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09 00:11:35

이상훈(좌완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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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align=center><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d02c20><tablebgcolor=#FFFFFF><:> MBCMBC 스포츠+의 야구 중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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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MBC 소속 김나진
MBC 스포츠+ 소속 한명재, 정병문, 정용검, 김수환
해설자 MBCMBC 스포츠+ 겸임 허구연, 정민철, 김선우
MBC 스포츠+ 단독 박재홍, 양준혁, 이상훈, 심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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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SPORTS+/KBO 리그 중계, MBC SPORTS+/MLB 중계

파일:/image/213/2010/04/07/20100407_1270597803_73668500_0.jpg
야생마이자 삼손으로 불렸던 현역 시절의 투구 사진.
파일:attachment/lee.jpg
만화가 최훈이 그린 이상훈 일러스트.
파일:76195430.3.jpg
코치로서 다시 친정팀 LG의 일원이 됐었던 3년 [1]
파일:이상훈 야구해설위원.jpg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이름 이상훈(李尙勳 / Lee Sang-hoon )
생년월일 1971년 3월 11일 ([age(1971-03-11)]세)
출신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학력 서울신길초 - 강남중 - 서울고 - 고려대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3년 1차 지명 (LG)
소속팀 LG 트윈스 (1993~1997, 2002~2003)
주니치 드래곤즈 (1998~1999)
보스턴 레드삭스 (2000)
SK 와이번스 (2004)
지도자 고양 원더스 투수코치 (2013~2014)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5)
LG 트윈스 피칭 아카데미 원장 (2016~2018)
해설위원 MBC SPORTS+ 해설위원 (2019~)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4
수상 기록
1995년 한국프로야구 투수 골든글러브
1994, 1995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1995년 한국프로야구 승률왕
1997년 한국프로야구 구원왕
파일:2717BF33565FE49A1B.jpg
LG 트윈스 임시결번
No.47 이상훈 [2]

파일:Twins_logo.png
-1 [[틀:LG 트윈스 주장|{{{#FFFFFF '''MBC 청룡 / LG 트윈스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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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1984 1985~1986 1987 1988~1993
이종도 이해창 김재박 이광은 ?
1994~1997 1998 1999 2000 2001
노찬엽 김동수 송유석 김선진 양준혁
2002 2003 2004 2005 2006
서용빈
유지현(서용빈의 군입대)
이상훈 이병규 조인성 서용빈
2007~2008 2009 2010~2011 2012~2013 2014~2015
이종열 조인성 박용택 이병규 이진영
2016~2017 2018 2019~
류제국 박용택 김현수
}}}}}} ||
LG 트윈스 등번호 47번
김진명(1991~1992) 이상훈(1993~1997) 결번
결번 이상훈(2002~2003) 오승준(2004)
조윤준(2012~2015) 이상훈(2016~2018) 임시결번
SK 와이번스 등번호 47번
조중근(2001~2003) 이상훈(2004) 최정(2005~2006)
두산 베어스 등번호 85번
황병일(2014) 이상훈(2015)

1. 소개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LG 트윈스 1기 시절2.3. 주니치 드래곤스 시절2.4.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2.5. LG 트윈스 2기 시절2.6. SK 와이번스 시절
3. 은퇴 후4. 지도자 경력5. 해설자 시절6. 기타7. LG 트윈스와의 악연8.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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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3경기 연속 등판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박빙의 상황이 되자 자진해서 불펜으로 향하며 코치진에게 남긴 말.

LG 트윈스, 주니치 드래곤즈, 보스턴 레드삭스, SK 와이번스 소속의 투수이자 가수. 前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現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별명은 야생마

대한민국 투수 중에서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 임창용, 오승환과 함께 '한, 미, 일 프로 무대를 모두 경험한 선수이자, 한미일 3개국 프로야구 1군 경기에 모두 등판했던 최초의 선수이다. 구대성은 2005년 미국에 진출하며 이 기록을 달성했고 박찬호는 2012년, 임창용은 2013년, 오승환은 2016년이었다. 김병현일본에서 1군 기록이 없다. 지진만 맞았다 아울러 한미일 3개국 1군 무대에 모두 섰던 날 기준으로 유일하게 만으로 20대에 달성하였다.

등번호는 47번(LG 1993~1997, 2002~2003 & SK 2004) - 17번(주니치) - 40번(보스턴). 선수로 활동했던 11년 중 대한민국에서 뛰었던 기간은 6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1990년대 LG 트윈스의 신바람야구를 상징하는 선수이자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했던 좌완 파이어볼러로 강렬한 임팩트로 인해 LG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서울고등학교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좋은 폼을 가진 130대 후반의 공을 던질 수 있는 좌완 투수로 이름나 있었지만,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돈을 벌기 위해 대학시절 여러 차례 학교를 이탈한 적도 있지만(정확하게 14번이라고 한다.), 학교 선배이자 절친인 故 임수혁임수혁 선수의 부친, 그리고 고대 시절 은사인 故 최남수[3] 감독의 도움으로 대학 야구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 투수로 성장했다. 고려대학교 시절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깨닫고 트레이닝을 늘리며 145km/h까지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좌완 파이어볼러로 한층 성장했다.

같은 89학번인 구대성이 고교야구때부터 대형투수로 기대되었고 대학야구를 대표하는 좌완투수였던 반면, 이상훈은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이 되어서야 야구계의 주목을 받을 정도의 활약을 펼친다.
파일:external/appdata.hungryapp.co.kr/BBrYrXkJD.jpg
고려대 시절 임지섭?
파일:external/image.sportsseoul.com/20140914_1410654787_62012300_1.jpg
LG 입단 확정 직후, 맨 왼쪽이 이광환 당시 LG 트윈스 감독.

고려대학교 4학년이던 1992년 대학야구 춘계리그 때 성균관대학교와의 경기에서 무려 14타자 연속 탈삼진 이란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우며성대가 죽었슴다;단박에 서울 연고 프로 팀의 영입 0순위로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도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였으니. LG 트윈스OB 베어스가 이상훈을 영입하기 위해 치열한 혈전을 벌였지만 결국 이상훈의 향방은 주사위 승부로 결정되었고, 두번째 판까지 OB가 이기고 있었는데 세번째 판에서 OB의 주사위가 1, 1이 나오는 바람에 21:16으로 LG가 승리했다.또 OB는 주사위 때문에 호구잡혔다 재미있는 건 이 때 주사위를 던진 OB의 김현홍 스카우트는 2016년 현재 LG의 스카우트 팀장이다 서울 지역 드래프트 우선권을 얻은 LG 트윈스가 그를 1차 지명하면서 이상훈은 1993년 프로야구 역대 최초로 2억 원이라는 몸값에(계약금 1억 8천 8백만원, 연봉 1천 2백만원) LG 유니폼을 입었다.[4]

당시 이상훈을 주사위 던지기로 지명한 LG 스카우트가 구단에 전화로 "우리가 이상훈을 잡았다"며 흥분하면서 낭보를 전하고 있는데, 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던 당시 KBO 이상훈 총재가 그 스카우트에게 "허허 스카우트 양반, 날 잡아서 뭐 어쩌려는 게요?"라면서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2.2. LG 트윈스 1기 시절

데뷔 첫 해인 1993년에는 9승을 거두며 아쉽게 두 자리 승수엔 미치지 못했지만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공헌했고,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탈락 직전의 팀을 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다만, 93년은 워낙 대어급 신인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시즌이어서 9승밖에 올리지 못한 이상훈은 신인왕 후보 5명 안에조차 들지 못했다.[5]

이듬해인 1994년에는 김태원-정삼흠과 선발 삼두마차를 이루며 1선발로 맹활약, 18승으로 조계현과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 LG가 그 해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1등 공신으로 남았다. 골든 글러브를 수상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성적이었지만, 그 해 태평양 돌핀스 소속으로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40세이브(세이브포인트가 아니다.)를 올린 마무리 투수 정명원의 임팩트에 밀려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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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준 前 단장과 함께.

1995년에도 20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그의 20승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있었다가, 그로부터 훗날 22년 뒤, KIA 타이거즈양현종이 20승 5패를 기록하며 토종 좌완 선발 20승 투수로서 두 번째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6]그렇지만 MVP는 OB 외야수 김상호에게 넘겨 주었으며, 본인도 롯데 자이언츠와 맞붙었던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7][8][9] 어찌 됐건 1995년의 이상훈은 1998년의 김용수, 2001년의 신윤호와 같이 단 한명도 나오지 않은 LG 출신 MVP에 근접했던 선수였다.

OB 베어스김상진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여, 둘의 선발 대결이 있다고 하면 매진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역대 전적은 이상훈의 3:0 압승.[10]

포스트 시즌에서의 부진과 달리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온 1995년 2회 한일 슈퍼게임의 1, 5차전에 선발 등판해서 일본프로야구 올스타 팀을 상대로 12이닝 1실점이라는 엄청난 호투를 펼치기도 했다. 특히 1차전은 일본도 전력을 기울인 베스트 멤버였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인 피칭이었고 일본과 상당한 수준 차이를 느껴야 했던 1991년 1회 대회에 비교해서 대한민국일본과도 비등한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1등 공신. 그래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차전 선발 등판 전 일본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일본 기자들이 선동열에게 "1차전 선발을 맡느냐?" 물었을 때 선동열은 "올해 대한민국에 20승 투수가 있다. 그에게 물어 보라!" 고 나름 멋진 대답을 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7이닝 가까이 무실점으로 일본 타선을 틀어막았는데, 안타를 많이 주지 않은 제구가 상당히 잘 된 경기어서 선동열의 대답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오오 예언자 선?

그러나 1995년 페넌트레이스 4일 등판 - 포스트시즌 - 한일 슈퍼게임까지 이어지는 혹사의 후유증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1996년 시즌 도중 손가락 혈행 장애와 함께 원래 있었다던 척추분리증까지 발병하면서 더 이상 선발로 출전이 힘들어지며 마무리인 김용수와 보직을 맞바꿔 중간계투마무리로 활약했다. 본격적으로 마무리로 돌아선 1997년에는 10승과 37세이브로 47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면서 구원왕 타이틀 홀더가 되었다. 이는 당시 정명원이 보유하고 있던 한 시즌 세이브포인트 기록을 깬 신기록이었으며[11], 이후 진필중에 의해 기록은 다시 깨졌다.[12]

2.3. 주니치 드래곤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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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드래곤스 시절.

1997년 시즌이 끝난 후 LG 구단 측에 돌연 해외 진출 의사를 밝혔다. LG는 선수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적료 200만 달러에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로의 이적이 성사되는 듯 했다. 하지만 당시 FA가 아니었던 계약특성상 다른 MLB 구단들이 '우리도 이상훈을 영입할 권리가 있다'며 보스턴의 단독협상에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에는 MLB 사무국까지 개입하며 한-미 양국 간 포스팅 제도를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이상훈은 MLB 전 구단 스카우터들이 참여하는 공개 테스트를 진행했지만, 포스팅 응찰액이 60만 달러에 그치며 몸값이 반 이하로 뚝 떨어져버렸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금액에 LG 구단은 이적을 철회했고, 어차피 안고 갈 수 없던 이상훈은[13] 자매구단인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즈에 2년 간 임대 후 완전 이적 조건으로 떠나보냈다.

1998년 시즌 시작 직전 어찌어찌 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 형식으로 이적하여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했고 1999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페넌트레이스 우승에도 공헌했다.[14] 1998년에는 혈행 장애의 악화와 그런 상태로 무리하게 선발 투수로 보직을 정하고 던졌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1999년부터는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 의한 보직 변경으로 당연히 선발 첫 7경기동안 방어율 6.28인 선수를 누가 써 선발보다 주로 중간계투마무리 투수로 등판하며 빼어난 성적을 거둬 1999년부터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한 선동열의 공백까지 메웠다.

이 당시의 등번호는 17번, 등록명은 삼손 리.

여담으로 이상훈은 LG 트윈스를 처음으로 떠날 때부터 프런트와 감정이 극도로 상해 있었다고 한다.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주 요인은 그가 야구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이광환 감독을 해임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앙금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 않아서, 임대 중인 일본 무대에서 괜춘한 활약을 보인 뒤 그를 완전 이적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순전히 'LG에 이익을 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본인의 평생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함과 동시에, "절대 일본에 남지 않겠다"는 충격 발언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때가 바야흐로 주니치 드래곤즈가 다이에 호크스(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맞아 신나는 재팬시리즈를 치를 무렵(...)

다만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LG와의 감정 이전에 미국 진출에 대한 동경 자체는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99년 시즌이 종료되고 이상훈이 돌연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하자 주니치 대표는 그의 잔류를 위해 설득했지만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오히려 "삼손, 좋아. 남자는 꿈을 가져야 해."라며 격려해 줬다고 한다. 이런 주니치 측의 반응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다고.

2.4.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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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결국 일본을 거쳐 1999년 말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하지만 유망주라기엔 적지 않았던 나이,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메이저리그에 콜업될 기회조차 적었다. MLB에서는 2000년 잠깐 콜업되어 9경기에 등판한 게 전부이고[15], 결국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던 와중 2002년 초 방출되었다.

2.5. LG 트윈스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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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친정으로 복귀했을 당시. 왼쪽의 인물은 故 유성민 前 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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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광환 감독과 경기 후 하이파이브.

방출 후 KBO 리그 복귀 의사를 타진했고, 김성근 감독이 이를 받아들여, 귀국하자마자 친정팀 LG와 연봉 4억 7000만원에 계약하며[16] 고국에 리턴하게 된다. 그 와중에 애꿎은 김성근을 낙마시켜 버리는데, 김성근과 이상훈 조합도 충분히 유효했을 것이고 두 당사자 모두 납득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상훈과의 계약(이광환 감독의 복귀)을 준수하기 위한 LG 프런트의 과감한 결단력이 아이러니하게도 별 개같은 효력을 발휘한 덕분이다. 2002년의 말도 안 되는 LG 트윈스의 전력으로 준우승을 해낸[17] 김성근 감독이 해임된 이유는 'LG가 추구하는 야구 스타일이 아니다'였다. 당시에는 우승을 해야 LG 스타일이었던 듯. 하지만 막상 이광환 감독도 2003년 감독 후 1년 만에 짤렸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김성근 해임도 좋은 결정이었고...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이미 많이 지친 몸을 이끌고 3경기 연속 등판하는 투혼을 보였으나 결국 시리즈 전적 2:3으로 뒤지고 있던 6차전에 9:6으로 앞서던 9회 말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맞은 후 강판당했고,[18] 뒤이어 등판한 최원호가 곧바로 마해영에게 역전 끝내기 백투백 홈런을 내주면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마운드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 최원호의 마지막 모습 이후 LG는 10년 동안 가을야구를 맛보지 못했고, 강산이 한 번 변하고 나서야 김기태다시 가을야구를 실현시켰다.

이후 2003년 시즌을 앞두고 무려 6억이라는 연봉을 받으며 삼성 이승엽에 이은 리그 연봉 2위이자 투수 최고연봉을 받게 되었고[19] 투수로써는 드물게 팀의 주장을 맡았다. 시즌 초 노장진, 조웅천과 함께 구원왕 자리를 다투다가 시즌 중반기부터 슬슬 맞아나가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20] 9월 중 어깨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다. 그리고 이게 이상훈이 현역 선수로써 LG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나온 마지막이 되었다.

2.6.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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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부터가 너무 암울하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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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4년 후, SK 프랜차이즈 스타에게서 데자뷰를 보게 되는데...

2004년 1월, 스프링캠프 기타 파동으로 인해 이순철 감독과의 트러블을 빚었고 오승준과 양현석을 상대로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되었다.[21][22] 초반에는 괜찮은 공을 던졌으나 얼마 안 가서 급격한 부진에 빠졌고, 결국 친정 팀 LG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다며 6억이나 되는 연봉[23]을 포기하고 과감히 은퇴.[24] 이 때문에 조범현이 구상했던 조웅천과의 더블 스토퍼 체제가 붕괴되면서 이 해 SK 와이번스는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다. 훗날 이상훈은 LG와 상대하면 포기할 상태까지 왔다고.. 즉 예전 모습의 위력이 안나와 공을 놓았다고 한다. 다만, 이상훈의 기량이 전년도인 2003년부터 완연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25] 이상훈 & 조웅천 더블 스토퍼 체제의 붕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잠시 야구와 거리를 두었다. 록밴드 'What!'[26]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으며, 뷰티샵을 운영하였다. 음악을 좋아해서 선수 시절에도 늘 기타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순철 감독과의 갈등의 출발점은 여기서 온 듯 하다. 당시 이순철 감독은 이상훈이 라커룸에서 기타를 쳐 팀 분위기를 해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상훈은 2010년 4월 5일 LG 프런트의 만행을 폭로한 글에서 자신은 덕아웃, 라커룸에서 기타를 친 적이 없는데 누명을 쓰고 트레이드된 것이라 진술하였다.

그러나 사회인 야구에서 그를 봤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공 던지고 덕아웃에서 내려와서 계속 기타만 치고 있었다고(...) 고된 생활을 했던 자신에게 기타만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할 정도로 기타라는 악기는 이상훈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김태형 감독과도 친한 이유가 바로 기타 때문이라고.. 사실 이순철이 이 걸 뭐라했던 이유는 기타를 치다가 손가락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 일이니, 기타를 치지 말라고 했던 것이였다.

2009년 7월에 친정 팀으로부터 코치 제의가 들어왔다가 퇴짜를 맞았고, 2010년에는 초상권 침해로 인해 친정 팀과 또 마찰이 있었다.

은퇴 후 마구마구, 슬러거 측의 은퇴 선수 이름 무단 사용에 문제를 제기하여 서명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마구마구와 슬러거 측의 안일한 태도로, 사태는 언제쯤 해결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커졌다. 이는 다른 선수들의 경우 KBO 또는 선수협에 권한을 위임한 덕에 양측과의 협의를 통해 문제를 일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상훈은 개인 자격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인데, 정확히는 최초에 게임사에서 선수협[27]에만 계약이 되어있었고 은퇴 선수들은 무단 사용을 해왔다. 이에 이상훈이 이를 처음 문제시하면서 몇몇 은퇴 선수들과 소송을 걸게 된 것. 이게 이슈화 된 후 많은 은퇴 선수들은 새로 만들어진 은퇴선수협의회를 비롯 일구회, 혹은 선수협에 초상권을 위임하고 게임사는 협회들과 단체협약을 맺었는데 이상훈만 협회에 가입을 안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프로야구게임 초상권 침해 사태참고.

그러던 중 프로야구 매니저에 난데없이 서울고 출신 좌완투수 신철수 선수가 업데이트되었다. 누가 봐도 이건…[28] 트집잡힐 게 두려웠는지 등번호는 물론 기록마저 죄다 0으로 표기해 놨다. 아무리 숨겨봤자 코스트랑 스텟은 어쩔꺼야 심지어 2014년 1월 23일 업데이트에서는 그 신철수의 레전드 카드도 나왔다! 베이스 카드는 좌완 최후 20승을 올린 1995년도 카드. 물론 통산 스탯, 수상기록 등은 모두 삭제되어 비어 있지만... 유독 마지막 '기타' 문단에는 마운드의 영원한 불꽃, 트윈스의 심장이라고 이 카드를 소개해, 팬들을 아련하게 하고 있다. 영입을 위한 카드 1성구는, 1995년의 호적수였던 김상진. 그리고 2014년 2월 13일 업데이트로 드디어 퍼블리시티권 계약이 됨에 따라 폭풍 간지나는 이상훈 선수의 선수 사진과 실명이 적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마구마구에서도 2월 19일자로 다시 카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4. 지도자 경력

그래도 야구에 손을 놓지 않았는지, LG 시절에 함께한 투수 전승남과 함께 하남시에서 야구 클럽을 운영하기도 했다.

지도자로써의 평가는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4.1. 고양 원더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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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원더스의 투수코치가 된 이후. 그의 상징과 같았던 장발과 수염들이 정돈되었다.[29][30]

2012년 시즌 후 스승인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고양 원더스의 투수코치로 계약하였다. 그리고 외모가 깔끔하게 정돈됐다.

2014년 9월 고양 원더스가 해체됨으로써 원더스의 수많은 선수, 코치진들이 무직 신세가 되어 버렸고, 이상훈 코치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에 많은 LG 팬들이 2015 시즌 이상훈이 코치로 친정 팀에 복귀해 주기를 염원하고 있다. 양상문, 차명석, 이상훈 투수 출신 코치라인 오오 그런데 2010년에 이상훈과 LG 구단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면, 이런 소리는 헛소리인데

하지만 팬들의 바람과 다르게 2014년 10월 30일, 결국 스승인 김성근 감독의 뒤를 따라 한화 이글스로 간다는 기사가 나왔다. 관련 기사 하지만 이상훈 코치 본인이 직접 아니라고 알려 왔고, 그 소식을 들은 LG 팬들은 다들 안심했지만....

이보다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이상훈의 거취는 김성근의 한화도, 친정 팀인 LG도 아니었다.

그 행선지는......

4.2. 두산 베어스 시절

바로 잠실 라이벌 팀인 두산 베어스였다.관련 기사

두산 프런트는 이상훈에 대해 "검증되지는 않았으나, 좌완 투수를 육성하는 데 최적의 인물로 판단되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송일수 감독 관련으로 욕을 바가지로 먹은 두산 프런트의 입지를 되살리고무엇보다 두산의 고질병 오브 고질병인 "좌완투수 잔혹사"를 끝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전의 LG와의 악연이 끝내 걸린 것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으나, 어쨌든 영원한 LG맨이라고 생각되던 이가 하필 다른 곳도 아닌 잠실 라이벌 팀에 간 것 때문에 많은 LG 팬들이 멘붕했다.

하지만 기사 직후 인터뷰에서 아직 확정된 적이 없다고 했다. 다만 두산 베어스와의 논의는 현재진행형이고, 한화 이글스는 비공식적으로도 제의가 없었다고 한다. 알다시피 2010년의 일 때문인지, LG 트윈스에서도 이상훈에게 코치 제의를 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일단 11월 30일까지 고양 원더스의 코치로서 활동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의 인터뷰를 보면, 두산행을 굳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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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스에서의 활동이 끝난 날인 2014년 11월 30일, 잠실에서 열린 '2014 들의 모임'에서 신임 코치 환영식 때 정식으로 인사했다. 이로서 두산행 확정.

김태형 감독은 이상훈을 2군 투수코치로 기용한다고 밝혔다.[31] 여담이지만 김태형 감독과는 사적으로 조금 친한 편이었다고 한다.[32] 그리고 김태형 감독이 갓 취임한 후, 이상훈에게 연락하여 코치 제의를 했다고 한다.

2015 시즌 2군에서 괜찮은 투수를 발굴해 내면서 두산 팬들에게 투수코치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군에 올라와 깜짝 선발로 등판해 호투를 펼친 김수완허준혁이나, 2군에서 영점을 잡고 돌아와 괜찮은 모습을 보이는 오현택 등을 보면 확실히 선수를 길러내는 데 능력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두산 베어스는 2015년 전반기가 끝난 시점에서 좌완 투수들이 총 30승(유희관 12승+장원준 9승+진야곱 3승+허준혁 2승+함덕주 2승+이현승 1승+이현호 1승)을 합작, 좌완투수 잔혹사를 완전히 털어내고 선발 4명이 좌완 투수인 좌완 왕국으로 거듭났다. 덧붙여 비록 2군에 있어서 현장에 같이하지 않았지만, 본인은 21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4.3. LG 트윈스 시절

2015 시즌 후 LG로 복귀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LG 프런트가 직접 이상훈의 상징성을 들어 두산 프런트를 설득한 끝에, 두산에서 이상훈의 LG행을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이에 각 커뮤니티의 LG 팬들은 일제히 감동의 눈물을 쏟고 있다. 롸켓과 야생마를 한 팀에서 ㅠㅠㅠㅠ[33]

그러나 두산 팬들은 '이제 겨우 팜 구실이 갖춰지나 했는데, 유능한 투수코치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냐'며 두산 프런트를 신랄하게 까고 있다. 한용덕 코치님마저 한화 차기감독으로 내정된 상황에서 좌완 잔혹사 끊어준 분을 대책도 없이 보내다니 이게 호구가 아니면 뭐냐?

정식으로 계약해 11년 만에 코치로 줄무늬 유니폼을 입게 된 이상훈 코치는 투수 육성을 위한 LG 구단 내부의 피칭 아카데미 초대 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는 삼성 라이온즈의 BB 아크같은 기초 육성 시설을 벤치마크한 것이고, 2016년부터 류택현 2군 투수코치가 육성군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았을 때 아카데미는 육성군과 별도로 운영하는 듯하다. 두산에서 그의 2군 투수 유망주 지도가 괜찮게 검증받은 것도 LG 프런트의 마음을 이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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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2009년과 2010년에 구단과 불쾌한 일이 있었지만, 이상훈은 LG에서 코치로 다시 불러 주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포수 조윤준이 이상훈 코치를 위하여 자신이 쓰고 있었던 47번을 양보하기로 하여 이상훈은 코치로도 47번을 달게 됐다.

2016년 10월 8일 마지막 홈경기에서 시구자로 나서게 되었다. 무려 13년만에 LG소속으로 잠실의 그라운드에 등판한다. 이미 팀은 4위로 포스트시즌을 확정지은 상태. 이 날 경기는 클래식 유니폼 데이로 검정색 원정 유니폼이 오랫만에 다시 부활하는 경기이기도 하다. 시타는 노찬엽 코치가 맡았으며, 이날 이상훈 코치는 현역 시절 때처럼 마운드로 뛰어나와 현역 시절 못지 않은 1루 견제와 시구를 보여주었다. 영상 깨알같은 세리머니 & 포수와 포옹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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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그의 어퍼컷 세레모니.

2017년 들어 LG 투수진에 김대현, 고우석 등 20대 초반의 젊은 투수들이 1군에 올라와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자 피칭아카데미 원장으로써 좋은 평가를 받는 중이다.

시즌이 끝난뒤 11월 17일 스포티비 객원해설위원으로 2017 APBC 대회 한국:대만전 해설을 하였다. 처음이고 옆에 선배인 김경기가 있어서 그런지 중간에 말하는 타이밍을 잘 잡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중저음의 목소리가 여성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2018년 들어 LG가 Again 2011을 시전하면서 이상훈 코치에 대한 평가도 하락하고 있다. 전년도와는 다르게 투수자원이 부족했기 때문. 다만 투수라는게 키우기 쉬운 것도 아니여서 섣부른 비판만 할 수도 없다.
그리고 키워올려도 불상수가 다 망치잖아

그리고 "피칭아카데미가 사라진 게 이유"라며 LG 코치직에서 사퇴하며 친청팀과는 3년만에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LG 이상훈 코치 자진사퇴 피칭 아카데미 해체는 양상문이 LG를 나가기 전에 한 일로 차명석과는 무관계. 이후 인터뷰에서는 구단에서 다른 보직을 제안했지만 봉급만 받고 있을 거면 있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사퇴했다고 한다.

항간에는 차명석 단장과 선수시절부터 서로 성향이 안맞아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소문 [34]이었지만 불투명한게 사실.. 다르게 보면 한편으로는 팀 투수진의 성적 부진에 대해 나름의 책임을 진 거라는 평도 있다. 선수시절부터 책임감이 투철한 성격이기도 했고, 투수 분야가 완전히 무너져버리면서 팀이 추락한 것이 더해졌다는 해석.. 향후 2019년 2월 10일 이영미 기자 인터뷰를 통해 지난 시즌 1군 성적이 안 좋으니깐 피칭도 소문이 안 좋았던게 사실이었다고 한다. 물론 기사를 통해 알았다고 했으며 팀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는게 맞다며 팀에 말해줫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아쉬워했다고.. 다만 그냥 팀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나왔다고 한다.
작년 시즌 후반기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1군 성적이 좋지 않으니 아카데미까지 여파가 올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기사를 통해 피칭 아카데미를 없애겠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제가 학원 원장인데 학원이 폐지되는 걸 기사로 알게 된 것이죠. 팀을 이끄는 수장이 바뀌면 정책에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인 것이죠. 그래도 직접 얘기해주기를 바랐습니다. - 이영미 기자 인터뷰중-

차명석 단장이 47번을 비워놓고 이상훈 원장을 다시 기다리겠다고 말하면서 LG의 47번은 비공식적이나마 영구결번이 되었다.

2019년 초반 그의 지도를 받은 김대현이 빠른 배팅볼과 직구와 다름없는 슬라이더를 던지고 고우석마저 최일언코치와 함께 바꾼 슬라이더 그립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체 한게 무엇이냐는 소리가 쥐갤에서 나오고 있다

5. 해설자 시절

2019년 2월 1일 심재학과 함께 MBC SPORTS+의 해설위원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됐다.

그리고 2019년 4월 2일 ~ 4월 3일 행복드림구장 롯데 자이언츠 : SK 와이번스에서 본격 해설자로 현장 데뷔를 시작하였다. '마운드 위 야생마' 이제는 공 대신 마이크를 쥔 이상훈 해설 위원

그리고 2019년 4월 16일 ~ 4월 17일 창원 NC 파크에서 벌어진LG 트윈스 : NC 다이노스의 경기에서 친정팀 중계로 사실상 첫 중계를 시작하였다.

또한 개그도 가끔씩 하는 편이다. '특별 도우미 등장' 김희주 아나운서가 전하는 어제 경기 리포팅

베이스볼 투나잇에서는 고양 원더스에서 같이 한솥밥을 먹은 이원재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6. 기타

  • 유명한 별명으로는 '야생마', 그리고 머리가 야구선수 치고는 심히꽤 길어서 붙여진 '삼손'이 있다. 덕분에 주니치 시절의 등록명이 삼손 리 였다. 먼저 자리잡고 있던 이종범과「LEE」가 겹쳐서 즉흥적으로 결정한게 별명이었던 삼손 리. 데뷔 초창기에는 머리를 기르지 않았었다.
  • 구원등판을 할 때 항상 불펜에서 마운드로 전력질주를 하며 올라가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열정적인 모습에 팬들은 환호하고 상대 선수들은 기가 죽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기가 그 때 미쳤었다며 다른 투수들은 절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35]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뛰어간 것인데 팬들의 호응이 너무 좋아서 하면 안되는 줄 알지만 계속 뛰어서 올라갔다고.
  • 위에 써있듯이 일본 활동 당시 등록명이 삼손이었는데, 하필이면 일본 내에서는 삼손이 유명한 게이 잡지의 이름인지라.. 물론 이상훈 본인이야 그걸 알지는 못했겠지만(...) 여튼 그런 이유로 당시에도 좀 도큥네임 취급을 받았고 아직도 일본 인터넷에서 이름이 특이한 야구선수 하면 꼭 등판하는 추억의 선수이기도 하다. 참고로 삼손은 2017년에도 발행중이다.
  •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군 면제를 받았던 사실이 있다고 한다. 아마 생계곤란 사유인것으로 보인다.
  • 나이들어 상남자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데뷔 초에는 꽤 순박하고 앳된 얼굴이였다. 이상훈이 95년도에 20승 도전 당시 인터뷰를 보면 그 야생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밝고 명랑하다.
  • 국내에서 뛸 때 달았던 등번호 47번은 투수 톰 글래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대학 시절 미군방송에서 톰 글래빈의 투구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던져야겠다고 마음먹어서 47번을 달았다고 한다. 마해영은 같은 이유로 외야수 조 카터의 49번을 달았다. 관련 칼럼
  • 47번 이외에 이상훈이 프로 선수로 활동하며 달았던 번호로는 17번(주니치), 40번(보스턴)이 있다. 선호하는 등번호인 47번을 달 수 없어서 비슷한 숫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 SK의 좌완투수 김광현이 어릴때는 엘지팬이여서 이상훈을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다고 한다.
  • 롯데 자이언츠 선수였던 故 임수혁과는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선후배 사이로,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방황하던 이상훈을 故 임수혁이 도와 주고 삐뚤어지지 않게 바로잡아 줬다고 한다. 故 임수혁이 쓰러진 후 꾸준히 그를 도와 왔으며 2010년 2월 7일 故 임수혁이 끝내 눈을 감자 조용히 그의 옆을 지켰다.
  • 2010년 10월 3일 서울종합운동장에서 열린《서울 국제 자전거 디자인 페스티벌》중 자전거 락 페스티벌에서 공연 중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 대해 "XXX, 2년이나 남았네"라는 논란의 여지가 충분한 발언을 하였다. # 고대 선배인데? 평소 엄청난 보수성향인 LG 트윈스 갤러리에서도 이상훈을 까는 사람은 소수였지만 사이트 성격이 성격이니만큼 그날부로 별명이 하나 추가되어 좌생마(…)란 별명이 전 야갤에까지 퍼지게 되었다.물론 이순철이 이상훈을 쫒아낸 걸 잘했다는 LG 트윈스 갤러는 한 명도 없다. 그리고 그가 LG의 코치로 돌아오자 선수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갤러들 중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 박펠레스포츠춘추의 박동희가 3부작으로 나눈 이상훈에 관한 인터뷰가 있다.사람들이 잘 몰랐던 이상훈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과거등이 잘 나와있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은 글. 읽어보기
  • 마구마구 갤러리에서는 '품절쥐'라는 별명이 있다. 본인이 성명권 사용을 거절하면서 더 이상 본인은 야구게임에서 볼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다른게임은 가명을 이용하여 선수를 공개했지만 유독 마구마구는 가명을 쓰지않고 선수카드 발매를 중단시켰다. 덕분에 지금은 이상훈의 카드를 소유한 유저만이 사용 가능하게 되었다. 특이폼이 뛰어나게 구현되어 있으며 본의 아니게 희소성이 가장 뛰어난 카드가 되어서, 거래를 할 때는 평범한 스페셜에도 현금 10만원이 왔다갔다 하고 있다. 본인이 게임에 나오는걸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라이센스 계약을 모두 거절했다고 하는데 2014년 1월 말, 컴투스 프로야구 매니저의 이삼민이 이상훈으로 변경되 업데이트 되어 엘지팬들을 설레게 하였다. 모든 야구게임 사상 최초. 이어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도 초상권 협의가 드디어 이뤄졌다. 따라서 다른 게임에서도 이상훈이 등장할 가능성이 생겼다. 그리고 2월 19일자로 마구마구에서도 이상훈 카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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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유독 사진의 퀄리티가 출중하다. 역대 프야매 레전드 카드 중 가장 간지난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 다만 이 사진 선정에는 웃지못할 일화가 있는데 처음 업데이트 예고에는 지금 사용되는 이상훈의 클래식 카드 이미지와 레전드 카드 이미지가 각각 레전드와 클래식 카드에 적용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유저들이 레전드 카드가 클래식 카드보다 사진 퀄리티가 더 떨어지냐는 항의댓글을 달았고 결국 클래식, 레전드 이미지가 지금의 사진으로 변경되었다.
    프야매에서의 성능은 발군으로 명실공히 프야매 최강 덱인 94'LG 덱의 1선발로 군림하고 있다. 좌완에 최고급 구종과 등급을 가지고 있으며 유학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팀 혹은 자팀의 레전드 선발보다도 성능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 2016년 4월 16일, LG vs 한화전이 우천취소되어 KBS N 스포츠에서 대체 프로그램으로 레전드 스토리 이상훈편을 방영했다. LG에서의 영광의 시절부터 비극적인 이별, 그리고 LG로 돌아온 이상훈 코치의 야구인생이 방영되었다. 양상문, 김동수, 서용빈, 최동수 등 많은 은퇴한 선수들이 출연했고, LG팬으로 알려진 최훈과 현역 이동현김광현[36]도 출연했다. LG 트윈스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큐멘터리 초반 눈물을 보인 야생마는 다큐멘터리 마지막에도 조용히 눈물을 흘려 이를 지켜보던 많은 LG팬들도 함께 울었다. LG열혈팬 민혜경 작가가 집필했다.
빨리 옛사랑은 추억이 될 수 있게끔 만들어 줄 거에요. 첫사랑은 잊고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게 할겁니다.
-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이상훈 코치가 남긴 말
  • 1990년대 라이벌인 김상진과는 친했다고한다. 둘의 선발 맞대결 후에는 항상 사석에서 만났는데, 김상진은 항상 기달렸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이유인 즉, 이상훈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긴 머리를 정리정돈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라고...[37]
  • LG와의 가슴아픈 이별 이후 다시 돌아온 이래, 야생마의 영구결번을 원하는 팬들도 많다. 실제로 그의 번호 47번은 LG팬들에게는 준영구결번급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번호이기도 하다.
  • 이상훈은 LG에 다시 소속되었을 때도 스프링캠프는 따라가지 않아서 스프링캠프용 모자(하얀색)는 써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2019년에 LG 스프링캠프를 해설위원 자격으로 방문해서 처음 모자를 써보게 되었다.

7. LG 트윈스와의 악연

한 줄로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김재현과 함께 대표적인 LG 프런트가 저지른 사건의 희생자. 이 둘은 누구보다도 트윈스를 사랑했고, 트윈스 팬들에게 사랑받던 선수들이다. 근데 캐넌꾀돌이 때문에 LG에 돌아올 가능성이 더 낮을 듯[38]

2004년 LG감독으로 이순철이 임명되면서, 당시 LG의 주축 선참이었던 유지현-서용빈이 순서대로 은퇴 수순을 밟고, 김재현은 부상 재발 시 책임소재에 대한 각서를 구단에서 강요받아 이에 반발하여 sk로 이적한다. 고참들을 정리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팬들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웠으나 매우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가장 결정판은 이상훈의 트레이드였다. 계획적이면서 단기간에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진행되었다는 것은, 이순철 감독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당시 젊은 신임 감독이었던 이순철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구단 프런트의 운영 방향성과 맞아 떨어지는 맞장구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베테랑 소중한줄 모르고 무시하던 LG의 이런 운영은 10년 암흑의 시발점이 된다.

감독이 된 이순철은 자기가 원하는 영입 위시리스트를[다] 은연중에 언론에 흘리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기존 멤버들이 부족하여 교체해야 한다는 식의 밑밥 깔기를 하였다. 언론에 진필중을 데려오고 싶다고 선언한 이상, 이상훈을 이미 팀 전력외로 분류한 것이다.

여기에 기존 멤버들을 제대로 기용해주지 않고 2군에서 뜬금 멤버들을 계속 불러올려 실험하고, 이미 폐급의 먹튀 FA들을 떼돈을 주고 데려와서 무작정 띄워주는 식으로 기존 멤버들을 도태시키는 식의 운영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이라도 가능했던 김재현, 이상훈은 구단에서 내보내는 상황이 되어도 전혀 중재하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부진으로 입지가 좁아진 유지현은 철저하리만치 무능한 노장으로 짓밟히도록 방관하였다. 특히 이순철이 이상훈과 기타 관련하여 신경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제대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외면하였다는 것이 후일 이상훈의 인터뷰에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선수가 감독에 항명한다는 이상한 이미지로 왜곡되며 방출성 트레이드로 결말이 나고 말았는데, 계속 대화를 시도하던 애꿎은 이상훈은 해명, 화해의 기회 한번 없이 고향팀과 인연이 끊기고 말았다. 이상훈은 박동희와의 후일 인터뷰에서 당시 단순히 이순철과의 불화도 있었지만 이순철은 그 사태의 주연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한 만큼(상술했겠지만 나중에 이순철과 만나 서로 오해를 풀었다), 당시 구단의 방향성이 이미 이상훈, 그리고 다른 베테랑들의 편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2009년 7월LG 프런트가 그에게 복귀를 종용하다가 뒤통수를 날린 행각을 폭로하는 내용의 글을 2010년 4월 5일 LG 팬 게시판인 쌍둥이 마당에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나중에 밝히길 선수들은 구단을 상대로 항상 을의 입장인데, 운동을 그만둔 후에도 을이 돼야 하고, 있었던 일도 관점의 차이라며 없는 일로 만드는 처사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음은 그가 쌍둥이 마당에 올렸던 글의 전문이다.
정치 트윈스

안녕하세요 이상훈입니다.

몸이 부서져라 팀 전체가 희생했었던 2002년 시즌을 기억하시는 지요?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전이었던 2002년 뼈와 살을 파고드는 날씨의 한국시리즈… 그곳까지 가기위해 자신들을 버렸던 감독, 코칭 스텝, 선수, 그리고 엘지야구 팬들…

아마도 그 기억을… 지우기란 어려우실 것입니다. 또한 그시절을 그리워하며 엘지를 응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구가 아닌...마치 훌륭한 영화의 클라이막스 같은 장면을 여러 번이나 연출을 한 듯한 신들리고 그 추운 날씨에 손에 땀을 쥐게 했던 경기장면들…

그 이후 2003년 시즌이 끝난 후 전 기타를 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운동도 안하고, 팀 분위기 더럽게 만들었던 선수로 내몰아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억지 트레이드를 당해야만 했던 2004년… 참으로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난 덕아웃..락커룸에서 기타친 적 없다 어느 미친놈이 거기서 기타를 치냐..? )

내입으로도 조차 입에 오르내리기도 창피했던…
나 자신은 결국 그러려니 하는 생각으로.....
어둠 속에 갇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참아야만 했던…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가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런 모습은 프로야구 선수로써의 자세가 못 된다 하며.....
스스로의 자악에 야구를 그만 두었던…
그 후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이자 나의 정신적 지주였던 기타와 음악을 하며 여러 가지 일거리로 생계유지를 하며 7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제가 선수 생활을 하던 중 은퇴했던 선. 후배선수 들의 모습 중에 가장 많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개인적인 사업이나 일을 하다가 야구가 그립거나 야구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부딪혀 구단을 기웃거려야만 하는 전직 야구인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너무나도 쓰리고 아팠습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야구인이 되기 싫어서 은퇴 후 결정한 것에 대해서 후회 없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였고 누구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고 뭐든지간에 선택한 결정은 뒤도 안 돌아보며 살아왔습니다.

덕분에 음악에 있어서는 밴드의 스타일과 색깔대로 4장의 앨범이 나오게 되었고, 계속적인 우리들의 무대에서 활동 중에 있으며… (사업이라 해야 하나요?) 생계유지에 있어서도 많은 벌이는 아니지만 가족들과 하루 세끼 챙겨먹으며 아주 큰 탈 없이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전… 그간에 엘지의 성적을 떠나 맘속으로 진정한 응원을 해왔었고,....
또는 크고 작게나마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엘지 복귀나 야구계의 복귀를 외치던 여러 곳곳의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며 알고 지내왔었고,.. 나의선택 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여러가지들의 현실에 마음아파 했었습니다.

엘지 트윈스 팬들의 목말라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엘지의 몰락에대한 여파의 여운이라 생각했으며 마치 옛 애인에 대한 그리움이라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엘지도 더더욱 훌륭하고, 아리따운 애인을 만나서 옛 애인에 대한 생각은 지나간 추억으로 만들어지는 날이 오겠지…

또한 새로운 설레임속에 데이트를 즐기며 안정된 살림을 차리겠지…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마디로 슬프지만 7년전부터 엘지는 무슨 이유인지? 박혀있는 각각의 조강지처들을 보내 버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중 하나였던 나는 버려진 영혼이라 분명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이후에도 많던 적던 나의 새끼들이라 할 수 있는 후배들이 찾아오거나 때로는 찾아가서 라면에 소주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으로 다독일 때도 있었고, 때론 그들로부터 위로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흔쾌하게도 어느 누구든 만나며 지내왔고, 바쁜 시즌에는 그저 브라운관을 통해서 나오는 야구공과 나무 작대기를 휘두르고 던지는 모습을 보며 부상 없이 1년을 잘 치르는 선수가 진짜 프로야구 선수다라는 것을 맘속으로 후배들에게 전달해가며 살았습니다. 하다못해 얼굴한번 제대로 보지못했던 선수들에게도 그 놈의 마음을 읽어가며 품에 안고싶은 마음에 위로의 말을 직.간접적으로 나의 시간과 정신을 들여가며 표현한 적도 있었습니다

잘 커나가는지 숨죽여가며 그냥 뒤에서 항상 앞장서지 못함을 뼈저리게 아파하며 고통스럽게 6~7년을 남모르게 눈물 흘려가며 살아왔습니다.

엘지에 신인으로 들어와 나의 분신이 되 주었던 47번…
문신으로까지 먹물 들여가며 나의 오른쪽 팔에 고통을 주었던 나의등번호......
지금은 의미가 없어져버려서 몇 년 간 또 다른 고통 속에서 지워도 봤지만‐ 잘 지워지지 않네요......

미국 다이아몬드 안에서 야구에 미친놈들과 눈을 부라리고 맞짱 한번 떠보겠다는 심정 하나로 미국 진출을 외치다 구단끼리 오가는 머니가 모자라다며 쌩 까버리고 일본 주니치에 엘지는 렌트 머니 두둑하게 받아가며 그 당시 일본으로 가지 않으면 나쁜 놈으로 낚인 찍혀야만 했던 98년 초…

결국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어 98년 많은 것을 느끼며 병신처럼 보내다가 어찌라도 해보려고 귀국도 하지 않고 미친 듯이 뛰고, 들고, 던지는 몸부림 속에 얻은 혈행장애를 숨겨가며 버틸 수 밖에 없었던 98년 가을서부터 99년 스프링캠프…그리고 개막전까지의 내 모습…

보직에 상관없이 마운드에만 오르는 것을 좋아했었지만 시즌 중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혈행장애 고통의 숨김을 팀에 전달하고 중간으로 보직을 변경해가며 운이라도 좋았는지 최고의 중간 계투진과 건재한 마무리가 버티고 있는 팀이 되어버린 주니치…그리고 11년 만의 샌트럴리그 우승… 허리 척추 분리증… 툭하면 빠지는 어깨탈골… 거기에 혈행 장애…
특히나 갑작스레 닥쳐온 혈행 장애를 이겨 내느라 혈관주사를 맞아가며…
또 그 해에는 왜 이리도 남모르게 어깨가 자꾸 빠지는지 던지는 팔까지 혈행 장애가 섞여서인지 왜 이리도 아프고 쑤셔대는지 혈관주사에 근육이완제까지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주사를 맞아가며 던지던 99년..... 결국 그것도 되지 않아 양쪽 어깨에 살색 테이핑을 두르고 감고 던졌던 것을 생각하면 2002년 못지않은 개인적인 감동의 시즌을 보낸 것 같습니다.

물론 원래의 생각이었던 야구에 미쳐있다는 미국놈 들과 맞짱 한번 뜨기 위해 뒤도 안 돌아보고 일본을 떴지만 그 당시 항간의 언론에 나왔던 쥬니치 구단의 몸값 제시액?
여러분 그것은 그 당시 주니치 대표를 제외한 사람 중 저만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인 듯 홀랑 벗고 핏덩이로 태어나서 죽어선 가루가 되어버리는 인간의 법칙이 있듯이 돈이란 본인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결과 또는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확고한 생각이 아직도 나의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듯 그 당시에도 나와의 약속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화려함은 일본에서의 생활이 더했겠지만 야구 인생의 의미로 따지면 마이너리그의 생활이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무궁무진한 것을 보고 느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메이저에 성공 못한 놈이라고 할지언정… 지껄이쇼!!! 나에겐 그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야구이기 전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야구를 깨달았고, 야구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더불어서 2002년 같은 미친 듯한 시즌도 있을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나에게 돈과 명예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 하는 것을 묻는다면.....난 엄마,아빠 중 누가 좋느냐를 물어볼 것이고 난 그저 내 운명을 받아 들이고 택하겠노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즉!!! 본인 앞에 와있고 그것에 대한 사리사욕이 없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을 택하겠노라고 말입니다.

항간의 사람들은 내게 말합니다. 자유분방?....... 여태껏 말입니다. 그 사람들 과연 날 얼만큼 아는지요? ,......맞습니다. 그리 표현하는 것도 그 사람 자유니 억지로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유와,자율이라는 단어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억제할 줄 알고, 사리 판단을 할 줄 알며,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순간 생각합니다. 내가 배운 것이 그렇고 느낀 것이 그러하니….....

서두가 길군요....... 난 항상 그렇다....... 서두가 길다!!

그런데…서두가 너무나도 긴 사연이 있다. (아...손가락 힘듭니다..존칭 빼고 가겠습니다)

03년 이후 벌레같이 트레이드가 되어 바보같이 몇 개월 더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제껏 야구에 대한 나의 후회는 엘지에서 병신같이 트레이드 될 때 그만두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라고 주구장창 물어보는 이들에게 대답했었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나와 팀… 모든 것을 위해서 몸이 망가지던 말던 반팔에 그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던졌던 시절… 그런데 아주 정신적인 병신을 만들어서 나를 내쫓은 팀이 뭐가 좋다고 먼발치에서 나마 팬들과 더불어 엘지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때론 대놓고…

언론에 얘기합니다. 난 엘지 팬이라고 또 엘지의 녹을 먹고 살았다고… 물론 엘지도 나로 인한 녹을 먹었겠지만 말입니다…

6년이 지난 작년 09년 7월 말쯤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엘지 단장이 나와 자리 한번 하고싶다고…!!

난 만나지못할 이유가 없었고 편한 시간 잡아 연락 달라했고 단장과의 약속은 하루 이틀 만에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나 또한 단장이 만나자는 말에 쉽사리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인 5~6월부터 인가 내 주변과 주변이 아닌 온갖 야구 관계자들 누구라고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의외의 곳에서까지 엘지 복귀에 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든 재촉 또는 확정에 대한 인사이드에서 돌아가는 말들이 터무니 없는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나의 귀에 들려왔었습니다.

이 또한 모든 것을 선택할 때처럼 나의 운명이라 받아 들였으며 단장과의 만남은 물음표를 달수는 있었지만 거부감까지는 없었습니다. 끝을 보면 오히려 내가 마음을 열고 만났다고 자신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단장 혼자 나올 줄 알았던 자리는 3:1로의 자리가 되어버렸고 점심식사를 2시간씩 먹어가며 애기를 들었습니다. 내 생에 2시간 점심을 먹은 것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만나서 1시간 정도 완전히 형식적인 얘기들.. 구단 실무자들이 내가 엘지에 있었을 때와는 많이 바뀌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허공 잡는 얘기만 하던 그들에게 만나자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먼저 물어보았고. 단장은 무엇인가 결정을 짓는듯한 표정, 말투와 행동으로 분명 날 보며 얘기했습니다. “엘지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내가 엘지에서 언제짤릴지 모르겠지만 성적을 떠나서 이상훈이라는 사람을 끌어들여 다시 엘지다운 팀을 만들고 싶다. 도와달라”!!! “지도자에 대한 생각은 없느냐”? 등등..

여러분 야구는 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난 이사람들이 뭔가에 목이 말라있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들은 말 중 가장 뚜렷하게 생각나는 말들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 듯 내가 병신이 되어서 트레이드가 됐을 때 야구를 그만둘 때, 그만두고 나서 6~7년간… 내 자신을 만회하고자 엘지에 침을 뱉은 적도 없고 오히려 난 엘지 팬이라고 떠들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던 만큼 엘지가 잘되길 바라며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분위기 끝에 약 2~3시간의 만남이 끝나고 당장 몇일 뒤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듣고 헤어졌다 그때부터난 야구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어느 곳에서도 즐비하듯 특히 프로야구라는 곳에도 여러분들이 모르는 구단과의 만남 속에 계약서에 사인 아닌 계약서 사인 이상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곳 야구 경기 중에 보이지 않는 예의를 지키며 야구 경기를 하듯 말입니다.

이것은 프로야구계 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도 있을것 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예의가 깨지는 순간 그라운드에서 전쟁이 일어나듯 뒤에서도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습니다. 전… 그 자리의 마지막 말로 기억되는 단장의 말… 우리 수일 내로 다시 만나자는 말이었고 난 그말들을 되짚어 보며 다시 내게 야구라는 운명이 찾아오는구나…아니...찾아 왔고 그리고 해야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난 굳게 마음속으로 결정을 하였고 엘지에 어떤 그 무엇으로 들어가든 지난 6년간의 생활을 작은 것 에서부터 큰 것까지 정리하기에 들어갔습니다.

더군다나 그간 했었던 일은 하루 아침에 정리가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난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만 했습니다. 정말 우연하게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고, 8월부터 6개월의 시간이라면 2010년 2월… 즉 해외로 캠프를 가는 일을 하던지 국내에서 캠프를 하는 일을 하든지 2010년 시즌 전에 정리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일단 밴드 멤버들의 상의와 양해를 구하고 밴드 ‘왓’의 3집 앨범 작업을 일단 중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샾, 공연장, 일간스포츠 네버엔딩 인터뷰. 앞으로의 일거리 계약 철회 등등… 걸리고 보이는 데로 정지나 스톱모드로 들어갔습니다.

야구 이외의 것으로 신경 쓰고 있다는 터무니 없는 말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듣기 싫어서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 극도의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수입마저 감수해가며 야구를 그만 두었던 시절을 생각하며 돈은 두번째 라는 생각과 함께 난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시켰습니다. 더군다나 또다시 엘지의 최악의 시즌으로 인한 여러 가지 말들이 언론에 나오는 상황 속에서 나에게는 엘지와의 만남은 언론에 감춰야 하는 비밀 아닌 비밀이 자연스럽게 형성 되어버렸고, 만남조차 엘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후배들에게 보이지 않는 예의라 생각하였기에 그 예의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어느 때보다 극도로 사람들과의 얘기나 만남을 피해가며 나 스스로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또한 말을 아낀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내가 또다시 병신이 되어가는지… 아니면 속은 건지… 세상이 날 안도와 주는 건지…
야구 판의 정치에 놀아난 건지? 그 후 어느 누구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진짜 어느 누구에게도…
만남을 가진지 거의 한달 째인가 기억이 안 나지만 왠지 그들의 정치에 놀아났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슨 정치인지는 그들이 알겁니다.. 그렇다라는 판단아래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진짜 패닉 상태로 집에서 나오면 오갈 데가 없어서 그저 연습실에서 저녁 늦게까지 산 송장처럼 앉아만 있다가 집에 들어와서 자기를 수십일 지냈습니다.

그들의 말에 야구모드로 돌아가기 위해 개인사의 모든 것을 버리고 바꾸었던 나로써는 다시 돌려놓기에는 또 다른 시간과 정신적, 금전적인 투자와 노력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랄까? 붙어있는 똥 딱지는 커녕 떨어진 똥 딱지라도 핥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난 단장과 그사람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날 만난 이유가 무엇이었냐고 물어봤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상식 기대 이하의 발언을 하는 그들을 쫒아 가서 주먹이라고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이 양반들 나이를 숫자로만 쳐먹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무리 짖고 싶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동물이 있듯이 참 대단한 양반들이구나… 야구 생각들은 안하고 정치를 어설프게 배워서 순간 위기를 벗어나려 하는 행위에 치가 떨립니다.

말과 행동을 바꾸기에 너무나도 바쁜 이 양반들아… 당신네들의 짓은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하늘은 알고 있네요!!!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들은 없겠지만 당신네들은 비가 오는 날에도 먼지가 나올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소!!! 단지 나에겐 치사한 증거만 없을 뿐… 이 글 이후로 나 또한 어떤 식으로 몰릴지 모르겠고 그대들이 어떠한 처신을 할지 모르겠지만 가슴과 마음에 손을 얹으시지요…

악상이 떠오르면 녹음 했었던 녹음기라도 올려놓고 얘기했을껄… 그 자리에 나 혼자였다는 것이 너무 후회스럽소… 그래서 3:1로 자리를 만든 건지 자신들이 없으셔서 아니면 피해갈 수 있는 쥐구멍이라도 만들어 놓으려고 3:1로 자리를 만든 건지… 어느 한 언론 또한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려 시작되는 기사를 내보냈다가 왠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후속 기사조차 내보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는 완전 폐인이 되어있었던 상태라 모든 것이 귀찮아서 반응조차 하질 않았었습니다.

결국 6년간의 모든 것을 바꾸고 버리고 남은 거라고는 패닉 상태로 쳇바퀴 돌듯한 생활에서 빠져 나오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막한 연습실에 틀어박혀 산 송장마냥 생활하길 2~3달 아무도 안 만나면서 정말 술 한잔 안 마셔가며 패닉 상태로… 지난 11월이면 나와야 할 3집 앨범이 올 초에 나온 이유도 엘지를 만난 이후로 모든 것을 중단하고 그만 두었던 것 중 한가지입니다.

그냥 마냥 날 이해해주고 믿어 주었던 밴드 멤버들에게도 너무 미안하다. 아~~ 여기서 부연설명 하나 드리자면 우리들은요 저 이상훈의 멤버가 아닌 정말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콩 한쪽도 나눠 쓰고, 나눠 갖는 팀이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미니 앨범 때부터 지금 나와있는 정규 3집까지의 활동이 그렇고 정말 우직한 멤버들이죠 오히려 제가 멤버들에게 도움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딜 가든 존경하는 뮤지션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여타 유명하고 전설적인 외국 뮤지션을 말하기 보다 우리 멤버들이라고 바로 말합니다. 야구 선후배들처럼 말입니다.
얘기가 잠깐 다른 곳으로 흘러 미안하군요… 늦었지만 개인적으로 패닉 상태가 풀리고 중단했었던 3집 작업과 녹음을 마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단지 수입이 없어서 악기를 팔고 모든 것을 돈으로 만들어 생활해야 하는 순간적인 처지에 놓인 억울하고 비통하지만 당분간 그리 해야 하고 뭐든 돈으로 만들어야 하는 지금의 현실이 나에게는 어색하기 그지 없지만 그것 또한 그리 해야하고… 니미~ 상훈아 샾 어떻게 됐냐? 공연장은? 앨범은? 준비 했었던 것은? 너 나랑 같이 하려고 했던건? 아무것도 모르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뭐라 대답할 길이 없으며 내 스스로가 병신 같아지는 이런 기분… 이런 식으로 내가 싫어져 본 것은 처음입니다. 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일들의 사실이 한 언론에 알려지면서 그들이 무슨 핑계를 대고 다녔는지?
나에게 돌아오는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상훈이 네가 거절했다며??...
이런 말들을 듣는 순간 난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어이가 없어 구단 사무실이라도 들어가서 한바탕 하고 싶었지만 참을 수 있었던 지난 과거까지 몰아 닥치는 이순간 난 어떻게 버티며 살아야 하는 건지 막막합니다.

또 참고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순간 러브페스티벌 진행 담당자라는 구단 직원의 연락이왔고. 이런 상황에서 러브페스티벌에 대해서 논의한다는 자체가 웃기는 거라 생각했으며 분명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회의를 거쳐 섭외해 보라는 단장의 말이 있었다는 것 또한 황당하다.

무슨 양아치도 아니고 무뇌한도 아니고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건지? 그 직원에게까지 마음 억눌러가며 그때의 상황을 애기하고 대충 정리하고..... 섭외하려면 단장한테 직접 전화하라고 말했지만 그 말에 대한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걸이라는 식으로 핑계를 대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정말 밉다. 러브페스티벌 섭외까지 날 딱 3번 죽인 거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작년 러브페스티벌은 뭐고 나한테 연락을 했었는데 내가 거절했다고? 시구 섭외했는데 뭐가 어째? 이런 빌어먹을… 난 어떠한 연락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고사하고 오히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라는 말을 직접도 아닌 간접적으로 전달하며 지들이 먼저 만나자 해서 만나고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도와 달라해서 그러려고 마음 먹었건만… 필요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니 오해로 묻어 버리려는 이런 개 뼉다구 같은 발상은 어디서 배워 처먹은 것인지? 내 스스로 엘지맨이고, 엘지 팬이기를 자청했건만 엘지의 몰락을 꿀 발라 감쌀 일이 있으면 토종 벌꿀로 감싸기 위해 노력한 건 아시는지?

아니 어쩌면 모르는게 낫고 없던 일로 하고 싶소이다. 이리 된 마당 나도 더 이상 그들의 그늘 속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내 스스로 떨쳐버릴 수 있는데 까지 떨쳐 버리겠습니다.

앞으로의 내 인생에 있어서 닥쳐오는 것들을 더더욱 미친 듯이 열심히 할 것이며,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내가 이순간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말입니다.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결과가 어찌되든지 간에 말입니다. 대신 예전 같은 마음을 아니겠지만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선.후배들이 그곳에 있기에 먼 발치에서 나마 지켜보렵니다. 정치적인 행동을 했었던 ...지금도 하고있는그들은 제외하겠습니다.

하지만 선.후배와 팬들을 응원합니다. 올해에는 제발 지난 옛 애인을 그리워 하지 않는 팬들의 마음을 풍족 시켜 줄 수 있는 줄무늬 유니폼의 선.후배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더 이상 내 품에 가둬놓고 참고 살아가기엔 이젠 너무나도 억울하고 가슴이 찢어집니다

엘지의 미래를 위해 진정한 마음으로 말씀 드립니다
장인정신 하나 없이 야구단을 이끌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무엇을 원하고 바라고 있는지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찾아보십시오.
순간을 모면하기위한 쓰레기 같은 발상들은 이젠 그만입니다. 미국과 일본에 교류를 맺어서 배워 가지고 오는 것들이 과연 무엇들인지요?

이세상에 그냥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내가 깡통을 차든, 가족들과 길거리로 나앉든, 정치 놀음에 어떠한 파장이 나한테 돌아오든, 야구계와의 마지막 끄나풀까지 끊기던 어떠한 것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핑계적인 정치를 해도 하늘은 당신들을보고 알고 있으니까요…
내 맘속에 신이 나를 지켜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엘지의 모든 것이 잘되길 바랍니다.
이세상 사람 중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을각오로 덤비는 사람입니다.

...짧게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09년 7월말 그들이 만나자해서 만났고 ...도와달라해서 야구를 그만두었을 때처럼 깊이 생각하고 결정했고 따라서 지난 6~7년간의 인생을 접어버렸고 두통수 당할 무렵 쪽팔리게도 구리에서 땅고르는 일이라도 달라했지만 나에겐 선택의 여지도 없었으며...정치에 따른 인간들이 위에 올라가 있는것을 보고 있노라니 기가 막힐 뿐.......
구리에서 땅고르는 일이라도 달라했잖아.......
그와중에 러브페스티벌 섭외차 전화하는 당신네들은 도데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가있는 집단인지?

...내가 어마어마한 당신네들을 이길수는 없겠지만 맨땅에 해딩한번 해볼랍니다
바윗돌에 계란던지는 거겠지만....
7년동안 내이름 훔쳐서 유니폼 팔아먹은것과 ... 이번일 공식사과 요청하니 뭐가 어째 ?
알아서 하겠다고.....? 단장이시여 말이면 다가아니지...
아무런 해결책도없고 그냥가만있으면 나가떨어질 놈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뭔가 착각을하고 있는것 같군요
봅시다.....
# 엘지 유니폼을 입고계신 선후배 여러분들과 팬들에게는 죄송합니다
찢어지는 가슴에 목이메어 엘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 올리는 글이니 이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노력해 보았지만 여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부디 모두 건강하시고 우리 엘지팬들이 옛 애인들을 버릴수 있도록 줄무니 유니폼 입으신 분들께서는 노력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할수 있습니다...아니...해야합니다.....아니 ....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하십시요.....
맘속깊이 응원하겠습니다..... 1년간 부상없이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자가 진정한 프로입니다... 건강하세요..
엘지팬 여러분들도 기쁜마음 가질수 있도록 응원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p.s 동정은 사양입니다
운영자님 의 글내리기도 사양입니다

이에 구단과 단장의 변명은 "이상훈이 오해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인사하려고 점심 한 끼 하면서 구단 실무자를 두 명이나 대동하고 2시간이나 점심을 먹었을까?

이 사건이 알려진 뒤 올드 팬들이 잠실 야구장에《성적은 못 내도 상관없으나 추억은 건드리지 마라》는 플래카드를 걸었다가 두산 직원들에 의해 철거당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상훈은 안 그래도 LG 구단이 봉중근 2군 강등 사건 등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플래카드는 걸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플래카드 사건 며칠 뒤에는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팔이 더러워지는 것 같다"고 하며 더 이상 LG 구단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글을 올렸다.

그리고 약 4년 후, 그는 라이벌 팀의 코치로 부임하는데...[40]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 이 시절의 막장 프런트가 갈리고 LG와 이상훈의 관계가 많이 풀려졌는지 LG에서 이상훈에게 코치직을 제안했고, 두산의 양보로 LG는 다시 야생마를 안게 되었다.

8.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93 LG 트윈스 28 150⅔ 3.76 9 9 0 0 129 10 78 131
(4위)
1994 27 189⅔ 2.47
(5위)
18
(1위)
8 0 0 140 9 64 148
(2위)
1995 30 228⅓
(1위)
2.01
(2위)
20
(1위)
5 0 0 150 12 51 142
(5위)
1996 41 99⅓ 2.54 3 3 10 0 70 8 42 95
1997 57
(5위)
85⅓ 2.11 10 6 37
(1위)
0 56 6 27 103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98 주니치 드래곤즈 11 32⅔ 4.68 1 0 0 0 32 0 12 33
1999 36 95⅓ 2.83 6 5 3 0 75 0 30 65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2000 보스턴 레드삭스 9 11⅔ 3.09 0 0 0 0 11 0 4 6
2001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2002 LG 트윈스 52 85⅔ 1.68 7 2 18
(4위)
0 53 8 33 92
2003 55 56⅔ 3.34 4 4 30
(1위)
0 42 4 21 55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2004 SK 와이번스 18 14 5.14 0 3 3 1 11 2 9 15
KBO 통산(8시즌) 308 909⅔ 2.56 71 40 98 1 651 59 325 781
NPB 통산 (2시즌) 47 128 3.30 7 5 3 0 107 0 42 98
MLB 통산 (1시즌) 9 11⅔ 3.09 0 0 0 0 11 0 4 6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3 7완투 3완봉
(5위)
1994 6완투 2완봉
1995 12완투
(2위)
3완봉
(2위)
1999 2완투 0완봉
통산 27완투 8완봉


[1] 이 사진이 정말 애틋한 사진인 것이 이상훈은 저 글씨체의 유니폼을 입기 직전에 팀에서 강제 트레이드되었고, 이상훈이 돌아온 1년 뒤에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구홍로고 유니폼으로 교체되었기 때문. 2016년에 팀에 돌아온 덕분에 이상훈은 LG의 3가지 유니폼(1990~2005, 2006~2016, 2017~)을 전부 입고 사진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2] 차명석 단장이 47번을 이상훈이 돌아올 때까지 누구에게도 주지 않겠다고 발표하며 비공식이긴 하지만 영구결번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3] 고려대학교에서만 17년 동안이나 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선동열, 박동희, 조성민을 비롯하여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고대 출신 야구 스타들은 모두 그의 제자인 셈. 1993년 9월 조성민이 등판한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이 깨지는 순간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향년 48세로 타계했다. 고려대학교는 10여일 후에 열린 연세대학교와의 정기전을 감독 없이 치렀고, 분투 끝에 최 감독의 영전에 승리를 바쳤다.[4] 당시에는 신인 선수의 연봉은 1,200만원(즉, 월 100만원)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계약금을 높이는 방식으로 2억 원에 맞추었다.[5] 이 해 신인왕은 타율, 출루율, 장타율 1위였던 양준혁이었고 나머지 4명의 후보는 득표순으로 이종범, 김경원, 박충식, 이대진이었는데 김경원은 9승에 23세이브와 방어율 2위까지 기록했고 박충식과 이대진은 각각 14승과 10승을 했으며 방어율도 훨씬 낮았다.[6] 좌완 투수 20승 기록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편이다. 과거 삼성의 김일융 역시 좌완 투수로 20승을 넘기는 업적을 달성했지만, 그 기록에는 구원승도 몇 승이 포함되어 있다. 이상훈은 1995년 오직 선발 등판만으로 20승을 거머쥐었다는 부분에서 대단한 기록이다. 시대의 차이는 있지만 류현진, 김광현, 봉중근 등의 기라성같은 좌완들도 해내지 못한 대단한 업적이다. 다만 2014년 10월 14일 앤디 밴 헤켄이 20승을 기록하여 국내 최후라는 수식어가 빠지게 되었다. (물론 밴헤켄은 외국인 좌완투수 중에서도 최초의 20승이다.)[7] MVP를 김상호에게 뺏긴 이유는김상호가 잠실 홈런왕과 101타점, 한국시리즈 우승 버프도 있었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고려대학교 시절의 무단 이탈과 (특히 기자들에게)무뚝뚝한 태도 때문에 기자들에게 평이 안 좋았던 것도 있었다. 하여튼 기레기들이 문제다(이는 1996년의 박재홍도 마찬가지. 이유는 다르지만)[8] 이 해 포스트시즌에서 부진했던 이유는 시즌 후반기에 김태원이 부진으로 전력에서 이탈하자 이광환 감독의 조급증이 발동해 대체 선발을 챙길 생각을 않고 LG 선발진 전체에 3일 휴식 후 등판하는 로테이션이 시작됐고(이상훈 김기범 정삼흠 박철홍 순으로 돌아갔다.) 이 중 가장 이닝 소화력이 출중했던 이상훈에게 당연하게도 부하가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당시 이상훈은 시즌 중반까지 20승이 거의 확실해 보일 정도로 리그를 압도하는 페이스를 보였지만 4일 로테이션이 시작된 이후 급격하게 승수를 쌓는 페이스가 떨어졌으며, 결국 시즌 최종 등판에서 쌍방울을 상대로 간신히 20승을 달성했다. 마지막 등판 쌍방울전에서도 9회에 교체를 거부하며 끝내 완투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상태로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이상훈의 체력은 당연히 바닥나 있었고, 결국 롯데에게 난타당하는 요인이 됐다.[9] 게다가 그 해 이상훈이 기록한 5패 가운데 해태와 롯데에게만 각각 3패와 2패를 당한데다가 LG 트윈스 역시 롯데와의 상대전적이 6승 12패로 절대열세였다. 정삼흠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발진이 롯데를 상대로 부진했었고, 타자 역시 송구홍한대화 등을 빼고는 상대전적이 별로 좋지 못했는데, 반면 김응국, 박정태 등은 LG를 상대로 3할대 중후반의 타율을 기록했고 이종운은 무려 4할 8푼을 상회했었다. 한편 OB의 입장에서는 LG에게 6승 1무 11패의 난감한 전적을 지녔으나 롯데에게는 9승 1무 8패로 근소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롯데가 올라오는 것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2선발 권명철은 롯데를 상대로 3승 무패를 기록할 정도였다.[10] 김상진의 이 해 승수는 17승이였다. 만약 반대로 김상진이 3승을 거뒀더라면... 물론 야만없.[11] 다만 순수 세이브 갯수는 정명원이 더 많았다.[12] 그러나 실제로는 블론 세이브도 많았다. 과감한 승부를 즐기는 탓에 0B2S나 1B2S처럼 유리한 카운트에서 성급하게 잡으러 들어가는 경우도 잦았거니와, 스피드에 비해 공이 가벼웠던 탓이다.[13] 당시 해외 진출을 시켜주지 않으면 은퇴해버리겠다고 못박은 상태였다.[14] 당시 주니치에 소속된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대한민국 3총사라고 일컬었다.[15] 표면적인 성적은 11이닝 ERA 3.00으로 나쁘지는 않았다.[16] 당시 전 구기 종목 통틀어 최고액 연봉이었다.[17] 김성근/구설 참조.[18] 나중에 KBS N 스포츠의 한국프로야구 10대 레전드 - 이승엽편에서 밝히기를, 병살타를 유도하려고 했는데 이승엽에게 맞았다고 했다.[19] 이 당시 일화. LG와 삼성 양 구단은 전년도인 2002년 최고의 활약을 펼쳐온 각 구단의 두 선수를 연봉왕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도장을 찍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나, LG 쪽에서 2003년 FA가 되는 이승엽의 상징성을 인정하고 먼저 이상훈과 계약하겠다고 발표, 6억이라는 금액에 도장을 찍었다. 반면 삼성 쪽은 이승엽에게 5억 후반~6억 사이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LG가 이상훈에게 6억을 안겨주는걸 보고 이승엽의 연봉을 6억 3000만원으로 정해 주었다고 한다.[20] 평소에 앓고 있던 혈행장애와 직전해인 2002년 너무 무리했던 탓도 있다.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80이닝 이상을 던졌고, 거기다 부산 아시안게임, 그리고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연투를 했으니...역시 세이콘[21] 견해적 차이겠지만 홈구장 더그아웃에 기타를 치는건 좋지 않다는건 동료나 상대팀 선수들에게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순철 전 감독의 생각이었고, 여담이지만 당시 삼성에서도 투수진 보강을 위해 이상훈의 트레이드를 제안했는데, 삼성이 내밀었던 카드는 2년차 좌완 투수던 권혁이었다. 마침 새로 부임한 선동열 수석코치가 이상훈과 고려대 선후배 출신이기도 하고 일본 주니치에서 같이 뛰었던 적도 있어서 이상훈을 삼성으로 데려오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LG 측에서 추가로 현금을 요구하고 덩치 큰 왼손잡이 덕후인 김응용 당시 삼성 감독이 막판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고. 그외에도 롯데 역시 뒷문 보강을 위해 이상훈의 트레이드를 고려했다고 하나, 양상문이 롯데 감독으로 부임했고, LG 투수코치 출신이라 이상훈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던 데다가 적지 않은 나이, 부상 경력, 높은 몸값 등을 고려하여 그냥 논의에 그쳤다고 한다.[22] 이후에 밝히길 고양 원더스가 해체될 무렵 이순철과 만나 트레이드를 하게 된 경위를 듣고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다만 대놓고 나쁘게 말하는 게 싫었을 수도 있다.[23] 10년 전 물가로 비교하면 실질적으로 더 많은 액수다. 거기에 이 연봉은 공을 한번도 안던져도 자동으로 받는 금액이었다[24] 조범현 감독이 직접 상훈아, 차라리 나랑 같이 그만두자!라고 말했을 만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25] 당시 나이도 33세로 선수로써는 적지 않은 나이였고, 고질병인 손가락 혈행장애와 어깨 탈구증세가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26] 앨범 3장을 낸 프로 뮤지션이다. 지금도 What!의 CD를 구할 수 있다.[27] 마구마구의 경우엔 여기에 MLBPA까지[28] 사실 이런 형식의 가명으로 된 선수는 실제 선수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스포츠 게임에서는 꽤 흔한 일이다. 물론 사태의 99%는 초상권료가 원인이다. 마이클 조던, 배리 본즈가 그 예.[29] 김성근 감독이 최향남SK 와이번스 입단을 거절했던 이유가 최향남의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실제로 이상훈이 고양 원더스로 올 때 김성근이 첫 미팅에서 수염을 보고 그게 뭐냐고 지적하자 수염을 자르고 왔다고 한다. 이상훈과 김성근이 LG 트윈스 선수와 감독으로 만났을 때에도 이게 문제가 되었었는데, 이 때도 김성근이 이상훈에게 머리를 자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상훈은 머리는 자를 수 없다고 했고, 김성근은 "너만 예외를 인정할 수는 없다. 너 뿐만 아니라 어느 선수도 머리를 자르게 하지 않겠다." 라고 넘어갔다. 그러나 김성근의 성격상 지도자 수업 중에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상훈 본인도 후배들을 가르치기에는 긴 머리가 적절치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중이고. 최향남도 고양에 합류하면서 이런 것도 생각했을 것이다.[30] 다만 머리카락은 원더스 합류 이전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정리했다고 한다. 기사[31]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을 선택한 이유는, 1군 투수코치로 올리면 특히 잠실 야구장에서 일부 LG 팬들로부터 야유받을 우려가 있어서였다.[32] 김태형 감독이 전자기타 연주를 좋아해서 이상훈과 같이 술마시고 기타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기사[33] 실제로 이동현은 이상훈의 복귀 소식이 수면위로 오르자 바로 이상훈에게 전화했다고 한다.[34] 엠팍에서는 또다른 글이 있었다. 이상훈 코치 아내의 글이 "구단에서 쫓아냈다"등 안좋은글이 돌기도 했지만 자세한건 불투명[35] 리듬을 갖고 한구한구에 집중해야 할 투수가 숨이 차서 헉헉거리거나 심장이 쿵쾅거리면 투구가 제대로 될리가 없으니 당연한 말이다.[36] 이동현과 김광현은 나란히 어린 시절부터 이상훈을 동경하던 영웅이자 롤모델로 생각해왔다. 그래서 이들의 인터뷰가 들어간 것. 여담으로 어린 시절 김광현LG 트윈스의 팬이기도 했는데 그 바탕 역시 이상훈의 존재 때문이었다.[37] KBS N 스포츠 레전드 스토리 이상훈편 김상진 코치의 인터뷰[38] 김재현유지현은 원래도 그랬지만 선수협 관련 등으로 인해 사이가 썩 좋지는 않다. 지금은 그냥저냥한 사이지만... 자세한 건 유지현 문서 참조. 아이러니하게도 김재현-서용빈 사이와 유지현-서용빈 사이는 또 괜찮은 편.[다] 알다시피 그 위시리스트는 결과적으로 하나같이 역대급 먹튀 아이디어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각종 먹튀 FA을 양산하였다. 진필중, 마해영, 최상덕 등...[40] 거기에 2군에서 두산의 오랜 아킬레스건인 좌완 육성을 성공해 내면서 2015년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