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차우급 어뢰정 (Schichau-class Torpedo Boat)
1. 제원
함종 : 원양 어뢰정건조 업체 : Seearsenal Pola / Schichau-Werke / Stabilimento Tecnico Triestino
운용 국가 : 오스트리아-헝가리 / 이탈리아 / 세르비아 / 크로아티아 / 슬로베니아
후속 함급 : 코브라급 어뢰정(Cobra class Torpedo Boat)
건조 시기 : 1885년~1891년
운용 기간 : 1886년~1944년
준공 : 22척
만재배수량 : 88~90톤
전장 / 함폭 / 흘수선 : 39.88 m / 4.8 m / 1.9 m
승무원 : 16~18명
동력 : 관류식 보일러 1기 (950~1,000지시마력)
추진 : 3단 팽창 증기 기관 1기 / 1축 스크류 추진
최대속도 : 19노트(35 km/h)
항속거리 : 10노트 순항시 1,200해리(2,200 km)
무장 : 37mm 호치키스 함포 2문 / 356mm 어뢰 발사관 2문
2. 건조 배경
1880년대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은 프랑스 해군에서 막 부상하고 있던 청년학파(Jeune École)의 비대칭 전력 이론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영향을 받아들였다. 청년학파 장교들의 주장을 압축시키면, 강력한 무장을 갖춘 작고 민첩한 함정을 활용하여 적의 대형 주력함을 격파하는 것이 골짜였다. 이 전략은 개혁을 주도했던 해군 사령관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Vizeadmiral Wilhelm von Tegetthoff : 1827~1871) 제독의 사망 이후 해군이 예산난에 빠지자 더욱 강한 유혹을 받게 된다. 그의 후임자인 프리드리히 폰 푀크(Friedrich von Pöck : 1825~1884) 제독의 신형 장갑함 예산 증액 요청은 1870년대와 1880년대 초에 걸쳐 정부에서 거듭 거부당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2,000 km가 넘는 긴 해안선을 방어하기 위해 비용이 덜 드는 수단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청년학파의 이론을 뒷받침한 혁신 중 하나는 어뢰라는 신무기의 등장이었다. 186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4년 전 퇴역 해군 대령 요한 루피스(Johann Luppis : 1813~1875)가 시제품을 발명하고 로버트 화이트헤드(Robert Whitehead : 1823~1905)가 이끄는 피우메의 해군 엔지니어링 회사인 스타빌리멘토 테크니코 디 피우메(Stabilimento Tecnico di Fiume)에서 개량, 생산한 신무기로 함선을 무장한 최초의 국가가 된다. 이 신병기를 탑재하기 위해 개발된 함선이 바로 어뢰정으로, 순양함과 연계 운용을 목적으로 하는 작고 빠른 함정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청년학파 이론을 채택하고 어뢰정을 위한 공해 및 연안 전술을 개발하면서, 푀크 제독 치하에서 수십 척의 어뢰정 건조가 시작되었고 그의 후임자인 막시밀리안 다블렙스키 폰 스테르넥(Maximilian Daublebsky von Sterneck : 1829~1897) 제독 치하에서 쉬차우급의 건조가 시작된다. 바로 어뢰정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3. 초기 어뢰정의 특징
쉬차우급 어뢰정은 평갑판(flush-deck) 구조에 높다랗게 솟은 함교 바로 앞에 짧은 계단형 포어마스트(foremast)가 세워졌다. 갈퀴 모양의 메인 마스트는 선체 중앙에 솟아있으며, 론치을 올리고 내리는 데릭이 설치되어 있었다. 승무원은 16명에서 18명의 장교와 수병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쉬차우급은 3단 팽창식 증기 기관 1기를 동력원으로 삼고 함교 바로 뒤에 세워진 연돌을 통해 기관차 보일러에서 배출하는 검은 매연을 내보냈다. 이 어뢰정은 하나의 기관으로 하나의 스크류 프로펠러를 구동시켜 추진되는 직관적인 구조였지만, 석탄을 태우는 탓에 기관실에는 화부가 항시 대기하면서 작업해줘야만 했다.쉬차우급에 실린 권관 보일러는 구식이었기 때문에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신형 야로우식(Yarrow Type) 수관 보일러 2기로 교체되었고, 이때 두 번째 연돌이 추가되었다. 증기 기관은 950~1,000지시마력(ihp)으로 정격 출력이 설정되었으며, 최대속도는 19노트(35 km/h)였다. 이 함정은 10노트(19 km/h) 순항속도로 1,200해리(2,200 km)를 항해할 수 있어 당시 기준으로는 원양 어뢰정(Sea-Going Torpedo Boat)으로 불리기에 충분한 항속거리를 보였다.
이들은 슈코다(Škoda)가 프랑스로부터 생산면허를 받아 만들어낸 37mm(1.5인치) L/23 호치키스(Hotchkiss) 함포 2문으로 무장하여 450g(16온스) 무게의 포탄을 3,000 m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또한 356mm(14인치) 어뢰 발사관 2문을 갖춰 여기에는 45 kg 탄두를 내장하고 24노트(44 km/h) 스피드로 600 m까지 나아가는 C형 어뢰(Type C torpedo)를 발사할 수 있었다. 초기형 어뢰 발사관 2문은 모두 함수와 선수루 위에 설치되었지만, 후기형에 와서는 함수와 함미에 1문씩 회전 마온트 위에 장착하도록 개량되었다. 쉬차우급은 취역할 당시만 해도 1급 어뢰정으로 분류되었다.
4. 운용 개시
1893년 11월 7일, 22번함(SM Tb 22)인 크뢰헤(SMS Krähe)는 아드리아해의 흐바르 해협(Hvar Channel)에서 어뢰순양함 루신(SMS Lussin)과 조우해 교전을 벌였으나 양쪽 모두 결정타는 입히지 못했다.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쉬차우급은 대개장에 들어가 27번, 29번, 30번, 33~38번, 40번함은 1911년에서 1913년 사이에 소해정(minesweeper)으로 개조된다. 이렇게 개조된 쉬차우급은 더 이상 어뢰를 장비하지 않았지만, 함포는 그대로 유지했다. 28번함은 1911년에 폐기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에 이관되어 텐더 28(Tender 28)로 운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는 이 어뢰정들은 일선에서 운용되지 않고 있었으나 전쟁의 불길은 그들이 쉬게 내버려두지 않았다.5. 1차 대전에서
1914년 8월, 쉬차우급 어뢰정과 소해정들은 아드리아해 연안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주요 항구에 주둔하는 각 지역 방위군에 분산 배치된다. 21, 24, 32, 39번함은 아드리아해 북부의 이스트라 반도 남단 폴라(Pola)에서 제7어뢰정 사단의 제13어뢰정전대를 구성했고, 27, 30, 33, 34, 37, 40번함은 기뢰 제거함대에 배속되었다. 20, 23, 26번함은 이스트라 반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제15, 16 어뢰정 전대의 일부로 주둔했으며 19, 22, 25, 31번함은 중부 달마티아 해안의 시베니크(Šibenik)에서, 그리고 29번과 35번함을 포함한 소해전대와 함께 제10, 제20어뢰정 전대를 구성했다. 남부 달마티아 해안의 코토르 만(Bay of Kotor)에서는 36번과 38번함이 소해부대의 일원이었다.1914년 8월 23일, 26번함은 폴라 앞바다에서 강한 강풍에 밀려 남쪽 기뢰밭을 통과하는 안전한 항로에서 이탈하다가 기뢰에 부딪혔다. 함장 요제프 코닉(Josef Konic) 대위와 승무원 6명은 구조되었지만, 장교 1명과 승무원 10명은 실종되었다. 프랑스 해군의 플루비오즈급(Pluviôse-class) 잠수함 퀴노(Cugnot Q76)는 카타로 만(Cattaro Bay) 외곽의 기뢰밭 사이를 뚫고 들어와 11월 29일에는 만에 진입했지만, 카이만급(Kaiman-class) 어뢰정 57 T에 의해 발견되어 경보가 발령되었다. 후사르급(Huszár-class) 구축함 울란(SMS Ulan)과 어뢰포함 블리츠(SMS Blitz)는 36번함과 함께 장갑함 크론프린츠 에르처초크 루돌프(SMS Kronprinz Erzherzog Rudolf)를 공격하려던 잠수함을 추격했다. 퀴노는 수중 장애물에 부딪혀 공격을 포기했고, 57 T는 어뢰를 발사했지만 수심이 너무 낮게 설정되어 빗나갔다. 프랑스 잠수함은 천신만고 끝에 만에서 탈출해 기뢰 사이를 헤쳐나가 사지를 벗어났다.
12월 20일, 프랑스의 브뤼메흐급(Brumaire-class) 잠수함 퀴리(Curie Q87)는 폴라 항구에 진입하여 대잠 그물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4시간 동안 탈출을 시도했지만 성과 없이 부상한 퀴리는 24번과 39번함, 카이만급 어뢰정 63 T, 후사르급 구축함 투룰(SMS Turul), 구형 구축함 사텔리트(SMS Satellit), 제1기뢰사령부 소속의 소형 보조함들, 그리고 해안포대까지 합세한 총공격을 받았다. 결국 퀴리는 포격을 뒤집어쓰고 침몰했지만, 승무원은 1명 전사 / 1명 중상으로 나머지는 구조되었다. 퀴리는 이후 인양되어 SM U-14로 재취역하게 된다.
쉬차우급 22번함은 1916년 3월 3일 세베니코 앞바다에서 좌초되어 침좌했지만, 그해 말 건져서 수리되었다. 남아 있던 모든 어뢰정은 1917년에 소해정으로 개조되었다. 이 어뢰정들은 어뢰 발사관을 남겨뒀지만 19번과 21~24번함만 어뢰를 싣고 있었다. 1917년 11월 16일, 23, 27, 30번함은 소해부대의 일원으로 베네치아 인근 피아베 강(Piave) 하구 인근 코르텔라초(Cortellazzo)에 있는 이탈리아 해안포대에 대한 포격을 지원했고 이때 3대의 비행정도 합세했다. 그러나 구식이지만 날랜 쉬차우급 어뢰정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7척의 구축함과 3척의 잠수함의 호위를 받으며 3척의 MAS로 구성된 이탈리아 함대가 나타나자 포격 부대는 철수했다. 12월 19일, 대규모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함대가 코르텔라초에서 이탈리아 해안포대와 다시 교전을 벌였고, 이때 20, 23, 27, 30, 32, 34번함의 지원을 받았다. 포격 부대의 함선들은 임무 수행 중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18년 4월 5일, 후사르급 구축함 우스코케(SMS Uskoke)와 26번함은 이탈리아 중부 해안의 안코나(Ancona)에 상륙부대를 배치했지만, 포로로 잡혔다. 9월 5일, 19번과 38번함은 알바니아 해안에서 떨어진 드린 만(Gulf of Drin)에서 다른 어뢰정을 지원하던 중 이탈리아 함대와 딱 마주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는 교전을 중단하고 이탈했다.
6. 전간기
20척의 함정이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았다. 오-헝 제국을 끝장낸 생제르맹 조약(Treaty of Saint-Germain-en-Laye)에 따라 16척이 이탈리아에 전리품으로 할당되었고, 5척은 항만을 오가는 세관함으로 이용되었지만 나머지는 폐기되었다. 세관함 또한 1925년에는 폐기되었다. 나머지 4척은 신생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훗날의 유고슬라비아)에 할당되었다. 유고슬라비아군은 21호, 36호, 38호, 19호함을 각각 D1~D4 소해정으로 운용했다. 유고슬라비아 해군에서는 함포를 제거하고 기관총 2정을 장착했다. 결과적으로 D1과 D2만 취역했고, D3과 D4는 코토르 만의 티밧 병기창(Tivat Arsenal)에 정박한 채로 예비부품 공급원으로 활용되다가 1925년과 1927년에 폐기되었다. D1은 1929년 6월 5일 파손될 때까지 쿰보르(Kumbor)와 코토르 만의 다른 지역에서 경비함과 소해정으로 쓰였다. D2는 처음에는 코토르 만을 기지로 삼고 소해 임무를 하다가 1924년부터 1941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최남단 항구인 두브로브닉(Dubrovnik)의 해군사관학교에서 훈련함으로 이용되었다.1941년 4월에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을 때, D2는 프랑크 포드보이(Franc Podboj) 함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 배는 침공 중 그루즈에서 코토르 만까지 항해하다가 이탈리아군에 나포되고 만다. 이탈리아 해군은 노획함을 개조한 다음 D10 어뢰정으로 굴렸다. 하지만 이 배는 1943년 9월 11일에 이탈리아가 항복할 때 코토르 만에 정박해 있다가 독일 해군에 압수당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군용으로 가치가 없어 독일군이 철수할 때 코토르 만에다 자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