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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 게오르기 말렌코프 | 제3대 | 니키타 흐루쇼프 | |
제4대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제5대 | 유리 안드로포프 | |
제6대 | 콘스탄틴 체르넨코 | 제7대 | 미하일 고르바초프 | }}}}}}}}}}}} |
블라디미르 레닌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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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d700>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초대 인민위원장 블라디미르 레닌 Влади́мир Ле́нин | Vladimir Lenin | |||
이름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 ||
본명 |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1] (Влади́мир Ильи́ч Улья́нов) | ||
출생 | 1870년 4월 22일 | ||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현 심비르스크군 심비르스크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울리야놉스크주 울리야놉스크) | |||
사망 | 1924년 1월 21일 (향년 53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현 포돌스크군 수하노보면 고르키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주 레닌구 고르키레닌스키예) | |||
묘소 | 레닌 영묘 | ||
재임기간 | 초대 러시아 SFSR 인민위원장 | ||
1917년 7월 6일 ~ 1924년 1월 21일 | |||
초대 소련 인민위원장 | |||
1923년 11월 8일 ~ 1924년 1월 21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d700> 부모 | 아버지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울리야노프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울리야노바 | |
형제자매 | 형 알렉산드르[2] 누나 안나,[3] 올가[4] 남동생 니콜라이,[5] 드미트리 여동생 올가,[6] 마리야 | ||
배우자 |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 ||
자녀 | 없음 | ||
학력 | 카잔 황립대학교 (법학 / 제적) 상트페테르부르크 황립대학교 (법학 / 학사)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무종교 (무신론) | ||
신체 | 165cm, 72kg | ||
최종 당적 | [[소련 공산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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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초대 최고 지도자이자 사회주의 혁명지도자. 소련의 국부로 평가받으며 오늘날 러시아인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된다.러시아 제국의 혁명 조직인 볼셰비키의 지도자였으며, 소련 장관회의 초대 위원장 겸 소련 공산당의 창립자였다.[7]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레닌주의의 창시자이자 카를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혁명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반면 반공주의자를 위시한 반(反) 좌파 인사들이나 같은 좌파 중에서도 무장봉기를 반대한 멘셰비키, 즉 사민주의자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반대한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 및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소련의 폭압적 체제의 기반을 만든 원흉이자 이오시프 스탈린 못지 않은 학살자라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블라디미르 레닌/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자세한 내용은 블라디미르 레닌/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여담
- 레닌이 죽은 이후 스탈린에 의해 추진된 레닌 우상화에 따라 레닌의 동상이 소련 곳곳에 세워졌다. 냉전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 사회주의 국가라면 레닌 동상이 여러 곳곳에 세워졌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공산주의 몰락과 함께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에 있던 레닌 동상은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일부 국가나 지역에 따라서는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 러시아에서는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에 레닌 동상 중 상당수가 철거되었고, 폴란드나 체코 등 반러 감정이 강한 국가들처럼 레닌 동상이 완전히 혹은 거의 대부분 철거된 국가들도 있지만 너무 많이 만들어진 탓에[8]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레닌 동상이 5,300여 개가 넘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러시아 주요 거리나 광장에서 레닌 동상을 쉽게 볼 수 있는 편이다. 특히 시베리아나 극동과 같은 오지에서 많이 보이는 편. 노보시비르스크의 오페라극장 광장에도 큰 동상이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러시아군이 동부지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공산당이 일개 야당에 불과함에도 레닌 동상을 복구하는 일이 있었다.
- 우크라이나에서도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이전까지는 적잖은 수가 잔존하였으나, 2010년대에 도네츠크와 루한스크를 제외하고는 전부 철거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레닌 동상을 소련 체제의 상징이자 러시아 압제의 상징으로 여겨 대부분 철거하였으며, 다른 소련 시절 동상들도 탈공산화의 여파로 대부분 철거되었다.
- 스위스의 사진가인 닐스 아커만이 철거당한 레닌 조각상들의 현재 모습을 추적한 사진집 《Lost in Decommunization》을 발간해 현재의 동상들의 모습들을 담기도 했는데, 허리 윗부분만 싹둑 잘려나가 방치되거나 지하실에 곰팡이 낀 채로 처박히거나 완전히 산산조각나서 코만 한조각 발견되거나 공장 구석에 방치되거나 철조망에 걸려 있거나 하는 취급을 당하고 있다. 개중에는 아주 희한한 최후를 맞이한 케이스도 있는데, 오데사에 있는 조각상은 알렉산드르 밀로프라는 조각가가 다스 베이더로 깎아버렸다.#
- 좀 특이한 사례로, 시애틀에서는 그의 동상을 매입해서 매년 성 패트릭의 날, 하누카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마다 트리 겸 장식물로 활용하고 있다. 코로나 시국엔 한동안 빨간 마스크를 씌워놓았다. 이 동상은 본래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것으로, 동구권 붕괴 이후 버려져 있던 것을 한 영어 교사가 매입해 들여와서 전시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반공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철거를 요구하고 있지만, 사유지에 있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간혹 반공주의자들의 반달리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기네스북에도 오른 바 있는데, 바이칼 호수 근방의 울란우데라는 도시에 세워진 레닌 두상이 세계에서 가장 큰 레닌 머리라는 이름으로 1991년 등재된 것이다. 폭 4m 이상에 무게는 42톤짜리로 레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기존의 레닌 상 셋을 대신해 세운 거라고 하는데, 소련 붕괴 후 이걸 철거하자니 철거 비용이 너무 나와서 그냥 방치해 놓았는데 어느 날 기네스북에 올라가게 되며, 애물단지였던 이 두상은 본의 아니게 관광 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 남극의 도달불능점에 모스크바 방향을 바라보는 플라스틱제 레닌 흉상이 있다.# 이 흉상을 두고 웃기는 냉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소련 탐사대가 이 흉상을 세웠음을 안 미국이 도달불능점으로 탐사대를 파견해서 흉상을 워싱턴 D.C. 방향으로 돌려놓았고, 이를 안 소련은 다시 도달불능점을 찾아 흉상을 모스크바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 러시아의 문호인 레프 톨스토이의 애호가로,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고 극찬할 만큼 높이 평가했으며 이 때문에 공산 혁명 이후 과거 러시아 제국의 유산이 비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오히려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은 갈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 첼리스트 그리고리 퍄티고르스키(Григорий Пятигорский, 1903–1976)가 15살 나이에 현악 4중주단을 만들었는데 베토벤 4중주단이라는 이름을 지어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한 존경을 내비쳤다. 그런데 당에서 이 이름을 레닌으로 바꾸라고 명령했고, 퍄티고르스키는 "레닌은 혁명가이지 음악가가 아니다! 죽어도 못 바꾼다!"며 당에 대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레닌이 직접 그를 만났고, 퍄티고르스키는 죽음을 각오했는데 레닌은 껄껄 웃으면서"자네 말이 맞아. 난 음악에 대하여 도통 아는 게 없는데 내 이름을 악단으로 짓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예술가로서의 그 용기 정말 멋졌네. 아, 이름이야 자네 마음껏 짓게나."
하며 되려 그를 격려했다. 하지만 레닌의 격려와 달리 주변에선 아무래도 레닌 4중주단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하여 결국은 이 이름으로 바꿔 활동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 분위기로선 자유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어렵다고 느낀 퍄티고르스키는 18살 나이로 식구 및 음악 동료들과 같이 해외로 망명해 버렸다. 국경을 넘을 때 수비병들에게 걸렸지만 무사히 망명에 성공했다. 다만 그가 아끼던 첼로가 이 과정에서 부서졌을 뿐.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레닌은 "나는 음악가 하나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건가."라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 민영환을 만날 뻔한 적이 있다. 1896년 7월 3일, 민영환이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해 외교 활동을 모두 치르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문물을 두루 살펴보는 중 감옥을 들렀는데 레닌이 이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민영환이 레닌을 면회했다는 식의 직접적 인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민영환의 당시 여행기 《해천추범》에는 감방 구조를 설명하는 부분도 있어서 민영환이 레닌의 수감실을 지나갈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물론 외국에서 오신 나름 높으신 분이었던 민영환이 진짜로 레닌을 봤다고 해도 민영환의 시각에는 그저 많고 평범한 죄수들 중 한 명이었겠지만.
- 2020년 3월 7일에 독일 법원이 겔젠키르헨시에서 레닌 동상을 세울 수 있는 판결을 내렸다.#
- 우드로 윌슨보다 앞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여 세계에 큰 파급력을 미친 사람이다. 단, 민족자결주의가 레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서는 적국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민족의 자결을 본격적으로 구호로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내전 시작 시기에 봉기했던 구 러시아 제국 산하 체코 군단도 이러한 목적으로 차르 정부에서 육성한 것이었다.[9] 레닌의 민족 자결론은 이를 자타를 가리지 않고 적용하면서 러시아 제국의 해체 및 식민지로부터의 우호 획득에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고, 그 결과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을 꾀하던 국외의 여러 지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다.[10] 다만 러시아 제국의 해체 이후 내전기에 캅카스,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3국, 부하라, 히바 등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면서는 당시 민족문제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어도 러시아 제국의 권역 내에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거부하되 프롤레타리아 민족주의는 받아들인다는 식의 논리로 선회하기도 했다. 단, 레닌의 민족 자결론을 단지 자국 이익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생각했다고 해석하는것은 편향된 시각이다. 애초에 서강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식민지들의 경제적 착취 문제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분석한것이 레닌주의, 즉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 가한 이론적 공헌이다. 레닌은 민족 자결주의, 즉 서강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항하는것을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이론적 배경은 ‘제국주의론’을 비롯한 그의 저작들에서 여러번 명시된 바 있다. 또 제정 러시아 시절 중국에게서 강탈한 영토를 돌려주겠다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중국에게 한 적도 있다. 이를 감안하면, 그의 반식민주의적 태도에 대한 진심성은 부정하기 힘들다. 한편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승인요구를 철저히 묵살[11]한 반면, 소련은 아시아 식민지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지원도 했었다.[12] 이러한 일환 중 하나로 임시정부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레닌을 여러 차례 만나고 조언을 구하는가 하면 400만 루블이라는 거금의 공작금을 원조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이 자금의 행방을 둘러싸고 임시정부가 더 분열되었고,[13] 이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은 김립은 김구에게 사살되었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김립이 죽을 만해서 죽였다고 써 놓아서 다들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와서야 밝혀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조.
- 20대일 때 벌써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14] 수염도 자라는 대로 내버려뒀던데다가 목소리도 걸걸하여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왠지 무서워했다. 이 덕에 소비에트 정권이 생긴 이후에 국가원수의 사진을 대중에게 공개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조차 꼴이 말이 아니라서, 지도자의 공식 사진은 1918년에 가서야 최초로 언론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이런 외모가 해외로 피신할 때는 의외로 도움이 되었는데, 가발을 쓰고 면도만 하면 완벽하게 변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진이 1917년 핀란드 망명 시절 레닌의 변장 모습. 정말로 변장한 거라곤 면도하고 가발을 쓴 것밖에 없다. 이때 레닌의 수염을 면도해준 사람은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레닌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누가 봐도 핀란드 농부로군. 이러면 잡힐 일이 없겠어!"라고 크게 흡족해했다고 한다.
- 레닌은 학창 시절에 최우수 학생이었으므로 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교육 방식은 미칠듯한 암기와 물어봐서 답을 못 대면 패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레닌의 집에는 밤이면 밤마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심지어는 상급자에 대한 절대복종을 강요하여 동생에게 울라고 명령한 다음 반응이 없으면 쥐어패서라도 울린 다음 너는 네 명령에 복종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어머니마저 동생들을 그만 좀 때리라고 말렸을 정도다.
- 당시 러시아 제국의 대학교에서 각광받던 학과는 과학, 기술 혹은 의학과였다. 실제로도 누나와 형 모두 그렇게 진학했고 마찬가지 성적이 뛰어났던 레닌도 그럴 것이라고 보였지만, 레닌은 뜬금없이 당시 비인기 학문인 법학을 선택한다. 레닌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의 선택을 말렸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고, 결국 레닌은 법대에 진학했다.
- 동상이나 초상화 등에서 옷깃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긴장했거나 두려울 때 하던 버릇이었다. 이 덕에 옷깃이 너덜너덜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옷을 한번 사면 낡아 빠질 때까지 입었기 때문에 더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파리 망명 당시 발에 안 맞아서 못 신는 구두를 버리지 않고 트로츠키에게 줬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로 봐서, 의외로 구두쇠였는지도 모른다.
- 위와 마찬가지 맥락으로, 레닌의 사진을 보면 양복이나 코트를 거의 풀어 헤치고 있는데, 기본적인 이유는 더워서다. 활동량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었던 듯 하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집안의 온도를 섭씨 16도 이상 올리지 못하게 했으므로 아내 크룹스카야는 집안에서도 옷을 껴 입고 있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나중에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주치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온도를 조금 더 올리긴 했지만 그때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 외국어 능력이 뛰어났다. 제정 러시아 귀족층의 공용어는 러시아어가 아닌 프랑스어였는데, 레닌은 하급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했다. 학창 시절엔 라틴어와 그리스어 성적이 좋았고,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 이후 외국의 혁명가들과 교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독일어와 영어를 익혔다. 거기다 폴란드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다만 망명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던 외국어는 프랑스어 정도였고, 독일어와 영어는 이후 스위스[15]와 영국에서 생활하며 유창해졌다.
-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계 본좌이지만 사실 그 자신은 심비르스크시 장학관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부유하게 살았으며, 이때 뿐만이 아니라 그는 평생 육체노동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특히나 노동자와 자신을 분명히 다른 계층으로 보고 있었으며 집에도 하녀를 두고 있었다. 본래 공산주의의 시조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노동자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그 외에도 유명한 사회주의 운동가 중에는 오히려 출신 신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 계층과 거리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출신 성분의 차이라는 아이러니함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연구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선 레닌을 시작으로 중국의 마오쩌둥도 젊은 나이에 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부자였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도 아버지가 농장 소유주였고 체 게바라도 아버지가 귀족 출신에 병원 원장이었다. 레프 트로츠키는 8살 때 당시 우크라이나에선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열대 관엽식물이 잔뜩 놓인 사진관에서 입학 기념 사진을 찍을 만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폴 포트는 왕의 외척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왕족들과 교류했고 쑤파누웡은 왕자였다. 반대로 가난한 집안 출신들로는 이오시프 스탈린, 저우언라이, 요시프 브로즈 티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호찌민을 들 수 있는데, 이 와중 저우언라이랑 호찌민은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만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자체는 확고한 몰락 유학자 선비 집안, 스탈린도 비슷하게 주머니는 텅텅 비어도 글은 배우는 신학교를 나오는 등 고등교육에 대한 인식과 기회 자체는 있는 배경 출신이 많았다. 문제는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려면 고대 철학에서부터 헤겔을 비롯한 고등교육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짜배기 가난한집안에 독학으로 공산주의를 배운 인물로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있다.
- 소련 시절에 나온 레닌에 관련된 책에서는 그가 아버지 사후 기지를 발휘해 가족들을 부양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레닌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도 어머니 밑에서 값비싼 여러가지 부대비용을 요구하는 벅찬 존재였다. 위에서도 썼지만 그는 육체노동을 해 본 적이 없다. 단지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거나 도서관에서 아예 안 오거나 했을 뿐이다. 이 덕에 레닌의 어머니는 영지를 팔기도 하고, 레닌의 요구에 따라 이사를 다니며 집에 세를 내거나 하는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레닌의 어머니는 러시아 제국의 국채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국채에서 나오는 이자가 레닌의 망명비용으로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나마 사치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기는 했다.
- 학창 시절에 담배를 달고 살았었다. 이에 어머니가 "담배는 건강에 해롭다."라고 충고했는데, 이때만 해도 레닌은 그 충고를 무시하고 계속 담배를 피웠지만 어머니가 보다못해 "너에게는 네 담뱃값으로 가족의 재산을 소모할 권리가 없다."라고 지적하자 반박할 수 없었던 레닌은 즉시 금연했다.[16]
- 형 알렉산드르가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자, 레닌의 담임 교사는 아직 어린 레닌에게 이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나 걱정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그는 동요하지 않고 "형이 스스로 옳은 일을 하였다고 여기고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면, 형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형의 국가반역 행위 덕에 레닌은 대학교에서 뭔 사건만 터지면 주동자로 몰려서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다가 청강생으로 법학 공부를 겨우겨우 하고 졸업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수석이었다. 변호사 면허도 최우수 성적으로 받고 사무실에 취직한다. 그러나 이 당시 레닌은 사소한 소송에서도 매번 패소한 데다가 한 달에 대략 6번 정도의 의뢰만을 받았을 정도로 이 일에 관심이 없었다. 즉 그저 생계를 위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서민들의 억울함과 사회 현실의 부조화 등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17]
- 레닌은 책을 사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쪼들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독촉해서라도 돈을 구하거나 빌려 책을 샀을 정도로 유명한 책벌레다. 책의 요약 및 정리하는 능력이 일반인과는 넘사벽 수준이었고, 칸트나 헤겔, 마르크스의 저서를 읽고 비판과 개인적인 주석까지 달 정도의 수준이었다. 토론에 들어가면 논쟁에서 유리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많게는 400권씩 읽었다. 또한 5,000단어로 된 문서 하나 쓰는 데는 4시간이면 충분했으므로, 레닌이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연설가이자 세계구급 논객이었다는 것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였다.[18]
- 아이러니하게도 공화혁명의 시발점이자 공산주의의 발상지인 프랑스를 싫어하고 자본주의의 상징국이자 세계 최대의 제국인 영국을 좋아했다. 레닌은 프랑스 망명시기 프랑스를 두고 더럽고 규칙도 없는 제일 추악한 곳이라며 욕을 퍼부었을 정도. 당시 그가 살았던 아파트의 맞은 편에 살던 푸줏간 주인이 매일같이 소시지를 만들어대는 통에 풍기는 돼지 창자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레닌은 아무리 더워도 창문을 열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앞집 사람은 독일계였다.
[19]
* 레닌은 만성적인 위장 질환을 앓았다. 주치의들이 광천수를 마시도록 처방하고 각종 검사를 해봐도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는데, 원인은 다름아닌 체스였다. 실제로 레닌은 체스를 매우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레닌은 체스 도중 좋은 수가 떠오르면 숙이고 있던 상체를 갑자기 일으키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버릇이 몸에 힘을 주게 되어 위장에 무리를 준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실제로 체스를 끊자 고통이 많이 사그라졌다. 사실 알고 보면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수준인데, 특히 신경쇠약은 항상 달고 다녔으며 불면증으로 며칠이나 잠을 못 잘 정도로 고생하기도 했다. 그의 말년 뇌일혈이나 기타 사소한 질병들은 그의 아버지 쪽 가족력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 레닌은 만성적인 위장 질환을 앓았다. 주치의들이 광천수를 마시도록 처방하고 각종 검사를 해봐도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는데, 원인은 다름아닌 체스였다. 실제로 레닌은 체스를 매우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레닌은 체스 도중 좋은 수가 떠오르면 숙이고 있던 상체를 갑자기 일으키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버릇이 몸에 힘을 주게 되어 위장에 무리를 준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실제로 체스를 끊자 고통이 많이 사그라졌다. 사실 알고 보면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수준인데, 특히 신경쇠약은 항상 달고 다녔으며 불면증으로 며칠이나 잠을 못 잘 정도로 고생하기도 했다. 그의 말년 뇌일혈이나 기타 사소한 질병들은 그의 아버지 쪽 가족력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 원래 힘이 장사였다. 학창시절에는 실제로 성적도 최상위권이었고 공부만 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만약에 자신이 책을 읽을 때 시비를 거는 학생이 있으면 폭력을 시전. 덕분에 레닌이 책을 읽고 있을 때는 아무도 그의 옆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평범한 강도는 그냥 제압해 때려 눕힐 수 있을 정도였고, 토론 자리에서 언성이 높아질 때 자기 측의 인원 중 하나가 폭력을 쓰려고 하자 그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회의장 밖으로 끌고 나와서는 "논쟁의 자리에서 폭력을 쓰는 자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또 2월 혁명 이후 독일에서 러시아로 향할 때 기차 안에서 수상해 보이는 인물을 발견하자, 다짜고짜 그 사람을 기차의 플랫폼으로 던져버렸다.
- 운동을 좋아하여 볼가 강을 따라 카누 타는 것을 어려서부터 즐겼을 뿐 아니라 스키와 등산도 좋아하여 알프스를 등반하는 것도 즐겼다. 따라 온 일행들이 퍼지면 "벌써 퍼지는 건가?"라고 핀잔을 준 뒤 그래도 못 따라오면 버리고 갔다. 국가원수가 된 이후에도 차를 타기보단 크렘린 주위를 자주 걸어다녔으므로 강도를 만났던 적도 있고 저격미수사건도 이 도중에 일어났다.
- 레닌은 패션, 요리, 청소, 집안 인테리어 등에 굉장히 무지하였다. 옷도 누가 사주지 않으면 입던 옷만 계속 입었고 집에서도 누가 요리를 안 해주면 그냥 굶었다. 실제로 일만 하는 혁명 로봇 수준.[20] 1917년 비밀열차를 타고 돌아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는 유명한 사진과 그림 당시의 말쑥한 옷차림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노동자와 군인들이 귀국한 레닌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카를 라데크가 스톡홀름에서 열차를 멈춰 백화점에 목불인견 상태의 레닌을 끌고 가 사 준 옷이라 한다.
- 다혈질에 자타공인 아가리 파이터로 유명하다.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역에서 실제 객차의 자리수보다 표를 많이 발권하는 오류로 승객들과 승무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레닌은 분명히 올바른 좌석 표를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열차가 지연되자 승강장으로 박차고 나가 승무원을 붙잡고 입배틀을 시전, 결국 모두 타고 갈 수 있게 한 적이 있다. 설전이 붙으면 상대가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논쟁했으며 이 시간이 몇 시간씩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말년에 투병중이라 말도 잘 못하는 레닌에게 백이면 백 털렸으며 볼셰비키 최강의 이론가이자 꿀리지 않는 아가리 파이터인 니콜라이 부하린도 레닌과의 논쟁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 다만 레닌을 말빨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레닌이 가장 말싸움으로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었고,[21] 레프 트로츠키와도 논쟁 중 밀려서 트로츠키의 의견이 옳다고 인정해야 했던 적이 한 번 있다.
- 소비에트의 국가원수가 된 이후, 관용차로 당원들이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에 관심없던 레닌은 시큰둥한 반응이었고, 한번 타 보았을 때 눈보라에 바퀴가 박혀 버려 운전사와 함께 차를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자 돌아와서 "이 차는 사치품일 뿐 쓸모가 없다!"라고 일갈하며 내다 버리라고 명령했다. 왜 레닌이 자동차를 사치품이라 칭했냐면, 당시에는 자동차 자체가 진귀한 명품이었다. 1920년대 시점에서는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나 자동차가 보급된 수준이었고,[22] 대부분의 국가들과 식민지에서는 자동차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고위급이나 일부 부유층이나 타고 다닐 수 있던 수준이었고, 훨씬 이후에도 고급품이자 부의 상징이었다. 당장 소련만 해도 자가용의 대중화는 늦게 이루어져서 자동차가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라다 공장이 완공되고 나서부터의 일이었으며, 한국은 1980년대 중반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하여튼 레닌의 일갈에 당황한 각료들은 차량에 무한궤도와 썰매를 달아서 눈길도 잘 달리도록 만들었는데, 이렇게 개조된 이후에 타 보곤 그제서야 제 기능을 한다며 마지못해 이용했다. 그리고 이 실버 고스트는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레닌의 별장에 전시되어 있다.[23] 실제로 레닌은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그다지 좋아했던 편이 아니다. 후에 뇌일혈로 불구자가 되었을 때, 영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전동휠체어를 선물했을 때도 참전 군인들에게 주라고 거절했었다.
- 깔끔하고 정돈된 상황을 좋아했고 주변인에게 그렇게 요구했다. 특히 자신의 집무실 이외의 장소는 어질러지든 더럽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집무실만큼은 업무를 볼 때 연필을 반드시 뾰족하게 깎아서 길이를 맞추어 일렬로 배치해야 했고, 자리에 앉을 때 책상을 반드시 걸레로 닦은 뒤에야 업무를 보았다. 뇌일혈로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크렘린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 물건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러 올 정도. 집무실에 있을 때 소음이 들리는 것 또한 매우 싫어해서 크룹스카야는 그가 집무실에 있을 때면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타인이 집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면 밖의 날씨가 어떻든 무조건 창문을 열어 버렸다. 일례로 스탈린이 집무실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자 레닌은 창문을 열었고, 스탈린은 담배를 껐다.[24]
- 특히 아이들을 좋아했다. 집에 아이들이라도 놀러오면 근엄한 모습을 내버리고 아이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방 안을 뛰어다니는 등 정신이 없었다. 이를 본 볼셰비키 당료들이 오히려 당황해 했을 정도이다. 특히 레닌은 늘 손주나 다른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했다. 다만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는 병을 앓았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따라서 레닌의 직계 자손은 없다.
-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논객답게 연설과 토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말년에 체력적으로 매우 무리가 따르는 상황에서도,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설을 감행하기도 했다가, 연설 직후 기절한 적도 있다. 그러나 비생산적인 논쟁이나 논쟁을 위한 논쟁은 매우 싫어했으며, 논쟁이 무익하다고 판단할 때는 그냥 상대를 하지 않았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노선차를 둘러싼 논쟁이 도저히 해결이 안 되자 깔끔히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당된 것은 레닌의 이런 면도 크게 작용했다.
- 러시아 혁명이 완수되고 크렘린이 집무실이 되었을 때, 레닌은 거대한 크렘린 궁전의 딱 세 방만을 사용했는데 침실, 집무실, 서재이다. 이후 대부분의 소련 서기장들은 이러한 레닌의 검소함을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대부분 비슷한 방식의 구역을 사용했다. 이 방들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나, 건물 자체가 러시아 대통령의 집무실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
- 사후 1930년에 그를 기리기 위하여 소련 최고 등급의 국민훈장인 레닌훈장이 제정되었다.
- 레닌이 사망한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닌 동지가 도대체 어떻게 천재적인 혁명적 위업을 수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주제로 그의 뇌를 절단해 세계 각지에 보내 공밀레를 시전했다. 당연히 답이 없다. 그러나 독일의 한 과학진이 레닌의 뉴런 집합체가 일반인보다 크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 혁명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서 반대파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한때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마르토프는 10월 혁명 후 레닌이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냐는 질문에 "온종일 혁명만 생각하고, 혁명에 대한 글만 쓰고, 혁명에 관한 글만 읽는 사람이 어찌 집권할 수 없었겠소."라고 되물었다. 레닌은 한때 혁명 동지였으나 노선 차이로 갈라진 멘셰비키 인사들에 대해 매우 관대했으며, 옛 동지 마르토프도 해외 망명을 허가해줬다.
-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 혁명가 이네사 아르망(Inessa Armand)과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이 있었다. 2004년 EBS에서 방영한 레닌의 전기영화 레닌의 혁명으로 가는 열차(Lenin:the Train, 1988)는 이 소문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화는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혁명가들이 봉인열차를 타고 스위스를 떠나 독일을 횡단하면서 러시아로 갈 때 벌어진 일화를 다루고 있다.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에게 크룹스카야와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자고 재촉하지만 영화에서 레닌은 단호히 이렇게 말한다. "혁명가가 조강지처를 버린다면 도대체 누가 그 혁명을 지지하겠소."[25]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을 따라 러시아에 왔고 그가 집권하는 것을 봤으나, 혁명 이후 창궐했던 티푸스에 걸려 사망한다.[26] 이네사와 레닌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는 소문이 퍼진 이후에도, 뜻밖에도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와 이네사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서로를 혁명 동지로서 존중하고 아껴준 흔적이 편지나 주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남아 있다. 이네사가 사망한 이후 크룹스카야는 진심으로 슬퍼하며 그녀를 위한 추도사를 작성해 주었으며, 이네사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앙드레를 후견인으로서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레닌이 바람피웠다는 증거는 없고, 아르망과의 관계는 그냥 소문이다. 그러나, 존경하는 혁명가에게 이러한 '추문'이 도는 것을 불편해 한 볼셰비키들은 레닌 사후, 기록 말살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이네사 아르망에 대한 기록과 레닌과의 연관성을 지워 버렸다.
-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였다고 한다. 둘은 초기 공산주의자, 즉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정작 그리피스의 작품들은 심각한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 레닌이 죽은 뒤 시신이 앰버밍 처리되자 미국 언론에서는 그 사진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했다. 그러다가 라이프에서 사진을 구해 독점 보도로 보도했는데, 알고 보니 장의업계 전문잡지에서 이미 선수를 쳐서 라이프는 뒷북을 쳤다고 한다.
5. 어록
소비에트 권력이란 무엇인가? 국민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 새로운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점점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권력의 본질은 부자들과 자본가들이 독점하던 국가 경영이 이제는 처음으로 억압받고 박해당하던 계급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레닌의 정의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레닌의 정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언제나 고대 그리스 공화국들에 있었던 자유, 즉 노예 소유자들을 위한 자유와 거의 같은 것이다. 현대의 임금노예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조건으로 인해 궁핍과 빈곤에 몹시 짓눌려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신경 쓸 여지도 없고 정치에 신경 쓸 여지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일이 통상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될 때에는 주민의 다수가 공적 생활과 정치 생활에서 배제되어 있다.
저서 《국가와 혁명》 중
저서 《국가와 혁명》 중
어려움이 실행 불가능은 아니다.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는 확신이 중요한 것이니, 이 확신은 기적을 이룰 수 있는 혁명적 정력과 혁명적 열정을 백 배 강화해 준다
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중
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중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빠르게 연단에 올라 '동지들이여'라고 목을 굴리며 명확히 말하였다. 그는 말을 잘 못하는 것 같아 보였으나 잠시 후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말에 빨려들어갔다. 매우 복잡한 정치문제들을 그토록 단순하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문장을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않았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놀랍도록 손쉽게, 그리고 단어의 의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듯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가볍게 위로 올려져 앞으로 내민 그의 팔과, 말을 담고 있는 듯한 그의 손은 적의 주장들을 축출하면서 노동자 계급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뒤나 옆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들을 내세웠다. 이 모든것은 탁월하였다. 레닌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간결하게 하는군 이라고 소곤거렸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막심 고리키가 묘사한 레닌의 연설
막심 고리키가 묘사한 레닌의 연설
국가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자유가 있으면 국가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27]
"새로운 노동조직을 확립하려면, 노동자는 그 언젠가는 정치권력을 획득해야 한다. 그들은 낡은 제도의 지주로 행세하고 있는 구정치체제를 전복해야 한다. 만일 이것을 잘못해서 이에 실패한다면, 구체제의 번복을 소홀히 하였기에 이 현세에서 그들의 왕국을 실현할 수 없었던 초기 기독교도들과 똑같은 운명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했다 하여 이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 어디서나 천편일률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국가와 혁명》에서[28]
《국가와 혁명》에서[28]
"미국의 필리핀 병합에 반대하는 한 일본인에 대해서, 그가 정말로 그 병합 자체에 반대한다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우리는 오직 그 일본인이 일본의 조선 병합에 반대하여 싸우고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분리될 자유를 요구하는 경우에만 그가 진정 성실하게, 또 정치적으로 정직하게 병합에 반대하여 투쟁한다고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제국주의론》에서[29]
《제국주의론》에서[29]
6. 저서
레닌의 저작은 총 120권의 책으로, 1960년에 소련 공산당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에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민주화 이후 가장 유명한 저작 일부만이 번역되어 출판되어왔으나, 2017년부터 아고라라는 출판사에서 전집 출간을 시도하고 있다.#- 《이른바 시장문제에 관하여》, 1893
- 《인민의 벗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는가》, 1894
- 《우리의 임무》, 1899
-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 1899
- 《무엇을 할 것인가》, 1902
- 《가난한 농민에게 바란다》, 1903
-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1905
- 《유물론과 경험비판론》[30], 1909
-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31], 1916
- 《국가와 혁명》, 1917
7. 레닌의 이름을 딴 지명
더 보고 싶으면 여기를 참고. 굵은 글씨는 현역 지명이다.- 레닌그라드 - 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레닌그라드 주 -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둘러싼 주
- 울리야놉스크 -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32]
- 레니노고르스크 - 러시아 타타르스탄 공화국
- 레닌스크 - 러시아 볼고그라드 주
- 레닌스키 구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구
- 레니나칸 - 현 아르메니아 규므리
- 레닌고리 - 남오세티야[33]
- 레닌스키 - 카자흐스탄 북부
- 레닌스크 - 현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 레니나바드 - 현 타지키스탄 후잔드
- 레닌그라드 - 현 타지키스탄 무미노보드
- 레닌 봉 -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국경에 위치한 소련의 최고봉[34]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기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35] - 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8. 대중매체에서
* 심슨 가족 시즌 9에서 등장한다. 호머가 해군에 입대해 핵잠수함을 강탈하는 에피소드인 Simpson Tide[36]에서 러시아가 소련으로 되돌아가겠다고 선언하자[37] 퍼레이드에 게양된 평화 기호(☮) 깃발이 소비에트 연방 국기로 덮이고, 퍼레이드 구조물에서 탱크가 나오며, 소련군 복장의 병사들이 절도 있게 움직이고, 베를린 장벽이 다시 쳐진다. 그리고 보존 처리된 레닌이 유리관을 깨고 부활하더니 "MUST CRUSH CAPITALISM!!"[38]이라고 외친다.
- Workers & Resources: Soviet Republic에선 기념물로 건축 가능한데 동상과 콘크리트상 두개로 나뉘어져 있다.
- 메트로: 라스트 라이트에서 그의 유골이 등장한다.[39] 관 앞에는 공산주의 계열 스토커가 놓고 갔는지 초와 음식이 놓여져 있다.
-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도 소련관련하여 동상과 초상화로서만 등장한다.[40]
- 하프라이프: 알릭스에서는 북극성 호텔 앞에 세워진 동상으로 등장하나 목이 잘려진 상태로 서있다.알릭스의 배경시간대는 하프라이프 2의 5년전으로 해당동상은 콤바인 침공이전부터 목이 잘려나간것으로 추측된다.참고로 알릭스와 하프라이프2편의 배경은 동유럽 그중에서도 구소련권으로 보인다.[41]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서 목자의 무리중 하나인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죽어도 러시아가 여전히 전쟁에 개입하는것에 화가난 목자가 레닌에게 칼을 들이밀고 러시아로 가서 혁명을 일으켜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지시한다. 레닌은 자신이 개입하면 정세가 왼쪽으로 치우쳐지니 오른쪽으로 균형을 맞춰야한다며 우려를 표하고 러시아로 가서 수많은 노동자들 앞에서 니콜라이 2세의 퇴임선언서를 들고 노동자들에게 환호 받는다. 참고로 나중에 라이벌이라고 오른쪽의 균형을 잡아줄 인물이랑 악수를 하는데 그사람이 아돌프 히틀러다.
- 대통령 각하 만세라는 대체역사 소설에서는 암살미수사건이 없었기에 1940년대 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장수하며 자신의 후계자로 트로츠키를 지명하는데 성공한다. 그래서 스탈린은 그냥 평범한 레닌과 부하린의 부하로 살게 된다.[42]
-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가 저술한 레닌 평전 4부작이 국내에 들어와 있다. 다만 클리프주의의 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 이른바 속류 민주주의[43]의 관점에서 레닌의 활동과 사상을 다소간 곡해하고 있으므로 읽을 때 이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클리프주의 경향에서는 이 책을 거의 종교경전으로 숭상하고 있다. 사실상 레닌을 자기네들 입장에 맞게 끼워 맞춰서,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레닌은 독재자가 아니다[44] 라고 호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한 책인 셈인데, 막말로 스탈린이 레닌을 왜곡한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레닌과 스탈린을 왜곡하고 있다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을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클리프 본인부터가 역사학자가 아닌 정치운동가에 가깝고 클리프가 주로 소스로 삼은 1차 사료들은 기껏해야 망명자들의 매우 단편적인 증언이나 일부 법령집 따위의 내용들이며, 90년대 이후 소련 문서고가 공개되었을때 클리프는 이미 노쇠한 상태라서 문서고를 뒤져가면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 수준의 연구를 할 수 있을 여력 자체가 안되었다.[45] 애초에 러시아어로 그 많은 문서들을 해독해야 할 능력 자체는 둘째치고 말이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클리프의 소련에 관한 여러 저작들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환상 속의 소련을 제시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크게 비판하고 있다. 노경덕 교수 또한 클리프의 소련관이 미국 주류학계의 시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당시 시대적 혹은 상황적 맥락을 파악하지 않고, 스탈린 격하에 치중하여 오류를 범한다고 학술적으로 크게 비판한 바 있다. 당장 레닌의 군수공업 육성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의 위협을 논하면서 스탈린의 군수공업 육성에 대해서는 소련의 자본주의화의 증거로 갑자기 잣대를 바꾸는 모습 등에서 소련사의 맥락에 대해 진지하게 고착했다고 보긴 어려운 인물이 클리프. 애초에 클리프의 주장 자체가 한국의 운동권 사이에서 인기가 이상하게 높아서 그렇지 국제적으로 그리 명성이 높았던 것도 아니다.
- 2001년 삼인출판사에서 영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저술한 레닌 평전이 정발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되고,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출판사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 12권으로 다시 출간했다. 저명한 러시아 연구자 김남섭 교수가 번역했다.
-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가 쓴 《레닌을 회상하며》라는 책이 있다. 박종철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 빅토리아 3의 DLC 인민의 목소리에서 역사적 선동가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레닌을 밀봉열차에 태워 타국에 보낼 수 있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원래역사랑 너무 변해서 레닌이 아닌 울리야노프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이 지연되면서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자가 아닌 알렉산드르 2세 암살자가 되어 러시아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결국 오스트리아로 이주해서 반(半)독일인이 되었고 독일식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카리스마는 원 역사와 같이 여전하지만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분열은 없어지며, 러시아에서의 기반도 없어서 자신도 독재자가 아니라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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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끔 한국 운동권에서 풀네임을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이라고 쓰는 경우가 있는데, 풀네임을 쓰려면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까지만 써야 한다. 또한 성씨는 발음 표기에 따르면 [ʊˈlʲjanəf\](울랴노프)로 표기하는 것이 맞으나, 한국어권에서는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울리야노프로 표기하는 편이다.[2] 1866.~1887.[3] 1864.~1935.[4] 태어난 지 1년만에 요절.[5]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요절.[6] 1871.~1891.[7] 소련의 지도자가 서기장이었을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의외로 소련의 초대 서기장은 레닌이 아니라 스탈린인데, 이는 스탈린 집권 이전에 서기장이 정무직이 아닌 한국 정당의 사무총장과 같은 실무 총괄직이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현대로 치면 총리와 유사한 직책인 인민위원장으로서 소련을 통치했으며 당과 정부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8] 이건 단순히 많이 만들어져서라기보다는 1990년대 러시아 경제사정이 안 좋아져서 철거를 미처 못했고, 옐친 시절 실정에 대한 반동으로 소련에 대한 향수도 강해지다 보니 레닌 동상을 굳이 철거할 필요가 있나라는 식으로 여론이 반전되다 보니 철거 논의가 힘을 잃은 것에 가깝다. 현재도 통합 러시아 등에 의해 철거 논의가 간간히 벌어지기는 하지만 반응은 미미한 편.[9] 물론 이 군단의 주 목적은 어디까지나 범슬라브주의라는 것이 정설이긴 하다.[10] 그런데도 중국은 티베트나 위구르 등은 독립해선 안 된다는 이중잣대를 내밀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중국의 붉은 별》을 보면 마오쩌둥은 조선마저도 중화연방의 일원이라는 식으로 말해서 인터뷰한 작가인 에드거 스노우가 따로 지적하는 주석을 달기도 했다.[11]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열강들은 아시아 식민지 문제에 대단히 소극적이었던 자세로 일관했었고, 일본 제국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12] 실제로 아시아 여러 지역의 여러 지도자급 인물들이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쑨원도 이러한 전략적 필요성에 공감해 소련과 손잡았다. 독립군 무장이 보통 모신나강이나 PPSh-41 같은 소련제 무기인 것으로 보아 무기도 지원해 준 것으로 보인다.[13] 이는 독립운동가들 사이 내부 계파가 생각이상으로 분열이 심각했기 때문이다.[14] 25세가 되던 1895년에 찍은 머그샷을 보면 이미 탈모가 상당히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영상은 썸네일의 20대 레닌 사진 때문에 댓글창에 탈모 드립이 가득하다...[15]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함.[16] 반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은 담배를 신나게 피웠다.[17] 레닌 에센스 중 하나인 무엇을 할 것인가? 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18] 모스크바 대학을 나오고 당내 최고 이론가인 니콜라이 부하린도 레닌에게 논쟁으로 이긴 적이 없다! 인터넷에서 반박 근거를 바로 찾아낼 수 있는 현대에도 아는 게 많고 글과 말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꺾는 건 매우 어렵다.[19] 망명 시기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체스를 두는 레닌의 모습. 가운데 있는 인물은 막심 고리키이다.[20] 레닌의 초상화에서 그가 입은 셔츠가 다운버튼 스타일이라 패션 리더가 아니냐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넥타이가 풀어지지 않게 하는 목적으로 카라를 조이는 링크버튼을 끼운 것으로 당시에는 꽤 많이 쓰였다. 지금도 탭 카라라는 이름으로 쓰이며 버튼다운보단 훨씬 고전적인 아이템으로 꼽힌다.[21] 레닌은 보그다노프를 반박하고 출당하기 위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책까지 저술해야 했다.[22] 이것도 포드 사가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는 시스템을 개발, 자동차를 염가에 팔아먹을 수 있게 만들어서 그렇지 그게 아니었으면 자동차의 대중화는 훨씬 늦었을 것이다.[23] 위 기록사진보다 완성도가 좋은데, 위 기록사진은 일단 급한 대로 기능부터 추가한 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24] 레닌이 "이 아시아놈 같은 작자를 보게! 할 줄 아는 건 앉아서 담배 빠는 것밖에 없잖아!" 라고 소리치며 창문을 열었고, 레닌의 말에 화가 치민 스탈린이 창 밖으로 파이프를 던졌다는 설이 있다.[25] 이에 반해 트로츠키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딴살림을 차렸다. 대체적으로 혁명가들은 보수적 성향과 거리가 있다보니 연애 문제에 대해서도 개인의 의지가 중요하다면서 관대한 사람이 많았다. 유명한 여성 볼셰비키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프리섹스를 주장했다. 다만 섹스는 물과 같다고 주장한 콜론타이의 주장은 볼셰비키 당 내에서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았고, 상당한 비판까지 받았다는 점에서 연애 문제에 대한 혁명가들의 보수성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레닌은 그렇다고 아무 물이나 마실 수는 없다며 콜론타이를 논파했다. 한편, 콜론타이의 직책이 주로 공사, 대사 등 외교관이었던 것 역시 대단히 명예롭고 대외적으로 소련의 남녀평등을 과시할 수도 있지만, 실권은 별로 없는 자리에 박아넣은 것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26] 당시 유행했던 티푸스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데,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존 리드도 그때 사망한다.[27] 물론 레닌은 엄연히 무신론자이니 절대로 착각하지 말자. 레닌은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종교를 탄압하였다. 사실 실제로 한 말이 맞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으며, 실제로 한 말이 맞다고 해도 니체가 기독교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는 비판이 덜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레닌은 절대 크리스천이 아니었고 종교에 호의적으로 굴지 않았다.[28] 블라디미르 레닌, 김영철, 국가와 혁명, 265쪽.[29] 블라디미르 레닌, 남상일, 제국주의론, 160쪽.[30]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를 논박하고 출당시키기 위해 출판한 책이다.[31] 《제국주의론》이라고도 불린다.[32] 원래 도시의 이름은 심비르스크(Симбирск).[33]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조지아에서는 아할고리(ახალგორი)라고 한다.[34] 타지키스탄에서는 2006년 이븐 시나 봉(Қуллаи Ибни Сино)으로 개칭했다. 다만 키르기스어 이름은 아직도 레닌 봉(Ленин чокусу).[35] 우크라이나어로는 볼로디미르 일리치 레닌 기념 초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이다.[36] 시즌 9 에피소드 19로 크림슨 타이드, 붉은 10월을 비롯한 잠수함 영화들 패러디이다.[37] 이때 알렉산드르 보로딘이 작곡한 오페라 '이고르 공'의 일부인 'Boyar's Chorus'가 흘러나온다. # 나라 이름만 바뀌는 게 아니라 멀쩡하던 베를린에 다시 장벽이 생기는 등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사회주의 공화국들이 다시 흡수되는 듯한 묘사가 나온다.[38] EBS 더빙판에서는 "자본주의를 쳐부수자!"라는 위엄(?) 넘치는 대사로 번역되었다. #[39] 아무래도 핵전쟁으로 러시아가 멸망해버리는 바람에 관리를 못 받아 백골화된 듯 싶다.[40]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즈노프한테 대차게 까이며, 피델 카스트로는 암살 시도로 대역과 애첩이 죽고, 유리 안드로포프는 졸지에 좀비 사태의 흑막이 되어버렸다.[41]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추정된다.[42] 역사와 달리 레닌이 조지원에게 스탈린을 우호적으로 소개 하는 것을 보면 사이가 원만한 사이인것 같다.[43] 국가자본주의론 및 좌익 공산주의. 이런 경향은 레닌 본인이 강하게 비판한 바 있는 노선이다. 레닌의 저작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이 아예 대놓고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를 대차게 까는 내용이다.[44] 레닌, 그리고 레닌 시기에 2인자였던 트로츠키가, 계급 중립적 입장에서 볼 때 독재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분명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추구하였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전제로 하여 그 체제 안에서 제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의 정치적 다양성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그마저도 송두리째 부정하고 짓밟아 버린 게 스탈린인데,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그런 스탈린과 같은 유형의 독재를 추구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지만 속류 민주주의자들이 마치 스탈린이 처음 발명한 것인 것처럼 왜곡하는 KGB나 굴라크는 이미 레닌 시절에 트로츠키가 만든 것이고, 스탈린은 그걸 오남용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일 뿐, 정통 트로츠키주의 쪽에서도 그런 권위주의적 통치 기구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한다. 반면 클리프주의자들은 아예 어떤 유형의 독재도 절대악이라 규정하기에 레닌의 활동과 사상에서 그런 부분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기네들 마음에 드는 레닌을 만들고자 온갖 무리수를 두고 있는데 그 시도의 결정체가 바로 레닌 평전이다.[45] 하지만 국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일부 법령집 따위를 가지고 클리프가 소련 1차 사료에 능통했다는 왜곡까지 거침없이 자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