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21:00:13

제2차 세계 대전/대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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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서부전선
3.1.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다면?3.2.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실패했다면?
4. 동부전선(독소전쟁)
4.1.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더라면?4.2. 바르바로사 작전의 중지 혹은 축소4.3. 레닌그라드의 완전 점령4.4. 중부집단군이 바로 모스크바로 쳐들어 갔다면?4.5.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4.6.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전했다면?4.7.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했다면?4.8. 쿠르스크 전투의 경우4.9. 영국을 완전히 항복, 종속시킨 후 소련을 침공했다면?4.10. 일본 제국이 미국 대신 소련을 공격했다면?4.11. 소련이 먼저 독일을 공격했다면?4.12. 소련이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아냈더라면?4.13. 스탈린이 독일과 강화했다면?4.14. 독일이 소련에 좀 더 일찍 쳐들어갔다면?4.15. 독일이 바그라티온 작전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막아냈다면?
5. 아시아-태평양 전선
5.1. 나치 독일일본 제국이 아닌 중화민국과 동맹을 맺었다면?5.2. 진주만 공습 당시 항공모함들이 모두 진주만에 있었다면?5.3. 진주만 공습에서 일본군이 미군의 유류 저장고를 공격했다면?5.4.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했다면?5.5. 상하이 전투가 일본군의 패배로 끝났다면?5.6. 중일전쟁이 없었거나 늦게 일어났다면?5.7. 우호 작전이 없었다면?5.8. 니고 연구로 일본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했다면?5.9. 일제가 1944년에 항복했다면?5.10. 히로시마·나가사키를 포함해서 그 어느곳에서도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6. 기타
6.1. 2차 세계대전 불발(不發)6.2. 미국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6.3. 독일 혹은 독일 국방군인종차별과 그에 기반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6.4.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뗐더라면?6.5. 뮌헨 협정이 결렬되었다면?6.6.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성공했다면?6.7. 독일이 연합국보다 먼저 핵을 개발했다면?6.8. 독일이 항복한 직후 영미연합에 합류하여 소련과 충돌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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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파생되는 여러 대체역사 시나리오들을 논하는 문서.

2. 특징

제2차 세계 대전 자체가 사악한 악의 축이라 할 수 있을 나치 독일, 일본 제국추축국과 대결한 연합국, 2차대전 중에 세계의 역사를 바꾼 천하삼분지계합종연횡을 방불케 하는 극적인 전세와 국제적 정세변화, 크고 아름다운 군사 작전들, 홀로코스트 등 전례없는 대량학살들이 대거 등장했고, 이로 인해 결정된 국제 정세가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가지는 영향력까지 포함해서 역사학자나 역사 밀리터리 매니아, 팬덤들 사이에서도 진지하게 의논되는 경우가 많은, 언제나 식지 않는 주제이다.[1]

전쟁 자체가 단순한 숫자놀음으로 끝나지만은 않기 때문에 전쟁 시작 시점에서 한 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하다고 해도 불리한 측이 무조건 패배하기만 하는건 아니며 경우에 따라 반대로 대역전승을 거두는 사례도 많다. 당장 2차 세계 대전 자체가 폴란드 침공때 영프가 독일의 태도에 겁먹고 버로우타지만 않았어도 2차 세계대전이 유럽내를 벗어나 세계적인 파급력을 가져오진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2]

반대로 항상 독일이 소련에게 승리한다는 것이 아닌 이미 독일이 밀리기 시작한 후에서의 국제 정세에 관한 시나리오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독일이 방어전으로 나왔다든가, 티토를 암살했다든가, 반대로 소련이 선공을 가했더라든지 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들도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라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진지하게 토의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3. 서부전선

3.1.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다면?

연합군이 만약 독일의 암호였던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었다면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결국엔 미, 영, 소 삼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하는 결말을 불려왔을 수도 있다. 단순한 상상력만이 아닌 게, 영국으로 향하는 보급선을 죄다 격침함으로써 섬나라인 영국은 엄청난 물자난에 시달렸을 것이고 결국엔 독일과 강화했을 수 있다. 이 시나리오로 간다면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게 연료 및 필요 물자들을 보급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집트에 진입해 카이로와 이라크 바그다드를 거쳐 히틀러가 추축국에 동조시키려 안달이었던 친독성향의 중립국인 튀르키예, 에스파냐를 가입, 동부전선에서도 연합군의 에니그마 해독불가로 소련 측에 정보공유 불가로 인해 바르바로사 작전의 기존 목표를 진행해 캅카스의 바쿠유전, 스탈린그라드까지 가게 됨으로써 소련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가능하며 비록 유보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이란이나 태평양 루트로의 렌드리스를 받을 수는 있겠으나, 장거리로 인해 보급이 늦어지는 약점이 생기며 영국이 결국 독일과 강화하여 전쟁에서 발을 뺀다면, 원래대로 미국, 영국과 상대했을 나머지 서부전선의 독일군 전력들이 죄다 동부전선에 투입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고 그만큼 소련의 부담도 가중되었을 것이다. 렌드리스야 어차피 독일 해군이 현실적으로 건드리기 어려운 루트로 운영되기도 하였으니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불리한 것은 확실하며 소련과 독일의 단독 싸움에서 독일이 소련을 압도하기는 힘들었겠지만 굉장히 유리한 상황에서 협상을 맺을 정도가 되었을 수 있다.

3.2.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실패했다면?

우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 상황을 알아야한다. 소련이 벨라루스~폴란드 전선까지 피를 뿌리며 전진했지만 독일이 재정비를 하고 방어를 하자 도저히 밀 각이 안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스탈린은 영국 미국한테 이제 그만 몸 눕히고 나올 때 되지 않았냐고 여러번 말을 한다.

이 상황에서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는 당연히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유타-오마하-골드-주노-소드 해안에 약 100km의 해변에 상륙작전을 펼치는 계획을 입안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aval_Bombardments_on_D-Day.png

연합국의 대부분을 때려박은 상륙작전으로 이 상륙작전이 실패 또는 상륙은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군인들이 전사 or 부상자들이 된 전략적 실패 상황이라면 참담해진다. 자세한 배치 병력과 연합국 병력을 보려면 노르망디 상륙작전 문서로 가자.

이 작전이 실패하려면 여러 전제가 필요한데.
1. 연합군 머리가 단체로 이상해졌거나.
2. 독일이 연합국의 암호를 해독하고 노르망디가 상륙지점인 것을 알아내 우주방어를 했거나

1번은 우선 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하다. 1944년 중반이면 루프트바페는 곧 죽는 노약자나 다름이 없어서 미국-영국은 나치 독일 영공을 자기 집 안방마냥 드나들며 폭격을 하고 항공정찰을 했다. 노르망디가 상륙지점임을 숨기기위해서 많이 찍지는 않았겠지만 노르망디가 대충 어느 상황인지는 훤히 아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 연합국 명장 아이젠하워던가 몽고메리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노르망디에 이상한 상륙을 꼴아박을 확률은 없다.

2번은 훨씬 더 희박하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단단히 화난 히틀러가 아프베어의 수장 빌헬름 카나리스의 모가지를 짜르고 사실상 정보기관이 있으나 마나가 됐다. 그 이전에도 영국 첩보부는 그냥 독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는 수준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인데 대장급 되는 인물이 나치 독일 괴뢰국인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서 죽는데 그 사전 징후를 독일 내에서 아무도 몰랐다. 이런 상황인데 나치 독일이 연합국 암호를 해독해 상륙작전의 지점과 일시를 알아낸다?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리고 설령 알아냈다 하더라도 노르망디 작전 수립부터 실행일까지의 시간은 고작 한 달이었다. 이 시간 동안 저 길다란 라인에다가 우주방어용 진지를 깔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가능한 방법을 꼽으라면 근처에 있는 군 부대를 모조리 이 지역으로 이동시켜서 독일군도 수십만 정도의 병력을 대기시키는 것 정도인데, 만약 독일군이 이런 짓을 했다면 연합군의 정찰기가 이런 움직임을 탐지 못할 리가 없으니, 그냥 작전을 취소하고 다른 지역을 물색해버리면 그만인 일이다.

막 울펜슈타인 시리즈 마냥 초월적인 기술력은 아니어도 독일의 서부집단군 사령관 롬멜이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해 노르망디의 연합군들에게 후퇴던가 피 흘릴 것을 가정한다면 상륙작전 시작 전 교란과 게릴라 목적으로 투하된 미-영-캐나다 군 공수부대 약 2만명은 당연히 전멸하고 칼레를 지키던 수비군이 당장 노르망디로 뛰어올 것이며 근처에 놀고 있던, 파리 주둔군이나 프랑스 북부-벨기에 상륙방어군까지 끌고와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짜 만에 하나의 일이 일어나 독일군이 정말 잘싸우던가, 연합군이 아주 못싸우던가 해서 연합군 156,000명이 전멸을 했어도 나치 독일의 패망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 물오른 소련이 동유럽에서 열심히 밀고 들어오고 있으니 미국,영국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또 다른 곳에 상륙을 해 프랑스와 베네룩스3국은 공산화를 막아야 했을 것이다.

결과론 적으로 나치 독일의 패망은 최대 1946년까지는 미뤄졌겠지만 패망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4. 동부전선(독소전쟁)

4.1.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더라면?

독소전쟁으로 나치가 폭망한 현실을 고려하면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제일 희망적인 IF다. 직전까지만 해도 소련측은 독일과 손잡고 타국가를 노렸을 정도였기 때문에 독일이 난데없이 뒤통수를 후려치지만 않았어도 그대로 날아온 반격에 나치의 모가지가 순식간에 날아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당시 대략적인 전황으로 보면 영국은 처칠의 주도 하에 바쿠 유전 지대 폭격 작전을 검토하고 있었으며 소련은 독일과 손잡고 회담에서 말한대로 인도 제국을 침공하고 있었을 것이다. 독일-일본만 해도 막는데 벅찼던 연합군이었던 만큼 소련이 독일과 적대하지 않고 추축국에 가담했다면 현실에서보다 더 순조롭게 상황을 끌고갔을 가능성이 높다. 소련이 추축국 가입까진 가지 않는다해도 불가침조약만 계속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동부전선으로 갈 물자와 병력을 아프리카영국으로 돌릴 수 있게 되므로 훨씬 여유가 있는 상황이다.

그 외에 존 키건 교수는 소련 침공에 동원한 병사들을 소련이 아닌 중동 전선으로 투입했을 경우의 수도 이야기했는데 이 당시 미국, 독일과 같이 국력 정상을 달리던 소련과 치열하게 싸웠던 수준의 독일 병사들을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로 보내기만 했어도 간단하게 밀어버릴수 있었을 것이다.[3] 아프리카까지 먹힌다면 유럽은 동쪽 해로를 통해 아시아로 가는게 몹시 힘들어지므로 아시아에서도 유럽의 영향력을 상관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심지어 중동, 아프리카를 독일이 먹는다면 이후 만에 하나 침공할 가능성이 있는 소련의 측면을 노릴 수단이 생기므로 억지력 역할을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4.2. 바르바로사 작전의 중지 혹은 축소

독소전쟁을 피할수없었다고 가정하면 나치 독일입장에선 둘째로 희망적인 IF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입안 중 보급을 총괄하던 병참장군 에두아르드 바그너는 지속적으로 작전을 미루든가 아니면 작전의 목표를 좀 더 작게 수정해달라고 건의하였다. 바그너 장군의 계산상으론 나치 독일의 물자로는 AA선은 택도 없고 스몰렌스크 까지가 한계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국방군최고사령부는 귀담아 듣지 않았고 모스크바까지 무리하게 진격하다가 크게 한방먹고 스몰렌스크 인근까지 집단군을 물려야 했다. 후퇴 중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손실된건 덤.

만약 최고사령부가 바그너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스몰렌스크 까지로 작전을 수정하거나 혹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키예프 전투 이후 중지했다면 큰 이점을 가지고 독소전쟁을 끌어 갈수 있었다. 르제프 전투,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보았듯이 독일 국방군은 방어전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특히 소련군이 준비가 덜 된상태에서 낸 공세를 번번히 격퇴하였다. 어차피 키예프 전투가 끝날 즈음 라스푸티차가 시작되기 직전이었고 독일군이나 소련군이나 유의미한 진격이 불가능했다. 그 말인 즉슨 다음 해 봄까지 전력을 추스르고 다음 작전을 구상할수 있었을 것이다. 지친 군대를 쉬게 하고 보급또한 정비할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점령하고 은색 여우 작전을 성공시켜 렌드리스를 막을수도 있었고 혹은 좀 더 준비 된 상태에서 청색 작전을 진행 해 캅카스 지역을 완전히 점거 할수도 있었다. 물론 소련군도 전세를 재정비 할수 있었겠지만 독일군이 스몰렌스크에서 전선을 안정화 시키기 시작하면 조급해지는건 소련군이고 스탈린의 무리한 탈환 명령은 소련군의 출혈을 강요 했을 것이다. 독일이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를 장악하고 더 나아가 캅카스 유전지대마저 먹었다면 전쟁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건 소련일 가능성이 크다. 점령지의 시민들을 온정적으로 대했다면 금상첨화 이겠지만 그건 나치더러 나치짓을 하지 말란 소리이므로 논외.

만약 시나리오가 이렇게 흘러갔다면 소련을 멸망시키는건 힘들 더라도 아주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4.3. 레닌그라드의 완전 점령

리처드 오버리의 명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주제. 약 100만의 북부집단군이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치르는 대신 레닌그라드를 완전 점령한 이후 모스크바 전투 시 북부에서 양익 작전을 실시했거나 무르만스크, 아르항겔스크 등의 무기대여법 북극해 항로를 마비시켰다면 41년의 소련은 도미노처럼 무너졌을 것이다. 상기 서적에서는 "러시아의 옛 수도의 결사 항전이 새로운 수도의 목숨을 살렸다."라는 평을 하고 있을 정도. 그래서인지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는 영웅도시(ГОРОД ГЕРОИ)라는 칭호가 붙어있다.

4.4. 중부집단군이 바로 모스크바로 쳐들어 갔다면?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중부집단군이 키예프로 가지않고 바로 모스크바로 쳐들어갔다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치 독일은 멸망했을 것이며, 공산주의의 세력은 최소한 벨기에까지 미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당시 독일 중부집단군은 사실 애초부터 모스크바까지 진격할 수 있는 전력과 물자가 없었다. 따라서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남부, 북부집단군에서 전력과 물자를 빼어 중부집단군에 배치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중부집단군에게 양쪽 측방을 비우고 최전선에만 집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당시 키예프와 레닌그라드 일대에 있던 소련군의 규모와 전력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며, 정말 이렇게 된다면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끝나기도 전에 물자가 다 빠져나가 약체화된 남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의 공격을 받아 싸워서 몰살시키고 중부집단군에 대한 포위섬멸을 기도할 수 있었다. 발트삼국과 우크라이나를 다 통과하지도 못한 채로 중간부만 모스크바 코앞까지 닿는다면 그야말로 동유럽 전체보다 넓은(...) 돌출부를 형성하는 것이며, 소련군은 글자 그대로 동유럽 전체를 통째로 포위섬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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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전선을 이와 같이 기형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독일의 전략적 기반은 송두리째 붕괴하며 유효한 전력은 물리적으로 섬멸된다. 그리고 소련군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는 전력이 없는 만큼 소련군은 적어도 동유럽 전 지역, 만약 재수가 없다면 단숨에 나치 독일 본토까지 진격했을 것이다. 이것은 영국이나 미국의 개입이 제대로 있기도 전에 소련군이 유럽 동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상술한 대로 서유럽 지역, 적어도 저지대 국가들에는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미쳤을 것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대체역사로 많은 호사가들에게 이야기되었던 이유는 전략적 관점을 보지 못하고 전술적 관점으로만 판단한 구데리안의 짧은 식견에 기반한 회고록 때문으로, 전략적 관점에서만큼은 키예프를 정리하지 않고는 모스크바로 진격할 수 없다는 히틀러의 판단이 명백하게 옳았다. 독일과 소련은 근본적인 경제 규모와 동원 인력의 격차가 있고, 전쟁경영론적 관점에서 그것은 전술적으로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다.

4.5.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중의 하나이다. 모스크바 전투를 가장 상세하게 다룬 서적인 '세계사 최대의 전투'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 점령에 대비하여 시가전을 준비하는 등 독일군이 모스크바 점령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를 보았을 것이 확실하나, 전쟁은 짧아도 몇 년은 더 끌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모스크바의 상실로 유럽 러시아의 모든 교통로가 마비되어 보급이 절단나는 상황이 왔을 것이다. 물론 독일군도 보급선 등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모스크바 점령 후 보급이 절단된 소련 주요 도시들로 진격을 계속했더라면 말 그대로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도 소련이 바로 항복했을 가능성은 없으나, 스탈린에겐 아돌프 히틀러와의 강화를 생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4] 또 무엇보다도 일본이 모스크바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 소련 침공을 감행했을 것이고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참전도 뒤로 늦추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모스크바 함락 이후 소련 서부 지역 대부분이 독일에게 점령되고 일본이 몽골연해주를 기습했다면 전세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른다. 추축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미국이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문제는 그게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참전하기로 마음을 굳혔을 즈음엔 이미 독일과 소련 사이엔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영국이 포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전에도 참전하기로 약속을 했기에 시기가 늦춰지기는 했어도 참전했을 것이다.

4.6.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전했다면?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중의 하나이며, 의외로 가능성이 있었던 시나리오다. 청색 작전 시기 전력을 반으로 나누는 뻘짓만 안했어도 스탈린그라드 장악이 상당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청색 작전 때 캅카스 지역으로 반을 보내고 스탈린그라드 지역으로 반을 보냈는데, 그 정도의 병력으로도 스탈린그라드의 무려 90% 가까이를 장악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모스크바 전투 다음으로 중요한 전투인 만큼 그에 대한 파급력도 상당했을 것이 확실하다. 당시 일본은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소련을 공격하겠다고 독일과 밀약을 체결한 터라 일본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연해주와 북사할린, 캄차카 반도 등이 공격받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미국과 이미 한창 전쟁 중인 터라 소련과의 전면전은 무리고 극동지역의 소련군에 도발하여 묶어두는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독일에게는 굉장한 이득이다. 게다가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함락을 발판 삼아 그 기세로 소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면, 독일이 간절히 원했던 유전이자[5] 반대로 소련에게 매우 중요한 바쿠 유전의 상실로 소련군은 전쟁 말기의 독일군이 겪었던 연료부족으로 인해 각개격파당하는 것을 피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6] 또한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존재도 지속적으로 위협받았을 것이며 동부전선은 최소한 교착상태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4.7.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했다면?

앞의 가정과 함께 많이 의논되는 이야기이다. 6군이 독일 정예군의 결정체로서 이들의 전멸이 독소전쟁이 분기가 되었을 정도로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코카서스에는 이들보다 규모가 훨씬 큰 A집단군 역시 소련군에게 포위될 위기를 겪었다. 6군의 저항 덕분에 코카서스의 A집단군이 철수 할 수 있어서 남부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가장 희망적인 가설은 A집단군 철수 이후 다시 구조작전이 시작되어 남은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시기에 소련의 포위망이 엄청나서 병력은 몰라도 장비회수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됭케르크 철수작전과 비슷하기 때문에, 살아남아 전선에 다시 투입될 병력자체만으로도 독일군 역량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만약 장비들 역시 운좋게 회수하였다면 독일군 역량 회복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4.8. 쿠르스크 전투의 경우

앞의 2개의 가정에 비해선 파급력이 낮은 편이지만 이 또한 매우 중요한 편이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함으로써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전선에 상륙한 병력들도 북진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노르망디 상륙작전바그라티온 작전이 이루어짐으로 독일이 패망했다. 그런데 여기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이후 독일은 방어전으로 전환하여 동쪽에선 소련군을 막아내면서 남부에선 이탈리아 방어에 더 치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과 바그라티온 작전도 없었던 일이 되었을 것이고 당시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던 게릴라들도 싸그리 청소함으로써 독일의 목숨이 몇년 연장되었을 것이다.[7]

4.9. 영국을 완전히 항복, 종속시킨 후 소련을 침공했다면?

이건 앞의 것들보다는 좀 가능성이 적은 게, 애초에 독일이 영국을 항복시킬 힘이 없었기 때문.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IF 시나리오이고 역사라는 특성상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현상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 영국이 독일의 패권을 인정, 협조하게 되었다고 가정하고 영국의 막대한 해군력과 식민지 상당부분이 독일의 영향권에 간접적이나마 들어갔다고 치자. 예를 들어 만약에(대체역사)라는 책에서 가정한 것처럼 처칠 대신 대독 온건파인 핼리팩스 경이 영국 총리가 된 상황이거나, 더 나아가서 나치를 지지했던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지 않고 국왕으로 재임한 상황 등등. 독일이 항복한 영국의 도움을 받고 공군력과 해상 보급도 동원했다면 부실한 보급이 상당부분 나아졌을 것이고 속전속결로 모스크바나 스탈린그라드 정도는 점령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점령한 후에 영국도 없이 유럽에 홀로 남겨진 소련이 강화를 결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입은 피해가 인명손실적으로 너무나 막대하기 때문에 영국과의 전선에서 입은 피해를 과소평가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영국 본토 항공전 문서에 매우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독일은 이미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부터 그 총력전 역량이 이미 바닥을 쳤다. 독소전쟁의 전장이 워낙 거대하고 또 기갑전력과 육군이 전쟁의 핵심이었기에 많이 무시되지만, 독소전쟁에서 모스크바 전투 이래 루프트바페는 단 한 번도 소련군을 상대로 정상적인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했다.[8] 소련군의 저열한 전투기 기술과 낮은 파일럿 수준을 감안한다면, 이는 정상적인 군사대국의 공군에게 있을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독일이 영국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위해 개발한 V1, V2 로켓의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다 합쳐 30억 마르크를 초과하는데, 이것은 4호 전차를 3만 대나 만들 수 있는 군비였으며, 동시에 독일군 보병사단 250개를 1년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었다. 독일이 대서양 전쟁 과정에서 건조한 유보트가 280척에 육박하는데, 이것은 4호 전차 1만 대를 만들 수 있는 비용과 4호 전차를 5,600대나 만들 수 있는 철강 및 원자재가 투입된 것이었다. 따라서 독일이 영국을 상대로 총부리를 거둔다면 독일이 얻게 되는 어드밴티지는 단순히 영국과의 교전에서 얻은 피해가 없어진다는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총력전의 근본적인 역량을 소련에게 퍼부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이 초반에 패배한 결정적 이유가 '히틀러 그놈이 설마 영국이 아직 건재한데 전쟁을 또 벌일까?'였던 걸 보면 영국이 항복한 시점에서 소련은 최고 경계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영국을 항복시키느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연기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초반부터 그렇게 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전 유럽 점령은 아니더라도 모스크바아르항겔스크, 스탈린그라드를 잇는 광활한 지역과 중앙아시아 일부도 독일군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국이 이미 독일의 아래로 들어간 마당에 미국이 유럽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상황까지 왔다면 미국은 독일 중심의 유럽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인정하고 독일과 공존하기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9] 그렇게 영국을 굴복시킨 후 소련 침공도 순조롭게 이루어짐으로써 유럽 일대를 제패했더라면 당신들의 조국이 현실화됐을지도.

4.10. 일본 제국이 미국 대신 소련을 공격했다면?

일본이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소련을 공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심리적 영향과 소련에 타격은 주었겠지만 일본군의 역량을 생각해본다면 궁극적으로는 시베리아 출병 때처럼 북 사할린연해주, 더 나아가 봐야 바이칼 호 이동 지역만 분쟁지역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독소전이 시작된 이후에도 극동에는 최소 30개 이상의 사단이라는 대규모 병력[10]이 배치되어 있었고 일본 육군은 소련까지 상대할 여력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독일처럼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극동에 배치된 병력을 잡아두는게 최선이고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패전국이란 이미지만 보고 나온 이론적인 면으로, 일본군이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의외로 군사적 역량이 상당했기에 아무리 주공이 아니어도 이를 막으려면 소련군은 추가로 병력을 차출하고 그 보급을 북아프리카 전역를 뛰어넘는 수준의 난이도로 수행해야 한다. 당연히 이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양측의 전략 목표는 결국 시베리아 철도 시설들에 집중 될게 뻔하다. 다만 일본판 KV쇼크가 일어나도 무방할 정도로 일본군의 대전차 능력이 형편 없었다는 점이 중요 요소가 될수 있지만, 이를 항공전력을 투입해 근접항공지원으로 극복하고 현상유지라도 성공하면 극동 소련군은 발이 묶여버린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여기도 대숙청의 영향을 받았고, 이미 이 시점에서 주코프가 독일을 대비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럼 이 부패가 만연한 극동에 남은 병력들이 일본군을 제대로 상대 할수 있다고 믿는건 좀 무리가 많다(...). 아무튼 동부전선에서 시베리아 너머에서 온 정예 부대들[11]이 엄청난 전공을 세운 것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독일군에게 많은 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독일군의 목적인 소련군을 잡아두는걸로도 모스크바 방위가 강화되지 못하여 모스크바가 심대한 타격을 받든가 심지어는 함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4.11. 소련이 먼저 독일을 공격했다면?

만약 소련이 T-34를 좀 더 일찍 배치하고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하였다면 소련군의 공격은 아무리 잘해 보아야 단치히바르샤바, 동프로이센쯤에서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소련은 스탈린대숙청으로 군이 반병신이 된 상태였고 독일도 소련을 침공하기 전에 소련의 공격에 대비한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다만 소련의 선공이 있었더라면 모스크바까지 뚫리는 일과 더불어 소련의 침공으로 여력이 없게 된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실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홀로코스트 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1942년 1월의 일로 독일이 소련을 쳐바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당장 전황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소련군 막을 생각을 먼저 하지 유대인을 죽일 생각을 할까? 하긴 했다하더라도 실행은 나중의 일로 미루었을 것이다. 일단 당장은 눈앞의 불을 꺼야 할 상황이니까. 그런데 소련의 선공으로 독일이 그걸 막는데 여념이 없는 동안 북아프리카에선 롬멜의 진군과 후퇴도 없이 전황이 방어전의 상황으로 지속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북아프리카 군단이 좀 더 오래 견디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을지도. 한편 이런 경우 소련이 명백히 침략자인 상황이므로 미국이 렌드리스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어쩌면 독일이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비시 프랑스에게 점령지를 뱉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서구 여론은 독일을 제1의 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양면전선이 된 독일을 노려 일찍 독일을 패망시켜 끌어내리고 소련과의 비밀 협약을 통해 얄타회담 후와 같이 유럽을 양분하게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딜 가나 실제 역사와 비슷하게 흘러갈 수 밖에 없다는 것.

4.12. 소련이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아냈더라면?

대표적으로 스탈린라인의 완공 문제와 키예프 방어전 그리고 그리고리 쿨리크의 숙청에 달려있다. 폴란드 국경에 건설 중이던 스탈린라인을 괜히 옮기는 일 없이 그대로 계속했더라면 1941년이 오기 전에 완공할 수 있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독일은 소련 침공을 재고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키예프의 경우도 마찬가지. 게다가 대숙청 기간에 그리고리 쿨리크가 숙청되었다면 일찍이 T-34 전차와 데그탸료프 기관단총, 53-K 대전차포와 ZiS-3 대전차포가 소련군에 배치되어 화력이 개선되었을 것이고 유연한 전략적 후퇴까지 허용되었다면 소련군이 조기에 포위섬멸당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소련 남부에 독일군이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서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고 전쟁의 종결을 앞당기는 동시에 수천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멍청한 독재자무능한 장성의 결정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대숙청으로 맛이 갔던 당시의 소련군이었지만 이러한 변수가 해결되었다면 모스크바 근방까지 속절없이 밀려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전력을 재편한 소련군이 조기에 독일군에 반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국력을 상당수 보존한 소련이 장차 도래할 냉전에 있어서도 현실의 소련보다 더욱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을 것이다.

4.13. 스탈린이 독일과 강화했다면?

모스크바 전투 이전에는 스탈린은 불가리아[12]의 중재로 일단 나치 독일과 폴란드 서부, 발트 3국, 몰다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부를 내주는 선에서 강화를 맺으려고 했다. 이는 선례도 있어서 더 유리하다. 블라디미르 레닌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영토를 떼어 주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빠진 후 한숨 돌렸다가 나중에 독일이 패한 다음에 많은 영토를 수복했다. 스탈린은 이를 따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조기강화의 경우에 독소전쟁은 사실상 독일의 승리로써 소련은 1차 대전 전후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처럼 오늘날 러시아 부분만 간신히 유지했을 것이고, 더불어 스탈린의 권력 또한 엄청나게 위험해지게 되어 조기 실각의 가능성이 훨씬 커졌을 것이다. 심지어 소련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다. 동쪽의 위협이 사라지고 자원 수급도 원활해진 독일은 혼자 버티는 영국과의 전쟁에 집중했을 것이며 일본이 이 와중에 혼자 진주만 공습을 벌이더라도 일본의 도움이 불필요해진 독일이 일본 편을 들어서 미국에 선전포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도 영국 빼고 전 유럽을 장악한 독일을 공격하지는 않았을테니 일본과만 전쟁을 했을 것이고 전후 질서는 유럽의 독일 세력 vs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미국 세력의 냉전 체제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시점에서 소련 공략을 포기하고 강화 조약을 맺었다면 좀 더 생명이 연장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데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독소전쟁 중 독일과 소련의 강화 가능성은 모스크바 전투가 끝날 때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

1944년에는 오히려 위기에 몰린 독일은 공산주의를 혐오하던 히틀러를 배제한채 스탈린과 협상하여 단독 강화를 맺으려고 하였으며, 괴벨스는 서방 측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치에게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소련이 다 잡은 맹수를 살려 줄 리가 없다.[13]

4.14. 독일이 소련에 좀 더 일찍 쳐들어갔다면?

의외로 가능성이 높았을 사례. 원래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개시일은 1941년 5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둠의.연합군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그리스를 침공하면서, 독일도 여기에 합류를 하게 되고 점령하는데에 군사력이 소비됨으로써 바르바로사 작전이 1941년 6월 22일로 미뤄졌다.[14]
이로 인한 나비효과는 엄청 났는데, 추축국의 점령 직전의 레닌그라드 공격이 포위전으로 바뀌고 모스크바 공방전이 겨울까지 끄는 바람에 월동 준비가 부족한 추축국이 공세를 중단했던 이유이다. 작계대로 혹은 4월쯤 일찍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동되었다면 겨울이 오기 전에 주요 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등이 함락, 소련은 그야말로 멸망 직전까지 몰렸을 것이다. 최소한 모스크바 시내가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세로 전장터로 초토화되었을 것이다.[15]

다만 다른 의견도 있는데, 오히려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함으로써 소련이 방심했기에 오히려 진격이 더 이른 시기에 끝났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이다. 게오르기 주코프가 바로 이런 주장을 했는데, 의외로 이것도 신빙성이 있는 의견이다. 실제로 추축국의 공세가 늦춰진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치게 빠른 진격으로 독일군의 보급선에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지 기상은 부수적인 원인이다. 물론 5월에 진격을 했다면,여유 시간이 있었긴 하나, 독소전쟁 문서에서 보듯이 소련의 방심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한 것도 있음을 감안하면 독일에게 1달 정도 더 여유가 생겼을 뿐, 소련이 오히려 준비를 더욱 더 해서 독일이 현실보다도 꽤 어렵게 진격했을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

4.15. 독일이 바그라티온 작전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막아냈다면?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바에서는 히틀러가 고지사수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장군들이 유동적으로 싸우지 못해 발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당시의 전황을 본다면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장군들은 그 명령을 씹고 유동적으로 방어했다.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완전히 밀려난 것은 독일군이 어리석게 싸웠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독일군의 전쟁 역량이 한계에 다다른 동시에 소련군의 기동이 결코 1940년대 초의 독일에 못하지 않을 정도로 교묘하고 전격적이었기 때문이며, 바그라티온과 비스툴라 공세의 승리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독일군을 소련군 자신들의 노력과 근본적인 체급 차이로 찍어 누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만약 독일군이 이 공세를 막아낸다 해도, 소련군 입장에서는 여전히 독일군보다 더 많은 병력이 있었고, 공세를 얼마든지 더 감행할 수 있었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막히면 2차, 3차, 4차 바그라티온을 감행하여 뚫어버리면 그만이다. 어쨌거나 독일은 소련보다 오래 버틸 수 없으니까. 전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전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근본적으로 독일은 적들의 최종 종심인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전에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소련을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따라서 독일군이 이를 막아낸다면 종전이 조금 늦추어지거나 소련군이 베를린까지 입성할 가능성은 미미하게 줄어들 수는 있으나 독일의 패망 사실 자체는 결코 피할 수 없었다.

5. 아시아-태평양 전선

5.1. 나치 독일일본 제국이 아닌 중화민국과 동맹을 맺었다면?

중독합작은 실제로 10년 넘게 유지되었던 동맹관계였다.[16]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벌인 1차적인 이유가 미국의 금수조치 때문이었음을 고려하면 진주만 공습은 추축국 가입과는 별개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만약 독일이 중일전쟁 국면에서 일본이 아닌 중국과의 동맹을 이어나갔다면 일본과는 적대관계가 되기에 미국의 유럽 전선 참전 양상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17] 또, 독일의 레벤스라움(소련)과 일본의 대동아공영권(태평양)이 사실상 동상이몽인 것과는 다르게 장제스의 국민당과 소련은 잠재적 적국이다. 일본과의 동맹이 독일에게 도움이 되기는 커녕 손해만 입혔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나름 희망적인 시나리오로 보인다. 물론 중일전쟁 당시 중국은 국공합작 중이었기도 했고, 중국은 소련이나 독일 중 하나를 무작정 적대하진 않았다. 황포 군관 학교도 소련의 지원을 받아 건설했었다.

5.2. 진주만 공습 당시 항공모함들이 모두 진주만에 있었다면?

예정상 진주만 공습 당일 항공모함은 모두 4척이 진주만에 있어야 했다. 새러토가, 렉싱턴, 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으로, 이 네 척은 모두 태평양 전쟁 초반부에 스스로를 갈아넣으며 적극적으로 싸운 수훈함들이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 당일 새러토가는 긴급 기관 문제 발생으로 샌디에이고 조병창에서 수리 중이었고, 문제의 엔터프라이즈는 폭풍이 와서 하루 늦게 입항하는 등 단 한 척도 진주만에 주재하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진주만에 정상적으로 있었더라면 분명 참혹한 꼴을 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큰 문제는 아닌데, 진주만 공습은 12월 7일이고 이들이 본격적으로 활약을 시작한 것은 이듬해 3월경부터이다. 진주만에서 항공모함들이 정박해 있을 곳은 얕은 동부 해안의 정박장이므로 이들이 폭탄을 맞았다고 해도 좌초 이상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 보기 어려우며, 4개월이면 미국 입장에서 항공모함 네 척 수리할 시간으로는 충분하다. 리처드 딕 베스트[18]가 죽는 바람에 일본 항모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살아난다든지 하는 소설적인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면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5.3. 진주만 공습에서 일본군이 미군의 유류 저장고를 공격했다면?

사실상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원활히 이끌어 나갈 수 있는"[19] 방도는 이외에 찾기 힘들다. 일본군은 미군의 주력함대를 격멸하는 데에 집중하느라 유류 저장고를 파괴하기 전에 이미 탄약, 폭탄 등을 다 써 버렸고, 때문에 3차 공습으로 유류 저장고를 치려다가 중단하고 돌아왔다. 당시 미군의 유류 저장고는 태평양 함대 전체를 지탱하는 물자의 기둥이었고, 만약 일본군이 탄약이 넉넉하고 항공기들의 피로가 적어 3차 공습을 했더라면, 그래서 이것이 파괴되었다면 미군은 태평양 전쟁 진행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20]은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막대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많지 않다"고 평하지만, 적어도 한 달 내지 두어 달 정도의 여유라도 벌 수 있다면 일본군은 남방작전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미드웨이 해전을 감행할 필요성도 적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미 태평양 함대의 재건에 사용될 물자가 유류 공급에 돌려져야 하므로 어쨌든 미군의 기동력과 전투력을 심대하게 저하시킬 몇 안 되는 가능성의 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일본군이 하와이를 점령하는 것은 무리고[21] 미군의 물량이 본격적으로 뽑히기 시작하면 일본군은 그걸 당해낼 방도가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미국과의 협상의 여지를 더 만드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5.4.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했다면?

만약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을 먼저 포착하고 선제타격, 퇴각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긴 했을 것이다. 히류의 요크타운 공격 성공에서 보다시피, 미드웨이 작전에 나선 나구모 주이치 예하 일본 항공모함들과 그 탑재 항공단은 미 항공모함들을 먼저 발견하면 모두 격침시킬 수 있는 역량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미드웨이를 미군이 승리 했다는 결과론만 놓고 보는 경향 때문에 그렇지, 당시의 미군은 여기서 패배하면 뒤가 없는 상황에 항모격차를 줄이기 위해 산호해해전에서 타격을 입은 요크타운을 3일만에 긴급수리와 함선으로써 기능을 할 정도의 핵심적인 수리를 마친 뒤 투입시키고 미드웨이에 활주로 건설해 전투기를 배치하고 요새화를 하는 등 사활을 건 전투였기 때문,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작전목표는 미 해군에 대한 물리적 격멸이 아니라 미드웨이 섬에 대한 공격이었고, 상술했듯이 진주만 기습으로 하와이를 어마어마하게 요새화한 미군은 미드웨이에게도 충분한 요새화를 끝마쳐 두었다. 물론 하와이에 비하면 못하지만 미드웨이도 충분히 강한 요새고, 패배해 해상전력을 전부 잃지 않은 이상 일본군이 끌고 간 4척의 항공모함과 전함, 1만을 좀 넘는 상륙전력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완전히 궤멸했다면 미 해군 역시 앞으로의 전투에서 고전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우선 태평양 지역 연합군 반격의 첫 발인 과달카날 전역이 벌어지지 않거나 연기되어 과달카날에서 소진을 강요받았던 일본군의 수상함 전력들, 항공 전력들이 그만큼 더 남아있었을 것이며, 1항전을 위시한 일본군 항모기동부대의 건재 때문에 미 태평양 함대는 본토에서 건조 중인 에식스급 항공모함,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들이 사라토가, 와스프와 함께 궤멸당한 항모기동부대를 본 전투력까지 재건할 때까지는 과달카날 전투와 같은 적극적인 반격이 힘들어져 전쟁이 1~2년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서양에서 날뛰던 독일 크릭스마리네 유보트들에 대항하기도 빡빡했던 미 해군에겐 일본군 잠수함의 통상 파괴도 위협적인 요소다. 일본군 잠수함들이 하와이와 미드웨이를 말려죽일 수준까지 되었는가? 는 의문부호가 붙지만 미 해군 입장에서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음은 되었지 플러스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일본군에도 점령지를 확대할 기회가 됨은 물론이다. 미드웨이 해전을 연구하여 책까지 출간한 조너선 파셜과 앤서니 털리는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이 승리할 경우 일본군은 뉴헤브리디스 제도, 피지, 사모아는 물론 심지어 호주 북부까지 진격할 수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물론 조너선 파셜과 앤서니 털리는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의 승리가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줄 수는 없다는 것이라는 것을 함께 지적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미국의 수많은 전쟁 병기를 생산하는 산업 시설들은 일본군이 절대 타격할 수 없는 지점에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이 미 태평양 함대 항모기동부대의 궤멸로 끝났다고 해서 본토에서 건조 중이던 에식스급 항공모함,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아이오와급 전함, 플레처급 구축함 등의 수많은 신예 함선들과 F6F 헬캣, F4U 콜세어와 같은 신예 전투기들의 생산, 새로운 미군 사단들의 배치가 중단되는 것도 아니며, 1944년의 사례에서 입증하였듯 미군은 중부 태평양에서 직접 공격하여 일본군 방어선을 뚫고 일본 본토까지 진격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항모기동부대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더라도, 미군은 이 패배를 만회할 능력과, 입지 역시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5.5. 상하이 전투가 일본군의 패배로 끝났다면?

실제로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수적, 양적, 질적으로 중국군에게 완전히 압도당했으며[22] 심지어 그 일본 해군 항공대가 중국 공군에 의해 제공권을 이틀 가까이 빼앗기기 까지 했다. 일본군이 상하이 전투에서 중화민국군을 제압하고 내륙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건 무차별적으로 뿌려 댄 독가스 때문이었는데, 만약 일본군이 상하이 공세를 포기했다면 중일전쟁은 훨씬 더 안정적으로 영위되었을 것이다. 중화민국군은 엄연히 40만 명에 육박하는 최정예 병력과[23] 각종 군벌군 450만 명을 거느린 당대의 지역강국이었고, 상하이에는 중국 철강의 90%를 생산하던 거대한 제철소도 있었다[24]. 또한 무역항으로서 중국 조세의 30%를 담당하고 있는 대도시였으므로, 일본이 상하이를 포기했더라면 결과적으로 이는 중화민국의 외세 지원을 확대하고 산업 역량을 키워 주며 행정력을 확충할 기회를 열어 주며 중일전쟁을 독소전쟁 꼴로 만들었을 것이다.

5.6. 중일전쟁이 없었거나 늦게 일어났다면?

당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보았을 때 가능성은 상당히 낮으나 21세기 현재의 전 세계 판도까지 다 바꿔놓았을 엄청난 대격변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만약 중일전쟁이 2년만 늦춰진다고 해도 일본군은 결코 하북을 넘을 수도, 상하이를 돌파할 수도 없다. 중국군이 상하이에서 일본군 12만 5천 명을 1개월 이상 묶어두는 데 독일식 기계화 정예사단 3개면 충분했는데, 1939년까지 이것이 40개로, 이것보다는 못하지만 일본군에 준하는 정예사단이 80개로 늘어날 예정이었다. 여기에 각종 무기를 더 배치하여 중화민국군 전체를 일본군에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최소한의 전투는 가능할 정도로 근대화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으며, 만약 이것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중국군은 450만에 육박하는 그 엄청난 대군 대부분이 근대화를 거치며 소련군을 능가하는 조직화된 대군으로서 다시 한 번 아시아 최강의 육군으로 군림할 것이다.

게다가 당시 중화민국의 근대화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았다. 중화민국은 급속도로 서방제 무기를 수입하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으며, 이미 일본 다음가는 규모의 제철소를 보유하고 있었고 중국 전 지역에 열악하지만 철도를 확대하고 있었다. 상하이, 난징, 우한, 충칭, 광저우 5개 도시를 중심으로 근대화를 진행했을 뿐인데도 당시 중국의 총생산은 일본을 능가하고 프랑스 식민제국에 필적하고 있었다. 만약 당시의 상승세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중국은 1938년에는 철도 보유량에서 일본을 넘어서고, 1941년에는 철강 생산량에서도 일본을 넘어서게 된다.[25] 이미 중화민국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방과 일본의 투자가 꽤 있었지만) 성냥, 못, 탄약 등의 기초물자는 물론 야전포, 항공기, 함정까지 자력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중국과 일본의 입장은 아예 뒤바뀐다. 1940년대를 넘기게 되면 그때부터는 중국이 공격자, 일본이 수비자의 입장으로 변하며, 중국 공산당도 만주의 장쉐량도 중화민국 중앙정부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대적할 수 없다. 특히 공산당은 1940년대를 넘기기 전에 완전 소탕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5차 초공작전으로 사실상 식물인간이 되었던 공산당이다. 장쉐량 역시 더 이상 독립적인 세력으로 남지 못할 것이며 중화민국의 군사력은 일본군에 대등한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충분한 힘이 생긴 중국이 눈앞에 있는 고토를 그냥 놔둘 리가 없다.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용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등 언뜻 보면 한국의 독립운동에 지원적이고 우호적이었던 듯하지만, 실상 그가 한국에 애착을 보인 이유는 한반도에 친중 정권을 수립시켜 동아시아 패권을 잡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었다. 물론 국부천대 이후로도 한국에 어느정도 관심을 두는 등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호감 또한 어느정도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정치와 개인적인 감정은 어디까지나 별개이기에 그러한 요소들은 고려되지 않을 것이다. 중화민국이 결코 대만을 그냥 둘 가능성 역시 없고, 무엇보다 자신 이상으로 강력해진 중국을 일본이 그냥 둘 가능성도 없으므로, 1940년대가 지나가기 전에는 아마 사실상의 동아시아 대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과가 대단히 아이러니해지는데, 여기서 중국이 이기든 일본이 이기든 일본은 사실상 절대로 만주와 중원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이며, 중국은 승패와 상관없이 동아시아 최대의 세력으로 급부상할 것이다.

이후의 변화는 중화민국이 국공내전 승리한 대체 역사 항목에 쓰여있다시피 엄청난 떡밥이지만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아 섣부르게 어떤 결과로 이어졌다 결론 내리긴 어렵다.

중화민국 입장에서 긍정적인 가정을 한다면 통일된 중국의 역량하에서 문화대혁명도 대약진 운동도 없이 냉전기를 보낼 것이고, 반공국가로서 미국의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을 것이다. 장제스의 독재와 국민당 일당체제도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후의 일본이 어떻게 되느냐, 한국이 어떻게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진다. 중국은 아시아에서 더 이상 대적할 자 없는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할 것이고, 일본, 한반도, 만주, 몽골, 동남아시아 등에 있어 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며, 나아가서 그 거대한 인구를 앞세워 무수한 유럽국가들의 공장을 유치하고, 제조업에서 어마어마한 입지를 확보할 것이고, 채굴 과정의 오염이 심한 희토류, 티타늄 등에 있어서는 거의 독점적인 입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대약진 운동도 문화대혁명도 없으므로 중국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물과 유적들은 보존되었을 것이고, 중국의 어마어마한 미디어 산업으로 소프트 파워를 확대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소련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강력한 육해군을 가질 것이고, 반도체와 정밀기계에서도 무시 못할 입지를 갖추고 높은 기술 수준을 확보할 것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시베리아 지역의 자원과 경제권에 있어서 영향력을 투사할 것이고, 제3세계의 수장인 인도 역시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 앞에 무릎꿇을 것이다.
그리고 냉전 종식 이후 스스로 충분히 힘을 길렀다고 판단한 중화민국이 태평양을 향해 눈을 돌리는 순간, 미국은 자신이 아시아에 뭘 만들어 낸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정부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상술한 중화민국의 부상은 국민당 정부의 부정부패와 내부의 문제가 해소된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고, 내부 사정으로 성장이 지연 혹은 정체되어 인도나 러시아가 그러하듯 규모의 측면에서 경제력과 영향력은 국제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패권국이 되어 군림하지는 못하는 국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서두에 썼듯이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사의 판도를 바꿔놓았을 가정이라는 것이다.

5.7. 우호 작전이 없었다면?

우호 작전(임팔 전투)은 희대의 뻘짓으로 유명하지만, 대전략상 대단히 중요하다. 남방에 주둔하던 일본의 10만 대군이 건재한 상태로, 이들이 버마에서 소멸하는 대신 오키나와, 이오지마 등으로 갔다면 미군은 훨씬 더 많은 인명피해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원자폭탄을 개발했으므로 전쟁을 좀 더 잔혹하게 만들 뿐이다.

5.8. 니고 연구로 일본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했다면?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수렴하며, 상징성은 크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개변이다. 일단 당시의 핵무기란 미사일에 실어서 쏘는 게 아니라 폭격기가 들고 다녀야 하는 무기였고, 일본군은 원자폭탄의 최소질량인 5톤을 들어올릴 폭격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일본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것부터가 넌센스이지만, 그걸 넘어서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역사 개변이 될 것이다. 다만, 적어도 전후에 일본 본토의 원자폭탄 관련 서류를 손에 넣기 위한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첩보전은 더 격화되었을 것이고, 소련의 핵개발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

5.9. 일제가 1944년에 항복했다면?

필리핀 해 해전사이판 전투절대방위선이 무너지면서 일본 제국 내부에서도 연합국에 대한 항복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만약 일제가 항복을 일찍했다면 도쿄 대공습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기아 작전이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고 일본 본토의 산업체계가 온전히 보존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 백만의 생명들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일제가 이미 미국의 역린을 단단히 건드린 상황이라 미국의 가혹한 요구를 피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중화민국과 한반도에게도 희망적인 시나리오인데, 중화민국의 경우 피해를 좀더 최소화한채로 중국 공산당 소탕에 힘을 쏟을 수 있었을 것이며, 한반도 역시도 중국 공산당의 소멸에 더해 소련의 개입 가능성이 희박한 시기이기 때문에 남북분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온전히 독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26] 소련이 독소전쟁을 끝낸 이후에도 중화민국이 세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어서 함부로 남진할 수가 없다. 다만 온전히 독립한 한국이 정세도 안정적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한데 미군정 시기에도 정치가 혼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간의 갈등이 폭발하다 못해 백색테러는 물론이고 수 많은 양민 학살이 터졌을 가능성도 높다.

5.10. 히로시마·나가사키를 포함해서 그 어느곳에서도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일단 이러려면 몇 가지 중 하나의 조건이 붙는다.

전자의 경우라면 실제 역사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핵무기는 물론 일본의 항복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이미 1944년 중반 시점에는 일본의 패망이 확실시되었고, 일본 본토 공습의 전개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핵폭탄이 전략적으로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 본토 공습과 외교만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고, 또한 실제로 그렇게 했다.[27] 일본이 폭격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버텼던 이유는 소련을 중재자로 미국과 협상할 수 있다는 처절한 희망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이며, 일본 대본영과 천황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았을 때는 계속해서 총옥쇄를 부르짖었지만 소련이 참전하자 바로 다음날에 항복을 결정지었다. 계전파 군부가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나가사키에는 핵을 맞기도 전에 항복했을 것이다. 원자폭탄의 투하는 일본에게 "경악"이었지만, 소련의 침공은 일본에게 "절망"이었고, 둘 중 무엇이 더 항복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을지는 자명하다.

따라서,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로 벌어진 일과 별다른 차이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다만 소련의 참전이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10일 앞당겨졌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일본은 8월 25일에 항복했을 것이고 그게 끝이다... 그리고 그동안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교토 등 원자폭탄 투하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공습을 막았던 지역들도 이 세계선에서는 모두 혹독하게 폭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의 경우는 조금 전자에 더한 거긴 하지만, 차이가 있다. 바로 소련이 참전하기도 전에 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러면 위에 1944년에 일본이 항복한거랑 비슷한 루트를 타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본을 제 2의 이탈리아라고 놀려먹는 경우가 생길 것으로 보이며, 일본 내부에서도 군은 수치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일미군에게 일본의 안녕을 100% 위임할수도 있을 것이다. 자위대 없는 세상 또한 소련이 일본 쪽에 간섭할 명분이 사라지면 독립한 대한민국은 남북 분단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6. 기타

6.1. 2차 세계대전 불발(不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은 시나리오를 다룬다.

의외로 전쟁을 막을 기회는 차고 넘치게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독일의 경우 히틀러만 없었어도 원 역사만큼 거대한 무언가를 터트릴 가능성이 0에 가깝게 떨어진다. 신흥 식민제국과 기성 강대국의 싸움인지라 발발 이유가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되는 태평양 전쟁도 따지고 보면 일본군부 폭주의 시발점이 된 만주 사변점을 쳐서(...) 결정되었을 정도로 충동적인 사건이었다. 심지어 중일전쟁 발발 직후의 파나이 호 사건 때까지만 해도 일본 제국미국과 싸울 생각이 별로 없었다.

유럽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더라도 1차 세계대전의 앙금이 아직 남은 탓에 냉전에 준하는 긴장감이 족히 수십년 이상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치 독일이 집권하지 않았다 쳐도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잃은 영토를 다시 확보하고 싶은 야심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동유럽을 두고 소련 등과 충돌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제국프랑스 침공이 없었으니 현실적으로 동남아시아 를 칠 수가 없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등 전 세계의 열강들과 한번에 싸울 생각이 아닌 이상 중일전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 세계와 척을 진 상태이고 미국이 순순히 다시 기름을 팔아줄 생각도 아니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동남아시아를 못 먹으니 시베리아를 치자는 심정으로 소련과 충돌하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시점부터 이미 상당히 맛이 간 상태였기 때문에 21세기가 오기 전 마치 소련처럼 제국이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은 훨씬 오랫동안 식민 지배 상태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유럽 국가들은 독일과 한바탕 붙은 탓에 국력을 완전히 소진했고, 아시아의 식민지들도 일본 제국이 거하게 때려부숴놓은 탓에 더 이상 경영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 다다랐다. 게다가 세계 최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이 (3차 세계대전은 피하고 싶으니) 식민주의 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열강들은 어쩔 수 없이 10~20년 내로 대부분의 식민지들을 독립시켰다. 그러나 이정도 규모의 전쟁이 없었다면 당연히 유럽의 열강들이 국력을 그 정도로 소진할 이유도 없고, 미국이 반식민주의 노선을 밀어붙일 명분도 딱히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식민주의의 종식까지는 시간이 훨씬 더 걸리게 된다.

6.2. 미국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소련 학자들과 군인들도 인정한 부분인데 미국의 무기대여법에 따른 무지막지한 원조가 없었더라면 소련은 도저히 독일을 몰아낼 방법이 없었다.[28][29] 1963년에 한 대화에서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원조가 없었다면 소련이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했다. 도청된 그 대화 내용은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해제되었다.[30] 이렇듯 무기대여법은 많은 역할을 하였다.[31] 일단 산업 시설들이 시베리아로 이동되었기에 각종 무기류만이라면 소련도 충분히 생산이 가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곡창 지대는 이미 상실한 상황이었기에 이대로는 군인 민간인 너나할 거 없이 사이좋게 굶어죽어가다 평화협정을 맺을 지경이었고, 소련 자체의 능력으로는 무기를 만들더라도 전선까지 보급할 수송력도 없었다. 미국이 운송수단과 식량을 우선적으로 보내준 것도 이 때문이다. 소련이 민간부문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고, 군수물자 생산에만 집중하여 엄청난 물량을 뽑아낸 것은 무기대여법 덕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500,000대가 넘는 차량은 독일 본토로 진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1944년 하반기 이전까지 유럽 대부분의 공업지대를 차지하고 헝가리, 루마니아, 등 동맹국의 지원과 스웨덴, 스페인 등 우호적인 중립국의 지하자원을 수입하는 등 총력전을 하는데 소련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전쟁패배로 이어진 독일보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여간 미국 정치권의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 소련에 대해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면 실제 역사에서처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까지 도착한 뒤 뻘짓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소련은 현상유지면 모를까 독일군을 몰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양상이 전개된 것이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이란이 이라크보다 훨씬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미국과 서방의 무기 금수제재와 혁명으로 인한 이란군의 전반적 전투력 약화가 겹쳐서 이란군의 공세 능력은 전쟁 후반기에 극도로 약화되었다. 거기다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군의 주요 장비들의 가동률도 악화 일색이었고 혁명수비대를 비롯한 이란군 병사들은 보급품 부족으로 그저 소총만 든 채 맨몸으로 돌진해야 했다. 심지어 소년병까지 총알받이로 동원되었다. 그렇기에 끝내 서방과 아랍 국가의 지원으로 가동되는 강력한 기계화부대로 무장한 이라크군을 밀어내지 못하고 막대한 희생자만 배출한 채 티그리스 강 장악은 커녕 전쟁 이전 영토만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6.3. 독일 혹은 독일 국방군인종차별과 그에 기반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독일로서는 매우 희망적인 가정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었던 경우. 만일 나치 독일이 인종차별과 학살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자제하고 소련 치하의 민족들의 국가 설립을 막지 않았다면 600만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과, 집시, 슬라브인들은 독일군에 징병되는 건 물론, 핵 개발의 주요 인물들의 미국 망명이 없었거나, 조국에 다시 귀국하면서 미국의 맨해튼 계획이 시작도 안 되거나 매우 늦춰지는 결과가 있었을 수 있다. 또한 전쟁 초반에 독일군을 해방자로서 반긴 점령지의 수많은 슬라브족 인구가 독일군에게 적극 협조하고, 병력이 되어 소련군과 싸우면서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이랬을 경우 독일군의 병력은 소련군과 동등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성립 이념을 생각해보면 이런 인종차별과 전쟁범죄가 없을 수가 없었다. 만일 나치 지도부가 개전 이후 타민족의 협력을 얻기 위해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했다면 인종주의에 기반한 나치 이념과 충돌을 일으켜 모순을 이뤘을 것이다.

6.4.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뗐더라면?

현실성은 있으나 나치 독일에게 부정적이면 부정적이었지 긍정적일 수는 없는 시나리오이다. 히틀러가 군사적으로 벌인 실책은 많았지만 그가 나치 독일의 군사적 역량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훨씬 더 컸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당시 만슈타인이 제안했던 낫질 작전의 진가를 알아보고 채택한 장본인이 히틀러이며, 다수의 장성이 반대하는데도 키예프 공격을 강행하여 중부집단군의 생명, 나아가 나치 독일의 생명을 수년 이상 연장시킨 것도 히틀러였고[32] 나아가 서방군의 유럽 본토 상륙작전 당시 모든 장성이 칼레를 1순위로 지목할 때 노르망디를 의심한 유일한 장성 이상급 인물 역시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결코 문민통제를 자신들의 자유도에 대한 침해로 여기는 좌충우돌의 지휘관들이 주장했던 것과 같은 무능하면서도 명령하기만 좋아하는 전쟁놀이 마니아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그는 (적어도 노이로제와 약물로 인해 글자 그대로의 정신병자가 되기 전인 1943년 중반까지는) 나치 독일의 최고 권력자이자 전쟁의 총책임자로서 당시 그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판단은 다른 장성들이 내린 것보다 나으면 나았지 나쁘지 않았다. 히틀러는 엄연히 부사관 경력이 있고 실전 경험이 있는 군인이고 군사학을 공부한 인물이었으며, 나치 독일 최고의 참모진을 거느리고 있었고 모든 정보는 그에게 집중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사령관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 나치 독일 내부의 경제와 사회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가 내리는 결정은 그런 것이 없거나 부족한 현장 지휘관이나 전선사령관이 내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전략적이었고 더 큰 판을 두는 결정이었으며, (누차 강조하지만 1943년 이전의) 히틀러가 내린 대부분의 "군사적으로 옳지 못한 똥별 같은 결정"은 나치 독일 내부의 경제, 사회 사정을 본다면 "정신머리 똑바로 박힌 인간이라면 내릴 수밖에 없는 결정"에 가깝다.

물론 1943년 이후의 히틀러는 "퇴각 금지 명령"이나 "제트전투기를 폭격기로 개조 명령" 등 분명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지경의 어리석은 수를 수없이 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본다면, 과연 1943년까지 와서 히틀러 하나 빠진다고 나치가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나치가 과연 그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퇴각했다면 소련군을 다시 격퇴할 수 있거나, 방어선을 강화할 수 있었을까? 제트전투기를 이용하여 제공권을 다시 장악할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절대 아니다. 전략적 관점에서 나치 독일은 모스크바에 도달하기 전에 공세종말점이 와버린 바로 그 순간에 이미 패망한 것이다. 나치 독일이라는 국가가 낼 수 있는 퍼텐셜을 다 소비했고[33]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불가능하고 점령지를 운영하며 내정으로 버티기만 가능한 상황이 된 것인데, 여전히 소련은 그 군세와 전력이 건재했고 자원이 풍부했으며 미국이라는 든든한 동맹이 있었으므로 이 시점에 나치 독일의 운명은 결정지어졌다. 따라서 1943년 이후에는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서 손을 뗀다 한들, 물론 아주 소소한 전술적 이점을 가질 가능성은 있겠으나 그것이 나치 독일의 최후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6.5. 뮌헨 협정이 결렬되었다면?

세계대전과 이에 따른 독소전쟁을 피할수없었다고 가정하면 나치 독일입장에선 셋째로 희망적인 IF다. 회담이 결렬되고 독일의 선공으로 전쟁이 일어났다면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진격하더라도 마른 강 유역에서 막히고[34] 나아가 루마니아를 통과하여 체코로 진입한 소련군[35]이 전쟁의 진행을 완전히 바꿔 놓았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련군은 스탈린의 숙청으로 제 상태가 아니었고 폴란드가 있었으므로 히틀러가 소련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로의 진행 과정을 보면 1차 대전 재탕(?)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히틀러에게는 이대로 마른 강에서와 폴란드-루마니아-북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동부전선에서 모스크바로 진격해 소련과 독소전쟁을 계속하다가 밀려나서 베를린 공방전이나 치루고 패망하든지 아니면 점령지를 죄다 토해내는 것으로 유럽 각국과 강화를 하든지 이렇게 2가지 선택만이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과 비교하면 소련을 제외하면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인들과 독일 군부에게도 그리고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 그 자신에게도 해피 엔딩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였다면 독일은 그냥 제1차 세계 대전이 규모가 살짝 커진것에 불과할 뿐(?)이고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초대형 전쟁도, 홀로코스트도 폭주하지 않은채 히틀러와 나치당도 독일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권좌에서 쫓겨나 기껏해야 추방, 망명 내지는 감옥에 가는 정도로 제거됨과 동시에 나치 독일독일 제국 MK-2급 독일 제2 제국으로 재탄생했을 테고, 히틀러는 흔한(?) 독재자 정도로 평가받고 있을 것이다.

6.6.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성공했다면?

쿠데타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히틀러를 암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 암살을 성공했다면 쿠데타가 실패하더라도 히틀러가 이리저리 꼬아놓아 막장이 된 독일군 지휘체계만큼은 일시적으로 마비되면 이 틈을 타서 히틀러가 그렇게 꺼리던 협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더라도 쿠데타가 성공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발키리 작전이 실행될 때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Großdeutschland), 즉 대독일사단 소속 수도경비대대의 특성에 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군사반란 발발시 즉시 진압에 투입할 정예 수도 방위 부대를 모체로 한 베를린 경비연대를 기반으로 창설된 정예 부대였다. 진압 부대가 역으로 반란 모의에 적극 동참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게다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육군 최정예 부대로 주력 부대는 막대한 전과를 올리면서 동부전선 곳곳에서 맹활약 중이었고 쿠데타 측이 동원할 수 있었던 베를린 내 주둔군은 고작 4개 중대 뿐이었다. 그렇다면 부대를 직접 통솔하게 될, 그 4개 중대 내의 중간급 간부들을 포섭해야 했는데 그 많은 수의 간부들을 포섭하는 것은 쿠데타 사전 발각의 위험이 너무 컸다.

결국 쿠데타 측은 SS가 히틀러를 암살하고 군사반란을 시작했다는 거짓 정보를 발표하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간부급 장교들을 쿠데타에 포섭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발키리 작전을 따라 부대를 통솔해 작전을 계시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히틀러의 생존과 SS의 연락이 닿으면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이것이 쿠데타였음을 인지하고 이 작전은 실패하게 된다.

또한,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에 따르면[36] 나치당내의 주요인사들을 체포하거나, 정보교환을 차단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살해하는 등 이러한 행동으로 쿠데타 성공 확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들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쿠데타 당시 괴벨스는 슈페어와 같이 있었고, 이들의 무장은 그들이 각자 소유하던 권총뿐이었다. 1개 소대도 아니고 1개 분대만이라도 이들을 해하려 시도했다면 이들은 결코 무사할 수 없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방송국을 점령해서 독일 전역에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이들은 위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쿠데타 계획을 세웠으면서도 자신들의 집권 방법은 도덕적이어야 하고 나치에 대한 단죄는 합법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 아래 나치 고관을 암살하지 않고 그냥 체포해서 후에 법정에 세운다는 아마추어적인 생각 때문에 이렇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쿠데타 계획을 세운 군인들이 전쟁을 잘 알 뿐 정치적인 공작에는 서툴렀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특성을 고려해서 반히틀러 쿠데타라는 점을 숨긴 채로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는 쪽이 사실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이 계획에서 군부를 대표한 루트비히 베크에 대해서 구데리안은 자기 회고록에서 쿠데타에 가담하라고 권유가 있었으나 주모자가 루트비히 베크인 것을 알고 그렇게 결단력 없는 인물이 성공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구데리안이 주모자가 베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담했을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쿠데타는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특성상 '완벽한 계획'을 만드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다. 실제로 역사상 성공한 쿠데타들도 계획 자체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진압을 해야 하는 정권 측의 실수가 겹치거나 뜻하지 않은 행운을 통해 성공한 사례가 많다. 무엇보다 쿠데타 계획이 허술했다 하더라도 쿠데타 측의 반히틀러 저항 정신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계획이 허술했건 아니건 이들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걸고 한 것이다.

당시 쿠데타 측의 계획은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마르틴 보어만 등을 비롯한 나치당 수뇌부를 제거하고 독일 제국 시절과 같은 군주국을 세운 뒤 연합국과 강화하고 그들과 함께 소련에 맞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패망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연합군 수뇌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설령 그들이 히틀러 암살에 성공하고 주요 인사들을 제거한다 치더라도 힘러의 경우 테러가 일어났을 땐 저 혼자서 멀리 떨어진 채 SS 호위 병력의 경호를 받으면서 무장 열차 안에 있었고 힘러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한 뒤 자신이 독일의 총통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37] 파울 하우서요제프 디트리히 등 SS 소속 장성들은 힘러를 싫어하며 오로지 히틀러에게 충성하였으나 이들도 쿠데타 측을 그냥 보고 있었을 리도 만무하다. 결국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한 데로 쿠데타 측과 SS의 충돌로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고 전선이 붕괴되어 연합국이 1944년 12월 크리스마스 전에 베를린에 입성하는 꼴로 끝났을 것이다. 진짜 많이 잘해서 쿠데타 측이 힘러까지도 제압하고 SS의 진압도 물리친 후 신정부를 세웠다고 쳐도 이미 독일 내부의 혼란으로 전선의 붕괴는 더 빠르게 이루어졌을 테고 신정부가 협상을 시도할 즈음엔 연합군은 이미 지크프리트동프로이센까지 밀려오고 있었을 것이고 강화는 결렬, 신정부 측은 좋든 싫든 계속 전쟁을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전선 붕괴 없이 방어전에 어찌어찌 성공하고 점령지 대부분에서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처칠, 루스벨트와 강화했다고 치더라도 독일 혼자만의 여력으로 소련군을 막기는 힘들 것이 확실. 게다가 병사들의 사기도 쭉쭉 내려가고 국민들의 신뢰도 내려간 마당에 소련군에 쳐발리는 독일 군부표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에 의해 제2, 제3의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도 없다. 이 점은 안네의 일기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즉, 쿠데타 측이 암살과 신정부 수립에 성공했어도 독일의 패망은 정부만 바뀌었을 뿐 이루어졌을 일이고 더욱이 이들은 총통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한 매국노들로 후대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되면 철저한 탈나치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한 번 배후중상설이 돌며 독일 내의 전체주의, 군국주의화를 다시 불러왔을것이며, 제3제국으로의 회귀하거나, 나치 독일 그 이상으로 맛이 간 제4제국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설령 민주화가 됐더라도 현재 일본마냥 과거사 문제로 폴란드와 체코, 네덜란드 등 이웃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매우 시끄럽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6.7. 독일이 연합국보다 먼저 핵을 개발했다면?

이쪽은 가능성이 낮다. 대전 말기 원자로 가동도 하지 못한 상태를 감안하였을 때,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은 힘들었을 듯.[38] 핵이 개발되어도 독일은 핵 공격을 할 만할 초대형 전략 폭격기의 생산이 어려웠다. 핵 투발용 특수 전략 폭격기의 생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 핵폭탄을 제작한 주요 인물들 중 일부는 추축국 출신이다. 그들은 망명할 계획 없이 잘 살다가 나치가 집권하고 인종차별을 시작하면서 망명했다. 거기에 입국을 거부하고 입국했으면 사형선고를 때릴 정도로 무차별적인 인종청소가 만연했다. 1945년에는 이미 루프트바페보텐플라테 작전 등의 삽질을 통해 갈가리 찢겨 핵 폭격기 호위기도 부족한 상황이고. 이 한 방에 모든 것을 걸어 보았자 광활한 시베리아를 전부 점령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V2 개량이라는 묘수가 있긴 했으나 핵무기가 올라갈 플랫폼 수준으로 개량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핵 공격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독일은 핵무기 대신 생화학 무기를 V2에 탑재해서 미국으로 날리는 게 더 빠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만약 독일이 핵을 1940년이나 1941년에 개발하였더라면 동시에 로켓 개발이 빠르게 이루어져 V2, V3 개발을 완료했다면 런던레닌그라드, 모스크바는 지도에서 증발하고 핵으로 초토화된 유럽은 제3제국으로 통합되었을 것이다. 전쟁 중후반에 미국과 독일이 비슷한 시기에 핵개발을 했다면 끔찍한 상황이 될텐데 당시에는 매우 강력한 폭탄 정도로 알고있기에 어느 누구도 방사능 피폭 등 핵무기의 폐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진행중인 전쟁에 거리낌없이 사용했을테니 핵무기가 만들어지는대로 죄다 적국 주요 도시와 전선에 뿌려버렸을 것이며 수많은 핵공격이 일어나는 진정한 의미의 핵전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6.8. 독일이 항복한 직후 영미연합에 합류하여 소련과 충돌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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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하나의 선택지만으로 전쟁의 국면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은 별로 없었다. 군사적으로만 본다면 언뜻 하나의 선택으로 갈아엎어진 경우가 많았으나, 실제로 정치적, 행정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시점에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의 범위가 원래 그 선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경우가 많으며, 다르게 선택했다 하더라도 역사적인 요소들이 원래 벌어져야 했을 일을 일어나도록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시 말해, 어떠한 요소로 인해 일본이 미국에게 빨리 항복하여 한국이 분단되지 않은 채 독립할 가능성은 있으나, 결국 언젠가는 소련의 개입으로 분단되거나 내전에 휘말렸으리라는 뜻이다.[2] 다만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영프 쪽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긴 했다. 현대에 각국의 사료를 비교해봤을 때 군수물자로나 병력으로나 병장기의 질로나 폴란드 침공 시점에선 영프가 합친 게 독일측보다 우세하긴 했지만 작정하고 전쟁준비를 해놨던 독일에 비해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을 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하고 있었다. 애초에 어딘가로 공세를 간다는 생각 자체를 빼놓고 있던지라 보급수단 정비는 물론이요 편제나 작계 같은 기본적인 구성도 안되어 있었다. 즉 이 때 영프가 말없이 버로우를 탔던건 독일을 과대평가한 면도 없잖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자기네들 체계가 잡혀있지도 않았던게 컸다. 전쟁에서 위험한 것 중 하나가 체계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벌이는 전쟁이라는걸 고려하면 영프는 이 시점(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자기들은 전쟁준비가 1도 안된 상태)에서는 그나마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3] 현실에선 롬멜이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멋대로 공세에 나서긴 했는데 롬멜이 지휘하던 군대는 3개 군단이 전부였다. 그러고도 물량 차이가 압도적으로 나는 영국군을 상대로도 전선을 이집트 국경까지 밀었던걸 고려할 때 보급과 군대 증원까지 겹쳐지면 아예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럽 열강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4]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 전에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강화를 매우 진지하게 검토했다.[5] 히틀러는 원자재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으로부터 수입으로 충족, 식량자원은 우크라이나로 충족되었다고 생각했으며 독일군의 각지 전선의 기계화전력을 기동시킬 연료에 간절하였기에 청색작전을 집행한 것이기도 하다.[6] 다만 무기대여법으로 연료를 더 뜯어내는걸로 때웠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나 스탈린그라드가 점령당하면 보급선이 꼬인다는 것을 감안하면 타격이 클 것이다.[7] 그린힐의 대체역사 전집에서 참고. 해당 서적은 국내 미출간.[8] 소련군이 충분한 대공력을 가지고도 순전히 교전을 유기해서 유지된 경우는 있다.[9] 일각에서는 영국과 노르웨이가 모조리 독일의 손에 넘어갔다면 제해권이 완전히 장악되어 미국이 렌드리스를 하려고 하더라도 제대로 소련에 도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건 틀린 의견인데, 그 이유는 렌드리스 수송선의 북극 항로의 비중이 역사적으로 상당히 적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소련에 건네준 렌드리스 물품의 대부분은 북극 항로의 계절적인 위험과 영국을 포위한 유보트 때문에 북극 항로가 아닌 인도양태평양을 통해 옮겨졌다. 북극 항로를 통한 렌드리스는 초기에 시도해 보다가 손실률이 너무 커서 유보트를 거의 다 잡아낸 대전 후기까지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배만 운영되던 비주류 항로이며 렌드리스 물품의 과반수 이상은 일본과 중립 관계였던 소련이 직접 태평양을 통해 옮겼고 나머지도 대부분은 인도양으로 옮겨졌다. 이 북극 항로의 위험성 문제는 렌드리스가 42년 중반이 넘어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치가 영국을 점령하고 그로 인해 일본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태평양 항로가 막힌다고 가정하면 렌드리스 자체에 큰 위험이 되겠지만 단순히 미소 간 렌드리스로 한정한다면 북극 항로는 역사적으로 차지하면 엄청 좋은 항로지만 없다고 렌드리스 운송을 못할 항로는 아니었다. 북극 항로가 그나마 대전 총합 20% 수준의 렌드리스 물품이라도 옮긴 건 대전 후기에 유보트를 다 잡아내고 제해권을 장악한 이후에 이 항로를 애용했기 때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 초기에 북극 항로를 통한 운송 실패가 워낙 빈번하여 대전 총합 이 항로의 손실률은 7%에 달했다.[10] 독소전의 정신나간 스케일에 비하면 30개 사단이 별거 없어 보이지만 상식적인 구성에서 30개 사단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대군이다. 그 유명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고작 4개 사단이었고 아프리카 전역의 대전투들이라는건 고작 몇개 사단들끼리 서로 치고박는 정도였다. 30개 사단은 북아프리카에 가져다두면 그 즉시 전역 자체가 종결되는 수준의 대군이다.[11] 극동의 부대들은 정예였고 그 수도 상당했으나, 앞서 적혀있듯 심지어 소련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모스크바 전투에서도 소련은 극동에 대규모 군대를 유지했다.[12] 당장 불가리아는 추축국이었지만, 같은 슬라브족-정교회를 매개로 러시아와 매우 가까웠으며, 특히 러시아 제국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불가리아를 독립시켜줬기 때문에 소련을 상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추축국인데도 독소전쟁에서는 병력을 보내지 않고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13] 애당초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참하게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원래 양면전쟁은 어떤 국가나 피하려고 하는 데다가 독일은 제국시절에 일어난 1차대전때 프랑스를 얕보고 양면전선을 했다가 단단히 준비한 프랑스가 잘 대응하며 버텨내자 구상도가 완전히 어그러졌고 말기에 러시아와 타협해 서쪽전선에 투입했을 당시에는 이미 독일 전선이 무너지던 도중이었다. 이후 독일은 이 전투를 교훈삼아 "전선을 2개로 만들지 말라"는 격언까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확대한 점은을 일으킨 점은 두고두고 까일 일이다. 독일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패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초기 전선잘 돌아가면서 비관적으로 보던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의 발언권이 약해지고 히틀러의 발언권이 강해졌었다. 결국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의 예상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을 듯. 전투는 이기지만 전쟁을 이기지 못하는 독일의 종특 뭐...전체적으로 본다면 동맹간에 손발이 영 안맞았던게 문제기는 하다. 일본 제국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기에 소련을 협공하자는 독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왕국은 전쟁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그리스 침공, 이집트 침공을 하다가 되려 역관광 당해 제 앞가림도 못하는 바람에 독일이 상당한 도움을 줘야했으니(...).[14] 청색 작전과 성채 작전도 원래 5월로 예정되었다가 연기되었다.[15] 전황이 급격히 악화된 후 어느날,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대왕 초상화 앞에서 "그 1달을 돌려달라"고 절규했다는 풍문이 전해질 정도이다.[16] 1929년부터 1939년까지 독일은 중국군의 현대화에 도움을 주는 대신 중국으로부터 원자재를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의 일방적인 공세가 계속되자, 히틀러는 향후 소련 침공 대비를 위해서는 중국 대신 일본과 동맹을 맺는 편이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중일전쟁 초반까지 독일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전쟁을 중재하려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1937년 12월 일본군이 중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며 더 이상의 전쟁 중재는 불가능해졌다. 1939년 독일은 만주국을 국가로 인정하고, 또 1941년 왕징웨이 정권을 인정하며 장제스 국민당 정부와의 외교관계는 끊어진다. 그리고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2차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다.[17] 실제 역사에서 1939년 독일이 U보트로 상선을 격침시켜서 대서양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고려하면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독일편에서 소련과 싸울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미국의 대독일 유럽 전선 지원 규모가 줄어들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미국의 총력전은 국민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독일은 진주만 공습을 벌인 적(일본)의 적(중국)의 동맹이다. 총력전으로 독일에 맞서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상당했을 것이다.[18] 하루만에 일본 항공모함 2척에 폭탄을 명중시켜 인류 역사상 최고의 공격 파일럿 중 하나가 된 인물.[19] 강조하지만 "승리할 수 있는" 이 아니다.[20] 특히 토크멘터리 전쟁사 진주만 공습 편에서 이를 부정적으로 다루었다.[21] 70년의 기술 격차가 벌어진 2020년 시점의 미군도 24시간 내에 함락시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는 엄청난 요새가 1940년대의 하와이 오아후 섬이다. 지형부터가 많이 양심이 없고, 해안포와 벙커도 장난이 아니다. 일본군이 상륙전을 감행했다면 오키나와 전투 역전세계가 펼쳐졌을 것이다. 거기다 진짜 있을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점령을 한다 치더라도 보급 선박의 부족으로 하와이까지 보급을 할수가 없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발발후 동남아로의 침공을 위해 민간선박까지 닦닦 긁어모았던게 그때 당시 일본이다. 설령 보급에 필요한 선박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그 먼거리까지 보급선을 유지할만한 능력은 그때 일본 해군에겐 없었다.[22] 인구나 물량은 예나 지금이나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고 질은 중독합작으로 해결.[23] 당연한 소리겠지만 전부 독일제 무장이다.[24] 상하이 제철소는 일본의 야하타 제철소 다음가는 거대 제철소였으며, 동시에 단일 용광로의 규모로서는 세계 최대였다.[25] 1937년 일본과 중국의 제철량 격차가 150:1에 달하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따라잡아?" 싶을 수도 있으나, 1935년에는 그 격차가 3,000배를 넘었다. 즉 중국은 고작 3년 만에 총 제철량을 20배 이상 확대하며 일본을 바짝 추격해온 것이다. 이 상승세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1939년에는 격차가 7.5:1로 줄어들며, 1942년에는 1:2.6으로 중국이 일본을 압도하게 된다.[26] 상황에 따라 만주국이 아닌 일본의 할양 영토였던 요동이 한반도의 손에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물론 요동의 주민은 모두 중국인이긴 하지만.[27] 자주 착각하는데 원자폭탄 투하도 엄연히 공습이다. 그리고 그 전과는 도쿄 대공습과 비교했을 때 별로 크지 않았다.[28] 니키타 흐루쇼프는 자기 회고록에 이용한 녹음 인터뷰에서 서구가 소련의 전쟁 수행 노력에 원조한 보급 물자들의 중요성을 인정했지만, 다음과 같은 부분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간행되었다. "나는 스탈린이 주위 측근에게만 (무기대여법을) 인정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그는 우리 공업의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독일과 1대 1로 대결했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29] 흔히 말하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무기대여법 효과도 받지 않고 승리를 거뒀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독일군을 밀어낼 여력이 되지 못했다.[30]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268p[31]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냐는 식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 조차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군의 보급 능력이 예상보다 덜떨어진것으로 밝혀진 이후 랜드리스 빨로 이긴 거 아니냐는 의견으로 선회하고 있다. 그 원인 역시 우크라이나가 잘 싸워서 그런게 아닌, 우크라이나 역시 소련 처럼 서방권이 랜드리스를 전쟁 전 밀어넣어준 결과 방어에 성공하고, 이후 랜드리스를 본격적으로 미친듯이 밀어넣으면서 장기전으로 고착되었기 때문이다.[32] 상술한 "모스크바에 먼저 진공했더라면" 문단 참조. 이때의 히틀러가 내린 키예프 진격의 판단만으로도 그가 저지른 군사적 실책에 몽땅 면죄부를 줄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선택이었다.[33] 공세종말점은 어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 경제적, 행정적인 면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며, 여기서는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크다. 다시 말해, 나치 독일이라는 국가의 경제는 더 이상 전시경제의 운용이 불가능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전쟁특수를 통해 가릴 수 있는 국가경제의 적자량이 임계점을 돌파, 이제부터는 전쟁을 치르면 치를수록 제 살 깎아먹기에 진입하는 시점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더 국가의 역량을 쥐어짜다가 나치 독일보다 훨씬 더 처절하게 폭망한 케이스가 일본 제국이다. 독일 제국 역시 그 행정력을 통해 국가의 모든 자원과 인력을 빨아먹으면서 전쟁을 하다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되어버린 전 독일의 노동자들의 반란으로 망해버렸다.[34] 애초에 뮌헨 협정 당시 프랑스와 폴란드 국경에 배치된 독일군이 몇개 사단씩 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와 폴란드가 빨리 참전하기만 했으면 여기까지 밀릴 일도 없었을 것이고 되려 독일이 국경 인근의 라인란트와 슐레지엔을 순식간에 잃었을 것이다. 다만 가짜 전쟁 당시에도 프랑스군이 전면적인 공세를 꺼렸던 것을 감안하면 서부 전선의 급격한 동진까지는 글쎄...[35] 다만 루마니아는 당시 소련군의 국경 통과를 거부하고 있었고, 소련도 일단은 프랑스가 참전해야 참전한다는 조건을 걸어놓았기에 그렇게 순조롭진 않았을 것이다.[36] 정확히는 괴벨스가 한 말을 자서전에 작성한 것이다.[37] 진압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외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 조건까지 충분히 갖추어진 상태였다.[38] 애초에 대전 내내 물자부족에 머리를 싸매던 나치 독일의 역량으로는 핵은 이론적 완성은 몰라도 실제 개발 배치는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보면 알겠지만 쇼미더머니를 갈기던 미국 기준으로도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바람에 미국 하원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만큼의 자금이 꿀꺽 사라진 거냐'며 당장 예산 장부를 공개하라고 강력히 요구하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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