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29 17:40:30

후이족

회족에서 넘어옴
파일:중국 원형.png 중국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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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족 축구 선수 우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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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족의 복식은 히잡과 모자 외에는 한족과 별 차이가 없다.

回族(후이쭈, 회족)

1. 개요2. 역사
2.1. 당, 송 시대의 해상 교역로를 통한 회족 유입2.2. 송, 원, 명 시대의 육로를 통한 회족 유입2.3. 청나라의 회민 반란2.4. 현대
3. 정의4. 풍속5. 중국 당국의 이슬람교 규제6. 문화7. 둥간족8. 인물

1. 개요

중국소수민족 중 하나. 중국 내 인구는 약 1058만명. 한족화되어 중국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다. 중국 대륙 뿐만 아니라 대만,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에도 소수의 회족들이 살며 중화권 외에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 등지에 약 10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데 이들은 둥간족(東干族, Дунгане)이라고 불리며 그들의 언어는 둥간어라고 하는데 중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자가 아닌 키릴 문자로 표기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회족이라는 개념에는 이슬람을 믿는 한족(한회, 漢回)과 중세 이후 중국 본토에 정착하여 한화된 무슬림들의 혈통적 후예라는 개념을 포괄한다. 조상이 무슬림이었지만 후손들이 이슬람도 믿지 않고 완전히 한화된 경우나 이슬람을 배교한 회족 같은 경우에는 회족으로 정해야 하는지 아닌지 논란이 많다.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이들은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중동으로 돌아갔다가 날씨가 풀리면 중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돌아올 회(回)’를 붙여 후이족으로 불리게 됐다는 가설도 있다. 현재는 후이족인지를 알려면 후커우(戶口·호적)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전체 후이족 중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은 전체의 34%에 불과하며 의외로 중국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특히 간쑤성섬서성, 허난성 일대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청말 회민반란 이후 회족 상당수가 죽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이후 현재는 중국 각지에 골고루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도시에서 도축업이나 소매업 관련된 사업을 운영하거나 택시 기사 등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소수민족으로 고위직에도 상당히 많이 진출해있으며 중국 역시 다른 이슬람 민족들과 다르게 이들에게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시행할 수 있도록 자치권을 부여하며 다른 무슬림 민족들과 다르게 이들은 중국 사법 체계를 자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부 모스크에서는 설교자이자 지도자인 이맘과 법원이 같은 중재 사무실을 이용하며 이맘은 샤리아법을 근거로 분쟁을 조정한다. 그런 곳에서 중국 사법 체계는 샤리아법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거나 조정이 실패한 경우에 한해서 개입한다.

사실 중국의 종교관련 법규에는 정부 승인을 받아 설립된 종교 교육기관 외에 각급 학교는 종교 행사를 열어서도, 종교과목을 개설해서도, 학생들에게 선교나 전도를 해서도, 신앙을 강요해서도 안 되는데 이들은 그런 법을 무시하고 그냥 하기 때문에 갈등이 좀 있다. 더구나 같은 민족이거나 해도 신도가 아니면 차별하는 이슬람 특성상[1] 무난하게 양립하기 힘든 점도 있다.

2. 역사

당나라 때부터 원나라 때까지 많은 유럽인들과 인도/중동인들이 회흘(回吃)[2] 지방을 건너와 정착하였다. 이러한 색목인들 중에는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자가 많았다. 이를테면 한때는 중국에 정착한 기독교인과 유대인도 회회인(回回人)이라 칭하였다.[3]

당, 송 시대에는 무슬림들이 주로 해상 무역을 하러 왔다가 중국에 정착했다면, 원, 명 시대에는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들이 회흘 지방을 통해 주로 감숙성, 섬서성에 정착했다. 재밌는 점은 이슬람 세계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대에는 중국 내 무슬림들이 무역업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고 시기,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나...[4] 이슬람 세계가 쇠퇴기에 접어든 시점인 청나라 시절에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대놓고 무시당했다는 점. 일례로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원나라에서 투항한 무슬림 관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주마 예배(이슬람의 금요일 합동 예배) 때마다 연설을 했는데, 이를 두고 청나라 시절 역사가들은 주원장이 사실 한족이 아니라 근본도 없고 무식한 회족이라고 날조를 시도했었다. 청나라 때 회족의 평판과 사회적 입지가 얼마나 낮아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청의 통치에 맞서 1862~1877년 회민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는데 이 와중에 중앙아시아 일대로 피난간 이들은 둥간인이라고 불리고 있다.

2.1. 당, 송 시대의 해상 교역로를 통한 회족 유입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무역 상인들이 6~8세기 무렵 중국의 행정력이 당시 잘 미치지 못하던 광저우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였다. 광저우를 통한 중국과의 해상 교역 루트는 곧 아랍인들에게도 알려졌다. 당나라 때 광저우의 유력자들은 대부분 아랍인 무슬림 혹은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상인 출신이었지만, 이들은 자기 고향의 부녀자들을 데려오는 경우는 드물었고[5] 대게 중국인이나 동남아시아인 현지처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광저우 루트는 이미 꽤 유명해서 탈라스 전투 때 아랍군의 포로가 되었던 중국인이 12년만에 이라크에서 광저우로 가는 뱃길을 이용해서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758년 10월에는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이끄는 동남아 출신 해적들이 광저우를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878년 황소의 난 때는 황소의 반란군이 광저우에 체류하던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12만을 죽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 수치는 광저우에 체류하며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통제를 받던 동남아인들까지 포함한 수치로 추산된다. 광저우가 파괴된 이후에는 푸젠성취안저우가 해상 무역 중심지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취안저우의 파르시와 무슬림 상인들이 당나라 남부의 해안 지대의 교역을 장악한 가운데, 신라인들은 황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했었다. 당나라 신라방에 정착한 신라인들과 페르시아인 상인들은 권위 있는 아랍, 페르시아 지리서에 신라가 여러 차례 언급된 것을 보면 상당한 수준이었던 듯 하다. 이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신라인들과 발해인들이 빈공과에 자주 급제했듯이 아랍-페르시아인 중에 능력이 유별나게 좋은 경우에는 빈공과에 지원해 급제하는 경우도 있었다.[6]
왕이 거둬들이는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향기 나는 풀이었다.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곤 했는데 마을마다 아주 높은 가격에 팔렸다. 이를 '차(al-sakh)'[7]라고 부른다. 세 잎 식물보다 잎이 많고 향도 약간 더 강하며 시큼한 맛이 난다. 중국인들은 물을 끓인 다음 잎을 뿌려 넣었으며 모든 병을 다스리는 데 썼다.
-『중국과 인도 여행기』[8]

회족들이 처음 중국에 정착하던 시기는 중국에서 차가 대중적으로 유행하게 되는 시기와 겹친다. 광저우의 페르시아인, 아랍인 상인들을 통해 차 문화가 중국에서 중동으로 직접 전파되었다.

송나라 때에는 광저우와 취안저우의 페르시아인, 아랍인 후손 대부분이 한화되었다 하며[9] 명목상으로만 무슬림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송나라의 해상 무역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있는 다른 페르시아-아랍 무역 거점들과 해상 교역을 지속하였다. 오대십국송나라의 황제들은 광저우와 양저우 출신 서역인 후손들 중에 미인이 많다고 후궁으로 선호하였다 한다. 당시 중국인들의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이해도는 매우 피상적이었는데, 심지어 메카를 붓다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한다던지, 메카가 불교도들이 1년에 한 번 순례를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등 잘못된 정보가 널리 퍼져있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광저우와 취안저우를 중심으로 한 해상 도시의 회족 후손들은 대부분 완전히 한화한 상태이다.

2.2. 송, 원, 명 시대의 육로를 통한 회족 유입

오호십육국 시대에 중국에 유입되던 서역인들이 대부분 불자였고, 당나라 때는 대부분 마니교 신자였다면 중세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가 가속화되면서 송나라 때부터 중국에 유입되는 서역인 중에 무슬림 비중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1070년대 요나라 기병에게 시달리던 북송에서는 당나라에서 중앙아시아 출신 사타족을 이용해 토번 기병을 제압한 사례를 기억해내고, 부하라 출신 무슬림 용병 5,300명을 고용했으며, 1080년에는 만여명을 추가로 고용하였다 한다. 당나라 때는 이슬람이 대식파[10]라고 칭해졌으나 북송에 부하라 출신 무슬림 용병기병이 도착한 시점을 계기로 이슬람을 회회교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다.

원나라 때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유럽에서 수십만명의 색목인들이 중국에 정착했는데, 이는 원나라를 지배층이었던 몽골인들이 중국인들을 불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색목인들은 불교처럼 이미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종교를 믿는 경우도 흔했지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유대교, 마니교, 이슬람을 아우르는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원나라가 망한 이후 무슬림들을 제외한 색목인들은 대부분 중국인과 동화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회족이 되었으며, 중국에 마지막까지 남은 네스토리우스 파 공동체는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인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면서 사멸했다. 일단 원나라 때 무슬림 의사, 천문학자, 역관, 관료 중 상당수가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관직을 보존했는데, 이들을 한꺼번에 다 죽이면 대체 가능한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11] 대신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들 색목인들은 무조건 한족과 통혼해야 한다는 법을 제정하여 한족화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들과 다르게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티베트 불교 승려들은 아예 적폐로 찍혀서 가혹한 박해를 받아 거의 전멸하였다.[12]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 부흥이 일어난 건 훗날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부터였다.

명나라 정부의 적극적인 쇄국 정책[13]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수의 무슬림 이주민들이 자신이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왕자 출신이라고 사칭하며 감숙, 섬서 지방에 난민으로 정착하였다.[14] 오늘날 회족의 유전자 조사 결과 이들은 서아시아인과는 별로 공통점이 없고 몽골계 무슬림 동향족, 튀르크계 살납족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것으로 나왔다.

이자성의 난을 일으킨 이자성이 한 번은 명나라 관군에게 크게 패해 같이 싸우던 반란군 대부분이 전사하자 그는 병력을 보충하고자 회족들에게 찾아가 반란에 합류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 때문에 이자성 반란군의 상당수는 회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자성 군의 상당수는 기병이었으며 보병들도 대부분 이동 시에 말을 타고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족 농민반란군 만으로 이렇게 기동성 있는 병력구성을 갖추기는 힘들었을 것이다.[출처]

2.3. 청나라의 회민 반란

회족들이 주로 정착한 감숙, 섬서 지역은 강남 지방이 경제적으로 계속 성장하는 것과 반대로 가뭄이 계속되며 극빈 지역으로 전락하였고, 이로 인해 감숙, 섬서, 영하의 회족들은 청나라 사회에서 사회, 경제적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하며 극심한 소외감에 빠지게 되었다. 북경, 남경 지역의 부유한 색목인 관료의 후손이었던 회족들 역시 절대다수가 도축업자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회족들은 청나라의 지배 계급 만주족에 대한 불만을 직접 표출하기 힘들자, 만주족들이 특히 열심히 믿던 불교에 대해 증오감을 대리 표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회족 전승 중에 불교를 비하하는 내용이 많은 것도 이 때문. 명나라 시절 정화를 비롯한 회족 상당수가 불교에 우호적이던 것과는 사정이 달라졌다.

18세기 후반 청 제국이 준가르 칸국을 정복하고서 준가리아 평원의 목초지를 농경지로 개간하는 식민 사업을 시행할 때 회족들을 동원했다. 주로 우루무치 근방에 정착한 회족 농민들이 경작한 농산물은 청나라 팔기군이 돈을 주고 구입하여 군량으로 활용하였다 한다. 당시 신장은 전통적으로 오아시스 도시의 황백혼혈 주민들이 거주하던 타림 분지를 중심으로 한 “회부”와 준가르족을 몰아낸 후 팔기군 가족과 회족, 위구르인 농부들이 식민 사업을 하던 북부 초원지대의 준가르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1761년 야르칸드와 카슈가르에서 공부하고 감숙성에 돌아온 회족 마명심은 급진적인 수피 신앙을 전파하다가 다른 회족 공동체와 싸움이 붙었다. 마명심을 따르던 소규모의 회족 공동체는 결국 1781년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당했으나 청나라 조정은 마명심과 사이가 나빴던 다른 회족들까지 같이 엮여서 탄압하고 처벌하면서 회족들의 불만이 가중되었다.

태평 천국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 토호들이 한족 농민들을 무장시키는 과정에서 감숙, 섬서 지방에서 회족 농민들과 한족 농민들간의 유혈 충돌이 점점 심해지다가 결국 1862년 회민 반란[16]이 일어났다. 그에 앞서 운남성에서는 판타이[17]들이 농민 출신 생원 두문수의 지휘 하에 이미 1856년 봉기하여 대리를 비롯한 50여개의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이른바 평남국을 건국한 상황. 섬서성의 회민 반란은 마명심의 후계자 중 한 명이었던 마화룡을 정신적 지도자로 삼았으며 신장의 팔기군 기지들로 향하는 보급로를 차단, 파괴하였다. 2년 후인 1864년에는 신장의 회족들이 1850년대 운남성의 회족들처럼 수천명 단위로 각지에서 집단 학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회족들이 대거 봉기하고 신장의 팔기군 요새들을 포위하였다. 회족들이 몽둥이와 식칼을 들고 팔기군 요새를 기어오르자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희망을 잃은 만주족 팔기군들은 대게 요새와 함께 자폭하는 방법을 택했다 한다.

회민 반란은 이른바 청나라 최후의 명장 좌종당에 의해 진압되었다. 좌종당은 자신이 훈련시킨 한족 사병들을 데리고 먼저 감숙, 섬서성의 회족 반란군들을 차례로 진압했다. 그는 회민 반란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마화룡과 그의 친지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였으나, 그 외에의 회족 지도자들은 사면하고 받아주었으며 오히려 적극 육성하여 이들이 청해성을 지배하는 군벌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2.4.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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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도스 시의 모스크
신해혁명후 마씨일족은 군벌로 성장하여 마가군을 이끌었고, 이들은 다른 군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지를 독립왕국 처럼 다스렸다. 하지만 이후 국민당정부에 복속했고, 국민당 정부의 편에 서서 이 근처로 대장정을 해온 홍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장궈타오가 지휘한 홍 제4방면군은 이들과의 전투에서 궤멸적으로 참패하고, 거의 전멸한 끝에 지휘부만 옌안에 겨우 도착한다.

공산당은 마씨일족에 반대하는 회민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들을 자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한족병사들이 회족 마을에서 이슬람 관습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여러 주의를 주었다. 1946년 이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회족군벌 마홍규가 지휘하는 마가군은 후쭝난군에 편입되어 공산당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지만, 이후 전세는 역전되었고, 회족군벌은 공산당에 투항하거나 대만으로 망명해서 거의 100여년간 이곳을 지배하던 마씨일족의 왕국은 해체되었다. 이후 마씨일족의 영지는 닝샤 후이족 자치구로 개편되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는 공산당의 정책 + 중국 내 반종교 정서로 문화대혁명 때는 심각한 수준의 박해를 받았었다. 지금은 그 정도만큼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에도 여러가지 제약이 따르고 있다. 지금도 닝샤나 간쑤에 가보면 가보면 모스크가 곳곳에 있고, 나름 기도시간마다 많은 신도들이 와서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중국 내 무슬림들이 해외와 교류하는 것을 상당부분 제한하고 있다.[18]

오늘날의 쿠란의 중국보통화 번역판이나 중국 내 이슬람교 교리는 이슬람과 중국 애국주의가 절충된 형태의 번역으로 되어 있다.[19] 학문적 입장에서는 논란일 수도 있겠지만, 반종교정서가 있는 중국에서 이슬람이 별문제 일으키지 않고 공존하려면 어쩔 수 없는 타협이기도 하다.[20] 일단 회족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중국인 및 외국에서 온 무슬림과 통혼한 한족으로 구성된 민족이기 때문에 일반 중국인 비무슬림들과 무조건 척을 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도 오늘날 중국에서 회족에 대한 인식은 의외로 별로 나쁘지 않은 편인데, 명장 바이충시가 중일전쟁에서 맹활약한 역사가 있기 때문. 중화 인민 공화국과 대만의 회족은 청나라 때보다는 회족에 대한 종교 차별과 억압이 줄었다며 비교적 만족하는 분위기이다.[21] 게다가 중국의 유명 축구선수 우레이, 장린펑 전 중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인 가오훙보도 회족이다. 오늘날 회족들은 한족에 비해 중국 내에서 학업 성취도가 비교적 떨어지는 대신에 주로 축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다.

3. 정의

일단 후이족이란 이슬람화된 한족으로, 한족과 섞여 살며 한족과 언어, 문화 면에서 공통되어 있지만 이슬람을 믿으며 이슬람의 영향을 크게 받은 문화와 풍속을 가지고 있어 별도의 소수민족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현재 회족의 후예 가운데는 이슬람을 믿지 않는 후이족도 있으며, 다른 소수민족 가운데 이슬람을 믿는 부족을 '너네도 회족'이라고 한데 묶어놓기도 한다.

회족과 위구르인은 양쪽 다 무슬림이지만 이 두 민족 사이에는 몇 가지 주요한 차이점이 있다.

첫째, 회족은 한족과 혼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당나라 때부터라고 한다.[22] 중세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은 중국에 가족들과 함께 이민 온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 이민 온 무슬림 남성들이 한족 여성과 결혼하면서 회족의 기원을 이루었으며, 이런 가정에서는 대부분 성으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름으로부터 취한 "마(馬)"씨 성을 택했다. 심지어 십회구마라는 말도 있다. 회족 열에서 아홉은 마씨라는 뜻. 회족이 당나라 때부터 중국 역사 속에 존재했다면 이슬람화한 위구르인이 중국의 지배를 받은 시기는 이보다 훨씬 늦은 청나라 때부터이다. 위구르인들은 한족과 혼혈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화된 문화도 적다.[23]

둘째, 모국어의 차이. 명나라 때부터 회족들의 모국어는 아랍어도 아니고 튀르크어이란어 계통의 언어도 아닌 중국어이다. 장기간의 혼혈과 통혼으로 중국 문화에 많이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까지 중국어를 아랍 문자로 표기하는 체계인 위구르어 표기보다 더 복잡한 아랍식 병음인 샤오얼징(小兒經)이 비공식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회족은 극히 드물며, 회족 절대 다수의 아랍어 그가 능력은 예배용으로 필수적인 기도문을 암기하는 수준에 머문다.

반면 위구르인들의 모어는 투르크어 계통의 위구르어로,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중국어와는 유사성이 없고, 같이 차가타이어족에 속하는 우즈베크어와 많이 비슷하다. 자세한 내용은 투르크어족 문서 참조. 그리고 어족 단위에서 별개의 언어로 분류되는 언어동조대 중에서는 아랍어나 이란어와 더 비슷한 편이다.

하지만 언어적, 혈통적으로 비슷해 보인다 할지라도 이슬람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확고해서 위구르처럼 분리독립운동을 일으키지 않을 뿐[24], 주류민족과의 갈등은 갈등은 여전히 무시 못할 수준. 현대 칭하이성과 같은 곳에서는 한족, 티베트족[25]과도 갈등이 있다.

중국에 정착한 유대인들도 회족이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회족의 몽골족 버전, 티베트족 버전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회족은 한족에서 나온 무슬림 종교, 민족집단이다. 이와 비슷하게 몽골계 민족중에는 보안족이라는 무슬림 민족이 있으며, 티베트에는 까체라는 무슬림 티베트인 집단이 존재하며 이들 역시 무슬림 상인의 후예다. 더 자세한것은 이쪽 참조

이러한 융화정책과 인종적 유사성으로 인해 중국 내에서 회족은 이슬람교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중국의 한 민족이 되었다.[26] 이슬람교가 주도한 둥간 혁명 등, 많은 억압과 학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결점을 찾아내 공존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타 소수민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민족이다. 이 때문에 중국 내의 할랄 푸드(무슬림들의 식문화) 생산은 대부분 회족이 담당하고 있다.[27]

한마디로 말해서 회족은 미국에서 유대인 비슷한 처지로서 특별한 종교를 믿는 중국인 정도로 보면 된다.

같은 종교를 믿는 위구르족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한 때는 신장에 독립왕국을 세운 야쿱 벡은 같은 무슬림인 회족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며 많은 회족을 죽였다. 심지어 청나라 좌종당군이 쳐들어오려 준비하는 와중에도 신장 북부의 회족들과 싸우는데 정신이 없었을 정도니...회족 군벌 마부팡이나 마중잉이 위구르족들을 탄압한 역사도 있었다. 종교 교파의 차이라기보다는...회족들이 결국은 유교 경전을 배우거나 군대에서 활약하는 등 중국과 타협을 선택한 반면, 위구르인들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들과 연대하면서 생겨난 차이이다. 그러니까 종교만 같을 뿐, 혈통과 문화도 다르고 동질감도 적다.[28] 민족감정을 배제한 종교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두 민족이 서로 교류하기도 한다.

회족과 위구르인은 서로 원수 지간으로 알려져있으나 일방적인 원수 지간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서로 어렵고 힘들 때 도와준 역사도 많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는 위구르인의 성지 순례를 사실상 금지하다시피 하는데, 후이족들이 여기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운남성과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무슬림인 판타이(Panthay)들은 같은 무슬림인 로힝야족과 원수 지간이다.

중국으로부터 독립성향이 가장 강한 티벳인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두 민족이 함께 분포하는 칭하이성에서는 폭력사태가 자주 벌어질 정도.

4.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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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족은 예배를 하루에 5번 드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금요일마다 모스크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수피의 영향으로 성자묘를 숭배하는 경우도 있으며, 관혼상제의 풍속은 이슬람을 따른다. 중국에 있는 모스크는 '청진사'로 불리며 건축 양식과 이슬람식 건축양식이 융화된 양식이다. 언어는 중국어를 쓰지만, 일부 아랍어, 페르시아어 어휘가 도입되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몇몇 만주족[29], 티베트의 까체, 파키스탄 길기트 발티스탄주의 티베트계·이란계 혼혈 발티인, 미얀마의 미얀마계·인도아리아인계 혼혈 무슬림과 함께 중국티베트어족 무슬림에 속한다.

또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서 이슬람화된 민족의 특성 때문인지 남성의 할례 문화가 있어 회족 남성은 다른 중국의 민족[30]과는 다르게 포경수술을 많이 받는다.[31]

그런데 회족 중에는 완전히 세속화되어 아예 무종교인이거나 이슬람교를 버린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은 한족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사실 이슬람 국가가 아닌 이상 할랄푸드를 지키는게 어렵기 떄문에 대도시에 나와 있는 회족 중국인 중에서는 명백한 돼지고기만 피하는 회족도 많다. [32]

청결을 중시하는 이슬람교 특성상 이들의 음식 문화는 위생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마치 미국에서 코셔 푸드가 안정성이 검증된 고급 식자재로 평가받는 것처럼 청진 요리도 안전한 중화요리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족은 야생동물을 즐겨먹는 관습이 있고[33], 이것은 SARS코로나19와 같은 질환의 원인이 되곤 하지만, 후이족은 이슬람 율법에 하람으로 규정된 개와 돼지는 물론, 박쥐, 설치류, 천산갑, , 사향고양이류 따위는 입에 대지 않는다.

한족이 즐겨 먹는 돼지고기는 이슬람 율법상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후이족은 쇠고기, 양고기를 즐겨 먹으며, 이슬람교 계율 대로 피를 완전히 빼서 먹는다. 명나라, 청나라 때 중국인들은 쇠고기 하면 후이족을 떠올릴 정도였다. 쇠고기와 양고기를 구하기 힘들고 돼지고기를 구하기 쉬운 지역(특히 중국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후이족들은 쇠고기와 양고기 대신 닭고기오리고기를 많이 먹는다.

또한 원래 물이 귀한 지방이 많은 중국은 씻는 문화가 그다지 발달되지 않았지만 이슬람교는 하루 5번 있는 기도 전에 반드시 손발을 씻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회족은 자주 씻는다. 또한 한족은 아무데나 침뱉기를 하지만 회족은 이슬람교 관습상 금기시되어 거의 하지 않는다.[34]

5. 중국 당국의 이슬람교 규제

이렇게 중국화된 회족이지만, 시진핑 집권이후 중국 당국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후이족에게도 전파될 것을 우려, 종교 통제를 더욱 강화한다고 한다. 일단 닝샤의 여러 곳에서 아라비아풍 모스크를 철거하고, 이를 중국 전통 양식으로 다시 짓게 했으며[35], 아동에 대한 이슬람교 종교 교육을 금지한다고 한다.# 회족이 위구르 족이나 다른 중앙아시아 이슬람계 민족보다 중국화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청나라 말기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기 때문에 중국 지배층의 전폭적인 신뢰는 얻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집권 이래 닝샤에서는 "불법적으로 증축된" 20여개의 모스크가 철거되었다고 하지만 웨이저우에 세워진 대모스크는 후이족의 항의 및 서방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로 법에 어긋난 부분만 철거하는 쪽으로 행정조치가 내려졌다고 한다.# 물론 위에도 말했듯이 중국정부는 이슬람교 건물만 콕 집어 탄압하는 것은 아니고, 기독교나 불교 건축물들도 정부 지침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철거한다.#

6.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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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문장을 한자 서법으로 쓴 후이족의 서예작품이다. 문장은 뜻은 "신께서 지식과 코란을 저에게 주심을 감사한다". 오른쪽 옆에 중국어로 뜻을 적어놓았다.

자기 지역의 요리할랄에 맞게 변형한 칭전 요리(清真菜) 문화를 발달시켰다. 중국 각지에 가면 회족식당에서 그 지방의 요리를 할랄 푸드로 만든 요리를 맛볼 수 있고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들도 회족의 요리를 맛보러 식당을 찾는 일이 많다고 한다. 대표적인 매뉴로는 우육면(牛肉面)으로 알려진 란저우 라몐(蘭州拉麺)이 있다.[36]

7. 둥간족

회족중에서 옛 소련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둥간족(东干族, Dōnggān zú)이라고 한다. 본인들의 명칭으로는 회족(Хуэйзў, Xuejzw).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코칸드 칸국에 의해 중국 서부지역에서 잡혀와 노예로 팔려온 한족들의 후예들로, 원래는 인구가 수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1862년 현재의 중국 간쑤성, 산시성에서 회민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청군의 진압을 피해서 중앙아시아로 도피한 회족 난민들이 합류하면서 수가 크게 늘었다. 둥간족은 현재 키르기스스탄에 6만여 명, 카자흐스탄에 3만여 명이 살고 있다. 현재 인구는 약 10만정도이다. 유명인물로는 시인인 야쓰얼 스와쯔(雅斯尔·十娃子, Ясыр Шывазы)가 있다.

한족의 중앙아시아 거주는 여러 사료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는데, 고창의 경우처럼 지배층인 경우도 있었고, 현장이 기록한 탈라스의 한족 농노들처럼 노예인 경우도 있었다. 원나라 때 도사 이지상은 타림 분지에서 한족 도사나 유생들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기록했다. 청나라 이전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한족들은 오이라트족들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노예가 된 후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포로들과 함께 농노가 되어 준가리아 일대의 오아시스 농장 경영에 투입된 후, 위구르인과 동화되었다.

8. 인물

혼혈인의 후손들이라 피지컬이 좋은지, 회족중에 축구인들이 많다. 연예계에도 회족이 상당히 많다.


[1] 단, 완전히 세속화되어 사실상 종교적 가르침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무슬림들은 당연히 예외다.[2]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3] 이를테면 기독교인은 십자회회(十字回回), 유대인은 남모회회(藍帽回回) 등등 회회 앞에 특징을 붙여 칭함.[4]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보면 중국에 정착한 무슬림 상인들이 대체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 평판도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5] 이들과 연관이 깊은 인도의 파르시들의 유전자를 조사해본 결과 부계 Y-DNA는 대부분 이란에서 기원한 것으로 나왔으나 모계 mtDNA는 6% 정도만 이란에서 기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페르시아인 입장에서 인도보다도 중국이 훨씬 더 이동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중국에 정착한 페르시아인과 아랍인의 성비불균형은 인도에서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6] 다만 신라인들과 발해인들이 빈공과를 거의 휩쓸다시피 한 것과 다르게 아랍-페르시아계 빈공과 합격자는 한두명 정도였다. 자세히 아시는 분은 추가 바람.[7] 오늘날 아랍어에서는 Shay라고 발음함.[8] 9세기 무렵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무역 상인들의 구술을 편집, 기록한 책.[9] 당나라 항구 도시에 정착했던 신라인 공동체도 한화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해상 무역 패권은 다시 중국인들이 장악했다.[10] 아랍-타지크인의 율법[11] 일례로 우리나라 칠정산의 기원이 된 회회력도 원나라 때 무슬림들로부터 도입하여 한역한 역법이다.[12] 명군에게 사로잡힌 몽골인들은 어떻게 되었냐면...몽골인들이 열대우림의 질병에 취약하다는 걸 노리고 남방 소수민족 반란을 진압하러 보낸다는 핑계로 상당수의 몽골인 포로들을 열대우림 지대로 파병 보내서 태반이 질병으로 죽어나가게 만들었다. 이들 중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이 오늘날 윈난성에 거주하는 몽골족의 조상이다.[13] 영락제의 해상 원정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회족 정화도 쇄국 정책에 의해 기록의 상당수가 말소되었다.[14] 이렇게 자신이 중앙아시아의 왕자 출신이라고 주장하며 명나라에 정착한 경우가 수백건 정도 된다고 한다.[출처] : Late Imperial Chinese Army, Men at Arms. Osprey[16] 영어권에서는 감숙, 섬서의 회민 반란과 신장의 야쿱 벡 정권 성립을 묶어서 Dungan Revolt라고 칭한다.[17] 원나라 때 운남성으로 이주하여 운남성과 버마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무슬림들.[18] 중국 내에서 해외교류가 제한되는 것은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정교회를 제외한 기독교 종파들도 마찬가지다. 천주교의 경우 교황청의 임명권을 배제한 채, 중국 내에서 독자적으로 국가가 주교를 임명하고 있다.[19] 참고로 이 번역본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인증하고 보급하는 중국어판 번역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보급하는 한국어판 번역본은 지나치게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다. 비무슬림 전부를 불신자라는 살벌한 단어로 표현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불필요한 의역이 많다. 다른 한 편에서 보면 부인이 말을 안 들으면 “살짝” 때리라던지, 적의 목을 “때리라”같은 어설픈 번역으로 한국 이슬람계 내외에서 엄청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사실상 보급이 중단되었다.[20] 중국은 종교 계열이 주도한 민란으로 나라가 혼란해졌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중국 내 종교들을 다소 빡빡하게 감시하는 편이다. 여호와의 증인파룬궁은 중국에서 아예 해체되었다.[21] 청나라 때는 만주족을 제외하고 한족 뿐 아니라 회족도 변발을 강요당하거나, 현재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팔기군들이 위구르족과 후이족을 학살하기도 했다. 모스크 입구에 “황제만세 만만세”라는 간판을 강제로 걸도록 하는 모욕적 조치 때문에 회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었다.[22] 단, 원래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끼리만 결혼하기도 했으나 명나라 때는 강제로 결혼을 시켰다.[23] 다만 같은 위구르인이라도 어느 나라 국적인지에 따라서 세세한 차이는 있다. 흔히 알려진 중국의 위구르인은 회족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한족 문화의 영향을 받은 편이지만, 러시아나 카자흐스탄 같이 아예 한족 문화권이 아닌 나라에 사는 위구르인들은 한족 문화의 영향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24] 혈통적 동질성도 있고, 오랜 시간 동안 중국에 정착해서 살았기 때문에 이쪽에 관련해서는 그나마 온건한 편이다. 유럽으로 치면 불가리아의 포마크족과 비슷한 상황.[25] 회족 입장에서 티베트족도 다른 종교를 믿는 이교도일 뿐이라 딱히 한족보다 더 우호적이지 않다. 티베트족과 종교가 같은 북방 한족들조차도 티베트족과 격렬하게 갈등하는 상황이니...[26] 오히려 줄서기나 인재 배출을 잘해서 다른 무슬림들과 다르게 정부의 지원을 받는 면도 있다.[27] 물론 중국에서 위구르족 인구가 매우 많은 만큼 위구르족도 회족만큼은 아니지만 중국 내의 할랄 푸드 생산을 담당하는 일이 있다.[28] 러시아로 치면 볼가 타타르인과 체르케스인의 차이와도 비슷하다. 전자가 토착 러시아인들과의 타협을 선택한 반면, 후자는 러시아인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터키인들과 연대하려 하고 있다.[29] 이들은 회족과 위구르족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교로 개종한 경우인데, 만주족 대다수가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중국어를 모어로 쓰는 관계로 사실상 회족과 다를 바 없는 중국티베트어족 무슬림이다. 물론 청나라 때부터 이어져온 티베트 불교 신앙을 지키거나 청나라 멸망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대다수 만주족에 비하면 극소수다.[30]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과 그외의 소수민족.[31] 위구르족, 보안족, 동향족 등 중국의 다른 무슬림 소수민족들도 회족과 마찬가지로 무슬림이라는 점에서 할례 문화가 있어 해당 민족들 또한 남성들이 포경수술을 많이 받는다.[32] 한 한국인이 회족 친구와 같이 피자를 시켜 먹었는데 소세지만 따로 떼어내고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다. 원리원칙대로라면 돼지고기가 닿은 음식은 버리거나 아예 사먹지 말아야 하지만, 비무슬림 친구와 같이 밥 먹을 때 이런 걸 너무 따지면 친구가 불편해할까봐 그런 것. 만약에 같은 회족들이 이렇게 먹은 걸 알면 놀림이나 핀잔을 좀 듣게 된다.[33] 다만 음식 자체보다는 포획, 도축, 정육과정에서 인간에게 전파된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중화 요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국요리는 날것은 절대 먹지 않고 고열에서 조리하기 때문에 음식으로부터 바이러스를 섭취할 가능성은 의외로 낮다.[34] 다만 같은 한족이라도 싱가포르는 회족처럼 이슬람교가 주류인 말레이인의 영향으로 청결함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강하다.[35] 대만의 경우 당연한 일이지만 종교의 자유 때문에 정권을 막론하고 아라비아풍 모스크가 건재하다. 말레이어가 국어이고 말레이계, 인도계, 후이족계 주민들의 이슬람교 신앙이 잘 보장되는 싱가포르는 말할 것도 없고...[36] 이 라몐을 일본의 라멘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37] 책을 태운다는 뜻의 분서 맞다. 자기 책을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불살라 버려야 한다고 말했던 데서 노리고 지은 이름이라고. 이 사람이 쓴 분서에는 남녀평등과 같은 진보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탁오가 무슬림 종족인 후이족 출신이고, 오늘날의 이슬람 국가들에서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 지를 생각하면 실로 시대를 앞서나간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400년전 사람보다 사고방식이 후진 근본주의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