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5 15:23:33

아소카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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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유도.png   온라인 게임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아소카(그라나도 에스파다) 문서를, 스타워즈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아소카 타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마우리아 왕조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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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아소카 왕(Ashoka the Great)
별칭 아육왕(阿育王)
아소카(Ashoka)
부왕 빈두사라왕(頻頭娑羅王)
생몰년도 기원전 273(?) ~ 기원전 232년
재위기간 기원전 265년경~238 또는 기원전 273경~232


1. 개요
1.1. 불경 속의 아쇼카 대왕
2. 정복군주3. 불교에 귀의하다4. 트리비아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6. 같이보기

1. 개요

마우리아 왕조의 왕. 아쇼카 마우리야(Ashoka)왕, 한자로는 아육왕(阿育王)으로 표기하며 프라끄리뜨어의 발음으로는 아소까, 산스크리트어로는 아쇼카라고 한다. 삼라트 차크라바르틴(Samrāṭ Chakravartin), 즉 전륜성왕의 모델이기도 하다. 재위기간은 불분명하지만 기원전 265년경~ 기원전 238년 재위설, 또는 기원전 273년경~기원전 232년 재위설도 있다.

마우리아의 3대 왕으로 흔히 아쇼카 대제, 아쇼카 대왕이라 칭송되는, 인도 역사상 최고의 군주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인물이지만, 젋은 시절엔 2대 왕 빈두사라의 자식 101명 중 한 명으로 왕위 계승 다툼에서 친동생 한 명을 뺀 이복동생 99명(!)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따르던 신하와 궁녀까지 모두 죽인 뒤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이기도 했다. 이후 타국과도 무수한 정복 전쟁을 벌여 엄청난 피를 흘린다. 그리고 후술되어있듯 어느순간 본인 역시 이런 행위에 회의감을 느껴 불교에 귀의한 케이스.

또한 불교에 귀의한 뒤에 불교를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도 전역은 물론 나아가 동남아시아중국, 중앙아시아 나아가 페르시아그리스, 이집트헬레니즘 세계로까지 포교관을 보내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게 했다. 이전까지 인도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지방 종교였던 불교가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세계 종교로 도약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콘스탄티누스 대제와도 닮은 점이 많다. [1]

1.1. 불경 속의 아쇼카 대왕

잡아함경 권23 아육왕경은 아쇼카 대왕이 태어나기 전에 석가모니 부처에 의해 그가 전륜성왕이 되리라는 수기가 이미 있었다고 적고 있다.[2] 아쇼카 왕을 낳은 어머니는 첨파성(詹波城)[3]에 사는 브라만의 딸로, 관상을 보는 사람이 왕후가 되어 두 아들을 낳을 것인데 첫째 아들은 사분(四分)의 전륜왕이 될 것이며, 둘째 아들은 출가하여 도(道)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딸을 빈두사라왕에게 바쳤는데, 궁 안의 모든 여인들이 "왕이 이 여인을 보게 되면 반드시 그 즐거움에 빠져서 우리들은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며 즉시 그 여인을 이발사로 만들어 왕의 머리나 깎게 했으나 이발 도중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왕이 여인을 보고 “네가 갖고 싶은 것이나 마음에 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보아라.”라고 말했고, 여인이 왕과 노니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말하자 빈두사라 왕은 "넌 이발사이고 나는 국왕인데[4] 어떻게 너와 함께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다 여인은 자신이 바라문의 딸이며 이발사가 아니며 궁안 사람들이 자신을 이발사를 하게 시킨 것이라고 밝혔고, 왕은 즉시 여인을 해방시키고 부인으로 맞아, 아쇼카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 아쇼카의 어머니는 비다수가(毘多輸柯)라는 이름의 아들을 한 명 더 낳았다. 하지만 아쇼카는 피부가 거칠고 껄끄러워서 빈두사라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이미 수사마(修私摩)라는 이름의 아들 즉 아쇼카에게는 이복 형이 되는 태자가 있었기에 아쇼카가 왕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빈두사라 왕은 여러 아들 가운데 누가 자신의 뒤를 이어서 왕위를 감당할 수 있는지 점을 쳐보고자 빈가라발사(賓伽羅跋娑)라는 외도(外道)의 관상가에게 왕자의 관상을 보게 했는데, 아쇼카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 빈두사라 왕의 처소로 가보라고 했지만 아쇼카는 "부왕은 저를 귀애하지도 않으시는데 왜 가라고 하세요?"라고 거절하다가 일단 가보기나 하라는 어머니의 말에 빈두사라 왕의 거처인 금전(金殿)으로 가다가 이때 성호(成護)라는 이름의 대신을 만나, 그로부터 좋은 코끼리 한 마리를 얻어 타고 갔다.

그곳에 모인 다른 왕자들은 모두 금은으로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고 있었고, 아쇼카는 땅바닥에 앉아서 어머니가 사람을 시켜 보낸 밥과 타락죽을 질그릇에 담아 먹었다. 아육왕경에 따르면 관상가는 그 자리에서 아쇼카가 왕이 될 상임을 알아차렸지만 그랬다가는 빈두사라왕에게 해코지를 당할지 몰라[5] "저는 지금 인연으로 관상을 보는 것이므로, 이름은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해서 허락을 얻고, 왕자 가운데 좋은 탈 것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앉은 자리가 빼어난 분이라면, 좋은 음식과 좋은 그릇을 가진 분이라면 왕위를 감당할 것이라고 뭉뚱그려 말했다. 이때 모든 왕자들은 좋은 자리에 앉아서 금은으로 된 그릇에 음식을 먹고 있었으므로 빈가라발사의 말을 듣고 제각기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쇼카는 "좋은 탈 것이라면 나는 코끼리를 타고 왔고, 좋은 자리라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대지에 내가 앉아서 대지(흙)에서 나온 음식(밥과 타락죽)을 대지에서 나온 그릇(질그릇)으로 먹고 있는 내가 최고가 아닌가?"라고 해석하며,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자부했다고 한다.꿈보다 해몽

이때 빈두사라 왕이 부용국으로 거느리던 덕차시라(德叉尸羅)[6]라고 하는 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빈두사라 왕은 아쇼카에게 병사를 모아 진압할 것을 명했지만, 병장기와 보급 물자를 충분히 주지 않았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만약 나에게 공덕이 있다면 마땅히 왕이 될 것이고, 병기와 물자도 자연히 나타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순간 땅이 열리더니 병기와 물자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이 물자와 병장기로 덕차시라를 공격했고, 덕차시라의 백성들은 아쇼카를 마중하러 나와서 자신들은 싸울 생각도 반역할 생각도 전혀 없다며 빈두사라 왕이 보낸 대신이 패악질을 부려서 시달리다 못해 일어난 것이라고 변론했다.

한편 파탈리푸트라에서는 빈두사라 왕이 중병을 얻어 숨이 다할 판이었는데, 그는 사인(使人)에게 “맏아들인 수사마에게 나라를 맡기고자 한다.”며 아쇼카를 다시 덕차시라국으로 보내고 수사마를 돌아오라고 하라고 명했는데, 당시 수사마는 덕차시라국과 전쟁 중이었다. 아육왕경은 수사마가 당시 마우리아 왕조의 재상과 알력이 있었다는 언급이 있는데, 동산에서 돌아와 파탈리푸트라 성으로 들어서다가 재상과 마주쳤을 때, 하필 대머리였던 재상의 머리를 장난삼아 손으로 한 대 친 것에 재상은 앙심을 품고 아쇼카를 왕으로 세우고자 신하들과 계획을 짠 다음, 덕차시라 백성들을 선동해 빈두사라 왕에게 다시 반기를 들게 했고, 이에 빈두사라 왕은 수사마를 보내어 그들을 정벌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수사마가 덕차시라에서 고전하는 사이에 아쇼카가 본국으로 돌아왔다.

재상의 사주를 받은 신하들은 노란 생강즙을 아쇼카의 몸에 발라서 병든 모습으로 보이게 해 놓고 또 낙차(落叉)를 끓인 즙을 그릇에 가득 담아서 한곳에 두고는 "아쇼카는 병들었다"고 왕에게 알렸으며, 빈두사라 왕이 아직 임종하지 않았을 때에, 아쇼카를 화려하게 꾸며서 빈두사라 왕의 처소에 이르러 알렸다.
“이분이 왕자이십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이분에게 왕위를 물려주셔야 합니다. 수사마가 돌아온다 해도 저희들은 마땅히 왕위를 아육에게 줄 것입니다.”

빈두사라 왕은 분노했고, 아쇼카가 나서서 말했다.
제가 왕이 되는 것이 만약 여법(如法)하다면[7], 하늘이 지금 즉시 나에게 천관(天冠)을 내려줄 것입니다.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

이 말이 끝나자 모든 하늘이 즉시 그의 머리 위에 천관을 씌워 주었다. 빈두사라 왕은 그것을 보고 화가 더욱 치밀어서, 마침내 뜨거운 피가 입에서 흘러나오더니 바로 목숨이 끊어졌다.

이때 덕차시라에 있던 수사마는 대왕이 죽고 아쇼카가 즉위했다는 소식에 노해서 군사를 돌려 아쇼카를 쳤고, 파탈리푸트라에서 아쇼카는 이복 형의 군대를 상대로 농성에 들어갔다. 아쇼카는 즉위하자 앞서 자신이 관상을 보이러 가는 길에 코끼리를 선물했던 성호라는 대신을 재상으로 삼았는데, 성호는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성의 동쪽 문에다 여러 가지 기계 장치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서 아쇼카의 신상(身像)과 군사들의 상을 만들고,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 다음 연기가 나지 않는 불을 넣고 물건으로 덮은 다음 다시 마른 흙을 그 위에 깔아 놓았다. 이때 수사마가 군사를 거느리고 북문을 공격하려고 하자 성호는 수사마의 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를 공격하지 말고 마땅히 동문을 공격하라. 아쇼카는 그곳에 있다. 너희들이 만약 아쇼카 왕자를 죽이게 되면 나는 알아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수사마는 그의 말을 따라 즉시 군사를 돌려 동문을 공격했는데, 이는 성호의 함정이었다. 성호가 만들어놓은 아쇼카와 그 군사의 상을 보고 수사마는 진군했고, 순간 땅이 꺼지면서 수사마와 그 군사들은 불구덩이에 떨어져 스스로 타 죽었다. 그렇게 아쇼카는 자신의 이복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2. 정복군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uryan_Empire_Map.gif
아소카왕 재위 중 최대 영토(기원전 265년). 이 영토는 훗날 1,800년 후 무굴 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도 역사상 최대 강역으로 기록된다.
인도에서 아소카왕은 최상급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인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최초의 제국이자 거의 최대 판도의 제국[8]이 바로 마우리아 왕조인데 그 왕조의 최고 성군이 또 아소카 왕이기 때문이다.

아소카 왕은 재임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이 막강한 힘을 남아시아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그의 마지막 전투인 칼링가 전투 직전까지 활발한 영토 확장을 펼친 끝에 기원전 265년에 이르러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별다른 기록이 남지 않은 마우리아 왕조 최대강역을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아소카왕이 전국에 세운 비문인 '아소카 칙령' 덕이다. 비문의 분포도가 정확히 마우리아 왕조의 강역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비문 꼭대기에 장식된 사자 조각은 오늘날 인도국장이며, 함께 새겨둔는 수레바퀴 문양은 현대 인도 공화국 국기의 한가운데에도 자리잡았다.
파일:인도 국장.png
아소카 비문의 사자 조각 [9]

3. 불교에 귀의하다

처음 아쇼카 왕이 즉위한 후 행동이 대단히 난폭하여 지옥(뇌옥)을 만들고서 사람들을 살해했다. 둘레의 담장은 높이 솟아 있고 귀퉁이의 망루는 특히 더 높게 했다. 맹렬한 불꽃과 홍로(큰 화로), 날카로운 창과 예리한 칼 등 갖가지 고문 도구를 갖추고 그 모습을 지옥과 같이 차려놓고 흉포한 자들을 모아 옥주(전옥)를 맡겼다. 처음에는 나라 안의 법을 어긴 죄인을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도탄의 고통 속에 처넣었는데, 중에는 감옥을 지나가는 자들, 그 다음에는 아무나 잡아다 살륙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오는 자는 모두 죽게 되므로 그대로 입을 봉하여 밖으로 새어나가는 법도 없었다.
현장 <대당서역기>권8 ‘파탈리푸트라 성’[10]
아쇼카 왕은 바른 법으로 다스리고 교화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은 자기들이 아쇼카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왕을 업신여겨 임금과 신하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 왕도 또한 여러 신하들이 자기를 업신여기는 줄을 알고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저 꽃이나 과일 나무를 베고 거기에 가시나무를 심어라.”
여러 신하들은
“가시나무를 베고 과일 나무를 심는 것은 보았지마는, 꽃이나 과일 나무를 베고 가시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일찍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왕은 세 번이나 명령해 베게 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 때 왕은 대신들에게 성을 내며 날카로운 칼로 5백 명의 대신들을 죽였다.
또 어느 때에 왕은 채녀와 권속들을 데리고 바깥 동산에 나가 놀다가 꽃이 만발한 한 무우수(無憂樹)[11]를 보았다. 왕은 그것을 보고
“이 꽃나무는 나와 이름이 같구나.”
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왕의 형체는 추하고 더러우며 피부는 깔깔하였고, 채녀들은 그런 왕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였으므로 그 무우수를 손으로 꺾어버렸다. 왕은 아침에 깨어 무우수 꽃이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잔뜩 화를 내며 채녀들을 묶어 불로 태워 죽였다. 이렇게 왕이 포악한 짓을 하므로 ‘포악한 아쇼카’라고 불렀다.
대신 성호가 포악한 아쇼카 왕에게 아뢰었다.
“때리거나 죽이거나 하는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고, 응당 스스로는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왕은 즉시 대신 살생을 할 수 있는 자를 찾아 모집하였다. 그때 산속에 촌락이 하나 있었는데, 그 촌락에 사는 옷을 잘 짜는 사람이 자식을 하나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기리가(耆利柯)[12]라고 했는데, 그 아들이야 말로 가히 두려워할 만했다. 어질지 못한 짓을 마구 행하면서 부모에게 항상 욕을 했으며, 집안의 남녀를 모두 두들겨 패고 나아가 모든 중생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해쳤다. 항상 그물을 쳐서 포획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니, 죽이고 해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또 그를 전타기리가(旃陀耆利柯)[13]라고 불렀다. 왕이 악인을 찾다가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사자(使者)가 그에게 말했다.
“왕은 지금 살해(殺害)하는 것으로써 사람을 다스리고자 한다.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대답했다.
“염부제 안에 있는 것을 다 죽여 없애라고 하여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사자는 돌아와 그의 말을 대왕에게 아뢰니 왕은 즉시 명령했다.
“그 사람을 데리고 오라.”
사자가 교령을 받들고 그에게 가서 말했다.
“왕이 너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 사람이 사자에게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부모님을 꼭 만나 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부모에게 아뢰었다.
“아쇼카 대왕은 일체를 살해하는 것으로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는데, 나에게 그 일을 하라고 하여 지금 가고자 합니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자 그는 성을 내면서 곧 부모를 죽이고 사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사자가 말했다.
“너는 어째서 이렇게 늦게 오느냐?”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내가 가는 것을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기에 내가 이미 그들을 죽였습니다.”
뒤에 왕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자 그는 대왕에게 아뢰었다.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뇌옥(牢獄)을 짓고, 옥문(獄門)을 장엄하되 극히 화려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그 감옥을 보는 자들이 사랑하고 즐거워하도록 하십시오.”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청컨대 왕께서는 엄한 교령을 내리시어, 옥에 들어온 자는 아무도 다시 나갈 수 없도록 해 주십시오.”
왕이 말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이때 전타기리가가 계사(鷄寺)[14]에 이르렀는데, 절에 한 비구가 경전[修多羅]을 읽고 있었다. 그 수다라에서는 지옥의 일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즉 펄펄 끓는 가마솥[鑊湯]과 훨훨 타는 화로[鑪炭]와 칼로 만들어진 산[刀山]과 가지와 잎이 모두 칼로 된 나무[劍樹] 등과 같은 갖가지 괴로운 일을 말하면서, 만약 사람이 지옥에 태어나면 죄에 따라서 그렇게 다스린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천사수다라(五天使修多羅)』[15] 중에서 지옥의 일을 설명해 놓은 것과 같이 자세하게 지옥의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전타기리가는 그 말을 듣고는, 그 내용에 따라서 지옥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을 모두 다 만들어 놓았다. #
<잡아함경>권23 ‘아육왕경’

불경 잡아함경의 권23은 아육왕경 즉 아소카 대왕이 주인공으로, 아소카 대왕이 펼친 철권통치와 그가 불교로 귀의하기까지의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인도 역사상 최초로 인도 대륙 전역을 하나의 통치권 아래에 지배했던 아소카 대왕의 이름은 ‘슬픔을 모르는 자’[16]라는 뜻으로, 그 이름에 걸맞게 아소카 왕의 전반생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왕이 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알린 첫 순간은 아소카 자신의 이복 형이자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수시마에 대한 무력 진압과 그의 죽음이 함께 했다. 이후 99명에 달하는 이복 형제를 숙청하고 장장 10여 년에 이르는 통일전쟁을 벌이는 동안 인도 전역은 피로 물들었다. 불교에서 최고의 군주로 꼽는 아소카 왕에 대한 기록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것은 아소카가 실제로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잘 나타내준다[17]

그러나 통일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자, 아쇼카 대왕은 기원전 260년경에 불교로 전향한다.[18] 이후 아소카는 오랫동안 지속된 정복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든것을 후회하고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며 최고의 복지 군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모든 종교는 그들 모두가 자기 통제와 마음의 순수함을 갈망하기 때문에, 도처에 존재해야 한다.”
“나의 영역에서는, 어떤 살아있는 존재도 희생제의에서 제물로 바쳐지거나 도살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 간의 접촉은 좋은 일이다. 하나의 종교는 다른 종교들의 교리를 들어보고 존중해야 한다. 천신들로부터 사랑받는 왕은 모든 종교가 다른 종교의 좋은 교리를 잘 배우는 것을 간절히 원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Edicts_of_Ashoka

칼링가[19]라는 이웃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보병 60만, 기병 10만, 코끼리 부대 9천 마리를 이끌고 쳐들어가 10만이 넘는 인명을 해쳤는데, 폐허가 된 칼링가의 수도를 직접 둘러보다가 자신의 야심으로 무수한 인명이 죽고 고아가 된 아이들 모습과 미쳐버린 사람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20]

칼링카 정복으로 아소카는 인도 최초 통일왕조를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스스로 많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 뒤로 다른 나라 침략을 그만두고 공공사업을 후원하고 병원과 고아원, 양로원을 세워 전쟁으로 떠돌던 이들을 치료하고 돌보게 했다고 한다. 더불어 역사상 처음으로 동물보호 및 학대금지 법령을 제정하였으며, 동물병원을 세우고 인류 최초로 수의사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21] 덕분에 계몽주의 유럽 역사학자들에게부터도 대단한 관심을 받았으며 유럽 학자들은 천 년도 더 된 옛날의 아시아에 이런 훌륭한 업적을 쌓은 군주가 있는 게 놀랍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전쟁에 대한 참회와 반성의 의미로 불교를 열성적으로 신봉하여 불탑을 세우고 승려들을 스리랑카 등 이웃 나라[22]로 보내 불교 선교화에도 힘을 썼다. 아소카 왕의 치세는 대다수의 주변국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는 시기와 겹치니 과장 좀 보태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불교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불교만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를 관대하게 인정했다. 재미있는 것은 마우리아의 1대 왕이자 자신의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자이나교를 믿었으며, 2대 왕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빈두사라는 힌두교를 믿었다는 점.

불교의 불살생 원리를 몸소 실천하고 공평한 정책을 펼쳐 인심을 얻은 그는 수많은 불교 승원과 기념탑을 세우고 불자들을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고, 몸소 석가모니 부처의 유적을 찾아 참배하고[23] 여러 왕비들이 낳은 자녀들이 출가해 승려가 되게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스리랑카를 비롯한 외국 각지로 전법사[24]로 파견한다.[25]

아소카 왕이 포교단을 보낸 아홉 개 지역 가운데. 특기할만 것으로는 (팔리어 경전을 따르면) 다음과 같은 곳이 있다. 오늘날의. 변경과 미얀마 하 지역에 해당하는 수반나부미, 오늘날의 리랑카에 해당하는 탐바판니, 나중에 정복되어 헬레니즘 왕국이 되는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지역인 요나카랏타, 그리고 히말라야 지역 등이다. 수반나부미 지역에 대한 포교 행위는 시기상조였는지 몰라도 마힌다[26]가 이끈 스리랑카 포교단은 그 후 불경을 문자로 기록하는 일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27]

아소카 대왕은 붓다 입멸 뒤에 분배받은 사리를 봉안해 지었던 ‘근본 8탑’ 가운데 일곱 개를 열어서 그 안에 봉안했던 사리를 나누어 전국 각지에 8만 4천 탑을 짓게 한다.[28] 아소카 왕의 8만 4천 탑 건립도 인도 전역에 불교를 유포한다는 점과, 동쪽 교단에서만 존재하던 불탑이 전 인도로 확대되었음을, 아울러 동쪽 교단의 권위 축소를 의미하는데, 세 번째의 경우는 2차 결집을 통해 확인되는 서쪽 교단의 약진과 상호 연관지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붓다 입멸 뒤에 성립되었던 서쪽 교단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사리’라는 붓다의 성물이 이제는 서쪽 교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고 서쪽 교단이 더욱 강력하게 약진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아소카 왕의 자녀로서 출가해 스리랑카 불교의 시원을 이루게 되는 마힌다와 상가미타는 모두 서쪽 교단의 인물이었다.[29] 이러한 아쇼카 대왕의 재위 17년 되던 해에 마가다의 수도 파탈리푸트라(화씨성)에서 마우드갈리푸트라 티쉬야의 주도로 1천 명의 비구가 소집되어 결집을 행했다. 이것이 제3차 결집(화씨성 결집)이다.[30]

백성들 생활개선에도 큰 힘을 쏟아 우물을 파서 물이 부족한 지역을 돕게 했으며, 흉년에 대비하여 곡식을 저장하고 싼 이자로 빈민들의 경제적 뒷받침을 하도록 하여 인도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왕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소카의 비폭력, 비전쟁 정책에 대해 그의 아들들을 포함해 불만을 가지는 세력 역시 많았고 결국 아소카가 죽은 뒤로 이런 비폭력, 비전쟁 법률은 흐지부지되어 사라지게 된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 왕이었다보니, 불교 문화권에서는 불교의 수호신 같은 이미지로 전해지기도 한다. 때문에 한국에도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데, 서기 574년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과 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 불상을 만들다가 실패하자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었으며, 신라 진흥왕은 이 금과 철을 가지고 황룡사의 장육존상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장육존상은 신라삼보 중 하나로, 나중에 고려 태조 왕건도 이 장륙존상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 등 매우 중요한 보물 취급받았던 것 같으며 재료의 양에 대한 꽤 세세한 기록이 있기에 큰 불상들을 만든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그걸 인도에서 보내왔다는 것은 믿기 힘들며, 결정적으로 시간상 아소카왕이 살았던 시대와 거의 800년 차이가 나기 때문에[31] 불교적인 정통성을 위한 픽션이라고 추정된다. 이때 만든 장육존상은 보관되던 절인 황룡사가 사라진 지 오래인 17세기 조선시대까지 홀로 남아있었음이 동경잡기의 기록으로 확인되나 구한말 이전에 사라졌다.

4. 트리비아

양무제 소연의 경우 "동방의 아육왕"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치세가 6세기 전반(549년 졸)이다.

아소카왕에 대한 전승 중 지금까지도 흥미롭게 회자되는 것 중 하나가 비마나라는 비행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물건은 상기된 전쟁에서 매우 요긴하게 써먹었는데, 설명을 보면 여기 탑재된 병기의 위력이 거의 핵폭탄급.(...) 평소에는 쓰지 않다가 중요한 시점에서 뻥뻥 터뜨려줬다는데, 대체 어떤 무기가 장착되었는지 적국 영토를 그야말로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이 가공할 무기가 한창 쓰이고 나서야 아소카 왕은 직접 적국을 들러 그 진상을 파악했는데, 당연히 그 잔혹함에 너무 놀라 이후 비마나를 전투병기에서 정찰기로 그 역할을 축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인본주의 불교 육성 정책이었다고... 흠좀무비마나에 대한 전승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진출에 관한 일화까지 이어져[32] 현재까지도 무수한 소설가, 과학자들에게 떡밥을 던지고 있다.

동생이 죄를 저질러 사형시켰다는 소리도 있다는데 확인바람.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1997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라젠카에서 이름이 언급된 바 있다. 역사대로 젋은 시절에는 전쟁광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나 어느 순간 반전론을 내세웠고, 세계 평화의 유지를 위해 비밀조직을 만들었다는데, 그 조직의 문양이 주인공의 부메랑형 무기에 새겨진 문양과 비슷하다는 추측이 극중 인물을 통해 나온 것. 그 이후 이 떡밥은 묻힌다(...). 이 무기는 주인공 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해서 주인공의 출신을 암시하는 떡밥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 2001년 인도에서 최고 인기스타인 샤룩 칸 주연으로 무려 3시간에 달하는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역시 위명이 있어서인지 흥행에 성공했다.
  • 에로게 영웅전희에선 여성화되어 등장했다. 어째서인지 가슴을 그냥 노출시키고 있다.
  • 블레이크와 모티머 시리즈 중 '6번째 대륙의 석관' 편에서는 현신하여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을 추종세력으로 거느리는 것으로 나온다.
  • 문명 4에서는 간디와 함께 인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 임페라토르: 롬에서는 빈두사라의 미성년 아들로 등장한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Holy Fury DLC가 있을 경우, 인도에서 불교/힌두교/자이나교를 믿는 영주일 때 정해진 조건을 맞추면 시작되는 연퀘를 완료하면 플레이어가 아소카의 현신으로 인정받으며 전용 혈통을 받는다.

6. 같이보기



[1] 다만 그리스도교 학자인 오강남은 아쇼카 대왕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 모두 정치적 지도자인 만큼 종교의 교리보다 정치적 이용 가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개인적인 신앙심이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확신보다도 오로지 자기의 통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려고 한 정치적 의도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아쇼카 대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강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평하였다. #[2] 물론 아쇼카 대왕과 불교와의 인연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윤문일 가능성이 높다.[3] 중인도 폐사리국(吠舍離國)의 남쪽에 있던 지명이다. 갠지스강의 남쪽 강변에 첨파국이 있었는데, 섬부주의 여러 성들은 이 나라의 도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현재 벵갈 지방의 바가르푸르가 이 나라의 도읍지로 추정된다.[4]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다른 계급끼리의 통혼은 허용되지 않는다.[5] 나중에 아쇼카의 어머니에게는 따로 가서 말했는데, 아쇼카의 어머니는 나중에라도 왕이 다시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으니 피했다가 아쇼카가 왕이 되거든 돌아오라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6] 타크샤쉴라의 음역으로, 석실(石室)이라 번역한다. 고대 북인도에 자리했던 나라 이름이다. 왕사성의 북쪽, 건타라국의 동남쪽, 가습미라국의 서남쪽에 있었다. 고대인도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한때 대승불교가 성행했다. 일찍이 건타라국의 속지(屬地)였으나, 현장이 서역에 갔을 당시에는 가습미라국(카슈미르)에 예속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인도 펀자브(punjab) 지방의 북쪽, 파키스탄의 영토인 라왈핀디(rawalpindi) 지역에 해당한다.[7] 적법하다면[8] 서로는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이란의 일부, 동으로는 아삼과 미소레, 남으로는 데칸 지방을 장악하고 스리랑카에서도 조공을 받았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인도 제국 강역이 더 크긴 하지만, 여긴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여서..[9] 훗날 오늘날 인도의 국장이 된다.[10] 현장에 따르면 파탈리푸트라의 옛 왕궁 북쪽에 높이 수십 척 되는 돌기둥이 있었는데 이곳이 아쇼카 왕이 지옥을 만든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11] 마야 부인이 석가모니 부처를 낳은 룸비니 정원의 그 나무다.[12] 산(山)이라 한역한다.[13] 가외산(可畏山, 무서운 산)이라 한역한다[14] 범어 굴굴타아람마(Kukkutaarama)를 번역한 것으로, 계원(鷄園)이라고도 번역한다, 계작사(鷄雀寺), 계두말사(鷄頭末寺)라고도 한다. 인도 마갈타국에 있던 절 이름이며, 아쇼카왕(BC 3세기)이 창건하였으며, 이름난 스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삼국유사에 천축 즉 인도 사람들이 신라인을 가리켜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닭을 숭상하는 나라라는 뜻이 담겨 있는 의미였다고 한다.[15] 혜간(慧簡)의 저작인 『불설염라왕오천사자경(佛說閻羅王五天使者經)』의 약칭으로, 악행을 지은 자가 지옥에 떨어져 겪게 되는 일들을 설하고 있다.[16] 정복 전쟁 시절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그의 성품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17] 놀랍게도 그리스도교에서 대제로 추앙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역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군주라는 이면에 의외의 잔인함과 포악함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아소카 대왕과 닮아 있다.[18] 그 전에는 아버지 빈두사라왕처럼 아지비카교도였다.[19] 오늘날 오디샤 주 해안지대.[20] 강에 물이 아니라 피가 흘렀으며, 적국 사람들의 피가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였다고. 흠좀무[21] 여담으로 아소카 이후 최초의 근대적 동물보호법을 만든 사람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 유대인은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였던거냐[22] 헬레니즘 제국의 잔당도 포함.[23] 이는 당대의 고승 우바굽다의 인도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때 아쇼카 대왕은 방문 지역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기념 석주를 세워서 석가모니 부처의 성소를 기렸다. 이때 세워진 석주들을 ‘아소카 석주’라고 부르며, 훗날 현장이 인도를 찾았을 때 대당서역기와 함께 붓다의 유적지를 찾고 확정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9쪽[24] 자현은 ‘법대관’으로 지칭해 불렀다. 불교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직책으로 당시 인도와 국교를 맺고 있었던 모든 국가에 파견되었고, 그 중에는 그리스와 로마도 있었다.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9쪽[25]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26] 아소카의 아들 혹은 친척[27] 팔리어 경전은 스리랑카에서 기록되었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21쪽[28] ‘8만 4천’이라는 숫자는 실제로 8만 4천 탑을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많다’ ‘완전하다’라는 의미로 인도 및 불교에서 흔히 사용되는 숫자로, 그리스도교에서 ‘7’을 완전한 숫자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29]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9쪽[30]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31] 기록 자체도 그 배가 메리 셀러스트호 사건마냥 빈 배가 1300년 이상을 바다에서 떠돌아 다녔다고 주장한다. 이러면 또 500년이 안맞는데#[32]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에서 잠시 머물다가 날아갔다고 하며, 대왕은 특유의 언변으로 스스로를 '하늘도 인정한 남자'라고 칭하며 도리어 사기를 고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