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2-13 11:35:44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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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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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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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 이회 여개 마충 왕평 장억
14권 「장완비의강유전(蔣琬費禕姜維傳)」 15권 「등장종양전(鄧張宗楊傳)」
장완 비의 강유 등지 장익 종예 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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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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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祖 昭烈皇帝
열조 소열황제
파일:Liu_Bei_Tang.jpg
묘호 열조(烈祖)[1]
시호 소열황제(昭烈皇帝)
비(備)
현덕(玄德)
출생 161년 7월 16일
후한 유주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망 223년 6월 10일
촉한 백제성
능묘 혜릉(惠陵)
재위 한중왕 219년 7월 ~ 221년 5월 15일
황제 221년 5월 15일 ~ 223년 6월 10일 (2년)
유(劉)
부친 유홍
황후 목황후 오씨
연호 장무(章武)
1. 개요2. 외모3. 이름과 칭호4. 생애5. 평가6. 혈통 논란7. 가족 관계8. 유비의 무덤9. 미디어 믹스

1. 개요

맨주먹과 인의만으로 일어나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난세의 영웅.

중국 삼국시대 촉한(혹은 촉)의 초대 황제. 하지만 당시 본인은 새 황실의 개창이 아닌 400년 한나라의 계승을 천명했기 때문에, 명분상으로는 초대 황제가 아니고, 한나라의 제30대 황제이다. 그리고 소설 《삼국지통속연의》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으로 그 사후엔 그의 유지를 받든 제갈량이, 제갈량마저 죽은 이후엔 강유가 주인공을 이어받는다고 볼 수 있다.[2]

그가 세운 촉한은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 때문에 이라고 국가 명칭을 공표하였지만, 삼국 시대가 끝나고 난 후부터 오늘날까지 전한후한을 따로 구분 짓듯이, 파촉 지방에 할거한 한나라라는 뜻에서 촉한이라고 불린다. 일부 역사가들은 계한이라는 이름으로 칭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전한과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끝 계(季))이란 뜻으로 촉나라에 정통성을 주는 명명이다. 물론 촉한 뒤에도 한나라를 계승했다며 나타나는 나라가 있지만 어디서 굴러온 듣보잡이 한나라 왕족 후손임을 참칭해 세운 것이므로 그만큼의 정통성은 없다. 그러므로 한나라 왕족 출신인 유비가 세운 촉한을 정통성 있는 마지막 한나라로 여기는 것이다.

유비가 군웅으로 살아간 평생을 가장 중시한 것이 바로 대의명분이다. 당시로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의 나이에도 위험한 전장을 떠돌면서도 황제가 되고 죽는 날까지 이 명분을 더럽히는 행동을 한 적이 없어 인내와 처세술의 교과서로 평가받는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소설 초반에 나오는 황건적에게 대항하는 의병을 조직한 뒤, 대장간에서 쌍검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후에는 군주가 된 유비가 직접 전쟁터에 나설 일이 없으니 초반에만 잠깐 나오고 말지만.

그는 명분이나마 한의 황실 부활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역사적으로 그가 반동탁 연합군에 가입한 일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영웅기》에는 영제(靈帝, 재위 168년 ~ 189년) 말 유비는 수도에 있다가 조조와 함께 패국(沛國)에서 무리를 모았다가 영제가 죽자, 유비 또한 군을 모아 동탁(董卓) 토벌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조조와 다소간의 친분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이 주석을 믿는다면 조조는 유비를 곁에서 보며 그 역량을 확인할 충분할 시간이 있었던 셈. 연의 또는 연의 이후에 만들어진 창작물에서는 보통 이때부터 조조와 유비가 서로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다만 연의에서 유비는 공손찬과의 친분을 살려 공손찬의 부장으로서 동탁 대항전에 참전했다고 묘사되지만, 공손찬은 동탁 토벌에 참여한 적이 없다.[3]

또한 유비는 밑바닥부터 역경을 딛고 올라서서 난세의 흐름 자체를 바꿔버렸으며, 끝내 삼국 정립을 이끌어내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보통 다른 시대라면 조조 같은 강력한 군벌이 가뿐하게 다 쓸어버리고 새 왕조를 여는 혼란기 정도였을 후한 말기를 수많은 창작과 민담의 무대로 만든 사람은 바로 조조의 천하 통일을 막아낸 유비였다.

삼국지 이야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황건적의 난 시기에 나타난 수많은 군웅 중에서 가장 미약한 기반으로 시작했으며, 그중에서 살아 있을 때 황제의 자리에 올라 후계자에게 대업을 전한 인물은 유비 단 하나뿐이다. 조조도 타 군웅과 비교하면 시작은 미약(?)한 편이긴 해도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지만[4], 유비와 동급인 다른 군웅들과 비교하면 명확해지는데, 유비는 문자 그대로 맨주먹으로 시작한 수준이며, 조조의 경우 황제를 옹립하고 있었기에 대의명분상 황제를 칭할 수 없었고 조비대에 황권을 강제로 이양 받는다 기반 자체는 유비보다 훨씬 나았으며, 손권은 3대째로 초창기 군웅이 아니다. 그 외에 '초창기 군웅이면서 황제가 된' 케이스인 원술은 그 시작 기반 자체가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기 때문에 유비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게다가 원술의 칭제는 후대에 와서는 조롱거리로밖에 취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창천항로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의 "미증유의 군웅 할거... 그로부터 어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가. 유비. 유 현덕이여, 살아남은 건 무명에서부터 올라온 너 혼자뿐이구나, 유비! 만 여의 밤을 지나 남은 것은 너와 나 단 둘뿐"이라는 대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5]

조조가 부유한 집안의 자손으로서 명성을 얻고 일어선 군벌이고, 손견이 중앙 정부에 사관하여 무관으로서 명성을 쌓은 케이스라면 유비는 유협 집단의 전통하에서 그 기반을 찾을 수 있는 케이스이다. 당장 정사 삼국지 선주전에만 봐도 유비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철들 나이 때까지 돗자리를 짜서 근근이 입에 풀칠하던 신세였고, 비록 주변에 유비의 친족들이 집성촌에 거주하고는 있었다고 하나 그 사람들이 무슨 대단한 지역 유지들이었던 것은 아니었다.[6], 선주전에 보면 집안 어른들 중 유원기라는 사람이 싹수가 보이는 유비를 친아들처럼 대하고 친아들과 같이 노식 휘하에서 공부시켜주고 학비를 대주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의 부인이 (친척이라지만) 어찌 항상 따로 일가를 꾸린 유비에게 학비를 대줄 수 있겠느냐면서 반발하는 부분이 나온다. 즉, 유비의 친족들이라고 그렇게 여유만만한 집안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초기 유비군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유씨 집성촌으로부터 유비가 딱히 도움을 받았다는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반면 선주전에는 노식 휘하에서 공부할 때부터 꾸준히 유비가 주변 호협들과 교류했으며 그들이 유비에게 귀부하고 지역 유지나 호족들과 상관없는 상인 집단인 장세평소쌍의 지원을 받아 더 많은 무리를 꾸릴 수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즉, 유주 인근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상인이었던 장세평이나 소쌍의 이런 행위는 이미 관우나 장비 같은 출중한 무력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휘하 호걸들을 끌어들여 거느리는 등, 이미 범상치 않은 실력을 보여준 유비의 집단을 보고 장래성이 보이는 그들에게 지원을 해주면서 후한 말 혼란한 시기에 위협적인 도적 무리나 기타 다른 위협에서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유비는 반동탁 연합에 참여할때까지 황건적의 난으로 얻은 벼슬을 계속 버리고 떠돌았으며, 한번 정착하면 인근 지역의 백성들을 도적들로부터 지키고 그들과 섞여지내며 후하게 덕을 베풀면서 인심을 얻었고, 이 과정에서 지역의 유지와 마찰을 빚어 암살 위협을 겪기도 하는데 당시 유비 집단의 성격이 그만큼 일반 백성들이나 유협에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조상 유방이 유협 집단을 이끌고 다니면서 세력을 키운 것과 유사한데, 유방은 고향의 지역 관리 소하하후영 등과도 친분이 있었고 해당 지역 토박이로서 거병한 반면 초기의 유비는 관우, 장비, 간옹 등의 몇몇 측근들만을 대동하면서 그냥 몇년간이나 고향을 떠나 천하를 주유했다. 그만큼 초기 유비군은 제대로 된 기반없이 오로지 맨주먹으로 집단의 생존과 향후의 기반을 닦기 위에 고군분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로, 유비는 형주의 잔존 세력들을 모아서 오와의 동맹으로 적벽대전을 설계하여 조조의 천하 통일을 박살냈으며, 한중에서 승리하여 촉한을 삼국의 한축으로 자리잡은 굳건한 국가로 성장시키는 동시에 자신과 한고조 유방을 동일시하여 한 황실의 부흥을 천명하고 황제로서 즉위하는 데 성공했다.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조조가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을 이루고 죽은 셈. 거기에 삼국지의 초창기 군웅 중에서 유일하게 현세에도 후손을 남긴 인물이라는 타이틀도 획득했다.# 공교롭게도 3대 군벌인 손권과 자기 부하였던 제갈량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비도 말년에는 이릉 대전에 대패를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촉한은 가뜩이나 부족한 인재팜에 큰 치명상을 입었으며, 이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제갈량의 고군분투 속에서 10년 이상의 시간이 더 소모가 되었다. 무엇보다 관우의 전사로 인해 형주를 잃고 난 뒤, 북벌의 루트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약점을 남기고 만다.

삼국지 연의의 이런 설정은 한고조 유방과 유비를 최대한 동일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있는데, 유방은 실제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준의 악과 깡, 패기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마인드를 가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개인적 능력도 나름 있었다는 점에서 유비와 비슷하기도 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을 부려 천하를 차지하였다는 점도 있었고. 연의에서는 유비를 유방과 거의 동일시함으로써, 그의 한중왕 선언이나 칭제에 큰 카타르시스를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정사에서부터 이미 유비 본인을 평가할 때 '한 고조의 풍모가 있었다'고 인증하고 있는 마당이니 삼국지 연의에서 한 고조와 동일시 되던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삼국지 연의에서 유비의 포지션은 '몰락한 황족의 귀공자'다. 그러나 그가 지녔던 황족이란 타이틀로 인하여 그가 얻은 실익은 없었고, 또한 삼국시대에는 유우 등의 그보다 더 유력한 황족도 많았다. 연의에서 유비의 최고의 무기는 눈물로써, 오죽하면 유비냐 울기도 잘한다라거나 유비는 울어서 천하를 차지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연의의 이러한 설정 때문에 유비는 흔히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인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사실 이러한 시각은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마오쩌둥의 삼국지연의 인물 재해석으로 인해 늘어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유비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해석한 것과는 별개로, 조조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했다.[7]

2. 외모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는 귀가 어깨에 닿고 손목이 무릎에 닿는 기이한 모습으로 묘사되며, 이는 사실 부처님을 상징하는 외모라고 한다. 정사에서 유비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장은 7척 5촌(172.5cm)에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에 닿았고 눈을 돌려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
선주전
유비가 말했다.
'안 됩니다. 명공은 여포가 정건양(정원)과 동태사(동탁)를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가 유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귀 큰놈(大耳兒)이 가장 믿지 못할 놈이로구나.'
후한서 여포 열전
이후 선주(유비)가 돌아가자 공(조조)은 사람을 풀어 선주가 어찌하고 있는지 살피게 하였다. 선주는 그러한 사정을 알아채고는 밭에서 파를 뽑으며 하인에게 돕게 하였는데, 파가 단정치 않은 모양을 하고 있던 고로 하인을 몽둥이로 후려팼다. 이를 조조가 듣자 말했다.
'귀 큰 녀석(大耳翁)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화양국지 유선주지
유비에게는 수염이 없었기 때문에 장유는 이런 방법으로 그를 개우친 것이다.
주군전

즉, 유비가 팔이 길고 귀가 크다는 건 정사에서도 나오는 사실이다. 또한 장유와의 일화에 따르면 그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수염이 없었다고 한다. 수염이 없는 건 유비 스스로도 콤플렉스로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8] 그래서인지 대중매체에서도 유비는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해 수염이 없거나 수염 숱이 적은 편으로 묘사된다.

3. 이름과 칭호

널리 알려진 '유비 현덕'이라는 표기는 일본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를 한국에서 쓰는 건 일본의 영향이다. 한국에 널리 퍼진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9]가 60~70년대 한국에도 번역되어 널리 퍼졌는데 한자로 성 2자+이름 2자가 기본인 일본인답게 유비 현덕, 관우 운장으로 4글자에 맞추어 이름을 풀어써[10] 표기하는 등의 오류를 저질렀다. 연의 본문에서는 유비, 유현덕, 현덕, 유황숙, 한중왕, 소열제 등의 호칭으로 그를 가리킨다. 이런 모습이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것이 과거의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삼국지2 ~ 공명전)과 범우사판 삼국지인데, 전자는 일본식으로 4자에 맞춰 표기하고 후자는 대만판의 번역이라 유현덕, 관운장, 관 공(公)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화권에서는 자와 이름을 다같이 소개할 때는 성은 유, 이름은 비, 자는 현덕이라고 각자 하나씩 쓰거나, 줄여서 부를 때는 <유비>, <유현덕>이라고 부르지 한 번에 이름과 자를 같이하며 <유비 현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단적으로 중국의 삼국지 드라마에서는 아예 자막에 이름을 넣고 자는 따로 표기한다. 즉 유비를 소개한다면 <유비 자(字) 현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성인이나 부모, 조상, 군주 등의 이름과 같은 한자를 쓰지 않음을 예로 여겼고 발음도 하지 않았다. 이를 피휘(避諱)라고 부른다. 피휘할 대상은 아니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대놓고 면전에다 이름을 부르면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다고 하였다. 자(字)를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친한 사람끼리 부르는 이름이고 실제로 그렇게 아는 사람이 있는데 자야말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한 또 다른 이름이였다. 요컨대, 이름이야말로 친한 사람들끼리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친한 사람이라고 함은 친구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 등 그야말로 혈연 관계에 있는 가까운 사람이다. 또한 공식적인 문서에는 인물의 이름을 쓴다. 다시 말하자면, 벼슬과 자는 같이 쓰지 않는다.

그리고 성+자를 하면 존중의 의미이고 그냥 벼슬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성+벼슬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을 꽤 존중해주는 지칭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에서는 좀 다른 부분이다. 김 사장, 김 교수, 하고 부르는 것은 그 호칭을 받는 대상자의 명백한 윗사람이거나 최소한 같은 나이대, 같은 지위에서나 존중하는 표현이지 아랫 사람이 이렇게 부를 경우 굉장한 실례가 된다.

유비의 다양한 호칭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유비(劉備): 본명.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고대 중국과 우리나라는 부모 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었으며, 평대가 되기에 아군이라면 당연히 쓸 사람이 없고, 오히려 적이 많이 썼다. '유비 놈'이라든지, '네 이놈 유비'라든지. 아니면 이보다도 더 낮춰 불러 '귀 큰 놈'이라든가 '돗자리 짜던 촌놈' 하는 식의 욕설로 호칭했다.
  • 현덕(玄德): 자. 현덕이라는 그의 자는 도덕경 10장에서 따온 어휘로 여겨지며, 이를 풀이하자면 묘한 덕 또는 매우 깊은 덕이라는 뜻이다.
  • 유현덕(劉玄德): 성+자. 딱히 벼슬이 없을 때는 이 호칭이 자주 쓰였다.
  • 귀 큰 아이(대이아大耳兒/혹은 대이옹大耳翁): 적대 군주가 유비를 욕할 때 부르는 이름. + 여포가 죽기 직전 부른 이름. 예를 들어 여포유언이 있다.
    • 비슷한 별명으로 당나귀같이 귀가 큰 자(기령), 돗자리나 짜던 촌놈[11] 등이 있다.
  • 유 예주(劉 豫州): 도겸, 조조가 상표하여 예주목을 벼슬로 받았을 때의 호칭. 사실 유비가 자주 있던 소패는 예주 패국 패현으로 추정된다.
  • 유 황숙(劉 皇叔): 연의에서 헌제와 만난 다음 족보를 뒤져보고 황제의 숙부뻘이라 하여 붙은 호칭. 주로 아군들이 유비의 혈통을 높이려는 뜻에서 자주 쓴다.
  • 좌장군(左將軍): 유비가 한중왕에 스스로 등극하기 전 조정에서 정식으로 받은 최고 관직은 좌장군이다. 출처는 노숙전, 오서 인용 주석, 관우의 말. 사실 과거나 현재나 직함이 있을 경우 그걸 붙여 호칭하는 게 일반적이라 그 사람의 행적을 조명할 때나 어떠어떠한 지위를 거쳤다고 적는 거지, 그렇게 불렸다는 출처를 표기하라거나, 그것들을 일일이 불렸던 호칭이라고 열거하는 건 의미가 없다.
  • 한중왕(漢中王): 한중왕에 오른 뒤에 쓰인 이름.
  • 선주(先主): 촉한의 앞선 군주라는 뜻. 정사 삼국지에서 쓰인 호칭이며, 삼국지연의에서도 해당 표현이 쓰인다. 성+선주라고 해서 불린 적이 있는 듯. 북송 시대의 기록 가운데 삼국지를 소재로 한 연극을 보고 한 농부가 의자를 머리에 쓴 다음 "유 선주같지 않나?"면서 장난을 쳤다는 것이 있다.[12] 위의 정통성을 이은 진의 사가인 진수가 촉한을 꽤나 존중했음을 나타내는 칭호다.[13] 유비의 뒤를 이어 촉한의 황제가 된 유선은 후주(後主)라고 불린다.
  • 소열제(昭烈帝): 시호+제(帝)를 붙여서 황제로 취급한 것. 정통성을 인정하여 가장 높이 평가하는 호칭이다.[14] 물론 시호이므로 생전에 저렇게 불린 적은 없다.
    • 소열, 한소열: 帝는 떼고 시호만 부르는 명칭. 한국에서 조선 시대 왕들을 부를 때 보통 묘호를 부르듯, 조선 시대에 유비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소열로 부르는 기록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 음흉한 놈, 사기꾼, 배신의 달인, 유통수: 촉까들이 종종 쓰는 호칭. 물론 촉까가 아니어도 유비를 저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개중 음흉한 놈이란 호칭은 그 유서가 깊다.
  • 누상촌 돗자리파 두목(…): 유비군이 기본적으로는 임협의 성격이 강했기에 나오는 말. 은근히 한국 인터넷상에선 많이 쓰인다. 실제로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유비의 기반 세력을 탁군 저잣거리의 유협 집단으로 해석한 뒤 도원결의 부분을 그에 대한 2차 창작으로 적어놓았다.
  • 유비소프트: 해외게임제작사인 유비소프트와 유비의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15] 한국에서 주로 이쪽에 엮는다.

4. 생애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비/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평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비/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혈통 논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비/혈통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가족 관계

유비의 아내로는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 목황후 등이 있다.

유비의 자식들 가운데 행적이 알려진 이는 양자 유봉, 장남 유선, 차남 유영, 삼남 유리 이렇게 4명이다. 유영과 유리는 유선과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 동생으로 유선의 후손은 영가의 난 때 몰살당했으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받는다. 따라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유비의 후손은 모두 유영의 후손이다. 다만 유리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유비의 후손은 아래 단락에 나온 청두 유비혜릉 앞에서 조상님이 거병하기 전에 했던 같은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외에는 딸이 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서 조순전의 '장판파에서 유비의 두 딸과 군수품을 획득했다'는 대목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관련 기록이 없고 저 기록이 전부다.

양자 유봉에 대해서는 유비가 시종일관 친자식으로 여기고 아끼며 좋아했다. 유봉이 죽은 이유는 겉으로는 관우를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유봉이 주둔 중이던 상용은 원래 위나라의 땅을 점령한 것이었기 때문에 군대를 움직이면 반란을 걱정해야 한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제갈량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다. 중국의 역사학자 심백준의 유비에 대한 비판에서도 나오지만, 유봉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갈량의 독단이 아니라, 유비의 합의가 있었다.

8. 유비의 무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두 유비혜릉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미디어 믹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비/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촉한에서 붙여준 정식 묘호는 아니고, 후세에 추증한 묘호다. 전조의 유연은 흉노는 한의 동생이라며 한나라의 계승을 칭하면서 한왕에 올랐는데 한고조, 광무제, 소열제(유비), 한문제, 한무제, 한선제, 한명제, 한장제를 모셨다. 이때 앞의 세명, 즉 서한의 창건자 고조, 동한의 중흥자 광무제, 촉한의 건국자 유비까지 3조(三祖)로 두고 뒤의 다섯 황제는 5종(五宗)으로 모셨다고 한다. 대체적으로는 이때 열조의 시호를 받지 않았나 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열조가 유비의 묘호라고 쓴 기록이 있다. 열조는 자그마치 조선 인조(…)의 묘호가 될 뻔 했으나, 더 좋은 묘호를 주기 위해 기각되었다. 어딜 감히![2] 나관중 삼국 연의는 총 120회로 유비가 죽는 회차가 85회이다. 이는 절반인 60회를 가뿐히 넘은 횟수로 초반부 주인공이라기엔 전체적인 비중과 사후 비중이 너무 크다. 유비 사후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이 후반 삼국지 연의를 이끄는 것인데 애초에 유비의 영향력이 없었다면 제갈량과 강유가 평생을 몸바쳐 북벌을 할 이유가 없다. 제갈량과 강유 또한 북벌 반대 세력에 대한 명분으로 선제(先帝)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그 누구도 딴지를 걸지 못했다.[3] 하지만 그것보다 핵심은 공손찬의 휘하에 든 이후. 유비의 출세는 여기서부터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원상(태수급)까지 되었는데 평원의 위치를 보면 원소와 싸우는 최전선에서 격렬하게 치고받은 걸로 보인다. 거기서 군공을 많이 세웠으니 평원상이 되었을것이다. 이후 청주로 가서 주둔하는데 조조의 공격을 받은 도겸이 헬프치자 출병하여 조조와 싸운다.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도겸의 목이 붙어있게 된 데도 유비의 공이 혁혁했던 걸로 보인다. 도겸은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는다. 이후 도겸이 죽고 서주의 유력 호족들은 유비를 서주목으로 추대한다. 194년도 즈음에 이미 그만큼 유비의 명성이 드높았다는 뜻일 것이다.[4] 사실 조조의 기반이 미약하다고 보기 어렵다. 조조군은 초기부터 원소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조 자신이 탁류파와 청류파 모두의 존경을 얻었으며 황제 옹립을 좌지우지할 만한 권력을 지녔던 중상시 조등의 손자이다. 애초에 조조는 전형적인 귀족 자제들의 관직 입문 코스를 거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자비로 수천의 병사를 모을 정도의 재력도 있었고, 일족인 하후돈, 조인으로 대표되는 하후씨-조씨 친척들의 든든한 인재 풀까지 있었다. 반면 유비는 이름만 황족의 후손이지 사실상 평민이었다.[5] 세력 면에서 본다면 공손찬이나 원소도 이에 준할 수 있는데, 유비 이상의 흙수저인 공손찬은 군사력 이외에는 함량 미달이었고 초기에 탈락했다. 원소는 출신 면에서 유비만큼 불리한 면이 있었지만 일정 궤도 이상으로 올라간 이후에는 명문가로서의 장점을 살린 케이스. 어쨌든 유비만큼 많이 패배하고 실패한 군웅 자체가 없었고, 유비의 실패는 상당 부분 기반의 미비로 인한 불가항력이었음을 감안하면...[6] 한나라가 중간에 망한 적이 한 번 있다 전한 - 신국 - 후한으로 나뉘며 족보는 이어지지만 전한이랑 후한은 완전히 다른 체제의 나라로 보는 게 맞는다. 오히려 조조군 책사 유엽이 후한 16대 광무제 후손...족보로만 따지면 유비는 유엽을 못 이긴다. 유비의 조상인 중산정왕은 전한 6대 효경황제의 아들.[7] 마오쩌둥과 조조는 능력이 출중한 지도자이자 학살자였기에 마오쩌둥이 조조에게 동질감을 느껴 좋게 여기고, 숙적인 유비는 나쁘게 여겼을 것이다.[8] 현대에도 마초성을 강조하는 기준 중 하나가 인상적인 수염인데, 고대는 오죽하겠는가.[9] '오늘도 황하는 도도히 흐른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며 유비가 황하를 바라보다가 장비와 만나는 삼국지이다.[10] 단 제갈량을 '제갈 공명'으로 표기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성인 제갈과 자인 공명을 합쳐 제갈공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표기이기 때문. '유비 현덕'은 굳이 따지자면 '제갈량 공명'이라고 쓴 것과 같다.[11] 연의에서는 툭하면 적들에게 "돗자리나 짜던 천한 놈이"라면서 출신 문제로 욕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황족인 동시에 하류층인 미묘한 사회적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12] 면류관을 의자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황제의 지위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 농부는 관청에 잡혀갔지만, 황제가 무지렁이 시골 농민이 장난친 걸 가지고 진지 빤다며 풀어주게 했다.[13] 참고로 진수는 위나라의 시초가 된 조조는 황제로서 추존된 명칭을 따 무제기, 한을 멸망시키고 정식으로 위를 세운 조비에 경우 문제기, 오나라 황제 손권은 오주전, 사마의는 당시 진수가 봉직한 서진의 추증 황제로 '선제'라는 명칭이 따로 있었는데도 그냥 진나라가 왕국이던 시절의 추증 명칭인 '사마선왕'이라고 적었다.[14] 소열은 시호이고, 연호는 장무다.[15] 다만, 유비는 해외에서 Liu Bei로 불리며, 유비소프트의 유비는 Ubi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