원일기』, 고종 8년(1871년) 4월 20일

무슨 말이냐 하니, 광성보가 박살이 나서 전사자가 300명이 넘는 대패였는데, 임금에게 김병학은 미군함의 파손 사실을 두고 자뻑을 시전한 다음 신미양요의 원인을 천주교 신자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니까, 왜 피해가 그리 컸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내용이 아니고, 싸우면서 주먹 백대 맞고 한대 때린 사람이 "이야! 내가 한대를 때렸으니 얼마나 통쾌하냐! 저놈도 이제 간담이 서늘할 것이다!"라고 정신 승리를 시전한 다음, 고종 3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로 집단학살을 당하던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미양요의 책임을 돌린 것이다. 흥선대원군 앞이니 흥선대원군에게 하는 말이고 자신들끼리 주고 받는 자뻑과 정치적 책임의 전가였다 할 것이다.

신미양요 당시 뜬금 없어 보이는 김병학과 고종의 이 대화는 병인박해로 인해 병인양요가 벌어지고,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이 양이 침입에 대비한다며 급하게 상비병을 늘렸는데, 신미양요로 왕창 박살이 난 책임을 이미 학살한 수천 명의 천주교 신도들의 남은 가족이나 잔당에게 돌리는 것을 모두 아우른다. 이 네 사건이 서로 연결된 사건이며 이 대화에 다 들어있다는 뜻이다.

김병학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일가가 죄다 숙청당한 이후에도 요직을 잃지 않을 정도로 흥선대원군과 인적 교분이 두터웠고, 그의 행보는 병인박해에 있어서도 천주교도를 죽이고 천주교를 금지하는 데에 앞장섰던 사람인데, 보수적인 척화파였기에 이런 대화가 나온 것이다. 천주교의 확산은 조선 사회의 기득권인 유림들의 입지에 어떤 관점으로 봐도 위협적이었을 것이므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던 유림들은 눈에 불을 켜고 사학의 무리를 찾기 바빴고, 결국 희생자 숫자가 작았던 그 이전과는 자릿수가 다른 병크의 끝장판 병인박해로 마무리를 지었다.

개혁가라면서 실제 행보는 서원 철폐나 호포제 정도를 제외하면 다 유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서양을 바라보는 시각은 고종의 추임새 같은 대답에서도 나타나듯 당시 청이 서양을 바라보던 중화사상에 기반한 시선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4.3.2. 앞선 기술에 대한 안이함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며 신식 군함 건조를 추진한 것도 실패로 끝났고, 흥선대원군은 그 실패를 통해 기술 격차를 극복할 마땅한 대안을 내놓기는커녕 서양과 조선의 학문적, 기술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은 줄곧 목선만 제조해왔고, 대포와 같은 공용화기도 여전히 주물포를 쓰던, 증기기관이 뭔지도 모르던 조선[20]이 갑자기 증기기관을 갑자기 모조해낼 능력은 없었으며, 근대의 화기들 역시 모조하여 개발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국방 기술이 절정에 달한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 중기까지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총을 기반으로 한 화승총만 붙들고 하염없이 화승총만 만들었으며 화포류도 마찬가지로 2세기 전의 기술로 만든 홍이포, 불랑기포 같은 정도였다. 포탄은 당연히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19세기 이후 현대의 포탄 원형이 개발되기 전에도 유럽과 미국은 조선에서 지연 신관 역할을 했던 심지와 포탄 자체가 파편상을 일으키는 폭발탄(작열탄)을 계속 발전시키고 대포의 명중률도 개선하였으며 탄도학을 비롯한 포병술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21] 조선군의 농성은 애초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신미양요의 전투 결과는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이후 추진한 상비군 증강이, 그냥 이전 것을 그대로 해서 양만 늘린 것이고 근대화된 군대를 상대로는 쓸모없다는게 확인된 것이다.

4.3.3. 반론

위에 있는 주장은 조선의 처해진 상황을 보지 않은 부분이 있다. 우선 상비군을 늘리고 기존 무기를 계속 사용하는 이유는, 시대적으로 당시 조선은 정조 이전에도 이양선이 주변에 돌아다니면서 사회적으로 불안감을 키우는 동시에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지면서 당시에 엉청난 충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방비가 집중이 되었는데 문제는 조선은 세도정치 이후로 국방력이 거의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정조 때도 국방력이 엉망이라서 박제가와 이익이 조선의 국방은 너무나 개판이라고 한탄하였고 당시 국내에 숨어있던 프랑스 신부가 무기고에 무기는 커녕 썩고 녹슨 나무 토막, 쇠 토막만 있을 뿐이니 군함 한 대만 끌고와서 대포 몇 방만 갈기면 알아서 무너질 거라고 말했을 정도로 심각했으며 특히 개화된 이후에도 동학 농민 운동 때는 서양식 신식 무기와 훈련을 하고서도 패배하는 추태를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 서양세력에 빠르게 대비를 할 정도로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상비군을 늘리는 길 이외에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뒤쳐진 무기로 상비군을 무장시켜 앞선 무기에 맞서게 했다는 주장도 당시 상황을 보지 않은 채 주장하는 것이다. 계속 뒤쳐진 무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새로운 무기를 갖추는 데 돈과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일단 서양에서 사용된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면 기술자를 초빙해서 무기공장을 설립하고 제작지식을 보급하는 교육시설을 만들고 무기에 대한 규격과 도량을 통일시켜야 하며 거기에 각 진영에 어떻게 보급을 하고 거기에 유지비를 어떻게 마련하고 거기에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따로 새로운 군대를 만들거나 재편해야 하며 거기에 이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교육관을 양성시켜야 하는 등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돈을 마련하는 것은 둘째 치고 뒤쳐진 무기를 빠르게 대체할 시간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다

서양에서 무기를 수입하면 하는것도 문제다 .수많은 유럽 국가들 중에서 어느나라의 무기를 선택을 하고 무기를 수입하는 루트를 개발하고 어떻게 빠른 시내에 무기를 빨리 수입해서 충당을 하여 각 진영에 보급하는 것도 위에서 상황보다 낫지만 시간이 상당히 걸리며, 거기에 유럽국가들이 순순히 자신들의 무기를 줄리가 없으며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거절하거나 설사 수입이 가능하다 해도 여러가지 바가지를 세우며 비싸게 팔 것이다. 싸게 파는 놈에게 사요.라고 하면 된다.그리고 이것도 어디까지 임시방편이고 언젠가는 무기를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다. 거기에 수입하는 것은 둘째치고 군사를 따로 훈련해야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실제 양무운동 사례를 보면, 무기는 제대로 갖춘 상태에서 병사들의 훈련 인프라가 충실하게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장비빨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일본에게 참패했다[22].

그럼 군사력 키우지 않고 곧장 문을 열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문제다. 군사는 미래에 만약에 사태를 대비하는 조직이기에 이 상황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고 오히려 아무런 준비없이 서양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더 만만히 보면서 더욱 이익을 챙기기 위해 더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할지도 모르는 얘기다[23].

다만, 진짜 문제는 제쳐놨던 돈 문제이다. 흥선대원군은 기술과 산업 발전 시키고, 군사력 강화할 돈을 원납전과 당백전으로 조선 전체에서 미래의 여력까지 다 동원해서 뜯어내서 경복궁 만들었다. 고종은 광무개혁을 포함해서 이걸 이렇게 하려고 하긴 했다는 식이라도 나오고 그게 한참 부족하다는 평[24]으로 이어지는데, 흥선대원군은 이 부분도 부족하다. 구식군대 유지를 제외하면 끽해야 면제배갑이나 제네럴 셔먼호 엔진 인양한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는 증기선 정도에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그중 남은 것은 없었다. 광무개혁 시기 진짜 제네럴셔먼호급 양무호 구매한 것도 쓸모 없다는 소리나 듣는데, 잘 보면 움직이는 수준이었던 증기선은 무의미했고, 면제배갑은 신미양요 때 이미 실효성이 없었다. 구식군인들은 대원군의 작품인 정부의 재정파탄으로 인해서, 대폭 축소와 지원감축이 일어났다. 5군영은 2군영으로 축소되었고, 강화도 병력의 자금원이었던 경강수세[25]도 중앙재정으로 돌리면서 강화도 병력은 실질적으로 무력화 되었다. 임오군란 시기의 임금 문제도 당연히 횡령도 있겠지만, 신식병사를 육성하는 과정에서 얼마 없던 자금여력이 소멸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26].

4.4. 대외무역 개념 부재

일본이 1853년 미국의 개항 요구에 순순히 굴복하여 아무 준비없이 불평등 조약을 맺고, 준비되지 않은 전면 개항 십수년만에 일본이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며 무진전쟁이 발발한 것을 보고,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군사력 강화가 잘한 정책이라고 보는건 무척 좁은 시각이다. 조선이 일본과 청나라간의 무역만 겪어서 세계의 무역 동향에 무지해서 그렇지, 조선도 개항 시 서양식 조약에 무지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는다고 가정할 시에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은 쿼터제다. 공무역의 형태로 중국과 정한 양의 물품을 교환하거나 정해진 지역에서 중국, 일본의 소규모 무역에서 할당량을 정하여 교역하는 것은 충분히 익숙한 개념이었으므로, 개항을 하되 관세의 불평등을 교역량을 크게 제한한 다음 점진적으로 늘리는 방식으로 하고, 시장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기술도입을 추진하는 방안 등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겪은 이후 일부 적용했고 양무운동을 전개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그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개항을 안하고도 당백전 병크를 통해서 스스로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조세 개혁이라 함은 나라의 세수를 늘리는 여러 개혁을 묶어 평가해야 하는 것인데, 흥선대원군의 조세 개혁에서는 대외무역에 의한 관세가 빠져있다. 그 이유가 대외무역은 그저 외세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하려하는 수단 정도라고 보는 수준이었다는게 여러기록에서 드러나는 바, 그의 조세 개혁은 철저하게 조선 내에서 걷히는 세수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5. 당백전 발행의 실패

한 줄 요약 : 국가가 스스로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내다.[27]

경복궁 중건이나 갑작스레 증강한 상비병으로 지출할 돈이 많아지니, 그저 단순하게 "돈을 찍어내면 다 해결 되겠지."하며 당백전 병크를 일으킨 것인데, 흥선대원군의 능력은 자신이 세운 정책을 밀어붙이는 카리스마 같은건 있을지 몰라도, 경제관에 대해서는 한없이 모자란 필부의 수준이었다. 조선 조정은 당백전을 찍어낼 생각만 하고, 찍어낼 화폐의 가치를 담보할 금이나 은을 보유하지도 않았고, 당백전 자체가 귀금속도 아니었으므로,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만 엄청나게 늘어나니, 상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폭락하는 당백전을 꺼릴 수밖에 없었고, 이에 물가가 완전히 박살나게 된다. 즉,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이후 상황과 똑같게 되었다. 수량을 100장으로 한정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래 언급된 1600만냥은 금위영에서 5개월 동안 직접 생산한 것만 고려한 수량이다.

당백전이 발행되기 전 재정이 아주 많이 필요했던 조정에 의해 백성들뿐 아니라 조선 왕실도 정부 고관들도 원납전이라는 형태로 돈을 내놔야 했고, 이걸로 부족해서 강제로 걷어야 했다. 상평통보의 발행량이 1000만냥인데, 원납전으로만 750만냥을 걷어들이고도 돈이 부족했다. 호포제의 실시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며, 결두전[28]을 포함해서 온갖 잡세가 다 등장했다. 예를 들면 사대문 밖에서 출입세를 걷고 한강에서 선세를 걷었다. 이게 고종 재위 시기라고 해서 고종의 악행으로 까이고 있다. 하지만 고종 10년에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고종 시기 행적의 굵직굵직한 것들은 흥선대원군이 앞서 추진한 것이기에 공도 과도 모두 흥선대원군의 것이다.

이걸로도 부족해서 생각해낸 것이 앞서 언급된 당백전과 청전의 발행이다. 당백전은 기존의 상평통보에 비해서 6/100 정도의 악화였는데도, 2년만에 1,600만냥의 가치의 돈이 풀렸다. 이로 인한 문제는? 당시는 실질화폐의 시대이다. 명목화폐를 사용하고 싶었다면, 조선 정부가 당백전에 대한 지급보증을 해야 실질적으로 운영이 가능하다. 이게 아니면 조선 정부가 1,000만냥 이상을 조선 전체에서 강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화폐 발생 초기 왜 , , 구리를 필두로 한 금속이 화폐로 사용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금속제 화폐는 내구성이 매우 높아 반영구적이기도 했지만, 화폐를 구성하고 있는 금속의 가치가 화폐의 가치를 담보하기 때문에 화폐가 안정적인 신용도를 쌓을 수 있던 것이다.[29] 당시는 신용의 시대가 아니었으며(정확히 말하면 '신용 화폐의 시대') 심지어 현대에서조차 화폐 이전에 현물이 있다.[30] 그 유명한 미국 달러조차 '브레튼우즈 체제'로 대표되는 금태환 화폐 시절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와 브레튼우즈 체제를 통해 미국 달러는 파운드 스털링의 따귀를 후려치고 기축 통화의 위치에 올라서는데 성공한다.

현대 신용화폐의 시대에서 화폐 발행의 주체들이 윤전기를 돌리면서도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가 화폐가 전적으로 현물과의 교환을 담보할 수는 없다는 사실[31] 때문이다. 금본위제도에 의거한 금태환 화폐의 경우에는 무조건 '금'이라는 현물과의 교환이 담보되기 때문에 문제가 비교적 적다(비교적 적다는 것이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용화폐가 과도 발권될 경우 화폐는 신용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결과 짐바브웨 꼴이 나므로 윤전기를 돌리면서도 타이밍을 열심히 재는것이다. 고도로 금융학이 발전한 현대에도 이럴진대, 근대의 물도 제대로 못 먹은 조선에서 화폐의 신용 개념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악화(당백전)를 유통했으니 어떤 꼴이 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대원군은 당백전 유통을 위해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지출하는 돈의 비율을 당백전2, 상평통보 1의 비율로 하라고 명령했고, 나중에는 중앙에 올리는 공납 전부를 당백전으로 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게 작용되어 지방 수령들은 상평통보나 아예 실물로만 세금을 받은 다음에, 명목 가치에 해당하는 당백전으로 조정에 상납하여 수령들 배만 엄청나게 불렸기 때문에 이를 처벌하는 조항까지 등장했다. 결과적으로 조선 조정이 양화인 상평통보를 빨아들이고, 악화인 당백전의 유통 비율을 높인 것이다.

더구나 기존의 상평통보의 총액은 1,000만냥 정도에 불과했으니, 인플레이션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자연스럽게 상평통보는 창고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에 대한 불신이 쌓인 것이다. 결국 5개월만에 주조 중단, 그리고 2년 만에 당백전은 폐지된다. 무려 1,600만냥이 폐지되었다. 폐지된 당백전은 유통이 불가능하고, 녹이기라도 하면 국법으로 처벌되었다. 당백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다 호구, 빵셔틀이 된 것. 이에 구제책으로 조선 조정은 당백전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교환비율은 당백전 1개로 상평통보 또는 청전 1냥. 그렇게 회수한 당백전은 녹였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애초에 당백전으로 돈놀이해서 번 돈이 사라지면 재정 압박이 강해지지 않겠는가. 이걸 대비한 것이 앞서 언급된 청전(淸錢)이다. 애초에 청전은 밀수품이었다. 당백전이 워낙에 말도 안 되는 악화이다 보니, 그보다는 볼만한 돈으로 시선이 몰렸는데, 그것이 바로 청전이다. 청전의 명목가치는 상평통보와 같지만, 실질가치는 상평통보의 1/2. 이것도 악화란 소리다. 하지만 청전을 수입해서 조선에 풀어놓으면 그 과정에서 유통마진이 명목가치의 1/3이 생기기 때문에 밀수가 이뤄졌는데, 이 짓거리를 조선정부가 직접하기 시작한 것.

이러니 상평통보가 창고 밖으로 나올 일은 여전히 없다. 애초에 당백전에 비해서 양화(良貨)란 것이지, 어차피 상평통보 대비 악화인 청전은 비율이 상대적으로 낫다는 이유로 대원군 퇴임하는 그 시점까지 사용되었다. 이게 안정적으로 유통되었다는 소리도 하는데, 자기나라 돈의 화폐 유통체계를 개판으로 만들고, 밀수된 외국 화폐를 정식 유통하는 것이 무슨 놈의 안정인지도 의문이지만, 이건 이것대로 문제다. 청전의 유통도 400만냥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되었고, 대원군의 돈놀이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청전은 경복궁 다 지은 이후에도 유통이 금지되지 않았다. 청전의 유통은 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이런 화폐 사기극과 그로 인한 초(超)인플레이션은 가혹한 조세 수취보다도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정부 시책을 따라서 당백전이나 청전을 사용하는 이들만 손해를 보고, 상평통보를 자기 창고에 쌓아두었던 이들은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관북 지방과 영남 지방에서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애초에 당백전이건 청전이건 사용하지 않았다. 정부 시책이 안 먹힌 것이고, 부작용이 기호 지방과 특히 한양에 몰빵이 될 것이란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연 실질 가치의 1/3인 악화를 유통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금을 거둬들이는 쉬운 방법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빨아들인 최대의 블랙홀인 경복궁 중건에 시대착오적 왕권 강화책이란 명분은 차라리 부차적일 정도이다. 정부의 재정적 한계와 국가의 경제적 화폐적 기반을 뒤흔들 정도의 뭔가를 진행했다면, 그게 왕권 강화책이건 민주주의의 상징이건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재정 문제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악화를 통한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화폐 불신을 끝내기 위해서는 결국 악화를 폐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모든 후폭풍은 악화를 폐지하는 시점에서 몰아치게 된다. 그게 바로 고종의 친정 초기이다. 황현은 자신의 일기 매천야록에서 대원군이 10년을 쌓아둔 재정을 고종명성황후가 1년만에 탕진했다고 기록하면서, 고종 부처를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면, 이미 파탄지경이었던 조선의 재정 상황에서, 모든 자금을 빨아들인 블랙홀 경복궁 중건을 거친 대원군이 도대체 무슨 수로 재정을 쌓았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되는데, 이 경우의 해답은 대원군이 치트키라도 입력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서는 청전과 당백전 유통의 이익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결국 이 모든 환투기 수단을 폐지하고, 조선 왕실이 스스로 불러온 인플레이션을 정면을 맞이하게 되는 고종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재정 파탄으로 가게 된다.

우선 청전이 폐지되었으므로, 당연히 인플레이션은 정반대로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되게 되고, 더구나 지방 관청에서 상평통보로 세금을 걷고 중앙에는 청전만 올려보낸 것은 이 때도 유지되었기 때문에, 청전을 폐지시키고 보니 중앙정부 금고에는 청전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고종 친정 시기 이 재정파산 상태를 타개하는 것에만 2년이 걸렸다. 이 때문에 조선정부가 한 최대의 실책으로 평가하는 입장도 존재하지만[32], 역으로 말하자면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조선 정부의 손해를 민간에게 떠넘기거나, 혹은 10여년에 걸쳐서 천천히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어느 쪽이건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이 여파 때문에 조선 정부는 세수 확보에 발악을 하게 된다. 그런 흔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운요호 사건 시기다. 대원군이 재정을 동원해서 강화했던 하지만 결국 발악에 가까운 응전이 떼몰살로 이어지긴 했었던 강화도 병력의 주 수입원이었던 경강수세마저 중앙정부 유지비용으로 들어가고, 강화도 병력들이 별다른 응전도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황현과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대원군이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과정과 고종 초기에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이전 관념으로 상상해서 집어넣는 것이다.[33] 그러니 보수적인 사대부나 유림들 입장에서는 대원군이 돈 많은 이유야 호포제 등을 실시해서 그럴 것이고, 고종이 돈 없는 이유야 사치를 통해서 돈을 많이 써서 그렇겠거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34] 당시의 전 세계 어느 지식인이라 해도, 극소수 경제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4.5.1. 호포제

가끔 고종이 호포제를 폐지했단 말이 있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애초에 대원군의 호포제부터 양반과 평민의 세율에 차이를 둔 불안정한 것이었거니와,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린 고종이 그나마 안정적인 세원(稅源)인 호포법을 폐지할 리가 없다. 실제 완전 균등 과세는 갑오개혁 시기에 완성되고, 그 이전은 대원군의 세수 체제가 그대로 이어졌다.

군포라는 수백년을 이어온 병역세에서 혜택을 받아온 양반은 서원철폐도 열받는 판에, 1871년 호포제까지 시행되자 거의 게거품을 물다시피하며 상소를 올렸지만, 부패한 유림을 개혁하려 했던 흥선대원군과 뒤이은 고종의 입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호포제는 그나마 성공한 세수 확대 정책이었다.

문제는 호포제가 군역을 면제받던 유림들에게 조세로서 군역을 이행하게끔 하는 정도의 견제효과와 약간의 조세수입 증가 정도에서 효과가 그친다는 것.

가기에 호포제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부분이 있다. 세금에 대해서는 토지에 대한 정책이니만큼 대단히 민감한 부분이라서 당시 세금개혁으로 상류층에게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자체가 결국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직접세의 문제점인 조세저항이 강하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당장 균역의 면제는 당시 양반의 특권이었다. 당장 방납의 폐단 때문에 대동법을 실시하려 했으나, 지방 지주층들 가장 반대했기 때문에 완전히 실행까지 무려 100년이나 걸렸다.[35] 거기에 균역법마저도 이전부터 논의되어오던 제도이나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가 영조 때와서 실행이 되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봤을 떄도 쉽지 않은게 로마시대 때 심각한 빈부격차로 그라쿠스 형제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을 하다가 최고 권력 집단인 원로원의 강력한 반대로 암살을 당해 실패한 점이 있으며 더불어 프랑스 혁명의 이유가 점점 나라의 빚이 너무나 늘어나 어떻게든 개혁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기득권에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발로 무산됐고, 실제로 귀족들이 조금이나마 양보해서 세금을 낸다면 국가의 빚을 갚고도 남는데도 끝까지 거부한 결과 벌어진게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군역을 면제받던 유림들에게 조세로서 군역을 이행하게끔 하는 정도의 견제효과와 약간의 조세수입 증가 정도에서 효과가 그친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백성들이 가장 기피한 조세 제도가 역이었고 실제 백성들뿐만 아니라 양반들조차 역에 대해 기피하였다. 당장 속오법으로 속오군을 구성할 때 양반부터 노비까지 모든 계층을 징집하려 했지만, 결국 노비들만 남았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36] 그나마 어떻게든 호포제를 통해 간산히 양반들에게 역을 부과할 수 있었고 약간의 조세수입이 증가했다는 점은, 백성들에 대한 과도한 수탈을 막고 기존에 있던 당시 법대로 세금을 거두면서 생기는 일이다. 당장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민생안정책으로 기존의 있던 조세를 10분의 1로 다시 조정하면서 결과적으로 감세 정책이 되었던 전례가 있다. 그리고 오히려 백성들이 낼 과중한 세금이 당시 대다수 인구를 차지한 양반층에게 부담되면서, 세금이 각 계층마다 적절하게 분배가 되었다는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이전까지는 군포를 10명 중 2명이 각각 5개로 부담했으면 이제는 10명이 각자 1개씩 부담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당백전에 대해 실드를 안쳤다(...) 실드 칠게 없는데 어떻게 실드를 칠 수 있을까

4.6.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쇄국정책-

대원군의 행적에서 지금도 가장 많은 찬반과 논쟁의 무대가 되는 정책

4.6.1. 쇄국을 하게 된 계기와 경과

애초에 조선은 외부에 관심이 적을지언정, 나라를 완전히 막아버릴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 건국기에는 국경을 크게 확장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의 대외 군사력 투사에 집중한 시기가 있었으나, 유교 중심의 사회가 자리잡은 덕에 숭명 사상이라는 매우 자발적인 굴종과 중화 숭배(소중화)가 고착되었다. 선조가 임진왜란 대비를 나름대로 잘한 부분이 있어서 칭송받을 여지도 있었으나, 애초에 선조가 이런 사상에 찌든 사람인지라 재위 초반에는 알 수 없었던 찌질함이 드러나면서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주하려 하고, 전쟁 이후 광해군과의 갈등 역시 명나라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명청 교체기 척화파가 멍청하게 보이는 원인이 항전을 주장하면서 내민 명분이 숭명이었고, 강력해진 여진은 그저 하등한 오랑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얕잡아보던 하등한 오랑캐에게 굴복하여 그 오랑캐를 섬기게 되자 자연스럽게 청나라를 상국으로 받들며 후손들의 손발이 오그라들고 눈이 썩는 처절한 정신승리를 시전하고, 그들의 명령을 따라 더 멀리서 온 오랑캐들과 싸우며 흥선대원군 집권기 직전에는 에도 막부로 형식적으로나마 보내던 조선 통신사도 보내지 않게 될 정도[37]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었다. 그걸 공식적이고 '개혁적'으로 추진하여 천명한 정책이 쇄국 정책이다.

흥선대원군 집권기 이전부터 청나라나 에도 막부도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쇄국을 지향했는데, 청나라는 명나라의 무역과 경제 인프라를 그대로 이어받았기에 경제 문화적으로 부족한게 전혀 없었고, 유럽에서도 엄청난 부의 땅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많은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 항로를 개척할 때 조선 같은건 안중에 없었으면서도 중국만큼은 되든 안되든 꼭 무역을 요청했는데, 그런 서구 열강 중에서 무역을 허가받은 영국이 대청 무역을 하면 할수록 무역 적자가 심해지자 스스로 애걸복걸 했으면서도 아편전쟁까지 일으켰고, 에도 막부는 매우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한 덕분에 지방 다이묘들을 통제하고 내정을 안정시킨다며 수세기에 걸쳐 쇄국을 이어나갔지만, 나가사키의 데지마 항을 통한 서양 문물 및 기술, 국제 정세를 끊임없이 보고받으며 흡수하였으며, 이 때문에 뜬금없는 개항이 일어나고 무진전쟁까지 발발하였음에도 비교적 국가 전반에 걸친 혼란은 적은 편이었다. 이는 미국내에서 남북전쟁으로 국내에 정세기 혼란이 있는 행운까지 겹쳤던점이 있었다. 애초에 조선은 처음부터 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상 외세와 접촉이 드물었고 직접적인 개항 및 요구도 가장 늦게 발현되었다. 이를 두고 일본 및 청과 비교하여 개항이 늦었다니 비판하는 것은 과한 점이 있고 잘못되었다.

4.6.2. 이에 대한 반론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기 전에, 이미 정조 때부터 이양선이 오면 식량과 물을 주되 적절하게 쫒아냈으며 거기에 1832년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선 암허스트호가 조선으로 와서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이떄 흥선대원군이 처한 바와 다르게 암허스트호는 아무런 무력적 압박 없이 평화로운 요구였는데다, 머무르는 동안 감자를 재배하는 신농법을 알려주거나 의료 봉사를 해주는 등 우리가 그간 조선 말기에 당해온걸로 무작정 나쁜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당시 서양 세력들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결국 세도정치와 교조주의로 치닫던 조선의 당시 상황과 겹쳐 이러한 평화적인 요구에도 매몰차게 조선은 거부한적이 있는 등 이미 통상에 대한 거부는 이미 관례대로 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정조때의 일도 사실 이전부터 해오던 일에서 약간 수정한 정도에 불과한게 인조때 온 벨테브레하멜의 사례를 보고 '조선은 외국인이 오면 살려는 주지만 보내지는 않는 나라' 라고 인식하기 쉽겠지만 사실 원래는 중국으로 보냈다. 아마도 '중국은 큰 나라고 큰 나라니까 여러 나라랑 접촉할테고 그러니 중국으로 보내면 귀찮을 일 없겠지' 라고 생각해서 일듯한데 문제는 벨테브레가 왔던 때는 명청교체기라 선뜻 중국으로 보내기 뭣한 상태였고 하멜은 아얘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이미 임진왜란으로 개판이 된 적이 있던 조선으로서는 하멜을 일본으로 보내기는 뭣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하멜 일행이 탈출에 성공한 이후 조선에 딴지를 걸었으니까 즉 조선이 외국인을 만나면 되도록이면 내보낸다는 정책은 수백년간 지속된 정책이었다.

또한 근대라는 개념이 생소한 당대에 당장 개항해서 근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사회 전반이 명나라 이후 유일하게 자신들이 중화 문명의 전통을 이었다는 소중화주의에 젖어있어, 당시에도 청나라를 멸시하고 나아가 서양을 양이라고 멸시했다. 거기에 천주교는 진산 사건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조선사회에서 인식이 최악으로 떨어진 상태. 물론 일부 개화파들을 위시해 개항을 해야한다는 목소리도 있긴 했었지만 이들은 정치적 역량이 없는 소수 비주류들이었고, 그들이 직접 서양에 대한 문물을 접하는게 아니라 청나라에 있던 서양문물과 서양사람들과 접촉하는게 한계였으며, 개항을 한 이후 어떻게 근대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38].

설령 개항이 되었다고 해도 근대화를 시키는 과정은 별개의 문제다. 근대화는 단순히 제도의 개혁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국가의 전체적인 법, 제도, 문화, 과학기술, 학문, 시민들의 의식 등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 이미 세도정치로 인해 당시 조선은 상당히 피폐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설사 근대화가 진행된다고 해도 기존의 있던 세력들이 기득권을 잃을 우려로 크게 반발하여 불미스러운 일로 트집잡아 흥선대원군을 실각시켜 근대화가 저지당할 경우와, 그간의 전통과는 파격적으로 달라 근대화 자체를 반기지 않는 일반 백성들, 그리고 그러한 난리통에서 자국의 이득을 꾀하려는 외부세력에 의한 간섭도 고려해야 한다. 반발세력을 통제하면서 각종 불미스러운 일과 변수들에 잘 대처하고 넘보는 외부세력까지 잘 견제하며 전체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 하지만, 그냥 글로 읽어만 봐도 알 수 있듯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일본처럼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당시 조선 외에 근대화를 급속 추진했던 많은 나라들 또한 실패의 길을 걸었다[39].

즉 개항을 한다해도 근대화는 이미 불투명한 상태였다. 당장 청나라에서도 양무운동이 실패하자 광서제가 캉유웨이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꾀하나 이에 보수파들이 서태후의 원조 아래 반발하여 결국 좌절된 사례가 있다. 이렇게 되면 개항만 하고 근대화는 해내지 못해 사실상 서양세력의 식민지로 직행하는 꼴이고, 이러한 광경을 옆에서 보고들은 대원군이니만큼 개항과 근대화가 별개라는 것은 몰랐을 리 없다.

하물며 당시 상황조차 도움을 주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미 내부세제 등 개혁에 집중하느라 개항 준비에 힘을 쏟기 힘든 상황이었고 거기에 _이미 개혁으로 인해 양반의 세력들이 불만이 엄청나게 쌓여있는 상태였는데, 이들이 서양을 혐오하기까지 하는 상황에서 개항을 추진한다면 결사적 반대에 직면할 것은 뻔한 상황_이었다. 이 반대를 누르려면 개항에 마땅한 명분이 필요했는데, 위에 언급한 천주교 관련 사태들로 사실상 개항의 명분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고, 이 상황에서 개항과 근대화를 강행하면 반대 세력들이 "대원군이 양이와 손을 잡아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려고 한다"는 식의 명분으로 오히려 실각을 당할 수 있었다. 실제 광해군 때 중립외교로 인해 서인들에게 덜미를 잡혀 인조반정이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40][41].

4.7. 세도 정치 종결

조선 후기는 순조 재위부터 세도 정치로 본격적인 막장이 되기 시작했다. 임금의 부덕함을 지적하고 모자란 지혜를 더하여야 할 조정은 붕당 정치의 폐해만 심각해져 제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 끝장판은 섭정 형태에 가까운 세도 정치였다. 세도 정치가 조선 후기 몇몇의 유력 사대부들의 권력을 비대화하고, 국가의 총생산을 좌우하는 농민과 상공인들을 위한 정책이 나오지 못하거나 무효화될 수밖에 없는 왕조 말기의 흔한 폐단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것을 외가에 의한 섭정인 세도 정치를 고종의 부친인 이하응이 섭정을 통해 종결하여, 현재의 흥선대원군에 대한 몇가지 긍정적인 평가 중 하나가 되었다.

세도 정치를 끝내기 위해 세도가와 정치적인 협력 등을 통하여 고종을 보위에 앉히고, 직전의 세도가였던 풍양 조씨를 배척하고 능력을 중시하는 고른 인재 등용을 표방하여 조정을 구성하였다.

흔히 잘 알려진 집권 이후 (신)안동 김씨를 살려준 것은 그가 딱히 관대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신)안동 김씨와 정치적인 거래를 한 것도 있었고, (신)안동 김씨가 그나마 능력 위주로 집안을 관리했기 때문에 김병학이나 김병국처럼 행정에 능숙한 엘리트들도 많았다.

더욱이 대원군 자신부터가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천명했으므로, (신)안동 김씨를 깡그리 없애는 것은 자신의 명분도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신)안동 김씨의 행정 능력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현실적, 정치적 안배가 들어있는 조치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서 대원군의 집권 과정에서도 언급했지만, 고종의 즉위는 (신)안동 김씨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였고,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편에 선 것이 병자 돌림의 김병학 - 김병국 형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신)안동 김씨를 완전히 몰아내면 조 대비의 풍양 조씨가 다시 단독 최대 파벌로 떠오른다. 그야말로 풍양 조씨만 좋은 꼴이고, 조 대비의 의도대로 (신)안동 김씨 학살 + 고종의 왕비가 풍양 조씨가 되는 루트가 되었다면, 이건 풍양 조씨가 종친인 전주 이씨와 손잡고 세도 정치를 재현하는 꼴이 될 뿐이다.[42] 때문에 집권 직후 풍양 조씨의 대두를 막을 세력으로 (신)안동 김씨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신)안동 김씨가 그를 포함한 왕족들에게 그렇게까지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이하전의 사사는 (신)안동 김씨가 악질이거나 그 시대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라,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원래 조선시대 종친에 대한 전반적인 대우에 불과했다.

허나, 세도 정치가 반복되지 않도록 나름 숙고하여 며느리로 민씨를 간택한 것이 악수가 되어 다시 민씨 가문의 영향력이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독재로 지친 고종과 민씨가 흥선대원군을 실각시고 이후 민씨 일가와의 권력다툼으로 외세 개입이 본격화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세도 정치 타파 역시 원론적으로는 실패가 된 셈이다. 일본에 의해 죽었다는 것만으로 얼토당토않는 왜곡질로 재조명되었던 민씨는 기록된 역사대로 그 일가와 협력하여 반동적인 세도 정치를 하고, 고민없이 질러댄 외세 의존 등으로 흥선대원군이 긍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정도의 망국적 병크를 연이어 터뜨린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를 왕비로 앉히면서도 민씨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민씨 일족을 숙청하지 않았던 것은 큰 화근이었으며, 그가 추진한 개혁이 안일했거나 흥선대원군의 지혜나 역량이 크게 모자랐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위에 있는 글이 어폐가 있는게, 자신이 물러난 이후 명성황후에 대한 행적을 어떻게 예측하고 파악할 수 있겠는가가 문제다. 실제 이 부분은 인간의 한계인 게, 당장 세종대왕조차 계유정난을 예방하지 못했으며 성종조차 자신의 아들이 이렇게 암군이 될 것을 예상을 못했고, 하물며 세계적으로 봤을 때도 로마 5현제 중 하나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조차 아들인 콤모두스가 암군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등 명군조차 미래에 대해 예측하지 못한 것을, 대원군에게 크게 지혜와 역량이 모자란다며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이 있다. 게다가 민씨가 간택될 당시에는 편모슬하 외동딸이었기 때문에 후에 세도 정치를 저지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렇게 일가친척 다 끌어다 국정을 파탄낼 거라고는...

4.7.1. 또 다른 세도정치의 시작?

무엇보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실력으로 몰아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측근세력을 만들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왕은 커녕 아무런 법적 직위를 가지지도 못한 인물이다. 여기에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권력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손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친위세력을 만들어야 했다. 상단에서 흥선대원군이 여흥민씨를 관리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데, 만일 흥선대원군이 명성왕후 민씨를 통해서 여흥민씨를 관리했다면 고종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제 3의 세력을 통해서 흥선대원군을 축출하려고 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세력을 쥐고, 안동김씨를 몰아내는 것을 세도정치의 종료로 이해하는 것은, '대원군'이라는 직책에 뭔가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흥선대원군을 왕, 혹은 적어도 상왕으로 은연중에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43].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쥐고 죽을 때까지 유지하면 그 자체로 세도정치일 뿐이다. 왕에게는 자신의 세력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외척이건, 처족이건, 근친이건 다 똑같다.

4.8. 서원 철폐

세도 정치 혁파의 일환으로 부패한 유림들을 일깨우기 위해 서원 철폐도 단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초기 개혁 행보는 유력 사대부들이 왕실과 결혼을 통하여 간섭하거나 섭정하면서 왕권을 약화시키고, 그렇게 취한 권력을 개인 치부에 사용하거나 기득권 보호에 사용함은 물론, 지방 유림들은 공자의 가르침은 누구보다 잘 안다면서 백성의 삶은 잘 모르겠고 그저 개인 치부에만 몰두하며, 조세나 병역은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문자 그대로 쓰레기 같은 귀족계층으로 전락하였다고 보고 추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서원 철폐 자체는 상당한 개혁이라고 볼 수 있으나 삼정의 문란이 극복되지는 못하였고,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의 여러 병크를 물고 늘어지며 상소를 올리자 결국 하야하게 된다.

물론 서원 철폐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어 고종도 만동묘를 복구해준거 하나 빼고는 싹 다 개무시했다. 그나마 만동묘도 관 위주로 운영토록 하여 유림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철저히 막았다. 심지어 유림들마저 서원의 병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인지 소심하게 중요 서원들만 복구를 청했지만 이마저도 싹 다 씹혔다.

4.9. 경복궁 중건

나라 바로세우기 및 왕권 강화 차원에서 이뤄진 경복궁 중건 사업은, 후대에 있어선 분명한 업적으로 분류된다. 조선은 말아먹었어도, 대한민국에 문화 유산은 남긴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을 당시엔 병크이자 삽질, 돈지랄, 낭비, 최악의 국책사업이었지만 만들어지고 나서 후대에는 결과적으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관광자원이 되는 것들이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이 그런 케이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광화문과 경복궁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 또한 흥선대원군 덕분이다. EBS 신병주 교수의 역사이야기 편 참조 샤 자한타지마할을 무리하게 건축하는 바람에 무굴 제국의 재정을 파탄내서 희대의 암군으로 영구까임권을 얻었고, 에펠 탑은 처음 건축된 당시에는 파리의 경관을 망치는 뼈대만 앙상한 흉물이라며 파리의 시민들과 예술가들에게 온갖 욕을 배불리 먹었으며, 라파누이족은 모아이 석상을 무리해서 세우느라 이스터 섬의 자원과 자연환경을 거덜내버렸지만 역사가 흐른 오늘날 현대에 타지마할, 모아이, 에펠탑은 인도, 이스터 섬, 프랑스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이러한 것은 완전히 실용적인 건축물이 아닌 모든 건축물에 적용되는 사항이기도 하고 국력이 받쳐주는 한도 내에서 만들었다면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후손들에게 관광자원을 물려준 업적으로 재평가되지만, 모아이, 타지마할, 경복궁처럼 나라를 거덜내면서 만들었다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인정받아도 암군 딱지는 떼기 힘들다(...).

중건하는 도중에 운이 없었는지, 초기엔 신분차별 없이 걷은 원납전을 통해 자금을 충족하고 부역도 신중하게 정한 데다 위로금도 지급하여 순탄하게 건설되었으나, 중건 시작 후 1년쯤에 화재로 그동안 만들어놓은 전각과 왕릉에서 벌목해 쌓아놓은 목재가 전소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대원군이 총지휘자였기에 완성을 위해 목재를 다시 구하고 자금을 당백전을 발행하면서까지 만들게 된 원인이다. 덤으로 고종경복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이든 뭐든, 엄청난 인력과 재원이 필요한 대공사는 국가 경제 사정을 봐가면서 해야 하는데, 하필 경복궁이 중건되는 시기는 외부의 발전된 과학기술을 대거 도입하여 대대적인 산업화를 시작했어야 했던 시기였다. 또한 중건을 시작하자마자 병인양요를 겪자 경복궁은 경복궁대로 계속 짓고, 국방은 국방대로 구식 화승총병만 잔뜩 늘려서 지출되는 봉록의 부담만 가중되게 하였다. 경복궁 자체는 왕권을 강화하는 의미에 비하여 너무 많은 재정이 필요했다. 경복궁 중건을 고집한 탓에 당백전을 발행하는 희대의 병크가 벌어졌고, 이로 인해 화폐 불신이 심화되었으며, 거둔 세금의 가치도 절하되었다. 이것은 열강 개입 이후 외세의 말도 안되는 폭리와 여러 사업권의 헐값 매각에도 영향을 준다.

베르사유궁이 프랑스의 자랑일지언정, 일개 왕의 별장이었던 것을 수십 년 동안 어마어마한 재원을 쏟아가며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한 루이 14세를 명군이라고 칭송하지는 않는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궁 중건 이후 당대에 자신의 권위는 유럽 만방에 떨쳤을 것이고, 현재의 프랑스 국민들에게도 고귀한 문화유산이지만, 재위 기간 막대한 건축비와 치세 동안의 전쟁 비용 때문에 세기를 넘어 프랑스 평민계층에 대한 수탈이 지속되어,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루이 16세 처형의 원인이 되었다. 엄청난 재정이 소모되는 국정은 결과가 좋았을 경우에만 호평할 수 있다. 의도가 나쁜 재정지출은 소수다. 재정파탄, 경제파탄 등으로 국가가 망하는 원인을 제공하고도 명군, 성군이 되고, 훌륭한 개혁가가 되려면 무수하게 많은 근거를 필요로 해야 하는 것이다.

산업화에 무관심했던 청나라도 결국 그 쇄국 정책과 부패한 황실의 병크 연타 때문에 나라가 망한 후 각지에서 군벌이 일어났어도 워낙 뒤떨어진 군대들이었기에, 일본군에게 지리멸렬했고 종전 이후에도 오로지 전쟁만 하느라 기초적인 산업 기반이 태부족하여 수십년간 타이완 섬으로 쫓겨난 중화민국(대만)보다 국제적 영향력이 적었다.

각주들이 추가되기 전의 경복궁 중건에 대한 평가는 원납전당백전을 사용할 정도로 과하게 진행된 시대 착오적 왕권 강화책 정도가 고작이다. 국사 교과서에도 대충 이 정도로 적혀 있다. 하지만 각주에도 적힌 것처럼 경복궁 중건은 평시 조선 조정 1년 예산의 12년치 분량의 자금을 쏟아붓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경복궁 타령》이 유행했을까…

심지어 이보다도 더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왜냐하면 저 760만 냥이라는 돈이 경복궁에 들어간 돈의 총액이 아니라, 경복궁을 짓기 위해서 설치되었던 영건도감에서 발표한 원납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백성들과 양반들에게 거둬들인 돈이 720만 냥, 왕실과 내하전에서 내놓은 것이 35만 냥이었다. 이 760만 냥이 어느 정도 거금인가 하면, 당백전을 발행하기 이전에 유통되던 조선의 공식 화폐 상평통보의 총액이 약 1,000만 냥이다. 상상이 가는가? 인플레이션 이전 유통화폐 총액의 3/4이 그다지 필요도 없는 랜드마크를 건설하는 공사에 투입되었다는 것이? 더구나 당백전과 청전으로 인한 이득, 노동력 강제 동원, 무단 벌채, 결두전이나 통행세 등은 모조리 제외다. 물론 이게 다 경복궁 중건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연간 세입의 규모가 현물과 화폐를 통틀어 60만 냥 정도였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정말로 엄청난 규모인 것이다.

백성들이 얼마나 피를 토하면서 착취당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10. 그외의 비판과 주의해야 할 점

-정치력에 대한 비판
그리고 퇴위 이후의 활동은 흑역사에 가까운데, 정권을 다시 획득하기 위해서 꾸준히 쿠데타 시도를 하였다. 국왕의 생부라는 점에서 재집권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지만, 고종이 성년이 되면서 대리 청정이 끝나게 된다면, 대원군은 물러나서 후견인으로만 존재하는 게 합당하다. 하지만 대원군은 세종 초기 태종처럼 상왕에 가까운 위치에서 집권하려고 하였으니, 국왕인 고종의 측근 세력과 대립한 것은 당연한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왕실 내부의 문제는 외국 세력들이 꾸준하게 이용하는 전가의 보도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문제이다. 더욱이 이때 대원군의 행보를 보면 정권 장악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면 그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는 등, 원칙도 없고 극도로 기회주의적이었다. 강경하게 척화를 부르짖었던 사람답지 않게 일본 세력과도 기꺼이 연계하였으며, 심지어 자신이 혹심하게 탄압했던 천주교 쪽에 손을 내미는 듯한 모습까지 보인다.

결국 대원군과 고종의 대립 과정에서 왕족은 분열되었고, 고종에 대립했던 대원군 계파는 황당하게 이후 친일로 넘어가버린다.[44] 사실 고종의 친정 이후, 고종과 대원군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사실상 부자 관계는 남아 있지 않고 정치적으로 원수가 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결국 권력 회복 시도는 명분도 없었고 오히려 국가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만들어, 안그래도 좋지 않은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들었다.

-외교 정책에 대한 비판
또한 동아시아 전체를 놓고 따지면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구석이 거의 없는데, 조선의 외교 행정 체계는 서양과 통교 기간이 꽤 된 청나라에 크게 뒤쳐졌고 이로 인해 고종 집권기 열강들(특히 일본)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서 조선에 크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 이후 조선과 비슷한 수준의 쇄국을 유지하며 뒤떨어져 있던 중 서양의 개항 압력과 일본 내부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메이지 유신이 벌어졌는데, 메이지 유신은 개혁 집권 세력이 근대화의 필요성과 서양과의 통상 수교 필요성을 인정하고 추진한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일본은 통상 교역만 하며 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던 청과 달리 빠르게 근대화를 이룩하여 경제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고, 자신들이 서양의 외교법에 무지하여 개항과 통상 수교를 하며 당했던 불평등 조약들을 조선에 그대로 이용해먹었다. 흥선대원군이 일본보다 앞서거나 동시에 서양과 통상 수교를 시작하였다면, 만약이 없는 역사라고 하여도 무능한 껍데기 개혁가 흥선대원군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혁명적인 개혁가로 남을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며, 조선이 일본에 종속되는 한이 있어도 국가를 유지했을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통상 수교를 전면 거부하고 척화비를 세우며, 수십 년간(대원군의 섭정기간은 고작 10년이다) 내정에만 집중했다. 그나마도 백년 넘게 묵은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울만큼의 성과도 없었고,[45] 천주교 박해나 조선 후기에 세력을 키운 세도가와 권력 쟁탈에 몰두하는게 전부였다. 서양의 개항 요구는 조선도 횟수와 강도는 일본보다 적기는 하였으나 분명히 있었음에도 아무도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도굴 사건 한 번 정도로 서양 세력의 요구에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는 것은 그 안일함과 무관심이 다른 선대 암군들보다 다를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에도 조선과 비슷한 생각으로 서양에 배타적인 세력이 강성했음에도 당시 집권 세력이 서양과의 통상 수교 필요성을 인정하여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것인데, 흥선대원군은 개혁가라는 평가를 달고 있음에도 비슷한 행보는 전혀 없다. 흥선대원군이 개혁가라는 소리는 암군들이 즐비한 조선 역사를 통틀어 보았을 때나 그렇지,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냥 왕권 강화와 내정에 능력은 없었고 관심 정도가 있었던 평범한 권력가 정도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일본의 경제력은 화산 지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강수량과 각 지방 토호(다이묘)들의 자체적인 자강 활동으로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식량 생산량이 증가하여, 배타적인 에도 막부 시기에도 인구와 국가 총생산은 어느 정도 성장해 있었다. 문제는 동시기의 조선이 쌀 생산력이 더 크게 늘어나지 못하여, 인구로만 일본의 3분의 1 수준이 되었음에도 자각하지 못했고, 중국이 아편 전쟁 발생 전까지 엄청난 교역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개항이 막연하게 해가 될 거란 두려움 만으로 아무런 외교적 성과를 내지 않은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겨우 30여 년만에 열강이 되어 조선을 병합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흥선대원군이 정말 진지하게 주변국 정세에 무관심하여,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국호를 바꾸고 덴노 명의로 문서를 보내자 앞뒤없는 사대주의로 일본을 자극하여 일본에서 정한론이 득세하는 빌미를 준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멍청한 화폐 정책과 쇄국 정책, 그리고 일부 성과를 거둔 세법 개혁 정도로 '자강의 노력을 한 개혁가'라는 과찬을 하는 사람들은, 조선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흥선대원군 시기의 조선은 거의 300년 전에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을 겪었고, 청에게는 200여 년 전에 쳐맞은 다음 알아서 속국 행세를 하게 되었다. 왕조 교체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조선이 엄청난 풍요를 누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청과 일본 양국의 정세 파악에 아무런 관심이 없음은 물론 일본의 변화가 외교 문서로 전달되는데도 노발대발하며 반려하고 그게 끝이었다. 누가 봐도 중국 황제를 모시는 속국 주제이니 하등한 섬나라 왜인들이 중화 천자에 맞먹는 덴노를 칭하니 노발대발할 수도 있겠으나, 개혁 군주나 개혁가가 맞다면 일본이 어느 정도 깜냥이길래 청나라 황제에 깝치는가를 살펴야 하는게 아닐까?

세계사적 시점에서 흥선대원군을 평가해야 하며, 그가 본인의 그릇과 본의 아니게 중요한 시기에 조선을 다스렸고 근대화 시기를 놓쳐 일본에게 완전히 합병되게 한 여러 원인을 제공하였으므로, 그의 시대적 과오야말로 재조명 해야 할 필요가 충분하다. 1231년부터 1257년까지 몽골(원나라)과의 전쟁에서 전 국토가 유린되며 박살났어도 조정을 유지한 채로 강화하여 고려라는 국가와 국호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조선 후기 조정의 총체적 문제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에 더하여 외교적 감각이 전무하여 국호를 지키지 못함은 물론, 수탈당하는 농민들을 구제하는데 끝내 실패하여 조선 멸망 후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크게 득세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위 외교 정책 비판에 대해 고려해야 할 점

위에서는 대원군의 외교 정책에 비판하고 있는데 요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일본과 달리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지 않은 점 + 서계 사건에 대한 대응, 두 번째 외국 정세에 대한 대원군의 무지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결과론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있어 이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후술할 내용에서는 당대의 관점을 고려하여 서술하였다.

첫번째, 대원군이 일본처럼 적극적인 유신을 하지 않은 점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정치 환경이 달랐다는 점을 착안해야 한다. 당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단순히 외국 문물에 대한 개화뿐만 아니라, 덴노의 친정을 복구한 것이었다. 개화는 프로이센식 제국주의를 모방하여 덴노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는 물론 덴노가 정말로 절대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덴노의 뒤에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덴노의 간판을 이용하여 호가호위한 것이다. 에도 막부 시기에 조선에 비해 중앙 집권 수준이 약했던 일본이었기에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덴노를 위시하여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에 이러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에 반해 조선은 세도 정치로 문란해지긴 했어도 대원군의 집권 아래 중앙 집권이 빠르게 복구되었고, 조세 제도의 개혁 성과는 이러한 기반 아래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서계 사건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당시 쓰시마 도주 소 요시아키라가 전달한 외교문서 서계와 일본 정부의 국서 초안은 동래부 왜관을 거쳐 동래부에 전달되었다. 이때 서계에는 일본 왕실을 황실, 덴노의 명령을 받는 것을 봉칙이라 하였다. 그간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관계 아래 교류하였는데 유신 이후 뜬금없이 자신들이 조선의 상국 행세를 하니 외교적 결례가 아니겠는가? 단순히 섬나라 왜인들이 참람하게 황제의 칭호를 써서 조선이 오버했다는 서술은 지나치다. 더군다나 전년이었던 고종 4년(1867)에는 청나라에서 어느 일본인이 홍콩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공설을 퍼뜨려 물의를 빚은 사실을 통보한 바도 있었다.
..."근래 일본국의 군사력이 자못 강해져서 현재 80여척의 화륜선을 보유하고 있고 장차 해외에 있는 조선을 침공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고 했다"- 『일성록』 고종 4년 3월 7일자 기록

위 의구심과 더불어 조선 조정과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충분히 경계할 만한 사건이었다. 단순히 서계 사건을 조선의 병크로 보아서는 안된다.

또한 외국 정세에 대한 대원군의 무지에 대해서도 해명할 거리가 있다. 조선은 헌종, 철종 대를 거치며 두 차례 아편 전쟁에 대한 내용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내에서도 이미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상소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과 프랑스가 선뜻 통상을 하자고 하면 대원군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옆 나라 중국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서양 국가들이다. 대원군으로서는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비유를 하자면 옆집을 턴 강도가 우리 집에도 왔는데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통상 정책을 거부한 것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서양 세력은 조선 내 천주교 세력과 연계하여 밀입국을 시도한 적도 심심찮게 있었다. 조정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체제를 무너뜨리려 한 경계 대상이었다. 통상을 하더라도 문제였다. 조선과 서양은 대등한 위치에서 통상을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자원이 척박했던 조선에 비해, 서양은 모든 문물이 우수하였다. 강화도 조약 당시 최익현의 상소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저 적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모두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면서도 기이한 노리개이고 손으로 만든 것이어서 그 양이 무궁한 데 반하여, 우리의 물화는 모두가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이고 땅에서 나는 것으로 한정이 있는 것입니다."최익현 '''-『면암집』권 3 「지부복궐척화의소」

이러한 상황에서 대원군의 선택지는 통상 거부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당시 그것은 대원군뿐만 아니라 조선에게 있어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대원군은 통상을 거부했다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을 통해 서양 기술을 일부 받아들여서 자주적으로 대처할 능력을 갖추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통상 거부 외의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국호를 바꾸고 덴노 명의로 문서를 보내자, 앞뒤없는 사대주의로 일본을 자극하여 일본에서 정한론이 득세하는 빌미를 준 것은 당시 외교라는게 국가를 대표하는 일이기 때문에 옛부터 정치나 외교적인 일에서 언행과 감정, 예절으로 인해 문제되는 일들이 다분하였고 심지어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전쟁난 경우도 역사에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고, 지금도 어구 하나 하나로 국가의 이익이 오락가락한데 지금 황제조차 과분한 것을 덴노라는 칭호를 쓰는 자체가 대단히 오만하게 보는 것이 문제였다. 하다못해 중국의 황제도 자국 황제를 천자라 칭하던 때인데 말이다.

그리고 조선이 일본이 자국의 (명목상) 지도자를 덴노라 칭하는걸 아주 모르는건 아니었다. 성호 이익이 먼 훗날의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고했을때 일본의 덴노를 '왜황'이라 칭한 바 있다. 이익은 일본에 다녀온 사람도 통역관도 그렇다고 중앙정계에서 한 실력 했던 인물도 아니었고 단지 지방에서 학문을 닦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도 알 사실을 조선 조정에서 모른다는 사실은 말이 안된다. 즉 이미 덴노라 칭하는걸 알고는 있었지만 일단 서계에는 그렇게 쓰지 않았으니 넘어갔던 거지만, 아예 서계에서부터 덴노란 표현을 써서 문제삼은 것일지도 모른다. 병자호란 시기 최명길이 대간들의 탄핵을 받았던 것도 "오랑캐 칸을 '청국 황제'라 하여..." 라는 이유도 있었는데, 외교 절차상 결국 호칭 문제는 조선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입장에서야 "우린 오랫동안 덴노라 했는데 뭐가 이상한데?"라고 하겠지만, 호칭 문제에 민감한 조선 입장에서는 "일본 저것들이 덴노네 뭐네 하면서 갑자기 건방지게 구네?"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 조선은 아직까지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일본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점은 조선은 그 동안 세도 정치라는 사회적 암 때문에 제 아무리 흥선대원군일지라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세도 정치를 기득권층은 아직도 건재하고 거기다 사람들은 아직도 소중화 사상에 근대화 정책에 여전히 반감심에 거부감까지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이것을 모를리도 없었고 정치라는 것도 자신의 권력 지지가 있어야 실행할 수 있는데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조선을 먼저 내부를 잡고 힘을 키워야 개화를 할 때 그나마 온건적인 방향으로, 위의 비판하는 의견처럼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세도 정치는 무려 조선 여러 왕 세대에 걸쳐 일어났고 그 동안 일어났던 부정부패에 망가진 조선의 군사, 정치, 경제는 어떻게 할 건가? 무작정 개방했던 고종과 일본에게 강화도 조약을 맺은 것도 어떻게 보면 흥선대원군 정책의 반발하던 정책이었는데 오히려 백성들은 더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 열강들이 더 빼앗아가고 혹사시켜버린 덕에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고 기득권층들은 오히려 반발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여러 간신들은 나라까지 팔아 먹었다.

어떻게 보면 흥선대원군의 목적은 바로 조선의 내정 안정이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을 뿐, 만일 성공했었다면 조선을 다시 원래 기강대로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만약이니 주의하며 들을 것.

한국의 근대사의 중심에 서있는 대원군은 그 자체로 논쟁거리가 많은 사람이다. 공과 과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어떤 식으로 결론을 내리든 오늘날의 관점과 오만이 아닌 당시의 현실을 고려하여야 생산적일 것이다.

5. 호칭

그를 부르는 호칭은 꽤 다양하다. "대원위 대감(大院位大監)", "대원위 합하(閤下)" 등. 말년에는 "국태공 저하(國太公邸下)"라고 불리기도 했고, 갑오개혁으로 조선 왕실의 호칭이 격상해서인지(주상 전하는 대군주 폐하로, 왕비 전하는 왕후 폐하로) 독립신문의 기록을 보면 그를 가리켜 '대원군 전하', '국태공 전하'라고 한 기록들이 존재한다.[46] 아마 '살아있는 대원군'은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호칭을 정립하기 어려웠기에 이렇게 많았을 수도 있다. 또한 조선 시대 백성들은 유명한 재상급 인사들을 부를 때 그가 사는 곳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운현 대감(雲峴大監)'이라고도 불렸다.

6. 일화

노련한 정객답게 뛰어난 화술(話術)을 가졌으며, 음담패설의 달인으로 좌중을 자주 웃음바다로 만든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대원군 개인적으로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을 좋아했다고. 조선 후기를 풍미한 인물답게 그 재치나 언변과 관련한 많은 에피소드가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다.

다만 본문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흥선대원군 일화는 거짓 일화가 많다. 가장 큰 이유는 김동인의 소설 속 창작들이 실제 일화인 것처럼 퍼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 《국태공의 귀환》, 《젊은 그들》의 내용을 모아놓으면,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긍정적인 흥선대원군 상이 거의 정립될 정도로 흥선대원군 위인전 작가들이 복붙을 해댔다. 그리고 근대화도 싫고, 버젓이 왕이 있는데도 명성황후가 설치는 것도 싫고, 일본은 더 싫었던 당시 양반들이 그나마 긍정적으로 밀어준 것이 대원군이라서 이쪽 관련해서 미담들을 대원군과 연관시킨 것도 많다. 결국 재미로만 보고, 실제로 이 일화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야사의 한 떡밥을 여러 위인이 돌려 먹는 사례가 너무 많기도 하지만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하는데, 공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剗泰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於諸公何如?)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거라면 비록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할 수 없다."
  • 위의 두 발언이 유명하긴 하지만,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 이 발언은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에 나와있다. 이 책은 흥선대원군을 띄워주려는 목적으로 저술되었는데, 왜냐하면 박제형은 갑신정변에 참여한 인사이기 때문이다[47]. 해당 문서에도 적혀 있지만, 갑신정변은 정국 안정을 위해서 흥선대원군 일파를 정권에 포함시키고, 청에 잡혀간 흥선대원군 귀국을 시도했을 정도였다. 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는 이 책을 쓴 목적이 '일본에 의해서 왜곡된 흥선대원군의 모습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일본의 힘을 빌려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이들이 '임오군란 시기에 청나라로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옹호'하면서 일본에게 왜곡된 대원군 운운하는게 말이 안된다. 참고로 이 책, 갑신정변 참여했다가 죽은 인물의 책이라고 당대 일본에서 출판되었다.
  • 대원군이 젊었던 시절 기생 춘홍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옆자리의 금군 별장 이장렴과 시비가 붙게 되었다. 이때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한 나라의 종친이 창가(娼家)의 외상술이나 먹냐?"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48] 뒷날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러 "아직도 내 싸닥션 한번 갈겨볼 테냐?"고 묻자, 이장렴은 당당하게 "대원위께서 기생의 집에 드나들 때처럼 행동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원군은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며 술상을 차려 이장렴을 대접했다고. 혹은 그 자리에서 바로 "여봐라, 금위대장 오셨으니 술상 차려라!"라고 했다고도 한다. 대원군도 대인배지만 이장렴도 꽤나 용자인 듯[49] 다만 뺨 때리고 벼슬 얻은 얘기는 송시열 쪽도 존재한다.
  •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청의 사신은 조선의 경복궁을 둘러보고, 이거 짓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대원군에게 물었더니 대원군은 약 3년 정도 걸렸다고 대답하자 청의 사신은 "이 정도 건물은 우리 나라는 1년이면 뚝딱 지어낸다."며 대원군을 벙찌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창덕궁을 보더니 청의 사신은 또 이 궁궐 짓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물었는데 대원군은 1년 정도 걸렸다고 대답했다. 이번에 사신이 또 "이 정도는 몇 달이면 다 짓는데 ㅋㅋㅋ"라며 또 대원군을 열받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숭례문에 다다르자 사신이 또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하였는데 대원군은 이런 대답으로 사신의 입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어? 저긴 어제만 해도 아무 것도 없던 곳이었는데?"[50]조선의 건설기술은 세계 제일?
  • 전라도 영광에 살던 한 선비가 대원군에게 벼슬자리를 청하고자 운현궁을 방문했는데, 선비는 대원군을 보고 절을 올렸다. 대원군은 그냥 선비 하나가 자신에게 인사나 드리러 온 줄 알고 대충대충 대했는데, 그러자 선비는 다시 한 번 대원군에게 절을 올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을 두 번 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나 하는 일이다. 열받은 대원군은 "너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이 무슨 막돼먹은 행동이냐?"라고 화를 내자 선비는 천연덕스럽게 "처음 절은 인사를 올리는 절이었고, 두 번째 절은 이만 물러가겠다고 올린 절이었사옵니다."라고 받아쳤다.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대원군이 이 선비에게 한 자리를 내려준 이야기는 대원군의 일화 중 유명한 편.[51]
  • 어느 날 대원군에게 한 무관이 찾아왔는데, 때마침 조 대비(신정왕후)의 친척이 찾아와 청탁을 했다. 조 대비의 친척은 대원군에게 "마침 백천군수 자리가 비었다니 그 자리에 저를 앉혀 주십시오."라고 했는데, 친척이 말한 황해도 '백천'은 한자로 白川이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배천'이라고 읽었다.[52] 어이가 없어진 대원군이 기본도 모르는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도중 방 안에 방귀 소리가 났다. 그 방귀는 무관이 뀐 것이었는데, 무관은 자신이 뀐 줄도 모르고 친척에게 "어느 안전이라고 큰 방귀 소리를 내느냐!"며 성을 냈다. 그런데 이 친척은 아무 변명도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음식이 나와서 식사를 들게 했는데, 친척은 또 체면치레 하느라고 좀처럼 음식을 먹지 않았고 무관은 "제가 가난하게 살아서 이런 진수성찬은 먹은 적이 없습니다."라며 맛있게 음식을 다 먹었다. 그러고 대원군에게 "제게 늙으신 부모가 있는데, 집이 가난해서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배천군수 자리가 비었다고 들었는데 소인을 거기 보내주시면 열심히 일하며 부모님을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배짱 좋게 말했다. 대원군은 이 무관이 마음에 들었는지 즉석에서 그렇게 하도록 힘써 주겠다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조 대비의 친척이 "대원위 대감, 제가 먼저 부탁드렸는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묻자 대원군은 이렇게 말했다. "제 밥그릇도 찾아먹지도 못하고, 방귀 뀌지 않고서도 방귀 뀐 것처럼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곳의 이름도 모르고. 어찌 자네 같은 자를 군수로 쓸 수 있겠는가! 당장 집으로 돌아가게!"
  • 하루는 대원군이 별장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있는데, 별장 밖에서 어떤 노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무료했던 대원군이 그 노인과 함께 시간을 때울 생각으로 종자를 시켜 그 노인을 불러오고는 어디 사는 누구냐고 물었는데, "저 앞에 사는 장가이며 아직 환갑은 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대원군이 "심심한데 바둑이나 한판 두세. 바둑 둘 줄 아는가?"라고 묻자 그 노인은 둘 줄 모른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장기를 두자고 했는데도 이것도 둘 줄 모른다고 했다. 대원군이 "그렇다면 자네 고누놀이[53]는 할 줄 아는가?"라고 묻자 이 노인은 그것도 할 줄 모른다고 대답하고 만다. 싫증이 난 대원군은 결국 그 노인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이 이야기가 장안에 퍼지자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고 한다. "그 노인도 참 멍청하구만. 어떻게든 대원위 대감의 무료함을 풀어드렸다면 무슨 벼슬자리라도 하나 얻었을 텐데 말이야."[54]
  • 어떤 선비가 대원군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운현궁을 찾았다. 그런데 이 선비가 좀 '아는 척, 잘난 척'을 했는지 대원군은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원군이 문득 "자네 처가가 어디인가?"라고 묻자 선비는 또 있어 보이게 말하려고 문자를 써서 "황문(黃門)에 취처(娶妻)하였습니다(=황씨 문중에서 아내를 들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원군 왈, "항문[55]이라니. 자네는 똥구멍에 장가를 들었단 말인가?" 선비는 결국 데꿀멍하고 버로우.
  • 대원군이 되기 전 불우했던 시절에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그 집에 땔나무를 해다 준 한 나무꾼이 있었다. 이를 잊지 않던 그는 대원군이 된 후 이 나무꾼을 운현궁 연회에 초대했는데, 조정의 고관들과 장안의 부호들까지 초대했고 이 연회에서 자신이 상석에 앉고 자신의 바로 옆에 그 나무꾼을 앉혔다. 그리고 귓속말로 나무꾼에게 그간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면서 앞으로도 나무를 해다 줄 거면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지 않을 거면 고개를 저으라고 하자 나무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뜬금없이 대원군이 귓속말로 나무꾼에게 "자네 어머니께 내 수청 좀 들게 하게."라고 말하자 깜짝 놀란 나무꾼은 고개를 저으면서 안 된다고 했고, 그래도 대원군이 계속 이 청을 하자 결국 절대 안 된다고 하면서 연회장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대원군은 이 나무꾼을 버선발로 쫓아가며 청을 했으나 나무꾼은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이 나무꾼의 집에는 엄청난 양의 재물들을 가져온 부호들이나 고관들의 하인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알고보니 당시 연회석에 있던 고관들이나 부호들이 '대원위께서 저리 간청하는데도 들어주지 않는 걸 보면, 저 사람은 분명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실력자거나 대원위의 측근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그냥 나무꾼인지도 모르고 아부할 생각으로 재물들을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즉 대원군은 자기 재물은 한 푼도 안 쓰고 그 나무꾼에게 보답을 한 셈.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씁쓸한 에피소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흥선대원군이 나무꾼에게 은혜도 갚을 겸 고관과 부호들에게 골탕 먹인거다.
  • '2대에 걸쳐 제왕이 나올 명당'에 자리 잡은 가야사를 불지르고 거기에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쓰기로 했는데, 이장하기 전 형제들 모두가 신인이 '내 본진 건드리다니 니네 다 끔살'이고 협박하는 꿈을 꿨다. 다른 형제들은 덜덜 떨었지만, 흥선군만은 '여기가 진짜 명당인가 보다! 까짓 거 한 번 죽고 말지!' 하고 흥분해(...) 이장을 고집했다. 또한 무덤 자리에 돌이 깔려 있어 도끼로 찍어도 불꽃이 튈 뿐 깨지지 않았는데, 흥선군이 하늘에 대고 "나라고 왜 임금의 아비가 되지 못한단 말인가!"하고 외치고 도끼질을 하니 그제야 돌이 깨졌다고 한다. 패기 쩐다 하지만 이게 결국 화를 입게 되었는데, 명당이라고 아버지 무덤을 만들었다만 그 다음 이야기는(…).
  • 인왕산 인근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을 강탈(?)한 야사도 유명하다. 석파정은 본래 안동 김씨의 일원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는데, 이미 당대부터 수려한 경치와 건물로 유명했다. 이에 석파정을 가질 욕심을 가지게 된 대원군은 집권한 뒤 한 가지 묘수를 고안해 냈다.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석파정에서 하루 기거하게 한 것이었다. 조선의 관례에 따르면 임금이 하루라도 머문 장소는 일종의 불가침 장소가 되어서 신하가 머물 수 없었고, 결국 김흥근은 눈뜨고 대원군에게 석파정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별장의 이름 또한 대원군 자신의 호인 석파(石坡)를 따서 붙였다는 이야기.
  • 본인부터가 사군자의 명인으로 명성이 높은 예술가이기도 했던 만큼 당대 문화, 예술의 애호가이자 스폰서 후원자이기도 했다. 판소리를 대단히 좋아해서, 운현궁엔 전국의 내로라하는 소리꾼들이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현대의 판소리를 정립한 신재효와 그의 여제자인 진채선도 운현궁에서 소리를 기가 막히게 불러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 사진이나 그림으로 봐도 알 수 있듯이, 카리스마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를 한번 본 영국인 기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표정과 생명력과 정력, 연로했음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눈빛과 위엄이 넘치고 원기왕성한 제스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기록했을 정도. 그 외 많은 화가들도 운현궁에 드나들었고, 심지어는 남사당패까지 운현궁으로 불러들여 공연을 감상하기도 했다. 이 당시 남사당패에 '바우덕이(한자로는 김암덕 金巖德)'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유일한 남사당패 꼭두쇠(남사당패 대표쯤 된다)로 5세 때부터 남사당패에 들어가 뛰어난 기예로 유명했으며, 경복궁 중건 현장에서 공연한 후 흥선대원군이 당상관 벼슬의 인물들이 쓰는 관자[56]인 옥관자를 내려주기도 했다. 이후로도 1860년대에 전국을 돌며 리사이틀 공연을 펼쳤으나, 불행하게도 1870년에 23세로 폐병으로 요절했다.
  • 대원군으로 실권을 잡기 직전부터 '천하장안(천희연(千喜然), 하청일(河淸一), 장순규(張淳奎), 안필주(安必周)의 성을 딴 것)'이라는 중인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닌 것으로 유명하며, 대원군이 된 이후에도 흥선대원군의 심복으로 활약했다.
  • 의정부 경전철 흥선역은 흥선대원군의 군호인 '흥선'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역 주변에 흥선광장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역 주변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직곡산장 터가 있기 때문.
  • 개화를 막으려 했다는 행보로 유명하기 때문인지, 현대에는 주로 주변과 달리 유행에 적응 못하는 이들을 까거나 셀프 디스하는데 사용되는 별명이다. 즉 대놓고 나쁜 의미라는 것.

6.1. 석파란(石坡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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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그린 묵란(墨蘭)
당대 명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에게 직접 배운 을 잘 그렸다고 하며, 붓을 세 번 틀어 잎을 그리며 그 끝이 쥐꼬리처럼 튀는 특징이 유명하다. 흥선대원군이 친 난초를 따로 일컫는 말로 그의 호인 '석파'를 따서 '석파란'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동명의 소설도 있다. TV쇼 진품명품에도 가끔씩 나온다. 물론 위작으로 밝혀진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이걸 반영해서 '난을 치는 흥선대원군'은 사극이나 소설, 기타 창작물에 등장하는 대원군의 필수요소. 특히 심기가 불편하면 화로에다가 잘못된 난을 불태우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특히 실각 후 청나라에 잡혀가 있을 때 난을 치며 소일했기에 청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퍼져, 청나라 사람들도 석파란을 많이 받아갔다고 한다. 의외로 진품 석파란은 중국에 더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위조작이 많다고.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을 벌기 위해 일부러 그린 가짜도 있다고 한다.[57] 이때 석파란을 위조한 사람 중에는 오세창 같은 저명 인사도 있었다고 한다.

오세창은 자신의 그림을 추사 김정희의 것으로 위장해서 판 적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오세창의 석파란 위조설은 이것과 관련해서 제기된 설이다. 오세창은 추사의 그림이나 글을 위조하는 데 특히 뛰어났다고 알려졌는데, 흥선대원군은 추사의 제자였기 때문에, 추사 그림의 특징을 잘 이해한 사람이라면 쉽사리 위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당대에도 하도 난초 쳐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귀찮아진 번거로워진 대원군이 자신과 함께 추사의 그림을 배운 사람들을 시켜 난초를 치게 하고, 낙관만 자기 것으로 찍어서 내준 적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석파란이라 알려진 작품이었는데 조사 결과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따른 화가들인 노천 방윤명(1827년 ~ 1880년)이나 소호 김응원(1855년 ~ 1921년) 등이 친 난초고, 낙관만 대원군 것으로 밝혀진 그림도 적지 않다.

특히 방윤명에 대해서는 《홍약루속회인시록(紅藥樓續懷人詩錄)》에도 "방윤명은 난초 외에 매화도 잘 그렸으며, 묵란화가 대원군의 화법과 유사하여 대신 그려주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오세창 역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석파 노인이 국정을 맡고 있을 때 난초를 그려달라고 하면 노천으로 하여금 대신 그리게 했다. 노천이 그 필체를 꼭 닮아 세상에서 구별할 수 없었으니, 오늘날 석파란이라 유행하는 것은 이 사람이 그린 것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응원의 경우는 출신 배경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대원군의 종자였다는 설도 있다.

인물은 인물이었는지, 당시 외국에서도 제법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선의 정치가였던 셈. 외국인들의 평가를 대충 종합해 보면, 과격, 완고, 보수적이지만, 투쟁적이고 카리스마를 갖추었으며 능력도 있었던 정치인 정도로 귀결된다.
한편 청의 실권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의 보고서는 임오군란(1882년) 직후에는 '그의 성품이 간교하고 포악하다'고 했다가, 2년 뒤 갑신정변 직후에는 '조선인은 모두 문약하나 이하응만은 효웅(梟雄)이다'라거나 '그의 재기(才器)는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극찬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나 외국 사신들의 기록에 의하면, 키는 작고 얼굴은 얽었으나 그 목소리나 품행이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평했다.

미국인 선교사로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흥선대원군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석파(대원군의 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항상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아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대원군이 사망하자 당시 주한 미국 공사였던 알렌은 국무장관에게 한 보고에서 대원군을 이렇게 평했다.
대원군은 잔인하고 배타적이었으나, 항상 자기 나라에 대해 정의와 진실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인들과 손잡고 왕비를 시해할 때까지 그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국민 대부분은 그가 다시 권좌에 오르기 바랐습니다. 최근에 그의 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이 사망했는데, 이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898년 미국의 언론지인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에서는 "강철같은 의지와 확고한 목표를 가졌던 인물"이라고 했으며, 역시 미국의 언론지인 《보스턴선데이포스트(Boston Sunday Post)》지에서는 대원군을 가리켜 "철석(鐵石)같은 인물(Bowels of iron and heart of stone)"라고 묘사하고 있다.

황현은《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대원군 이하응은 10년을 집권하는 동안 공과가 반반이었다. 갑술년 이후 명성황후와의 사이가 날로 악화되어 여러 차례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10여 년간 두문불출하는 동안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뭇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번번이 좌절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경륜이 쌓여서 이름이 외국에까지 알려졌으며, 조야(조정과 재야)가 그를 대로(大老 : 나라의 원로, 큰 어르신)로 의지했다. 그가 죽자 모든 사람들이 다 슬퍼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대원군을 매우 고평가했다.
확실히 여러 기록으로 미뤄 보면, 당시 백성들에게 '운현 대감'은 그야말로 애증이 교차하는 존재였던 듯하다.

7. 창작물에서

구한말의 어마무시할만큼의 주요 역사 인물이자 뜨거운 감자이기도 한 인물인데, 정작 사극 드라마 등의 미디어에선 단 한 번이라도 '정식 메인 주인공'으로서 발탁된 적이 없다.

7.1.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크게 새로운 해석 없이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에서 해석하는 대원군으로 묘사된다.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상갓집 개나 파락호로 불리며 경제 기반까지도 안습인 막장 생활을 한 것까지는 아니고 오히려 경제 기반은 나쁘지 않은 정도였으며, 철종 때까지만 해도 신중히 처신하다가 집권기 직전인 철종 말년에 세도가에게 돈을 빌리거나, 관직을 청탁하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과 어울리는 등 야심을 감추기 위해 체면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했던 정도로 설명한다.

집권 후에도 대원군을 묘사한 드라마 같은 여러 매체처럼 전면에 나서 국무회의를 주도하는 식의 묘사가 아니라, 신정왕후(조 대비)와 고종의 배후에서 흑막스럽게 정국을 움직이며 개혁을 실행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대원군의 개혁 정책에 대해서는 왕정 시대의 정치 개혁가로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계도 설명하고 있고, 민심의 이반이나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어서 실각한 것이 아니라 대원군 실각의 원인은 왕조 국가의 기본 명제인 '권력의 중심은 왕'이라는 명제를 너무 가벼이 봤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묘사되는 대원군은 전면에 나서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흑막형' 정치인.

마지막권인 20권에서 박시백이 대원군에 대해서 내리는 총평은, 그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 지도자였으며, 그랬기에 권력을 원했다. 실각 후의 각종 쿠데타 시도와 권력욕에 대한 비판 역시 하고 있지만, 아들이나 며느리에게 그가 내린 짠 평가와 비교해 보면 전체적으로 아주 훌륭한 찬사에 가깝다. 차라리 아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 왕이 되었으면 좋았으리라라는 평가도 내린다.

네이버 웹툰 한섬세대에서는 시대적 배경이 (신)안동 김씨 세도 정치기라서 파락호로 살고 있으면서, 주인공 한섬을 곤경에 빠뜨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섬에게 세상 물정을 알려 주면서 결과적으로 한섬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인물. 갱생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한섬을 눈여겨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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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일본 만화에도 등장한 전력이 있다. 바로 에가와 타츠야의 《러일전쟁 이야기》에서 등장.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조선이 제법 다뤄지고 있고, 그 속에서 대원군도 등장한다. 여기서 묘사되는 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모토로 하긴 하지만, 카리스마 있고 성질 있으며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인. 하지만 번역은 오경화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는 카츠 카이슈의 입을 빌어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된다. 일본 공사관 무관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공작에도 무응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지친 나머지 조선을 넘보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만다. 결국 역사대로 갑오개혁 주도를 위해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꼭두각시로 내세워진다.

카카오페이지의 웹툰 요괴난전에서 등장하며, 명성황후의 계략에 빠져 권좌에서 물러나 있지만 다시 재기를 노리며 명성황후와 싸우고 있다.

7.2. 소설

김동인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야담(야사)들을 바탕으로 《운현궁의 봄》이라는 전기적 역사 소설을 쓰기도 했다. (대체역사소설이 아니므로 오해하지 말자.) 야담을 기본으로 쓴 소설이기 때문에, 고증은 당연히 개판이다. 하지만 김동인이 쓴 역사 소설 중에는 그나마 읽을 만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내용이 흥선대원군의 진짜 삶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흥선대원군 관련 책은 대부분 이 책의 내용을 따서 쓰고 있다. 《운현궁의 봄》에 등장하는 흥선대원군은 와신상담이 뭔지 보여주는 인물인데, 왕위를 되찾기 위해 견제 세력에게 숙청당하지 않도록 백수 건달 행세를 하며, 양반들의 다리 밑으로 기어가는 등의 굴욕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채하며 집에 와서는 굴욕의 쓴 눈물을 삼킨다. 그러다가도 불의를 못 참으면 위엄 넘치는 일갈 이노오오오옴!! 을 내리고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난봉꾼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카리스마 폭풍간지의 인물로 그려진다.

사실 듣보잡이나 흑역사에 가까워서 그렇지, 김동인은 《운현궁의 봄》 외에도 《교상(橋上)의 국태공》과 《젊은 그들》이라는 두 편의 흥선대원군 관련 소설을 썼다. 전자는 임오군란 직후를 다룬 작품이고, 후자는 청에 납치되는 대원군을 다룬 작품이다. 특히 《젊은 그들》의 일부 대목은 1980년대까지 출판된 대원군 위인전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올 정도였다.[58]

대체역사소설에서 이 시기를 무대로 할 때는 주인공을 도와주는 역을 많이 한다.

한제국건국사에서도 등장하며 권철상 일행을 도와 조선 내부의 개혁을 이끌며 대등한 개항을 준비한다. 물론 정치 싸움 도중에 어쩔수 없어서 제거하려고도 했지만....[59] 흥선대원군이 없었다면 권철상 일행이 큰 역할을 맡을수 없었을 테니 이것도 참작이 되는 행동. 2부 말미에서는 일부러 권력을 내세우며 오만하게 구는데, 이는 자기가 스스로 물러나면 오히려 아들이 제대로 왕권을 행사 못할 것이니, 자신을 스스로 축출하여 왕의 권위를 세우라는 깊은 뜻. 그러나 3부가 출판되지 않아보여서.[60]

<봉황의 비상>에서는 조기 개항으로 부강해진 조선의 위치를 다지기 위해 1부, 2부에서 청나라일본을 상대로 차례로 전쟁을 벌인다. 2부에서는 서구 열강의 요구로 헌법을 준비 중인데, 당초 관선 의회를 설치하는 안에서 사실상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가는 안으로 선회하려 한다. 이는 섭정이 끝나고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인 황제가 미덥지 않아서기도.

대체 역사 소설 《상왕 흥선》에서는 미래의 대학 교수가 사고를 당해 영혼째로 타임슬립, 열병에 걸려 죽은 진짜 이하응의 몸에 빙의해 조선의 현 상황을 파악하고 상업의 길을 가면서 동방의 로마 제국과 비슷한 위치로 조선을 만들게 된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상당한 권력욕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왕이 되면서 바뀐 아들(?)과 서로 협력과 견제를 오가며 암투를 벌이게 된다.
아들에게 밀려난 후 미국 캘리포니아를 방문했는데... 자신을 환영하는 아시아계 주민들에게 감명받은 후 캘리포니아에 정착을 결심한다. 이후에는 마피아 보스로서 자신의 세력을 키울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웹소설 임금님의 첫사랑에서는 여주인공 박선영의 첫사랑이며, 그녀를 '추선'이라 부르며 짝사랑하는 조력자로 나온다.

7.3. 사극(드라마,영화)

사극의 단골 등장 인물들 중 하나. 흥선대원군 역은 선악의 구도를 떠나, 대부분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로 묘사되게 마련이다.

흥선대원군을 연기한 배우들
파일:청일전쟁과여걸민비 김승호(흥선대원군), 최은희(명성황후).jpg
못된 콧수염 뚱보. 동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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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영균(1928년생) - 영화 《대원군》- 신상옥 감독작. 1968년 작으로 여기서 대원군은 노골적으로 박정희를 모델로 했다. 단 친정부 영화는 '절대 아니고' 당시 야권(민주화 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찬사를 보냈다는 평이 있다. #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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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재 - KBS 《풍운》
    이순재는 흥선대원군 역을 연기 인생에서 제일 인상 깊은 배역이자 또 한 번 연기하고 싶은 배역이라고 회고한 바 있으며[62], 이 드라마 자체를 '양질의 드라마'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대원군이 공식 석상에서 스스로를 '여(余)'라고 칭한다.
  • 김흥기 - KBS 《바람과 구름과 비》

    • 방송 기간 : 1989년 10월 9일 ~ 1990년 3월 29일. 조선왕조 5백년 대원군 편보다 먼저 방송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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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흥선대원군과 비슷한 외모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베트남 관복 복장
파일:명성황후 유동근(흥선대원군).jpg 파일:명성황후 유동근(흥선대원군), 최명길(명성황후).jpg
최명길》과 《리턴 매치
여담으로 입버릇이 종종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를 입에 늘~ 끼고 사신다.
유동근은 이 작품으로 2002년 K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1997년 용의 눈물태종 이방원 역할로 받은 연기 대상에 이어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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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흥선대원군 중에서 제일 잘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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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스터 션샤인 최종원(흥선대원군).jpg

8. 낭설 및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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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삼일절에 양상현 교수가 공개한 '그리피스 컬렉션'에 실린 대원군 추정 사진.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찍은 사진이라고 하나, 그 신빙성은 의문시된다. 당시 시대상황 상 당연히 조선인이 찍었을 리는 없고 필히 서양인의 손을 빌려 찍었을 텐데,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분위기 속에서 서양인이 과연 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사진 속 인물의 흉배는 대원군이 사용한 기린 흉배가 아닌 쌍호 흉배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사진에 관한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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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으로 알려진 사진.
이 사진의 주인공은 흥선대원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관복이나 목에 걸린 훈장 등으로 보아 사실은 프랑스에 간 베트남의 관료 반청간(潘清簡, Phan Thanh Giản)의 사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베트남사 전공 최병욱 교수는 베트남 관복은 맞지만, 반청간은 확실히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원군은 비교적 근대의 인물이라 사진이나 초상화도 제법 남아 있는 편인데, 위 사진과 현존하는 대원군의 사진이나 초상화들을 비교해 보면 사뭇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해당 관복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阮朝, 1802년 ~ 1945년) 시기의 관복이다. 응우옌 왕조가 들어서기 전의 후 레 왕조(後 黎朝, 1428년 ~ 1788년) 관복의 경우 명나라 관복을 토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 관복과 매우 흡사했지만, 19세기 들어 베트남의 관복은 사진과 같이 관복에 금실을 넣는 등 기존 관복에서 크게 변화하였기에, 조선의 관복과 매우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관복을 포함하여 1,000년 동안의 베트남 복식의 변천 과정을 그린 그림을 보면 맨 오른쪽 위에서 두 번째에 흥선대원군의 관복으로 잘못 알려진 문제의 그 관복이 있다.

하지만 저 옷이 왠지 위엄도 느껴지고 뽀대나 보이는 건지, 최근까지 사극이나 개화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속 재연극 등에서 흥선대원군은 저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찬란한 여명》이나 EBS 다큐멘터리 《개항과 전쟁》에서도 그랬다. # 《명성황후》에서는 검은색 바탕에 황금 용이 수놓아진 옷을 입고 등장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저 위 사진에 나온 것처럼 익선관까지 쓰고 나온 적도 있다. 《닥터 진》에서도 명성황후에서와 비슷하게 검은 바탕에 황금 용을 수놓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잘못 알려진 베트남 고위 관료의 사진에서 비롯된 오류이므로 전부 잘못된 것.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고 국가 기밀 유출이라며 판과 지도를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말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지금도 그 목판과 지도가 잘 남아있다. 고등학교 국사 책 표지에 있는 지도가 무엇인지 잘 한 번 살펴보자.

9. 관련 항목

10. 기타


11. 둘러보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조선의 대원군
덕흥대원군 이초 정원대원군 이부 전계대원군 이광 흥선대원군 이하응
파일:Unhyeongung_Ihwamun.png 운현궁의 역대 주인
운현궁 역사 시작 1대 흥선대원군 이하응 2대 흥친왕 이재면


[1] 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한 곳으로, 지금의 서울디자인고등학교와 동도중학교 운동장 부지에 걸쳐 있었던 99칸의 대저택이었다.[2] 고종의 법적 아버지는 문조(효명세자)이다.[3] 최종적으로 왕으로 추존된 정원군을 제외하면 3명. 흥선대원군도 대원왕으로 추존되긴 했지만 이 땐 황제국 체제였으니 정원군처럼 국가 원수로서의 왕과 같은 반열이라고 할 순 없다.[4] 친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혈연상으로 보자면 인평대군의 장남 복녕군, 복녕군의 차남 의원군, 의원군의 아들 안흥군, 안흥군의 아들 이진익, 이진익의 차남 이병원, 이병원의 차남 이구가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어 남연군이 되었다.[5] 현종과 숙종 두 왕이, 적자는 물론, 서자인 (장성한) 남자 형제마저도 없는 사실상 외동아들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여자 형제는 다소 있었다지만. 거기에 경종의 생식 불능,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요절,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의 요절,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요절까지(...)[6] 더 밑에 남동생은 용성대군이 또 있긴 한데 5살 때 요절했다. 당연히 후손도 없다.[7] 철종 시기의 왕족들은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후손들이었는데 은언군의 후손은 종손(宗孫) 익평군과 전계대원군의 가계를 이을 영평군 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자식이 없어 입양을 했는데 익평군은 덕흥대원군의 후손을, 영평군은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을 들였다. 은전군의 가계 역시 입양으로 이어졌는데 역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었다. 즉, 실제 혈통 상으로는 인평대군의 후손인 은신군의 가계가 왕통과 가장 가까웠다.[8] 특히 이재면의 아들로 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겉보기와는 다르게 실제로도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준용은 대원군이 수차례 일으킨 쿠데타 음모 중 마지막이자 가장 끈질기게 다음 보위를 노릴 대상자로 꼽혀서, 명성황후 등에게 여러 차례 목숨을 위협받았다. 그래서 일본으로 상당 기간 도피해서 살았고, 그 스트레스와 대원군의 장손이자 왕의 큰조카라는 입장이 이용당해왔던 것에 대한 환멸감이 심한 나머지 오래 못 살고 죽었다.[9] 일찍 죽은(막내 흥선군이 채 10살도 되지 않았던 때에 사망했다.) 맏형 흥녕군은 제외다. 사실 둘째 형 흥완군도 40살을 못 넘기고 일찍 죽었으니, 기실 셋째 형과의 악연이 제일 길었다. 대원군은 흥인군이 욕심 많고 무능해서 싫어한 듯. 극단적인 예로 임오군란 당시 난을 일으킨 구식 군대와 민중이 민씨 일파에 붙어먹은 이최응을 죽이면서도 흥선대원군에게 기댈 정도였다.[10] 참고로 이는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 + 大)'이며 철종은 왕이 된 이후 원범에서 '변(, + 弁)'으로 개명했다. 은전군의 양손자 역시 초명은 '병(, + 丙)' 이었다가 '승응(( + 升)應)'으로 바꿨으며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 + 羲)'였고 철종의 큰 형인 회평군도 원래 이름은 원경이었는데 '명(, + 月)'로 고친 것이다. 영평군 역시 원래 이름은 '욱(, + 立)' 이었다가 후일 '경응(( + 京)應)'으로 개명했다.[11] 게다가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동생(처남) 민승호가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갔다.[12] 따라서 명성황후 - 여흥부대부인과 흥선대원군은 민씨 집안 기준으로는 서로 14촌 남매가 된다(...)[13] 정작 대비들의 상당수는 문정왕후를 포함해서 수렴청정 끝난 다음부터는 정치에서 물러나기 때문에, 이후 행적의 공과는 국왕에게 돌아간다. 여왕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는 문정왕후도 수렴청정 거둔 뒤에는 정치에 공식적으로 개입한 흔적이 없다. 진짜 예외라면 친정가면이 몰락하거나, 몰락한 친정가문의 복권 때문에 호소를 하는 사례 정도이다. 예를 들면 경신환국으로 친정이 망할 지경이 되자, 상황을 뒤집어 엎은 명성왕후가 대표적인 예인데 이 때 명성왕후는 자살 드립까지 쳐야 했다.[14] 실제로 일본학계에서 정체성론 드립칠 때, 이걸 써먹었다. 세도정치헤이안 시대에 가져다 붙인 것은 무리수였는데, 흥선대원군을 인세이에 두면서 그 배경을 헤이안 시대에 이어붙였다.[15] 흥선대원군은 왕족들에게 직부전시를 실시해서 무리하게 자기 측근세력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고종은 대부분의 왕족도 배척해야 했고, 결국 고종 직계를 제외한 대부분 조선 왕족들은 모두 친일파로 넘어갔다.[16] 영조 때도 서원 일부를 폐쇄한 적이 있고, 군포 부담이 과중하다하여 균역법을 실시한 적이 있다.[17] 참고 : 이재은, 구한말 근대적 지방재정제도 도입 과정에 관한 연구, 2014년[18] 물론 1860~1870년대의 조선은 문호 개방 이전이라 상호간에 사신이 오간적도 없었고 당시의 서양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도 청에서 들여온 서적정도가 전부였다는걸 감안해야 한다. 본것도 아니고 자료도 없는데 잘 알수가 있긴하나[19] 실제로 해당 설명은 쓰시마 해적과 유사하다.[20] 에도 막부조차 임진왜란 직후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쇄국을 할지언정 서양과의 교역 항구는 지정하여 제한적으로 유지했고, 그 덕분에 증기 동력선의 존재를 일찍 확인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일본은 1853년 쿠로후네 사건 직후 자체적으로 증기 동력선을 모방 건조하기 시작했고, 겨우 40년만에 양적 팽창을 지속하던, 수치로도 외견상으로도 압도적이던 청나라를 패배시키고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거듭났다. 메이지 유신 전부터 일본이 증기선을 모방 건조 했다는 것은 민간 차원의 교류도 기술 혁신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고, 16세기 이후의 세계사에서 적당한 개방과 소통이 국가 운영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를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이다.[21] 조선은 이장손이라는 장인에 의하여 매우 혁신적인 포탄인 비격진천뢰를 실전에서 사용하였는데,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에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낸 것보다 무려 2세기 앞선 것이었다. 비격진천뢰에 영감을 준 진천뢰라는 무기는 투척식 폭발탄으로서 출현 시기가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지만, 이것을 포탄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문제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런 혁신적인 무기들을 발전시키지 않았다![22]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무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구식 무기가 편해 계속 사용하던 역사적 사례가 있듯이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도 신식 무기를 사서 쓰고 싶지만 훈련도 훈련이고 무엇보다 구식 무기로 계속 훈련해왔던 조선군인데 갑자기 신식 무기로 쓰라고 하면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거기다 흥선대원군 시기는 갑작스러운 급개혁을 추구했던지라 무기까지 새로 바꾸어 훈련시킬 여력이 없었다. 당장 양무운동 사건처럼 무기를 제대로 갖추었다 한들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무기는 그저 장신구일 뿐 구식 무기만도 못한다.[23] 당장 문을 곧장 개방한다고 해도 그 나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야 나중에 어떤 외교사항을 내밀때 이걸 대처할 수 있다. 외교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상당히 복잡하다. 거기다 국제 정세랑 상대가 원하는 것과 자신들이 손해보지 않는 등의 일종의 사업관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군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척화를 했던 조선이 갑자기 개방한다해도 지식이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흥선대원군일지라도 조선은 내내 척화정책 때문에 서구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었다.[24] 무기 사온 것이나 전기회사 만들고, 전철 깐 것 등을 고종의 취미 수준으로 취급된다.[25] 조선시대는 지방군의 상당수는 중앙에서 봉급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돈 벌 수단을 마련해줬다. 한양의 군대는 난전을 벌였고, 강화도 군대는 한강으로 올라가는 배들에게 통행세를 받아서 실질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게 경강수세이다.[26] 그러나 더 문제되었던 것은 당연히 세도 정치와 각 지방관료들의 부정부패였다. 거기다 고종과 명성황후도 세도 정치를 부활시켜버렸기에 정치가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고 가뜩이나 어려웠던 군비지급이 임오군란 계기 때 폭발한 것이다.이래저래 부정부패가 가장 문제다.[27] 돈이 지나치게 많이 풀리면 어떻게 되는지는 초인플레이션, 통화위조죄 등 문서를 참조.[28] 토지에 붙는 추가적 세금이다. 토지 1결당 100문을 더 걷었다. 이건 그냥 증세다. 토지세가 결국 하층 농민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거야 새삼스럽지도 않고.[29] 좀 쉽게 설명하자면 내가 금, 은, 구리를 가치있게 생각하는 만큼 남들도 금, 은, 구리를 가치있게 생각했기 때문이란 거다.[30]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있다. 금융시장의 성장은 계속되었으나 실물시장(대표적으로 부동산)은 성장이 둔화되거나 오히려 축소되고 있었고, 그 결과 거품이 발생하게 되어 거품이 사그라들자 다 폭삭 주저앉아버린 경우이다.[31] 화폐의 고정적 가치를 담보할 수 없다는 뜻.[32] James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202.[33] 황현은 정부 관료도 아니고, 경제적 지식은 더더욱 없다. 있는 지식이라고는 대원군 집권기에는 정부에서 큰 공사도 벌이고 이것저것 했는데도 문제가 없더니, 고종이 친정하더니 돈 없다고 난리더라는 것뿐이었을 것이다.[34] 여기에 명성황후가 진짜로 사치를 하긴 했으니 의심 수준이 아닌 확증으로 굳어져도 별로 이상할 일은 아니다.[35] 다만 대동법 같은 경우 당시 운송 수단의 한계로 인해 오히려 수량이 맞지 않으면 다시 올려야 했기 때문에, 운송하는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점의 측면이 크다.[36] 사실 지금도 재벌들의 자제의 병역기피가 뜨거운 감자이며 미국도 옛날에 전쟁에 군대에 가서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매도하고 비난했다는 점을 봤을 때, 옛날이나 지금이나 상류층의 병역의 의무에 대해 대단히 민감했다는 점을 알수 있다.[37] 물론 조선 조정이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내지 않게된 것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도 있고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도 있다. 중요한건, 조선 조정은 통신사를 통하여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1590년의 통신사를 통하여 전국시대가 막바지에 이르는 것을 보고받은 선조는 비록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류성룡과 본인이 직접 파격 인사를 통하여 이순신과 이억기를 남해안에 배치하여 전력을 크게 보강하는 등, 주도권을 쥐고 있던 남인들의 안일한 주장에도 남인의 의견을 헛되이 흘려듣지 않고, 후일 나라를 구하는 이순신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을 재배치하여 완전히 망할뻔 한 상황을 피했다. 원균 등의 치명적인 인사 실책도 있었으나, 다행히 이순신의 능력이 천행에 가까웠던 덕분이었다. 일본은 정권을 잡은 막부가 조선의 통신사를 맞았는데, 당시 명을 거친 조선의 (최신) 문물을 소개받거나 값진 소정의 선물을 받고 막부의 권위를 높이는 정치적 도구로 상호가 이익을 취했기 때문에 이런 외교 행사는 영조 재위 1763년까지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고, 대마도에서 끝나버린 순조 재위 1811년의 통신사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많은 비용이 들었기에 자주 이루어지진 않았으나, 주변국의 정세를 살펴 평화로운 치세를 도모하려는 기본적인 개념은 탑재하고 있었던 조선 조정도 세도 정치가 극에 달하여 권력 다툼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않으려 한 것은 사실이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이후에도 이런 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38] 다만, 진산 사건과 백서 사건 때문에 정조 때 꽃 피우던 실학과 천주교의 사상이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이건 그들의 자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 이것 때문에 조선은 한 동안 척화와 천주교 박해라는 폐쇄 정책이 펼쳐졌고 만일, 이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적어도 개화를 할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역사는 만약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적어도 조선의 개화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든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39] 당장 단발령을 시행하려고 하자 조선 백성들이 반발했다거나 화장을 거부하는 등의 사례를 보면 근대화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40] 물론, 광해군은 겉으로는 중립외교였지 사실상 속으로는 명과는 친하면서 청을 서서히 압박하는 식으로 후미를 위협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광해군참조.[41] 거기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서로 둘 다 기득세력 층과 맞서는 정치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물론, 조선의 이익을 위해서. 광해군은 중립외교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저 야만족 청나라보다는 계속 동맹이었던 명이 낫지."라는 생각에 청나라한테는 아무 탈없이 지냈지만 북방에 군사를 주둔시키며 후미를 위협했고, 흥선대원군도 초기에 프랑스 선교사와 정치적으로 손을 잡으려던 시도가 있었다라는 야사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기에 충분했지만 두 사람의 판단은 거의 국제 정세상으로는 현명한 판단이었고 당시 군사제도가 엉망인 조선 입장에서는 현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해야 했었다.물론, 실패했지만(...)[42] 다만 조 대비가 안동 김씨를 멸문시키고 풍양 조씨의 세도화를 바랬다는 건 야사에나 나오는 낭설일 뿐이다. (신)안동 김씨는 약 60년간 정권을 잡았는데 이때 일어났던 폐단은 한둘이 아니다. 이걸 몽땅 다 까발린다면 당연히 (신)안동 김씨는 직격타를 맞고 몰락할 수밖에 없다. 지방 관리의 경우엔 안동 김씨라는 이유로 된 경우엔 물러나야 했다만 핵심 인사들은 안 그랬다. 이게 흥선대원군이 그러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부인 흥선대원군보다는 법적으로 완전히 왕의 어머니가(족보상 고종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갔는데 효장세자의 세자빈이 조 대비였다.) 나서서 (신)안동 김씨를 숙청하려 들면 별 도리가 없다. 왕실 서열로도 본인이 아래고 조 대비와 흥선대원군의 관계는 군신 관계였기 때문이다. 즉 조 대비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과거 일을 캐내어 (신)안동 김씨를 박해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것이다. 고종의 왕비를 풍양 조씨로 만들려고 했으려고 했다는 것도 억지다. 위와 같은 상황이 되면 힘센 외척 = 세도 정치 = 청산'의 등식이 성립될 만한 일이다. 어느 가문이 왕비 자리를 채우든지 흥선대원군의 경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그 시대를 살아서 폐해를 잘 아니까. 이런데 조 대비가 나서서 풍양 조씨를 왕비로 세우려고 한다고 치자. 중요한 사실은 풍양 조씨도 한때 (신)안동 김씨와 한편인 세도 가문이었다. 이리 되면 다들 "이거 (신)안동 김씨의 재림이네요?" 라고 할 게 뻔하다. 즉 조 대비가 나선들 풍양 조씨를 후보로 만드는 것조차 분위기 때문에 매우 힘들거나 불가능하다.[43] 단적으로 상단표에서 '이름' 대신에 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휘는 군주의 이름에만 붙이는 명칭으로 대원군에게는 해당 사항 없다.[44] 분열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극히 일부의 근왕파를 제외하면 흥선대원군의 파벌이 되었다. 대원군 집권 시기에 종친 우대 정책을 펼쳤던 것이 그 이유다. 대원군의 장남 흥친왕과 장손 이준용으로 대표되는 흥선대원군계 친일파는 '조선 왕실 = 친일'이라는 시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일부 근왕파를 제외한 집권욕을 가진 왕족들이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하다.[45] 그나마 다행이라 할만한 건, 백성들이 고종의 친정과 개항 이후 대원군을 그리워한 걸 보면 최소한 "아 그때는 좀 나았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어쨌든 조금은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 듯.[46] 네이버 지식 백과 독립신문 1897년 7월 31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265&cid=51385&categoryId=51385[47] 책의 완성 자체는 갑신졍변 이전에 되었다.[48] 그런데 이장렴도 전주 이씨, 그러니까 흥선대원군처럼 왕족이라는 점. 비록 흥선대원군보다야 왕위 계승권이 한참이나 멀고 먼 인물이지만.[49] 실제 역사에서 이장렴은 고종 즉위 직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강화유수, 진무사를 거쳐 형조판서와 금위대장(고종 6년)에 올랐고 종친직으로는 지종정령에 올랐으나 고종의 밤 행차 때 횃불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종 9년 파직되었다.[50] 참고로 이 이야기는 원래 미국이나 유럽 쪽 유머이며, 이게 대원군 일화로 알려져서 여기 적혔다는 것은 일화의 일부가 근대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 더해졌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51] 그런데 동일한 내용의 에피소드가 선조이항복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52] 해당 지역은 당시만 그런 게 아니라 오늘날에도 '배천'이라고 읽는 것이 맞다.[53] 땅바닥에 판을 그려놓고 돌, 풀잎, 나뭇가지 등을 말로 삼아 승패를 내는 놀이. 일반적으로는 작은 돌로 많이 하는 민속놀이다. 만약 노인이 고누놀이를 할 줄 알았다면 조선의 섭정 흥선대원군이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작은 돌멩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54] 이와 유사한 내용의 이야기가 또 있는데, 다만 대원군은 집주인으로, 노인은 나그네로 바뀌어 있다. 고누놀이를 할 줄 아냐고 묻는 것까지는 동일하고, 이후 답답해진 집 주인이 "그럼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요?"라고 묻자 나그네가 "밥은 먹을 줄 압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55] 황문을 항문으로 잘못 들은 척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똥구멍'을 한자로 '황문'이라 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누런 것이 나오는 문'이라는 뜻.[56] 망건에 달아서 당줄을 걸어넘기는 작은 고리. 사극 같은 데서 망건에서 관자놀이 부근을 보면 조그만 동그라미가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게 관자다. '관자놀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표현이다.[57] 이 경우 가짜인줄 알면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기 위해 모른 척하며 사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기당했는데 독립운동 자금 대주느라 그랬다고 자기 위로를 하는 걸 수도 있고.[58] 대표적인 게 금성출판사 《한국 위인전》[59] 결과적으로 제거는 안했다.[60] 공개된 3부 내용을 보면 아들은 그렇게 찾은 왕권으로 나라를 망칠 거라 결과적으로 실수가 될 일이 된다.[61] 광복 직후 데뷔했다. 《로맨스 빠빠》, 《시집가는 날》 등 출연. 원로 배우 김희라의 부친이다. 1968년 고혈압으로 별세.[62] 그리고 2019년 인간극장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흥선대원군 역할을 맡은 때 금연을 했다고 한다. 만조백관을 앞에 두고 4분간 몰아치는 연설문이 있었는데, 제대로 표현하려면 목에 불편함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흠좀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