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안토니오 데 오켄도 이 잔다테기 Antonio de Oquendo y Zandategu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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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안토니오 데 오켄도 이 잔다테기 Antonio de Oquendo y Zandategui |
| 출생 | 1577년 10월 |
| 스페인 제국 기푸스코아주 산 세바스찬 | |
| 사망 | 1640년 6월 17일 (향년 62세) |
| 스페인 제국 라코루냐 | |
| 아버지 | 미겔 데 오켄도 |
| 어머니 | 마리아 데 잔다테기 |
| 형제 | 미겔, 프랜시스, 마리아, 후아나 |
| 배우자 | 마리아 데 라스카노 이 사리아 |
| 자녀 | 미겔 안토니오 데 오켄도(사생아) |
| 직위 | 스페인 대서양 함대 사령관 |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제독. 영국-스페인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스페인 해군 제독으로서 활약했다.2. 생애
1577년 10월 스페인 제국 기푸스코아주 산 세바스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푸스코아 함대 사령관 미겔 데 오켄도이고, 어머니는 현지의 유명한 변호사 크리스토발 데 잔다테기의 딸이자 라사르테 탑의 귀부인인 마리아 데 잔다테기다. 형제로 미겔, 프랜시스, 마리아, 후아나 등이 있었다. 아버지는 1588년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가 원정이 실패한 후 귀환한 뒤 파사헤스 항구에 돌아왔다가, 자기가 타고 있던 배에 있던 화약통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할 때 여기에 휘말려서 중상을 입고 며칠 후 사망했다.16살 때 페드로 데 톨레도 오소리오가 지휘하던 나폴리 갤리선 함대에 기사로 입대하여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즉시 두각을 나타냈다. 1594년경 루이스 파하르도가 지휘하던 함대에 입대한 뒤, 델핀 데 에스코시아와 라 도블라디야 호의 지휘를 맡았다. 1604년 7월 15일, 그는 배 2척을 이끌고 안달루시아, 갈리시아, 포르투갈 마을을 습격하고 약탈하던 잉글랜드 사략선들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아 리스본에서 출항했다. 8월 7일 새벽, 그는 카디스만에서 적과 마주쳤고, 뒤이은 카디스만 해전에서 2시간 동안 격투를 벌여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1척을 포획하고 다른 한 척은 큰 손상을 입은 채 도망치게 했다. 오켄도는 리스본으로 귀환한 뒤 국왕 펠리페 3세와 그의 사령관은 루이스 파하르도의 축하받았다. 카디스만 해전은 영국-스페인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다.
1607년, 마르틴 데 베르텐도나가 사망한 뒤 비스케이 함대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이 함대를 통해 칸타브리아 항구에서 스페인 선박들을 나포하려는 네덜란드인들로부터 해안을 보호했다. 그해 6월, 기푸스코아와 쿠아트로 빌라스 함대가 그의 지휘 아래 놓였고, 비스케이 함대와 함께 칸타브리아 함대를 구성했다. 그는 이 함대를 이끌고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인도 선박들을 보호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지켰다. 같은 해, 그는 누에바에스파냐 함대 사령관으로 선임되었지만, 그곳으로 간 뒤에도 칸타브리아 함대 사령관직임을 계속 역임했다. 한편, 그는 '바다의 왕자'라는 칭호를 지녔던 시칠리아 총독인 사보이아의 마누엘 필리베르토 휘하에서 제독으로 복무했다. 마누엘 필리베르토는 펠리페 3세에게 오켄도를 뛰어난 제독으로 칭찬했고, 왕은 오켄도에게 산티아고 수도복을 수여한 뒤 로드리고 칼데론에게 오켄도를 대신하여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를 맡게 했다.
1619년, 해양 함대 사령관 후안 파하르도는 지브롤터 해협 경비 임무를 맡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은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파하르도는 왕의 허가 없이 은퇴를 감행했다가, 결국 체포되어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 성에 투옥되었다. 오켄도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지만, 그는 함대를 준비하고 기함으로 사용할 함선을 건조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며 이를 거부했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대체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며, 서기관 아로스테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복무하지 않는 것은 의지 부족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명예롭지 않기 때문이며, 파하르도를 면제해 주는 것이 낫습니다."
그가 감히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것에 화가 난 코르테스 의원들은 왕에게 오켄도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푸엔테라비아 성에 투옥하라고 건의했다. 오켄도는 그렇게 체포되어 푸엔테라비아 성에 투옥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산 세바스찬의 산텔모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그의 갤리온선을 떠나 검사할 수 있는 허가가 내려졌다. 이후 마누엘 필리베르토가 개입해 오켄도는 무고하다고 호소했고, 결국 오켄도는 풀려났다. 그 후 인도 함대의 갤리온선 지휘권을 새로 받았고, 이 함대를 타고 여러 차례 항해했다.
펠리페 4세 치세 초기에 인도, 해군 복무, 티에라 파르메 무역에 관한 문제에 관해 왕의 총신인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과 협의했다. 그러던 1624년, 그는 지휘관의 부정과 편애, 친구 소유라는 이유로 부적합한 선박을 함대에 편입시킨 혐의, 그리고 아바나에서 필요한 수리와 월동 기간을 부당하게 허용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되었다. 고소인들은 그가 이런 짓을 하는 바람에 갤리온선 에스피리투 산투호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침몰했고, 보물이 유실되었다고 주장했다. 오켄도는 반대자들이 시기심을 품고 자신에게 가해진 모든 비난에 철저하게 반박했지만, 1년 반 후 4년간 인도 함대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국왕, 인도 코르테스 또는 인도 국민이 왕의 이름으로 내린 뜻에 따른 경우를 제외하고 갤리온에서 손실된 것에 대한 보상으로 12,000두카트를 지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626년, 오켄도는 해양 함대 사령관에 선임되어서 모든 함대 장군이 자신에게 총속하도록 했으며, 본인은 파드리크 대 톨레도 대장에게 종속되어 경의를 표했다. 1628년, 네덜란드 해군이 라 마모라를 포위 공격하자, 총독 디에고 데 에스코베도에는 오켄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오켄도는 카디스에서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해 적군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펠리페 4세는 이에 흡족해하며 그에게 친필로 서신을 보냈다.
"짐은 경이 짐에게 베푼 이러한 봉사에 깊이 감사하며, 이 시범이 그 사실을 증명할 것이오."
그 후 오켄도는 전쟁 평의회 위원이 되었고, 리스본에 편성된 함대 16척을 지휘했다. 그중 5척은 300톤 미만이었고, 군인은 40명이었다. 또 다른 5척은 배정된 보병의 절반만 수송할 수 있었고, 나머지 6척의 사정은 좀 더 나았지만, 보급품과 선원이 부족했다. 오켄도는 이 부실한 함대 중 갤리온선 산티아고에 깃발을 게양했다. 1631년 5월 5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포르투갈 상선과 카라벨 12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호위했는데, 이 함대에는 브라질 요새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한 보급 물자들이 있었다. 68일간 항해한 후, 그들은 올 세인츠만에 도착하여 수비대를 강화하고 호송대에 합류한 상선 20척과 함께 페르남부쿠로 항해했다.
9월 12일, 그들은 산타 마리아 섬을 막 약탈한 아드리안 한스 피터르 제독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함대를 발견했다. 한스 파테르는 적 함선이 300톤을 넘지 않았고, 22인치에서 8인치 대포로 무장한 걸 우습게 여기고, 적과 같은 수이지만 900~1,000톤의 대형 함선인 16척으로 전투를 벌였다. 전투가 투가 시작되기 전, 보병 사령관 바욜로 백작이 탄 카라벨이 오켄도의 기함 근처를 지나갔다. 이때 바욜로 백작은 오켄도에게 병사들을 증원하라고 제안했다. 오켄도는 익살스러운 어조로 적의 돛을 가리키며 "거의 다 뜯어졌네!"라고 말했다. 그는 병사들을 보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사고가 나서 카라벨로 돌려보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그들을 페르남부쿠로 데려가서 보물 호송대를 보호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631년 9월 12일 오전 8시, 로스 아브로호스에서 약 240마일 떨어진 남위 18도 바다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네덜란드 함대는 호를 그리며 돛을 최대한 펼치고 전진했고, 오켄도는 이에 맞서 능숙하게 기동해 적의 기함과 바람을 거슬러 접근했다. 이후 스페인 함대는 적을 향해 화공을 가했고, 네덜란드 제독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후안 카스티요 선장이 네덜란드 선박 위로 뛰어올라 갈고리 외에도 돛대에 묶은 밧줄로 선박을 고정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었다. 후안 카스티요와 그의 부하들은 곧 전사했지만, 혼란이 극심했기에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의 전사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던 오후 4시경 승부가 쉽사리 가려지지 않던 이때, 산티아고 호의 대포에서 발사된 불타는 포탄이 네덜란드 기함에 불을 질렀다. 라구사 출신 모험가인 헤로니모 마사브리디가 산티아고 호를 구출하여 폭발로 인해 네덜란드 함선이 침몰하는 것을 막았다. 아드리안 한스 피터르 제독은 여러 부하와 함께 물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목숨을 잃었다. 오켄도는 이 전투에서 네덜란드 함대의 군기를 탈취하고 적의 가장 큰 갤리온 3척을 불태웠으며, 적병 1,900명을 죽이거나 상처를 냈다. 스페인군은 갤리온 2척을 잃었는데, 그중 기함인 산 안토니오 호가 침몰하여 전사자 585명과 부상자 201명이 발생했다. 이후 네덜란드 함대를 추격한 그는 닷새 후 적을 발견했지만, 한스 피터르의 뒤를 이어 지휘권을 잡은 타르 제독은 수적으로 우세한데도 적을 두려워해 전투를 피했다. 그 후 오켄도는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가서 11월 21일 리스본에 입성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로스 아브로호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오켄도는 인도 항로 경비대 대장으로 선임되었고, 그 자격으로 1634년 4월 23일에 출발해 아메리카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오던 중 심한 폭풍을 겪고 상당한 손실을 봤다. 1636년, 오켄도는 이탈리아 신사의 도발을 받고 결투를 벌여서 그에게 상처 입혔다가 체포되어 질책받았다. 1637년, 오켄도는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나폴리에 있는 스페인 함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병력과 화약이 부족한 자기 함대의 열악한 상황을 지적하며, 이러한 행동은 적에게 쉬운 승리만을 가져다줄 거라고 경고했다. 결국 그는 마온에서 겨울을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서 메노르카 섬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나폴리에서 대포를 가져와서 섬의 요새를 대폭 개선했다.
1639년 8월,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상대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편성된 함선 23척과 선원 1,679명이 카디스에 집결했다. 펠리페 4세의 비서관인 페드로 콜로마는 오켄도에게 자작 직위를 수여한다는 통지서에 서명했다. 함대는 라코루냐에 정박했고, 그곳에서 장비와 훈련이 가장 잘 갖춰진 됭케르크 함대가 합류했다. 9월 5일, 함대는 전력을 다해 라코루냐에서 출발했고, 오켄도는 자신의 갤리온선 산티아고를 타고 됭케르크 함대를 뒤따라갔다.
스페인 함대는 9월 16일 도버 해협 부근에서 네덜란드 함대와 만나 6월 19일까지 사흘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 후 스페인 함대는 수리를 위해 잉글랜드 해안의 다운스 항으로 피신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네덜란드 함대는 원칙상 이들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함대는 잉글랜드의 항의를 무시하고 다운스 항을 봉쇄해 버렸다. 한 달 후, 오켄도는 출항해 봉쇄 중이던 네덜란드 함대와 교전했다. 그 결과 스페인 함대가 큰 손실을 보았지만,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고,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에 증원군과 물자를 성공적으로 전달했다. 네덜란드 함대 지휘관 마르턴 트롬프는 오켄도의 기함을 놓친 것에 대해 비난받자 이렇게 항변했다.
"돈 안토니오 데 오켄도가 탑승한 스페인 기함은 무적이오!"
오켄도의 기함 산티아고는 다운스 해전에서 여러 척의 적함을 격침했지만, 그 과정에서 구경이 각기 다른 1,700발에 달하는 포탄에 직면해야 했다. 선원들은 여러 날 동안 배에 뚫린 구멍을 막고 펌프를 가동해 물을 배 안에서 빼냈고, 결국 산티아고 호는 구조되었다. 그러나 오켄도는 그 과정에서 배에 40일 넘게 머물면서 갑옷을 벗지 못했고, 이 때문에 심한 열병에 시달렸다. 이에 그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죽는 것뿐이다. 나는 명예롭게 함선과 군기를 항구로 가져가겠다."
1640년 3월, 스페인으로 겨우 돌아온 그는 파사헤스 항구 근처에 있는 자기 집에서 투숙했다가 병세가 악화하자 항구에 입항하여 치료받으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받은 명령은 라코루냐로 돌아가라는 것이오. 죽음으로 나의 복종을 증명하는 것보다 더 나은 건 없소."
그는 라코루냐로 간 뒤 병상에 누워 있다가, 1640년 6월 17일 함대의 포병대가 성체 성혈 대축일 행사를 위해 예포를 발사하는 소리를 듣자. 자기가 전투 현장에 있는 줄로 착각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아래와 같이 외친 뒤 곧 죽었다.
"적이다! 기함으로 돌아가서 함대를 방어하라!"
오켄도는 1638년과 1650년 사이에 성 세바스찬 화단을 설립하고 라스카노에 기념비적인 궁전과 성 테레사, 성 안나 수도원을 건립한 것으로 유명한 마리아 데 라스카노 이 사리아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고, 안달루시아 귀족 출신인 아나 데 몰리나와 불륜 관계를 맺어 사생아 미겔 안토니오 데 오켄도를 낳았다. 미겔 안토니오는 아버지로부터 자식으로 인정받은 뒤, 스페인 해군에 입대한 후 포르투갈 독립 전쟁에서 벌어진 해전에 참여해 조부와 아버지처럼 상당한 공적을 세웠지만, 1663년 10월 카디스만 근처에서 폭풍에 직면해 막대한 손실을 본 후 36세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가족이 소유한 시골 영지인 라사르테에서 조용히 지내며 문학 연구에 전념하다가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