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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만 제국 이집트 헤디브 무함마드 타우피크 파샤 محمد توفيق باشا | Muhammad Tewfik I''' | |
| <nopad> | |
| <colbgcolor=#006c35><colcolor=#fff,#fff> 이름 | 모하메드 테우피크 파샤 محمد توفيق باشا Mohamed Tewfik Pasha |
| 출생 | 1852년 11월 15일 |
| 사망 | 1892년 1월 7일 (향년 39세) |
| 재위기간 | 이집트 케디브 |
| 1879년 6월 26일 ~ 1892년 1월 7일 | |
| 후임자 | 아바스 힐미 2세 |
| 부모 | 아버지 : 이스마일 파샤 어머니 : 샤파크 누르 하님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1. 개요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6대 군주이자 이집트 헤디브국의 2대 케디브.2. 생애
이스마일 파샤의 장남으로, 모친은 체르케스계 노예 여성 샤파크 누르 하님이었다. 테우피크는 동생들과 달리 이집트 내에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1866년 부친 이스마일이 왕위를 기존의 연장자 계승제에서 부자 계승제로 확립하며[1] 테우피크는 왕세자가 되었고, 카이로 부근에 궁전을 하사받았다. 1873년 테우피크는 7촌 조카이자 아바스 힐미 1세의 손녀인 에미나 일하미와 결혼했다. 1878년 테우피크는 내각의 임시 총리를 맡았으나 몇 달만에 사임한 후 궁으로 돌아와 전원 생활에 몰두했다. 그리고 1879년 6월, 영국과 프랑스의 압박 하에 술탄 압뒬하미트 2세가 이스마일의 퇴위를 명령하며 테우피크는 이집트와 수단의 케디브가 되었다. 계속해서 유유자적하고 싶던 테우피크는 즉위 소식을 가져온 하인들의 귀를 때리는 등 불만을 표했으나 결국 수긍했다.당시 이집트는 서유럽에 대한 채무로 재정 상황이 나빴고, 테우피크는 국정 운영 경험이나 추진력 모두 부족했다. 따라서 영국인 에블린 베어링 (크로머 경), 프랑스인 에르네스트 드 블리그니에르가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집트 군부는 우라비 파샤의 지휘 하에 봉기했고, 테우피크는 그를 군사 대신으로 삼았다. 다만 얼마 후 이집트 군인 중 일부가 알렉산드리아의 영국인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영국 장군 알세스터 경은 알렉산드리아의 군사 거점들에 대해 포격을 준비하며 인근 라믈 궁전에 있던 테우피크에게 떠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신민들을 버리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다만 우라비 파샤가 궁전을 공격하자 다른 궁전으로 피신했고, 영국군의 보호를 받았다. 1882년 9월 텔엘 케비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우라비 파샤를 격파한 후 테우피크는 카이로로 돌아와 영국의 요구로 개혁을 단행했다.
뒤이어 영국식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고, 영국인 더퍼린 경이 국정을 주도했다. 이로써 영국 치하 이집트가 성립되었고, 테우피크는 상징적 존재로 남았다. 그럼에도 그는 1883년 알렉산드리아에 콜레라가 퍼지자 직접 그곳의 병원들을 방문해 의료진을 격려했고, 농업 진흥을 위해 관개 수로들을 건설했으며 여러 학교와 법원을 설립했다. 또한 테우피크는 일부일처제를 지지하며 부친의 하렘을 폐쇄했고[2], 자신이 솔선수범하며 일부일처제를 신민들에게 퍼뜨리려 노력했다. 한편 1883년 수단에서는 반외세 운동인 마흐디 운동이 일어났고, 1884년 크로머 경의 압박 하에 테우피크는 수단 지배권을 영국에 넘겼다. 허버트 키치너가 이집트 군사 대신에 오른 1892년 1월, 테우피크는 카이로 인근의 헬완 궁전에서 사망했다. 사후 장남 아바스 힐미 2세가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