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FFB6C1><colcolor=#000000> 토머스 네빌 Thomas Neville | |
| 성명 | 토머스 네빌 Thomas Neville |
| 출생 | 1429년경 |
| 잉글랜드 왕국 노스 요크셔 포콘버그 | |
| 사망 | 1471년 9월 22일 |
|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미들햄 성 | |
| 아버지 | 윌리엄 네빌 |
| 별칭 | 포콘버그의 서자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가족의 행보에 함께 하다가 1471년 런던 탑에 갇힌 헨리 6세를 구출하기 위해 런던 탑 공방전을 단행했으나 실패한 뒤 에드워드 4세에게 귀순했지만 곧 처형당했다.2. 생애
1429년생으로, 아버지 윌리엄 네빌은 포콘버그 남작이었다. 그는 윌리엄 네빌의 사생아로, 어머니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1454년 칼레의 수비대장을 맡은 사촌 리처드 네빌의 지휘하에 영국 해협과 북해의 해적들을 소탕하는 데 크게기여했다. 이후 장미 전쟁이 터졌을 때 가족을 따라 요크 왕조를 지지했으며, 1460년 1월 15일 샌드위치 해전에 참전해 랭커스터군 함대를 포획하는 데 기여했다.1461년 토우턴 전투 이후 에드워드 4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발돋움했을 때, 토우턴 전투의 승리에 기여한 아버지 윌리엄 네빌은 켄트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토머스는 1463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사생아라는 이유로 직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그 후 1470년 에드워드 4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촌 리처드 네빌을 지원해, 에드워드 4세가 축출당하고 헨리 6세가 복위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1470-1471년 겨울 동안 영국 해협을 순찰해 에드워드 4세가 복귀하려 드는 걸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는 부르고뉴국의 공작 용담공 샤를의 지원에 힘입어 함대를 꾸린 뒤, 토머스의 함대를 우회하여 요크셔의 해안 항구인 레이븐스펀에 상륙했다.
에드워드 4세 상륙 소식을 접한 리처드 네빌은 토머스 네빌에게 켄트주로 가서 지원군을 모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토머스 네빌은 이 지령을 접수받고 샌드위치 항에 상륙했다. 칼레 수비대장 제프리 케이트가 병사 300명을 그에게 보냈고, 캔터베리 시장인 니콜라스 폰트가 200명을 보내줬다. 이후에도 여러 인사들이 병력을 지원하면서, 토머스 네빌의 군대는 3,000명으로 늘어났다. 토머스 네빌이 켄트에서 모집한 군대는 주로 워릭 백작이나 헨리 6세에 대한 충성심에서 동기를 얻었지만, 상당수는 풍요로운 런던을 약탈하려는 욕망을 품었다.
5월 8일, 시팅본으로 진군한 토머스 네빌은 런던 당국에 서신을 보내 수도에 입성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서신은 에드워드 4세가 3월 14일 바넷 전투에서 리처드 네빌을 처단하고, 5월 4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랭커스터파를 상대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뒤 런던에 이 소식을 알리는 서신이 도착한 지 몇 시간 후인 5월 9일에 도착했다. 이에 런던 당국은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토머스 네빌에게 수도 입성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즉시 전달했다. 이후 당국은 수도 주변 템스 강변에 대포를 배치했고, 시민들에게 무기를 지급했다.
토머스 네빌 역시 뒤늦게 튜크스베리 전투 소식을 접했지만, 런던 탑에 갇힌 헨리 6세를 구하면 재기를 랭커스터 왕조의 대의를 되살릴 수 있으리라 희망하고 런던으로 진격했다. 이후 1471년 5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 헨리 6세를 구출하기 위해 런던 탑 공방전을 단행했지만, 런던 민병대의 거센 저항으로 고전하다가 사방에서 런던을 구하려는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사우샘프턴으로 후퇴했다. 이후 함대가 자기 수중에 있는 걸 협상 카드로 삼고 적 수뇌부에게 신변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토머스 네빌은 5월 27일 글러스터 공작에게 항복했다. 에드워드 4세는 나중에 런던에 입성한 뒤 토머스 네빌의 공격으로부터 런던을 구한 런던 시장 윌리엄 햄튼을 포함한 시민들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 뒤, 켄트로 원정대를 이끌고 가서 반군을 도와준 자들을 응징하겠다고 선언했다. 캔터베리 시장 니콜라스 폰트는 5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진 뒤 몸이 갈기갈기 찣겨지는 형을 받았으며, 수많은 처형과 벌금형이 잇달아 벌어졌다. 토머스 네빌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함께 요크셔의 미들햄 성으로 가서 리처드의 밑에서 복무했지만, 이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을 받은 리처드에 의해 1471년 9월 22일 참수되었다. 그의 수급은 런던 브리지에서 니콜라스 폰트의 수급 옆에 놓였는데, 두 수급 모두 켄트 쪽을 바라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