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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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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좌우합작의 배경
2.1. 신탁통치의 대두와 좌우의 대응2.2. 민주의원과 민전, 좌우의 대립
3. 좌우합작의 전개과정
3.1. 좌우합작위원회 구성3.2. 좌우합작 7원칙과 반향3.3. 좌우의 반발과 실패
4. 관련 문서

1. 개요

좌우합작운동()은 1946년 7월부터 1년여간 좌익우익이 합작을 통해 연대를 추진하여 한반도의 남북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였던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에는 중도파(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 인사들이 주축으로 구성되어 전개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은 좌우합작 7원칙을 세우는데 성공했으나,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심화면서 한반도 내의 좌우익의 반발이 격화되고, 지도자인 여운형의 암살 등으로 무산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의 실패로 남북 분단이 현실화되어가자 김구와 김규식은 좌우합작운동을 계승하는 남북연석회의를 이끌었으나, 이 역시 결렬되고 만다. 결국 한반도에는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정권이 수립되어 체제와 이념이 다른 2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고,[1] 얼마 안 있어 6.25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2. 좌우합작의 배경

2.1. 신탁통치의 대두와 좌우의 대응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한다고 결정한 사실이 알려 지자 전국의 여론은 물 끓듯 하였고 29일에는 김구 중심의 민족주의자들의 주도 하에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가 결성되어 대대적인 반탁운동이 벌어졌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유리한 한국 정부를 창설하려고 했고, 소련 역시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에 전념했으니, 미·소 양국은 한국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제스처를 보였을 뿐이다. 신탁 문제를 둘러싼 좌우의 대립은 점차 내전을 떠올리게 할 만큼 국내 냉전으로 심화되어 갔다.

문제의 '모스크바 협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한국 민주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②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미·소 점령군의 대표자로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이 위원회는 한국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한다.
③ 한국 인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및 독립의 달성을 협력·원조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공동위원회가 수행하되 최고 5년 기한으로 4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제안한다.
④ 미·소 점령 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되는 회의를 2주 안에 개최한다.

민족의 소망인 독립정부의 수립을 갈망해 온 한민족은 5년간의 탁치 협정을 민족적 모욕이며 크나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반탁운동은 김구의 말에 의하면 '새로운 독립운동'의 형태로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모스크바 3상 협정의 내용에 대해서는 남한 지역에서는 대개 부정 일변도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러한 시각에서 벗어나 다음과 같이 새로운 해석을 하기도 한다.

이 결정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통일 지향적인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그 제1항에서 남북을 통틀은 '통일된 조선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미소공동위원회의 주도 아래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인 것이다. 신탁통치의 항목은 매우 부차적인 것으로,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신탁통치가 실시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통일된 조선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것이 모스크바 결정의 핵심이다.

물론 그때 이미 악화되어 가던 미소관계로 미루어 볼 때 모스크바 결정이 실현될 가능성이란 애초부터 희박했다고 말할 수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현성 여부를 논외로 하고 결정문 그대로만 볼 때, 모스크바 결정은 뒷날 남한에서 그처럼 강경하게 비난되듯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탁통치 오보사건[2]으로 인해 국내에 보도될 때는 모스크바 결정이 지닌 통일 지향적 성격은 거의 완전히 매몰되고 오로지 신탁통치 부분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이처럼 지극히 편중된 보도는 '즉각적인 독립'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온 한민족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충격과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남한 지역에서는 신탁통치 문제가 모스크바 결정의 전부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신탁통치를 일제의 식민통치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모스크바 결정을 전면 거부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좌우익의 구분이 없었다. 우선 우익 진영을 보면 그 가운데서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은 자신들의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 문제를 보았다. 순수한 민족주의적 정열과 조국의 즉각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 있던 그들에게 모스크바 결정은 신탁통치 하나로 비쳤고 신탁통치의 수락은 자신들이 걸어온 독립운동의 길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독립운동의 연장이라는 시각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즉 김구의 임정계는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반탁을 한 것이다.

한편 미군정과 제휴한 한국민주당은 반탁 대열에 이름이 끼이기는 하면서도 결코 앞장서는 일이 없었다. 즉 한민당은 수석 총무 송진우의 이름으로 반탁의 입장을 밝히고 당의 태도를 보류하는 용의주도한 입장을 취했다. 이승만도 처음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반탁운동이 국민적 열광을 불러일으키면서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이끄는 핵심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좌익 역시 애초에는 모스크바 결정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박헌영평양 방문을 계기로 그들은 곧바로 찬탁 쪽으로 돌아섰다. 처음에는 감정에만 흘러 본질적인 규명을 하지 못하고 탁치라는 문구에만 구속되어 그 문구를 을사조약 또는 제국주의적 위임통치로 서둘러 판단하거나 잘못 해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갖고 검토한 결과 3상 회담의 결정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가장 옳은 길임을 알게 되었다고 자신들의 노선 변화를 합리화했다.

신탁통치 실시의 보도에 자극을 받아 한때나마 남한 지역에서는 민족통일 계획이 한층 치열하게 전개되기도 하였다. 1946년 1월 6일 탁치 문제로 인하여 분열된 국내 정국을 수습하고 다시 협동의 방도를 모색하기 위하여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의 4개 정당과 임정 대표들이 철야 토의 끝에 '탁치안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 해결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4당 코뮤니케'를 작성하였다.

9일에는 4대 정당 외에 신한민족당이 추가되어 5당 대표회의가 열렸고 임정 측에서도 김원봉 등이 참석하였다. 이는 미소공동회의를 앞두고 서둘러 민족 통일전선을 결성할 필요성을 각 당에서 공감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곧 회의의 성격 문제로 논란이 일게 되었다. 좌익 측은 앞서의 4당 회의 연장으로 하자고 주장하였고, 우익 측은 임정이 제의한 비상정치회담의 예비회담적 성격으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5당 대표 회담은 몇 차례의 회의 끝에 결렬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신탁 반대'냐 '3상회의 결정 지지냐'로 표현되었다. 마침내 인민당 당수 여운형이 "3상회의에서 조선의 자유 독립국가 건설을 원조하는 것은 지지하나 탁치는 반대한다는 안을 제시하여 좌우측을 제휴시키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일보 기사는 "탁치 문제가 통일 계획의 암이 되는가. 중국의 예를 보라. 18년간이나 분립 항쟁하던 국공이 서로 제휴하지 아니 하였는가. 그리스의 각 정당도 대외 문제로 서로 악수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에 비하면 더욱 손쉽게 합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안타까운 여론을 반영하였다.[3]

북한 지역에서는 처음에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당의 주도로 광범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고, 앞에서 본 대로 공산주의자들도 처음에는 반탁의 뜻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일시에 좌익 측에서 찬탁으로 기울자 반탁 진영은 숙청되거나 월남하게 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남한 지역에서는 우익은 반탁으로 좌익은 찬탁으로 기울게 되어 양대 세력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4] 이를 계기로 해방 이후 민중의 지지기반을 넓히던 좌익은 그 기세가 꺾이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2.2. 민주의원과 민전, 좌우의 대립

반탁운동의 열기 속에서 우익 진영은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였다.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정부를 만들어 보자는 노력의 첫걸음이었다. 이승만, 김구, 김여식, 권동진, 오세창, 김창숙, 조만식(불참) 등 8명이 초청된 이 날 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 건국적 회의', 곧 국회를 자처하면서 정부 격인 최고정무회의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고 그 구성을 이승만과 김구에게 위임하였다.

또한 2월 8일에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약칭 국민회)로 통합되고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추대하였다. 바로 두 사람의 단합에 의한 과도정권이 곧 수립되는 듯한 기세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논의 끝에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명단 및 그 산하의 11개 상임위원장 명단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과도정권 수립의 산파역'을 임무로 탄생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는 이튿날인 14일에 미군정의 최고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으로 바뀌었다. 사실상의 정부가 서는 것을 원치 않는 미군정청의 요구에 따라 주한미군 사령관의 자문 기구로서 과도 정부의 수립을 촉진하는 사명을 띠고 민주의원으로 개원하게 된 것이다. 민주의원의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선출되고 25명의 의원은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이 그대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렇게 우익 진영은 비상국민회의를 거쳐 민주의원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한편 좌익 진영은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조선독립동맹 등의 정당이 중심이 되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 전국농민조합연맹(약칭 전농), 조선민주청년동맹(약칭 청맹), 조선여성총동맹(약칭 여맹), 천도교청우당 등 33개 정당 사회문화 단체가 참여하여 1946년 2월 15일에 여운형, 박헌영 등 15명을 의장단으로 하는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을 결성함으로써 그 세력을 집결시켰다.

민주의원과 민전은 한편으로는 좌우합작운동에 있어서 각각 우익 측과 좌익 측의 근본 단체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는 좌우 대립의 시작점이 되었다.

1946년 3월 20일부터 시작된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앞으로 수립될 임시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민주적 제정당·사회단체를 망라한 대중 단결의 토대 위에서 창설되어야 한다'라는 소련의 주장과,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이어야 하며 (중략) 소수파에 의한 한국 지배는 저지되어야 한다'라는 미국의 주장이 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5월 6일 무기한 휴회로 들어갔다.

소련의 주장대로 라면 3상회의 결정 사항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 단체는 미소공위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즉 공위는 '의사 표시의 자유' 문제를 둘러싸고 결렬되고 만 것이다.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의한 한국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이에 대한 국내 각 정파의 반응은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우익 측은 세 영수가 각각 다른 노선을 밟게 되었다. 즉 이승만계는 단독정부 수립운동으로, 김구계는 반탁통일 운동으로, 그리고 김규식계는 좌우합작운동으로 나아갔고, 좌익 측은 대체로 미소공위의 재개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였으나 민족전선과 조선공산당, 그리고 중도좌파인 여운형계는 각각 정국 대처 방안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모스크바 3상 협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미국은 신탁통치를 격렬히 반대하는 우익세력, 즉 이승만, 김구 및 그들의 추종 세력을 지지하기는 어려웠다. 자신들이 소련에게 '한반도 신탁통치 30년안'을 주장했는데, 정작 자신들을 추종하는 세력이 신탁통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5]

따라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 직전 미 국무성은 미국의 정책이 이승만,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진보적 지도자들(progressive leaders)'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음을 하지 중장에게 통고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신탁 논쟁이 격렬해진 뒤 미국이 남한 내에는 극단적인 세력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인물에게 통일 정책을 담당하게 하려는 정책의 변화를 말한다.[6]

이러한 변화는 미소공동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기본 골격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미국 측의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서 그때까지 미국이 소련과의 문제 협상 타결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또한 중도파를 선택하고 지지하려 한 이유는 한반도에서 소련의 괴뢰가 아닌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한다는 미국의 기본적인 대한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미 국무성의 지시를 받은 미군정은 좌우익을 연결할 수 있는 중도파 인물을 물색하였는데 여운형김규식이 각각 중간 좌우 세력의 대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의 정치세력과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당 대표인사 성향 신탁통치 희망 정부형태
한국민주당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송진우이승만 우파 반대 남한 단독정부
한국독립당 김구 민족적 우파 통일 민족정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 중도 유보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 민족적 좌파 찬성
조선공산당 박헌영 좌파 통일 공산정부
  • 김구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중심의 한국독립당 - 민족주의, 반공주의 성향의 우익세력으로 신탁통치 반대 입장. 남북 통일정부 수립 지향. 이후에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다가 김구는 1949년 암살당하며 나머지 인물들 또한 6.25 전쟁 때 대부분 납북당한다.
  • 송진우한국민주당이승만대한독립촉성국민회 - 대부분이 극단적인 반공주의 성향의 우익세력으로 신탁통치 반대 입장.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지향. 단 송진우는 스스로 오보를 수정하려고 했고, 김성수는 4당 코뮤니케에 협력하는 등 약간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도 탁치에 찬성한다고 비난 받았을 정도. 이승만 또한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여 당시에는 이승만과 한민당은 한몸으로 인식되었지만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이 한민당 몫 장관자리를 하나만 배정하자 동아일보를 통해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했고, 이후 발췌 개헌으로 완전히 결별한다.
  • 김원봉 중심의 조선민족혁명당 - 민족주의 성향의 좌익세력으로 신탁통치 찬성 입장.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를 통해 남북 통일 임시정부 수립 지향.
  •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 공산주의 성향의 좌익세력으로 신탁통치 찬성 입장. 남북 통일 공산정부 수립 지향.
  • 중도좌파 성향인 여운형, 조봉암, 홍명희중도우파 성향인 김규식, 김병로, 안재홍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중도파 세력[7] -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를 통해 남북 통일 임시정부 수립 지향.

3. 좌우합작의 전개과정

3.1. 좌우합작위원회 구성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김구이승만은 열렬한 반탁운동을 하게 되었고, 미군정은 이들을 극우세력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좌우를 포함하는 정치세력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승만은 이를 심각하게 반대하며 하지 중장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이에 하지 중장은 전략을 180도 바꾼다. 이승만이 있으면 좌우를 포함하는 정치 세력이 생길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그를 배제하고 중립 인사들에게 좌우합작을 해달라고 주문했으며, 중도좌파에서는 여운형, 중도우파에서는 김규식을 대표로 지목한다.

이미 중도파 세력들은 4당 코뮤니케가 무산되자, '좌우대립이 이렇게 계속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면, 남북은 결국 분단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은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위원장에 김규식을 선출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인물 구성을 보면 중도우파 계열은 김규식, 안재홍, 원세훈, 최동오, 김붕준, 김약수 등의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중도좌파 계열로는 여운형, 여운홍, 성주식, 장건상, 이영, 정노식, 정백, 리강국 등이 참여했다. 정작 핵심 합작 대상인 이승만 및 한민당과 공산당은 없었다.

좌우합작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좌우 사상을 넘어서 '조선 반도'가 하나로 통합되어 중도적 사상의 임시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 먼저 좌파와 우파 세력들 간의 연대를 시작해서 합작 운동을 실현하고, 그런 다음에 서울평양 간의 남북연합을 추구하며, 마지막 최종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기시키고, 미국과 소련 등 열강을 설득하여 '통일 임시정부'를 하루속히 추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3.2. 좌우합작 7원칙과 반향

미군정은 이 과정에서 좌우합작에 간접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미군정이 주선한 우익 계열만의 정치 개편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그동안 지원했던 이승만김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중도파 정치인 인사 여운형김규식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1946년 중순이 되면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좌우 세력을 결집시키는 좌우합작이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1946년 7월에 수립된 좌우합작위원회는 우파 세력들이 가져온 8원칙과 좌파 세력들이 가져온 5원칙에 입각하여 서로 절충하는 논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설립 3개월 후, 1946년 10월 7일에 좌우합작 7원칙을 합의·제정하고 좌우 대표에 의해 발표했다.[8]

좌우합작 7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② 미국·소련 공동위원회(미소공위)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유상몰수·무상분배)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④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⑤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 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⑥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⑦ 전국적으로 언론·집회·출판·교통·투표 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좌우합작 7원칙은 극도로 분열되어 가던 해방 이후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좌우 모두 한걸음 양보해서 얻은 소중한 결실이었기에 사상과 이념을 넘어선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좌우합작과 7원칙에 대해서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권동진의 신한민족당은 공식적으로 지지를 나타냈다. 심지어 이승만조차도 마지못해 긍정적인 제스처를 취하긴 했다. 그러나 김구는 좌우합작운동에 나서기보다는 관망하는 입장으로서 애매한 위치에 있었고, 한국독립당 내부에서 조소앙은 '신탁통치안이 폐기되고 반탁이 보장되어야 한다'라는 조건 하에서의 좌우합작에 다소 비판적이었으며, 신익희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민당공산당의 반대는 무엇보다도 격렬했다.

3.3. 좌우의 반발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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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28일 <제 3특보>에 실린 좌우합작 시사만평. 극좌세력(공산당)과 극우세력(한민당)이 좌우합작을 방해하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왼쪽은 여운형, 오른쪽은 김규식.
김성수를 중심으로 한 한민당은 자신들이 기반으로 하는 지주들의 이익에 어긋나는 제3조(토지개혁)과 제4조(친일파 청산)에 반대했다. 이들은 좌우합작운동이 결국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적화논리라고 강경하게 비난했다.[9]

더 강경한 자세로 비판한 쪽은 좌익 계열이었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초기에는 여운형과 좌우합작에 호의적이었으며, 1946년 초에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1주기 추모식에도 참가하기도 했으나,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이 공산주의 계열 탄압을 본격화하자 비타협적으로 좌경화되었다.

박헌영은 월북 후 좌우합작노선을 완벽하게 부정했으며, 8월에는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에 심어둔 프락치를 활용해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과 합당을 결의시킨다.[10] 이에 분노한 여운형은 8월 조선인민당의 당수와 남조선로동당창당중앙위 위원장(부위원장 박헌영)을 사임하고 10월 사회노동당을 창당했으며, 8월 미군정에게 박헌영을 제거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박헌영은 중도파 세력들을 '미군정과 연탁한 기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이면서 비판했다. 좌우합작운동은 미제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추진된 것이고, 좌익세력을 분열시키려는 미제의 술책이라는 논리였다. 박헌영은 좌우합작 7원칙 역시 무상몰수가 아니기에 지주의 권리를 옹호하고 미소공위 역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어긋난다며 극렬히 반대했다.[11] 박헌영이 기획한 합당 정당은 그해 12월 남조선로동당(남로당)으로 결성되었다.[12]

물론 이런 와중에도 미군정의 중도 지원 행보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1946년 12월 12일 김규식을 의장으로 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13]이 구성되었고, 어려움 속에서도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하곡수집법>·<미성년자노동보호법>·<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어서 미군정은 1947년 1월에는 반탁세력에게 운동을 중지하고 미소공위 참여를 권고했다.

그러나 결국 공산당과 한민당 등 좌우 세력들의 반대·불참으로 1947년 3월 미군정청의 간접적인 지원 방침이 잠정 철회되었고, 좌우합작운동은 이후 중도세력들만의 운동으로 축소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시작되었고,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을 다시 창당하며 재기를 꾀했다. 그러나 중도파의 몰락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해 7월 19일 좌우합작운동의 구심점이자, 중도파 세력들의 중심인물인 여운형이 암살된 것이다.[14] 이로써 다시 한 번 기회를 엿보던 좌우합작운동은 구심점을 잃으며 결정타를 받는다.

당일 여운형은 미국의 민정관 E.A.J. 존슨과 만나면서 그의 북한과의 관계를 해명하고 신뢰를 얻고자 했으며, 존슨은 그를 안재홍의 후임 민정장관(국무총리격)으로 임명하여 다시 한 번 중도파와 온건 좌파를 끌어안고 이승만 등 미소공위에 반대하는 우익들을 제어하고자 했다.[15] 하지만 여운형의 암살로 이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여운형 문서 참고.

곧이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어버리면서 미국이 결국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하게 된다. 이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어 실패로 끝나게 되고 38선 이남에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1947년 12월 10일, 좌우합작위원회는 공식 해체되어 실패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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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위원회 해체일에 촬영한 사진. 여운형이 그 해 7월에 암살당하자, 김규식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운형 얼굴을 오려 맨 우측에 붙여놓았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였지만 그 취지는 김구와 김규식을 통해 1948년 남북연석회의로 이어진다. 하지만 결국 남과 북의 단독정부수립을 막아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4. 관련 문서


[1] 참고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는 명백한 국가로 인정받고 있으나, 분단 관계에 있는 대한민국과는 상호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현행 헌법 3조4조에 근거해서 북한 정권을 대한민국 영토의 이북 지역을 불법 점거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이자 동시에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로 보고 있다. 1991년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에서는 남과 북을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2]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한반도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한다는 3국의 합의 내용에 중심을 두지 않고 새로운 식민통치가 시작되는 것처럼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의 신문을 내놓는다. 하지만 오히려 미국이 '한반도 신탁통치 30년안'을 제안했고, 이와 반대로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물론 소련이 정의로운 국가라거나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면 1945년 말 당시 한반도는 좌익세력이 우익세력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했고, 지리적으로 봐도 한반도로부터 바다 건너 있는 미국과 달리 소련은 대륙으로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자국의 영향력을 최대화하는 데 딱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소련은 한반도보다 중국의 공산화에 더욱 신경쓰고 있었다.[3] 그러나 중국은 내전이 다시 터져 대륙을 장악한 공산당과 대만으로 도피한 국민당으로 분단되었고 그리스 역시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인해 내전이 터지고 여기서 우익 정부군이 승리하였으나 3년 동안 이어진 내전으로 폐허가 되었다.[4] 안재홍은 "탁치가 좌우분열 및 정부수립 계획상에 미치는 영향은 당시에 민족주의, 공산주의 계열의 분열을 결정적으로 하였고, '4당 코뮤니케'의 폐기는 후일 좌우합작 불성공을 예고하는 조짐으로 되었다."라고 하고, 이어서 공산 측에서 1월 3일 태도를 돌변하여 찬탁의 기세를 높인 것은 정략상으로 매우 거칠고, 민족운동 상의 큰 결점을 남겼다고 비판하면서 그것이 이후 "조선인으로 하여금 탁치에 대한 해결 방법을 더욱 비이지적인 적개심의 방면으로 도입케 하는 결과를 지었다."라고 지적하였다.[5] 미 국무성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보내는 메시지 초안(1946. 2. 28)에 의하면 "현재로서는 어렵다고 느껴지겠지만 한국에 대한 확고하고도 발전적인 계획을 추진할, 김구 일파와도 연결되지 않으면서 소련의 조종을 받는 세력과도 연결되지 않은 그러한 지도자들을 우리의 지역 내에서 물색해 내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력은 4대 자유를 강조하며 광범한 한국 민중에게 설득력 있는 근본적인 토지 및 재정의 개혁을 강조하는 내용의 진보적인 강령을 면밀히 검토하여 만들어 내도록 격려를 받게 될 것이며, 또한 지금으로서는 공산주의적 강령만이 가장 희망을 주고 있다고 믿고 있는 민중들을 그와 같은 진보적 강령에 끌어들이려는 목표를 갖고 동 강령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련의 지지를 받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러한 세력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6] 당시 미군정의 경제고문으로 좌우합작에도 관여하였던 키니(Robert A. Kinney)는 "미군정은 중도파를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중도파를 제외하고 이승만이나 김구 등 극우세력을 지지한다면 중도파들은 공산당과 합류, 큰 세력을 유지할지 모르며 또 우리가 중도파를 지지해도 민족주의 우익세력은 공산당과 합작할 리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민족주의 및 우익세력은 약 50%, 중도파는 40%, 그리고 공산당은 약 10% 정도의 분포를 보였다."라고 하였다.[7] 좌익 진영은 근로인민당을 창당했지만 여운형 암살 이후 세력이 약해져서 일부는 월북하고, 조봉암 등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우익 진영의 상당수는 이후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고 일부는 한국민주당에 합류하는 등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또한 6.25 전쟁 때 상당수가 납북당하게 된다.[8] 그러나 여운형은 좌익의 테러로 발표 당일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9] 좌우합작운동은 결국 적화될 거라는 등의 논리는 뉴라이트 언론인 뉴데일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10] 여운형의 최측근인 이여성 등도 박헌영의 공작에 따라 이때 함께 넘어가버렸다.[11] 이런 입장은 북한 지역의 김일성 역시 두말할 필요 없었다. 여운형은 김일성, 김두봉의 지지를 기대했으나 좌우합작운동은 북한 지역에서는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12] 남로당은 합법 정당으로 인정되었으니, 박헌영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상황을 반전시키고 미군정의 탄압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13] 미군정의 과도 입법기구를 말한다. 민선 45명·관선(미군정 선발) 45명으로 선발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이후 9일째 되는 날인 1948년 5월 19일 과도정부법률 제12호에 의하여 해산하였다.[14] 좌우합작운동을 계기로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은 수차례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으로부터 테러와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여운형 역시 수차례의 암살 기도를 피한 상황이었다. 여운형의 암살에는 여러 배후가 추정되나, 확실한 건 극우(한민당)과 극좌(남로당) 모두 그의 장례에 의례적인 조의조차 보이지 않았다.[15]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의 언론플레이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에 미군정은 차라리 자신들에 우호적인 여운형을 민정장관으로 삼고 임시정부 수립을 앞당기며 차관을 제공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