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2007년 아르헨티나의 방송국 텔레페가 아르헨티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아르헨티나인 100명'을 선정했다. | ||||||||
TOP 10 | |||||||||
<rowcolor=#ffffff>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호세 데 산 마르틴 | 레네 파발로로 | 후안 마누엘 판지오 | 알베르토 올메도 | 체 게바라 | |||||
<rowcolor=#ffffff>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디에고 마라도나 | 에바 페론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마누엘 벨그라노 | 로베르토 폰타나로사 | |||||
11위~100위 | |||||||||
<rowcolor=#ffffff>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 |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 알폰시나 스토르니 | 알프레도 알콘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
<rowcolor=#ffffff>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알프레도 팔라시오스 | 알리시아 모로 드 후스토 | 앙헬 비센테 페냘로사 | 안토니오 베르니 | 아르투로 프론디시 | |||||
<rowcolor=#ffffff>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아르투로 움베르토 일리아 | 아스토르 피아졸라 | 아타우알파 유판키 | 바르톨로메 미트레 | 베니토 킨켈라 마르틴 | |||||
<rowcolor=#ffffff>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 베르나르도 우사이 | 칼푸쿠라 | 카를로스 빌라르도 | 카를로스 가르델 | |||||
<rowcolor=#ffffff>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카를로스 메넴 | 카를로스 몬존 | 카를로스 무기카 | 카를로스 레우테만 | 찰리 가르시아 | |||||
<rowcolor=#ffffff>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 세사르 밀스테인 | 다니엘 파사레야 |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 엔리케 앙젤렐리 | |||||
<rowcolor=#ffffff>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엔리케 산토스 디세폴로 | 에르네스토 사바토 | 에스테반 에체베리아 | 에스텔라 데 카를로토 | 파쿤도 키로가 | |||||
<rowcolor=#ffffff>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플로렌티노 아메히노 | 프란시스코 모레노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가브리엘라 사바티니 | 기예르모 빌라스 | |||||
<rowcolor=#ffffff>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구스타보 산타올랄라 | 헤베 데 보나피니 | 이폴리토 이리고옌 | 우고 포르타 | 호르헤 뉴베리 | |||||
<rowcolor=#ffffff>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호세 에르난데스 | 호세 마리아 가티카 |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 | 후안 호세 카스텔리 |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 |||||
<rowcolor=#ffffff>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후안 페론 | 후아나 아수르두이 |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 훌리오 보카 | 훌리오 코르타사르 | |||||
<rowcolor=#ffffff>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 | 레안드로 알렘 | 레온 히에코 | 리산드로 데 라 토레 | 롤라 모라 | |||||
<rowcolor=#ffffff>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루시아나 아이마르 | 루이스 페데리코 를루아르 | 루이스 산드리니 | 마누 지노빌리 | 마누엘 도레고 | |||||
<rowcolor=#ffffff>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마리아노 모레노 | 마리아노 모레스 | 마리오 켐페스 | 마리기타 산체스 | 마르틴 미겔 데 구에메스 | |||||
<rowcolor=#ffffff>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마리아 엘레나 월시 | 메르세데스 소사 | 니콜리노 로체 | 니니 마르샬 | 노르마 알레안드로 | |||||
<rowcolor=#ffffff>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 오스카 보나베나 | 끼노 | 라몬 카리요 | 라울 알폰신 | |||||
<rowcolor=#ffffff>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리카르도 발빈 | 로베르토 알트 | 로베르토 비센조 | 로돌포 월시 | 로케 사엔스 페냐 | |||||
<rowcolor=#ffffff>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살바도르 마사 | 산드로 데 아메리카 | 타토 보레스 | 티타 메레요 | 술 솔라르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75aadb><colcolor=#fff>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 삼두정 일원 호세 데 산마르틴 José de San Martín | |
본명 | José Francisco de San Martín Matorras 호세 프란시스코 데산 마르틴 마토라스[1] |
출생 | 1778년 2월 25일 |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 | |
사망 | 1850년 8월 17일 (향년 72세) |
프랑스 제2공화국 불로뉴 | |
정당 | 애국당 |
경력 | 페루의 보호자[2] (1821년 7월 28일 ~ 1822년 9월 22일) |
병역 | 스페인(~1812)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 파트리아 누에바 페루 보호국 |
별명 | El Libertador(해방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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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아메리카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스페인에 맞서서 남아메리카의 독립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생애
2.1. 독립운동 이전
1778년 아르헨티나(당시 스페인 라플라타 부왕령) 코리안테스 주 야페유에서 태어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성장한 이후 스페인 군대에 입대하여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우고,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1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 싸우면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는데, 이때 남아메리카의 독립 운동가들과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2.2. 독립운동
1812년 라플라타 부왕령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 등의 인물과 '북부군', '안데스군' 을 지휘했다. 산마르틴은 상(上) 페루(현재의 볼리비아)를 통해 진군하는 기존의 공격 방식이 별 효과를 얻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를 공격하고 거기서 다시 육군과 해군이 합동으로 진격해 페루를 독립시킨다는 계획을 세운다. 산 마르틴은 국경 도시 쿠요의 행정관으로 부임하여 1817년 초 안데스 산맥을 넘었고, 샤카부코 전투(1817년 2월 12일)에서 스페인 왕당파군을 공격해 승리했다. 칸샤 레야다 전투(1818년 3월 19일)에서 일시적으로 패배를 맛보고 후퇴하지만 이어서 마이푸(1818년 4월 5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칠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시민들은 산 마르틴을 해방자로서 환영하고 칠레 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정부수반직을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양보하고 이후 영국 백작 토마스 코크런을 해군 지휘관으로 초빙하여 자신이 계획했던 육해군 합동 작전을 실행시키고, 1821년 7월 28일에 리마에서 페루의 해방을 선포하고 '페루의 보호자(Protector Of Peru)'라는 호칭을 얻어 페루의 국가원수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산 마르틴의 페루 해방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페루 내 각 세력들의 다툼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2.3. 과야킬 회담
이후 페루의 완전한 독립을 논의하기 위해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시몬 볼리바르와 회담을 진행했다. 이 회담의 공식 기록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작은 밀실에서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 두 명만 남고 이외에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채 회담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두 명은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사이였지만, 의견 차이가 굉장히 갈렸던 것으로 보인다. 산 마르틴은 자신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볼리바르 군대와 합류하는 것까지 제안했지만, 볼리바르는 거부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것은 식민지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정치 체제에 대해 산 마르틴은 유럽의 왕족을 초빙하여 군주가 통치하는 군주제를 주장하고,[3] 볼리바르는 공화정에 입각한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언쟁을 벌였다는 이야기 정도다. 또한 볼리바르는 페루의 완전한 해방 및 독립을 자신이 실행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산 마르틴은 특별한 소득 없이 볼리바르와의 만남을 끝마친다.2.4. 은퇴 및 최후
시신은 사후 188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3. 여담
시몬 볼리바르 못지않게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세 나라의 독립에 공헌했고 그 자신의 이름을 딴 훈장은 아르헨티나의 최고 훈장이며 아르헨티나 어딜 가도 동상을 볼 수 있는 인물이다.과야킬 회담 당시 겨우 44세였고, 은퇴 이후에도 25년 이상을 더 살았던 것을 보면 만일 이 사람이 아르헨티나에 더 머물렀다면 분명히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의 시몬 볼리바르나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처럼 오랫동안 정치지도자로 남았을 인물. 하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남미 각국의 행보를 볼 때 산마르틴이 유럽으로 안 가고 모국인 아르헨티나에 남아 아르헨티나 독립 후 국가원수의 자리에 올랐었다고 해도 대콜롬비아 공화국, 칠레 독립 이후 각각 모국들의 초대 대통령이 된 시몬 볼리바르처럼 독재정치를 펼치며 반대파 세력들과 대립하며 실권하거나, 오이긴스처럼 반대파 세력들의 압력으로 축출당했을 가능성도 높아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산마르틴은 볼리바르나 오이긴스에 비하면 박수칠 때 잘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 1000페소 지폐의 인물이다.
4. 둘러보기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사실상 초대 대통령이다.[3] 멀리 갈 것도 없이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브라질에 있던 포르투갈 왕가들의 주도로 군주국으로 독립한 브라질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