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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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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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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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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蝦夷)
하야토
(隼人)

각 명칭
한국어 재일 한국-조선인
재일 한국인
재일 조선인
재일교포
재일동포
일본어 在日韓国・朝鮮人
在日韓国人
在日朝鮮人
在日コリアン[1]

1. 개요2. 재일 한국-조선인의 역사3. 재일 한국-조선인의 규모4. 재일동포 마을 및 코리아타운 목록 5. 재일 한국-조선인 사회의 언론6. 재일 한국-조선인과 일본인의 통혼 및 혼혈7.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한 인식8. 관련용어/문서
8.1. 양대 단체8.2. 관련 문서8.3. 유명한 인물 & 나무 위키에 등록된 인물
8.3.1. 정치인/법조인/기타 공무원8.3.2. 기업인8.3.3. 작가8.3.4. 학자8.3.5. 배우 & 성우 & 영화인8.3.6. 음악가 & 가수8.3.7. 만화가8.3.8. 스포츠 선수8.3.9. 범죄자 & 야쿠자8.3.10. 기타8.3.11. 대한민국 본국 영주 문제
8.4. 재일교포에 대해서 다룬 미디어

1. 개요


재일 한국인의 역사에 대한 영상[2]


재일 조선인에 대한 영상. 섬네일 이미지에 흠칫한 사람 있을 듯

독립 이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그 자손. 한국에서는 재일동포 혹은 재일교포라고 한다. 일본내에서는 줄여서 재일(자이니치[3])[4]이 라고도 부른다.

대한민국 국적[5]을 가지고 있는 재일 한국인조선적[6]을 가지고 있는 재일 조선인의 두 부류가 있다. 본 문서는 두 항목을 통합하여 기술하고 있다.

법적으로 교포의 기준은 해당 국가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다. 그 국가에서 태어난 2세 이하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주해서 10여년 넘게 체류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면 해외교포로 등록되게 되어있다. 2015년 1월 22일 이전까지는 여권 갱신시 주민등록이 말소되었으나 재외국민 주민등록제도 실시이후 영주권 취득자, 해외 이주자도 이전처럼 주민등록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 내 선거권이 없다. (특별)영주자도 엄연한 외국인이므로 '시민권'의 일부인 참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정권을 갖고 싶으면 귀화하거나, 정 일본인이 되기 싫으면 그냥 외국인 거주자로 살던가 조상의 나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현재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 혈통, 즉 한국계 일본인의 숫자는 326,671명이다. 재일 한국-조선인 중 영주자는 461,627명이다. 일반 체류자와 유학생 등을 합치면 일본 내의 재외국민은 578,135 명 정도이고 귀화자까지 합치면 한국인이거나 한국계 혈통은 90만명 수준이다. 1980년대 말부터 귀화를 해 1990년대엔 연 1만명 이상이 귀화를 했으나 현재는 감소세다.

재일 외국인 중에 가장 수가 많았지만 1990년대 이래 들어선 재일 중국인이 더 많다. 하지만 아직도 귀화자까지 합치면 한국계가 더 많긴 하다. 재일 외국인 참고.

2. 재일 한국-조선인의 역사[7]

재일동포의 시작은 대한제국 때 일본으로 유학한 학생들이 해당된다. 일제강점기부터는 2등 국민 신세가 되지만, 병역의 의무가 없어서[8] 일본인보다 사업에 유리하고 외지에서 산다는 끈기가 있어서 조선인을 우대하는 업자도 나와 사업에 성공하는 동포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본 본토인부터 자기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시기를 받게 된다.

일본에 돈을 벌기 위해 넘어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경상도 출신도 많았지만 특히 제주도 출신이 일본에 많이 건너갔다. 제주도의 주산업이 농업,어업으로, 열악한 산업환경과 인구증가 따른 실직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당시의 제주도 출신에 대한 멸시가 한반도에 있었기에 결국 제주도에서 발생한 실업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은 필연적으로 일본본토에 한정되어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떠났다. 경술국치 이후 일단은 한반도가 일본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에 그 절차도 다른 외국에 가는 것보다 훨씬 쉬웠고, 특히 1922년 자유도항제가 실시된 후에는 폭발적으로 일본으로 일하러 넘어가는 사람이 늘어났다. 1923년에는 제주오사카를 잇는 직항 배편이 개통하기도 했다. 한때 제주도민 1/4이 일본에 가 있고 오사카 재일교포의 60%가 제주도 출신이었다. 또한 주로 정치적 이유로 양반등의 지식계급이 귀양을 오는 유배지였던 덕분에 한반도에서 문해 수준과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 덕분에 일본 생활에서도 적응에 어려움이 없거나 상당한 지위를 구축하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지금도 제주 토박이치고 일본에 친척 없는 사람이 드물 정도고, 거의 모든 동네의 마을회관 앞에는 재일교포 공덕비가 세워진 곳이 많다.

1928년에는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배편의 운영사인 일본 회사가 운임을 기존 8원에서 12원 50전으로 인상하자 오사카 거주 제주인들이 반발해 '우리는 우리 배로' 구호를 내걸고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1930년 11월 임대 선박 '교룡환'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교룡환의 요금이 6원 50전이었기에 일본 선사는 부랴부랴 3원으로 운임을 내렸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두 배가 넘는 돈을 내면서도 우리 배를 이용했다. 이는 1930년 11월 7일자 동아일보에 올라와 있다.

때는 태평양 전쟁. 일본 정부는 조선의 불균형 발전과 공업화의 부진,[9] 인구 증가, 세계 불황, 대량의 실업자 발생, 그로 인한 독립운동의 기운에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중국만주에서 벌이는 전쟁, 그리고 나중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병역의무가 있었던 자기 국민을 마구 징발해 갔기 때문에 일본 본토는 노동력이 부족한 사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들을 "조선의 실업자에게 일본에 일자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선인 실업자와, 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일본업자들의 서로 이득되는 정책이라 호평이였지만, 싼 노동력의 대량공급은 노동자의 대우를 급격하게 하락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노동자를 혹대하여 노예 취급하게 된다.

전시 상황에서는 우선 대상인 탄광, 군수공장을 제외한 취업지를 제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를 대량의 조선인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은 각 탄광이나 군수공장에서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조치[10]였기 때문에 일본어/한국어에 대한 소통능력의 부족[11], 숙박 인프라의 구축[12]이 따라가주지 못했고, 당시 일본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일본인 우월사상[13]이 동반되어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가 건너갔던 사람들의 편지 소식으로 인해 취업지의 열악한 환경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자발적으로 돈벌러 가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물론, 일손은 엄청나게 필요했고 할당량은 채워야 됐기 때문에 결국 징용을 실시했다. 당시 강제징용의 형태는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의 채용 담당관(!)이 조선에 건너와 인력을 데려가는 형태였다. 그나마 일본에서는 위에서 상술했듯이 고용 사무소가 잘 설치되어서 인력이 금방금방 채워졌지만 조선에서는 고용사무소를 통한 인력수급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연히 채용 담당관들이 전국 각지를 돌면서 채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조선 지리,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지방 공무원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 공무원들이 처음에는 구슬리고 위에 나온 택도 없는 법률로 추천하였지만 나중에는 강제로 트럭에 태우는 수법을 이용했다.[14]

참고로 제주도 사람들은 3.1 운동이나 관동대지진으로 취직입국이 제한되어 있던 일본을 거의 자유로이 오고갔다. 얼마나 자유로이 오고갔으면 이런 말이 전해졌다. "긴자의 미츠코시 백화점 스카프가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에 걸리는 것은 1달 뒤, 제주도 소녀의 목에 걸리는 것은 1주일 뒤이다."

전쟁 말기에 일본의 패전으로 가면서 일본의 공권력의 약화한 뜸에, 일본 내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우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거나 조합을 설립하여 일본 업자와 일본 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후에 이 조합들이 이념으로 해산 및 분열되어 민단/총련이 된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했었는데, 이 때 원자폭탄을 맞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외에도 홋카이도, 사할린등 석탄 다산지에서의 석탄 강제노동으로 끌려간 조선인도 숱하다.[15] 오늘날, 이들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한국 정부 양측에서 전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16] 원자 폭탄을 떨어뜨린 미국 정부의 책임? 모릅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자경단)과 일본군, 일본 경찰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여 상당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17][18] 이미 이 당시에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취급이 어땠는지 이를 보아 짐작할 수 있다. 1923년에 일본 열도에 있던 조선인의 수는 8만 명으로 추정한다. 1945년 패전 직전에는 200만에 이른다. 갱스 오브 뉴욕아일랜드 이민자들도 아니고.

해방 후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로 돌아갔지만,[19] 불안한 한반도의 정치 상황과 경제 혼란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이들은 일자리가 부족[20]했기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한때 일했던 공장과 지역으로 돌아간다. 오사카에 재일동포가 많은 이유는 그 곳에 있는 군수공장이 밀집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일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재일동포 1세대는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일본 내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이념 대립이 발생해 남한을 지지하거나 북한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재일교포 양대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가 발족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제주 4.3 사건의 참화를 피하기 위한 제주도 출신의 한국인이 대거 일본에 입항하고[21], 6.25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 반대로 재일학도의용군이란 이름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재일교포도 있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를 거친 뒤로, 일본에 잔류한 재일교포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온 각종 사회적 차별에 여전히 시달려야 했다. 또한 남북간의 반목이 민단 vs 조총련이라는 형태로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나타났었고, 이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이 두 단체가 화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좌절로 돌아갔다.[22] 1960년대~1980년대의 독재체제에는 재일교포가 피해를 특히 심하게 봤다. 한국에 잘못갔다 억울하게 붙잡혀서 고문당하다 죽은 사람들이 숱하며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니 외국인 취급받기가 일쑤였다. 북한에선 더 심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재일 출신 귀환자들을 '재포' 내지는 '째포'라고 낮춰 부른다.

그 와중에, 일본정부는 패전초기에 비해서 급격하게 늘어난 재일교포와 그에 따른 물자부족, 치안악화, 잦은 민족단체들의 충돌에 따른 테러위험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과 협의하여 자국에 있는 다수의 북한 출신이나 좌익인 재일 조선인을 일본 적십자회의 이름으로 배에 태워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을 실시한다. 본래 북한은 UN에서 인정하지 않은 비합법적인 국가였으나, 일본 적십자회는 이를 묵인하고 북송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여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대한민국뿐이며,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던 교포의 송환지도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부의 분쟁들을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어했던 미국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국적 선택은 다른 국가가 참견할 수 없는 권리라고 내세우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북한과 일본 매스컴 모두가 북한을 살기 좋은 유토피아로 묘사하면서 북송을 희망하는 교포들을 재일교포 북송으로 끌어모았다. 허나 실상은 일본에 살던 시절보다 더욱 궁핍한 수준. 게다가 이렇게 북송한 사람들을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라 치부하며 온갖 차별을 가했다. 이윽고 북한 내부의 비인권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는데 정작 국제 적십자회는 이를 쉬쉬했다.[23]

게다가 소문은 처음 북송한 지 몇 년이 지나 처음 흘러나왔으나[24], 일본 적십자회는 무려 1980년대까지 재일교포의 북송을 추진했다.

멋모르고 북한행 배에 탑승했던 9만명의 재일 조선인과 1,800여명의 일본인들의 운명은 [25][26] 안습이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 특히 조총련계의 반수 이상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결국, 북한에만 득이 되었고, 일본 내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재일교포 북송을 참고할 것. 다만 이때 북한과 일본이 저지른 일은 나중에 일본인 종북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요도호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이들의 약점과 꼬투리를 잡을 구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는 조총련빨갱이 공작원, 민단파시스트 깡패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이 항목 초반에도 잠시 나와있듯, 민단의 구성원 중 상당부분이 무직인데다가, 이 항목 끝에 서술되어 있는 재일한국인 중 민단계의 거물 상당수가 실제로 야쿠자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그 야쿠자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민단 건설 및 교포사회 확립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훈장까지 받았다는 점[27][28]에서 이런 오명을 얻은 흑역사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고 조총련계는 일본 내 민간인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흑역사가 존재하고, 실제로 조총련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비롯한 급진 과격단체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시선이 고울래야 고울 수가 없다.

조총련계와 그 가족의 현재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비극적인 사례로, 옴진리교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 하야시 야스오(林 泰男, 임태남)이 있다. 야스오의 아버지는 북한 출신의 조총련계 비밀공작원이었고, 이미 일본 경찰에게 항상 마크당하는 상태였다. 중학교 때까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몰랐던 야스오는 평소 재일한국인들을 멸시해왔으나, 아버지가 북파 공작원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재일 조선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 세계를 방황하며 떠돌다 옴진리교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교단 내에서도 운전사 등 한직에 위치했던 그는 아사하라 쇼코에게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결국 도쿄 사건에 가담하게 된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남들은 사린가스 용액이 든 봉지 하나만 들고 가는데 3개나 들고 나가서 더 많은 구멍을 뚫었으며, 지하철이 출발하는 타이밍을 잘 잡은 덕분에 그가 탔던 열차 안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였다. 이 후, 1년여의 도주 생활 동안 가장 위험한 도주범으로 손꼽혔으며, 결국 1996년에 잡혀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후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2018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후에 조선인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귀국시 가져갈 수 있는 재산 규모에 제한을 두었고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측에서 징용된 조선인들의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상당수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공장이나 농지 등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 남아 있다가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 등의 여파로 계속 일본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29]

1952년부터 일본 정부는 '외국인 등록법' 14조를 제정해 재일동포에게도 지문을 강제 날인토록 했는데, 3년 갱신이 원칙이며 위반 시 1년 이하 징역 및 금고, 벌금 3만 엔을 내도록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외국인에 대한 감시 및 통제수단이라는 지적이 일어 1980년 9월 신주쿠구청에서 교포 1세 한종석이 지문 찍기를 거부했고, 이에 2세들도 동참해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일으켜 정부에 철폐를 촉구하며 재판도 벌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지문날인 주기를 1982년 5년, 1987년 1회로 각각 완화시키다가 1993년에 완전 폐지했다.

3. 재일 한국-조선인의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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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쳐 서서히 늘어나 관동대지진 당시에 8만 명 수준이었다. 1950년대부터 신규 유입이 줄어들고 자연증가하는 만큼 귀화자가 생기면서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30][31]

재일동포도 3~4세대로 가면 일본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가 된다. 이른바 "통명"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이름을 쓰면서 한국어에 서툴고 일본어에 유창하다. 혹은 이 두 언어가 피진화된 '재일어'로 통칭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조총련이 운영하는 민족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통해서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꾸준히 교육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재 일본 인구 중 재일교포는 약 60만 명이며, 그중 40만이 특별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이며 60%이상이 노년층이다. 그중 상당수가 오사카 및 관서지방에 몰려 살고 있다. 특히 오사카의 이쿠노구는 츠루하시 시장으로 대표되는 일본 최대의 재일교포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32]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오사카2ch 관서 외 지방의 혐한초딩으로부터 오사카민국[33]이라는 욕을 듣기 일쑤다. 그렇다고 오사카의 한국인들이 순조롭게 정착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도 해방 이후 일본 사회에서 자리매김할 때까지 차별로 인해서 불안하기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관동 쪽의 재일교포가 많은(많았던) 곳은 도쿄도 고토구의 에다가와와, 가나가와현가와사키시이다. 이 2곳은 오사카와 마찬가지로 공장지대라서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던 지구였다. 오사카와 달리, 이 2곳은 한국적인 것은 없다. 길게 보면 일제강점기부터, 일반적으로는 해방 전후부터 쭉 살아왔던 오사카와 달리 1964 도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판자촌에 살던 재일교포들을 치안과 경관문제를 이유로 공업지구에 이주시키면서 생긴 곳이다.

당연히 그 곳의 치안은 개판이 되었고, 일본 경찰은 그 지구를 포위하는 형식으로 곳곳에 파출소를 설치했다. 깡패마을로 밤마다 폭주족과 야쿠자 및 성범죄가 수두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재개발되어 치안이 급격하게 호전되어 현재는 도심부에 편입되었다.

관동 지역의 한인촌으로 도쿄의 신주쿠구 오오쿠보로 대표되는 히가시신주쿠 일대가 있다. [34] 원래 이 일대는 빈국 출신의 불법체류자 거주지로 유명했다. 가부키초에 가까워 암흑가와도 연결된 우범지대라 땅값이 저렴했다.

이 일대에 한인촌이 형성된 데 2개의 설이 있는데, 롯데의 껌 공장이 이곳에 세워져 재일교포의 고용이 다수 이루어져 노동자거주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있고, 또 다른 설은 이후 70~80년대 일본에 일하러온 불체자 한국인이 그 시초라는 설도 있다. 어느쪽이든 다른 국가 출신 체류자들과 달리 이 일대에서는 재일교포의 네트워크 이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국적에 비해 자리잡기가 유리했다. 그렇게 형성된 코리아타운에, 90년대 후반부터 한일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일본의 한류열풍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급증하게 되었다. 이렇게 90년대 이후에 일본에서 정착생활을 하기 위해서 건너오는 한국인들은 보통 재일교포 사회에서 뉴커머(New comer)로 불리고 있다.[35]

이 뉴커머들이 오오쿠보에 들어온 초기에는 사회문제가 된적이 있었다. 일본은 쓰레기를 정해진 곳에 투명 비닐봉투를 구매하여 정해진 시간에 버려야 하는데 쓰레기를 아무곳에나 투기하거나 길거리에 버리거나 편의점 쓰레기통에 투기했었다.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고, 한밤 중에 난동을 부려 현지 일본인들과 마찰이 많았다. 그러나 2010년 이후에는 한인촌 자체가 축소 되면서 중국인-재중동포(조선족)와 베트남, 네팔, 파키스탄 등의 아시아계 다국적 체류자들이 많다. 할랄 푸드 취급점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니 아시안타운이라고 해도 될 태세.

한인촌 축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바가지였다. 애초에 일본물가로 봐도 너무 높은 바가지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일본인도 한류붐과 희소성을 이유로 납득해왔지만, 판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음식의 질이 가격에 비해 너무 후져, 대다수의 뉴커머 가게는 단골을 만들지 못하고 한인촌=비싸기만 하는 동네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버렸다. 때문에 한류가 가라앉고, 그나마 있는 한류팬도 차라리 한국에 가버림과 동시에 혐한바람이 불면서 한인촌에 찾아가는 일본인이 줄어 줄줄이 망했다. 반면 현지화가 이뤄진[36] 일본의 차이나타운이 중일관계악화로 가속된 혐중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과는 대비되는 결과다.

또다른 뉴커머들이 불러온 부작용으로 한인촌의 단일화가 있다.
뉴커머 업소들은 완전히 일본에 정착할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짧고 굵게 돈을 벌려고 그때 유행을 이용한 업소를 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때문에 일본에서의 1차 한류붐에서는 죄다 삼겹살집을 하고, 2차 한류붐에서는 죄다 막걸리집을, 2018년 현지점의 3차 한류붐에서는 어디가도 치즈 닭 갈비집인 상태이다.
이러한 단일화는 한인촌의 매력 감소와 더불어 다양성이 부족하게 되어, 한류붐이 지나간 후에는 함꺼번에 망하게되는 부작용을 불러와, 빈 업소에 중국, 인도, 동남아, 중동업소가 진출하여 한인촌의 지속적인 감소를 불러왔다.
실제로 1차와 2차 한류붐이 지나가면서 한인촌이 급격하게 축소하여 주변 타국가 업소가 진출하였고, 현재 3차한류붐에 한국업소자체는 늘어났지만, 한인촌의 영역은 예전보다 축소되었고 한인촌 가운데에 대놓고 인도/베트남/터기 집이 진출하는 상태까지 오고 있다.

또한 이러한 뉴커머 업소의 부작용은 전통적인 한국 음식점을 밀어내고 유행음식 만 나오는 마을로 만들어 버렸다.
유행이 지나면 타국가 업소가 되고, 유행이 오면 다 똑같은 업소가 되고를 반복하는 뉴커머 부작용의 연속으로 일본한인촌전체가 점점 소멸하는 길로 가고 있다.

재일교포들 중에는 이러한 뉴커머를 "'한국인'"이라 부르며 싫어하는 재일교포들도 있다. 뉴커머들에게는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하거나 문제를 일으켜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을 일본에서 망한 인간이 한국으로 돌아가 재기할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 할 수 있지만, 재일교포에게는 일본이 삶의 터전이며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일본에 뿌리를 내려 일본사회에 적응하려는 재일교포과 일본에 잠깐 있었다가 가는 한국인의 인식차이에서 오는 한국인의 경솔한 행동이 일본 내에서의 재일 조선인의 입지를 좁혀버리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에서 온 사람(아주 먼 친척)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한국에 가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사칭하는 인간에게 유산을 빼앗기거나, 한국에 가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의 사례가 있다. 특히 심각한 문제로서 재일교포가 자기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세워진 한국학교에, 해외학교에서 3년을 지내면 재외교포로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37] "한국"에서 "한국인 학부모"들이 몰려와 "한국인 교사"와 "한국 교과서"로 "한국어"만 공부시키게 만들어 버려서 정작 재일교포가 제대로 혜택을 못 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2013년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에 코리아국제학원이 창설된 계기도 오사카 지역에 조선학교를 대체할 제대로 된 커리큘럼의 한국학교가 없어서였다고.

참고로 일본에 있는 파칭코 점포의 8할은 한국계가 운영하고 있으며,[38] 시장점유율 1위의 마루한과 2위의 다이남 모두 한국계 기업이다. 그 8할 중에 5할이 북한계, 3할이 한국계. 북한의 핵실험에 일본 파칭코로 번 돈으로 미사일을 만든다며 비난여론이 심하게 일어나기도 했다.[39] 현재는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라면 문제가 없지만, 한국에선 파칭코가 금지되어 있는데 일본에서 한국인이 파칭코를 운영해도 되냐는 식으로 까인다.

사실, 최근 일본 정부에서 카지노 해금법을 통과시킨 배경에도 일본 도박 사업의 대부분이며, 재일교포들이 중심인 파칭코에 대해 사실상 재편하여 간접적인 제재를 하려는게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법안은 외국인 뿐 아니라 내국인도 출입 가능한 카지노 사업까지 포함하고 있어 카지노가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활성화 되면 현재의 일본 파칭코 사업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하지만 일본의 파칭코 시장 규모과 잠재적인 카지노 시장의 규모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점 등을 들어(일본 파칭코 사업규모는 약 230조 원, 일본의 초기 카지노 예상 시장규모는 약 10조원 가량)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란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4. 재일동포 마을 및 코리아타운 목록

5점 만점기준
  • 도쿄도
    • 신오쿠보 [40] - 신주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5 | 치안: 3
    • 아자부주반 [41] - 미나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2 | 치안: 4
    • 아카사카 [42] - 미나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4 | 치안: 2
    • 미카와시마 [43] - 아라카와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5 | 치안: 3
    • 히가시우에노 [44] - 다이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3 | 치안: 2
    • 우에노나카쵸우 거리 [45] - 다이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2 | 치안: 2
    • 아사쿠사 데라(절)뒤 [46] - 다이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3 | 치안: 2
    • 에다가와 1번지 [47] - 고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2 | 치안: 2
    • 킨시쵸/카메이도 [48] - 고토구
      구분: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4 | 치안: 1
    • 코이와 [49] - 에도가와구
      구분: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3 | 치안: 2
    • 산겐챠야 [50] - 세타가야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2 | 규모: 2 | 치안: 3
    • 오오야마/오오야구치 [51] - 이타바시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2 | 규모: 3 | 치안: 3
    • 시바우라 다카하마바시 [52] - 미나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1 | 치안: 2
    • 니시아라이 [53] - 아다치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4 | 치안: 2
  • 가나가와현
    • 오오힌 지구 [54] - 카와사키 시카와사키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5 | 치안: 1
    • 토데4번지 [55] - 카와사키시 사이와이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1 | 치안: 1
    • 신마루코 [56] - 카와사키시 나카하라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2 | 규모: 2 | 치안: 3
  • 사이타마현
    • 니시카와구치 [57] - 카와구치시
      구분: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3 | 치안: 2
  • 지바현
    • 사카에쵸 [58] - 치바시 주오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4 | 치안: 1
출처

5. 재일 한국-조선인 사회의 언론

재일 한국인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발간하는 언론 간행물들은 민단, 총련마다 각각 하나씩 있다. 민단은 민단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총련은 조선신문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남/북교민용 신문지를 발행중이다.

이와는 무관하게 재일 한국인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KNTV라는 방송국이 존재한다. 지상파 방송은 아니고, 비 지상파 위성방송인데, 일본의 유명 위성방송사중 하나인 스카이 퍼펙트 TV에서 세웠다. 따라서 KNTV는 일단 스카이 퍼펙트 계열 방송국으로도 분류할수 있다. 재일 한국인 시청자들을 위해 한국 방송프로그램들을 수입한다음, 자막을 붙여서 재방영하는게 주요 일과. 처음에는 단순히 한국 방송 프로그램 소개 모둠에 가까운 구성이었으나, 한류붐의 시작 이후 한국 미디어가 궁금한 한류팬들의 수요가 소소하게 생겨서, 한류팬들을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 구성을 추가로 갖추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는듯.

6. 재일 한국-조선인과 일본인의 통혼 및 혼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Marriage_of_Koreans_in_Japan_ja.png
원 출처 : 재일본대한민국 민단

보라색은 한국과 일본이 아닌 외국인과의 결혼, 붉은색은 재일 조선인 남편과 일본인 아내, 연두색일본인 남편과 재일 조선인 아내 , 파란색한국인과의 결혼을 뜻한다. 재일 한국인 30만명 이상이 일본으로 귀화하고 저출산 등으로 젊은 층의 인구가 줄면서 결혼 건수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 어쨌든 통혼으로 한국과 일본의 혈통이 동시에 흐르는 일본인들이 늘고 있다.

여담으로 남자의 혼인 비중보다 여자의 혼인비중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생애 미혼율[59]이 남성이 16%, 여성이 8%인 점을 감안하면 재일 한국인도 일본인의 인구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셈[60]이다. 일본 전체로는 여초지만(노년층) 청장년층에선 남초라 그렇기도 하고. 관련기사

7.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한 인식

근래 들어서서 일본의 단일민족 사상이 조금씩 사라져 가면서 비일본인 아시아계 인물, 그 중에서도 특히 화교에 대한 묘사가 미디어에 가끔씩 등장하는데 반해 '재일 조선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언급을 회피하는 성향이 여전한 편이다. 굳이 찾자면 서브컬쳐에는 아후로디 같은 캐릭터가 있다. 단, 일반 문학에서는 종종 등장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혐한이나 넷 우익들 사이에선 재일+한국계를 혼동시켜서 재일한국인의 숫자는 100만이 넘는다, 집계되지 않는 인원을 더하면 재일한국인이 재일중국인보다 더 많다 카더라가 사실처럼 알려져있다. 넷 우익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든 분야에 걸쳐 재일한국인이 일본언론 매체를 조종한다는 주장을 한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또한, 자기들의 의견이 맞지 않은 상대방을 재일로 몰아간다[61]. 유명한 일화로는 박존파. 공식집계만 채 100만이 되지 않고, 아무리 더 추산해봤자 거기서 거기인 숫자의 재일한국인이 1억 2000만 일본인을 조종한다는건 한국에 경제 취약층을 차지하는 조선족이나 5만도 안되는 화교가 대한민국을 조종하고 있다는 극우 음모론과 거의 동급이며, 이런 얼토당토않은 주장은 2000년대부터 등장한 신종 넷 우익들이 같은 일본인들한테서도 혐한초딩 소리를 듣는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비슷하게 반한 및 보수성향을 지닌 5ch에서도 이런 우익들을 돌려서 비꼬고 있다. 한국인이 이 나라의 중심을 지키고 있어요

8. 관련용어/문서

8.1. 양대 단체

  •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약칭 민단, 올드커머 한국계 단체. 한국 정부와 협력관계이지만 한국 정부에서 독립된 단체이다.)
  •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약칭 총련, 올드커머 북한계 단체. 북한 정부 산하에 있다.)
  • 재일본한국인연합회 (약칭 한인회 뉴커머 한국계단체. 뉴커머의 단체로 기업인이 중심이다.1980년대에 신오쿠보의 코리아타운에서 시작됐다.)

8.2. 관련 문서

8.3. 유명한 인물 & 나무 위키에 등록된 인물

이하 목록에는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계 인물들도 있으니 주의. 일본 국적을 취득하여 귀화한 사람은 재일 한국인이 아니라 그냥 한국계/조선계 일본인이다.

8.3.1. 정치인/법조인/기타 공무원

  • 아라이 쇼케이
  • 김 류스케 (金龍介) - 재일한국인 변호사들의 단체인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재일변협)의 대표. 특이하게도 성씨는 한국식으로 읽는데 이름은 일본식으로 읽는다. 헤이트 스피치에 반대해오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당연히 넷 우익들의 변호사 징계요청 사건에 휘말린 적도 있다.
  • 김천해 - 좌익 운동가, 일본 공산당 중앙 위원, 재일본조선인연맹 최고 고문. 말년에 북한에 가서 선전활동하다가 숙청된다.
  • 하쿠 신쿤 (白眞勲) - 입헌민주당 소속 참의원 의원으로 조선일보 도쿄지국장 등을 지내다 2003년 일본 국적을 취득, 2004년에 참의원 비례대표로 당선되 현재까지 3선을 지내고 있다. 아버지가 한국인, 어머니가 일본인인 케이스다.

8.3.2. 기업인

  • 강정호 - ABC마트 창업주.
  • 김봉학 - 천마물산, 제주은행 창업주.
  • 김상호 - 한일전기 창업주.
  • 서갑호 - 방림 창업주
  • 손정의 - 소프트뱅크 창업주. 일본명 손 마사요시(孫正義)
  • 롯데 신씨 가문
    • 신격호 - 롯데그룹 창업주. 일본명 시게미츠 타케오(重光武雄)
    • 신동빈 - 신격호의 차남, 현 롯데그룹 회장. 일본명 시게미츠 아키오(重光昭夫)
    • 신동주 - 신격호의 장남.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일본명 시게미츠 히로유키(重光宏之)
  • 유봉식 - MK택시 창업주
  • 이희건 - 간사이흥은, 신한금융그룹 창업주.

8.3.3. 작가

  • 서경식 - 작가. 아래 서승과 서준식의 동생이다.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동경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 디아스포라 라는 용어를 널리 알렸다.
  • 유미리 - 소설가. 1997년 아쿠타가와상 수상.
  • 정의신 - 연극 극작가 겸 연출가. 한국에서도 자주 공연 중에 있다.
  • 양석일 - 소설가, 아래의 최양일 감독이 찍은 피와 뼈, 달은 어디에 뜨는가의 원작자.
  • 최실 - 소설가. 2016년 오다 사쿠노스케상 수상.#

8.3.4. 학자

  • 금병동 - 역사학자
  • 강덕상 - 역사학자
  • 강상중 - 대학교수, 국제정치학자. 한국 국적자 중 최초로 도쿄대 교수가 되었고 정년을 남겨두고 2013년 퇴임, 세이가쿠인대학의 학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도쿄대 명예교수. 대학 시절까지 '나가노 테츠오'란 일본명을 쓰다가 1972년 한국에 온 후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 서승 - 위의 서경식과 아래 서준식의 형. 한국 대학원 유학 도중이던 1971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뒤 한국에서 양심수로서 19년을 복역했다. 출소한 뒤 2011년까지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로서 재직했다 <옥중 19년>이라는 저서가 출간되었다.
  • 이성시 - 역사학자, 와세다대학 교수
  • 이진희 - 역사학자. 광개토왕릉비가 변조됐다는 주장을 함.
  • 전길남
  • 한태순 정보 이론 학자 전기 통신 대학 교수 역임 정보이론 분야의 최고상인 Ieee 클로드 섀넌상 수상

8.3.5. 배우 & 성우 & 영화인

8.3.6. 음악가 & 가수

  • 리세(한국명: 권리세) : 후쿠시마 현 출신. 재일교포 4세 레이디스 코드의 멤버.
  • 김홍재 - 지휘자.
  • 나카무라 유리(한국명: 성우리) - 2의 배우. 아버지가 재일 3세, 어머니는 한국인
  • 마츠야마 치하루 - 1955년생인 포크 가수.
  • 문리나 - 작사가. 비스트(아이돌), 포미닛 등의 일본어 가사를 작사했다. 축구선수 다카하기 요지로의 부인이다.
  • 사이조 히데키(한국명: 이용웅) - 가수.
  • 소닌(한국명: 성선임) - 가수.
  • (한국명: 유수영, 일본명: 쿠니미츠 슈) - 걸그룹 S.E.S.의 멤버.
  • 이카상 - 우타이테. 아버지가 한국인.
  • 이토 유미(한국명: 이아유미, 일본명: 이토 아유미) - 가수. 걸그룹 슈가의 멤버.
  • 양방언 - 음악가.
  • 이츠키 히로시(한국명: 이교부) - 엔카 가수
  • 최성일 - 바이올리니스트. 주로 사운드 호라이즌에 바이올린 세션으로 참가하여 한국에선 이를 통해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바이올린 솔로 앨범[63]을 내기도 하고 작곡활동도 하는듯. 사운드 호라이즌의 첫 내한공연때 아리랑을 연주하고 약간은 어눌한 한국어를 보여주기도 했다.
  • 전월선 - 성악가
  • 토와 테이(한국명: 정동화) - 음악가.
  • 키겐 - 기후 현 출신. 재일교포 3세. 가수, 작곡가.
  • JONTE(한국명: 시종태) - EXILE 신멤버 오디션의 결승진출자, 후에 극단 에그자일 소속으로 활동 하였으며, 현재는 에이벡스 소속으로 가수로 활발히 활동중이다.
  • VERBAL(한국명: 유영기) - 가수.
  • Crystal Kay -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가 재일교포 3세. 가수.
  • 호테이 토모야스 - 기타리스트. 아버지가 한국인.
  • 반야 - 랩퍼. 아버지가 한국인, 어머니는 일본인.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망해서 자신이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20세 때 알았다고. 자신의 이러한 사실을 가족이라는 노래로 만들었다.
  • 오바타 미노루(한국명: 강영철) - 엔카 가수. 평안남도 평양 출신 1937년 재일 한국인 테너 김영길[64] (일본명: 나가타 겐지로)을 동경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음악학교에 입학, 1941년 데뷔 이래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어로 된 군국주의 가요를 부른 탓에 친일인명사전의 문화 예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1979년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

8.3.7. 만화가

8.3.8. 스포츠 선수

  • 김성근 - 전 야구선수, 야구감독.
  • 강병수(일본명: 오하라 헤이슈) - 농구선수.
  • 강창남(일본명: 코야마 마사오) - 야구선수.
  • 고원부(일본명: 요시무라 모토토미) - 야구선수, 야구코치
  • 고지행(일본명: 다카야마 토모유키) - 야구선수.
  • 김공청 - 축구선수.
  • 김기태(일본명: 가네시로 모토야스) - 야구선수.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김무종(일본명: 다키무라 시게미) - 야구선수, 야구코치.
  • 김성길(일본명: 가네모토 세이키치) - 야구선수.
  • 김신부(일본명: 가네시로 노부오) - 야구선수.
  • 김실(일본명: 다나카 미노루) - 야구선수, 야구코치.
  • 김영덕(일본명: 가네히코 나가노리 → 가네히코 히데시게) - 야구감독.
  • 김용강(일본명: 아마노 유고) - 야구선수. 프로듀서. 탤런트
  • 김태영 - 이종격투기 선수.
  • 리 타다나리(한국명: 이충성) - 축구선수
  • 마고(프로게이머) - 일본명: 하야시 켄료, 한국명: 임현형. 일본의 프로게이머. 얼굴 생김새 때문에 계속 한국인이라고 의심을 받아왔음에도 계속해서 부정하다가, 2012년에 비자 문제로 트러블이 생겨 한국적임을 고백하였다. 세계최대의 격투게임 대회인 EVO에서는 줄곧 일본명인 HAYASHI KENRYO로 엔트리 했으나, 국적이 밝혀진 이후에 개최된 2013년의 EVO 2013에서는 한국명인 Hyeonhyeong Im 으로 엔트리하였다. 이는 국적이 밝혀지자 손바닥을 뒤집고 마고를 까대기 시작한 넷우익 유저들에 대한 반발로 사료된다. 현재는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박강조 - 축구선수. 한국 최초의 재일교포 출신 한국 국가대표 선수.
  • 송재박(일본명: 요시모토 히로시)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은퇴 후 사실상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 신용균(일본명: 히라야마 요우나라) - 야구선수, 야구코치, 야구감독.
  • 아키야마 요시히로(한국명: 추성훈) 유도선수, 종합격투기 선수. 파벌문제로 일본국적을 취득하였다.
  • 안창림 - 유도선수.
  • 이영구(일본명: 기야마 에이큐) - 야구선수.
  • 이충남(일본명: 야마모토 타다오) - 야구감독
  • 이시야마 가즈히데(한국명: 송일수)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 우에다 츠요시(한국명: 주강사)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소속의 야구선수. 재일교포 4세.
  •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 정대세 - 축구선수. 남아공 월드컵북한 대표로 참가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재일 조선인. 아버지 국적을 이어 본인의 실제 국적은 한국이나 실제 거주지는 일본으로 되어 있고 선수 등록은 북한으로 되어있는 등 복잡한 내력을 갖고 있다.
  • 진창수 - 축구 선수.
  • 주동식(일본명: 우다 토쇼쿠)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야구지도자.
  • 최일언(일본명: 야마모토 가즈히코)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 홍문종(일본명: 도쿠야마 후미무네) - 야구선수.
  • 홍창수(일본명: 도쿠야마 마사모리, 徳山昌守): 전 복싱 선수, 전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원래 조선적이었으나 2007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현재 일본 거주.
  • 황태호(일본명: 히야마 야스히로) - 야구선수.
  • 히야마 신지로(한국명: 황진환) - 전 한신 타이거스 선수. 2016년 3월 4일에 일본으로 귀화했다.
  • 초슈 리키(한국명: 곽광웅) - 프로레슬러. 뮌헨 올림픽에 자유형 레슬링 한국 국가대표로 참가한 적이 있다. '혁명전사' 라는 링네임으로 유명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스트롱 스타일을 대표하는 선수이자 명실상부 쇼와시대 신일본의 에이스 중 한명. 2016년에 일본으로 귀화했다.
  • 사이 료지(한국명: 최영이) - 프로레슬러. 재일한국인 3세. 신일본 프로레슬링ZERO-ONE을 거쳤으며 ZERO-ONE MAX 에서는 챔피언을 하기도 했다.
  • RYO(한국명: 최영) - 가라테 유파 진무관(신부칸) 무술가. 종합격투기 선수. Spirit MC의 신인발굴프로그램인 '슈퍼 코리안'을 통해서 한국무대에 데뷔한 후 Spirit MC 7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본명으로 활동했으나 주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후에 남동생[65]과 이름이 겹친다는 이유로 링네임을 RYO로 변경했다. 로드 FC 미들급 챔피언이었다.
  • 마에다 아키라(한국명: 고일명) - 쇼와의 격투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프로레슬러.
  • 호시노 칸타로 - 프로레슬러. 한국 프로레슬링 올드팬들에게는 한국 이름인 "여건부"로 더 유명하다.
  • 후쿠시 히로아키(한국명: 장명부) - 야구선수.
  • 가네무라 킨타로(한국명: 이형호) - FMW, W☆ING, HUSTLE 등을 거친 프로레슬러. 구 FMW 시절에는 믹 폴리오니타 아츠시 등과 살벌한 데스매치를 치르기도 했고, 엔터테인먼트 노선 전환 후의 FMW나 HUSTLE 에서는 코믹한 경기를 자주 하는 편. 하지만 성폭력 사건으로 평가는 바닥.
  • 다이너마이트 칸사이 - 한국명 이강자. 여자 프로레슬러.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계에서 손꼽히는 선수 중 하나이자 스플래시 마운틴(크루시픽스 파워밤)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 가네모토 고지 - 한국명 김일우. 전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이였고 지금은 프리로 뛰고있는 프로레슬러. 쥬니어 프로레슬링 레전드로 수신 선더 라이거 등등 유명 선수와의 명경기를 양성했다.
  • 텐잔 히로요시 - 신일본 소속 프로레슬링 선수
  • 역도산 - 스모 선수 , 프로레슬링 선수

8.3.9. 범죄자 & 야쿠자

8.3.10. 기타

  • 김수진 - 연극 연출가
  • 김주성 - 재일교포 3세 출신으로 1979년 재일교포 북송 시 조부모와 함께 북한에 넘어갔으나, 2008년에 탈북하여 한국에 정착하였다.
  • 김태현 - 작사
  • 마츠이 쇼케이(한국명: 문장규): 극진회관 2대 관장
  • 박리혜(일본명: 勝田梨恵/카츠다 리에) - 재일 한국인 3세, 남편이 박찬호. 본직은 요리 연구가, 미국의 유명한 요리학교인 CIA[66] 출신이다. 케이블 올리브 채널에서 홈메이트쿡에 MC로 출연한 적이 있다.
  • 서준식 - 위의 서승의 동생, 서경식의 형. 형 서승과 함께 한국 유학 도중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년을 복역했다. 출소 뒤 한국에서 인권운동사랑방 설립에 참여하는 등 한일을 오가며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다. <옥중서한 1971 - 1988>이 출간되어있다.
  • 이타미 준(유동룡): 건축가.
  • 조치훈 - 바둑기사.
  • 조선진 - 바둑 기사.
  • 진창현 - 세계에서 5명뿐인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67] 칭호를 받은 바이올린 장인 중 한명으로, 그가 제작한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아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 불렸다.
  • 최영의(오오야마 마츠다츠) - 극진공수도의 창시자이자 전설적인 무도가.
  • 곽인식 - 화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 정창욱 - 재일 한국인 4세, 국적은 대한민국. 셰프 이전에는 방송국에서 통역사로 활동했다. 교포 출신임에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군복무(의경)까지 한 특이 케이스.
  • 홍맑은샘 - 바둑기사.

8.3.11. 대한민국 본국 영주 문제

최근 들어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둥베이 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대거 한국으로 유입하려는 정부와 외교부, 법무부의 결정에 따른 결과를 힌트로 제시하자, 일본 내 우익 단체의 한국인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 문제를 해소하자는 취지와 연계해서 재일 한국인을 한국 본토로 이주시켜서 저출산을 극복하려는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확산되면 일본내 혐한 분위기가 수그러드는 것은 물론, 한국 내 저출산 해결에도 새로운 원동력이 될 것이 클 공산이 크다.

다만 2017년 현재 일본은 일자리가 넘쳐나고 한국의 청년실업문제가 심각하고, 새로운 인구의 유입이 취업난의 가중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이는 매우 신중히 진행할 문제다. 거기에 특별영주자들은 역사적인 이유때문에 법적으로 일본인과 동등한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이 가능한 재류자격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힘들게 형성한 멀쩡한 생활기반을 놔두고 귀국할지도 미지수.

8.4. 재일교포에 대해서 다룬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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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일 코리안. 남북관계를 고려하여 한국, 조선 대신 Korean을 그대로 음역하여 사용함으로써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할 때 사용한다.[2] 민단 측에서 제작한 동영상이기 때문에 민단의 역사와 함께 나오며 일본어판의 경우 대한민국 내에서 쓰이는 용어(한국전쟁, 북한 등)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3] 在日(ざいにち)[4] 엄밀히 말하면 '재일 조선인'이라고 해야 하고 재일이라고 줄이면 '일본에 있는'이라는 의미만 남는다. 하지만 일본 내 재일 한국-조선인의 규모 및 역사 등의 이유로 단지 '자이니치'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들을 의미하게 된 것. 그리고 재일에는 조센징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연히 차별적인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웹상(우익성향이 강한 2ch이나 야후 재팬)등지에서는 자이니치라 부르면서 차별한다.[5] 넓게 보면 북한 국적까지 포함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인들을 재일 한국-조선인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전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경우이므로 이 경우는 한국계(혹은 조선계) 일본인이지, 재일 한국-조선인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귀화한 한국인이나 일본 국적을 가진 한국계 일본인들을 재일 조선인으로 분류하지 않는다.[6] 사실상 무국적이며 필요시 북한 여권을 조총련에서 발급 받기도 한다. 일본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 국적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주의할 점은, 재일 조선인은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이전에 일본 정부가 한반도 출신 사람들에게 부여한 국적이므로 '재일 조선인=북한 사람' 이라고 구분 짓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7] 재일 1세들의 증언을 모아 재일 3세 사진작가가 쓴 책인 '재일 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을 참조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8] 조선인을 강제 징병한 것은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진 시기 한정이다. 그 전에는 일본인만 징병했다. 이유는 일본어보급이 낮아서 지휘명령에 어려움이 있어서다. 게다가, 무조건 일본 제국에 고분고분하게 따라줄 사람들도 아니고...[9] 만주 진출을 의한 중간기지로,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해서 만주에 공급해 왔다.[10] 애초에 국민들에게는 승전보만 전달되고 있어서 일본이 진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11] 직원 교육이 수월하게 이뤄지지 않았다.[12] 일본인들은 자택에서 출근하면 됐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장이나 탄광쪽에서 자비로 숙박장소를 구해야했다. 그러나 빠듯한 자금사정에 전시상황이라 제대로 된 숙박장소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그 와중에 나라에서는 자국민을 계속 징발해가고, 징발된 일본인 숙달노동자를 머리수로 대체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수용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받아들이게 되고...[13]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으니 우리 일본인들은 우월하다. = 다른 아시아인들은 미개하다.[14] 의외인 것이 당시 징용자들의 가족 대상으로 고용사무소에서 배급품 우선 지급권 등의 혜택을 명시해 놓은 법안이 전쟁 도중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고용 사무소가 일본에는 각 현마다 적어도 2~3개, 많으면 5~6군데 있었지만 조선에는 팔도 전체에 딸랑 2곳이었다. 당연히 가족에 대한 지원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었다.[15] 이에 대해서는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후반부에 제법 묘사되어 있다. 홋카이도답게 아이누 촌락도 나온다.[16] 다만 한국 정부의 경우만 서술하자면, 그냥 모른체하기에는 뭐했는지 노무현 정부시절에 설치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구체적인 조사에 나선 바 있다. 각종 구술자료집과 자료들을 PDF로 배포하니 시간나는 위키러는 들어가보자.[17] 요시노 사쿠조의 <<압박과 학살>>에는 2534명, 김승학의 <<한국독립연구서>>에는 6,066명,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로는 200명 대[18] 관동대학살은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뿐만 아닌 류큐인, 부라쿠민, 화교인,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 심지어 좌파운동가/아나키스트 일본인(대표적으로 오오스기 사카에)들도 희생당했다.[19]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몇 살배기 시절에 일본에서 일하던 노동자 부모가 한반도(주로 포항)로 돌아간 경우였다.[20] 해외에 이주한 일본인이 돌아올 때까지다. 해외의 일본인이 돌아오면 일본인 노동자가 남아 돌고, 법적보호가 없는 재일동포를 고용할 필요도 없기에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업자가 나온다.[21] 제주 4.3 사건에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등의 반공 극우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지역(주로 오사카)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애당초 일제식민지 당시 제주도 출신 중 1/4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아서, 거기 정착했거나 혹은 제주도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여 대규모 학살이 있자, 그것을 한국을 피해 연고가 있는 일본으로 피난한 것이다.[22] 한민통 등의 단체가 줄기차게 동포사회의 통합을 추진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지원하는 등 여러가지로 노력했으나 한쪽에서는 용공이라고 까이고 한쪽에서는 반동이라고 까였다. 단, 한민통 자체는 한국의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단체이다.[23] 한 마디로 국제협회가 한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속여 악랄한 북한에 보냈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당시 한국은 국제적 발언력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그 땐 북한보다 국력이 약하고 힘이 없는 국가였으니.[24] 북한에 간 사람들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없었다. 편지로 가족들간의 안위를 물을 수 있었는데 심한 검열 속에서도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편지들이 일본에 전해졌다. 북송된 사람들 중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탈북하여 일본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것도 1990년대에 말이다.[25] 당시 북한행 배에 몸을 실은 교포들 대부분은 북한을 엄청나게 선진화된 사회, 복지국가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1970년대 중반까지는 소련 지원에 의해 남한보다 북한 경제사정이 더 나은 편이긴 했지만, 훨씬 선진국이었던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그나마 북한의 나았던 경제사정도 이후 상황은 역전되고. 거기에 남한사회가 민주화되는데, 북한은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26] 강철환의 수필 <수용소의 노래>에서 작가의 조부모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이민을 가 그 곳에서 자수성가한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 시기 북한행 배를 타고 평양에서 정착하다 어느 날 작가의 어머니의 밀고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이 때 당시 많은 조총련계 재일 조선인이 이러한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27] 박정희전두환 정부는 일본 내에서 조총련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민단을 지원했다. 하지만 조총련처럼 학교를 세운다거나 하는 식의 지원이 아니고 그냥 민단이라는 단체에만 지원했다. 재일동포를 위한 지원이 아니라 북한세력 견제라는 정치적 목적만을 가진 이 지원은 남북한을 각각 지지하는 재일동포사회에 반목만 심어주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그 지원이라는게 평범한 재일동포에게까지 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특히 올드커머 사이에서 한국 정부의 신뢰도는 바닥을 쳤었다. 사실 북한이 조총련계긴 하지만 재일동포에 들인 공에 비하면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에게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었다.[28] 이 과정에서 한국은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요원을 비밀리에 보내어 민단직원으로 등용시켜서 대한민국산하기관으로 만들려고 하고, 민단은 독립성을 지키기위해서 안기부요원을 색출해내는 첩보전이 적지않게 있었다. 당시 북한에 대한 정보는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들과 연결된 북한계 재일교포단체인 조총련이였으며, 조총련은 북한 첩보전에도 협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단과 조총련은 서로 요원을 보내, 도청과 미행하여 기밀정보를 빼돌리는 등의 첩보전을 해왔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기위해서 민단에 대한 한일첩보기관의 요원이 접촉하려는 움직임이 잦았다. 현재는 조총련 자체의 영향력의 저하와 더불어, 일본정부의 감시태세강화, 북한에서의 조총련의 중요성 하락에 따라 민단에서 얻을수 있는 정보의 중요성도 떨어지면서 이러한 첩보전은 서로 상대를 도청하는 정도로 되었다.[29] 지금 일본인들 중에 할아버지가 조선 사람이었다는 경우는,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 아내를 들여 한일 혼혈로 태어난 케이스.[30] 파란그래프는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조선인/한국인을 나타내며, 빨강그래프는 일본의 "특별영주자"의 수이며 진정한 재일교포의 수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일본 거주 한국인"은 재일교포과는 다른 종족이라 할만큼 다르다.[31] 특별영주자는 일본이 패전후 일본에 거주하는 한때 지배하던 대만/한반도 출신에 한하여 일본인과 거의 동등한 사회활동이 가능하게 하는 재류자격인 특별영주권을 가진 자를 말한다. 또한 특별영주자의 아이도 특별영주권을 취득 가능하며 특별한 문제나 전과가 없다면 귀화에도 유리하게 작용된다.[32] 2011년 9월 8일에 방영된 KBS 특집 '쯔루하시 사람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33] 대판민국, 大阪民國, 공교롭게도 대한민국과 한자랑 발음이 비슷하다. 이 점에서 착안하여 아예 大阪을 음독으로 읽어서 '다이한민코쿠'(ダイハンミンコク)라고 읽는다.[34] 전후 롯데의 껌 공장이 이곳에 세워졌고, 일본 롯데의 본사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35] 참고로 이러한 뉴커머들이 모여서 세운 단체가 있는데 이것이 재일본한국인연합회다.[36] 무려 19세기부터다.[37] 실제로 외국어고등학교 고3 교실에서도 입시형평성 등으로 인해 이에 대한 불만이 상당한 상황이다.[38] 1970년대전까지 재일교포는 일본내에서는 불법체류자보다 약간 나은 존재이기에 일반 기업에 취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재일교포는 필연적으로 서비스업종으로 갈수밖에 없었고, 일본이 패망하면서 1946년부터 금지됬던 파칭코업소가 해금되고, 해외에서 돌아온 넘쳐나는 전역군인들이 할일이 없어서 술과 도박에 매진하면서 일본사회에 대대적인 파칭코붐이 일어난다. 하지만 1955년에 인기였던 연발식 파칭코가 금지되면서 수많은 파칭코 업소와 회사가 사라지게 되는데,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시기에 돌입하면서 일본인 업주나 사장들은 일찌감치 업종을 바꾸거나 다른 회사에 취직할수 있었지만, 재일교포들은 그럴수가 없어서 남아서 파칭코사업을 계속한 결과이다.[39] 실제로 북한계 점포들은 대북송금을 하고있다. 대표적인게 규모가 줄긴 했다해도 조총련계의 꾸준한 대북송금이 있다.[40] 원래 이곳은 옛부터 저렴한 숙박시설이 집중해있었으며, 주로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이곳이 코리아타운화 된것은 일본 패전후에 이곳에 재일교포기업인 롯데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공장노동자로서 재일교포가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국에서부터 일본으로 돈을 벌기위해 넘어온 불법체류자를 포함한 뉴커머들을 재일교포 업소와 기업들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점차 뉴커머에 침식당하면서 올드커머가 쫓겨나면서 급격하게 한국화된 코리아타운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곳에 한국인 학부모를 위한 한국어로 한국 대학의 수능을 준비하는 학원도 생길정도로 심하게 한국화된 지역이다.[41] 이곳에는 여러나라부터의 대사관이 모이고 있는 지역인데, 한국대사관과 민단본부가 있는 관계로 한국인도 많이 생활하는 지역이다. 게다가 주변 자체가 도쿄에서도 알아주는 부촌이라 기본적인 치안이 뒷받침되어준다.[42] 원래 이곳은 구일본군 군사시설이 밀집해있었던 관계로 공습으로 완전히 폐허로 변하였다. 폐허가 된 그 곳에 자리잡기 시작한 재일교포들로 인하여 재건이 시작되었고, 이곳에서 역도산과 같은 신흥 일본 재일교포 사업가를 많히 배출시면서 재일교포 경제의 중심지적인 역할을 하게되었다. 현재는 한국기업의 일본지사가 들어서면서 뉴커머에게 잠식당한다. 또한 이러한 경위로 이곳을 야쿠자와 한국인밖에 없다고 해서 "얏칸(한국인을 일본어로 칸코쿠진이라고 한다.)"이라 불리기도 한다.[43] 간토에서 가장 역사가 있는 재일교포마을이다. 옛부터 소규모공장이 밀집해있던 지역으로 제주도출신의 재일교포가 가장많다.[44] 이곳은 원래 아메야요코초에 있었던 암시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있던 재일교포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면서 생긴 마을이다. 이러한 경위로 좁은 면적에 비해 높은 밀집도를 자랑한다. 이곳에 다른 이름으로 한국인이 많다는 의미로 "키무치요코쵸"(김치거리)라 불린다.[45] 히가시우에노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는 마을이지만 이곳은 홍등가이다. 애초에 우에노 아메요코쵸 일대가 좀 낙후되어있긴 하다.[46] 일본 패전 직후의 혼란기에 재일교포가 눌러살면서 판자촌과 술집을 열면서 성립된 마을이다. 한때는 조총련사무소도 있었지만 공터가 되었으며, 현재는 관광객도 주민도 다가가지 않는 쇠퇴한 마을이다.[47] 일본영화인 "박치기!"의 무대가 된 장소로, 이곳은 간토 대지진이 발생후, 지진피해로 발생한 잔해처리를 위해서 매립하면서 생긴 지역으로 그후 공장이 들어서면서 대표적인 환경오염 지역이 된다. 이곳에 재일교포가 들어서게된 계기는 바로 맞은편에 있는 시오하마에 전후부터 재일교포들이 판자촌을 형성하면서 급격한 슬럼화가 진행되었는데, 1964년 도쿄 올림픽 유치로 인하여 경관상/치안상 문제가 있었던 시오하마에 있었던 판자촌을 철거하고, 다리건너 맞은편에 있는 에다가와에 이주시키면서 형성되었다. 그러한 경위로 이곳은 일본화되어서 그냥 일본 지방 시골도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한국적인 문화를 느낄수 있는건 굉장히 적으며, 한국계 가게와 불고기집이 몇개 있는 정도다. 바로 옆인 토요스 및 아리아케를 포함한 오다이바 일대가 급격하게 개발되면서 중국인의 대거 진출로 에다가와에도 최근 중국요리집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있다.[48] 원래부터 외국인, 특히 동남아계가 많았던 지역이라 외국인술집과 야쿠자가 활보하는 어둠가의 하나였으며 대다수의 뉴커머가 어둠가에 진출하는 것처럼 이곳도 뉴커머의 한국인음식점부터 시작되었다. 혈기왕성한 야쿠자와 육식문화인 외국인들을 상대로 형성되었지만, 지금은 가까운 코이와에 한국인이 몰리면서 한국인의 밀도가 낮아지면서 다문화지역의 일부가되었다.[49] 이곳도 킨시쵸와 같은 다문화 마을이지만 최근 뉴커머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코리아타운을 형성되기 시작하고 있다.[50] 토지개발에서 버려진 지구에, 한때 암시장이 있었던 복잡한 골목길에 자리잡은 재일교포가 소소 하게 남아 거주하고있다.[51] 조선학교도 있는 올드커머의 지역이 였지만 이케부쿠로 부터의 중국인의 생활문화가 많히 들어오고 있는 지역이고, 한때 있었던 재일교포의 슬럼가도 현재진행형으로 철거되고 주택가로 변해가고 있다.[52] 토지개발에서 버려진 지구에 있는 소규모 판자촌으로, 반쯤 강위에 세워진 집이나 다른 집을 뚫고 통하는 등의 괴상한 형태로 만들어진 집을 볼수있다. 바로 가까이에 도살장이 있는 관계로 고기집이 많다.[53] 이곳은 소규모공장이 전쟁전부터 많았던 지역으로 거기에 근무하는 조선인노동자가 많히 생활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또한 아라카와(강)의 방수로건설에도 조선인 노동자도 투입된 관계(주의:강제징용이전인 1924년이기에 강제징용과 연관 짓지말것)로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올드커머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조총련이 운영하는 병원이 이곳에 있다.[54] 이곳에는 일본근대화로 인하여 공업지구가 형성되었고 그에따라 많은 조선인노동자가 넘어오게 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특히 "오오힌"지구라는 이름은 근무하던 조선인들이 오오시마/사쿠라모토/하마쵸우의 세 지구를오오힌지구라고 불렀던 것이 그대로 행정지구명으로 된것이다. 현재는 역부터 먼 관계로 크게 쇠퇴하고 있지만 규모와 역사는 관동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이다.[55] 이곳에는 전쟁이전부터 자갈채집작업에 일하던 조선인노동자들이 근무했었던 지역으로 전후에 하천부지를 불법점거하면서 만들어진 슬럼가였다. 불법점거이기에 인플라개발이 이루어지지않아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카와사키 역 주변이 신흥주택가로 재개발되면서 역에 가까운 관계로 지역도 급속도로 재개발이 이루어져 완전히 철거되어 소멸되었다. 일부 남은 옛공장과 폐허만이 그 흔적을 느낄수있다.[56] 형성배경은 공장노동자가 살던 마을이였으며, 한국요리점이 많지만, 특필할게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일본마을이다.[57] 전쟁전부터 이곳에 있던 주물산업의 공장에 근무하는 조선인노동자가 살면서 형성된 지역으로 현재는 관동에서도 유명한 홍등가이다. 땅값이 저렴하기에 국내외로 저소득층이 몰리면서 다국적도시로 변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한글을 적지않게 볼수있다. 워킹홀리데이로 온 한국사람들이 이곳에 둥지를 많이 트는 편.[58] 지역이름이 "번창하는 마을"처럼 이곳은 원래 치바현의 중심시였었다. 하지만 일본유수의 군사도시였던 관계로 집중적로 공습을 받아 말그래도 삭제당하는데, 전후 혼란기에 공백이 된 자리에 재일교포가 들어서면서 형성되었다. 시내 중심지를 재일교포가 점거하자 재개발계획이 이루어지지않아 홍등가로 변모하였고 결국 치바역이 현재위치로 옮겨지면서 치바현은 중심지를 옮기게 된다.[59] 50세까지 결혼을 하지 않음.[60] 이는 다른 집단이 같은 국가 내에서 결혼에 대한 관점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이상 어디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 내의 화교도 한국인들의 인구 현상을 따라간다.[61] 여기에는 일본인, 외국인, 심지어 같은 넷우익도 포함된다[62] 김현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귀화 전에는 김복자(金福子)라는 이름이었으며 일본으로 귀화할 때 변경한 와다 아키코(和田 現子)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화전 현자'이며 '김현자'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은 없다. 최영의가 실제로는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63] 한국에도 정식 발매됐다.[64] 이 사람도 오바타 미노루와 같이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어 있다.[65] 위의 사이 료지(최영).[66] 절대로 미국 중앙 정보국이 아니다.[67] 다른 이의 감독 없이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다는 뜻.[68] 2014년 작품으로 오사카 조선학교 고등부의 럭비팀이 전국 출전 중에 겪는 일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한 작품. 당시 오사카부 지사였던 하시모토 도루도 잠깐 등장해서 까인다.[69] 한일 양국 배우들이 섞여 공연했는데, 일본배우들은 한국어를, 한국배우들은 일본어를 배워 한본어 2개 국어를 공연 내내 섞어 썼다. 흥미로운 일화로는, 재일교포의 삶을 포기하려는 극중 주인공의 딸이 "북한으로 가겠어요"라고 선언하자, 일본 관객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진 반면, 한국 관객들은 "하하, 저거 바보 아냐?"하며 웃음이 터졌단다. 2018년에는 한국인 제작자에 의해 영화화되어 개봉되기도 했다. 아버지 역인 용길 역에는 김상호씨가, 어머니 역인 영순 역은 이정은씨가 맡았고, 사위역은 오오이즈미 요가 맡았으며, 그 외 딸 역에도 이노우에 마오나 마키 요코 등, 유명 여배우들이 맡은걸로 잠깐 화제가 되기도 했다.[70] 김명준 감독 작품. 홋카이도 조선학교 고등부 3학년들의 생활을 감독이 직접 함께 생활하면서 담은 다큐멘터리 작품. 국내에서는 2007년 초 개봉.[71] 메인 캐릭터중 한명인 곽영사가 재일교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