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9px" | 추존왕 | |||||
목조 | 익조 | 도조 | ||||
환조 | 덕종 | 원종 | ||||
진종 | 장조 | 문조 | ||||
대립왕 | ||||||
흥안군 · 밀풍군 | ||||||
추존 존령 | ||||||
시조고 · 선조고 | ||||||
}}}}}}}}} |
익조 관련 틀 | ||||||||||||||||||||||||||||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추존 국왕 이행리 | 李行里 | |||
지릉 전경 초상화 | |||
출생 | 연대 미상 | ||
장소 미상 | |||
사망 | 연대 미상 9월 10일 | ||
장소 미상 | |||
능묘 | 지릉 (智陵) | ||
재위기간 | 요동천호소 천호 | 다루가치 | ||
1300년 ~ 미상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행리 (行里) | ||
부모 | 부왕 목조 모후 효공왕후 | ||
형제자매 | 6남 중 4남 | ||
배우자 | 정숙왕후 | ||
자녀 | 이춘 외 7남, 1녀 | ||
묘호 | 익조 (翼祖) | ||
시호 | 익왕 (翼王) → 강혜성익대왕 (康惠聖翼大王) | }}}}}}}}} |
[clearfix]
1. 개요
조선 왕조의 추존 국왕으로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조선 개국 직후에는 시호 '익왕'(翼王)만 올렸다가 현손자인 태종이 1411년에 묘호 익조(翼祖)를 올리고 시호를 '강혜성익대왕'(康惠聖翼大王)으로 바꿨다.#
2. 생애
전라도 전주에서 두만강 하류 부근까지 이주해서 몽골 제국의 오동천호 및 다루가치가 되었던 목조 이안사와 효공왕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4남으로, 부친 목조가 죽은 다음 해인 1275년 3월에 천호 벼슬을 물려받았으며, 이후 쌍성 등지의 고려 군민(軍民)을 다스리는 다루가치의 일을 맡았다.하지만 여진족 천호들에게 쫓겨나게 되었는데 당시 두만강 주변의 천호들은 모두 여진족이었지만 이행리만 유일하게 고려인이었다. 그래서 여진족 천호들은 두만강 북쪽에 있었던 동족들과 모의해 고려인 천호 이행리를 습격해 죽이기로 하고, 이를 모르는 이행리에게는 사냥간다는 핑계를 대며, 미리 군사들을 풀어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런 줄 몰랐던 이행리는 길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노파가 이 사실을 전해줬고 깜짝 놀란 이행리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적도'라는 섬에서 만나자고 가솔 및 가병들에게 전한 이후 자신도 적도로 향했다.
이행리는 겨우 적도 기슭에 다다랐지만 두만강은 물이 깊고 폭이 넓어 건널 수가 없었고, 여진족 천호의 추격병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썰물 덕분에 물이 빠져 건널 수 있었다. 나중에 추격병들이 왔을 때는 밀물이 밀려와 건널 수가 없었다. 이행리는 적도에서 움집을 짓고 잠시 살다가 배를 10척 정도 만들어 가솔 및 가병들과 함께 동북면 의주, 즉 현재의 원산으로 향했다. 의주는 아버지 목조 이안사가 몽골에 투항하기 이전 고려의 의주 병마사로 있었을 때 선정을 베풀었던 곳이라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고, 경흥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도 대거 오는 바람에 쉽게 세력이 다시 커졌다.
이행리는 얼마 후에 대몽골 울루스의 제5대 카안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인 세조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에 참가했는데 이 때 충렬왕(25대)을 만났다.
충렬왕은 접견 자리에서
그대는 본국(고려) 벼슬을 하던 집안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것인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음을 알겠다.
라고 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라가 원나라에 반(半)복속이 되고, 충렬왕 본인도 장인이었던 원 세조에게 대고 뭐라 끽소리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과거 몽골에 항복한 고려인 관리에 대해 고려 국왕인 자신이 쓴소리를 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훗날의 폭군 충혜왕(제28대)은 원나라 사신에게 발로 마구 차이며 맞기까지 한 판이었다.
이행리는 9월 10일에 죽었지만 연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익왕'(翼王)으로 추존했고, 태종이 '익조'로 재추존했다. 능은 1945년 광복 당시 기준으로 안변군 서곡면 능리에 있는 '지릉'(智陵)이다. 조선시대 지도와 구한말 흑백사진에 담긴 《지릉》 모습
3. 가계
익조에게는 2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손씨, 두 번째 부인은 등주(안변)의 호장 최기열의 딸 최씨이다. 익조의 뒤를 이은 것은 최씨가 낳은 이춘이었고, 이러한 이유로 이춘의 손자 이성계는 이행리의 첫 번째 부인 손씨가 아닌 두 번째 부인 최씨를 이행리의 정실부인으로 보고 정비(貞妃)로 추존했다. 그리고 나중에 태종이 정숙왕후로 재추존했다.
선원속보에는 함녕대군과 함창대군도 정숙왕후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