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04:01:30

찰스 존 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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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조선–한국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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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찰스 존 코프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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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1905)
2대
아서 베레스포드 터너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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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0)
3대
마크 네이피어 트롤로프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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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30)
교구장 서리
헨리 존 드레이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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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31)
4대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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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941)
교구장 서리
구도 요시오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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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2)
교구장 서리
구도 요시오 요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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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5)
교구장 서리
윤달용 모이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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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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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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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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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어니스트 차드웰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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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53)
4대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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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1954)
교구장 서리
아서 어니스트 차드웰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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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56)
5대
존 찰스 시드니 데일리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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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965)
성공회 서울교구장 · 성공회 대전교구장 }}}}}}}}}
'''초대 성공회 조선교구장'''
파일:고요한 주교.jpg
출생 1843년 5월 14일
영국 솔즈베리[1]
사망 1921년 6월 30일 (항년 78세)
영국 솔즈베리
재임기간 초대 조선교구장
1890년 9월 29일 ~ 1904년 7월 25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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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올 소울즈 컬리지
종교 성공회
가족 아버지 찰스 윌리암 코프[3]
어머니 제인 엘리자베스 코더
<colbgcolor=#871B4D><colcolor=#ffffff> 부제서품 1866년
사제서품 1867년 7월 16일[4]
주교서품 1889년 11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 대주교 주례
문장 파일:존 코프 문장.png
Nihil Longe Est Deo
(천주께 먼 곳은 없다)[사목표어]
}}}}}}}}}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조선의 첫 주교2.3. 동역자를 찾아나서다2.4. 조선 땅을 밟다2.5. 본격적인 선교에 앞서
3. 참고자료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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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마치 나룻배 한 척으로 전쟁에 나가는 기분이었다.
초대 조선교구장 찰스 존 코프 주교, 그의 술회 중.
찰스 존 코프 (고요한, The Rt. Reverend Charles John Corfe)
성공회 최초의 조선지역 파견 주교이자 초대 조선교구장.

2. 생애

2.1. 출생

1843년 5월 14일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 찰스 윌리암 코프(Charles William Corfe)와 어머니 제인 엘리자베스 코더(Jane Elizabeth Coder)사이에서 태어났다.

2.2. 조선의 첫 주교

이전부터 계속 제기되던 조선 선교가 1883년 한영조약이 체결되면서 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벤슨 대주교는 고교회파 선교단체인 SPG로 하여금 조선 선교를 준비하게 하였으며, 또한 북중국교구장 스코트 주교를 통해 £2500을 전달하면서 한국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6] '주교 없는곳에 교회를 가질 수 없다.'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벤슨 대주교는 조선과 그나마 가까운 중국과 간접적인 관계가 있던 코프신부를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선임하였으며, 이윽고 1889년 11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주교로 서품받으며 조선 땅으로 출발할 첫 걸음마를 떼게 된다.

2.3. 동역자를 찾아나서다

조선교구장 주교로 서품받은 이후 코프 주교는 같이 선교할 동역자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액의 선교자금과 무보수라는 조건 때문에 많은이들이 꺼렸다. 1890년 6월 24일 첫번째로 함께 갈 이가 나타났으니, 바로 후에 3대 조선교구장이 되는 마크 트롤로프 신부였다. 이후 1890년 7월 25일부터 코프 주교는 미국 9개 도시, 캐나다 8개 도시, 일본 3개 도시를 순회하며 조선 선교에 대한 호의를 이끌어냈다. 그는 이 순회에서 캐나다성공회 뉴 웨스트민스터 교구 소속 사제인 스몰 신부와 피크 신부를 영입했고, 외과의사 와일스와 내과의사 랜디스 박사도 영입했다.[7] 한편 코프 주교는 1890년 7월 1일부터 조선 선교에 관한 정기 간행물인 모닝캄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2.4. 조선 땅을 밟다

1890년 9월 3일 조선선교부는 영국을 떠나 조선으로 출발했다. 9월 26일 부산을 경유하여 9월 29일 제물포에 당도하였고, 비로소 조선교구의, 대한성공회의 역사가 시작되게 되었다.

2.5. 본격적인 선교에 앞서

19세기 말, 코프 주교가 밟은 조선 땅은 열강들에 의해 반강제로 개항하게 되면서 종교 포교의 자유까지 보장받게 된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계구역 내에서만 거주해야 했으며, 극 초기에는 성서도 한 권 제대로 구하기가 벅차는 등의 큰 어려움이 닥쳤다. 이에 코프 주교는 두 가지 과제를 내세우게 되는데, 첫째로는 한국어와 한문에 능통할 것, 즉, 선교보다 언어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판단 하에 언어공부를 먼저 하게 되었고, 둘째로는 거주지를 구하는 것이었다.

코프 주교는제물포에 두 대지를 마련하는데, 하나는 조계 내이며, 하나는 막바로 조계 밖에 위치한 대지였다. 조계 내의 대지에는 지금의 내동성당의 전신인 송학동 성 미카엘과 모든 천신 성당을 건립·축성하고[8], 해당 부지에 사제관 또한 건립하였다. 후자의 부지는 현재의 내동성당 부지인 내동 3번지인데, 그곳에는 랜디스 박사가 상주하는 성 루가 병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서울에도 두 부지를 매입하였는데, 하나는 지금의 서울대성당 부지인 중구 정동 3번지이고, 하나는 지금의 고려대연각타워 자리인 중구 충무로1가 25번지 일대[9]로, 사제관을 건축하여 스몰, 와일스 등이 거주할 수 있게 하였다.

3. 참고자료

  • 《대한성공회 백년사》이재정 저, 대한성공회 출판부, 1990

4. 둘러보기

파일:대한성공회 문양.svg 파일:고요한 주교.jpg 파일:영국 국기.svg
초대 조선교구장
찰스 존 코프 주교 각하
1st Bishop of Korea
His Excellency Charles John Corfe
파일:고요한 주교.jpg
파일:대한성공회 문양.svg 역대 성공회 조선–한국교구장
조선교구 설정(관할구역: 한반도 및 만주) 초대 찰스 존 코프 주교 제2대 아서 베레스포드 터너 주교


[1] 솔즈베리 대성당에서 태어났다고.[2] 13년 9개월 27일[3] 오르가니스트, 교회음악가[4] 성 삼위일체 축일. 영국 해군 군종사제로 서품[사목표어] [6] 그 이후에도 연간 일정 금액을 전달하였으나, £1500정도로 매우 빈약하였고, 선교도 일본이나 중국처럼 다양한 선교단체가 아닌 오직 SPG 한 단체만 선교를 지원하는 등 영국에서는 이렇다 할 큰 기대가 없었으나, 이 선교는 제국주의의 팽창의 도구가 아닌 단지 주변국 선교사들의 종교적 열정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의의가 있다.[7] 이 외에도 포우널 부제, 위너 부제, 데이비스 전도사도 영입했다.[8] 지번주소로는 송학동3가 3번지[9] 당시는 낙동(駱洞)이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