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2 19:19:41

우크라이나 소련의 적통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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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우크라이나군의 선전을 빗댄 순수한 드립3. 진심으로 우크라이나를 소련의 적통이라 주장하는 역사왜곡
3.1. 소련 서기장 우크라이나 설3.2. 우크라이나 소련유지파설, 옐친에 의한 우크라이나 강제독립설
3.2.1.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국민투표 몰표3.2.2. 오히려 우크라이나 국민들 덕분에 소련이 해체됐다!3.2.3.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 문서는 나무위키에만 존재한다?
3.3. 우크라이나 정부의 소련 상징문화 탄압(최대 징역 5년) 외면
4. 여담

1. 개요

파일:루스끼너만소련이었던게아니다.png
해당 밈에 주로 인용되는 폴란드볼
2022년부터 한국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한 우크라이나소련과 관련된 역사성에 대한 드립.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최근 국제 정세를 관찰하노라면, 이 속담에 딱 들어맞는 사례로 ‘돌아온 탕자’ 러시아가 떠오른다. 소련의 해체와는 상관없이 그 적통의 계승국 러시아가 여전히 지구촌 패권정치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외교정책의 이해: 대립과 통합, 푸틴의 길 (고재남. 역사공간, 2019, 464쪽)
홍 완 석
슬라브학보 제34권 4호
2019년 12월 30일

일반적으로 소련의 후신으로 꼽히는 국가는 러시아인 게 보편적이며, 실제로 러시아는 구소련의 채무를 대부분 계승하였고 상임이사국 지위 또한 이어받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가 '소련의 적통'에 걸맞지 않은 헛발질을 하는 사이 우크라이나가 침략 독재국가에 맞서 일치단결하고 '대조국전쟁'을 수행하고 소련식 종심 돌파 전술 등을 보여주는 모습이 진짜 소련과 같다면서 이런 드립이 퍼지기 시작했다.

2. 우크라이나군의 선전을 빗댄 순수한 드립

애초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파생된 드립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는 이쪽이다. 역사왜곡이 아닌 순수한 드립으로 그냥 소련의 구성국이었던 우크라이나가 '소련의 적통', '진짜 소련', '진정한 소련의 후예'인 것처럼 우수한 전투력을 보여주고 러시아는 그렇지 못하다는 의미다. 미국과 세계를 양분했던 초강대국 소련의 모습을 러시아가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 소련의 무기체계와 전투교리를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기에[1] 우크라이나 뒤에 소련이 보이는 폴란드볼 짤은 우크라이나의 전투방식 또한 과거 소련의 전투방식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특히 푸틴과 히틀러를 동일시하는 여론은 대한민국의 인터넷 여론뿐만 아니라 언론, 해외 시위대 등 수많은 여론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독재자에 맞서 국가를 수호하는 이미지로서 보여줬던 구소련의 '대조국전쟁'을 이번에는 우크라이나가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전쟁 프로파간다 포스터를 보면 소련 시절의 공산주의 선전 포스터 색채가 진하게 묻어나 이 드립이 다시 나오기도 했다.

3. 진심으로 우크라이나를 소련의 적통이라 주장하는 역사왜곡

종종 인용되는 이 폴란드볼 드립
"우크라이나'도' 소련이었다."
도?
근데 과연 이게 드립일까?
'러시아'는 소련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도' 소련이었다?
위의 드립성 표현과 달리 '소련에서의 우크라이나'는 흔히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진지한 문제임.
어느 정도냐면 '러시아 지도자(ㅍㅌ)'가 약간의 자격지심을 품고 이를 거론할 정도?
출처
진심으로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인소련의 적통이라 주장하거나 드립인 건 인정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드립이라 주장하는 역사 왜곡이다.

3.1. 소련 서기장 우크라이나 설

3.1.1. 니키타 흐루쇼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접경 지대에서 출생했다고 모호하게 서술하지만 출생지는 러시아이며 혈통도 러시아계다. 브레즈네프와 다르게 국적을 우크라이나인으로 표기한 적도 없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말하자면 흐루쇼프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러시아계이지만 그가 어릴적과 청년시절의 대부분을 우크라이나에 보냈으며 정계입문도 우크라이나에서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스탈린 같은 인물에 비해서는 우크라이나에 비교적 온건한 통치를 했고 우크라이나계들을 중앙정계로 많이 불렀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도 많이 가졌으며 크림 위기를 부른 크림반도 이양도 이 사람이 결정한 것도 맞다. 그러나 이건 순전히 흐루쇼프 개인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때문이지 그가 우크라이나인이니 우크라이나 출생이니 하는것과는 관련이 없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와 가장 비슷하게 설명하자면 A에서 태어났지만 B에서 자라고 정치경력을 시작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 뒤에 자신의 고향처럼 느낄 수도 있고 정치적 기반인 B를 신경쓴것이지 진짜로 자기 고향이라고 챙겨준 것이 아니라는 말과 비슷하다.

3.1.2.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06~1982)
우크라이나 인
우크라이나 카멘스코예 출신으로 우크라이나가 배출한 두번째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 부터 따지면 30년 간 소련 서기장이 우크라이나 출신인 셈#
한국에선 브레즈네프가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거나 '브레즈네프의 가계는 러시아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우크라이나인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등의 오류가 유포되고 우크라이나가 소련이란 주장까지 튀어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들을 시대상과 발굴된 자료들을 무시하는데 당시엔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로 자칭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브레즈네프도 본인을 러시아인이라 기록했다.
브레즈네프는 1906년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직업을 찾아 러시아 제국 남부, 이른바 '신러시아'(지금의 우크라이나)로 이주한 쿠르스크 지역 출신의 전직 농민인 산업 노동자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초기 문서에서 브레즈네프는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칭했지만, 나중에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신분을 '러시아인'으로 바꿨다. 이것은 느슨한 '러시아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신중한 선택이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우크라이나인'이 볼셰비키 국가 분류 체계에서 선호도를 누렸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균형이 '러시아인'으로 바뀌었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일부가 된 '뉴 러시아'(노보로시아)의 영토는 브레즈네프의의 작은 고향이었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쾌활하고 사교적인 '남부 러시아인'으로 보았다. 또한 문화적으로 브레즈네프는 러시아 농민과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다. 그는 농민을 돌보고 농민 가족의 가치를 보존했다.
Brezhnev was born in 1906 in the Russian empire. He came from a family of industrial workers, former peasants from the Kursk region who moved in search of jobs to the southern region of the Russian empire, so-called 'NewRussia' (now Ukraine). In his early documents Brezhnev put himself down as 'Ukrainian', but later, after he moved to Moscow he changed his identity to 'Russian'. This was natural for people with a loose 'Russian' identity, but it was also a prudent choice: in the 1920s 'Ukrainians' enjoyed preferences in the Bolshevik national taxonomy, while after the 1930s the balance became reversed in favour of 'Russians'. The territory of 'New Russia' (Novorossiia) that became part of Soviet Ukraine was Brezhnev's small homeland; his contemporaries viewed his character as stereotypically 'southern Russian' - cheerful and gregarious. Also culturally, Brezhnev never fully separated himself from Russian peasantry. He cared about peasants and preserved peasant family values.

Zubok, Vladislav. "'Do not think I am soft…': Leonid Brezhnev." Mental Maps in the Era of Détente and the End of the Cold War 1968-91. Palgrave Macmillan, London, 2015. 7 https://link.springer.com/chapter/10.1057/9781137500960_2
그리고 이후 문서고를 통해 브레즈네프의 젊은 시절 기록이 발굴됐는데, 본인의 문서에 브레즈네프는 일관되게 민족을 대러시아인( великорос)으로 표기했었다.출생지는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이었지만 브레즈네프는 본인을 일관적으로 대러시아인으로 기록했었다.

브레즈네프는 1920년대에는 일관되게 본인을 대러시아으로 기록했지만 이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으로 이동하면서 다르게 기록했다. 1940년대에는 национа́льность(민족, 민족소속, 국적, 국민성)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자칭했다. 1947, 1942, 1942 시기를 보면중간에 러시아인으로 자칭하는 기록도 존재한다.1943 시기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우크라이나를 두고 소련이 스테판 반데라와 경쟁하던 시기에 나온 자료이다.

브레즈네프는 1920년대에는 일관되게 대러시안으로 자칭했지만 이동한 국가에 따라 나중엔 национа́льность(민족, 민족소속, 국적, 국민성)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자칭한 것이었고, 그와중에도 러시아인으로 자칭하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1970대엔 자서전에선 본인이 러시아인임을 인정했다.
따라서 민족(혹은 국적)에 따라 나는 러시아인이며 출신은 프롤레타리아이며 유전 야금 학자다. 그것이 내 가계도에 대해 알려진 전부다.
Таким образом, по национальности я русский, по происхождению — коренной пролетарий, потомственный металлург. Вот и все, что известно о моей родословной.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Жизнь по заводскому гудку" (Москва: Издательство политической литературы, 1981), с.7

많은 한국 사람들이 혼동하는데 национальности는 국적, 국민성으로도 번역된다.
1.민족
2.민족소속
3.국민성, 민족성
출처 :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새노한사전
민족(民族); 국적, 국민성, 민족성
출처 : 도서출판 문예림 최신 러시아어-한국어사전
국적
национа́льность;национа́льная принадле́жность; по́дданство; гражда́нство
출처 :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새한노사전
국적
1.гражданство
2.национальность (судна)
3.национальный характер;национальные черты
출처 : 국립국어원 한국어-러시아어 학습사전(KORU)
국민성
национальность
출처 : 국립국어원 한국어-러시아어 학습사전(KORU)
검색출처

상단에 인용된 Zubok, Vladislav. "'Do not think I am soft…': Leonid Brezhnev."란 논문에 사용된 national taxonomy도 국가 분류로 번역된다. 그리고 당시 소련에서도 법적으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우크라이나 국가가 실존했었다. 공문서에 기재된 것만으로는 국적(국민소속)이 기재된건지 민족소속을 기재한 건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브레즈네프는 1920년대 시절부터 문서에 일관적으로 '대러시아인'으로 기재했었다. 소련에서는 대러시아/소러시아라는 용어로 러시아/우크라이나를 구분하지 않았으므로 해당 맥락은 국적이 아니다. 결국 대러시아인의 민족정체성을 가진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이 러시아인으로 국적을 변경한 사례일 뿐으로 나중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조차 아니게 됐으므로 우크라이나인이라 볼 근거는 없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태어났으니 우크라이나인'이라면 윤동주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으니 한국인이 아니라 중화민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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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우크라이나 소련유지파설, 옐친에 의한 우크라이나 강제독립설

"우크라이나가 진짜 소련이다"는 단순 드립이 아니고 진짜임.
루리웹 등에서 퍼진 유언비어(추천 178)
ㄴㄴ
소련 해체 당시의 우크라이나는 '강경하게' 소련 해체 반대하던 쪽이었음.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이 강경한 소련 유지파.
근데 옐친이 러시아 먹고 싶어서 막무가내로 해체하고 내쫓은거.
위의 추천 178의 덧글
사실 역대 서기장과 주요 고위직 배출한 것을 생각하면…
심지어 마지막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분열을 반대했던 것이 우크라이나
지리적으로도 모든 루스인들의 근본이기도 함
루리웹 베댓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에서도 나오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오히려 소련 유지의 가능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국민들이었다. 옐친은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방해했다가 실패하고 해체파로 돌아선 경우였다.

3.2.1.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국민투표 몰표

On 24 August 1991, he spearheaded a resolution that declared Ukraine an independent state. The declaration also called for a referendum on independence to be held throughout the new republic on December 1991. That same day, presidential elections were scheduled as well.

In the months leading up to the referendum and elections, Kravchuk enhanced his reputation as a defender of Ukrainian interests by opposing Gorbacher's pro posals for a new union treaty that would limit the political and economic sovereignty of its members. When the December referendum was finally held, the results were a surprise to even the most ardent believers in independence. No less than 92 percent of the country's inhabitants voted for independence. Over 80 percent of the voters in each of the supposedly russified eastern industrial oblasts (Donetsk, Dnipropetrovs'k, Zaporizhzhia, Kharkiv) voted for Ukraine's independence. Even the Crimea, which as of September 1991 had had its own state sovereignty within Ukraine," returned a 54 percent majority in favor of independence, Kravchuk won the presidency with a comfortable majority of 62 percent of the vote.

1991 년 8월 24일, 그(레오니드 크라우추크)는 우크라이나를 독립 국가로 선언한 결의안을 주도했다. 이 선언문은 또한 1991년 12 월에 새로운 공화국 전역에서 독립에 관한 국민 투표를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같은 날 대통령 선거도 예정되어 있었다. 국민 투표와 선거에 이르기까지 몇 달 동안 크라프추크는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경제적 주권을 제한하는 새로운 노조 조약에 반대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이익의 수호자로서 명성을 높였다. 마침내 12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그 결과는 독립에 대한 가장 열렬한 신봉자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나라 주민의 92퍼센트 이상이 독립에 찬성했다. 러시아의 동부 산업 지역 (도네츠크,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자포리자, 하르키우)의 유권자 중 80 % 이상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투표했다.1991년 9월 현재 우크라이나 내에서 자체 주권을 가진 크리미아조차도 독립에 찬성하여 54 %의 다수를 얻었고 크라우추크는 62 %의 지지율로 대통령직을 차지했다.
Paul R. Magocsi, A History of Ukraine: The Land and Its Peoples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10), pp. 724.https://m.dcinside.com/board/war/2511991?
독립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의회의 독립 선언에 대한 국민투표를 [1991년] 12월 1일 실시하기로 했다. [소련 보수파의 실패한]쿠데타의 여파로 러시아에서 공산당이 불법화되자 우크라이나에서도 8월 30일 공산당의 불법화가 선언되고, 공산당 소유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우크라이나 국방부가 설치되어 우크라이나 내의 군 병력을 관할하기 시작했고 국경에 대한 법률도 통과되었다. 12월 1일 국민투표에서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84% 투표율에 90.3%의 압도적 찬성으로 독립을 지지하였다.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크림주에서도 독립 지지는 54%에 달했다. 독립 승인 투표와 같이 진행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크라우추크가 61.6%을 얻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허승철, 『우크라이나 현대사 - 1914-2010』 (고려대학교출판부, 2011), 198쪽https://m.dcinside.com/board/war/2511991?

3.2.2. 오히려 우크라이나 국민들 덕분에 소련이 해체됐다!

1991년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 대거 참여해 강대국 소련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쳐박히도록 만들었다.
세르히 플로히,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독립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 허승철 역 , 2022알라딘 미리보기p.33
8월 독립 선언과 1991년 12월 대통령 선거와 독립 국민 투표 사이에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우크라이나를 구 소련 내에서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국민 투표에서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같이 러시아인이 많이 밀집한 지역에서조차 90%의 압도적인 찬성율로 독립에 찬성했다.
Taras Kuzio (1994) Ukrainian nationalism, Journal of Area Studies, 2:4, 91
1991년 12월 7-8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민스크 정상 회담에서 옐친은 고르바초프로부터 제안을 받아 마침내 우크라이나를 소련내에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주권 국가 연방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8월 쿠데타 이전의 크라우추크에게는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지만(그러나 민족주의자에게는 그렇지 않음) 독립 국민 투표 결과 90% 이후에는 시작할 수가 없는 계획이었다.
Taras Kuzio (1994) Ukrainian nationalism, Journal of Area Studies, 2:4, 92
1985년 3월 이전에는 어떤 신뢰할 만한 학자도 소련이 1991년말까지 존재가 소멸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소련 붕괴의 장기적인 전조 신호를 지적할 수 없다. 1985년 3월 현재 소련은 파국적인 분기점에 이르고 있지 않았다. 소련의 상황적 전환점은 고르바초프가 1991년까지 체제를 분열에 취약하게 만든 일련의 불안정한 쇼크를 시스템에 가했을 때 찾아왔다. 직접적인 티핑 포인트는 1991년 8월의 쿠데타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국민투표였고, 연방이 해체되는 원인이 되었다.(which in combination caused the union to unravel.)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16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여론 변화는 결국 옐친의 목표를 바꾸도록 강요했고 그리고 벨로베즈스카야 푸쉬차Belovezhskaya Pushcha협정과 알마-아타Alma-Ata 합의를 통해 소련의 종말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그렇게 극적으로 바뀌자 않더라도 옐친과 고르바초프 둘 다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실행 가능한 구조가 고안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6
그 마지막 위기에서 또 다른 티핑 포인트는 독립 국가로 귀결되는 결정적인 투표인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와 함께 찾아왔다. 국민투표 캠페인과 투표 자체는 근본적인 정치 변화의 역학에 대한 게르슈프스키의 유형론에서 또 다른 내생적으로 주도된 파열(Type III Change) 을 구성했다. 1991년 8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에도 옐친은 처음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그리고 다른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을 연결시키는 연방을 보존하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1991년 가을 우크라이나 주민 대다수가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12월 1일에 투표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옐친은 국민투표가 되돌아 갈 수 없는 포인트가 될 것을 깨달았다. 공식적인 투표 집계를 보기 전에 그는 독립 러시아 국가(구 소련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구성 요소)에서 권력을 공고히하고, 그리고 새로 선출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우추크와 벨라루스 의장(사실상 국가 원수) 스타니슬라우 슈슈케비치와 그 연방을 끝내는데 함께하기로 결정했다—1991년 12월 8일 벨로베즈스카야 푸쉬차에서 과업을 완수했다.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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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 문서는 나무위키에만 존재한다?

1991 Ukrainian independence referendum 위키피디아 문서

위키피디아에는 이미 2006년에 만들어진 문서이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만 없을 뿐이다.

3.3. 우크라이나 정부의 소련 상징문화 탄압(최대 징역 5년) 외면

2015년 5월 15일, 우크라이나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은 공산주의 기념물(제2차 세계 대전 기념물 제외)을 제거하고 공산주의 관련 주제를 따서 명명된 공공 장소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 6개월간의 기간을 시작한 일련의 법률에 서명했다. [2][3] 당시 이것은 22개의 도시와 44개의 마을이 새로운 이름을 얻도록 설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2015년 11월 21일까지 지방 정부는이를 시행할 권한이 있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 주는 2016년 5월 21일까지 이름을 변경해야 했다. 그 날짜 이후에 합의가 옛 이름을 유지했다면 우크라이나 각료회의는 합의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권한을 행사할 것이다. 2016년에는 51,493개의 거리와 987개의 도시와 마을이 개명되었고, 1,320개의 레닌 기념물과 1,069개의 다른 공산주의 인물 기념물이 제거된다. 법을 위반하면 잠재적인 미디어 금지 및 최대 5년의 징역형이 부과된다.[4][5][6][7][8]

우크라이나의 탈공산화 법은 다음에도 적용된다.
  • 소련의 국기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의 다른 14개 공화국의 국기와 동유럽과 해외의 사회주의 국가의 국기
  • 소련과 그 구성 공화국의 국가 상징뿐만 아니라 동유럽과 해외의 사회주의 국가
  • 소련과 공화국의 국가
  • 소련의 붉은 별
  • 소련의 해머와 낫
  •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 조셉 스탈린, 마오 쩌둥, 김일성, 체 게바라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
이 법은 2015년 5월 20일 발표되고 공식적으로 다음날 발효되었다.[9]

4. 여담

1. Государства Содружества поддерживают Россию в том, чтобы она продолжила членство СССР в ООН, включая постоянное членство в Совете Безопасности, и других международных организациях.
1.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은 러시아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다른 국제기구를 포함한 UN에서 소련의 회원자격을 이어가는데 지지한다.

2. Республика Беларусь, РСФСР, Украина окажут другим государствам Содружества поддержку в решении вопросов их полноправного членства в ООН и других международных организациях.
2. 벨라루스 공화국,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는 UN과 다른 국제기구의 정규회원국 자격에 있어 다른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다.

연합 국가들의 UN과 기타 국제기구 회원자격에 대한 독립국가연합 국가원수 회의 결정 (Решение Совета глав государств СНГ от 21.12.1991 о членстве государств Содружества в ООН и других международных организациях), 1991년 12월 21일. 전문 (CIS 홈페이지, 러시아어)
1991년 12월 21일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 창설국들은 알마아타 협정 당시 러시아가 UN에서 소련의 기존 의석을 승계하는 데 동의했다. 당시 창설국들은 러시아가 UN에서 소련의 위치를 계승하는 것을 지지하는 대가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나머지 9개 공화국들의 UN 가입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따라서 드립을 제외하고 진지하게 법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크라이나는 독립 과정에서 러시아가 국제법상 주체로써 소련을 이어받는 데 동의했다고 볼 수 있다.[10]
Стаття 7. Україна є правонаступницею прав та обов'язків за міжнародними договорами СРСР, які не суперечать Конституції України та інтересам республіки.
제7조.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헌법과 공화국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소련이 체결한 국제조약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계승한다.

Стаття 8. Україна дає згоду на обслуговування зовнішнього боргу СРСР 16 липня 1990 року в тій частині, яка визначена окремим міжнародним договором. Україна не зобов'язана надавати кредитні контракти та угоди, які СРСР уклав після 1 липня 1991 року, без згоди України.
제8조. 우크라이나는 별도의 국제조약에 명시된 부분에서 1990년 7월 16일 소련의 대외 채무를 상환하는데 동의한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7월 1일 이후 소련이 우크라이나의 동의 없이 체결한 신용 계약 및 계약을 제공할 의무가 없다.

Стаття 9. Усі громадяни СРСР, які на момент проголошення незалежності України постійно проживали на території України, є громадянами України. Україна гарантує забезпечення прав людини кожному громадянину України, незалежно від національності та інших факторів відповідно до міжнародно-правових актів про права людини. Порядок збереження, набуття та втрати громадянства України регулюється Законом «Про громадянство України».
제9조.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 당시 우크라이나 영토에 영구적으로 거주하는 모든 소련 시민은 우크라이나 시민이다. 우크라이나는 국제인권선언에 따라 국적 및 기타 요인에 관계없이 모든 우크라이나 시민에게 인권을 보장한다.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유지, 취득 및 상실하는 절차는 "우크라이나 시민권에 관한 법률"에 의해 규정된다.

우크라이나 법적승계에 관한 법률(Про правонаступництво України), 1991년 9월 12일. 전문 (우크라이나어)
흔히 우크라이나가 소련을 승계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법률로써 자주 제시되는 "우크라이나 법적승계에 관한 법률(Про правонаступництво України)"을 이해하려면 법률이 제정되던 당시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 우크라이나는 UN에서 소련과 별도로 의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UN이 창설되던 시기였던 1945년 당시 미국과 영국이 자국 자치령이었던 필리핀과 인도를 가입시키려 하자 이에 대한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소련에 추가 의석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국제법상 주체로써는 소련과 별개의 주체(subject)였다. 이때문에 소련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소련이 가입했던 여러 국제조약이나 소련이 보유했던 자산을 인수할 때 법적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었다.[11]

우크라이나 법률인 "우크라이나 법적승계에 관한 법률"은 원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우크라이나로 전환되던 시기 국가승계 과정에서 소련이 가입했던 국제조약 승계나 소련이 보유하던 자산 인수 같은 사항을 규정하기 위해 만든 법률이었다. 따라서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가 (진지하게) 법률적인 측면에서 소련이란 전체 국가를 승계했다고 주장한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해당 법률에서 우크라이나는 소련이 체결한 국제조약과 의무를 승계하고(제7, 8조) 자국에서 머무르던 소련 시민들을 자국 국민이라고 표명했기에(제9조) 법률적으로 우크라이나는 소련이란 국가를 일정 부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우크라이나는 2015년 탈공산화법을 통해서 소련 시절을 역사적으로 청산하고 소련이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계승국이 아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의 국가를 표방하기에 진지하게 우크라이나가 소련의 후예를 자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1] 소련 해체 이후 각자 자기식으로 고쳐쓰는 부분이 있겠지만 기본 틀은 서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서로에게서 노획한 무기나 장비를 복잡한 절차 없이도 바로 실전 투입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2] Poroshenko signed the laws about decomunization. Ukrayinska Pravda. 15 May 2015, Poroshenko signs laws on denouncing Communist, Nazi regimes, Interfax-Ukraine. 15 May 2015 http://www.pravda.com.ua/news/2015/05/15/7068057/, http://en.interfax.com.ua/news/general/265988.html[3] Shevchenko, Vitaly (14 April 2015). "Goodbye, Lenin: Ukraine moves to ban communist symbols". BBC News. Retrieved 17 May 2015. https://www.bbc.com/news/world-europe-32267075[4] (in Ukrainian) In Ukraine rename 22 cities and 44 villages, Ukrayinska Pravda (4 June 2015) http://www.pravda.com.ua/news/2015/06/4/7070191[5] (in Ukrainian) "Komsomolsk in any case be renamed", depo.ua (1 October 2015) http://poltava.depo.ua/ukr/poltava/komsomolsk-u-bud-yakomu-vipadku-pereymenuyut-01102015183700[6] "Decommunization reform: 25 districts and 987 populated areas in Ukraine renamed in 2016", Ukrinform (27 December 2016) https://www.ukrinform.net/rubric-society_and_culture/2147127-decommunization-reform-25-districts-and-987-populated-areas-in-ukraine-renamed-in-2016.html[7] "Ukraine lawmakers ban 'Communist and Nazi propaganda'", Deutsche Welle (9 April 2015) http://www.dw.de/ukraine-lawmakers-ban-communist-and-nazi-propaganda/a-18372853[8] "New laws in Ukraine potential threat to free expression and free media, OSCE Representative says", OSCE (18 May 2015) http://www.osce.org/fom/158581[9] "Laws discommunization and status OUN and UPA published in "Holos Ukrayiny"". Ukrayinska Pravda (in Ukrainian). 20 May 2015. http://pda.pravda.com.ua/news/id_7068453/[10] 실제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상임이사국 의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거나 소련 승계에 대한 이유로 자국에게 해당 의석을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UN에서 국제법상 주체로 소련을 계승하는데 반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11] 유사한 사례로 발트 3국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소련 시기를 점령으로 간주하여 점령국(소련)의 자산(대표적으로 소련군 병력)이나 부채를 승계하는 것을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