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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합스부르크 측의 묘사 |
오스만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오스트리아 대공국 간에 1529년 9월 27일에서 10월 14일까지 18일동안 빈에서 벌어진 대공방전. 빈 포위라고도 하며, 1683년의 두 번째 포위와 구분하기 위해 1차 빈 공방전으로 지칭한다. 두 번 다 결과는 수비 측인 오스트리아의 승리였고, 이로써 오스만 제국의 서유럽 진출이 좌절되었다. 8세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과 함께, 유럽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큰 전투라고 할 수 있다.
2. 배경
쉴레이만 대제 |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즉위한 야심만만한 청년 황제는 국가의 법을 공고히 다지고 예술과 문화를 진흥하는 등 내치에 힘쓰는 한편, 아버지인 셀림 1세의 정복 사업을 물려받아 원정 또한 꾸준히 추진했다. 그의 재위 동안 추가로 이라크와 아라비아 반도, 튀니지가 오스만 수중에 떨어졌으며[1] 빈 포위와 관련해서는 1526년에 모하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한때 동유럽의 최강국이었던 헝가리 왕국을 사실상 멸했다.[2] 이로써 그는 명실공히 3대륙을 호령하는 제왕이 되었다.
문제는 3대륙을 지배하는 황제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카를 5세 |
최전성기에 도달한 이 두 제국간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유럽 세계는 레콩키스타를 통해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마지막 이슬람 세력을 축출한지 채 반세기도 되지 않아 다시 이슬람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육지에서 유럽의 최전선이었던 헝가리마저 모하치에서 무너지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뿌리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오스만 제국의 국경과 바로 마주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3. 개전
1526년에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 국왕 러요시 2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동생으로 황제 대리의 자격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는 즉각 자신이 헝가리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일단 러요시의 왕비 마리아가 자신의 누이였던데다가 본인은 러요시의 누나 언너와 결혼했고, 러요시 자신도 생전에 자신이 후계를 남기지 못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보헤미아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귀족들은 이에 동의했다. 반면 헝가리의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의견이 양분되어 서부와 북부의 귀족들은 페르디난트 1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했으나 동부 에르데이 출신 귀족들은 유력한 지방 귀족이자 대다수 귀족들의 민심을 얻고 있던 서포여이 야노시를 야노시 1세로서 옹립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가 야노시의 즉위를 납득할 리 없었고, 결국 그는 군사를 일으켜 헝가리를 침공했다. 페르디난트의 합스부르크군은 연승을 거두며 헝가리의 수도 부더를 비롯한 주요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이에 야노시는 처가인 폴란드 왕국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장인인 지그문트 1세가 거절하자[6]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쉴레이만 1세를 찾아가 오스만 제국이 페르디난트에 맞서 싸우는 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의 신하(봉신)가 되었다.
쉴레이만은 급한 대로 군대를 파견해 합스부르크군의 진격을 저지시켰다. 그 결과 헝가리는 합스부르크령과 오스만령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529년, 황제 쉴레이만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합스부르크의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헝가리로 향했다.
8월에 쉴레이만이 직접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 12만 5천명은[7] 9월까지 헝가리 전역을 수복하고 합스부르크 군대를 축출했다. 포조니와 자그라브 등을 제외한 동쪽의 요새들은 맥없이 오스만에게 넘어갔으며, 헝가리 수도 부더를 사수하던 합스부르크 주둔군은 패배하고 포로들은 남김없이 처형되었다.
한편 오스만군이 헝가리 전역을 점령하고 오스트리아까지 쳐들어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페르디난트는 급하게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로 피신해 자신의 형인 황제 카를 5세에게 구원을 청했다.
당시 카를 5세는 이탈리아를 놓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한창 대치중이었다. 이런 카를 5세에게 동쪽 변경에서의 급보는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카를 5세는 급한 대로 스페인과 독일에서 징발한 일단의 정예 보병을 오스트리아로 급파했다. 4년 전 합스부르크군이 프랑스를 무릎꿇린 파비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던 70세의 베테랑 장군인 니클라스 그리프 살름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빈 수비군의 지휘관으로 발탁된 살름은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그는 제일 먼저, 성벽을 견고하게 보강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고 급속히 성의 동쪽에 요새와 누벽을 신설하고 6피트를 넘지 않는 성벽을 더 굳건하게 보강하고, 4개의 성문을 폐쇄시켰다.
이윽고, 오스만군의 흡사 전격전을 방불케 하는 진격으로 순식간에 수도인 빈의 성벽이 둘러싸이고 말았다. 빈 포위가 시작된 것이다.
참고로 오늘날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빈 공격이 계획된 것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즉 쉴레이만이 '어라, 합스부르크가 생각보다 너무 싱겁게 무너지는데? 이참에 오스트리아의 중심도시라는 빈까지 점령해버려...?!' 라고 생각한 것인지, 애초에 '헝가리는 시작에 불과하고, 오스트리아 전체를 제국의 영토로 만들겠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 확실한 건 쉴레이만에게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란 존재는 전 유럽을 제국의 발 아래에 두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었다는 점이다.
▲튀르키예 사극 위대한 세기에서 나오는 빈 공성전. |
4. 전개
하지만 사전에 계산된 것이었든 다소 우발적인 것이었든, 이대로라면 오스트리아 정복도 어렵지 않으리라는 판단은 큰 오산이었다. 이미 헝가리로 향할 때부터 폭우가 내린 바람에 수많은 보급 수레와 대포를 길에 버리고 온 상황이었고, 보급에 동원할 낙타도 거의 대부분 죽는가 하면 군사들 사이에 전염병까지 퍼졌기 때문이다.
결국 빈에 도달했을 때 오스만 제국군은 제대로 된 전투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반면 빈의 합스부르크군 2만은 보급품도 충분하고 역병의 공격도 받지 않아서 사기가 높은 편이었다. 빈에 도착했을 때, 평소처럼 싸울 수 있는 오스만 제국 병사들 가운데 3분의 1이 시파히, 즉 기병들이었다. 물론 평소에도 오스만 제국군의 주력부대는 시파히였지만, 기병을 공성전에 동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스만 제국군은 빈의 성채를 향해 강력한 포격을 퍼붓고 갱도를 파는 등으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니클라스 살름이 지휘하는 빈의 수비군은 이를 효과적으로 잘 막아냈다. 10월 6일에는 땅굴을 파는 오스만군을 합스부르크군이 알아차리고 8천의 병력으로 공격하여 이미 파여진 땅굴을 파괴했고 10월 11일에 쏟아진 비는 남아 있는 땅굴들마저 무력화시켜 공성전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공성이 뜻하지 않게 1개월 가까이 장기전으로 이어지면서 오스만 측의 보급에도 문제가 생겼다. 빈 주변의 주민들은 모두 빈 요새로 피신했기에 물자의 현지 조달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었다. 보급이 열악해지면서 오스만군 내에서 탈영자가 속출했다. 군마를 먹일 먹이조차 바닥을 드러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봄부터 폭우가 쏟아진 것도 모자라 평소보다 일찍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예니체리들마저 끝장을 내자는 각오로 총공격하거나 철수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목소리를 내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 쉴레이만은 휘하 지휘관들을 모두 불러모아 회의를 연 다음 이기면 빈을 점령하는 것이고 패배하면 그대로 철수하기로 한 채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10월 12일에 감행된 최후의 총공격도 니클라스 살름과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고[8], 오히려 막대한 사상자만 발생했다.[9] 그로부터 이틀 뒤에 쉴레이만은 철군 명령을 내렸다.
5. 영향
1530년 오스트리아 측에서 묘사한 빈 공방전
철군도 쉽지 않았는데 이른 폭설로 인해, 오스만군은 퇴각 도중에만도 수많은 병사와 병기, 물자를 잃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오스만 제국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으로는 수만 명 정도의 피해는 막대한 피해라고 하기 어려웠고, 빈 함락에는 실패했으나 오스만 헝가리의 지배권을 전보다 더 확고히 다지기도 했다. 반면 합스부르크 왕조는 오스트리아 본토와 합스부르크령 헝가리가 초토화되고 프랑스와의 전쟁 수행 문제도 있었기에, 해가 바뀐 뒤에야 반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쉴레이만 1세의 야심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빈 포위의 실패를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이 자신의 생각보다 튼튼한 존재임을 확인했고, 보다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숙적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도 군사동맹을 맺었고[10], 해상에서의 영향력도 확대해 나갔다. 두 제국의 국경에서 산발적인 교전도 이어졌다.
빈 포위로부터 3년이 지난 1532년,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쉴레이만 1세는 빈을 목표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 때는 신성 로마 제국도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이탈리아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에 둔 황제 카를 5세는 8만 명의 군대를 소집하여 친히 이끌고 빈으로 향할 수 있었고, 대조적으로 오스만군은 오늘날 헝가리의 쾨세그라는 도시에서 발이 묶인 채 시간을 허비하다 수만 명의 지원군이 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물러났다. 물론 곱게 물러나지 않고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공격해 마을과 도시들을 박살내고 돌아갔다. 이후 쉴레이만은 헝가리를 두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계속해서 접전을 벌이며 줄곧 우위에 있었지만, 끝내 빈을 다시 공격하지는 않았다.[11]
그러나 지중해에서의 패권 경쟁은 계속되었다. 1538년까지 오스만의 함대는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이 장악하던 에게 해의 여러 섬을 오스만의 수중에 넣었다. 베네치아의 해상 제국이 붕괴되자 유럽에서도 교황 바오로 3세를 중심으로 신성 동맹이 결성되어 해상에서 군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의 가톨릭은 종교개혁의 열풍으로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으며, 이슬람의 공세를 차단해 위신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1538년의 프레베자 해전에서 신성 동맹의 함대는 이슬람 세계의 명제독 하이르 앗 딘이 이끄는 오스만 해군에게 박살나고[12] 베네치아는 사실상 몰락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레판토 해전에 이르기까지 반세기가 못되는 동안 지중해의 패권은 오스만 제국에 넘어간다.
빈 공성전을 승리로 이끈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는 훗날 조카이자 적통인 펠리페 2세를 물리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위에 오르게 되는데, 빈 공성전의 승리는 그가 계승 순위 1위인 조카를 제치고 제위에 오를 수 있게 된 명목상의 결정적인 업적이 되었다.
수십 년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1세의 맏아들 막시밀리안 2세는 1차 빈 포위의 격퇴를 기념하고자 쉴레이만 1세가 진을 치던 자리에 노이게보이데 궁전(Schloss Neugebäude)을 건립했다.
6. 관련 문서
[1] 이 가운데 튀니지는 1534년에 정복했으나, 그 이듬해에 합스부르크 왕조에 빼앗겼다. 오스만이 다시 탈환한 것은 1574년으로, 쉴레이만의 아들 셀림 2세 치세 때의 일.[2] 당시 왕이었던 러요시 2세가 후계 없이 전사하여 이후 헝가리 왕국은 둘로 분열되다가 16세기 후반 셋으로 갈라졌으며 2/3은 오스만 제국, 1/3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들었다. 즉 모하치 전투로, 완전 독립국이며 단일국가였던 헝가리는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전역을 탈환하기 전까지 셋으로 갈라졌으며, 19세기 말 대타협으로 주권을 되찾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된다.[3]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에는 확실한 영토가 있었고, 아시아의 경우 포르투갈과 사라고사 조약 체결 이후 필리핀의 정복을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도 멜리야, 오랑, 튀니스와 같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다.[4] 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을 가리킨다.[5]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세력을 꺾겠다는 것을 목표로 내걸고 계속해서 전쟁을 걸고 있었지만 내부가 단합이 되지 않다보니 연패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영국은 대영제국은커녕 아직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나뉘어 있던 때였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조는 프랑스와 오랫동안 전쟁(이탈리아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견제를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어 합스부르크에 대항하고 있었다. 또한 합스부르크는 그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만의 적대국인 사파비 조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종교 문제도 있어서, 오스만 제국도 합스부르크 제국도 서로에 대해 온 국력을 쏟아붓기 어려운 상황이었다.[6] 당시는 루블린 조약 체결 이전이라 지그문트 1세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동군연합으로 통치하고 있었는데 모스크바 대공국이 리투아니아를 위협해서 쉽사리 도움을 주기 어려웠다. 게다가 지그문트 1세는 백부 브와디스와프 3세가 오스만 제국과 정면승부를 펼치다 바르나에서 전사한 악연이 있어서 조카(러요시 2세의 아버지 울라슬로 2세는 지그문트 1세의 맏형)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과 정면승부는 피하려 했다.[7] 헝가리, 세르비아, 몰다비아, 불가리아인들이 포함되었다.[8] 니클라스 살름은 이때 벌어진 공방전에서 직접 싸우다가 중상을 입어 사망했다.[9] 약 1만 5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10] 오늘날 이는 기독교 유럽이 처음으로 종교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이교도와 체결한 군사동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것보다는 신성모독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지만 말이다.[11] 1533년의 코스탄티니예 조약이나 1547년의 에디르네 조약 등을 보면,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중부 및 동부를 지배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은 헝가리 서부를 가져갔다. 그나마도 오스만 제국에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였는데, 이는 비록 문서상으로나마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오스만 제국의 신하라는 소리. 게다가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문에는 '스페인 국왕' 으로 표기되고 페르디난트는 '독일 왕' 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진정한 '로마 황제'는 오직 쉴레이만 대제 한 사람뿐이라는 오스만 제국 측의 목소리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12] 이때 신성 동맹은 전함 302척, 병사 6만으로 전함 122척, 병사 2만의 오스만보다 군세가 압도적이었는데도 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