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4 16:27:37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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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핀란드의 공영방송 YLE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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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E. 만네르헤임 남작 리스토 뤼티 우르호 케코넨 아돌프 에른로트 타르야 할로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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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herre(Vapaaherra) Carl Gustav Emil Mannerheim (1867년 6월 4일 ~ 1951년 1월 27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러시아 제국군 장교2.3. 핀란드 내전2.4. 전간기2.5. 겨울전쟁, 계속전쟁2.6. 공화국 대통령
3. 평가4. 여담5. 매체에서

1. 개요

핀란드의 군사 지도자, 정치인. 핀란드 내전 당시 백군 사령관, 핀란드 왕국의 국무섭정,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공화국방위군사령관, 제6대 핀란드 공화국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핀란드 역사에 유일한 대원수(핀란드의 원수)다.[1] 화려한 전쟁영웅이고 실제로 나라를 구하기도 했지만, 그 과정이나 결과가 모두 무결점의 영웅인 것처럼 과대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과대평가는 어느 정도 핀란드 국민정체성 형성을 위한 만들어진 전통이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핀란드의 최고위 스웨덴계 귀족 중 하나인 만네르헤임가에서 태어났다. 만네르헤임의 증조부 칼 에리크 만네르헤임 백작은 핀란드가 막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넘겨졌을 때 여러 공직을 지냈다. 그는 원로원 경제부부장으로서 말하자면 오늘날의 핀란드의 총리의 전신에 해당하는 직책의 초대 역임자였다. 만네르헤임의 조부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백작은 법관이며 또한 곤충학자였다. 부친 로베르트 만네르헤임 백작은 사업가였다.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은 태어나면서 백작의 삼남으로서 남작 작위를 받았다. 1880년 부친의 사업이 파산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만네르헤임의 부친은 전재산을 처분한 뒤 정부와 함께 파리로 가서 보헤미안이 되었다. 모친은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죽었다. 만네르헤임 7남매는 친척들에게 맡겨졌고,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은 그 중 외삼촌이 후견인이 되었다. 재정 악화로 진로 문제가 심각해지자 외삼촌은 만네르헤임에게 군인의 길을 권했고, 만네르헤임은 하미나의 핀란드인 간부후보생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좁아터진 지역사회에 염증이 나서 반항 목적으로 무단외출을 했다가 퇴학당했다.

핀란드군에 들어갈 길은 막혀 버렸고, 결국 만네르헤임은 러시아로 건너가 러시아 군인으로 임관받는다. 발트 3국 지역의 독일계 귀족들이 러시아 황제에게 충성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듯이(카를 베베르 등), 만네르헤임 역시 러시아 황제를 섬긴다는 생각에 별 의문이 없었다. 이런 중세적인 사고방식은 만네르헤임의 삶에서 여러 번 그 편린을 드러낸다. 만네르헤임은 니콜라이 기병학교에 입학해 1887년 러시아 황제에게 충성맹세를 했다. 1889년 우수한 성적(전교 10등)으로 학교를 입학하고 기병소위로 임관해 독일 국경지대의 제15용기병연대에 배속되면서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2.2. 러시아 제국군 장교

1891년, 만네르헤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후친위기사연대에 배속되었다. 황실친위대이니만큼 용모가 수려해야 했는데, 187 센티미터에 이르는 장신의 덕을 보았다. 그 덕에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코앞에서 직접 보기도 했다. 친위기사연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만네르헤임은 1897년부터 황실 마구간 관리 일을 맡으며 군마 전문가가 되었다. 1903년 교도대 대장으로 발령받아 기병연대 훈련소 승마교관이 되었다.

만네르헤임은 1892년 대모의 중매결혼으로 부유한 러시아 귀족 영애와 결혼했다. 부부는 슬하에 2녀 1남을 낳았는데 막내인 아들은 사산되었다. 만네르헤임은 1902년 별거했고, 1919년 이혼했다. 부자 아내와 이혼하자 당장 생활고가 닥쳐왔고,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궁핍으로 인한 우울증을 전장으로 도피하여 해결하고자 만네르헤임은 자원 참전했다. 1905년 봉천 전투에서 승리한 만네르헤임은 그 공으로 대령으로 승진했다.

한편 만네르헤임이 지구 반대편에 가 있는 동안 핀란드에서는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만네르헤임은 조국의 그런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청나라에 대한 첩보임무를 받아 투르키스탄을 거쳐 베이징까지 가는 탑사여행길에 올랐다. 만네르헤임이 카스피해에서 중국행 열차를 타는 동안 혁명을 일으킨 핀란드 민중들은 세계 최초의 완전한(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모두 부여) 여성참정권을 포함한 의회제도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만네르헤임은 시안, 정저우, 카이펑을 거쳤다가 불교 성산 오대산에서 달라이 라마 13세를 만났다. 그 뒤 내몽골에서 만네르헤임은 한족들이 몽골인의 방목지를 잠식하고 있어 몽골인들 사이에 불만이 심각함을 보고했다. 만네르헤임은 러시아 군부에 올리는 보고서에서 신강성을 중국과 "거래대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1909년 러시아로 귀환한 만네르헤임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소장으로 진급해 별을 달았다. 그 뒤 바르샤바 주둔 황제경호친위창기병연대 연대장, 황실수행단, 독립친위기병여단장 등 요직을 돌았다.

제1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만네르헤임은 친위기병여단장이었으며, 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싸웠다. 1914년 12월, 만네르헤임은 용전분투의 상으로 4등급 성 게오르기우스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만네르헤임은 "이제 편히 죽을 수 있겠다"며 매우 만족해 했다.

2.3. 핀란드 내전

1917년 초 휴가를 받아 후방으로 온 만네르헤임은 2월 혁명과 황제의 몰락을 목격했다. 그해 여름 제6기병군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케렌스키 정부가 자신을 반혁명분자로 간주하자 러시아 공화국에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다. 만네르헤임은 낙마 후유증으로 골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보직해임을 청했다. 예비역으로서 오데사에서 요양을 하다 아예 퇴역을 하고 핀란드로 귀국하기로 했다.

명문귀족의 자제이자 몰락했다가 자수성가로 부활했으며 종주국의 군대에서 중장까지 단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우파들에게 우상적 존재였다. 향후 독일이 핀란드를 정복할 때를 대비하여 러시아군 내의 핀란드인 장교들이 1915년에 만든 군사위원회(Sotilaskomitea)라는 사조직이 있었는데, 전쟁이 다 끝나가던 1918년 만네르헤임은 그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30년 만에 핀란드로 돌아온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어를 잊어서 새로 배워야 했다. 훈장을 받고 "이제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황제에 충성했기에 황제를 몰아낸 러시아 공화국에 등을 돌렸던 것이다. 향후 러시아 내전에서 활약하는 대부분의 백군 장군들이 이런 식으로 군벌이 되었는데, 다만 만네르헤임은 돌아갈 핀란드가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만네르헤임이 귀국한 시점에서 핀란드 정치는 개판이 되어 있었다. 앞서 말했듯 핀란드는 1906년 의회개혁으로 당시 기준 어느 선진국도 하지 못했던 매우 진보적인 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핀란드는 러시아 속령이었고, 국가원수인 러시아 황제가 수틀리면 의회는 해산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17년 2월 마침내 황제가 없어짐으로써 핀란드는 훌륭한 제도를 제대로 한번 굴려 볼 기회를 얻었다. 해산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성장한 정당은 단연 핀란드 사회민주당이었다. 사회민주당은 선거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었고, 1916년 3월 총선에서는 다른 정당과의 연정 없이 단독 과반을 달성했다. 이 선거로 성립된 오스카리 토코이 원로원(핀란드 대공국의 행정협의회)은 핀란드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제외한 모든 행정권력을 러시아로부터 회수하고, 그 권력을 원로원이 아닌 의회에 부여한다는 "권력법"을 발의했다. 사회민주당이 단독 과반이었으니 이 법은 당연히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하지만 종주국인 러시아 공화국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좌익에 의해 독립이 되면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는 좌익이 국가를 주도할 것을 두려워한 핀란드 우파들은 모스크바의 케렌스키에게 쿠데타를 사주했다. 케렌스키는 핀란드에 병력을 파견해 토코이 원로원을 해산했다.

다시 치러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의석을 얻었고, 나머지 중도-우익 정당들이 다같이 연정하여 겨우 여당이 되었다. 핀란드의 노동계급 사이에서는 거대한 분노가 피어나기 시작했고, 그리고 압도적 제1정당임에도 사회주의가 싫다는 것 외에 아무 공통점도 없는 다른 정당들이 뭉쳐서 불법적 수단을 사용하니 자신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더해졌다. 이제 의회주의, 민주주의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파 역시 그런 분위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좌익세력들에 대항하기 위한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네르헤임이 귀국한 것이다.

스웨덴계 귀족으로 법관 출신인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가 러시아군 중장인 만네르헤임에게 핀란드군 대장 계급을 수여해 주었다. 그리고 만네르헤임이 신생국 핀란드 군부의 수장이며 자신들이 조직한 우익 민병대가 군대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좌익세력들과 노동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즉시 무장봉기했다. 핀란드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뼛속까지 러시아 근황주의자였던 만네르헤임은 스빈후부드를 비롯한 우파 정치인들이 독일과 유착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일단 좌익세력들과 싸워야 하니 총사령관직을 받아들였다. 핀란드 내전은 앞으로 6.25 전쟁 등에서 되풀이되는 공산주의 vs. 반공주의 내전에서 발생하는 온갖 끔찍한 일들이 미리 다 벌어진 아수라판이었다. 이런저런 학살 및 수용소에서의 학대로 사망한 피해자 수치는 3.6만 명 정도로, 이것은 핀란드 인구의 1%에 달했다. 좌익과 우익 모두 전쟁범죄를 저질렀지만, 발생빈도는 6:1 정도로 우익에 의한 전쟁범죄가 압도적이었다.

만네르헤임은 이 전쟁범죄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1918년 2월 25일, 만네르헤임은 포로에 대한 처우를 각 제대 지휘관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쉽게 말하자면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하는 것을 정당화하겠다는 말이다. 이런 성명을 발표하게 된 것은 정치적 문제 때문이었다. 외환죄를 근거로 사형을 집행하려면 외국과의 전쟁이 진행 중이어야 한다. 하지만 핀란드 내전은 어디까지나 핀란드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외세의 지원을 받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핀란드 백군은 사로잡은 적군 포로를 외환죄로 사형에 처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외환죄 적용이 가능하게 하려면 방법은 계엄령뿐이었는데, 계엄령은 러시아 지배 시기 워낙 악용되었기에 민중들의 증오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스빈후부드 원로원은 그런 정치적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았고, 적군(reds) 가담자들을 박멸해야 할 "적군(enemy)"이 아닌 "무장한 민간인(armed civilians)"으로 취급했다. 반면 만네르헤임으로 대변되는 군부는 빨리 다 죽이게 계엄령을 내리고 핀란드 적군을 "적국(enemy state)"으로 간주해 선전포고하라고 요구했다.

원로원과 군부의 이런 이해관계의 타협안으로 나온 것이 만네르헤임의 성명이었다. 백군 지휘관이 적군 포로를 죽이거나 해쳤다면,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도주나 반항으로 인해 위협을 받은 백군 측의 정당방위라는 논리였다. 그래서 포로들을 풀어주고는 "포로들이 도망간다!"라며 등에 총을 쏴 죽이는 일도 빈번했다.

논리야 무엇이든 결국 핵심은 학살이었다. 내전의 특성상 민간인들을 포로와 구분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백군은 그들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핀란드 내전에서 누가 "전사"했다고 하면 그것이 싸우다 죽은 것인지 아니면 포로로 잡혀서 그 자리에서 학살당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이후 승세가 백군 쪽으로 기울고 군법회의소가 정식으로 만들어지면서 포로들에게도 재판을 받을 권리가 주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포로들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수용소에서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이미 금지된 즉결총살을 당했다. 적군에는 공장 노동자로서 노동조합 활동에 참가한 여성들도 약 2000명이나 참여했다. 이들은 남자 포로들보다 더욱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결국 독일 제국군이 상륙하면서 수준을 달리하는 독일군의 직접개입으로 순식간에 내전이 평정되었다. 그런데 러시아를 몰아내니 이제 독일이 말썽이었다. 독일은 핀란드에 빌헬름 2세의 매제를 왕으로 꽂아줄 생각이었고, 독일군은 핀란드 내전이 끝난 뒤에도 독일에 머무르며 점령군으로서 내정간섭을 했다. 한편 만네르헤임은 러시아 근황주의자였기 때문에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여 공산당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독일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핀-러 간 국경을 (당연히 핀란드의 동의 없이) 미리 정해 놓았기 때문에 거부했다. 조만간 서부전선에 올인을 해야 하는데 겨우 잠잠해진 동부전선을 다시 들쑤실 이유가 없었다. 만네르헤임은 자신의 반공십자군(?) 계획이 거부당하자 빈정이 상해서 총사령관직을 내던져 버렸다.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의 패배가 기정사실화되는 가운데, 만네르헤임은 1차대전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원로원이 취한 친독일 정책에 연합군이 보복해올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과 거리를 두기 위해 1918년 6월 스웨덴의 문중을 방문한다는 핑계로 혼자 튀었다. 1918년 10월, 독일의 압력을 받은 원로원과 의회는 빌헬름 2세의 매제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 공자를 핀란드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불과 1달 뒤 독일이 서부전선의 올인에서 손모가지가 날아가면서 핀란드의 독일군도 철수하고, 헤센 공자도 왕위를 포기했다. 그러자 만네르헤임은 스톡홀름에 주재하는 연합국 외교관들을 만나고 다니며 자신은 원로원의 정책에 반대했고 연합국을 지지했다고 변명했다. "만본좌님이 핀란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불러온 독일의 영향력이 커질까봐 물러나셨다"는 서사는 사실이 아니다. 만네르헤임은 친러(제국)파였고, 독일은 스빈후부드가 불러온 것이다. 스웨덴 외유는 자기 작전이 독일에게 기각당하자 빈정상해서 + 독일의 패배가 명확해지니 살 길을 찾으러 간 것일 뿐이다.

12월, 핀란드로 소환된 만네르헤임은 스빈후부드의 후임 국무섭정으로 선출되었다. 핀란드를 왕국으로 만들기로 했는데 왕이 증발해 버린 상황이니, 훗날의 호르티 미클로시처럼 일단 섭정만 있는 왕국을 만든 것이다. 이 때 몇몇 군주주의자들이 만네르헤임에게 왕이 되라고 청했지만 만네르헤임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거부했다. 공화국 여론이 강한데 독일이 억지로 만든 왕국이었다. 게다가 해외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연합국이 승리했다. 이 시점에서 핀란드의 왕관은 독이 든 사과도 아니고 그냥 독약이었을 뿐이다. 만네르헤임은 그런 것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센스가 있었다. "국민들이 만네르헤임을 핀란드 왕국의 왕으로 추대했지만 애국자 만네르헤임이 거부했다"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

2.4. 전간기

1919년 7월,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왕국 국무섭정으로서 핀란드 공화국으로의 국체 전환에 서명하고 신헌법을 승인했다. 그리고 곧이어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상대는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결과는 143대 50으로 스톨베리가 당선되었다. "만네르헤임이 영웅으로 떠받들여지고 있었지만 내전의 상처가 가시지 않아 미끄러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만네르헤임이 전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었다면 선거에서 스톨베리에게 트리플스코어로 떡발리는 저런 성적을 거둘 수가 없다. 만네르헤임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은 그가 내전기 좌익학살의 주범 내지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내전 직전 민주적으로 단독과반을 획득한 강력한 지지기반을 가진 당이었다. 즉, 살아있는 국민 중 절반이 만네르헤임이 죽여버린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학살한 만네르헤임에게 분노했지만 내전에서 적군으로 가담한 좌파들은 선거에 나갈 수 없었고, 그래서 그나마 우파 중 가장 진보적인 스톨베리에게 표를 몽땅 몰아주었던 것이다. 만네르헤임을 지지한 것은 군주주의파인 핀란드당 및 청년 핀란드당 제비파, 그리고 스웨덴계 민족주의 정당인 스웨덴인당 뿐이었다.

스톨베리는 1906년의 의회개혁, 즉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완전한 참정권을 준 그 개혁의 안을 정초한 헌법학자였다. 내전 직후 국체 문제로 청년 핀란드당이 분당될 때 그는 공화주의자들을 참새파로 규합해 스빈후부드 등 제비파와 맞섰다. 1917년 핀란드가 독립하면서 새로 쓰게 된 헌법도 거의 그가 정초했다. 스톨베리는 매사에 자신이 초대 대통령으로서 후대의 전범이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처신했다. 이원집정부제 대통령으로서 총리에게 간섭하지 않았으며, 내전기 적군 가담자들도 국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온건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하고, 1920년에는 적군 가담자 거의 대부분을 사면했다. 이 때 군부의 강경한 비판이 있었지만 스톨베리는 사면을 강행했다. 하지만 이 사면으로 인해 내전기 전쟁범죄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성이 흐려져 만네르헤임의 혐의도 조용히 묻혀가게 되었다.

1922년에는 스톨베리의 중도적 정책에 신물이 난 군부 내 스웨덴계 사조직의 지령을 받은 백색 테러리스트가 스톨베리의 측근인 내무장관 헤이키 리타부오리를 자택 앞에서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간기 내내 핀란드를 괴롭힌 극우의 부상의 전조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1930년 7월, 자생적 파시스트인 라푸아 운동이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처럼 헬싱키로 진군하여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해 관철시켰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제 전직 대통령이 된 스톨베리와 그 아내가 이 파시스트들에게 납치당해 소련 국경까지 끌려갔다가(두들겨 팬 뒤 시체를 소련 국경 너머에 갖다 버리려고 끌고갔다) 겨우 구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직 대통령 같은 요인이 피습을 당할 정도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만네르헤임은 대통령 선거에 낙선한 이래 정치에 관심을 끊었다. 그는 헬싱키 은행 감사회장, 노키아 이사회 중역 등 기업 지분들을 가지고 배당금을 받아 살며 전세계에 수렵여행을 다녔으며, 한편으로 핀란드 적십자 총재를 역임하고 만네르헤임 아동복지협회(Mannerheimin Lastensuojeluliitto)를 창설하는 등 유유자적하고 비정치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가 정치에 관심을 끊은 이유는 정당정치나 민주주의를 불신했기 때문인데, 이는 2차대전 이후 독재자들의 논리마냥 "핀란드는 아직 후진국이라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라는 생각과는 다르다. 만네르헤임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불신하여, 전세계 어디에서든 제대로 된 지도자를 세울 수 있는 제도인지 의문시했다. 그가 보기에는 자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꾼들에 의해 국익이 침해당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공화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평민들 놀음에 끼고 싶지 않았기에 대통령 낙선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1929년에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만네르헤임을 찾아가 군사독재자가 되어달라고 하였으나 만네르헤임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극우 사상에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로 핀란드판 파시즘 운동인 라푸아 운동에 일부 지지를 나타내기도 했다.

1931년, 3대 대통령이 된 스빈후부드가 만네르헤임에게 방위평의회 주석직을 맡기고 전쟁이 일어날 시 육군총사령관으로 삼는다는 서면각서를 주었다. 스빈후부드의 후임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도 이 각서를 갱신했다. 방위평의회 주석으로서 만네르헤임은 군수공업에 집중했지만 그가 의도한 대로 재무장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다지 열성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내각과 사이가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사표를 내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2.5. 겨울전쟁, 계속전쟁

그렇게 태업을 하던 만네르헤임의 의욕을 되살린 것은 소련의 위협이었다. 1939년, 소련과 핀란드의 국경 협상이 결렬되었고 전쟁이 임박했다. 만네르헤임은 10월 17일 사직서를 취소했고, 다음달인 11월 30일 소련군은 대대적으로 핀란드를 침공했다. 겨울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개전 당일 만네르헤임은 장병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1939년 11월 30일 공화국 대통령께서 본인을 이 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셨다. 핀란드의 용맹한 병사들이여! 나는 우리의 뿌리깊은 적이 다시금 우리의 강토를 짓밟으려 하는 이 시점에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승리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지휘관에 대한 신뢰이다. 그대들은 나를 알고 나도 그대들을 알며 계급을 막론한 모두가 각자의 의무를 심지어 죽음에 이르러서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안다. 이 전쟁은 우리의 독립전쟁의 연장전이자 그 마지막 장에 다름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믿음, 우리의 국가를 위해 싸운다.
여기서 만네르헤임의 대러시아관의 편린이 다시 드러난다. 핀란드는 전쟁을 해서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사분오열되던 1차대전 말기, 독일제국이 러시아를 산산조각내기 위해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다른 소국들과 함께 독립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네르헤임은 자신들이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독립전쟁이란 다름아닌 핀란드 내전을 말한다. 핀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없던 스웨덴계 러시아 귀족 만네르헤임에게 핀란드인 정체성을 부여한 것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전쟁"과 자신이 거기에 기여했다는 사실이었다.

만네르헤임은 1,000km가 넘는 국경을 모두 방어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소련도 한정된 돌격로만 이용할 거라고 판단했다. 핀란드 북부는 도로 사정도 열악하고 극심한 추위 탓에 대규모 부대의 전개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주요 진격로로 예상되는 카리알라 지협을 중심으로 만네르헤임 선(Mannerheim Line)을 구축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는데 핀란드 국민들도 전폭적인 협력을 보냈다. 독립한 지 20년밖에 안 된 핀란드 국민들에게 이 전쟁은 조국의 존속이 걸려있는 전쟁이었다. 자원 입대자가 줄을 이었고 진지 구축도 자발적으로 나섰다. 미국과 캐나다에 거주하던 핀란드계 이민자들도 핀란드에 돌아와 입대 신청서를 냈다.

11월 29일, 전차 3,200여대, 항공기 3,800여기를 앞세운 26개 사단 460,000명의 소련군이 핀란드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핀란드군의 전력은 33만명, 전차 33대, 항공기 110여기에 불과했다. 게다가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종류를 가리지 않고 총을 나누어준 탓에 정규군마저 개인화기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누가 봐도 소련의 압도적 우세였고 12월 6일까지 소련군은 쾌속 진격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핀란드군은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겨울전쟁에서 거의 완벽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핀란드소련은 국력의 규모가 달랐다. 스탈린은 총사령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해임한 후 세묜 티모셴코를 새 지휘관으로 앉혔다. 티모셴코는 지난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소련군의 지휘와 전술을 바로잡았고 1940년 2월부터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자 90만 명의 병력을 더 투입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핀란드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2주 만에 병력의 절반을 잃었고 결국 만네르헤임 방어선이 무너졌다. 비축한 탄환마저 바닥을 드러내자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정부에 소련과 강화를 맺을 것을 요청했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이 조인되면서 겨울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났으므로 만네르헤임은 군통수권을 대통령에게 반환했어야 했지만 하지 않았다.

소련에게 땅을 뜯긴 충격으로 중풍을 맞은 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은 병을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기로 했다. 대통령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행사인 열병식에서 칼리오는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만네르헤임의 품에 안긴 채 사망했다. 그리고 총리 리스토 뤼티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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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왼쪽에 중절모를 쓴 인물이 리스토 뤼티

소련은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심각한 실수를 하나 했다. 핀란드의 군비를 제한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는 소련이 굳이 제한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평화조약의 내용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 핀란드 국민들은 소련에 이를 갈고 있었지만 겨울전쟁에서 핀란드 병력의 절반이 사라졌고 무엇보다 핀란드가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굳이 군비를 제한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겨울전쟁에서 보여준 핀란드의 전투력을 보고 감명받은 히틀러가 핀란드에 동맹 의사를 타진해 왔다.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했고 독일군 2개 산악사단도 핀란드에 들어왔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독소전쟁이 시작되고 3일 후, 소련을 공격하고 돌아가는 독일군 폭격기에게 유류를 보급했다는 이유로 소련 공군이 핀란드의 18개 도시를 공습하며 계속전쟁이 발발하였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패퇴하는 틈을 타 빼앗겼던 카리알라(카렐리야)를 탈환했고, 더 나아가 겨울전쟁 전에도 소련 땅이었던 동카리알라까지 점령해 거기에 군정청을 설치했다. 하지만 만네르헤임은 히틀러가 동맹국으로서 요구하는 각종 사항들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거절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때는 6개 사단을 보냈지만, 포위만 참여하고 공격은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태업을 시켰다.

계속되는 만네르헤임의 태업에 빡돈 히틀러는 만네르헤임의 75세 생일인 1942년 6월 4일 직접 핀란드로 날아왔다. 이 날 만네르헤임은 내각에게 대원수 칭호를 선물로 받았지만 불청객 히틀러의 방문에 기분을 잡쳤다. 만네르헤임은 히틀러에게 수도 헬싱키나 총사령부 미켈리가 아닌 외딴 숲 속에서 만나자고 했다. 국가 지도부 간의 공식적 만남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만네르헤임의 생일잔치 음식만 나눠먹고 제대로 요구사항도 전달하지 못한 채 돌아가 버렸다.[2] 여기에 관해서 만네르헤임이 히틀러의 혐연 성향을 알고 일부러 시가를 두 개비나 피워서 기를 죽였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매우 유명한 일화지만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전황이 반전되기 시작한 1944년 6월, 만네르헤임은 더 이상 독일의 요구를 피할 수 없으며,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요구하는 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대해 뤼티 대통령은 핀란드 의회의 의결을 통한 정식 조약 체결을 주장했지만, 만네르헤임은 이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고 뤼티 대통령 개인의 이름으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조약은 당시 핀란드 대통령인 뤼티 대통령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의 이름으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핀란드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았기에 나중에 독일이 불리해지자 핀란드는 "방위조약은 뤼티 대통령 개인의 약속이었을 뿐이다"라며 조약을 파기했다.

2.6. 공화국 대통령

독일의 패망이 확실시되어가자 핀란드는 독일을 손절매하려 들었다. 만네르헤임은 국내적 인망 뿐 아니라 대외적 위신에서도 핀란드를 전쟁에서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라고 주장했고,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만네르헤임에게 총리로서 내각을 이끌어 달라는 제의가 들어갔다. 하지만 만네르헤임은 문민정부 운영 경험 부재를 이유로 고사했다. 결국 1944년 8월 리벤트로프와 맺은 조약에 대한 책임을 지고 뤼티 대통령이 사임했고, 핀란드 의회는 만네르헤임에게 대통령직을 갖다 바쳤다. 만네르헤임은 선거로 선출되거나 의전서열상 2인자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이 아니었다. 의회가 만네르헤임에게 대통령직을 "수여"하는 특별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만네르헤임은 제6대 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시라 선거를 진행하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핀란드의 대통령 선거는 원래 의회의 간접선거였기에 굳이 선거를 하자면 못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 만네르헤임은 선출이 아니라 "추대"되었다. 그리고 핀란드는 리벤트로프와의 조약을 뤼티 대통령의 개인적 약속이었을 뿐이라며 파기했으며, 이에 따라 1개월 뒤인 9월 계속전쟁은 가혹한 조건으로 종전되었다. 영토의 10%를 소련에게 할양당했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만네르헤임은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기 직전 히틀러에게 이런 편지를 쓰고 겸사겸사 독일에게 주기로 했던 3호 돌격포 대금도 먹튀했다.
그대가 관대하게도 베풀어준 무기들을 독일을 향해 돌릴 수도 없고 돌리지도 않을 거요. 나는 그대가 설사 나의 태도에 불쾌하였다 하더라도, 나를 비롯한 다른 핀인들이 우리의 과거 관계를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고 청산하는 것을 그대도 바라고 또 노력해주길 바랄 뿐이오.

이후 핀란드는 노르웨이 쪽으로 후퇴하면서 분탕질을 치는 독일군과 라플란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핀란드의 동원령을 해제하면서 동시에 독일군을 몰아내라고 요구하는 혐성을 자랑했다.

라플란드 전쟁까지 끝나고, 연합국 통제위원회가 핀란드에 점령군으로서 들어섰다. 만네르헤임은 대통령 재임 내내 연합국이 자신을 평화에 반한 죄로 기소할 것을 두려워했다.(계속전쟁을 일으킨 것은 핀란드이므로)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는데, 만네르헤임이 꾸준히 온갖 서류에 자기 도장 찍기를 거부하며 미꾸라지처럼 처세한 덕분이기도 했고, 스탈린이 만네르헤임에게 개인적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이유였다. 대신 조약을 체결한 뤼티 대통령 등이 1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금고 10년형[3]을 선고받았다. 소련군이 물러간 뒤 뤼티는 핀란드 정부에 의해 조기 사면되었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전후처리는 모두 완료되었고, 만네르헤임은 신병을 이유로 3월 11일 사임했다. 대통령직은 총리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가 승계했다. 사임 직후 위궤양에 걸려 수술을 했다. 1947년 만네르헤임은 요양 겸 회고록 집필 목적으로 스위스로 출국했고 여생을 거기서 보냈다. 1951년 위질환이 재발한 만네르헤임은 1월 27일 스위스 로잔에서 사망했다. 핀란드로 송환된 유해는 모든 예를 다하여 국장으로 치러졌다.

3. 평가

만네르헤임과 비슷한 가치관, 즉 귀족적 가치관을 가지고 동시대를 살다 간 여러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만네르헤임의 커리어는 확실히 독보적으로 성공적이다. 만네르헤임처럼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을 지낸 헝가리의 호르티 미클로시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한 끝에 정치적으로 거세되고 공산당을 피해 망명지에서 객사했다.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근대에 떨어진 중세인으로서 원시의 광인 취급을 받다가 총살당했다. 프로이센융커들은 히틀러와 손을 잡은 결과 몰락했을 뿐 아니라 역사에 전쟁범죄자의 오명을 남겼다. 하다못해 그와 가장 가까운 환경을 가지고있던 백군의 장군들은 내전기에 전사하거나(코르닐로프, 콜차크 등)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해외를 떠돌아야만 했다.(데니킨, 브란겔, 유데니치[4] 등)

만네르헤임의 모순으로 가득한 일대기는 "보신주의"라는 단어로 일관되게 요약된다. 분명히 그는 유능한 군인이었고 정치적 감각도 있었으나 분수에 넘치는 야심을 품지 않았다. 그것은 만네르헤임이 다른 귀족들에 비해 안정된 말년을 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그는 보신주의적이었을지언정 호르티나 융커들처럼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지는 않았다. 파시스트들을 방관했지만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3대 대통령 스빈후부드가 파시스트들과 손잡아 이름을 더럽힌 것에 비하면 이는 확실히 대조적이다.

한스 폰 젝트바이마르 공화국에게 그랬던 것처럼, 만네르헤임은 대안부재의 심정으로 핀란드 공화국에 충성했다. 그것은 공화국이 만네르헤임에게 (적어도 군사에 관한 한) 무한한 권한을 부여해 주는 대신 아무런 책임도 지우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한 충성이었다. 만네르헤임의 이런 보신주의적 행보가 핀란드라는 국가의 국익과 반대방향이 아니었다는 것은 핀란드에 있어 지극한 행운이었다. 만네르헤임이 아무리 보신주의자라도 그는 유능한 보신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전간기에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것 역시 (본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에 대한 평가를 드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만네르헤임이 핀란드를 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핀란드 공화국도 만네르헤임을 역사의 심판으로부터 구했다. 만네르헤임이 협조하지 않았다면 핀란드 공화국은 망했을 것이다. 만네르헤임이 공화국에 협조하지 않고 페탱이나 호르티처럼 복고주의 독재자가 되었다 한들 그 체제는 2차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망했을 것이다. 핀란드는 만네르헤임이라는 맹수를 어르고 달래 적어도 공화국을 공격하지 않게 조련시키는 데 성공했다. 게으른 맹수는 근대의 철퇴라는 해수구제를 면했고, 공화국은 맹수가 죽은 뒤에도 뼛속까지 중세적 귀족이었던 그를 근대적 국민정체성을 형성하는 국민영웅으로 박제하여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4. 여담

그는 시가를 좋아하는 애연가에 모국어인 핀란드어부터 해서,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를 구사 할 수 있었고 키가 190cm에 가까운 장신이었다.

한국에선 영어식으로 매너하임, 혹은 독일어식으로 만네르하임이라고 잘못 읽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제 2차 세계 대전 학술서 중에도 그런게 있고 영화 겨울전쟁의 복돌 자막만 해도 그렇고..

5. 매체에서

스트라이크 위치스 시리즈의 세 번째 TVA 브레이브 위치스가 동부전선을 무대로 하는 관계로 등장. 여기서는 "클라우스 만네르하임"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카를스란트에르하르트 폰 만슈타인 원수와 함께 등장한다. 그런데 만네르헤임이 실제 역사에서 받은 적이 없는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패용하고 있고, 군복 계급장도 핀란드군이 아닌 나치 독일 육군 원수 계급장을 달고 있다. 이름도 그렇고 그냥 모티브만 대충 따온 캐릭터일지도.

호이4에서는 오랫동안 무시되다가 2019년 3월 20일이 되어서야 1.6.2패치를 통해 핀란드군 야전원수로 추가되었다.


[1] 핀란드군의 원수/대원수는 별도의 계급이 아니라 4성장군에게 부여되는 "칭호/훈작"의 개념이다. 일본 제국의 원수와 같다.[2] 당시 히틀러와 만네르헤임이 나눈 대화의 일부는 토르 다멘이라는 핀란드 국영방송(YLE) 기술자에 의해 일부가 녹음되었다. 이것은 히틀러가 특유의 강력한 연설 어투가 아닌 일상적인 말투로 발언했던 음성이 담긴 유일한 기록이다. 이 녹음본은 히틀러의 경호원들에 의해 폐기되었으나 전후 복원되어 민간에 공개되어 있다. 훗날 영화 몰락에서 히틀러를 맡은 브루노 간츠가 이 영상을 보고 히틀러의 평소 말투를 연습했다고 한다. 링크[3] 다른 핀란드 '전범'들 중 최고형이었다.[4] 유데니치는 만네르헤임의 절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