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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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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50227_25_02.jpg
농심배 우승을 결정짓고 나서 이창호 九단이 우승컵을 받은 장면
1. 개요2. 참가선수3. 대국 진행 사항(왼쪽 흑, 오른쪽 백)
3.1. 제1라운드(1~4국)3.2. 제2라운드(5~10국)3.3. 제3라운드(11~14국)
4. 최종 결과5. 기타6. 관련 문서

1. 개요

제6회 농심신라면배 대회. 2004년 10월 12일 개최되어 2005년 2월 26일 14국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이창호 九단의 5연승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이 우승하였다. 이창호 九단을 제외한 한국 기사들이 전부 탈락한 상태에서, 이창호 九단이 극적으로 5연승을 거둬 한국이 대역전, 우승하여 일명 '상하이 대첩'으로 불린다.

상대한 기사들은 중국 대표 3명, 일본 대표 2명이었으나 모두 (대만인을 포함한) 중국인들이었다.[1]

2. 참가선수

단수는 출전당시 기준.

3. 대국 진행 사항(왼쪽 흑, 오른쪽 백)

3.1. 제1라운드(1~4국)

3.2. 제2라운드(5~10국)

3.3. 제3라운드(11~14국)

4. 최종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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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있다면, 그 때부터 시작이다. - 창하오 九단
이 바둑이 끝나고서야 하늘이 높다는 걸 알았다. - 왕시 五단[5]
이창호의 기적과 같은 승리로 보통 이 대회를 상하이 대첩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창호는 이전 대회에서 불패의 신화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6회 대회에 출전할 당시에는 컨디션에 문제가 많았다. 비록 제4회 대회부터 선발전 없이 와일드 카드로 출전해 왔지만[6] 바로 전에 있던 LG배 4강에서 중국의 위빈 九단[7]에게 덜미를 잡혔고, 국수전에서도 최철한에 0:3으로 패배하는 등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한국팀과 이창호를 응원하던 한국 팬들조차 이창호의 승리에 확신을 가질 수 없던 상황이었다. 이창호는 이세돌 九단에게 밀려서 타이틀을 계속 상실하고 있었고, 점차 1인자 자리에서 내려오는 하향세였기 때문이다.[8][9]

이 상황을 두고 당시 중국일본 언론에서는 "이창호가 이겨서 한국이 우승할 확률은 3%도 안 된다[10]"며 대놓고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환구시보. 그런데 이창호에게 줄곧 털리기만 했던 마샤오춘은 "나는 언론 보도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1:2 베팅[11]을 해도 나는 이창호 5연승에 모든 걸 걸겠다"고 한 바 있다. 링크

그리구 이창호는 10국[12]에서 뤄시허 九단에게 이기고,[13] 11국에서 장쉬를 꺾더니[14] 폭주기관차같은 연승을 거듭해 왕씨 성 돌림인 왕레이, 왕밍완, 왕시를 내리 꺾고 5연승을 달성하여 우승컵을 한국에 가지고 왔다.[15] 이것이 오랫 동안 5연승으로 농심신라면배를 끝낸 유일한 기록으로 남았는데, 이후 22회 대회에서 신진서가 한번 더 그 기록을 달성한다.[16], 그리고 그 신진서25회 대회에서 더 극적인 조건에서[17] 완전히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18]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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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 제10국(부산에서 치른 2차전 마지막 바둑) 때 찍은 사진으로, 우승을 확신한 채 밝은 얼굴로 여유롭게 입장하는 중국 기사들과 달리 비장한 얼굴로 외롭게 홀로 걸어들어오는 이창호의 모습[19]이 압권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창호가 보란 듯이 전부 물리쳤으니, 이창호의 위용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으로 후술할 드라마에서도 재현될 정도였다.

이 스토리는 응답하라 1988에서 최택의 에피소드로 등장하였다. 사실 최택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창호를 그대로 모티브로 하였다. 그런데, 1988년에는 이런 방식의 국제 기전이 아예 없었다[20]. 이 상하이 대첩은 2005년이고, 농심신라면배의 선배격인 진로배 국가대항전도 1992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대회로 이창호의 5연승은 농심신라면배의 최다 연승기록으로 남게 된다. 물론 해당 대회의 전신인 진로배 제5회 대회에서의 서봉수의 9연승이란 어마어마한 기록이 존재하긴 하나, 농심신라면배로 한정지었을 경우 그렇다는 얘기다.[21] 이 기록은 훗날 강동윤이 12회서 5연승 타이기록을 세웠으며, 18회서는 판팅위의 7연승, 19회서는 신민준이 6연승으로[22] 국내기사 기록까지 갱신당하지만, 이들같이 비교적 약체가 지목되는 초반과는 달리 하나같이 고수가 쏟아져나오는 후반부에 5연승을 달성한 점은 빛바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창호 홀로 남겨졌을 때의 중압감은 말할 것도 없다.

이창호 공식 홈페이지가 사라지기 전, 어떤 팬이 이 대회 바둑을 다룬 수필을 썼다. 제11국, 제12국, 최종국.

다음 해인 2005년~2006년 대회에서는 이창호 九단이 14국에만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는 조한승 九단의 3연승으로 무난하게 한국이 우승하나 싶었는데, 하필 이창호가 최종국에서 만난 상대가 이창호의 천적 요다 노리모토. 요다 九단이 마지막까지 내리 연승을 찍고 최종국에 이창호 九단이 나와 천적 요다 노리모토 九단이 3연승을 찍음으로서 우승컵을 일본에 주게 된다.[23]

그리고, 이창호는 같은 2006년, 서울에서 열린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대회[24] 결승국에서, 전년 마지막 대국을 했던 왕시에게 패한다. 왕시는 이 승리로 五단에서 九단으로 즉시 승단했다.[25]

안타깝게도 그야말로 정점을 찍은 이 대회 이후, 이창호 九단의 전성기가 사실상 끝났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물론 이후로도 이창호는 여전히 30대 중반까지 세계 정상권 기사 중 한명이긴 했지만, 이전까지의 압도적 1인자에서 내려왔다고 평하는게 옳다.[26]

다름이 아니라 이 대회 이후 이창호 九단은 나이 때문인지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와중에 다른 기사들이 이창호에 대해 파고들며 연구한 것이 효과를 보며, 이창호의 패배가 잦아졌다.[27]

그러다 오랜만에 22회 대회에서 신진서 九단 또한 비슷하게 올킬을 기록하고 승리하였다. 심지어 25회 대회에서는 신진서가 상하이에서 열린 3R의 마지막 주자로 나와 끝내기 6연승으로 상하이 대첩 시즌2를 기록했다.

6. 관련 문서


[1] 각국의 대표는 그 인물의 국적이 아니라 기원 소속 국가를 대표한다. 조치훈 九단은 한국인이지만 일본기원 소속이라 일본 대표로 친다 - 사실 조치훈 九단은 이때까지 농심신라면배에는 자격이 있더라도 나오지 않았지만, 제7회부터 대표 뽑는 기준을 국적으로 바꿨기 때문에 이 대회에는 일본 대표로라도 나오기로 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2004년부터 정관장배를 농심신라면배와 같은 방식인 여자단체전으로 바꿨는데, 이때 한국기원에서 활동하던 루이나이웨이 九단을 소속기원 따라 한국 대표로 했다가는 결과가 뻔하니(개인전이었던 2003년 제2회 4강이 모두 한국기원) 중국 대표로 넣으면서 아예 (루이 九단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바둑 국제단체전 대표 기준을 국적으로 했다.[2] 제10국이 끝나고 2004년 12월 30일에 작고한 가토 마사오 九단 대신 나왔다.[3] 사실 왕시 五단은 패배한 동료기사들에 비해 경력이 제일 낮았고, 폭발적인 연승을 달리고 있는 이창호를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해 미리 겁을 먹어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고 알려진다. 이런 대진표를 짠 이유는 에이스들을 앞에 배치하여 기선 제압 하겠다는 중국의 계획이었다. 당시 중국기원의 왕루난 원장이 "왕시 五단이 잘 둬서는 이길 수 없다. 이창호 九단이 대형사고를 쳐야지만 이길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였다.[4] 잘못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캡처에서 트로피를 들고 있는 분은 한국김인 九단. 똥씹은 표정이 아니다. 예의가 중요한 바둑계에서는 이겼다고 대놓고 기뻐하거나 졌다고 대놓고 불쾌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표정관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5] 중국 팀 주장이자 마지막 기사[6] 제3회 대회까지는 선발전을 모두 이겼다(3회까지 선발전만 16승). 제6회 대회에 나선 한국 기사들 중 왜 뽑혔는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기사 2명(한종진·안달훈)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기대대로(?) 한 판에 탈락하였다.[7] 이창호는 위빈을 상대로 기존까지 11승1패로 압도했다. 2000년 응씨배 4강에서 위빈 九단한테 제대로 물을 먹인 이후 거의 무적이었다.[8] 30살에 접어든 시즌이었는데, 연초 1승 5패의 부진에 빠지며 슬럼프 설이 터져나오고 있었다.[9] 정확히는 2004년 최철한 九단과의 국수전·기성전 연패, 응씨배 8강전 패, 2005년 1월 국수전 영봉패까지 후배기사 1명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보인 것이다. 2004년 동안 오히려 이세돌은 부진을 면치 못했고 04년 연말, 05년 연초에서야 중국기사 킬러의 모습을 보이며 부활한 것. 대 최철한을 제외한 이창호 九단의 성적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연말에는 박영훈을 상대로 LG정유배 우승을 차지했으며 춘란배 결승에 오른 상태였다.[10] 단순히 '이기는' 것으로 계산한 수학적인 확률은 (50%)×(50%)×(50%)×(50%)×(50%)=3.125%이다. 굳이 "3%"라는 숫자를 언급한 건 이창호의 기량이 떨어졌다는 반 조롱의 표현이었을 것임을 방증하는 부분.[11] 마샤오춘(이창호한테 건)이 지면 2배로 배당을 주는 베팅.[12] 한국 마지막 대표가 부산에서 치르는 2차전부터 나온 건 이때가 처음이다.[13] 직전년도 대회에서 최종국으로 이창호 vs 뤄시허 대전이 성사되었는데, 일명 '공배의 묘수'라고 불리는 기막힌 묘수로 이창호 九단이 승리한 바 있다.[14] 이 11국이 가장 큰 고비였다.[15] 왕시와 대결할 때 돌가리기 결과 검은돌을 잡자 '이틀 전 왕레이가 검은돌로 놓은 포석'을 들고 나왔는데, 사실상 초반에 결판이 나고 말았다.[16] 신진서의 경우는 뒤에 박정환을 남겨두고 끝낸 것이라 위기감이 덜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숫자가 많을 뿐 이창호를 꺾을 만한 선수를 한 명 뽑기는 쉽지 않았던 6회 대회와는 달리 최종보스 커제까지 싹쓸이한 것이라 나름 대단한 위업이다.[17] 저 당시엔 최철한 기사가 1승이라도 거뒀는데, 이번엔 신진서만 남기 전에 모든 기사가 패하였다.[18] 이번엔 한국 기사 중 한 명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신진서가 남은 6명을 역올킬하였다.[19] 둘 다 타이젬 바둑 사진이지만 이제는 사진이 다 사라졌다. 사진을 찍은 곳은 호텔농심허심청2층에서 오갈 수 있는 연결통로로, 바둑을 둘 허심청 2층 사파이어룸으로 가는 모습이다.[20] 중일 슈퍼 대항전은 한국이 없다.[21] 1996-1997년 제5회 진로배 국가대항전에서 제2장으로 출전하여 중국과 일본의 정상급 기사 9명을 연파한 서봉수의 9연승 기록은 바둑 국가대항전의 전설 중 전설이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데 왜냐하면 이 기록이 깨지려면 비교적 약체라서 초반에 나오는 기사가 당대 최고의 기사들 9명을 한큐에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22] 그것도 이전대회 7연승의 위엄인 판팅위를 1국부터 꺾은 기록이었다.[23] 이것이 농심신라면배 최초이자 유일한 일본의 우승컵.[24] 한중일 3국이 돌아가면서 치른다.[25]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왕시의 유일한 국제대회 우승이기도 했다.[26] 농심배 대회 직후 펼쳐진 춘란배 우승을 마지막으로 이창호는 세계대회 우승이 없다. 이후로도 세계대회 결승만 10번을 밟았으며, 이는 이창호 시대 이후 1인자로 발돋움한 이세돌, 구리 다음가는 국제대회 성적이었다. 다만 무언가의 저주라도 걸린것처럼, 세계대회 10연속 준우승이라는 기록아닌 기록을 세우고 만다. 1인자 자리에서 내려오긴 했지만, 이후로도 이창호는 2010년까지 고레이팅 기준 세계랭킹 3위를 지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대회 준우승이 가장 많은 선수가 이창호다.[27] 이창호 이후 80년대생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던 시기다. 83년생 이세돌과 구리는 이창호의 하락세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세계대회 타이틀을 가져갔다. 이창호 연배인 70년대생은 창하오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었지만, 2005년 이후는 80년대생이 20대에 접어들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