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8:54:04

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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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1892~1938

Nikolai Kondratiev. 소련의 경제학자.

2. 생애

1892년 3월 4일 러시아 제국 코스트로마 주에서 출생하였다. 인민주의에 공감한 학자로서 사회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사회혁명당이 좌 · 우파로 분열할 때, 우파의 편에 서서 활동했다. 많은 사회혁명당원, 멘셰비키, 기타 사회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소련이 수립된 뒤에는 콘드라티예프도 소련에 합류해 학술 연구와 연방의 경제 분야에서 활약했다.

1922년부터 소련의 경제 발전과 경제학에 관한 논문을 쓰기 시작했고, 이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40년에서 60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된다는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을 발표하였다. 다만, 콘드라티예프의 이론은 비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일부 볼셰비키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렇지만, 신경제 정책 시기부터 콘드라티예프는 중용받아 입지와 영향력이 대폭 강화되었고 레닌과 스탈린도 네프를 지지했기 때문에 콘드라티예프에 대한 비판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래서 콘드라티예프는 네프 시기부터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자신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도시로의 식량 공급 문제가 심화되자 신경제 정책에 대한 찬 · 반 갈등이 극심해졌다. 원래 스탈린은 부하린의 편을 들어주며 신경제 정책을 유지할 것을 주장했지만, 좌익 반대파를 쳐낸 뒤에는 입장을 바꿔서 네프 중단을 천명했고 이 과정에서 희생된 것이 콘드라티예프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볼셰비키와 충돌했던 사회혁명당 우파 출신의 인민주의자였고 스탈린파의 눈에는 부하린의 볼셰비키 우파와 입장이 유사해 보였다.

게다가 정책 분야에서는 네프와 농 · 공 균형 발전론을 지지하고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와는 다른 토지 사회화에 기반한 협동조합화와 자발적 집단화 이론을 펼치고 있었기에 스탈린의 중앙파에게 콘드라티예프는 불순 분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스탈린파와 그들과 입장을 같이하던 경제학자들은 콘드라티예프에 대해 가열찬 비난을 퍼부은 다음, 그의 입지를 대폭 약화시키고 활동도 위축시켰다. 1930년, 스탈린 정권은 근로인민당 사건을 일으켜 그를 체포한 뒤에 32년 비공개 재판에서 8년형을 선고하고 투옥했다. 이 과정에서 콘드라티예프는 자신과 함께 사회혁명당원이었던 차야노프와 마카로프, 멘셰비키 경제학자 그로만, 수하노프 등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들 모두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옥중에서 연구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의 대숙청이 극에 달한 38년 9월 17일에 콘드라티예프는 향년 46세의 나이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콘드라티예프 사후에 그의 저작 중 일부가 공개되었으나, 콘드라티예프가 완전히 사면 · 복권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인 87년이 되어서였다. [1]

당시 소련에서는 대공황으로 유례 없는 경제 위기를 맞이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재기하지 못하고 망할 것이라는 주장이 대세였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의 경기가 침체되어도 다시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콘드라티예프의 이론이 소련 수뇌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 때문에 콘드라티예프가 죽었다는 설이 있으나, 낭설이다.

콘드라티예프의 장기 파동 이론이 비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네프 시기부터 콘드라티예프는 연방 정부로부터 중용받아 비판을 무시하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으며 25년에는 유럽 각국과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이론을 더욱 체계화할 정도였다. 그의 죽음은 공업화와 네프, 농업 집단화 문제로 스탈린파와 마찰을 빚은 게 원인이었지, 장기 파동 이론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스탈린 본인이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약화될 것을 노렸다가 자신이 중용하는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 경제의 탄력성과 서방 국가들이 대공황에서 회복할 것임을 예측하자, 즉시 그 의견을 받아들여 대서방 정책을 수정했을 정도였다.

3. 기타

트로츠키주의자가 비판한 내용이 한글로 정리되어있어 참고할만 하다. #
[1] 당시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을 보면 콘드라티예프를 철저히 조사해 반드시 사살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