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3 00:20:07

전국시대(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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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유도.png   중국의 전국시대에 대한 내용은 전국시대(중국)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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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sengoku_1.jpg

에도 시대 말기 화가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가 그린 작품집인 <道外武者御代の若餅> 중의 한 그림. '오다가 쌀을 찧고, 하시바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 앉은 채로 먹은 건 도쿠가와(織田がつき、羽柴がこねし天下餅、すわりしままに食うは徳川)'라는 글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1]

1. 개요2. 명칭3. 전국시대의 시작과 끝4. 주요 사건 연표5. 특징6. 대중적 인식
6.1. 일본6.2. 한국
7. 역사서8. 전국시대의 인물9. 관련 문서 / 인물 묶음10. 대중 문화 속의 전국시대
10.1. 전국시대를 다룬 작품10.2. NHK 대하드라마

1. 개요


파일:센고쿠시대 지도.jpg

戦国時代 일본 센코쿠 시대

일본무로마치 막부 말기의 혼란기로, 전쟁이 끊이지 않아 전국시대라 불린다. 덴노의 권위가 땅끝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오닌의 난으로 인해 쇼군막부의 권위마저 땅끝으로 떨어지자, 지방의 다이묘(영주)들과 사무라이들이 내가 최고가 되겠다고 들고 일어나 치고 박으며, 어제의 부하가 오늘의 적이 되는 하극상이 비일비재하던 시대였다.

이렇게 하극상으로 새로이 나타난 다이묘뿐 아니라 기존의 슈고 다이묘 중 살아남은 다이묘 혹은 이런 다이묘들이 서로 싸우다 몰락한 틈을 타 스스로 다이묘로 성장한 옛 소규모 호족 등 이 시대의 다이묘들은 막부나 조정의 권위는 빌릴지라도 이들의 대리 지배자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법령을 제정하는 등, 독립적인 특성이 더욱 강해졌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전국 다이묘라고 불러 이전의 슈고 다이묘 등과 구별한다.

혼돈의 카오스 전국시대를 대충 정리하고서 통일을 목전에 두었던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 그의 사후 일본을 거의 통일한 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 두 사람의 시대는 특별히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 또는 쇼쿠호 시대(織豊時代)로도 아울러서 칭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둘이 치고박고하면서 통일한 것을 기회로 계속 숨죽이고 있다가 어부지리로 일본을 완전 통일하여 에도 막부를 연 장본인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2. 명칭

다른 시대명이 지명 등의 고유 명사에서 유래한 것과는 달리 남북조시대와 전국시대는 일반 명사에서 뜻을 따온 명사이므로 표준어 대사전에도 전국시대로 실려 있으며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한편 중국의 남북조, 전국시대와 구분하는 의미, 또는 헤이안, 무로마치 등 일본어 발음으로 된 다른 시대 명칭과 형평성을 맞추는 의미에서 난보쿠초, 센고쿠로 쓰는 경우도 있다. 영어 명칭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명과 마찬가지로 번역한 Warring states period와 일본어를 음역한 Sengoku period를 같이 쓴다.

3. 전국시대의 시작과 끝

시작과 끝에 여러 이설이 있다. 시작은 1467년의 오닌의 난부터라는 설과 1493년에 일어난 메이오의 정변의 두 설이 대립하고 있고, 여기에 호조 소운이 호조 가를 세운 1488년으로 잡는 사람도 있다. 종결 시점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이 있는데 1573년 오다 노부나가무로마치 막부를 축출한 때까지라는 게 정설이긴 하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도 전국시대의 범주에 넣는 쪽도 있어서 오다와라 전투(1590년),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에도 막부 성립(1603년), 오사카 전투(1615년)[2]까지라는 설이 있다. 아예 노부나가가 상경한 1568년을 전국시대의 끝으로 보는 설도 있다. 또는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을 전국시대의 끝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1641년 시마바라의 난 종결을 끝으로 잡는 것.

어쨌든 일반적인 일본 학계의 통설은 1573년(무로마치 막부의 교토 축출)[3]을 끝으로 보고 있고, 보통 노부나가가 입경한 1568년부터 에도 막부가 성립하는 1603년까지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거하던 성 이름을 따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라고 부르며 다른 말로 오다(田)-도요토미(臣) 시대라는 의미를 담은 쇼쿠호 시대(織豊時代)라고 부른다.[4]

덧붙여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기거한 성 이름을 따서 부른다고 알려졌는데, 모모야마는 히데요시가 말년에 기거한 '후시미(伏見) 성'의 부지를 일컫는다. 모모야마라는 이름은 후시미 성이 폐성된 후 후시미 성 부지에 복숭아나무(桃)가 심어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문제는 이 이름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도 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 그래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모모야마' 대신 '후시미 시대'나 '오사카 시대'가 좀더 적절하며 '아즈치 모모야마'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오늘날에도 일본에서는 여전히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지만[5], 위 사실을 고려해 이를 대신하는 단어를 쓸 경우 '쇼쿠호 시대'라는 표현도 쓰이며, 기타 의견으로 히데요시가 건축한 오사카 성을 대신 넣어서 '아즈치 오사카 시대', 혹은 아예 쇼쿠호 시대 무렵에 쓰인 연호인 텐쇼(天正: 1574년~1592년)를 따서 '텐쇼 시대(天正時代)'라는 명칭을 제안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이는 정치사적 구분이고, 문화사적 구분으로는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하는 1615년까지 '아즈치 모모야마'라는 명칭이 일반적이며 이 무렵의 문화를 가리키는 '모모야마 문화(桃山文化)'라는 표현이 쓰인다. 한국의 세계사 교육 과정에서도 이 시대를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로 표기하고 있다.

4. 주요 사건 연표

  • 1467년~1477년 오닌의 난
  • 1478년 제1차 모리 지로의 난
  • 1489년 제2차 모리 지로의 난
  • 1493년 메이오의 정변
  • 1498년 메이오 대지진
  • 1504년 타치카와노하라 전투
  • 1506년 에이쇼의 난
  • 1509년 카타카쿠하라 전투, 뇨이가타케 전투
  • 1514년 타케하야시 전투
  • 1520년 토지인 전투
  • 1523년 닝보의 난
  • 1527년 카츠라카와라 전투
  • 1536년 하나쿠라의 난, 텐분훗케의 난, 제1차 카토우의 난
  • 1542년 텐분의 난
  • 1545년 제2차 카토우의 난
  • 1546년 카와고에 성 전투
  • 1549년 에구치 전투
  • 1550년 니카이쿠즈레의 변, 다이와이지의 변
  • 1553년 카와나카지마 전투
  •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
  •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
  • 1563년 유도코로구치 전투
  • 1565년 에이로쿠의 변
  • 1567년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
  • 1569년 엣소 동맹, 아시야 성 전투, 테이츄 전투, 아제이 성 전투
  • 1570년 아네가와 전투, 노다 성 전투, 후쿠시마 성 전투
  • 1571년 겐키의 법란
  •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키자키바라 전투
  • 1573년 오타니 성 전투
  • 1575년 나가시노 전투
  • 1577년 테도리카와 전투, 시기야마 성 전투
  • 1578년 오다테의 난, 미미카와 전투
  • 1580년 미키 성 전투
  • 1581년 타카텐진 성 전투
  • 1582년 혼노지의 변, 야마자키 전투, 빗츄 타카마츠 성 전투, 키요스 회의
  •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 1584년 코마키 나카쿠테 전투
  • 1585년 텐쇼 지진
  • 1586년 이와야 성 전투
  • 1587년 큐슈 정벌, 파트레이 추방령
  • 1590년 오다와라 정벌(오다와라성 전투, 오시성 전투)
  • 1592년 분로쿠의 역(임진왜란), 타이코 켄지
  • 1596년 케이쵸 이요 지진, 케이쵸 후시미 지진, 산 페리페 호 사건, 26성인 순교 사건
  • 1597년 케이쵸의 역(정유재란)
  • 1600년 아이즈 정벌, 후시미 성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 1604년 케이쵸 대지진
  • 1609년 시마즈 침입 사건
  • 1611년 케이쵸 산라쿠 지진
  •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
  • 1614~1615년 오사카 전투(오사카 겨울의 진, 오사카 여름의 진)
  • 1615년 잇코쿠이치조레이(일국일성령), 부케쇼핫토(무가제법도), 겐나 엔부

5. 특징

전국시대는 이 영주-무사-농민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전국의 영주들이 가장 신경쓰는 게 바로 부국 강병책으로, 먼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시켜야만 병사의 수를 늘릴 수 있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저수지와 개간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 일본의 농지는 오닌의 난 이전보다 약 1.8배로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고쿠 단위로 쪼개진 행정 영역은 통치를 보다 정교하게 만들었으며, 각 영주들은 검지[6]를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개 젠고쿠 다이묘가 자기 영지에 대해 제대로된 검지를 실시한다는게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검지 자체가 부하들과 산하 호족들에게 일종의 세무조사, 증세와 마찬가지였기 때문. 그 자체로 수하들에게 하극상의 빌미를 줄 우려가 컸고. 실제로 반발이 심했다. 하단에 설명되어있듯. 당시의 유력다이묘들도 실질적으로 지역 호족 연합세력의 수장 이상의 절대권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태합검지는 오히려 여러 다이묘들의 내심 환영을 받기도 했다. 검지에 반발하는 부하들을 손쉽게 찍어누를 좋은 핑계였고 검지로 히데요시 정권에 대한 동원부담이 커지는 것보다 영지장악력과 다이묘 가문의 수익이 커지는 부분이 더 컸기 때문.

그리고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지자무라이들과 토호들을 전부 가신단으로 편입시키고 연공을 일원화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로 전국시대가 끝난 후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 일본 전체의 석고는 1,800만 석, 다이코 검지 때는 2,100만 석까지 늘어나게 된다. 또한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승기를 잡기 위하여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거나 개발하는 데에도 매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때마침 유럽의 신항로 개척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 문물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총과 같은 신무기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결과적으로 반복되는 전쟁이 군사력이든 농업생산력이든 높은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긴장 상황을 유발하고 지속시켰기 때문에 이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와 별반 차이가 없었던 일본의 국력은 이 시기부터 한반도를 크게 능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세종 이래 나라 전체를 뒤흔들 수준의 국가적 변동 없이 정체된 상황을 유지한 조선의 상황과 맞물렸으며 그 결과가 임진왜란이라는 대 전쟁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즉 토호들의 과도한 수탈을 방지하는 한편, 수취를 하나로 통일하여 대영주가 아닌 이상 영주들은 무사들에게 농민들에게 일원적으로 받아낸 을 녹봉으로 지급하였고, 무사들을 성하 마을인 조카마치에 거주하게 함으로써 소집과 감시를 편하게 하였다. 봉록을 받는 무사들은 전쟁의 빠른 소집과 감시를 위해 성하 마을에 살게 되고, 이런 거대한 소비 집단을 위해 직인, 상인들이 대규모로 마을에 살게 된다. 이로써 영주들은 농민과 무사 상공업자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할수 있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 전국 단위로 총동원 체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당연히 중간 단계가 생략된 연공의 일원화, 즉 조세의 일원화는 농민들에게 가중되는 부담이 줄어들게 했는데 이들 농민으로 하여금 공동의 운명체라고 느끼게 하는 게 중요했다고 여겼다. 만약 민심이 이반해버리면 다른 영주가 침공했을 경우 살아남기 힘들어지니까[7]. 어찌 보면 이후 에도 시대의 기반을 닦고 지역별 색채를 강화시킨 게 이 시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 일본 각 지역에서 지역의 상징으로 유명한 인물들 가운데는 이 시기 다이묘들이 많다.

덤으로 여러 불교 종파들도 승병으로 군사력을 구축해 패권 다툼에 끼어 들었다. 정토진종의 혼간지(本願寺, 잇코잇키), 진언종의 네고로지(根来寺), 천태종의 엔랴쿠지(延暦寺) 등등. 보통 한국에서는 승병을 ‘나라를 위해 무기를 든 스님들’[8] 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전국시대의 승병은 한국의 후삼국시대 때처럼 지금으로 말하면 정치깡패에 비견되는 무장 조직과 다를 바 없다. 자체를 거점으로 삼고 주변 마을, 적대 교파 약탈은 기본이고, 낭인들을 매수하여 머리만 깎아놓고 용병 조직처럼 움직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종교에 힘입어 잇키를 일으켜 영주를 내치고 영지를 차지해 거대한 교단 영지를 세워 대영주랑 맞짱뜨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의 사원은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고 중세 서양 기독교의 대주교, 주교들처럼 사실상 독자적인 영지를 가진 세속적인 군사세력이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괜히 불교를 깨부수고 다닌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전국시대 다이묘들은 그 지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한국인 시각에서는 '한 지방의 절대군주' 같은 자리로 연상하기 쉬운데, 대부분의 전국다이묘는 그 지역 호족이나 토호, 유력 무사 등의 연합맹주와 비슷한 위치였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다이묘들은 영지물이나 전국시대를 다룬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자기 독단적으로만 통치를 할 수 있던 게 아니라 이런 지역 유력자들이나 가신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고, 이들과의 합의나 협조 없이는 영지를 운영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피거나, 심지어는 하극상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하다못해 그 유명한 다케다 신겐이나 서국 제일의 다이묘라는 모리 모토나리도 결국 이 '지역 연합맹주'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또한 전국시대에는 가신이 주군을 배신하는 하극상이나, 가신이 다른 주군에게 옮겨가거나, 한 번에 두 가문을 섬기는 행동 등이 일상다반사였다. 어떤 가문에서 공을 세우고 그 전공을 치하하는 표창장 겸 경력증명서 역할을 한 문서인 '간죠(感狀)'를 받아서 다른 가문으로 옮겨가거나, 주군에게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았다거나, 다른 가문으로부터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거나 하면 가문을 옮겨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주군을 바꾸는 행동이 '배신'이라는 의리 없는 행동으로 여겨진 것도 아니었고 흠잡을 만한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무사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른 일할 곳을 찾겠다고 다이묘에게 말하면 다이묘가 오히려 다른 가문 다이묘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써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흔히 퍼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무라이'라는 이미지는 전국시대 무사의 실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고 오히려 주는 만큼은 확실히 일하고 도리를 다한다는 '용병'이나 오늘날 직장생활을 하는 직장인처럼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 대부분이다.[9][10] 이런 전국시대 무사들의 가치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예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항왜를 들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의 시각에서야 이들은 매국노 취급을 받을 수 있지만, 당시 일본은 오랜 분열기로 인해 '우리는 일본인'이라는 국가관이나 정체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항왜들의 상식으로는 조선에 투항하는 것을 단순히 '조선의 왕'이라는 또다른 주군에게로 옮겨가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군에게 도리를 다하는 것을 경시한 것도 절대 아니였으며[11] 한 가문에 오래도록 충성을 바치는 무사도 없던 것은 아니라서 이렇게 한 가문에서 오래 일한 무사는 '후다이(譜代)'라고 해서 가문의 측근 중신으로 중용되었다.

또한 전국시대에는 같은 일본인들을 외국에 노예로 갖다 팔아버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는데 이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던 일본이 긴 전쟁 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상품이 다름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12]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큐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를 팔아넘겼으며[13], 여기에는 서양 선교사도 가담한 경우도 있어서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를 금압하는 주된 이유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14] 화약값 대신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 일직히 세상을 하직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등이 인신매매 1, 2위를 다툰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이러한 노예무역에도시대 이후에야 겨우 일본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15]

중국사에서 실제 비중에 비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삼국시대는 조조 · 유비 · 손권이 활약하는 초기의 비중이 크고 이들이 다 죽은 후의 중후기의 관심도가 떨어진다면 이 전국시대는 반대로 초중기의 관심도가 떨어지고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활약하는 말기의 관심도가 높다. 삼국시대의 끝은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더 혼란한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시대로 이어졌지만 일본 전국시대의 끝은 에도 시대라는 결실을 맺었던 게 아마 그 이유가 될듯. 한국의 후삼국 시대의 경우 완벽하게 신라와 고려 사이 교체기인 데다가 중국 일본보다는 기간이 짧고 명확하다.

6. 대중적 인식

6.1. 일본

'바쿠마쓰(막말)' 시대와 함께 일본 역사시대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향유하는 두 시대 중 하나다. 지역관광이나 각종 창작물에서도 아주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는 소재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 일본인들까지 전국시대를 잘 알고 있고 일상적 대화 주제로 통하는 정도는 아니다. 일본에서 이 시대 인물 중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졌으며 3살 아이부터 80살 먹은 노인까지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소위 '3대 천하인'이라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셋 뿐이다. 거기에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16]이나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 그리고 막대한 은혜를 베풀어줬던 주인을 배신한 사이토 도산[17] 정도가 유명한 편이고 만화나 게임 같은 전국시대 매체에서 그렇게 띄워주는 무장들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기껏해야 자기 지역 출신 무장이나 자기 지역 영주를 지냈던 무장들을 "아, 그런 사람도 있었지"라는 식으로 아는 정도. 일본에서도 이 시대 관련 역사는 관심 있는 사람이나 파는 분야라고 한다.

대개의 개괄서에서도 이 3대 천하인이 주요 인물로 나온다.[18] 일부 전국 팬들이 이걸 가지고 '다케다 신겐은? 우에스기 겐신은?'이란 식으로 물고 넘어지기도 했는데, 사실 개관적인 역사만 파악하려 한다면 이 시대는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이들의 업적만 알아도 충분하다. 시대 전체적으로 따진다고 해도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등 3대 천하인 외 유명인은 대개 3대 천하인과 같은 시대 사람이라 밀릴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는 차라리 앞서 말한 호소카와 가쓰모토 · 야마나 소젠이나, 전국시대 중기에 중앙 정부를 좌지우지한 호소카와 정권 사람들이 더 중요한 편.

한국의 전국시대 팬 중 일부는 일본인이라면 이 시대 무장들에 대해 빠삭한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정작 일본인들은 한국의 전국 팬들의 생각보다 전국 무장들에 대해 빠삭한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19]

6.2. 한국

한국사로 치면 대략 조선왕조 초기~중기와 겹친다. 조선 시대의 국왕 시기로 치면 조선 세조 치세 말년부터 선조 치세 중엽까지가 해당된다. 한국사와 전국시대의 접점이 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왜구(정확히는 후기 왜구).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양국 통교가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니 접점이 많진 않지만. 한편 중앙 정부가 사실상 붕괴하고 각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들고 일어난 사회적 분위기의 유사함을 따지면 우리나라는 남북국시대 말부터 후삼국시대가, 중국으로 치면 오대십국시대가 가장 유사하다.

저 시대 조선인들은 일본에 대한 인식이 이후에 비해서도[20] 굉장히 안 좋았다. 왜구가 가장 심각한 요인이기도 했고, 그 다음으로 수시로 신하가 주군을 상대로 반역을 하거나 심하면 시역도 하기도 하고, 자식이 부모를 상대로도 비슷하게 찬탈하는 등 도덕적인 측면에서 인식이 영 막장인 난세였기 때문이다.[21]

한국의 전국시대 팬들은 소설 대망을 통해 입문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귀무자 시리즈를 접하면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으며, 진삼국무쌍 시리즈를 접하고 나서 전국무쌍 시리즈로 와서 전국시대를 파보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22] 그래서인지 전국시대 인물들을 삼국지에 대입하려는 움직임이 자주 보이는 편이고 그나마 소설 대망도 '일본판 삼국지' 정도로 알고 읽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전국시대에 입문하는 한국인들은 삼국지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 하지만,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국시대에 대해 어찌 보면 민감한 시선도 있는 편이고,[23] 더더욱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사람들이 아는 전국시대 인물은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은 물론,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나,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등 인진왜란 관련 인물 몇명 뿐이다.

서울의 소리라는 한 인디 언론에서는 기사를 통해 전국시대는 일본의 국호였으며 1900년대 이전까지는 일본이라는 국호가 쓰이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24]

7. 역사서

삼국지 팬덤 같은 경우는 정사에 대한 토론도 많이 이루어지고 오히려 연의의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그건 연의의 내용이고 정사에서는 이러이러했다"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진 데 반해 한국의 일본 전국시대 팬덤은 주로 요시카와 에이지, 야마오카 소하치, 시바 료타로, 이자와 모토히코 등 한국에 소개된 전국시대 관련 소설을 가지고 그대로 이 시대의 역사를 논하는 경우가 많은 경향이 있다. 특히 이 작가들의 소설도 나온 지 오래 된 작품들이 많아서 이후 이루어진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이 반영되지 않고 이미 근거가 빈약한 설로 밝혀진 이야기들이 그대로 나도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장에 이 나무위키에서도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사실 한국어로 번역된 전국시대를 역사적으로 깊이 다룬 서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일본사 개설서에나 나오는 정도라서 일본어나 한자를 잘 모르면 깊이 파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은 일본 위키피디아 등지에서 자료를 검색해서 번역하여 이 시대를 파악하기도 하고, 내공이 깊은 사람들은 이 시대 관련 원서들을 구매해서 읽기도 한다.

사실 이 시기는 일본서기 같이 정사로 인정될 만한 역사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일일이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점도 있다.[25]

8. 전국시대의 인물

전국시대(일본)/인물 문서 참고.

9. 관련 문서 / 인물 묶음

여기에 나온 인물 묶음, 특히 사천왕이니 24장이니 하는 것들은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후대에 창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구는 사천왕에 들어가지 못하니 듣보잡', '누구는 왜 사천왕에 못들어가?' 란 식으로 크게 얽메이지는 말 것.

특히 전국 과대사천왕이란 단어는 2ch의 전국시대 게시판에서 나온 말이다.

10. 대중 문화 속의 전국시대

일본사에 있어 겐페이 전쟁, 메이지 유신과 함께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사극이나 만화, 게임의 소재로 자주 쓰인다. 특히 카드가 주로 등장하는 소셜 게임 장르에선 중국에 삼국지가 있다면 일본에는 전국시대가 있다 함께 내세울 정도로 단골 메뉴.

10.1. 전국시대를 다룬 작품

10.2. NHK 대하드라마

NHK는 대하 드라마를 1963년부터 제작하였다. NHK가 매년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대하 드라마를 제작하지는 않지만 꽤 자주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제작하는 편이다. 80년대처럼 시청률이 미친듯이 높게 나오지는 않지만 최근에도 15~20% 정도는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굵직굵직한 다이묘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2000년대 들어와서는 그런 다이묘들의 가신이나 주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이야기가 많은 편이다. 그야말로 일본 사극의 최고 떡밥


[1] 이 글은 우타가와가 살았던 에도 시대 말기에 누군가가 적은 낙서 비슷한 글이라고 한다. 떡을 찧고 있는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츠히데(절구를 찧고 있는 사람이 노부나가고, 절구 안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이 미츠히데다)이고 반죽하는 원숭이같이 생긴 사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뭐 사실 일본 현지 관련 대하 드라마에서도 보면 오다 노부나가가 히데요시를 향해 "원숭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보이긴 한다.), 오른쪽 위에 앉아서 혼자만 투구를 쓰고 뭘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다.[2] <도해 전국무장(圖解戰國武將)>의 저자인 이케가미 료타는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3] 이 해는 일본 전국시대에서 상당히 중요한 해다. 다케다 신겐 사망, 무로마치 막부교토 축출, 아자이-아사쿠라가가 멸망하면서 오다 노부나가의 긴키 지역 패권이 확립된 해.[4] 이건 학계에서 구분한 것이고, 대중적으로 전국시대를 접하는 이들에게는 특히 전국시대 전체를 알기 어려운 한국에서는 길게 잡아도 호조 소운 등 3효웅이 나타날 때부터 세키가하라 전투나 오사카 성 전투까지로 인식한다. 소설이든 만화든 게임이든 이 테두리 안에서 노니까.[5] 그래서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쇼쿠호 시대'를 검색하면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로 리다이렉트된다.[6] 토지 측량과 생산력[7] 더구나 이것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한 수단이었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하고도 예민한 문제였다.[8] 사실 한국사에서도 무신정권 시대에 최충헌, 최우 등 무신권력자들이 기존 왕실과 문벌귀족들이 후원하던 교종을 억압하고 선종을 키우는 과정에서 교종 사찰들의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킨 사례가 많은 것을 보면 고려시대까지는 사원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인력을 동원할수있는 일종의 호족과 같은 성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9] 실제로 일본에서 전국시대를 해설하는 교양프로그램이나 서적, 사극 등에서는 전국시대 사무라이 사회를 직장생활에 비유해서 해설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10] 유교 문서의 일본 부분을 참조해도 알 수 있다. 유교의 기본적인 사상들이 장려되기 시작한 것은 에도 시대부터이며, 그 전까지의 유교는 제왕학의 일종이었을 뿐이다.[11] 주군에게 도리와 충정을 다하는 것을 중요시 여긴 것은 배신이 난무한 전국시대에서 영주들 개개인에게도 당연한 것이였다. 때문에 대세가 기울어 주군을 배신하여 죽게 만든 성주가 오히려 상대측 대장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하기도 했으며, 주군에 대한 도리를 지키고 전사한 유명한 무사를 배출한 무사 가문은 나름 대접을 받으며 이후 구직 활동에서 선조의 이름덕을 보기도 했다.[12] 심지어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똑같이 서양인들이었다.[13] 대가로 조총화약등을 받기도 했다.[14] 히데요시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동기로는 일본의 천하인으로써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그리스도교 포교가 상대국의 식민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규슈 정벌 중에 쿠마모토 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주로 꼽힌다.[15] 에도시대에 이르면 전국시대가 마감되었음은 물론 쇄국정책을 펴니 공급도 수요도 모두 발생하기 어렵다.[16] '적에게 소금을 보내다( 敵に塩を送る)'는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속담의 유래가 되는 사람들이라 이들이 실제로 어떤 인물들인지는 잘 몰라도 이름 정도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17] 3대 효웅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효웅이라고 하면 도산부터 떠올릴 정도.[18]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역사 편에서 이원복 교수도 마찬가지로 이 셋에다 오닌의 난의 원인인 아시카가 요시마사 일가와 양편의 실권자 호소카와 가쓰모토 · 야마나 소젠만 언급하고 3대 천하인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그림 중에 다케다 가의 문장 '마름모'와 같이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묘사를 보면 다케다 신겐 같지만 이름이 안 나온다.[19] 사실 한국의 경우도 후삼국 시대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궁예, 견훤, 왕건 이렇게 3명 정도 아는 수준이고,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이순신, 선조, 원균 정도나 알고 조금 더 아는 사람들도 류성룡, 권율, 김시민이나 곽재우, 사명당 정도로 유명한 의병들이나 신립, 김명원 정도 아는 수준이니 일본인들이 3대 천하인 빼고 잘 모르는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다. 케이스는 약간 다르지만 현대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전부다 탈무드를 필독하는것도 아니다. 여하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20] 여전히 오랑캐라고 까기도 했지만, 그나마 좀 아는 부류들은 일본에서 서적을 수입해 보거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등 최소한 이전에 비해서는 나았다.[21] 당시 유교가 국가 통치의 이념이었던 조선에서, 특히 삼강오륜을 절대적으로 삼던 조선 사회에서 당시 일본의 이러한 행태는 '천한 것들'이나 일삼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괜히 '군신유의'를 운운했던 게 아니다.[22] 특히 이 게임 시리즈 제작사인 코에이는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일단 고증은 철저하게 하는 회사로 유명하고 또 게임에서 등장하는 문장들 역시 실제 그 모습과 성격 그대로 구현하는 편이라 많은 참조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전국 바사라와 같은 허구투성이인 작품에서도 실제 모습을 바탕으로 이를 뒤틀려 해석하는 식이 대부분이다(단 그런 만큼 왜곡은 심하다.).[23] 전국시대의 대표 인물 중 하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이하의 계파들이 그렇고,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 임진왜란의 왜장들도 전부 전국시대 인물들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몇 세기 전의 일이 지금까지 민감하게 여기는 이유는 비교적 최근 일인 일제강점기까지 겹쳐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비슷하게 중국도 왜구를 토벌한 명나라의 장군들이 진짜 영웅 대접을 받은 건 중일전쟁 이후의 일이다.[24] 일본이란 국호 자체는 이미 7세기 즈음부터는 쓰이던 국호였다. 더욱이 국호가 '전국'인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25] 중국, 한국과는 달리 통일된 중앙정부가 없다시피 했던 것이 한 몫을 했다. 사실 일본서기나 고사기 같은 것들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의 율령제가 잘 돌아가고 그래도 덴노가 (이 시대에 비해서) 권력있던 시절에 쓰여진 것이었다. 율령제도 붕괴하고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가 된 덴노와 중앙정부가 역사사 편찬할 재정과 인력이 있을턱이 없다. 실제로 이 시기 덴노는 매우 곤궁한 편이었는데 길가에 나갔다가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고 끼니를 굶거나 기운 옷을 입는 등 최소한의 품위 유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26] 정확히는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와 연관된 히로인들이 모종의 이유로 현대에 넘어와 주인공 노부나가와 엮어가는 러브 코미디다.[27] 영걸전 시리즈 3편으로, 노부나가 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러 전국시대물들과 달리 모리 모토나리가 주인공이다.[28] 영걸전 시리즈 4편. 말 그대로 오다 노부나가가 주인공이며 이미지는 노부나가의 야망 무장풍운록에서 가져왔다.[29] 시기만 전국시대인 판타지. 오다 노부나가가 언급되는걸 보면 시간대는 대충 알 수 있다. 작중 카고메도 자신이 어쩌다가 전국시대로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대사도 있다. 애니에서는 사라 공주의 아버지가 "최근에 들어온 조총" 이라는 말을 한것으로(조총은 1543년에 들어왔다.) 전국시대임을 한번 더 강조했다.[30] 이쪽은 거의 최소한의 모티브만 빌려온 특촬물.[31] 원작은 전국 무장 모에화 게임. 애니메이션은 타임슬립물로 배경이 현대다. 모에화된 무장들이 현대로 타임슬립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메인.[32] 국내로 넘어오면서 조선시대로 로컬라이징 되는 대참사를 맞이 했다.[33] 짱구는 못말려 10기 극장판으로 짱구네 가족이 전국시대로 타임슬립해서 겪는 일들을 그렸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치고 고증이 웬만한 사극 뺨칠 정도로 수준급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34] 1990년에 같은 원작을 기반으로 영화화도 된다.[35] 2009년에 토쿄 TV 계열에서 나카마 유키에를 주연으로 리메이크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