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0 14:49:47

인도차이나 전쟁


1. 개요2. 배경
2.1. 프랑스 식민지와 2차 대전2.2. 2차 대전 이후
3. 제1 차 인도차이나 전쟁
3.1. 남베트남의 대혼란3.2. 북베트남의 통일 정책
4. 제2 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5. 제3 차 인도차이나 전쟁

1. 개요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이 총 3번에 거쳐 외세와 싸워온 전쟁이며 1차는 프랑스 제4공화국, 2차는 남베트남미국, 3차는 중국과의 전쟁이다.[1]

2. 배경

2.1. 프랑스 식민지와 2차 대전

19세기 이래로 베트남 지역은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Indo-chine: 라오스, 캄보디아 포함)'라고 불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문명의 전파'를 표방했기에 비교적 다른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비해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프랑스와 베트남 관계의 본질은 결국 프랑스가 베트남을 착취하는 것이며, 본국에서 이탈해 식민지로 오는 관리들의 수준이란 뻔한 것이었기에 이상과 달리 실제 통치는 혹독하였다. 게다가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프랑스도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군대를 앞세워 혹독하게 진압하는 바람에 반감이 더욱 쌓여만 갔다.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역사 문서 참조.) 애초에 식민지 독립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하지 않은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이 어디있겠냐만...

1930년에 있었던 민족주의 세력의 무장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공산주의 세력으로 기울어졌는데 그 중심에는 프랑스 본토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온 민족 지도자 호찌민이 있었다.[2] 제 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프랑스 본토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총독부는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도리어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인도차이나의 운명은 일본군과 비시 정부가 손을 잡는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된다.

막장 둘이 만나 막장 오브 막장이 되자 공산세력은 민족주의자들과도 손을 잡고 통일전선을 결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후일 베트남 통일을 달성하는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월맹(베트민)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미군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 일본은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명호작전으로 인도차이나 지역의 비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를 내세워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을 묶어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1945년 3월 11일 ~ 1945년 8월 23일)을 성립, 비시 정부와 자유 프랑스 모두의 뒤통수를 치며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는 쇼를 벌였으나 이는 베트남인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만주국의 존재를 알았든 몰랐든, 똑같은 외국 침략자니까 결국 일본의 패배와 함께 베트남 제국도 무너지며 베트남은 무주공산이 된다.

일제가 패망하자 호찌민은 기민하게 행동하여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했다. 호찌민은 자신이 세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미국 정부가 지지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식민지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처음에는 베트남의 독립을 지지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로 유지하려 하자 처음에 미국은 이에 반대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 원했던 독립국 베트남은 공산주의는 아니였다는 점이 호치민의 판단과 달랐다.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과 소련이 연합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파시스트 국가인 나치 독일일본 제국에 맞서기 위한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 그들은 서로의 체제를 전혀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베트민을 지원[3]한 것도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뿐이다. 결국 2차 대전이 끝나자 마자 미국과 소련이 전세계를 둘로 갈라먹는 냉전 시대로 접어들었고, 미국은 공산 베트남의 출현을 꺼려하게 된다.

2차 대전 종전 후 당장 유럽에서는 소련의 군사적 개입으로 동유럽이 줄줄이 공산화되었다. 중앙유럽까지 파고드는 공산화의 물결에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크게 위협을 느꼈고 결속력을 강화했다. 그런데 서방권 국가들 중에서 유독 프랑스는 잃어버린 국가적 위신을 찾기 위해 미국과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공산권 국가들과 가장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미국은 프랑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 미국은 베트남의 독립을 지지했으나, 프랑스가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두려고 하자 결국 이를 방관했다. 베트남 입장에서는 일제가 패망하자 결국 바로 과거의 압제자 프랑스군이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2.2. 2차 대전 이후

일본 제국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항복하자 호치민 휘하의 베트민은 8월 16일 총 봉기를 일으켜 8월 말 쯤에는 북부 대부분을 장악한 뒤, 호치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 항복 서명일에 맞춰 1945년 9월 2일 베트남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와동시에 베트남 남부에는 영국군과 북부에는 국민당군이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는데,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각각 남쪽과 북쪽을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북쪽의 경우 국민당군은 곧 자국 영토 내의 공산세력싸우러 가버려 사실상 공백지역이 되는 바람에 무장해제된 일본군 장비를 넘겨받은 베트민이 북쪽을 장악하여 호찌민을 국가주석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월맹)을 세운다.

한편, 남부의 영국군은 이 지역에 선거를 통한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들을 자주 했지만 프랑스 영토였던지라, 결국 프랑스에 돌려주고 돌아가 버린다. 사실 영국은 인도 제국버마의 독립 요구에 시달리고 있어 훈수 둘 처지도 못 되었으며 병력 부족으로 비시 잔당들과 일본군 포로 일부까지 치안 유지에 동원한 탓에 깽판치던 국민당군보다 더 미움을 받았다.

이런 영국의 정책은 프랑스가 다시 한 번 베트남을 식민지 영향 아래에 둘 수 있다는 착각을 주었는데, 영국은 증가하는 민족주의가 주변의 인도나 버마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 판단, 베트민과 협상을 하지 않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책을 썼다. 이로 인해 영향력 있던 베트민과 협상 한번 하지 않고 들어간 프랑스는 베트남이 순순히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착각했다.

3. 제1 차 인도차이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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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4공화국은 최초에 베트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정식으로 인정해주는 듯 하였으나, 곧바로 입장을 바꿔 베트민 주도의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종전 후 베트민 지도자 호찌민과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예비협정을 파기하고 북쪽으로 프랑스군을 진격시키고, 1946년 11월 23일에는 하이퐁 항구에 프랑스 해군이 함포사격과 비행기 폭격을 가해 하루 동안 최소 6,000명의 베트남 시민이 사망했다.[4] 1946년 12월 19일, 호찌민은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사실상의 베트남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5] 프랑스는 이 전쟁에 프랑스인 233,467명, 외인부대 72,833명, 북아프리카인 122,920명, 아프리카인 60,340명 등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다. 여기에 베트남인 병력[6]도 추가되었다.

그리고 보응우옌잡[7](Võ Nguyên Giáp, 武元甲, 무원갑)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 북부 산악지역으로 패퇴하여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박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호치민이 체포될 뻔 하기도 했다.이후 4년 동안 베트민은 소극적 게릴라 공세를 계속하며 그 사이 정치 운동을 통해 북부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다.

반대로 프랑스는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세네갈 등 다른 프랑스령 해외 식민지에서도 독립 압력이 가중되면서 전력이 분산되기 시작했고 "전후 재건에도 사람이 부족한데 애먼 전쟁터에 젊은이들을 내몰 거냐"는 여론의 악화, 미국, 영국 등의 외교적 압력으로 서서히 베트남에서의 우위를 잃었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9년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나자 중국공산당은 프랑스에 맞서 싸우고 있던 호치민의 베트민을 적극 도왔다. 1950년 1월 마오쩌둥의 중국은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민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무기와 장비를 지원하고 베트남 국경지대 근처에서 베트민의 군사훈련을 지원해줬다. 1950년 9월 중순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 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개시했다. 중월 국경지대 동 케에서 벌어진 전투에선 베트민군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지원받은 바주카포, 박격포, 무반동총을 사용했을 정도로 중무장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패퇴했고 베트민군은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은 뒤 1950년 12월 베트민은 총공격 계획까지 세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격화되자, 미국은 호치민의 요청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프랑스편을 들기 시작했다.[8]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1946년에 일어나자 미국은 지원군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에게 전쟁물자를 지원했다. 1949년 중국의 내전이 마오쩌둥의 승리로 끝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남에 따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물자 지원량은 늘어났고, 한국 전쟁 휴전 협정이 막 시작되던 1951년 시점에는 프랑스 전쟁 비용의 80%를 미국이 지원하게 됐다. 즉 미국은 전쟁에 군사를 파병하지만 않았지 사실상 전쟁에 개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의 막강한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머스탱 전투기와 네이팜폭탄도 받았고, 결국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서 이용하게 된다.

1951년 2월, 베트민은 공세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하노이 해방을 목표로 전면 공세를 시작한다. 그러나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장군이 미리 하노이, 통킹만, 홍강 삼각주까지 연결된 드라트르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드라트르 장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 받은 네이팜 폭탄을 사용하여 베트민군의 대대적인 전면 공세에 맞섰다. 베트민은 이 방어선에 철저히 막혀 도리어 수천명 이상의 큰 사상자만 남긴 채 하노이 함락에 실패하게 된다.[9] 그러나 1952년 타시니 장군이 악화된 지병 때문에 프랑스로 귀국하면서 전세는 베트민 측으로 급격히 기울어진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는 15만명의 베트남군이 거의 쓸모가 없어[10] 19만의 프랑스군만으로 전쟁을 해야 했고 초반에는 어리버리하기까지 했던 베트민군은 전투를 통해 순식간에 정예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프랑스군은 여기저기서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미국의 전비 지원 삭감에 따른 재정부담이 가중되자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11] 8만의 병력을 철수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1954년 프랑스군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하고 위신을 있는대로 깎아먹은 채로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56일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천명~3천명 수준의 전사자를 내었고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만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베트민은 이보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었지만, 베트민은 독립을 위해 이런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반면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결국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양 측은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고,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과 베트민의 북베트남으로 나눠졌으며 8km DMZ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하였다.

늘어나는 희생과 전비로 식민 통치의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는 남베트남의 총리였던 응오딘지엠을 통제하는 것에 실패했고, 응오딘지엠은 자신의 정치적인 위치를 이용해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다. 응오딘지엠이 프랑스군의 주둔을 비난하는 상황까지 오자 프랑스는 총 선거의 행정업무를 돕고 선거 실시를 감독해야 하는 휴전협정 이행조차 방기하고 선거를 3개월 앞두고 철수해버렸다.

3.1. 남베트남의 대혼란

미국은 본래 베트남 지역의 독립에는 찬성이었지만, 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를 넘어 자본주의 진영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화 되고 결국 미국마저 공산화 될 것이라 예상(도미노 이론)을 하고 있었고[12] 프랑스가 떠난 남베트남을 보호하는 데 적극 나서게 된다. 당시 미국 국방장관으로서 이 정책을 주장했던 사람 중 한 명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나중에 ''아무래도 그때 우리가 좀 미친 것 같았죠.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우리가 지레 겁을 먹은 겁니다." 라고 회고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미국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 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 이때 지원한 물량이 전차 1,400대, 비행기 340대, 정찰보트 350대, 소총 24만 정에 탄약이 1,500만 발 등 사실상 사람 빼고는 미국이 전쟁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유야 물론 2차 대전의 영향으로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전쟁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름 서방진영에서 구 식민 체제의 해체를 통해 공산세력과 맞서고자 했던 만큼 미국의 지원이 공짜는 아니고, 남베트남을 독립시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베트민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압제자 프랑스를 지원하는 명백한 적이었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비시 프랑스/일본제국이 베트남을 통치하던 시절에 OSS를 통해 호치민과 베트민의 독립 투쟁을 지원해주었던 국가기도 하다. 2차대전 이후에도 호치민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어야 꿈에도 그리던 베트남 독립을 이룰 수 있고,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미국에 우호적이면서 힘에 대해서 두려워 했고, 후일의 통일 베트남도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식민지 해방전쟁과 동급으로 여기진 않고 남베트남 통일전쟁의 일환으로 해석한 걸 보면 미국과 프랑스는 확실히 구분한 듯하다.

결국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호찌민이 프랑스와 중국을 경계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호찌민은 일찍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8차례나 서한을 보내 독립을 지지해주길 호소했으나 <불간섭> 소리만 들으며 묵살당했다. 아이젠하워 정권도 마찬가지로 호찌민 정권과의 교섭을 일체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 수립을 방해할 시 미군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1954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약속을 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부터 군사 훈련, 무장 등 일련의 원조가 시작된다.

이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중증이다시피한 알레르기 반응을 갖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아시아 국가들의 공산화가 확산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현실을 외면하고 근거도 불확실한 도미노 이론을 맹신하면서, 제3세계 곳곳에서 반소반공이라면 독재던 나발이던 상관없다는 식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13] 거기에 국내에선 매카시즘의 광풍에 휘말려 공산주의의 '공'자만 들어도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호찌민 정권과의 협조는 미국의 선택지에 없었다. 비록 호찌민이 공산주의자라곤 해도 사실상 민족주의 성향에 가깝고, 이념에 관계없이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애타게 원할 정도로 유연한 외교전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관심이 되지 못했다.

황제가 경찰권을 폭력단에게 공식적으로 팔아넘겼다고 할 정도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된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고딘디엠으로 자주 잘못 불림)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 호찌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정부에 저항하는 폭력단과 불교도 군벌을 효과적으로 토벌하고 80만에 달하는 피난민의 재정착을 완수하는 등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를 보다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지엠의 일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미국 원조금은 경제 개발에 돌려지지 않고 사치품 수입에 낭비된다. 예컨대 베트남은 농경국가인데 농업용 비료 수입에는 고작 200만 달러를 쓰면서, 사치품인 양담배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행태를 보여줬다.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생인 응오딘누가 두목인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마구 투옥시킨다. 말그대로 "신악(新惡)이 구악(舊惡) 뺨친다"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막장성으로 기껏 안정되었던 치안도 도로 악화되고 국민들이 등을 돌리며 응오딘지엠 정권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이는 공산당의 세력화를 불러온다. 1960년 12월에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다.

이 와중에 남베트남에서는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 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남베트남 사람들은 이 반부패 운동에 참여하는 데 좌, 우익을 가리지 않았다. 목사, 승려, 학생 등 남베트남 국민들은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문제는 당시 국가 상황이 여러 면에서 최악에 가까워지고 있어 좌익과 우익 인사들이 서로 반목하다 급기야 서로를 향해 테러와 암살을 행했다.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시체로 발견됐다.[14] 반대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좌익 인사도 사실상 마찬가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대응책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관변단체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15]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좌익이나 우익이나 똑같은 놈들로 보일 뿐이고,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나라를 좀 평화롭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상황에 이른다. 사이공의 대학생들도 초기에는 평화주의적 노선을 견지했으나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자 결국 나라를 버렸다. 온 나라가 불교 신자, 가톨릭 신자,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극좌/극우 등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끊임없는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남베트남은 국가 내부의 부패가 심각해지며 내부 불만이 심화되며 치안이 악화되었고 좌익과 우익은 이념적 유혈갈등을 마구 일으켰으며 각 계층의 사람들이 마구 반목하며 남베트남 국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특히 부패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불교도를 공공연하게 탄압했다. 물론, 불교계도 부패했고 여러 문제가 많았지만 천여 년이 넘도록 불교를 많이 믿어온 베트남 여론은 이런 탄압을 환영하지 않았다. 국교나 다름없는 불교를 탄압하곤 정작 가톨릭을 내세우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니 이런 여론의 분노를 지지삼은 남베트남 불교계는 남베트남 지엠 정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전쟁이 심화되며 사람들이 마구 죽어가기까지 해 극도로 격렬한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불교계는 이미 남베트남이라는 국가에 소속된다는 소속감도 잃어버린 것이다. 미군 철수 이후 남베트남 주요 도시가 차례차례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징병 반대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였고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병징집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불교도 시위가 이렇게 격해지며 경찰로는 감당조차 못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판국에 이르렀음에도 대통령은 공산주의자 탓이라는 헛소리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 불교도 시위 와중에 저명한 승려틱꽝득소신공양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16] 결국 군부에서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거론하기까지 했는데 대통령 영부인 역할을 하던 응오딘지엠의 제수(응오딘누의 아내) "마담 누" 쩐레수언이 베트남의 고승 틱광둑의 소신공양 사건을 평할때, "중놈들이 한 게 뭐 있나요? 기껏해야 자기네 하나를 바베큐로 만든 게 고작이죠, 불타게 놔두고 박수나 칩시다(Let them burn and we shall clap our hands)"라 평했다. 거기에 뒷붙인 말이 "자주를 외치면서 수입 휘발유를 쓰다니 앞뒤도 안 맞잖아요?"라는 비아냥. 이 막말은 미국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위에서 보듯이 영어 자막을 달고 미국에서도 방송되었고 이 막말을 본 존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황당해했다.# 원래 베트남불교가 국교이다시피 할 정도로 국민들의 상당수가 독실한 불교도인 나라이다. 이런 곳에서 집권 세력이 종교적 편견에 찌들어서 불교를 맹목적으로 탄압하고 비하하면서, 극소수인 카톨릭 교도들에만 온갖 이권을 안겨주니 당연히 온 국민이 분기탱천할 수밖에.

결국 소신공양 사건 1달 후인 1963년 11월, 미국의 방관 하에 쿠데타가 발발, 응오딘지엠은 동생과 함께 가톨릭 성당으로 숨으려다 체포, 사살당한다. 쿠데타 세력 내에서도 응오딘지엠의 처리에 관해서는 의견이 대립했지만 해외 추방으로 의견을 모아 지시를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사살당한 뒤였다. 이에 어쩔 줄 몰라하던 군부는 미국에 응오딘지엠이 자살했다는 거짓보고를 올리기도 했다.한편 쩐레수언은 겨우 달아나서 프랑스로 망명했고 48년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2011년 로마에서 병사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조국에서 죽게 해 달라고 베트남 정부에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혼란의 1막에 불과했다. 지연, 학연, 종교와 미국과의 연줄로 분열되거나 또는 난마처럼 얽힌 남베트남 군부는 갑자기 손에 떨어진 권력에 어쩔 줄 몰라 했으며 지엠 정권 추종자를 모조리 축출한 정치 공백에 권력의 맛을 본 군인들의 야욕에 의해 쿠데타가 쿠데타가 부르는 막장에 빠진다. 이때부터 1975년까지 무려 열차례가 넘는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심지어 북베트남군에 항복하는 하루 전날까지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응웬 까오 끼 전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종교인들은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서, 더 이상의 북베트남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쿠데타와 부패가 횡행하고, 우익 좌익할 것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대놓고 정부를 부정하는 시위들이 벌어지는데 정부는 손놓고 있고, 간첩과 게릴라(빨치산)들이 영토 내에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3.2. 북베트남의 통일 정책

한편, 북베트남은 달랐다. 호찌민은 베트남 공화국 성립 직후 군사회의에서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우리는 베트남을 통일한다"라고 결정한다. 이미 남북으로 갈라지기 이전부터 각지에 추종세력과 무기를 은닉해두었고 COSVN(남베트남 해방사령부)를 조직하여 후일 호찌민의 후계자가 되는 레주언이 그 수장이 된다.

휴전선 형성 이후 북베트남에서는 인민재판을 빙자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 반대자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우선 60만에 달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대거 월남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호찌민과 북베트남이 그들을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의심했던 것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의 가톨릭 세력은 종교와 무관하게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세력들도 적잖게 있었지만 그들또한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고향에서 쫓겨난 셈[17]이었다.[18] 그리고 사실상의 전시체제 선언인 1953년 농업 강령을 선포한다. 이 과정에서 집단농장화를 무리하게 추진,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 1956년 말 호찌민의 고향이기도 한 게안성(省)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성을 거의 장악했다.)가 휴전선에서 동원된 정규군 사단에게 무너지며 일단락된다.

결국 이 2차 토지개혁 기간중 학살된 농민수는 1만~5만여명으로 추정되며[19] 북베트남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한때 공산당 내부에서 호찌민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으며 호찌민 이하 공산당 간부들이 집단농장화 정책에 대한 자아비판을 해야 할 정도였고 이 때문에 남베트남과 미국의 북베트남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으며, 미국이 총선거를 씹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소련, 중국같은 공산주의 대국들은 호찌민의 리더쉽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으나 다행인지 풍년이 계속되었고 경제원조도 효율적으로 사용되어 체제와 경제 모두 안정권에 들어간다. 굳이 토지개혁의 성과물이라고 하자면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대량이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공산주의적 농업 방식은 이러한 막장 결과를 안겨준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 명의 군세로 확대된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어리버리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무기고가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조차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아서 1963년의 압박 전투는 2,000명의 정부군이 200여 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처참히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4. 제2 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

미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미국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근 20년에 달하는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린 미국은 1973년 남베트남을 포기하고 미군을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의 군대는 무능한 지휘만을 드러내며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해 패망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 문서 참조.

5. 제3 차 인도차이나 전쟁

하지만 종전 이후에도 전쟁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미국이 패배하여 물러가자 이젠 지역 패권을 노리는 베트남과 그를 막아내려는 캄보디아, 라오스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으며, 전통적인 적국이었던 중국이 동남아를 수중에 넣으려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베트남은 민주 캄푸치아(당시 캄보디아)와 중국과 여러 이해관계가 충돌해, 1979년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된다[20]. 그리고 베트남은 끝내 중국을 물리치고, 캄보디아에서는 철수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중국-베트남 전쟁 문서 참조.

제3 차 인도차이나 전쟁에는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라오스 내전등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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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슷한 사례로 아프간 전쟁도 있다. 아프간 상대로 미국, 영국, 러시아는 굴욕적으로 물러났지만 영국은 그나마 보호국화해서 잠시 영향력을 행사한데다 아프가니스탄이 완전히 독립한 수 있었던 것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의 힘이 빠진 틈을 노린 것이었으니 유일하게 성공을 한 국가였다.[2] 1930년 무장봉기는 주로 통킹지역과 안남 북부에서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했다. 그 결과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진압하는 프랑스군에 의해 사망했다.[3] 호찌민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호찌민과 실제로 활동하기도 했던 OSS, 바로 CIA의 전신인 기구 정도였다.[4] 자료출처는 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이고 이 자료는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에도 나온다.[5]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1950년에야 중국소련으로부터 정부로서 인정을 받아 이 시점에서도 공식 문서에는 베트민으로 취급된다.[6] 형식상으로는 베트남국의 군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군 산하의 보조군이었다.[7] 흔히 뒷이름을 따서 "잡" 장군이라고 불리는 사령관[8] 당시 호치민은 2차세계대전 말기 미국의 OSS와 협력했던 관계를 통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었다.[9] 그에 비해 총공세시기 프랑스군은 400명의 전사자와 1200명의 부상자가 나오는 선에서 그쳤다.[10] 이게 당연한 게 형식상으로 독립한 베트남국의 국군 간판을 내걸고 모집했는데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시기처럼 프랑스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다. 병사들의 사기나 의욕이 생길래야 생길리가 없겠지.[11] 당시 사진들을 보면 분명 프랑스군인데 무기나 기타 장구류가 미제인 게 대부분이다. 미국에서 원조받은 장비가 없으면 보병 무장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뜻.[12]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6.25 전쟁이 정전으로 마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6.25 전쟁은 종전도 아닌 정전으로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땐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었는데 이때 베트남이 등장한 것이다.[13] 이것의 반작용으로 1970년대로 넘어가면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에서 엄청난 반미 광풍이 불어닥친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14]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대통령이 총리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반홍, 사이공 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었다.[15] 당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분단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좌익은 남에도 북에도 많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정치 성향이 좌익인 것은 사실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반공주의가 심화되었으나 남베트남은 그런거 없다. 게다가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김일성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훌륭한 사람이다. 호찌민은 오랫동안 베트남 독립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워온 사람이었기에 전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이 사람 행적을 보면 김일성보다는 김구나, 여운형의 공산주의자 버전에 가깝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구와 여운형을 섞은 다음 좌쪽으로 더 간 사람이 바로 호찌민이라 봐도 될 정도.[16] 당시 이 광경을 촬영한 사진이 미국 랩 메탈 그룹 Rage Against The Machine의 데뷔 앨범표지로 쓰이기도 했다.[17] 다만 인구 다수인 불교도랑 갈등을 빚었다든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응오딘지엠이 가톨릭을 우대하던 남베트남 경우가 있어서인지 북베트남 여론도 가톨릭교도 추방에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18] 토지개혁시기 북베트남에 있던 가톨릭들이 탄압받았던 건 사실이지만 북베트남 정부가 신앙의 자유를 금하지는 않았다. 당시 북베트남에 있던 150만명의 가톨릭교도들 중에 90만명의 가톨릭교도가 북베트남에 남았다. 북베트남 정부와 호찌민은 그들에게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겠다."고 가톨릭교도들 앞에서 종교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 결과 가톨릭 교도들로 새로운 친정부 연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월남한 주교들을 대체할 새로운 주교들이 임명되었으며 1954년 말에는 가톨릭 사제를 양성할 신학교까지 문을 열었다. 1955년 6월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하여 바티칸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정부의 포고까지 나왔다. 다만 북베트남 정부는 가톨릭교도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선전물을 배포하는 것을 금지했다. 출처는 호치민 평전 p712[19] 그런데, 문제는 베트남의 남북 분단 이후 숙청되거나 처형당한 사람들에 대한 통계가 없어서 아직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를 두고 호찌민 빠와 까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그렇게 많이 안 죽이고 부패한 사람들만 처벌했다, 한 쪽에서는 냅다 많이 죽였다 등등. 하지만 부패한 사람 처벌론은 당시 베트남 공산당도 하지 않은 억지 옹호로 실제론 양민학살이 맞다.[20] 1979년은 1월 중국(중화인민공화국, 당시 덩샤오핑)과 미국(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이 수교 하며 냉전에서 벗어나는 분위기가 크게 추진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같은 해에 같은 공산권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이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예상되었다면 예상된 일이지만, 역시 이데올로기 보다도 실질적 이익이 국제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이다. 참고로 오늘도 중국과 베트남의 국민 감정은 좋지 않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중월관계 문서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