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3 02:49:33

이미자(가수)

이미자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KBS_로고.png 가요대상 대상[1]
최희준, 김상희
(1967)
이미자, 배호
섬마을 선생님
돌아가는 삼각지
(1968)
남진, 이미자
(1969)
배호, 이미자
(1968)
이미자, 남진
여자의 일생
가슴 아프게
(1969)
최희준, 이미자
(1970)
남진, 이미자
(1969)
최희준, 이미자
(1970)
남진, 김상희
(1971)

파일:mbc.png 가요대상 대상
최희준
하숙생
(1966)
이미자
엘레지의 여왕
(1967)
이미자
여자의 일생
(1968)
펄 시스터즈
님아
(1969)
이미자
그리움은 가슴마다
(1970)
남진
마음이 고와야지
(1971)
}}} ||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7092106152230003600-002.jpg
이름 이미자 (李美子)
출생 1941년 10월 30일 ([age(1941-10-30)]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본관 전주(全州)
신체 160cm, 48kg, A형
가족 아버지 이점성, 어머니 유상례, 2남 4녀 중 장녀,
배우자 김창수, 딸 정재은, 아들 김모[2]
종교 가톨릭(세례명: 체칠리아)
데뷔 1959년 '열아홉 순정'

1. 소개2. 가수 활동3. 여담

1. 소개

대한민국가수.

1960년대~1970년대 초반 가요계의 여제로 불렸으며, '엘레지의 여왕' [3] 이라는 별명이 유명하다.

2. 가수 활동

대표곡으로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이 있다. 한국 가요계에서 각각 성별에 따라 절대적인 레전드라 하면 남자가수는 조용필, 여성가수는 이미자 혹은 패티 김을 꼽는다. 조용필이 락부터 트로트까지 사실상 모든 장르에 손을 댔고, 패티 김이 고급스러운 스탠다드 팝에 특화된 가수라면 이미자는 한국 트로트의 끝판왕. 1959년 데뷔해서 대략 70년대 중후반까지 전성기 기간이였고, 80년대 조용필이나 이선희, 이문세의 등장으로 밀려난 듯한 모습이 있었으나 여전히 대단한 위상을 누렸고 70~80년대 데뷔한 많은 여가수들이 지금은 은퇴 혹은 활동을 안하고 있으나 58년째 한국 트로트 가수 사상 최장기간 활동 중이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한국형 트로트가 완성되기 전, 일본 엔카 스타일의 곡 분위기와 창법으로 인해 왜색 논란이 있었다. 그 때문에 『동백아가씨』는 한때 금지곡으로 지정 당하기도 했다. 지금 듣기에는 별 차이를 못 느낄 수도 있으나, 당시 이미자의 히트곡들이 5음 음계 중심, 7·5조 가사의 폭스트롯이라 엔카와 음악적 문법이 똑같다. 왜색이기는 하나, 사실 60년대 당시 장년층 이상에게는 젊은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향수로 어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워낙 유명한 원로가수라서 어르신들이면 누구나 좋아할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고령층에 안티가 상당한 편이다. 아래 후술되겠지만, 첫남편과 이혼한뒤 친딸을 외면하고 산 이야기나 후배 여가수 죽이기 등 나쁜 일화가 많아서 평이 상당히 안 좋다. 이미자 관련 뉴스나 유투브 댓글을 보면 나이 지긋한 분들의 악플이 꽤 많다(..) 이런 이유로 이미자 보다 패티김을 좋아하는 어르신들도 있으나 히트곡으로는 이미자가 패티김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또한 1000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에 있어서도, 같은 트로트 가수인 후배 김용임 활동 이전의 전성기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 달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미자 이미지의 원천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이다. 전쟁의 상처를 서서히 회복해가던 전후,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화려하고 도회적이고 서구적인 이미지의 가수들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패티 김으로 대표되는 그 여가수들 가운데서 이미자는 고향의 여동생이나 누나를 연상시켰다. 그녀와 대비되는 패티 김은 서구풍의 가곡이나 스탠더드 팝 같은 우아한 곡들을 불렀고, 이와 대비되게 서구적으로 편곡한 민요조의 노래를 부르는 이른바 신민요 가수들도 있었지만 이미자는 사실 대중들에게 훨씬 친숙한 일본풍 엘레지로 대중들의 마음을 달래왔다.

과거에는 문란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썬데이서울 1970년 5월 17일 호 기사를 보면 그녀의 사생활이 아주 잘 나타나있다. 오죽하면 언론에서 검열삭제의 여왕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 그 당시 쓸만한 곡은 죄다 본인이 불러서 상당한 논란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총 2000곡이 넘는 노래들을 불렀다. 히트곡 목록을 적고 싶어도 여백이 모자라 적을 수 없다! 그래서 본인도 본인이 부른 노래를 잘 기억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그당시 '이미자가 싫어하는 여가수는 왕따를 당했다'는 얘기도 있었을 정도로 60년대 그녀는 대중음악의 아이콘이였고 그당시 한국전쟁 이후 민족의 한을 달래주던 여가수였다.

불미스럽게도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딸 가수 정재은을 절대 친딸로 대우하지 않고 냉대했다. 정재은은 누가 봐도 이미자와 똑 닮은 얼굴로 2살 때 부모가 이혼한 이후 친어머니 이미자를 단 3번 만났다고 했는데, 가정사가 복잡하다고만 할 뿐 정확한 단절의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펴낸 자서전에서 이미자는 딸아이를 지금껏 보지 않는 것에 대해 정확한 언급을 피했으며, 이혼 후 아이를 보지 않았던 것은 전남편과 계속 얽히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일화는 일견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에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합치되는 듯한 면도 있다.관련기사 아이러니하게 이미자 자신도 어린 시절 생모와 헤어진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전남편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이며 현 남편은 한국방송공사 PD출신.

2011년 12월 25일 MBC 창사 50주년 콘서트 <이미자와 친구들>에도 헤드라이너로 참석했는데, 이 콘서트는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단원을 격려하기 위한 자선콘서트이다. 특히 그녀는 출연료를 세네갈에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기부해 수술에 보탰다고. 이 콘서트에서 그녀는 직접 아이유에게 마이크를 건넸고, 아이유는 그녀의 데뷔곡 '열아홉 순정'을 불렀다.

2019년 5월 2일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28일 MBN과의 인터뷰에서는 은퇴는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도 새해들어 2020년 2월에도 스케줄이 잡힌걸로 보아 정말 은퇴가 아닌 듯 하다.

3. 여담

  • 이미자 사후에 성대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이미 개런티를 지불했다는 '사후 성대 기증설'이 떠돌아다녔는데 당연히 사실무근이다.[4]
  • 2017년 10월 1일 KBS 전국 노래자랑 서울특별시 서초구 편에 본선 심사위원 겸 피날레 초대가수로 등장했다. 평소 전국 노래자랑은 물론이고 가요무대에도 자주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미자 본인이 30년 가까이 서초구 반포동에 거주한 서초구민이었기에 출연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재능기부 차원에서 출연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날은 특별히 10분 더 방송을 했었다. 그냥 동네 잔치에 등장하신 슈퍼스타 마침 촬영 당시 서초구에서 서리풀 페스티벌이라는 지역 축제가 열렸는데 그것의 일환으로 전국노래자랑의 촬영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초 2016년에도 행사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스케쥴 때문에 불발돼서 아쉬웠다고 한다.
  • 딸 정재은이 이혼을 겪은 후 공항에서 이미자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이미자는 "잘 살지 그랬니... 사람들 눈이 있으니 어서 가거라"는 말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그런 분이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인 <친정어머님> 이란 곡도 불렀다.(...)
  • 트로트 이미지 때문에 무수히 많은 히트곡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를 상당히 많이 당했다. 일례로 1989년 가수 생활 30년 기념을 위해 세종문화회관에 대관신청을 했으나, "이미자의 노래는 '고무신짝' 들이 많이 들어와 질서가 없어지고 문화를 해친다" 며 대관 자체를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을 '고무신짝' 이라고 비하하는 소리를 직접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이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고건시장의[5] 도움으로 대관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득실 댈 것이라던 세종문화회관 측의 예상과 달리 당시 정재계를 비롯한 고위층 인물들이 관람하러 왔고, 특히 4개 야당 총재들이 부부동반으로 직접 공연을 관람하러 오는 등 공연은 성황리를 이뤘다고 한다. 이 후 이미자가 트로트 가수로서 처음 세종문화회관의 관문을 넘으면서 남진이나 심수봉 같은 후배 가수들 역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로미나의 커버 영상을 접한 이미자가 그녀를 직접 수제자로 받아들였고, 콘서트 때마다 초청하여 함께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1] 1980년까지는 TBC 방송가요대상이라는 이름의 시상식으로 진행됐고 언론통폐합 이후인 1981년부터 KBS 가요대상으로 이름을 바꿔 진행했다.[2] 아시는 분 추가바람.[3]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1967년에 개봉하였다. 한형모 감독, 최남현, 남정임, 박노식 주연으로 국내 최고의 여가수 이미자의 반생기를 그린 전기영화. 참고로, 나미가 어릴 적에 이 영화에서 이미자의 아역으로 나왔었다고 한다. 영화에 쓰인 박춘석의 곡이 히트하면서 얻은 별명이다.[4] "사후 성대 기증설"은 사실 순화된 표현. 속설로 돌아다니는 말은 이런 식이다. "이미자가 일본에 자기 목을 팔았는데, 그래서 이미자가 죽으면 시체를 어떻게 해서..."[5] 노무현 정권 당시 국무총리 였던 그 고건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