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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파니 이탈리아어 : Trapani | |||
| 국가 | 이탈리아 | ||
| 지역 | 시칠리아 | ||
| 면적 | 180.6km2 | ||
| 인구 | 54,775명[1] | ||
| 시장 | Giacomo Tranchida | ||
| 시간대 | UTC+1 (서머타임: UTC+2) | ||
1. 개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트라파니도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략적 위치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발전해왔다. 어업, 소금 생산, 해상 교역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 도시는 여러 문명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였다.2. 기후
트라파니는 온화한 겨울과 덥지만 일반적으로 덥지 않고 바람이 많지 않은 여름 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특징으로 한다.3. 지명
신화에 따르면, 세레스 또는 사투르누스의 손에서 낫이 떨어졌는데, 사투르누스는 이 도시의 전통적인 수호신이었고, 그 낫이 굽은 땅으로 변해 나중에 도시가 세워는데 그 낫의 이름이 드레파논(Δρέπανα)이다. 드레파논을 이탈리아식으로 번역한 것이 바로 트라파니이다.4. 역사
트라파니 최초의 정착지를 세운 사람들은 아마도 엘리미아인이다. 이들은 시칠리아 서부에 정착하였으며 트라파니는 유리한 지리적 위치 덕분에 곧 상업 도시로 발전했다. 기원전 260년, 제1차 포에니 전쟁 중 트라파니는 카르타고 해군의 기지로 사용되었으며, 로마 함대와의 여러 전투가 벌어졌다. 트라파니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드레파나 해전은 로마 해군의 큰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 그러나 기원전 241년, 로마는 결국 시칠리아 전체를 장악하며 트라파니 역시 로마 지배하에 들어갔다.로마 제국의 쇠퇴 이후 트라파니는 반달족과 동고트족의 침략을 받았고, 이후 동로마 제국의 통치를 거쳐 9세기 초에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되었다. 아랍 통치하에서 트라파니는 중요한 어업 및 소금 생산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이슬람 문화와 농업 기술이 전파되었다.
11세기 말 노르만족의 시칠리아 정복 이후, 트라파니는 시칠리아 왕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후 호엔슈타우펜, 앙주, 아라곤 등의 지배를 거치며 중세 내내 지중해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13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트라파니의 항구가 제노바, 베네치아, 카탈루냐 상인들과의 무역으로 번성하던 시기였다.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스페인의 시칠리아 통치기였다. 이 시기 트라파니는 해적과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대비해 방어 시설이 확충되었으며, 동시에 도시 내 바로크 양식의 교회와 궁전이 건설되었다. 트라파니의 소금 생산은 유럽에서 주요한 산업으로 성장하였고, 이는 도시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는 나폴레옹 전쟁과 부르봉 왕조 통치의 영향을 받았으며, 1860년 주세페 가리발디가 마르살라에 상륙한 이후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 편입되었다. 트라파니 역시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20세기 초 트라파니는 어업, 소금 생산, 산호 가공 산업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 경제의 중심지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군에 의해 폭격을 받았고, 1941년 11월 10일과 1942년 5월 31일에는 영국 공군에 의해 폭격을 받았으며, 그 후 1943년 1월부터 7월까지 27차례의 영미 폭격을 받았으며, 그 결과 산 피에트로의 역사 지구 전체가 파괴되었다. 1943 년 7월 22일 패튼의 연합군이 트라파니 광장에 도착했을 때 트라파니는 황폐화되었다.
5. 경제
산업화 이전 시대에 산호와 은 세공으로 유명했던 트라파니는 18세기와 19세기 사이에 지중해의 주요 농식품 허브 중 하나가 되었다. 트라파니는 무엇보다도 소금 광산에서 생산되는 소금으로 유명했는데, 이 소금은 오늘날에도 전 유럽에서 인기이다. 트라파니의 어업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특히 참치 어업이 유명하다.6. 관광
- 리니 타워(Torre di Ligny) : 1671년에서 1672년 사이에 도시 서쪽 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된 탑으로 현재 이 탑은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고고학 박물관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다.
- 카스텔로 디 테라(Castello di Terra) : 12세기 후반에 처음 지어졌으며, 19세기까지 여러 해에 걸쳐 증축되었다.
- 마리아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대성당(Basilica santuario di Maria Santissima Annunziata) : 원래는 1315~1332년에 카르멜회에 의해 지어졌고 1760년에 재건축되었다.
7. 자매도시
[1] 2025년 4월 30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