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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22c3f><colcolor=#fff> 폴란드 인민공화국 제22대 국방부장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 | Konstantin Rokossovsky | |||
본명 |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коссо́вский[1] Konstantin Konstantinovich Rokossovsky | ||
출생 | 1896년 12월 21일 | ||
러시아 제국 폴란드 입헌왕국 바르샤바현 바르샤바 (現 폴란드 마조비에츠키에주 바르샤바) | |||
사망 | 1968년 8월 3일 (향년 71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북부군집단 총사령관 | ||
1945년 6월 10일 ~ 1949년 11월 6일 | |||
제22대 국방부장관 | |||
1949년 11월 6일 ~ 1956년 11월 13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22c3f><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크사베리 보이치에흐 로코소브스키 어머니 안토니나 로코소브스카야[2] | |
배우자 | 율리야 페트로브나 바르미나 (1900-1986) 갈리나 탈라노바 (1941년~1944년 사실혼 관계)[3] | ||
자녀 | 딸 아리아드나[4], 나데즈다[5] | ||
신장 | 193~198cm[6] | ||
복무 | 러시아 제국 육군 | ||
1914년 ~ 1917년 | |||
노농적군 | |||
1917년 ~ 1946년 | |||
소비에트 지상군 | |||
1946년 ~ 1949년 1956년 ~ 1968년 | |||
폴란드 인민군 육군 | |||
1949년 ~ 1956년 | |||
최종 계급 | 하사 (러시아 제국 육군) 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원수 (폴란드 인민군 육군) | ||
주요 참전 |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공방전 | ||
주요 서훈 |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7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적기훈장 (6회) 전승훈장 쿠투조프 훈장 1등급 폴란드 인민공화국 건국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2등급 | }}}}}}}}} |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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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3년 8월 23일자 타임지 표지 |
독소전쟁의 중요한 전투마다 선봉을 맡아 대활약한 소련의 명장이지만 동시에 폴란드에서는 소련의 앞잡이로 비판받는 인물이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인해 소련에서도 처음에 폴란드인으로서 차별을 받았지만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폴란드계에 대한 차별이 완화돼 전쟁 영웅으로서 사후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로코솝스키 본인은 러시아에서는 폴란드인 취급받고, 폴란드에서는 러시아인 취급받는다며 씁쓸해했다.
2. 생애
2.1. 성장기
폴란드계 러시아인 귀족의 후손이지만 몰락하여 철도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아버지 크사베리 보이치에흐 로코소프스키(Ksawery Wojciech Rokossowski)[7]와 러시아인이었던 어머니 안토니나 옵샨니코바(Антонина Овсянникова)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려진 기록이 없는데 바르샤바에서 출생했다는 말도 있고 후일 로코솝스키가가 이주한 프스코프주의 벨리키예루키(Великие Луки)에서 출생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그가 폴란드 국방장관이 되었을 때 폴란드에 와서 여동생과 친척들을 30년만에 상봉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적어도 아버지는 폴란드인이었고 러시아에 살고 있는 로코솝스키의 손자도 자주 폴란드에 와서 할아버지와 폴란드와의 관련성을 강조한 것으로 봐서는 가계에 폴란드의 영향도 뚜렷했던 듯 하다.아버지는 1902년, 어머니는 1911년에 세상을 떠나 그는 14살이란 어린 나이부터 여동생과 노동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채석장과 직물 공장 등에서 힘들게 일하던 그는 16살에 반정부 시위에 휘말려 투옥 생활도 경험했다.
2.2. 군인의 길을 걷다
1917년 부사관 시절의 모습 |
그런데 1919년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터지자 제27기병연대장인 그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참전해 동족인 폴란드인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그의 충성심이 인정되어 군부 내에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다. 1929년에는 중화민국 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쉐량이 소련의 관할이었던 북만주 중국 동부 철도를 회수한 것(중동로 사건)을 계기로 봉소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때 만주 침공군을 지휘한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의 휘하에서 참전하기도 하였다. 이후 제7, 제15기병사단장이 되고 제5기병군단장으로 승진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2차 세계 대전 중 라이벌 격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와의 첫 만남은 1930년대 초반 이루어졌다. 당시 로코솝스키는 제7사마라(쿠이비셰프) 기병사단장을 맡고 있었고 주코프는 그 휘하의 여단장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주코프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엄격함. 자신의 욕구에 쉽게 만족하지 않고 집요함. 다소 불손하고 충분히 호감이 가지는 않음. 다소 고집스러움. 자부심에 가득 차 있음. 전문적인 면에서 잘 훈련되어 있음. 지휘관으로서 폭넓은 경험을 갖고 있음."
그는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주창한 종심 전투 교리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붉은 군대 내의 보수적인 지휘관들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2.3. 대숙청
1937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군부 내에도 대숙청의 피바람을 몰고 왔고 로코솝스키는 그 피바람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는 폴란드계 소련인이라 의심을 받았고 매사에 간섭하는 정치장교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당성을 의심받고 있었다.군단장으로 근무하던 그에게 난데없이 NKVD 요원들이 나타나 그가 폴란드 스파이이며 일본과 폴란드에 기밀 정보를 팔았다는 황당한 명목으로 그를 체포했다. 끌려간 그는 NKVD가 내세운 말도 안 되는 증거 자료들에 항변했지만 돌아온 것은 끔찍한 고문이었다. 그는 고문 때문에 치아 9개와 갈비뼈 3개가 부러졌고 손가락과 발가락에 시도때도 없이 망치질을 당한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될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이후 맞춤형 구두를 신고서야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레닌그라드에 있는 크레스티 형무소에 수감됐다.
사실 폴란드 스파이나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는 형식적으로 붙은 것이고 실제 죄상은 자바이칼스크 군관구에서 건설자재 횡령이었다.
2.4.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2.4.1. 스몰렌스크 공방전
겨울전쟁에서 대숙청으로 인한 유능한 장교의 부족이 붉은 군대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 드러나자 1940년에 총참모장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수용소에 갇힌 지휘관들을 전선에 복귀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스탈린은 마지못해 승인했다. 시베리아에서 끔찍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이에 따라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를 포함해서 일체의 해명 없이 석방되었고 크림반도에서 잠시 요양하고 스탈린과의 면담 뒤 제9기계화군단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9][10]1941년,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로 마침내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주코프가 지휘하던 서부전선군의 우익인 제16소총군의 사령관이 되어 스몰렌스크를 방어하게 됐다. 이때 스몰렌스크는 독일의 두 명장인 하인츠 구데리안과 헤르만 호트가 각각 지휘하는 제2기갑집단과 제3기갑집단의 우회 포위 기동으로 포위되어 소련군의 4개 야전군이 사라졌지만 로코솝스키의 16군은 간신히 외곽으로 탈출하여 독일군의 후속 진격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독소전쟁 초기에 소련군이 보여준 몇 안 되는 성공적인 기동이었다.
2.4.2. 모스크바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이 시작되자 그가 제16군을 이끌고 모스크바 외곽의 클린을 방어해 내는 데 성공한 덕분에 소련군은 전투를 한결 수월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승리에 고무된 스탈린은 무리한 계획인 동계 공세를 시작했는데 로코솝스키는 르제프 돌출부를 공격해 제1차 르제프 전투로 알려진 대규모 전투에서 르제프 돌출부의 독일 9군과 제4기갑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지만 1월 중순에 해임된 9군 사령관 아돌프 슈트라우스의 후임으로 임명된 발터 모델의 공세적 방어에 패배하고 말았다.2.4.3.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지자 그는 돈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군에게 패배한 여러 야전군[11]들을 추스르고 볼가 강을 통해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2소총군에게 보급 물자를 전달했다. 그때 '천왕성 작전'이 시작되자 주코프는 남서 전선군과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 역포위망을 완성하면 돈 전선군이 포위망을 이어받을 것을 로코솝스키에게 명령했는데 로코솝스키는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 완벽한 포위망을 구사한 로코솝스키는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고 결국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항복을 직접 받아 명성을 얻었다.2.4.4.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그러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중부전선군 사령관이 된 로코솝스키는 하르코프에 대한 무리한 공격 계획과 동시에 실행되는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한 공격 계획인 '별 작전'에 참여하게 됐다. 그는 너무 공격 일정이 빡빡하다고 불만을 터트렸지만 결국 공격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승리로 이끔에 따라 별 활약도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다행히 포포프 기갑군 같은 궤멸은 면했고 작전이 무리했다는 사실을 스탈린이 인정해 책임은 받지 않게 됐다. 사실 이 작전은 후에 소련군 교리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이후 소련군은 공세종말점을 벗어난 무리한 공격은 자제하고 일단 정지했다가 재편성 후 다시 진격하는 식으로 전술을 바꾸게 되었다.[12]2.4.5. 쿠르스크 전투
1943년 중장 시절의 모습[13] |
2.4.6. 바그라티온 작전
그는 이후 중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한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에 취임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선봉에 서서 민스크를 포위해 9군을 섬멸하고 독일 제4군과 제1기갑군을 괴멸시켜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고 폴란드의 바르샤바 목전인 비스와 강까지 진격했으나 이번에도 도중에 중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된 발터 모델의 파쇄 공격에 진격 한계점을 넘어버린 선두 부대가 궤멸당하면서 바르샤바를 눈앞에 두고 소련군은 진격을 멈추어야만 했다.바그라티온 작전에서의 공로로 로코솝스키는 원수로 승진했다. 이 작전에서 스탈린은 늪지대가 많은 벨라루스에 기갑부대가 들어갔다가 모두 빠져 버릴까봐 걱정해서 빠른 진격을 말렸으나 로코솝스키는 나무로 가교를 만들고 탱크를 움직이는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여 전광석화같은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로코솝스키는 소련군 계획에 맞춰 독일군 전선을 한 개의 돌파구로 뚫으라는 스탈린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했다. 로코솝스키는 두 개의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스탈린은 "가서 다시 생각해보라."고 세 번이나 얘기했지만 그는 언제나 돌아와서 "스탈린 동지, 두 개의 돌파구가 필요합니다."라는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세 번째에 스탈린은 침묵을 지켰지만, 로코솝스키에게 걸어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작전실은 긴장으로 가득 찼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스탈린이 로코솝스키의 견장을 뜯어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스탈린은 " 타당한 근거가 자네의 자신감을 받쳐주는 거겠지."라고 말했고 로코솝스키의 의견을 따랐다.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로코솝스키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2.4.7. 베를린 공방전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벨라루스 전선군은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라루스 전선군과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제2벨라루스 전선군으로 갈라졌다. 여기에 이반 코네프가 지휘하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합류해 유럽 전선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던 베를린 공방전이 시작되었고 공격 축선의 북익을 맡은 로코솝스키는 페르디난트 쇠르너의 중부집단군과 고트하르트 하인리치의 비스툴라 집단군을 상대해 다소 지지부진한 진격을 보였다.그러자 스탈린은 제1벨라루스 전선군과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하도록 했고 제2벨라루스 전선군에게는 동프로이센과 단치히를 제압하고 독일 중부집단군을 붕괴시켜 북부 폴란드와 오데르 강 유역을 점령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이런 명령의 이면에는 폴란드계인 로코솝스키에게 베를린 함락의 영광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어찌됐건 로코솝스키는 명령을 수행해 베를린 함락에 도움을 주었고 엘베 강으로 진격해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의 영국군과 조우했다.
1945년 7월 12일 연합군 점령하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조우한 연합군 수뇌부[14] |
흑마를 탄 로코솝스키와 백마를 탄 주코프 |
종전 후 승전 기념식에서의 모습 |
2.5. 전후: 소련의 대리인
폴란드 인민공화국 육군 원수 당시의 모습 |
로코솝스키뿐만 아니라 소련군에 있던 여러 폴란드계 소련인들이 폴란드군에 들어와서 지휘관이나 부사관을 역임하였는데 그 수는 7천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폴란드군의 간부 상당수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제2공화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군부를 공산당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수많은 폴란드군 장교-부사관이 전사 또는 학살되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숙련된 간부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국방장관으로서 폴란드 인민군에 대한 기여는 명암이 갈린다. 일단 군의 수장으로서 공산체제와 맞지 않는 제2공화국 시절부터 복무해 왔던 고참 폴란드군 장교들을 군에서 추방하고 반소적인 장교는 숙청했지만 폴란드군의 재건에는 큰 역할을 했다. 국방장관으로서 폴란드 정부에 엄청난 예산을 요구했고 소련의 눈치를 보던 폴란드 인민공화국 정치인들은 이를 소련의 요구로 해석해 경제에 부담이 되는데도 승인해서 거액의 국방비가 폴란드군에 배정되었다. 그리하여 2차 대전 시절에 기계화가 미진하여 기병에 의존하던 폴란드군은 빠른 속도로 소련식의 기계화보병으로 모양을 갖추게 되었으며 폴란드군의 군복이나 경례법(두 손가락 경례) 등도 전통을 존중하여 소련식으로 바꾸지 않고 제2공화국 시절대로 유지하는 데 찬성했다.[15] 런던에 있던 반공적인 폴란드 망명정부에서 일하던 고위 장성들이 마음을 바꿔 귀국하려고 하자 이를 허용하고 공산체제 이전의 군 경력을 인정하여 연금을 받게 해 주기도 했다.
문제는 로코솝스키는 지나치게 러시아화되어 있어서 폴란드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살아 폴란드어가 무척 어눌해서[16] 폴란드군 행사 때도 러시아어로 연설했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어 독해나 청해가 잘 안 되어서 자신에게 올리는 보고나 보고서는 모두 러시아어로 말하거나 작성하라고 명령했다.
폴란드 국민들은 폴란드 침공, 카틴 학살로 소련이나 러시아에게 크게 당했기 때문에 소련군에서 커리어를 쌓아서 폴란드의 고위직이 된 그를 "스탈린의 총독"으로 생각하여 싫어하고 불신했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그를 좋게 볼 리가 만무했다. 그리하여 로코솝스키 같은 "소련 앞잡이"들은 폴란드 민족주의자 입장에서는 불신 정도가 아니라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두 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에 그는 "러시아에서는 나를 폴란드인이라고 했는데, 폴란드에서는 나를 러시아인이라고 한다."[17]며 나름 씁쓸한 감정을 나타냈다.
여기에 공산정부는 여러가지로 폴란드의 사회주의화를 강행하면서 지주-귀족 숙청, 전직 국내군[18] 인사 숙청, 반소 게릴라 진압, 강제수용소 운용 등의 여러 억압책을 펼쳤는데 이는 소련 출신인 로코솝스키의 지시로 간주되어 폴란드에서 로코솝스키는 소련의 대리인으로 여겨져 증오의 대상이자 국민 욕받이가 되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자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에서는 반소 자유화 운동이 발생하였다. 공산정부는 비밀경찰, 고문과 강제 수용소를 동원해 소련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사들을 잡아들였으며 1956년 포즈난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에는 1만 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를 동원해 군중에게 발포까지 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켜 74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는 국방장관인 로코솝스키 지시로 받아들여졌고 폴란드에서의 로코솝스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하지만 폴란드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로코솝스키가 무력사용을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어서 이의 책임유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당대 폴란드인은 그가 소련의 명령을 받고 포즈난 무력진압을 지시했다고 여겼다.
포즈난 봉기 때문에 기존 공산당 지도부는 모두 사퇴하고 공산당 내 개혁파인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19]가 집권했는대 고무우카는 로코솝스키에게 유혈사태의 책임을 물어 국방장관에서 해임했다. 소련 지도자 흐루쇼프는 폴란드 신정부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무우카가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과의 동맹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고무우카 정권을 승인했다.[20] 폴란드 신정부는 로코솝스키가 폴란드에 머무르겠다면 현역에 있을 때와 동일한 연금을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로코솝스키는 이를 거부하고 폴란드군에 복무하던 폴란드계 소련인들과 함께 소련으로 떠났다. 흐루쇼프는 로코솝스키에게는 폴란드 귀화 이전 소련 직위를 다시 내리며 달랬다.
포즈난 봉기의 유혈진압은 당시 공산당에서도 과오나 실책으로 여겨지던 만큼 새로 집권한 고무우카로서는 소련인으로 간주되던 로코솝스키를 파면하는 것이 민심을 달랠 수 있던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로코솝스키도 본인을 계속 러시아의 앞잡이로 간주하던 폴란드에 별로 정이 없었는지 파면되자 미련없이 폴란드를 떠났고 폴란드에 있던 재산도 소련으로 가져가지 않고 폴란드에서 자신을 보좌하던 부하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21]
2.6. 사망
흐루쇼프는 1956년에 폴란드에서 돌아온 로코솝스키에게 이전의 직위를 모두 복원해 주고 처음에는 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이후 국방차관으로 중용했으나[22]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 항공원수에 의하면 1962년 한 사건 때문에 흐루쇼프의 눈밖에 나서 바로 해임되었다고 한다. 흐루쇼프가 로코솝스키에게 스탈린 시절을 비판적으로 회고하라는 글을 쓰라고 명령했는데 로코솝스키는 "스탈린은 저에게 은인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고 다음날 바로 해임되었다는 것이다. 로코솝스키는 스탈린 때문에 죽을 뻔했지만 스탈린 휘하에서 원수까지 승진한 것도 사실이므로 은인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하다.1968년에 전립선암으로 사망한 후 현충원 격인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다. 사망 전날 회고록에 서명했고 회고록은 사망 후 출판되었다.
3. 평가
학자들은 로코솝스키가 독소전쟁의 분수령에서 항상 선봉을 자처하여 날카롭고 뚝심 있게 승리를 이끌어 낸 전형적인 맹장이자 소련 승리의 큰 공신으로 평가한다. 에르빈 롬멜이나 조지 S. 패튼에 비교되는 인물이다. 소련군 내에서도 독소전쟁에 활약한 일선 야전 사령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군인으로서의 로코솝스키는 흠 잡을 데 없는 인물로 부하들은 그를 정직하며 겸손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은 동유럽 점령지에서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다고 평가받는다. 현재도 러시아에서는 로코솝스키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모스크바에는 로코솝스키 거리가 있다.반면 로코솝스키의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소련의 앞잡이, 매국노로 그의 재임 기간을 흑역사 취급하고 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민주화된 지금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고 1950년대 후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등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집권했을 때부터 이미 흑역사 취급을 받았다. 이는 그가 소련의 위성국이 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소련 총독 쯤으로 간주되었던 먼큼 폴란드의 반소파는 물론이고 이후 집권한 민족주의 공산주의자들도 사회주의화로 야기된 모든 부작용이나 공산주의 억압통치를 그의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로코솝스키는 실제로 폴란드에서 스탈린식 독재정치를 편 당시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대통령이 먹을 욕을 대부분 대신 먹었던 셈이다.
벨라루스에서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정권으로 대표되는 친러 진영에서는 소련 계승의식이 매우 강하다 보니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를 구국영웅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벨라루스 민족주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반러 진영에서는 그냥 외국(러시아)의 위인 정도로만 취급한다. 후자는 로코솝스키가 나치 독일을 물리친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러한 업적을 그저 소련 군인으로서의 업적으로만 여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가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전까지는 로코솝스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소련 시절을 흑역사로 여기는 분위기가 기존보다 더욱 강해지면서 로코솝스키를 그저 소련의 위인으로만 여기고 자국의 위인으로 여기지는 않게 되었다.
4. 기타
- 로코솝스키 휘하의 군의관이었던 예프로시냐 그리고리예브나 브레우스는 동프로이센에서 벌어진 한 전투에서 같은 부대에 있던 남편을 잃었다. 전사자들은 거대한 공동묘지에 한데 묻는 게 원칙이었으나 예프로시냐에게는 집은 물론이고 자식, 사진 등 그를 추억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규정을 어기고 남편을 추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고향에 그의 무덤을 만들 어주기로 했다. 예프로시냐의 이러한 요청은 당연히 무시당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총사령관이었던 로코솝스키를 두 번이나 찾아가서 사정했다. 로코솝스키는 처음에는 전쟁 중 타국에서 전사한 병사가 얼마나 많은데 유난을 떠냐며 불허했고 두 번째 만남에서도 그럴 기세였으나 '총사령관님은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예프로시냐의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춘 후 딱 하루만 휴가를 주고 예프로시냐와 그녀의 남편의 시신이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자신의 전용기를 내줬다고 한다.[23]
- 가족들에게 대숙청에 대해 한번도 얘기하지 않았다. 감옥에 있을 때 총살장으로 두번이나 끌려나가 공포탄 사격을 당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친한 친구인 카자코프에게만 털어놓은 것이었다.[24] 가족에게 유일하게 언급한 건 왜 항상 권총[25]을 지니고 다니냐는 딸 아리아드나의 물음에 "그들이 날 다시 찾아온다면 죽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 자서전으로 '군인의 의무'가 있다.
- 아르덴 대공세 당시 직접 교통 정리를 한 발터 모델에 비하면 인지도가 한참 부족하지만, 로코소프스키 역시 원수 신분으로 본의 아니게 직접 교통 정리를 하게 된 일화가 있다. 모델의 일화가 미담이라면 이쪽은 코미디극에 가깝다. 자세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제2벨라루스 전선군의 후방에서 한번은 젊은 여성 교통 통제관 리디아가 길을 막고 있던 어떤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 리디아는 운전병에게 고래고래 욕을 퍼붓기 시작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시끄러운 욕설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뜻밖의 지원군이 있었다. 키 크고 외모가 인상적인 로코솝스키 원수였다. 로코솝스키는 화가 나서 권총을 뽑으며 자신의 차에서 뛰어내렸다. 운전병은 원수를 보고 말 그대로 공포로 몸이 마비되어버렸다. 차에 타고 있던 장교도 넋이 나갔다. 그는 차에서 뛰어내려 근처 덤불로 달려가 숨었다. [26]
어찌 보면 로코솝스키의 불 같은 맹장의 면모가 드러나는 일화.
- 폴란드인이면서도 외국의 명장이란 점에서 나폴레옹 밑에서 활약한 포니아토프스키와 비슷하지만 오늘날 폴란드에서 영웅으로 존경받는[27] 포니아토프스키와는 달리 로코솝스키는 바르샤바 봉기의 외면[28]과 폴란드군 원수 시절 반소 봉기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소련의 국익만 생각한 매국노 겸 소련인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 파벨 바토프와 절친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부터 바토프의 제65군은 로코솝스키의 군에 베를린 전투 때까지 껌딱지처럼 붙어다녔다. 전후에 로코솝스키의 회고록 쓰는 걸 도와줬으며 그의 사후 모든 편집 및 디자인 등을 바토프가 맡았다.
- 결혼한 처와 딸이 있었지만 진중 여성 군의관과의 사이에서 사생아(1945년생)를 두었다.
- 1945년 6월 24일에 열린 승리 퍼레이드 때 비가 내려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집에 돌아온 로코솝스키는 몸에 딱 달라붙은 예복을 벗지 못했고 결국 딸이 가위로 이음새를 따라 옷을 잘랐다고 한다.
- 모스크바 지하철 1호선 1번역 불바르 로코소브스코보 역 근처에 로코솝스키 대로가 있는데[29] 가운데에 기다란 공원 같은 산책로가 꾸며져있어서 지역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공원 맨 끝에는 승리 퍼레이드 때 로코솝스키를 묘사한, 칼을 빼들고 말을 타고 있는 로코솝스키 동상이 세워져있다. 로코솝스키의 손자를 포함한 후손들은 이곳에 동상이 세워진 이후로는 승리의 날 때 크렘린 벽 묘지에 가지 않고 이곳 동상에 헌화하며 그를 기린다고 한다.[30]
5. 서훈 목록
-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 전승훈장
- 레닌훈장 7회
- 적기훈장 6회
- 수보로프 훈장 1등급
- 쿠투조프 훈장 1등급
- 성 게오르기 십자장 4등급
- 성 게오르기 메달 2등급
- 성 게오르기 메달 3등급
- 성 게오르기 메달 4등급
- 비르투티 군사훈장
- 그룬발트 훈장
- 바스훈장 명예기사십자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 (2급)
6. 진급 이력
- 1940년 6월 4일: 소장
- 1941년 9월 11일: 중장
- 1943년 1월 15일: 상장
- 1943년 4월 28일: 대장
- 1944년 6월 29일: 원수
- 1949년 11월 5일: 원수 (폴란드 인민공화국)
[1] 본래 미들네임(부칭)은 폴란드어식인 크사베리예비치(Ксаве́рьевич)였지만 1917년 콘스탄티노비치(Константи́нович)로 바꿨다고 한다.[2] 혼전 성은 옵샨니코바[3] 독소전 당시 제85야전병원 군의관.[4] 1925년 ~ 1978년[5] 갈리나 소생.[6] 출처마다 키가 다른데 6피트 4인치, 즉 193cm이라는 곳도 있고 198cm라는 곳도 있으며 로코솝스키 평전 서문에는 거의 6피트 5인치, 즉 거의 195cm라고 서술되어 있다.[7] 러시아어식으로 크사베리 유제프 로코솝스키(Ксаверий Юзеф Рокоссовский). 국립국어원의 러시아어 표기법을 따르면 '로코솝스키'이지만 폴란드어 표기법을 따르면 '로코소프스키'이다.[8] 게오르기 주코프의 경력와 비슷하다.[9] 이때 석방 통지서에 유무죄 여부의 언급이 전혀 없었던 탓에 한때 로코솝스키가 사형수 신분으로 석방되었다는 루머가 꾸준히 돌았으나 사실은 다르다. 비슷한 방식으로 석방/복직된 지휘관이 꽤 많았으며 이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의 졸전과 함께 나치 독일과의 개전 가능성이 조금씩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경험 있는 지휘관의 숫자가 부족하다는 점이 부각된 결과였다. 로코솝스키만 특혜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단지 장성급 숙청 대상자로서 복직된 사람들 중 가장 큰 활약을 했기 때문에 주목을 끌었을 뿐이다.[10] 로코솝스키는 주코프와의 인맥도 있었고 여러모로 운도 좋았다. 주코프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지 못했다가 개전 직후 이송되지 못하고 집단처형당한 장성들도 많다. 연방영웅 칭호를 2번이나 받고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했던 야코프 스무시케비치 공군소장조차도 독소전쟁 개전 2주 전 체포되어 재판과 증거 없이 4개월 후 총살당하기도 했다.[11] 야전군중 하나가 로코솝스키의 절친인 파벨 바토프의 65군이였다.[12] 이전까지는 소련군에게 공세종말점이란 개념이 희박했다. 소련군은 큰 틀을 짜놓으면 세부적인 전술 차원에서 작전목표를 정하고 움직이기보단 T-34를 위시한 소련 기갑부대의 특출난 기동성을 바탕으로 전략적 차원의 목표를 보고 진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지휘관은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진격을 멈출 수 없었다. 당시 소련군 교리는 한번 공세를 개시하면 맨 앞에서 선봉으로 진격하던 부대가 재편성이 필요한 경우 그 부대는 재편성을 위해 놔두고 뒤따라오던 후속부대들이 계속 진격하며 그 후속부대가 재편성이 필요하면 그 뒤에 따라오는 부대가 진격을 속행하는 식으로 한순간의 지체 없이 목표지점까지 최대한 단시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전법을 수립해 놓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조달이나 보급선 유지는 오로지 해당 지휘관의 몫이었으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도 있었다.[13] 별이 3개지만 상장이 아닌 중장이다. 장성용 카라 한정 미리 별 하나를 박아두기 때문이다.[14] 가운데는 게오르기 주코프, 카메라를 등지고 베레모를 쓴 건 버나드 로 몽고메리.[15] 폴란드 제2공화국은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의해 흑역사로 간주되던 반동체제였다. 현재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흑역사가 되었지만.[16] 폴란드어와 러시아어는 외국어치고는 슬라브어파로 꽤 가까운 편이라서 서로 60-70%는 통한다. 그런데도 로코솝스키는 폴란드를 떠날 때까지 공개 석상에서도 폴란드어로 연설하기 힘들어서 러시아어를 썼다고 한다. 이를 보아 폴란드인이라는 생각을 스스로도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의외로 국방장관으로서 공개석상에서는 본인은 폴란드인으로서 폴란드군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연설했다고 한다.[17] 원문은 다음과 같다. "Ot, Cymbarewicz, ironia losu, w Rosji ja był Polakiem, a w Polsce Ruskim(이봐, 침바레비치, 운명의 아이러니야. 러시아에서 나는 폴란드인이었는데, 폴란드에서는 러시아인이라고)." 1956년에 폴란드를 떠나면서 이 말을 남겼다. 프란치셰크 침바레비치(Franciszek Cymbarewicz)는 로코솝스키처럼 소련군에서 복무하다가 폴란드 인민군으로 발령받은 케이스인데 로코솝스키와 달리 끝까지 폴란드에 남았고 2000년 5월 27일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18] 나치에 저항한 국내군 상당수가 역시 반공적이었기 때문이다.[19] 정작 이 사람도 나중에 어영부영한 정책 집행으로 인민들에게 실망감을 주어 1970년 노동자 투쟁 때 책임을 지고 사실상 지도자 자리에서 실각했다.[20] 몇 달 후인 1956년 헝가리 혁명 때 집권한 개혁파 공산주의자인 너지 임레는 고무우카와는 달리 소련과의 동맹을 파기하려고 했기 때문에 소련군이 침공했고 결국 본인도 소련군에게 붙잡혀 처형된다.[21] 영어 위키백과 문서에는 로코솝스키가 소련으로 돌아가 흐루쇼프에게 폴란드를 침공하라고 부추겼다는 주장이 서술되어 있지만 그 주장의 출처는 failed verification이라고 적혀 있다. 그다지 신빙성 있는 출처가 아닌 듯하다. 게다가 다혈질로 여러 악평이 많았던 주코프와는 달리 여러 부하들이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로코솝스키의 인성을 보면 아무리 폴란드에서 소련의 앞잡이로 경멸을 받았다고 해도 바로 직전까지 자기의 지휘를 받던 폴란드인 부하들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상식이 없을 것 같지는 않다.[22] 당시 소련 국방장관은 흐루쇼프의 측근인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였다.[23] 출처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400~402p[24] 카자코프가 떠벌리고 다닌 것은 아니고 카자코프의 아내가 훗날 로코솝스키의 유족들에게 전해줬다. 덕분에 러시아 미디어물에서는 총살장으로 끌려나가는 로코솝스키가 자주 묘사되는 편이다.[25] 파울루스 원수의 권총이다.[26] 출처: 앤터니 비버, <베를린 함락 1945> 203~204p[27] 포니아토프스키가 나폴레옹 밑에 들어간 것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로 인해 갈라져 점령되어 버린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였다.[28] 소련군의 전력 소진이라는 나름의 사정도 있었고 폴란드 인민군 4개 사단을 보냈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도와주진 않은 것이 문제였다.[29] 불바르 로코소브스코보라는 이름이 로코솝스키 대로라는 뜻이다.[30] 크렘린 벽 묘지는 레닌 영묘를 통과해야 갈 수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지 않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