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8 17:11:20

제2차 중동전쟁

수에즈 전쟁에서 넘어옴
중동전쟁
제1차 중동전쟁(1948-49)
(이스라엘 독립전쟁)
제2차 중동전쟁(1956)
(수에즈 전쟁)
제3차 중동전쟁(1967)
(6일 전쟁)
제4차 중동전쟁(1973)
(욤 키푸르 전쟁)


1. 개요2. 배경3. 전황4. 여담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20px-1956_Suez_war_-_conquest_of_Sinai.jpg

The Suez Crisis or The Second Arab-Israel War, Tripartite Agression, Sinai-War (Operation Kadesh)
La crise du canal de Suez, éxpedition de Suez, gerre de Suez (opération Kadesh), campagne de Suez
מלחמת סיני (מבצע קדש), התוקפנות המשולשת
العدوان الثلاثي, العدوان الثلاثي أو حرب 1956, أزمة السويس أو حرب السويس, حرب سيناء أو حملة سيناء

제2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측은 시나이 전쟁(카데쉬 작전)이라고도 한다. 이집트(아랍 연맹 측)에서는 삼국 침략이라 부른다.

전쟁기간은 1956년 10월 29일 ~ 1957년 3월.

서방 세계의 패권이 영국이 아닌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쟁. 물론 국력 차이는 일찍이 미국이 영국을 압도한 지 오래였지만 수에즈 전쟁은 전 세계에 이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부 시각에서는 이 시점으로 서방 국가들이 (소련 제외) 국제 연합 UN의 눈치를 보는 새 시대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왜냐면 미국 또한 국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정책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 이 이후로 미국 또한 베트남 전쟁 등 여러 국제사회 눈치에 더욱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시대의 변화라고 말한다.

2. 배경

1956년 7월 26일,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이집트나세르 대통령은 양팔외교전략을 취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아스완 댐을 짓고, 소련과 무기 협정을 맺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도입하려 했던 것. 하지만 동유럽산 무기 도입 때문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측은 아스완 댐 건설비용 지원을 거부했고, 이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은 문서 참조.

친소 노선을 펼치며 원래 자신들의 것이나 마찬가지던 수에즈 운하를 집어삼킨 이집트에 영국과 프랑스는 크게 반발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금지당하는 데 크게 격분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는 단순히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 재산 피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히틀러라인란트 재점령, 안슐루스를 연상시키는 침략적 팽창행위로 간주되었다. 1930년대 히틀러를 상대했던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나세르를 중동의 히틀러로 간주하였고, 제2의 히틀러가 중동에서 패권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방지하는 예방전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나세르의 행동을 징벌하지 않으면, 나세르가 서방을 우습게 알고 폭주할 것이라 여겨 군사행동을 결의하였으며 이집트에게 큰 위협을 느끼던 이스라엘 역시 동맹으로 참가하게 된다.

사실 비단 수에즈 운하만이 이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다. 영국의 앤서니 이든 정권은 이라크에서 값싸게 석유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나세르가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나세르는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 범아랍주의를 주창하며 이라크에서 영국의 입김을 제거하려 들었고 영국은 이에 열받고 있었다. 프랑스의 기 몰레 정권 역시 나세르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었는데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알제리 전쟁에 나세르가 개입하여 반프랑스 게릴라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이집트를 타격할 준비를 하는 한편 이스라엘에 프랑스제 최신 병기를 지원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름대로 고민이 컸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호전적인 나세르가 선제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고 당시 가자지구에서 양측 간 계속된 제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전과가 훨씬 크긴 했어도 이스라엘에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는 팔레스타인 민족 게릴라인 페다이가 나세르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 페다이에 의해 이스라엘의 한 키부츠 지도자인 로이 로스버그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모세 다얀은 대국민연설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정당한 싸움을 하는 저들이 어중간한 대응으론 절대로 우리를 모두 죽이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테니 유대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외세의 간교한 평화협상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투지를 불태웠다.

3. 전황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삼국 외무장관은 셰브르에서 3자 회담을 벌였다. 이집트 공격을 결의했는지 안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쳐서 싸우고 있으면 영국과 프랑스가 질서유지를 구실로 개입하는 구도로 진행되어야 했지만, 양측은 전쟁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고, 이스라엘군이 혼자서 이집트를 거의 발라버렸다. 이스라엘 국경의 시나이 반도 방향에서 시작된 공세는 전선 중앙부와 남부 방향의 돌파로 일찍 전세가 결정돼버렸고 11월 5일,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시나이 반도의 최남단까지 모조리 점령하여 전쟁은 이집트의 완패로 마무리될 상황이었다. 여기에 영국 공수부대와 프랑스 외인부대가 도착하여 이집트는 완전히 3면에서 적군의 공격을 받는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자신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는 것에 분노해 압박을 넣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핵전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던 소련도 이집트를 감싸며 핵폭격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이 수술 후유증으로 반불구가 된 상태에서 진통제에 취한 채 정책을 처리했던 것이 병크의 주된 원인 중 하나이다. 나세르가 중동의 히틀러이며 나세르를 좌시하는 것은 1930년대 유럽의 참사를 재현할 것이라는 인식을 전혀 공유하지 않았던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과격한 군사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당연히 단단히 화가 났다. 영프 양국의 이 행동은 제국주의식 내정간섭으로 볼 수 있는 일이라서 도덕적으로도 큰 명분이 없는 사안인데다, 미국으로선 '고작' 수에즈 운하 하나 때문에 소련과의 전면 핵전쟁까지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거기에 아무리 영프의 행동을 좋게 해석해주려고 해도 결국 제국주의의 뽕에 취해서 수십년전처럼 식민정책을 유지하겠다는 행동이었는데 문제는 세계대전으로 식민지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유진영 국가의 이런 행동은 필연적으로 독립할 식민지 국가들을 죄다 공산국가로 만들 수도 있는 악수중의 악수가 될 수도 있었다[1]

이에 따라 미국은 소련이 무력을 사용해도 영국과 프랑스를 돕지 않겠다고 압박을 가했다. 그래서 UN의 중재로 1957년 3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오히려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두 나라가 우려했던 나세르를 중심으로 한 아랍 민족주의의 단결과 이집트의 패권 차지라는 나세르의 목적에 오히려 힘을 실어준 격이었다. 또한 영국의 이든 총리는 이 일로 인해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당연히 정치인으로서의 생명도 끝장났다.

이 전쟁이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핵전쟁의 위기에 닥치면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독자적인 핵전력 개발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2차대전 기간 중에도 많은 연구를 해 왔고, 풍부한 핵연료와 실험지를 가진 호주의 도움까지 등에 업은 영국은 비교적 빨리 핵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프랑스는 진도가 늦었다. 거기에 먼저 핵클럽에 가입한 영국은 재빨리 자신들을 배신했던[2] 미국 편에 붙어 프랑스의 핵개발에 딴지를 걸면서 올챙이 시절 모르는 개구리란 게 어떤 건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열받은 프랑스 정부는 조국의 핵무장을 외치면서 막나가기 시작한다. 이후 1960년 샤를 드골이 재집권하여 알제리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프랑스의 내정을 휘어잡으면서 프랑스의 핵개발은 가속화된다.

물론 유대인을 향한 테러 공격과 게릴라가 분명히 존재했고 이스라엘이 대응해야 했지만,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점령 당시에 이스라엘에 테러를 가했던 게릴라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고 했고 학살하기도 했다. 심지어 유엔 소속의 의사들조차 그에 휘둘리기도 하였다. 나중에 함마르셸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진위여부를 이스라엘에 추궁했고 이스라엘 크세네트(이스라엘의 국회)에서도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는 어찌 된 일이냐고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다. 외무장관 골다 메이어는 '그런 것 없어염. 우릴 해방자로 반겨주던데?' 하고 잡아뗐고, 참모총장 모셰 다얀은 아랍인들이 먼저 공격을 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작 페다이의 수장이었던 노인은 2003년에 페다이들은 중동전쟁 터지고 죄다 이집트로 진작에 달아났었다고 회고했다. 페다이 혐의를 받고 죽은 사람들은 페다이와 친해서 떠벌리고 다녔던 사람들이라고. 어쨌든 유엔 감시단과 이스라엘의 합동 조사단은 300~500명 가량의 무고한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살해된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못을 박았다. 미국 만화가 조 사코의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Footnotes in Gaza)>이 1956년 11월에 자행된 이스라엘군의 가자 주민 학살 사건을 다뤘다.

수상이었던 다비드 벤구리온은 미국에게 다른 건 몰라도 가자 지구만큼은 이스라엘이 확보하겠다고 억지를 부렸지만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불과 11년 후에 제3차 중동전쟁으로.....

4. 여담

냉전 초기에 핵을 둘러싼 동맹국의 위기와 소련의 핵을 동원한 무력개입 협박,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소련이 정말로 핵을 동원해서 무력을 사용했다면 미국이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에 대한 논의 때문에 미국에서는 대체역사소설이나 첩보물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재이다.[3]

영화로도 제작된 레온 유리스의 <토파즈>에서는 수에즈 위기 당시의 프랑스의 병크와 반미노선, 소련에서 2차대전 때부터 심어둔 프랑스 고위층 첩자에 의한 작품으로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선 늙은 프랑스 대통령이 소련 첩자에게 자기도 모르게 놀아난다는 내용으로 나오는데, 이름 자체는 창작된 가상의 인물로 나오지만 '반미 성향, 2차 대전 레지스탕스 출신, 강경 민족주의자' 성향에다 알제리 사건 등의 행적을 볼 때 샤를 드 골이 맞다.

포스트 아포클립스 소설 <해변에서(On the Beach)>[4]에서는 수에즈 위기 때 소련에 대한 미국의 오인공격으로 핵전쟁이 벌어졌다고 묘사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장편 대체역사소설 <The World of Difference>[5]에서는 미국과 소련 출신의 주인공 모두 수에즈 위기 당시 벌어진 아랍공중전에 참가한 파일럿 출신이라는 언급이 있다.


[1] 실제 당장 이집트를 시작으로 식민지 유지를 위해 난리를 치던 베트남, 알제리는 모두 공산당이나 친 소련정권이 들어선다[2] 미국은 영국과 대전 기간동안 맺었던 핵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영국의 핵개발에 도움을 주지 않은 전과가 있다.[3] 일단 미국은 겉으로는 핵폭격하든 알바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비밀공개결과 내부에서는 영, 프에 핵폭격이 가해지면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날거고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소련의 폭격기가 뜨면 그 첩보를 영, 프에 알려줘서 격추시킬 계획이었다고. 단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묵인하겠다고 방침을 세웠다.[4] 핵으로 인해서 북반구가 망하고 유일한 청정지역인 호주는 방사능 구름의 위기로 멸망을 기다린다는 내용. 1970년대에 김민이 코미컬라이징을 했고 영화는 두 번 만들어졌다.[5] 태양계 4번째 행성생명이 살고 있고 미, 소의 공동 탐사대가 탐사 중 그 나라의 역사에 개입한다는 대체역사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