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30 16:55:24

중화민국 군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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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육군군관학교
2.1. 유명 동문
2.1.1. 한국인 출신
3. 해군군관학교
3.1. 출신인물
4. 공군군관학교
4.1. 출신인물

1. 개요

중화민국의 군관학교(사관학교)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중화권에서는 장교사관이란 표현 대신에 군관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중화 문화권에 속해있던 조선시대까지 한국에서도 해당된다.

현재 중화민국의 육군, 해군, 공군 군관학교는 모두 가오슝에 위치하고 있다.

2. 육군군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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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푸 군관학교 교가
기원은 광저우 황푸에 위치했던 황푸군관학교에서 출발한다. 국공합작 이후 소련은 약속대로 군사 고문들을 파견했는데 이들은 가장 시급한 문제로 국민당의 자체적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을 지적했다. 소련 고문들은 국민당과 연합한 양시민, 유전환 등의 군벌들을 언제 배신할 지 모르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의 자질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매우 옳은 판단이었다. 이들 군벌군을 제외한다면 국민당의 군사력은 쑨원의 호위병력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바로 중화민국 군관학교의 전신인 황포군관학교였다.

소련은 학교 운영 자금과 소총 8천자루, 탄환 400만발을 보내주었고 파벨 파블로프를 군사 고문으로 보내주었으나 그는 1924년에 사고로 익사했고 그를 대신하여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이 새로 부임했다. 사관 후보생 교육은 장제스가 청나라 군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에서 받았던 군사교육, 일본의 군사교범, 중국 전통전략, 장제스가 본 붉은 군대의 전법을 참고했으며 기본 교과과정도 붉은 군대의 것을 상당 수준 반영하였다.

황푸군관학교는 군사교육 뿐만 아니라 사상교육에도 힘쓴 고도로 정치화된 학교였다. 장제스는 군관 후보생들을 위해 훌륭한 처우를 마련하는 동시에 군관 후보생들의 기강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고 연좌제와 명령 없는 후퇴를 사형으로 다스리도록 하는 규칙을 확립했다. 장제스는 군관 후보생들에게 혁명에 타협이 없음을 설파했으며 동시에 전선에서 유용할 각종 훈련에도 매진했다. 그리고 이러한 엄격한 규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칼같이 적용했다.

하지만 황푸군관학교에서 양성하는 군사들은 소규모 부대에 어울리는 지휘관들이었지 군사 행정, 병참에 어울리는 인재들이 극히 적었다. 만약 대규모 부대를 운용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면 지식의 부족함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장제스와 러시아 교관들의 충돌도 시작되었다.

당초 러시아 교관들은 18개월 과정을 주장했지만, 단기간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던 장제스는 6개월 속성 훈련을 주장했다. 장제스는 이 분쟁에서 상하이나 저장성으로 훌쩍 떠나는 시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의 정치위원인 랴오중카이로부터 황푸군관학교의 경비를 자유롭게 쓸 권리까지 얻었다. 1924년 4월 21일에 광저우로 돌아온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교장 겸 광동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24년 6월 16일 황푸군관학교의 개학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2년 전 예쥐와 천중밍이 쑨원을 습격했던 날짜였다. 전국의 국민당 당원들은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중학교 내지 고급소학교 졸업생을 후보로 추천하기 위해. 지원자들은 나라에 봉사하고자 하는 이유를 쓴 글을 제출해야 했고 최소 3년간 복무해야 한다는 조건에 응해야 했다. 총 645명의 1기 생도가 모집되었고 1926년에는 생도의 수가 3천 명에 달했다. 몽골, 티베트, 베트남[1], 타이완, 조선[2]에서도 생도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황푸군관학교의 정치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황푸군관학교는 무산계급의 훈련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도의 75%가 지주와 중농, 관료 집안의 자제였다. 상하이의 지원자들은 천치메이의 조카 천궈푸를 비롯하여 우익 조직이나 청방의 조직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황푸군관학교 내부에는 소련 고문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쑨원주의연구회를 비롯한 강력한 반공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의 생도들은 교장 장제스에게 충성하면서 장제스의 파벌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이 군관학교를 나온 바 있다[3]. 정식명칭은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다. 1924년 세워졌으며 쑨원이 창립 당시에 연설문을 낭독했는데 나중에 중화민국 국가의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초대 교장은 장제스. 랴오중카이, 다이지타오,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주임, 당대표로 일했고 허잉친이 교관으로 일했다. 속성으로 많이 교육했는데 창립되고 3년 동안 6천명의 교육생을 배출했다고. 1차 국공합작을 계기로 세워진 학교였다 보니, 이후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서 싸운 중국 국민당, 중국 공산당 양쪽의 주요 군사 지휘관들은 이곳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으로 첫 실전 데뷔를 했으며 1925년 국민당의 1차 동정, 국민당의 2차 동정으로 군벌 천중밍을 격퇴했고 1926년 중산함 사건 이후 친공세력이 대거 숙청되면서 확고한 장제스의 직계 세력이 되었다. 이후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주력인 1군을 형성하여 나섰다. 1927년에 난징에서 중앙육군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로 개편되고[4] 국부천대 이후에는 가오슝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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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이 아무래도 기후가 기후라 그런지 태평양 국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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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대회에 참가한 생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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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이 태권도 인구가 꽤 있어서 군관학교에서도 태권도 하는 생도를 많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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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는 생도들.

2.1. 유명 동문

2.1.1. 한국인 출신

3. 해군군관학교


중화민국 해군군관학교의 모집 포스터.


사관생도들.

3.1. 출신인물

4. 공군군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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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난징에서 세워지고 1949년부턴 가오슝에 소재하고 있다. 정식명칭은 중화민국공군관교(中華民國空軍官校)이다.

파일:external/www.cafa.edu.tw/pic_6.png
학교에서 별도로 홍보용 사진 게시판 같은 걸 안 만들어놔서 이것밖에 건지질 못 했다. 출처

4.1. 출신인물


[1] 호치민도 이때 황푸군관학교에 잠시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2] 예를 들어, 의열단을 이끌어 활약했던 김원봉이 1926년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고 졸업한 뒤 국민혁명군 장교 신분으로 국민당의 북벌에 참여했다. 이외에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3] 대표적으로 의열단이 암살ㆍ파괴활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 해체하면서 단원들이 단체로 입교하였다.[4] 파일:external/military.people.com.cn/F2007051118463100014.jpg 본토 광저우의 구 황푸군관학교 현장은 지금도 보존되어 박물관, 관광명소로 활용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