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시어도어 팔레올로구스 theodore paleologus | |
| 세례일 | 1560년 |
| 우르비노 공국 페사로 | |
| 사망 | 1636년 1월 21일 (향년 74~75세) |
| 잉글랜드 왕국 콘월 | |
| 국적 | |
| 직업 | 암살자, 가정교사 |
| 가문 | 팔레올로고스 왕조 |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가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일원이 이탈리아로 망명해 세운 가문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이탈리아에서 암살자로 활동하다가 잉글랜드 왕국에 정착해 영국 귀족의 하인이 된 특이한 인물이다.2. 생애
시어도어 팔레올로구스(theodore paleologus; 이탈리아어 theodoro paleologo)는 이탈리아 북중부에 있는 우르비노 공국의 페사로 지역에서 1560년 경에 태어났다. 이들은 자신이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의 형제이자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였던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라는 인물로 이어지는 후손이라 주장했는데, 이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란 인물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아버지는 카밀리오 팔레올로고스였고, 어머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시어도어는 아버지인 카밀리오, 그리고 아버지의 형제들인 스키피오네 팔레올로고스, 레오니다스 팔레올로고스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삼촌들은 1578년 레오네 리무시아티라는 인물을 살해하려한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는데, 이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갱단처럼 행동했으며, 실제로 사람을 죽였다고 암시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시어도어는 당시 미성년자였던 이유로 처형당하지 않고 우르비노 공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2.1. 루카 공화국에서의 암살 의뢰
시어도어는 1597년까지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행적이 확실하지 않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네덜란드 독립전쟁 시기에 스페인에 맞서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였다고 한다.아무튼, 그는 1578년 이후 어느 시점에 우르비노 공국에서의 추방이 철회되어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후에도 암살자로 활동한것으로 보인다.시어도어는 루카 공화국의 판사였던 프란체스코 안드레오티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게된다.
"당신이 나를 기억해주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기쁩니다. 저 또한 당신을 기억하며, 이번 기회를 빌어 제 사적 업무에 당신을 고용하고자 합니다. 이 편지를 전달하는 자로부터 제가 원하는 바를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그에게 전적으로 신뢰를 보여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저 또한 보답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일에 대한 보통의 보수뿐만 아니라 연금을 드릴 생각입니다."
프란체스코는 처음에 마르칸토니오 프란체오티라는 암살자를 고용해 안텔미넬리를 죽이려 했다. 프란체오티는 선불로 200파운드를 받았지만, 안텔미넬리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고 루카 당국에 “더 유능한 살인자”를 고용하라고 제안했다. 그는 팔레올로고스를 추천했으며, 이에 따라 시어도어 팔레올로고스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2.2. 안텔미넬리를 찾아 영국으로
알레산드로 안텔미넬리는 25세의 루카 공화국 시민이였으나, 그의 가족들이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다하며 알레산드로 또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으로 도망쳐 암베르지오 살베티란 가명을 쓰며 피렌체 출신이라고 속여 살고 있었다. 이를 쫓아 시어도어 팔레올로고스는 잉글랜드 왕국으로 들어왔으나, 결국엔 찾지 못했고 시어도어가 죽고 20년이 지난 1657년에 자연사 했다.안텔미넬리를 찾는데 실패한 팔레올로고스는 영국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헨리 8세 시대에 영국에서 가장 잔혹하고 난폭하기로 악명 높았던 귀족인 제2대 링컨 백작 헨리 클린턴 밑으로 들어갔는데
헨리 클린턴은 그에게 말 관리를 하는 중책을 맡겼다. 이는 시어도어의 전과를 알고 있었기에 맡긴것으로 보이며, 시어도어 또한 청부살인업자보다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싶었기에 수락한것으로 추정된다. 링컨 백작은 법적 문제로 종종 런던으로 불려갔는데 이때 시어도어는 그를 호위하고 보좌한것으로 보인다.
링컨 백작의 영지인 테터셜에 머무르는 동안, 시어도어는 메리 볼스를 만났다. 메리는 1575년경 서퍽의 해들리에서 태어났는데, 모종의 이유로 링컨 영지인 테터셜에 온것으로 보인다. 메리불스는 1599년 9월에 첫 아이를 임신한 이후, 1600년 5월 1일 시어도어 팔레올로고스와 결혼하게 된다. 아이를 임신했음 이렇게 늦게 결혼한 이유는, 당시 시어도어가 런던으로 가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혼식의 코팅엄의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첫 아이는 6월 12일 세례를 받았지만, 곧 죽고 말았다.
이후에도 시어도어와 메리 사이에선 여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세례를 받은 아이는 셋 뿐이었다.
1600년 5월 14일에 헨리 클린턴의 아내 엘리자베스 모리슨이 테터셜 성에 갇히자, 헨리 클린턴의 의붓아들인 프랜시스 노리스가 로버트 세실에게 개입해주길 바라는 편지를 썼다.
그는 그녀를 죄수처럼 가두어 두고, 그녀가 어떤 친구에게도 글을 쓰거나 소식을 듣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는 그녀의 감시인으로 이탈리아인을 세웠는데, 이 사람은 이탈리아와 저지대(네덜란드)에서 여러 건의 살인을 저지르고 잉글랜드로 도망친 자이다. 나는 맹세하건대, 그녀가 그에게서 목이 잘릴까 매 순간 정당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그녀의 감시인으로 언급된 이탈리아인이 시어도어 팔레올로고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616년 9월 29일 제2대 링컨 백작이 사망한 이후로는 3년간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이후 프랜시스 노리스에 의해 추방된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잠깐동안 메리 불스의 친척인 불스 가문에서 아내, 자식들과 함께 살았으리라 추정된다.
2.3. 이후의 생활과 죽음
이후 1619년에는 플리머스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1619년 6월 15일, 그의 아들인 퍼디낸드 팔레올로고스가 앤드루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었다. 시어도어는 그곳에서 집주인으로 살고 있었고, 당시 반 페니의 돈을 받았다. 이후, 예순 중반이 된 시어도어는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에게 봉사할것을 제안받았다. 당시 빌리어스는 부패와 무능으로 영국에서 가장 증오받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이후 곧 빌리어즈가 암살당하며 흐지부지되었다.곧이어 콘월의 부유한 지주, 니콜라스 로어가 시어도어를 랜덜프에 있는 그의 집으로 초대했는데, 이는 시어도어가 본디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가인 팔레올로고스 혈통인것이 크게 작용했던것으로 보인다. 로어의 집인 클리프턴 홀은 두가족이 살수 있도록 나누어져있었기에, 시어도어의 가족들도 함께 이주했다. 이후 그는 그의 집에서 역사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학자의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된다.
시어도어는 가족과 함께 클리프턴 홀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아내 메리 볼스는 1631년 11월 24일 플리머스에서 묻혔으며, 사망 당시 56세였다. 이후, 1636년 1월 21일에 시어도어 또한 세상을 떠났다.
시어도어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져있다.
여기 이탈리아 페사로 출신 시어도어 팔레올로고스의 시신이 누워 있다. 그는 그리스의 마지막 기독교 황제들의 황실 혈통에서 내려왔으며, 카밀리오의 아들이자, 프로스페르의 아들이자, 또 다른 테오도로의 아들이자, 존의 아들이며, 콘스탄티누스 팔레올로구스(그 이름의 여덟 번째이자, 콘스탄티노플에서 투르크인들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제위를 지킨 왕조의 마지막 황제)의 차남 토마스의 아들이다. 그는 서퍽 해들리의 신사 윌리엄 볼스의 딸 메리와 혼인하여 다섯 자녀, 테오도르, 존, 페르디난도, 마리아, 도로시를 두었으며, 1636년 1월 21일 클리프턴에서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