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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데 주비아우르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
Pedro de Zubiaur
성명 디에고 플로레스 데 발데스
Pedro de Zubiaur
출생 1540년
스페인 제국 비스카이아도 세나루사푸에블라 데 볼리바르
사망 1605년 8월 3일 (향년 64~65세)
잉글랜드 왕국 도버
아버지 마르틴 데 세나루사베이티아
어머니 테레사 데 이바르귀렌
배우자 마리아 루이스 데 수르코
자녀 아나, 마리아나, 마리아, 카탈리나(사생아), 페드로(사생아)
직위 스페인 해군 제독.
1. 개요2. 생애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제독. 위그노 전쟁, 영국-스페인 전쟁,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스페인 해군을 지휘했다.

2. 생애

1540년경 세나루사푸에블라 데 볼리바르에서 해군과 무역에 깊은 연을 맺은 주비아우르 가문의 영주였던 마르틴 데 세나루사베이티아와 테레사 데 이바르귀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68년 작은 배 2척을 이끌고 빌바오에서 네덜란드 총독인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에게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출항했다가 얼마 안 가 잉글랜드군에게 붙잡혔지만, 나중에 자유를 얻은 뒤 플란데런으로 가서 알바 공작을 위해 일했다. 여러 해전에 참여하면서, 전 재산을 투자했던 배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전략적 항구 도시인 플리싱언을 점령하는 데 일조하는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여러 번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가 풀려나길 반복한 뒤, 자신이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명에 시간과 돈을 많이 바쳤다고 불평했고, 네덜란드 반군과 화해하여 전쟁을 끝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지휘관들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펠리페 2세는 그에게 "플리부트의 병장"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이는 그가 수송 및 호위 선박인 플리부트를 전담으로 담당해 적의 압도적인 공세에 맞서 절박하게 맞서 싸운 걸 인정받았음을 암시한다.

1592년 11월, 주바이우르 선장이 지휘하는 5척의 플리부트가 전함 편대 6척의 지원을 받는 잉글랜드 수송선 40척을 급습했다. 그들은 수적으로 열세했지만, 적군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그 결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잉글랜드 기함은 스페인 병사들의 등선을 허용하여 화재에 휩쓸렸고, 여러 척의 상선이 손상을 입었으며, 선박 3척이 나포되었다. 스페인 함대는 플리부트 1척만 손상을 입은 뒤 유유히 빠져나갔다.

1593년, 펠리페 2세는 브레스트를 공략할 교두보로 삼기 위해 브레스트 인근의 크로종 반도에 요새를 세우기로 했다. 이때 주비아우르는 함선 12척에 건설 장비를 가져와서 공병들에게 전달했다. 또한 요새에 설치된 컬버린 23문 중 대부분은 주비아우르 함대에서 가져왔다. 그해 4월 18일, 위그노군에 포위된 블라이를 구원하기 위해 피니스 4척과 플리부트 16척을 이끌고 지롱드강 하구로 항해하던 중, 지롱드강 하구의 블라이만에서 윌켄슨 제독과 브레일포드 부제독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갤리선 6척과 마주쳤다. 스페인군은 무장 수준이 잉글랜드 해군보다 뒤처졌지만, 바람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부는 걸 이용해 화공을 가했다. 그 결과 갤리온 2척이 불길에 휩싸인 끝에 침몰되었고, 윌켄슨 제독과 브레일포드 부제독이 전사했다. 스페인 함대에서도 포르투나와 그리포라는 이름의 선박 2척이 침몰했다. 그 후 스페인군은 블라이만에 상륙해 포위된 수비대에 물자를 공급했다.

얼마 후, 보르도에서 파견된 군함 11~19척, 상선 40척으로 구성된 잉글랜드-프랑스 연합 함대가 블라이로 접근했다. 이에 주비아우르는 이들을 급습했고, 폭풍이 격렬하게 부는 가운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양측 모두 맹렬한 머스킷 사격으로 상당한 인명 피해를 보았지만, 폭풍에 휩쓸린 프랑스-잉글랜드 함대가 이리저리 흩어져 큰 손상을 입으면서 스페인 함대가 승리했다. 그들은 잉글랜드 상선 6척을 나포한 뒤 무사히 파사헤스 항구로 돌아왔다. 펠리페 2세는 블라이 해전 승리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주비아우르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브르타뉴의 블라베에 건설된 해군 기지에 주둔한 함대를 지휘하던 주비아우르는 1595년 7월 말 부관 카를로스 데 아메스키타에게 갤리선 4척과 아르케부스 3개 중대 400명을 맡겨 잉글랜드 해안을 습격하게 했다. 카를로스 데 아메스키타는 마운트 베이 습격에서 콘월 등지의 정착지 4개 파괴, 선박 3척 침몰 등 상당한 피해를 주고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은 채 귀환했다. 이 습격전은 스페인 함대가 잉글랜드에 상륙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유일한 사례였다.

1597년, 주비아우르는 해군 함대 사령관으로 선임되었고, 스페인 대함대의 3차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했지만, 폭풍 때문에 스페인 함대가 막대한 손실을 보면서 실패로 끝나는 걸 막지 못했다. 다만 1597년 피니스테레곶 인근에서 아소르스 제도를 향한 에식스-롤리 원정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귀환하던 잉글랜드 함선 6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601년, 주비아우르는 스페인 함대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그해 9월 2일 함대가 리스본을 출항했을 때 가담했지만, 도중에 갤리온 산 펠리페호와 다른 3척의 배와 함께 길을 잃었다. 그 배들은 700명의 정예 병력과 대부분의 보급품 및 탄약을 싣고 있었다. 주비아우르는 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바람이 약해 모두 실패했고, 도네갈 만에 도착하려는 마지막 시도도 실패했다. 일부는 대서양으로 휩쓸렸고, 탄약과 보급품을 실은 대형 수송선은 심각한 손상을 입은 채 잉글랜드 사략선에 나포되었다.

결국 스페인으로 귀환해 배를 수리하고 물자를 보충한 주비아우르는 12월 1일에 마침내 원하던 바람이 불자 아코루냐에서 함선 10척과 알론소 데 오캄포 대위가 지휘하는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항했다. 병참 총장 페드로 로페스 데 소토도 원정군에 가담해 킨세일에서 버티는 스페인군에게 필수적인 식량, 탄약, 보급품을 가져갔다. 여정은 처음에는 순조로웠지만, 아일랜드 해안에 도착하기 직전에 강한 북풍에 밀려났다. 유니콘 호는 킨세일 인근에 도착했지만, 레베슨 제독의 봉쇄선에 발각되어 프래스턴의 가랜드호에 의해 나포되었고, 그곳에 타고 있던 스페인 병사 80명은 항복했다. 3척은 상륙하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6척은 621명의 병사만 태운 채 잉글랜드 해군의 추적을 회피해 12월 11일 캐슬헤븐 인근에 상륙했다.

스페인군이 캐슬헤븐에 상륙하자, 베레헤이븐 백작 도널 캠 오설리번 베어와 엘리자베스 1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은 적이 있었던 피닌 오드리스콜 경이 스페인군을 환영하고 펠리페 3세에게 충성 서약했다. 주비아우르는 아일랜드 영주들과 조약을 맺어, 글렌 바라한 성을 넘겨받고 100명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대포 여러 문을 설치하는 등 방어를 강화했다. 그 사이 6척의 배는 캐슬헤븐의 얕은 곳에 정박했다. 주비아우르는 대규모 스페인군의 상륙에 매우 적합한 장소로 볼티모어 항구를 선정했다. 그 이유는 그곳이 완전히 외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알론도 데 오캄포가 병사 200명과 함께 출발해 볼티모어 항구 인근의 성을 접수했다. 베레헤이븐 근처의 던보이 성에는 다양한 구경의 대포 8문과 함께 사베드라 대위가 지휘하는 스페인 병사 60명이 주둔했다. 셔킨 섬의 도넬롱 성에는 대포 9문과 80명이 안드레스 데 아르베 대위의 지휘하에 주둔했으며, 소규모 병력은 볼티모어 인근의 두나시드 성으로 파견되었다.

모든 성의 방어 시설은 최신식으로 개조되었고, 대포로 무장하고 강화했다. 주비아우르는 자신과 가세한 아일랜드 영주들의 사병대에게 파이크 650개와 아르케부스 총 350개를 넘겨주고 그걸로 무장하게 했다. 또한 알론소 데 오캄포는 타이론 백작의 정예 병력 200명과 함께 육로로 타이론 백작의 본대와 합류하도록 파견되었다. 이틀 후, 킨세일 공방전을 치르던 잉글랜드 장성 찰스 블런트는 스페인 함선들이 캐슬헤븐 항구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리처드 레베슨 제독에게 캐슬헤븐에 있는 스페인 함대를 섬멸하거나 최대한 괴롭혀라."라는 전갈을 보냈다. 레베슨은 이 전갈을 받은 뒤 부제독 프레스턴을 남겨서 킨세일 항구를 계속 봉쇄하게 하고, 본인은 워스파이트, 디파이언스, 스위프트슈어, 멀린과 상선 한 척과 캐러벨 한 척을 이끌고 캐슬헤븐으로 항해했다.

12월 6일 오전 10시, 레베슨의 함대가 캐슬헤븐에 도착했다. 주비아우르는 적이 온다는 걸 사전에 전해 듣고 항구 입구에 8문의 함포를 갖춘 채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갖췄다. 10문의 함포를 갖춘 멀린은 스페인 군의 포격을 뚫고 노를 저어 518톤급 워스파이트가 뒤따를 수 있는 수로를 만들었다. 스페인 해안 포대와 함선들의 맹렬한 포격이 이어졌고, 이 때문에 잉글랜드 함선들이 다소 피해를 보았다.

양측은 오후 4시경까지 교전을 벌였다. 주비아우르의 기함 갤리온 선 마리아 프란체스카호는 대부분의 선원과 함께 침몰했다. 200톤급 시스노 카멜로는 수선 아래에 구멍이 뚫려 얕은 물에 가라앉았다.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된 프랑스의 임대선은 화재가 발생하여 침몰할 때까지 포격받았다. 특히 대형 갤리온선 디파이언스와 워스파이트의 지속적인 포격으로 인해 스페인 선박 2척이 큰 피해를 보아 운항이 힘들어졌고, 선원들은 이 선박들을 좌초시켰다. 여기에 스페인 상선 한 척이 나포되었고, 이 배 역시 곧 좌초되었다.

레베슨은 해안에 상륙하여 포대를 제거할 병력이 없었고, 그의 함선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탄약이 동났다. 여기에 스페인군은 아일랜드 보병들의 지원을 받으며 해안에서 항전했다. 이에 레베슨은 바람을 타고 바다로 철수했다. 스페인군은 이 해전에서 보유했던 전함들이 함선 1척을 제외하고 전부 파괴되거나 좌초되었고, 주비아우르는 캐슬헤븐에서 바다를 통해 킨세일로 갈 수 없게 되어 그곳에 고립되었다.

1602년 12월 말, 잉글랜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게일인 영주인 타르코넬 영주 휴 로 오도넬은 캐슬헤븐에 찾아와서 주비아우르에게 스페인군이 농성 중인 킨세일을 구원하고자 진군했던 아일랜드-스페인 연합군이 킨세일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주비아우르는 그에게 스페인과 아일랜드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펠리페 3세에게 직접 호소해 달라고 간청했다. 12월 27일, 두 사람은 로페스 데 소토에게 지휘권을 넘긴 뒤 스코틀랜드 상선을 타고 스페인으로 출항했다. 그러나 그들이 스페인으로 간 후, 킨세일에서의 스페인군은 1월 초 항복했고, 주비아우르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었던 로페스 데 소토도 킨세일 항복 소식을 듣고 따라서 항복했다.

스페인 대함대의 아일랜드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뒤, 주비아우르는 아일랜드에 처음 상륙하지 못한 것과 적 함대와의 교전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2년간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겨우 풀려났다. 1604년, 주비아우르는 바야돌리드에서 수력 발전 공사에 참여하여 후아넬로의 인공 관개 시설과 유사한 관개 체계를 수립했다. 그는 6,000두카트를 직접 지급했지만, 펠리페 3세는 나중에 감사의 표시로 비용의 1/3을 그의 미망인에게 상환했다.

그 후 주바이우르는 됭케르크로 병력을 수송할 임무를 맡은 함선 18척의 지휘를 맡았지만, 1605년 7월 영국 해협에서 빌렘 드 조에테가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 80척의 공격을 받았다. 주비아우르는 적의 규모가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자 중립국인 잉글랜드 항구 도버로 향하라고 명령하고, 본인은 기함과 다른 여러 함선으로 전투 준비를 하던 적 함대에 기만 공격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척의 선박을 침몰시키는 성과를 거뒀지만, 갤리온 2척이 침몰하고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주비아우르는 전투 도중 크게 다친 채 도버로 입항한 뒤 치료받았지만, 1605년 8월 3일에 부상이 악화하여 사망했다. 그의 남은 함대는 도버에서 겨울을 보내다가 12월에 기습적으로 됭케르크에 이동했으며, 그가 수송했던 스페인 육군은 잉글랜드 함대를 타고 플란데런으로 보내졌다.

주비아우르는 유언장에서 2만 두카트[1]의 재산을 젊은 아내 마리아 루이스 데 수르코와 그들의 딸 아나, 마리아나, 마리아, 그리고 결혼 전 낳은 사생아 카탈리나와 페드로에게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자기 시신을 빌바오에 안장해달라고 요청했고, 스페인 정부는 이에 따라 빌바오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러줬다.
[1] 봉급에서 갚아야 할 5천 두카트, 국왕을 위해 사용하다 잃어버린 배에 대한 보상금 14만 두카트, 바야돌리드 설탕 공장에 쓴 돈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