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21:30:54

아르메니아(병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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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전쟁2.2. 독소전쟁 발발 후2.3. 침몰
3. 전쟁 범죄4. 번외: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와의 공통점

1. 개요

파일:2B827A98-E009-4DCE-8CFA-6258A9A8491D.jpg
Теплоход «Армения»
독소전쟁 이전의 아르메니아호.

소련병원선. 독소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1년 11월 7일, 독일군 폭격기에 의해 공격당해 무려 5,00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내고 격침당했다. 이름의 유래는 당연히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2. 상세

2.1. 전쟁

아르메니아는 1928년, 레닌그라드에서 건조되었으며, 독소전쟁 발발 전까지는 화객선이었다. 일반적인 임무는 주로 세바스토폴이나 오데사 등의 흑해 항구를 오가면서 승객과 화물을 실어나르는 일이었다. 승객 수용원은 상당히 많았는데, 근거리 항해 시에는 최대 4,500명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아르메니아에는 자매함 3척이 있었는데 각각의 이름은 압하지야(Абхазия), 아자리야(Аджария), 우크라이나(Украина)였다.

2.2. 독소전쟁 발발 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르메니아는 소련 해군에 병원선으로 징집되었다. 이후 전쟁 기간동안 각종 부상병들과 민간인들을 실어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이런 부분을 놓고 보면 나치 독일의 여객선이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와도 행적이 꽤나 비슷하다.

2.3. 침몰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colcolor=#fff>
파일:B6D2BABE-03FF-4440-9F6F-139EC81DB42B.jpg
<colbgcolor=#bc002d> 발생일 1941년 11월 7일 아침
발생 위치 흑해[1]
유형 뇌격, 격침
원인 피난민과 상이군인 운송 중 독일군 폭격기에 의해 뇌격, 격침
탑승인원 5,000명-7,000명
인명피해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생존자 8명을 제외한 승선인원 전원 사망
실종 미상
구조 8명
선종 여객선, 화객선
[clearfix]

이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제11군이 세바스토폴과 크림 반도 전체를 포위하자,[2] 당시 육로는 이미 독일군이 차단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피난은 오직 해상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따라서 세바스토폴에 있던 아르메니아 역시 1941년 11월 6일 밤, 수많은 피난민과 상이군인들을 싣고 피난 준비를 하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상당한 과적을 해 버렸는데, 근거리 항해 시, 그러니까 연료를 조금만 채울 때도 4,500명이 한계였던 배에 무려 5,000명이 넘는 인원을 태운 것이다.[3][4]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막장이었는데, 문제는 독소전쟁 초기, 그것도 흑해에서는 제공권이 완전히 독일과 추축국 공군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흑해에서는 수백 척의 소련 상선이 격침당하고 있었고 군함도 무려 12척이나 격침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중무장한 군함도 아닌 일개 여객선이, 그것도 홀로 항구를 나서면 매우 높은 확률로 공격받았기 때문에 아르메니아 호는 1941년 11월 6일 밤 야음을 틈타 세바스토폴을 떠났다. 하지만 곧 상부에서 세바스토폴과 인접한 얄타에서 추가적으로 피난민들을 승선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아르메니아호의 선장 블라디미르 플라우솁스키는 하는 수 없이 얄타로 배를 몰았다. 그리고 얄타에 도착하자 피난민들과 상이군인들어 배에 더 올라탔고 아르메니아호는 말 그대로 갑판까지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게 된다.

한편 선장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얄타에서 밤이 지나가기 전에 빨리 출항하려고 했지만 호위 전력을 기다리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또 시간을 지체해야만 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결국 11월 7일 새벽,[5] 고속정 2대와 전투기 2기의 호위를 받으며 아르메니아 호는 마침내 얄타 항구를 나섰다.

하지만 출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1년 11월 7일 아침 11시 30분 경, 불행하게도 아르메니아 호는 그곳을 지나던 KG 28 소속 He 111 폭격기 한 기를 만났다. 아르메니아 호를 발견한 He 111은 탑재하고 있던 두 발의 어뢰를 아르메니아를 향해 투하했고, 다행히도 한 발은 빗나갔으나 나머지 한 발이 아르메니아 호에 그대로 직격하고 말았다. 어뢰에 맞은 아르메니아 호는 순식간에 두동강 났고 고작 4분만에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수장되어 버렸고, 생존자는 고작 8명이었다.

아르메니아 호의 침몰로 인해 무려 5,000여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 이 사망자 수는 10,0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6,500-7,000명의 사망자를 낸 고야 호[6]에 이어 전세계 민간 해양사고 사망자 순위 3위에 올라 있다. 이는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때보다도 약 4배~5배나 다 많은 사망자 숫자이다.

또한 전술한 아르메니아의 자매함 3척 역시 모조리 독소전쟁 도중 격침당했다.

이후 2014년, 호주의 GeoResonance라는 회사가 아르메니아호의 잔해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2020년, 러시아 측에서 아르메니아호의 잔해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잔해의 일부가 세바스토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바스토폴에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이 거세지자 모스크바의 대조국전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3. 전쟁 범죄

이 당시 독일이 저질렀던 병원선 공격 행위는 제네바 협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명백한 전쟁 범죄다.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격침당시 아르메니아는 적십자 표시도 새겨 넣었고, 무기를 수송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이전에 병력을 수송했던 전력이 있었고, 또한 침몰 당시 다른 군함에게 호위를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병원선이 아닌 일반 수송선 격침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제네바 협약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부터 비롯된 착각이다. 제내바의 해상에 있어서의 군대 부상자, 조난자 상태 개선에 대한 조항에서는 보호 대상자로 뽑은 군대 부상자의 대상으로 '공공연하게 무기를 소지한자'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또한 병원선에 대해 모든 국가의 군함은 공격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명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의 병력과 무기 수송 전력을 이유로 국제법에 따라 병원선임을 표시한 아르메니아의 보호 의무를 박탈시킬 수 없다. 또한 군함에 의해 수송에 관한 것 역시 반박이 가능한데 병원선 관련 교전 수칙에는 최대한 교전에 있어서 병원실을 비롯한 부상자와 조난자 수용시설은 피할 것이라고 명시가 되어 있다. 즉 독일군이 정당한 교전을 하였다면 적십자 기를 내건 병원선을 공격하는게 아닌 호위함들을 공격해야 했다. 아르메니아의 공격을 옹호하는 자들의 논리가 합당하다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사건의 소련 공격 역시 정당한 공격이 된다.

4. 번외: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와의 공통점

어디까지나 번외이지만,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망자를 내고 침몰한 배인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와의 공통점이 꽤나 있다. 그리고 브리타닉호와도 공통점이 존재한다.
  • 둘 다 병원선으로 사용되었다.[7]
  • 둘 다 전쟁 전에는 일반적인 여객선으로 사용되었다.
  • 두 배 모두 탈출 작전에 동원되었다가 격침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동프로이센 민간인 구출작전에, 아르메니아는 세바스토폴에서 피난민들을 실어나르는 도중 변을 당했다.
  • 두 배 모두 어뢰에 의해 격침당함.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잠수함에 의해, 아르메니아는 뇌격기에 의해 격침당했다.
  • 모두 국가가 절체절명적인 상황에서 격침당했기 때문에 자세한 승선 정보가 없다.
  • 두 배 모두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해안선을 따라 항해했더라면, 또는 기뢰부설함 한 척의 지원을 위해 켜 놓은 항해등을 꺼 놨더라면 격침을 피할 수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 역시 빈약한 호위 전력을 기다리는 대신 함장의 원 계획대로 전날 밤에 출발했더라면 참사를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두 배 모두 격침당하면서 어마어마한 사망자를 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최대 1만 명으로 세계 1위, 아르메니아 호는 5,000-7,000명으로 세계 3위이다.

[1] 얄타에서 약40km 정도 떨어진 곳[2] 당시 세바스토폴 주민들은 세바스토폴이 금방 함락될 것으로 예상하고 너도나도 피난길에 올랐다. 정작 세바스토폴은 그 후 9개월이나 더 포위를 버텨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것이다.[3] 자세한 승선인원은 아직까지도 불명이다. 전쟁통에 승선 관리 시스템은 개판이었고 워낙 많은 피난민들이 죽기살기로 승선했기 때문.[4] 게다가 승선자 5,000명도 가장 적게 잡은 거고, 자료에 따라서는 6,000명, 많으면 7,000명까지 보기도 한다. 게다가 이후 얄타에서 사람들이 더 탔던 관계로 실제 사망자는 이것보다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5] 이 날은 하필이면 러시아 혁명 24주년 기념일이었다.[6] 노르웨이의 민간선이었다가 나치 독일에게 징집되어 사용되었다. 상술된 빌헬름 구스틀로프처럼, 1945년 한니발 작전 도중 소련 해군 잠수함 L-3에 의해 발트해에서 격침당했다.[7] 즉 양측 모두 공격을 받아서는 안되는 배였다. 하지만 독소전쟁 자체가 인륜은 개나 줘버린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