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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토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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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프랭크 에드워드 토머스 주니어
Frank Edward Thomas, Jr.
생년월일 1968년 5월 27일[1]
국적 미국
출신지 조지아 컬럼버스
포지션 1루수/지명타자
신체 196cm, 125kg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1라운드 7번
소속팀 시카고 화이트삭스(1990~2005)
오클랜드 어슬레틱스(2006)
토론토 블루제이스(2007~2008)
오클랜드 어슬레틱스(2008)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2005
파일:MLB_logo.pn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thomas-plaque.png
프랭크 토머스
헌액 연도 2014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3.7% (1회)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영구결번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 3 4 9 11 14
넬리 폭스 해롤드 베인스 루크 애플링 미니 미뇨소 루이스 아파리시오 폴 코너코
16 19 35 42 56 72
테드 라이언스 빌리 피어스 프랭크 토머스 재키 로빈슨 마크 벌리 칼튼 피스크
}}}||

1993~1994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데니스 에커슬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프랭크 토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모 본
(보스턴 레드삭스)
1995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홈런 더비 우승자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프랭크 토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97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타격왕
알렉스 로드리게스
(시애틀 매리너스)
프랭크 토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버니 윌리엄스
(뉴욕 양키스)
1994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득점왕
라파엘 팔메이로
(텍사스 레인저스)
프랭크 토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알버트 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에드가 마르티네즈
(시애틀 매리너스)

1. 개요2. 선수 시절3. 기록과 위치4. 화이트삭스와의 화해5. 명예의 전당 입성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7. 트리비아

1. 개요


자신의 타격 매카니즘을 설명하는 토마스 엎드려 자식들아
내가 선수 생활을 시작할 때 30홈런 100타점을 때려내면 대단한 선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40홈런과 120타점을 목표로 했고 그것을 이뤄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수들이 60개씩 홈런을 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나에게 평범한 선수라고 했다.

199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오른손 타자 중 한명으로, 스테로이드 시대에 약물 없이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낸 청정타자다. 약물이 만연하던 시대를 지나오면서 상대적으로 가장 가치가 하락했던 선수 중 하나이다. 무책임한 행동과 부족한 인성으로 구설수에 오르며 2000년대 들어 평가가 바닥까지 낮아지기도 했지만, 한 시대를 지배했던 약의 힘을 빌렸음이 드러난 이후, 반대급부로 2010년대부터는 오히려 평가가 대폭 오르며 크게 수혜를 입은 선수. 그리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시카고 화이트삭스 공격 기록의 상당 부분에 이름을 남긴 타자다. 별명은 빅 허트(Big Hurt).

통산 성적은 19시즌 동안 타율 .301, 출루율 .419, 장타율 .555, OPS .974, 순장타율 .254, BB/K 1.19, wRC+ 154, 2468안타, 521홈런, 1704타점.

2. 선수 시절

야구를 좋아해서 자기 지명해주는 팀은 무조건 계약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시즌인 1986년 드래프트에서는 뽑히지 못했다. 결국 미식축구로 유명한 어번 대학교에 미식축구 선수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다. 195cm, 124kg의 거구인 토머스는 대학팀의 타이트엔드였지만 야구가 좋아서 결국에는 1989년 프로 지명을 받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했다.

마이너리그를 빠르게 졸업하고 199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맛을 본 후, 대표적인 실력파 선수로 알려지면서 영광의 7년을 보내게 된다. 메이저리그 데뷔 초기에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정교한 타격을 자랑하는 히터에 가까웠으나, 92년부터 파워를 싣는 스윙에 눈을 뜨면서 점차 완전체 타격에 가까워졌다.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프랭크 토머스는 1991년부터 1997년까지 7년 연속 3할 - 20홈런 - 100득점 - 100타점 - 100볼넷의 진기록을 세웠는데, 토마스 만이 유일하게 가진 기록이다. 또한 1994년 파업으로 인해 113경기만 치르고도 이런 성적을 이어갔다는 점은 그의 꾸준한 활약상을 대변해준다. 참고로 테드 윌리엄스는 6년 연속 달성했다. 이 시기 아메리칸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자리매김한 토마스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팀은 1983년 이후, 10년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에도 성공했다. 타격이 완성된 1993년과 1994년 연속으로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하면서 리그 최정상급 우타자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2] [3] 이어진 1995년과 1996년에도 토마스는 3할을 훌쩍 넘는 타율과 각각 40홈런을 기록하며 여전히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사상 최초로 50홈런 50 2루타의 대기록을 세우고, 리그에서 토마스의 위상을 능가하는 극소수의 강타자[4] 알버트 벨이 5년 5500만 달러의 사상 최고 계약으로 화이트삭스에 입단하면서 문제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하루 아침에 팀 내에서도 넘버 2가 되고 연봉에서도 큰 격차를 느낀 토마스는 은근히 팀에 섭섭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라이벌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4번타자 벨을 빼온 가장 큰 목적은 결국 지구 우승이었다. 1996년 85승 77패로 아깝게 와일드카드를 놓친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우승을 위해 지름신이 강림하여 지구 라이벌 팀의 4번타자를 빼오는 승부수를 던졌으나, 첫 해 벨이 잔부상으로 30홈런, 116타점에 그치면서(?) 기대했던 만큼의 위력은 보이지 못했다. [5] 이 해 토마스는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격왕에 올랐고, 35홈런과 125타점으로 여전한 위력을 발휘했다. 1997 시즌이 끝나자 시즌 중에도 연봉과 대우 문제로 이런저런 불만을 표출하곤 했던 토마스는, 지리한 협상 끝에 7년 6,440만 달러의 조건으로 장기계약을 팀과 체결했다. 알버트 벨보다 평균 연봉은 조금 적지만 총액은 더 큰, 당시로서는 초대형 계약이었다.

그러나 1998년이 시작되면서 토머스는 장기 계약의 여파인지 살이 잔뜩 불어난 몸으로 캠프에 참석하는 등 나태해진 모습으로 우려를 낳았다.여전히 100개 이상의 볼넷을 기록할 정도로 선구안은 녹슬지 않았고, 29홈런으로 장타력이 크게 하락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순발력이 확연히 떨어진 모습을 노출하면서 풀타임 후 처음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하고 말았다.(.269) 반면 전년도 약간 부진(?)했던 벨은 무려 49홈런과 152타점의 맹타를 휘두르며, 화이트삭스 투자한 거금이 전혀 아깝지 않은 위력을 과시했다. 게다가 1998년 메이저리그는 역사적인 마크 맥과이어새미 소사의 홈런 레이스로 온통 들끓는 상황이아, 당대 최고의 스타 켄 그리피 주니어의 56홈런도 별 관심을 못받고 묻힐 지경이었다. 이런 시기에 대우 문제로 불평불만을 노출하고, 장기계약을 체결하자마자 체중 관리도 안되어 성적이 크게 하락한 토마스에게 좋은 평이 나올 리 없었다. 기대했던 벨-토마스 조합이 엇박자가 나 버린 바람에 화이트삭스의 기대는 물거품으로 돌아갔으며, 상대적으로 팀의 프랜차이즈인 토마스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6] 다음해인 1999년, 토마스는 3할 타율에 턱걸이 했지만, 반대로 고작 15홈런에 77타점으로 전체적인 타격 성적이 폭락했다. 특히 타고투저가 극심하던 이 해에는, 30홈런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만큼, 팀의 중심타자로서 기본 조건에 불과했는데, 토마스의 성적은 왠만한 팀의 6,7 타자에게나 어울리는 초라한 성적이었으므로, 슬슬 끝물에 접어든다는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LA 다저스에서 유망주 폴 코너코가 이적하면서 지명타자로 전환하고, 운동량으로 체중을 대폭 줄이며 절치부심한 토마스는, 2000년도 .328 43홈런 143타점으로 제이슨 지암비에 이어 MVP 투표 2위에 올랐고, 재기선수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하는 듯 했다. 그의 활약과 더불어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95승을 거두고 오랜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디비전 시리즈에서 무기력하게 0-3 스윕을 당하고 가장 먼저 탈락했다. 문제는 토머스 본인이 3경기 내내 단 한개의 안타도 치지 못하는 역적질을 하면서, 팀의 허무한 탈락의 원흉이 되어 씁슬한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

아쉬움으로 마무리 된 2000년도 시즌이 끝난 후, 토마스는 그야말로 초대형 사고를 저질러버리고 마는데...

그 시점의 스토브리그는 메이저리그를 뒤흔든 몸값 인플레의 절정이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10년 2억5200만)의 전세계를 놀라게 한 초대형 계약을 필두로 하여, 이에 질세라 매니 라미레스(8년 1억6000만), 데릭 지터(10년 1억8900만)의 계약이 연일 뉴스를 뒤덮었으며, 심지어 투수인 마이크 햄튼도 8년 1억 2,100만 달러라는 사상 초유 거액 계약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토마스는 그들과 비교해 자신의 계약이 매우 형편 없다면서 불만을 떠벌이기 시작했고, 연일 팀에 징징거리며 계약을 수정해서 금액을 더 높여주지 않으면 야구를 못하겠다고 꼬장을 부린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토마스의 빼애액 때문에 언론이 가십거리로 빈번하게 언급하면서 선수단 분위기도 점점 망가졌는데, 아예 한술 더 떠 계약서 내용이고 뭐고 그냥 돈 더 내놓으라는 식으로 스프링 캠프를 무단이탈해 버렸다.....베테랑이자 화이트삭스의 상징인 토마스의 철딱서니 없고 이기적인 행동에 그야말로 비난이 폭발했으며, 심지어 동료들과 타 팀의 거물급 선수들까지 토마스를 디스하는 지경이었다. 마크 맥과이어는 요즘 선수들은 계약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것 같다며 에둘러 비판했고, 랜디 존슨은 아예 '누가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장기계약을 강요했었나? 그 때는 본인이 만족해서 계약해놓고 이제와서 계약 내용을 가지고 저러는 건 철부지 같다.'는 내용으로 대놓고 비난할 정도였다. 여론이 악화되자 토마스는 꼬리를 내리고 복귀했으며, 팀도 계약의 규모와 기간을 크게 늘려주는 대신,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계약 재조정을 수용한다는 기량감퇴조항(diminished skills)에 상호 협의하는 것으로 소동을 마무리 지었다.[7]

이로 인해 토마스의 평판은 최악으로 추락했는데, 사실 데뷔 후 2,3년 차 때에는 큰 덩치에도 순박한 미소와 성실한 운동 자세, 뛰어난 실력으로 평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MVP를 수상한 1993년, 1994년 시점부터 토마스는 경솔한 발언과 미성숙한 사고방식으로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다. '30세가 되면 야구를 그만두고 인생을 즐기겠다. 30살 넘어도 야구만 하기는 너무 지겹다' 이런 취지의 발언으로 실력은 최고지만 책임감이 부족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또 좋게 말하면 자기 자신의 표현에 솔직한 것이지만, 자신의 실력에 대해 지나친 자신감을 보이는 일이 잦아, 철부지 같다는 소리도 자주 나왔다. 알버트 벨의 파격적 계약조건 때문에 혼자 삐져서 생각없이 언론에 불만을 내뱉는 등, 팀의 리더로서 미흡하다는 소리도 들렸다. 게다가 장기계약 이후 체중관리도 안하고 전성기가 볼 수 있는 30세 언저리에 실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정신 상태 문제로 까이다가 겨우 예전의 모습으로 부활했다 싶었는데......토마스는 억지 꼬장으로 원하던 계약 규모를 키우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댓가로 팀의 처분 1순위 낙인이 찍혔으며, 팬들에게는 돈만 밝히면서 팀 생각은 안하는 이기적인 놈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고, 동료들로부터는 신뢰와 존중을 잃게 된 것이다. 한 때 토마스를 한참 능가하는 아이콘이던 새미 소사가, 급격하게 팀,동료,팬의 신뢰를 잃고 내몰리게 된 상황과 많이 비슷한 부분이다. 새미 소사 항목 참조. [8]
게다가 불운은 계속 되었는데, 2001년 4월 27일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에서, 토마스는 평소 폴 코너코가 뛰던 1루수 자리에 선발로 출장하였으나, 2회초 2사 만루에 들어선 스즈키 이치로가 때린 1루 강습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잡으려다 실패하고, 그대로 일어나지 못한채 실려나가고 말았다. 결과는 오른팔 삼두근이 끊어지는 중상으로 결국 시즌 아웃되고 말았다. 스프링캠프에서 그 난리를 피워 팀 분위기를 망쳐놓고 정작 시즌 아웃되어 버리자 또 다시 그에겐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부상에서 회복하고 돌아온 2002년은 무려 타율이 7푼 가까이 떨어진 .252에 28홈런으로 이름값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때부터 화이트삭스는 토머스가 아닌 폴 코너코, 매글리오 오도네즈카를로스 리등의 신예들로 중심축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2003년 타율은 .267로 여전히 전성기에 많이 떨어졌지만, 42홈런 105타점을 기록하면서 팀의 클린업 트리오의 위상은 유지할 수 있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신체능력 저하로 전성기의 타격을 더이상 기대하기 어려워진 토머스는, 2004년 부상으로 74경기밖에 뛰지 못했고, 간신히 2할 6푼대의 타율과 18홈런으로 체면 치례를 했을 뿐이었다. 이미 거액 연봉에 걸맞지 않는 계륵이 된 그는 팀의 주축에서 밀려나게 되어, 클럽하우스도 폴 코너코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2005년에 또 다시 부상으로 인해 고작 34경기 출전에 그쳤으며, 단장을 비롯한 팀에 있어 토마스의 존재는 이젠 골치덩어리에 불과했다. 문제는 2005년는 화이트삭스가 무려 88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누린 시즌이라는 것. 명목상 프랜차이즈 스타인 토머스는 부상으로 인해 포스트시즌에서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9] 결국 기량유지조항이 구실이 되어 화이트삭스를 쫒겨나 듯 떠나게 되었다. 화이트삭스는 내친 김에 은퇴까지 종용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동안 이기적이고 미운 짓만 골라 했어도, 한때 최고였던 대선수가 그런 지경까지 몰리자 팬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2006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누구도 기대하지 않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데 성공한다. 책임감 없고 이기심 덩어리라는 평판 때문에 아무도 토마스를 원하는 팀이 없을만큼 가치가 폭락했는데, 단돈 50만 달러에 계약한 오클랜드에서 지명타자[10]로 뛰면서 예상을 뒤엎고 39홈런 114타점을 터뜨리면서 클래스는 영원하다를 보여주기도 했다. [11] 그의 활약으로 오클랜드는 지구 우승에 도움을 받았고,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미네소타 트윈스의 에이스 요한 산타나를 상대로 홈런 두방을 터뜨리는 등, 그간 포스트 시즌에서 새가슴이라는 오명을 털어내고 2006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이 때의 활약은 정말 마지막 불꽃이었다. 2006년의 활약으로 FA 계약에 성공한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2007년 0.277의 타율과 26홈런 95타점을 기록하며 통산 500홈런을 넘기는 등 전년도의 기세를 제법 이어갔으나 2008년에는 부상으로 부진을 거듭하면서 방출된 후 다시 오클랜드로 복귀했다. 이후 결국 재기하지 못하며 몇 경기 나오지 못하고 은퇴하였다.

3. 기록과 위치

화이트삭스의 통산기록 상당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홈런, 득점, 2루타, 타점, 총루타, 볼넷, 출루율, 장타율 부분에서 토머스는 모두 1위에 올라있다. 또한 통산 3할 타율(.301)을 유지하면서 500홈런을 동시에 기록한 역대 7번째 선수이며, 500홈런과 1600볼넷을 얻은 여섯 명의 중의 하나이다. 알버트 벨, 제프 배그웰 등과 함께 1990년대 타격 기록에서 최고를 다투며,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우타자 중 하나이다. [12] 2010년대로 갈수록 세이버와 2차 스탯을 중시하며 분석에 중점을 두는 성향의 매니아들에게 고평가 받는 추세이다. 즉 동시대 그의 모습을 지켜본 경우보다 지난 스탯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시점에 더욱 평가가 후해지고 위치가 상승할 수 있는 선수라고 볼 수 있다. 사실 90년대 중반이후에도 토마스의 실력은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았으나, 수퍼스타로서는 뭔가 모자란 위치였고, 2000년대의 토마스는 사고뭉치로 몰려 쫒겨난 소사와 함께 몰락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선수였다. 평판은 바닥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팀과 동료들에게 노골적으로 외면당하고 아예 강제 은퇴와 방출까지 몰린 상황이었으니.... 다만 너무 초라하게 쫒겨났고 오클랜드에 최저가로 이적하면서 그래도 한때 리그를 대표하던 강타자였다며 동정하는 여론이 많이 늘어났다. 화려하게 재기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노장에 대한 격려로 최악이었던 인식도 많이 누그러졌다.

다만 화려한 공격력에 비해 수비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90년대 중반 메이저리그의 평가도 수비와 도루 능력을 빼면 본즈에 필적하고, 수비와 홈런 파워, 인기를 빼면 그리피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던 퓨어 히터다. 욕인가 칭찬인가 젊을때는 그나마 리그 평균 1루수보다 조금 못하는 정도였지만 나이가 점점 들고 98년부터 몸무게가 130kg 이상 늘어나면서 똥차1루수에서도 밀려나 지명타자로 주로 활동했다.

스테로이드 시대를 거치면서 켄 그리피 주니어, 짐 토미와 함께 약물에 대해 가장 당당한 선수다. 약물 조사를 담당했던 미첼 위원회에 자진해서 나가 조사에 응했고, 아예 1995년부터 올림픽처럼 타이트한 약물 검사 도입을 주장했던 선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배리 본즈 등의 믿을 수 없는 홈런 기록과, 90년대말~2000년대 초반 토마스의 기록이 대단치 않게 보이는 슬러거들의 타격 인플레가, 사실은 대부분 약물의 힘으로 일궈낸 것이라는 점이 밝혀진 이후, 반대급부로 오히려 토마스의 평가는 급상승한 바람에 근래는 과대평가 논란까지 나올 정도이다. 또한 약물 복용이 의심되는 선수들이 30대 중~후반에도 신체능력이 저하되지 않고, 전성기를 계속 유지했던 반면, 토머스는 30세를 기점으로 급격한 노화 현상이 찾아오면서 기량이 들쑥날쑥 해졌기 때문에, 커리어 곡선으로 보아도 약물과 연관성을 더욱 멀리할 수 있었다. [13]

다만 프랭크 토마스도 한 때 누적 커리어 평가에 불이익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시대의 가장 큰 피해자인 마냥 과장되어 묘사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 미루어 본다면 많은 오류가 있다. 적어도 토마스 본인부터가 1990년대부터 한결같은 주특기인 언론에 징징거리기 신공으로 떠드는 것처럼, 당시 그가 약물 선수들 때문에 당대에도 크게 불이익을 겪고 푸대접 받은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심한 비약이다.

1. 토마스가 처음 30홈런을 기록한 1991년, 언론에서는 23살의 나이에 31홈런 109타점을 기록한 토마스를 메이저리그를 이끌어갈 신예 슬러거로 꽤나 띄워줬었다. 이 해에는 세실 필더가 44홈런으로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 홈런-타점 2연패를 이루었는데, 같은 44개를 날린 호세 칸세코가 공동 홈런왕에 올랐다. 이미 당대의 수퍼스타이자 화려한 사생활로 연예인같은 대중의 인기를 누리던 칸세코 때문에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한 토마스가 평가절하 될 상황도 이유도 없다.

2. 토마스가 40홈런 120 타점 이상을 기록한 1993년(41홈런, 128타점)은 MVP를 수상했다. 또한 단축 시즌인 1994년(타율 .358 38홈런, 101타점)에도 연속으로 MVP를 수상했는데, 106경기만 출전하고도 타율 0.357, 36홈런, 101타점을 기록한 알버트 벨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성적이었음에도 기자들은 기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던 벨을 외면하고 토마스에게 몰표를 주었다. 오히려 MVP에 오른 후 '야구에서 몇 년 더 이룰만한 걸 이루고 30세가 되면 은퇴해서 인생을 즐기며 살겠다.' 이런 인터뷰를 해서 스타로서 책임감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3. 1995년은 40홈런, 111타점을 올렸는데, 알버트 벨은 그해 무려 50 홈런 - 50 2루타의 대기록과 함께, 126타점으로 홈런 타점왕을 동시 석권한 95년 최고의 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다들 약물복용자인 모 본에게 표를 던졌고 결국 39홈런 126타점이라는, 벨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스탯을 기록한 본에게 MVP를 강탈 당했다.

4. 1996년에도 40홈런, 134타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알버트 벨은 48홈런(홈런 2위), 148타점(타점 1위)을 올렸다. 그럼에도 MVP는 134경기만 출전하고도 47홈런, 144타점을 기록한 약물복용자 후안 곤잘레스에게 돌아갔다. 참고로 이 해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은 역시 약물복용자인 52개의 마크 맥과이어.

5. 1997년 타격왕에 오르면서(.357) 35홈런, 125타점을 기록했는데, 새로 합류한 알버트 벨에 밀려 2인자가 되고, 벨의 최고 연봉에 혼자 삐져서 시즌 내내 툴툴거리는 바람에 팀을 골치아프게 했다. 결국 팀은 시즌 종료 후 7년 6,440만 달러라는 당시 최고 규모 연장계약을 체결해 제대로 대접을 해 줬으며, 언론에도 최고 계약으로 대서특필 하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허나 역시 약물과 무관한 청정타자 그리피는 이 해 무려 56홈런을 날리고 147타점, 수비에서도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며 MVP에 올랐다. 토마스의 연봉은 그런 그리피보다 한참 더 높았다.

6. 1998년 스프링캠프에 무려 135킬로가 넘는 파오후가 되어 등장하였고, 시즌 내내 위력이 확 떨어진 모습을 보인 끝에 타율 .267, 29홈런 109타점을 기록했다. 클린업 듀오 알버트 벨은? 타율 .328, 200안타, 48홈런, 49 2루타, 152타점을 올렸다. 그러고도 또 다시 MVP는 1996년과 마찬가지로 45홈런과 157타점을 올린, 약물 슬러거 후안 곤잘레스에게 돌아갔다. 이쯤 되면 진짜 약물의 피해자는 벨이 아닌가? 토마스는 이 해 30홈런 100타점에 근접한 성적을 올리긴 했다. 그러나 폭락한 타격 정확성과 장기계약 후 나태해지는 모습으로 연봉값을 못하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이때는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 레이스 열풍 때문에, 아메리칸 리그의 모든 타자들이 묻히는 비운을 맛봤다. 오히려 98년에도 약물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진짜 피해자는 위에 사실처럼 알버트 벨과, 2년 연속 56홈런과 146타점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고도, 2부리그 홈런왕처럼 별 것 아닌 취급을 당한 그리피였다.

7. 1999년 토마스는 '지명타자로만 출장했으면서도' .305 15홈런 77타점을 기록하는데, 이건 약물 때문에 불이익 어쩌고 할 성적이 아니다. 투고타저가 최악이던 1960~70년대로 가도 이 성적이면 지명타자로선 오히려 너무 초라한 누적스탯이다. 이 해 그리피는 또 다시 홈런 48개로 3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에 오르고,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으나,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 레이스 2탄에 또 다시 묻히는 비운을 맛 보았다.

8. 2000년 토마스는 재기에 성공하여 타율 .328, 43홈런, 143타점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이해 MVP 2위에 오르고 올해의 재기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팬들과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MVP는 0.333 43홈런 137타점을 올리고 오클랜드를 지구우승으로 이끈 제이슨 지암비에게 돌아갔는데, 비슷한 성적이었으나 팀이 우승한 지암비의 공헌도를 더 높이 쳐준 것. 사실상 토마스가 40홈런-120타점을 올리고 약물 선수에게 불이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이 때가 유일하다.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청정타자 그리피는, 이 해 신시내티 이적후 40홈런 118타점을 기록하고도, 그 위로 무려 5명이나 되는 약물 선수들에게 밀려 홈런 9위에 그치고 평범한(?) 성적으로 실망스럽다는 쓴소리까지 들었다. MVP는 놓쳤지만 팬과 언론의 극찬을 받은 토마스와, 약물 선수들에게 밀려 저 성적으로도 욕만 잔뜩 먹은 그리피. 대체 누가 더 큰 피해자였나?

9. 2001년 토마스는 이미 맺은 장기계약에 불만을 품고 돈을 더 올려달라는 황당한 꼬장으로 팀 분위기를 망치고, 팀을 무단이탈하는 최악의 판단으로 팬들의 지지와 팀의 신뢰 동료들의 존중을 모두 잃었다. 그렇게 억지 연봉 올리기에 성공해 놓고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부상을 당해 아웃 되었다. 이쯤부터 10년 베테랑이자 팀의 최고연봉자로 격에 맞는 행동과 거리가 먼 토마스는 팀의 골칫덩이로 전락하고, 폴 코너코가 새롭게 팀의 리더로 자리잡았다.

10. 2002년은 타율 .252 28홈런 92타점, 2003년은 타율 .267 40홈런, 105타점을 기록하는데, 펀치력은 있었지만 가장 큰 장점이던 타격의 정확도가 크게 하락했다. 게다가 2004, 2005년은 부상과 부진한 성적에도 정신 못 차리고 계속 팀에 대한 불평불만을 언론에 떠들어대서, 동료들도 완전히 등을 돌리고, 팀에서 처리 1순위로 낙인찍혔다. 심지어 월드시리즈 엔트리에도 완전히 제외되어 팀이 88년만에 우승하는 순간에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는 약물로 저평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자업자득으로 인한 인과응보였다.

11. 결국 팀에서 쫒겨나고 이기적이고 철없는 행동으로 인해 아무도 받아주는 곳이 없자, 50만불 최저연봉에 오클랜드와 계약했으며, 2006년 그간의 악평을 씻고 39홈런 114타점으로 재기선수상을 또 한번 수상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재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호의적으로 대했으며, 팬들도 너무 비참하게 쫒겨난 그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크게 격려하고 박수를 보내주었다. 또한 2005년의 약물 스캔들로 인해 그의 재기에 더욱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이때부터 약물로 인한 불이익은 커녕, 비약물의 상징으로 낙점되어 오히려 고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위의 사실들처럼 프랭크 토마스가 전성기를 누릴 당시, 해당 시즌 약물 선수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받은 불이익은 크게 없다고 봐도 좋으며, 오히려 그리피, 토미, 알버트 벨이 토마스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큰 타격을 받은 경우라 하겠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토마스의 이기적이고 철부지같은 태도가 크게 드러나 평가가 바닥까지 떨어졌으며, 그에 더해 누적 커리어를 놓고 보면 약물 스타들의 성적보다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아 저평가를 받은 현상은 사실이다. 그러나 재기에 성공한 2006년 이후 약물 스캔들이 겹쳐 그런 시각은 빠르게 뒤바뀌었으며, 토마스 본인부터 과장을 섞어 언론에 떠들어대면서 마치 그만 엄청나게 푸대접을 받은 것처럼 과장된 흐름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14][15]

본인의 미성숙한 태도와 약물시대 성적 인플레로 인해 가치가 많이 훼손되었고, 한 때는 팀의 암적인 존재로까지 떨어져 모두에게 외면당하며 은퇴당하고 흑역사로 남을 뻔한 선수.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세이버 매트리션들이 좋아하는 스탯들의 가중치가 높은 선수로 더 평가를 후하게 받게 되었으며, 약물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선수 시절의 사건들도 은근슬쩍 가려지면서 근래는 포장되면서 갈수록 미화까지 되고 있는 선수. 그야말로 근 10여년 사이 인생사 새옹지마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선수이다.

4. 화이트삭스와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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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삭스에서 쫒겨나는 모습으로 안 좋게 결별했지만, 그래도 은퇴 후에는 팀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과거의 구설수들도 다 옛말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2010년 은퇴 선언도 화이트삭스에서 했으며, 그의 등번호 35번은 2010년 8월 30일 성대한 행사 속에서 영구결번 되고, 그의 사진이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 외야에 남게 되었다. [16] 화이트삭스를 나올 당시 팀과 동료, 팬들의 냉랭한 태도와 다른 따뜻한 환영에 격세지감을 느낀 것인지, 영구결번식에서 토머스는 기념 연설 도중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환대에 감사했다. 2011년에는 화이트삭스가 그의 동상을 홈구장인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 외곽에 건립하기로 결정했을 정도로, 팀을 대표하는 레전드로 인정하며 극진히 모시는 중. 토머스가 MLB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자 토머스는 당연히 화이트삭스 모자를 선택했고, 화이트삭스 구단도 이에 관해 별도의 페이지를 만들어 기념할 정도. 팀의 상징에서 암적인 존재까지 몰락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나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명예의 전당 입성

2014년 명예의 전당 투표 후보로 등록된 첫해, 83.7% 득표율로 당당히 첫 턴 입성에 성공했다. 같은해 첫 턴 입성에 성공한 그렉 매덕스톰 글래빈에 묻혀 주목을 덜 받는 감이 있어 아쉽지만, 첫 턴 입성은 그야말로 "명예 중의 명예"이다. [17] 사실 은퇴 직전만 해도 명예의 전당은 당연하겠지만, 첫 해 입성은 어렵다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대형 약물스캔들이 끊이지 않으면서 스테로이드와 무관한 선수들의 대접이 더욱 좋아졌으며, 그만큼 명예로운 선수들에겐 더 큰 대접을 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늘어나, 입회 시점에 상대적으로 많이 이득을 본 셈이다.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그레이잉크HOF 모니터HOF 스탠다드
프랭크 토머스 21 200 194 60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First Base (9th)
career WAR7yr-peak WARJAWS
프랭크 토머스 73.7 45.2 59.5
1루수 HOF 입성자 평균 66.4 42.7 54.6

7. 트리비아

여담으로 별명 '빅 허트'(Big Hurt)에서 풍기는 타석의 포스와 큰 체격의 위압감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성격이 상당히 온순한 걸로 알려져 있다. 실제 1998년 시즌을 앞두고 장기계약을 체결하기 전만 해도, 집과 연습장 외엔 별 취미도 없다보니, 몸 관리를 매우 잘해서 큰 체구에도 생각보다 날렵한 편이었다. 어린애처럼 순박한 미소만큼이나 성격은 정말 솔직하고 순수했고, 그만큼 어린애같이 잘 토라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여느 악동들처럼 깽판을 벌이거나, 술마시고 사고 치는 일은 선수생활 내내 없고, 그냥 하소연 하는 것 뿐.리얼 소녀 감성 단, 하소연을 장소 못 가리고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이 문제로, 프런트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잦았다. 팀의 상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리그 최고의 강타자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접하는 언론에다 대고 전혀 절제되지 못하고 아무생각 없는 듯한 화법을 사용했다. 이런 점 때문에 툭하면 징징거리는 것으로 비춰져서 철부지 같다는 평이 많았다.

그리고 워낙 순둥이라서 역으로 리더가 갖춰야 할 투쟁심이 부족하다며 지적 되기도 했다. 뭐 이런 정도는 사실 알버트 벨이나 밀튼 브래들리, 칼 에버렛 같은 악동들의 사고에 비한다면 문제라고 할 차원도 아니고, 그냥 좀 성가시거나 철이 좀 없는 대신 순해 빠졌으니. 덕분에 클럽하우스에서 동료들과 다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역사회에 봉사활동을 비롯해 자선사업 활동에 적극적인 선수로도 유명했으니, 잘 삐져서 하소연 늘어놓는 점만 아니었어도 사생활 바르고 순박한 만큼, 실력과 성품 모두 그림에 그린 듯한 모범 선수로만 남았을 듯.

파일:external/www.photoshelter.com/1998-Thomas-01.jpg
저건 공을 치라고 드는 물건이 아닌데요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때 연습용 배트가 아닌 철근을 휘둘러대는 것으로 유명하다. 투수들이 저거 휘두르는거 보고 지릴뻔




[1] 제프 배그웰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2] 94년 내셔널리그 MVP는 제프 배그웰이 받았는데 프랭크 토머스와 생일이 같은 인연이 있으며, 단축 시즌임에도 리그를 양분하면서 엄청난 성적을 올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3] 이 때 그의 별명인 빅 허트도 생겨났다. 화이트삭스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인 켄 해럴슨이 상대에게 또 큰 상처(Big Hurt)를 줬다고 붙여준 별명.[4] 다른 한명은 켄 그리피 주니어, 97년 시점 배리 본즈, 그리피,알버트 벨, 마크 맥과이어 정도를 제외하면 토마스의 위상은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이었다.[5] 물론 기대보다 조금 아쉬웠다는 것이지, 팀의 중심타자로서 최상급의 성적이었으며, 토마스에 비해 큰 손색없는 좋은 성적이었다. 다만 벨은 이미 메이저리그 최고 연봉 선수이며, 50홈런 150타점도 기대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슬러거였다. 따라서 화이트삭스는 토마스를 능가하는 모습을 바라고 있었다.[6] 물론 정상 가동된다면 토마스와 벨의 클린업 트리오는 매니 라미레즈, 짐 토미, 로베르토 알로마의 살인타선으로 유명한 인디안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문제는 벨이 계약할 때 본인보다 고액 연봉자가 나오면 그만큼 연봉을 인상 하거나 FA가 된다라는 엘리베이터 조항이 있었다는 점이고, 벨은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자 2년만에 뒤도 안 돌아보고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야심차게 거금을 투자한 벨-토마스 조합은 2년 만에 해산되어 버렸다.[7] 그러나 이 조항은 오히려 토마스에게 돈과 명예를 모두 잃고 팀에서 쫒겨나는 인과응보로 돌아왔다.[8] 그냥 앵무새처럼 약물 약물만 떠들면서, 무조건 소사가 약쟁이라 망한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는 멍청한 소리다. 소사의 평판은 코르크 배트 사건과 안하무인적인 행동, 무단이탈 사건 등으로 이미 급격하게 추락한 상태였으며, 금지약물 복용이 적발된 것은 비유하자면 한참 화재로 불타오르던 대파된 군함을 기어코 침몰시키고 만 탄약고 폭발일 뿐이었다.[9] 사실 부상이 아니었어도 토마스의 존재가 팀워크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팀원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프런트와의 문제 만큼이나 클럽하우스에서 토마스의 신뢰는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2005 시즌 화이트삭스의 팀 구성은 그를 제외한 이후 최고의 분위기라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으니.....[10] 빌리 빈 단장은 머니볼 철학에 걸맞게 지명타자로 주로 마이크 피아자스캇 해티버그등 경험많고 선구안이 좋지만 나이때문에 재계약에 실패한 노장들을 저렴한 가격에 후려쳐서 영입한 뒤 체력 안배를 하면서 비용대비 효율을 추구했는데, 결국 가장 큰 성공이 토머스의 헐값 계약이었다.[11] 2006년에 U.S. 셀룰러 필드에서의 시카고 화이트삭스 戰 원정경기에서 친정팀 상대로 2홈런을 때려내기도 했다. 홈구장에 다시 모습을 보인 토마스를 위해, 화이트삭스 팬들은 타석에 등장한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면서 예전의 악감정을 잊고 격려하며 성원을 보냈다.[12] 마크 맥과이어는 90년대 최다인 415개의 홈런, 새미 소사도 365개의 홈런, 후안 곤잘레스는 2차례의 MVP와 4년 연속 40홈런 130타점 이상을 올린 1990년대 최고의 우타자들이다. 물론 모두 스테로이드 복용이 확인되었으므로 같은 선상에 놓지 말아야 한다. 백웰은 카더라 정도의 이야기만 나온적이 있었으나, 적발된 사례나 미첼리포트에도 이름은 없었다. 마이크 피아자, 이반 로드리게스와 비슷한 경우.[13] 상대적으로 노쇠화가 온다면 한번에 훅 가버리거나 하는 케이스도 많지만 보다 자연스럽게 하락이 진행된 케이스이다. 물론 토마스의 성적 하락은 장기계약 후 나태해진 자기관리도 영향을 미쳤다. 그전까지 토마스는 경솔한 언행이나 불평불만으로 구설수에 오르긴 했어도, 허리가 출렁거리는 모습은 전혀 없이 기량 유지에 충실했던 선수였다.[14] 게다가 짐 토미와 같은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저평가가 심했는데, 알버트 벨과 매니 라미레즈라는, 더욱 완성도 높은 슬러거들과 같은 팀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그늘에 많이 가렸다. 설상가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1996년부터 2004년까지가 하필 스테로이드 시대를 관통하는 10년이었다. 토미는 9년 연속 30홈런 이상을 때렸지만 90년대 말의 30홈런은 왠만한 팀의 중심타자로서 평범한 것이었다.[15] 또한 토미는 2001년부터는 4년 연속 40홈런과 함께, 2003년 무려 52홈런을 기록했지만, 약물복용자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57홈런에 밀렸다. 이미 50홈런은 밥먹 듯 나온 바람에 예전만한 가치를 인정 받지도 못하고, 그냥 의외로 많이 친다는 정도의 저평가를 받았다. 2003년 필라델피아 이적 후 47홈런으로 생애 최초의 홈런왕에 오르면서야 겨우 최정상급 슬러거로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토미는 꾸준하게 기량을 유지하면서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2005년을 제외한다면, 38세인 2008년까지 34홈런을 기록하는 등 1996년~2008년까지 모두 30홈런 이상, 1994년~2010년까지 20 홈런 이상을 기록한 동 시대 최고의 슬러거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성기 내내 약물 선수들의 맹활약에 묻혀 직접적인 저평가의 대상이 된, 스테로이드 시대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이다.[16] 프랭크 토머스 사진 위의 'The Catch'는 마크 벌리퍼펙트 게임 9회에, 드웨인 와이즈가 홈런성 타구를 잡아낸 위치를 나타낸 것이다.[17] 그 와중에 가장 언론에 떠들어대는 것도 토마스였는데,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크게 높이면서 자랑하는 뉘앙스의 인터뷰는 여전했다. 과연 습성은 어디 안간다. 물론 레전드인 만큼 예우하기도 하고, 예전처럼 철없게 보는 시각은 사라졌다. 은퇴한 마당에 굳이 과거에 징징거린 일들이나 꼬장부리고 무단이탈한 흑역사는 그냥 묻어두는 분위기여서, 약물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미지 변신에 크게 성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