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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3세

블라드 가시공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lad_Tepes_002.jpg
루마니아어 별명: Vlad Ţepeş (블라드 체페슈, 가시의 블라드)
영어 별명: Vlad the Impaler(블라드 디 임페일러, 꿰뚫는 자 블라드)[1]

1431년 11월 10일 ~ 1476년

1. 개요2. 생애
2.1. 용의 아들, 1431(1살) ~ 1443년(13살)
2.1.1. 1431(1살) ~ 1436(6살): 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시기쇼아라에서 2.1.2. 1436년(6살) ~ 1442년(12살):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의 아들로2.1.3. 1442년(12살) ~ 1443년(13살):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의 동생으로
2.2. 볼모 생활(아버지의 2차 왈라키아 공 재임기): 1443(13살) ~ 1447년(17살), 5년간 오스만 제국에서
2.2.1. 바르나 전투(1444)2.2.2. 1444, 알바니아에서 제르지 카스트리오티(40세)의 반란 시작
2.3. 가시공 1차 재임기, 1447(17세)2.4. 도피생활: 1447(17살) ~ 1456년(26살), 10년간: 후녀디 야노시의 제자2.5. 가시공 2차 재임기: 1456(26살) ~ 1462(32살), 7년간
2.5.1. 집권 당시의 상황2.5.2. 요새 축조: 수도(타르고비슈테)의 남쪽 성채로서의 부쿠레슈티 축조2.5.3. 권력 강화: 1457(27살) 부활절 500명의 보야르 처형2.5.4. 핵심 통로 장악: 노예들의 강제노역을 이용한 트란실바니아 지역, 포에나리 요새 축조2.5.5. 공정한 공포정치2.5.6. 정교회의 수호자2.5.7. 높은 방어력의 트란실바니아의 '브라쇼브' 침공2.5.8. 오스만 제국과의 대결(1461, 31세 ~ 1462, 32세): 패
2.5.8.1. 전쟁 이전: 사절단 처형(1459, 29세)2.5.8.2. 오스만 제국의 1차 원정(1461): 승리, 전멸시킴2.5.8.3.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침입: 성공2.5.8.4. 메흐메트 2세의 친정과 청야전술(1462, 32세)2.5.8.5. 토르고비슈테 점령2.5.8.6. 1462년, 포에나리 요새에서의 패배
2.6. 포로생활: 1462(32살) ~ 1476(46살), 15년간 트란실바니아로의 피신
2.6.1. 1468(38세), 알바니아의 지도자,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사망2.6.2. 1475(45세), 몰다비아 공국슈테판 3세의 요청에 의해 풀려남
2.7. 가시공 3차 재임기(1476)2.8. 1477(47세)죽음
3. 왈라키아 공작 재임기 정리4. 가족관계5. 평가6. 트리비아
6.1. 흡혈귀 이미지
7. 대중문화 속의 블라드 가시공
7.1. 소설7.2. 다큐멘터리7.3. 게임7.4. 영화7.5. 그 외
8. 참조 서적

1. 개요


15세기, 중세 동유럽왈라키아 공국영주. 바사랍 가문의 드라큘레스티 혈족이다.

용공(龍公)이라 불린 블라드 2세의 뒤를 이은 왈라키아(Wallachia)공국[2]공작(제후, 군주. 영어로는 prince. 원어는 voivode)이다. 왈라키아 공국은 현재 루마니아왈라키아 지역에 존재했던 공국으로, 민족은 루마니아인이었다. 따라서 블라드 가시공도 루마니아인, 즉 라틴족이다.

평생을 싸웠다. 처음에는 오스만의 편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귀족계급과 싸웠고, 영주가 된 후에는 아버지의 원수중 하나였던 후녀디 야노시와 힘을 합해 오스만과 싸웠다. 후에는 오스만의 편이 된 동생, 라두와 싸웠으며, 죽은 후에는 형인 수도공 블라드가 본인과는 정반대로 귀족친화적인 노선으로 정치를 했다.

동생은 오스만에게 협력했고, 형은 귀족들과 손을 잡았지만, 본인은 당시 최강의 세력이었던 오스만에게도 저항하고, 당시 왈라키아의 경제적인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과 독일인들을 탄압한 희한한 인물. 덕분에 백성들에게는 영웅으로 모셔지게 된다. 이래저래 대단한 인물.

본명이나 공식적인 이명인 용의 아들보다는 별명인 블라드 체페슈(Vlad Ţepeş)쪽이 엄청나게 유명한 인물. 체페슈는 단순히 가시나 꼬챙이가 아닌 그것으로 무언가를 '꿰뜷는 자', 즉 인물을 칭하는 호칭이므로 직역하자면 위의 '가시의 블라드'보단 '(가시나 꼬챙이로)꿰뜷는 자 블라드'로 칭하는 것이 더 적절하며 더 간단히 하면 블라드 가시공(公)으로 표현된다. 단 체페슈라는 별명은 말년의 그의 잔혹성과 그로 이루어진 꼬챙이형의 악명이 유명해지면서 그의 말년과 사후에 갑작스럽게 유명세를 탄 이명이었기에 그의 생전엔 체페슈가 아닌 드라큘라의 모티브인 드러쿨레아(Drăculea=용의 아들)[3]란 별명으로 주로 불렸으며 블라드 본인도 이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본인의 친필로 보이는 서명 중에서 Wladislaus Dragwlya라고 써있는 서명이 발견되기도 했다.

여타 작품에서 체페슈라는 이름이 나온다면 100% 이 사람이 원조다. 그 외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괴담이자 괴물인 드라큘라의 모티브이기도 하며 악명은 악명이지만, 그만큼 나라 하나는 최대한 철저히 지켰던 인물인 덕인지 루마니아에선 조국을 위해 싸운 영웅으로 아직까지도 숭배받기도 한다. 한국을 포함한 외국에선 주로 블라드 가시공, 블라드 3세, 드라큘라, 블라드 체페슈(일본 창작물의 영향을 받은 경우 '블라도 체페시' 또는 '브라도 체페시'라고 표기), 블라드 대공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이 중에서 드라큘라는 그가 모티브인 가상인물 겸 설화이고 블라드 가시공 본인을 칭할 거면 드라큘라가 아닌 드러쿨레아, 정 발음이 힘들다면 드라큘레아 정도가 비교적 정확한 발음이다.

루마니아 대도시에서는 블라드 3세와 관련된 기념품이 자주 눈에 띄며, 관련된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브란 성[4] 과 포에나리 요새[5]가 있다.

2. 생애

2.1. 용의 아들, 1431(1살) ~ 1443년(13살)

2.1.1. 1431(1살) ~ 1436(6살): 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시기쇼아라에서

블라드 3세의 아버지헝가리드래곤 기사단[6] 소속이었기에 블라드 드라쿨(Vlad Dracul, Vlad the Dragon)이라고 불렸는데, 드라쿨은 (드래곤)을 의미하므로 번역하면 블라드 용공(龍公)이 된다.[7]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국의 공녀라고 하지만 확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형제관계는 형들인 장남인 블라드[8]와 차남 미르체아, 삼남인 블라드 자신, 그리고 남동생 라두 이렇게 넷이었다. 1436년까지는 왈라키아가 아닌 트란실바니아에 위치한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색슨족들이 모여살던 '시기쇼아라'에서 자랐다.

트란실바니아는 900년 가까이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 곳으로 12세기부터 헝가리는 동방식민운동의 일환으로 트란실바니아 남동쪽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 독일인들을 정착시켰다. 이 독일인들은 루마니아어로 '색슨족'이라는 뜻에서 사시(Sași)라고 불렸다. 위에서 설명하는 색슨족, 즉 사시가 바로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으로 이후 수백년 동안 트란실바니아의 지배 계급으로 존재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대부분 독일로 추방당했고 현재 극소수 만이 트란실바니아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 참고로 2017년 현재 루마니아 대통령 클라우스 이오한니스(Klaus Iohannis)가 트린실바니아 독일인이다.

블라드 2세가 이들과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가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고 실재로 시기쇼아라의 성벽은 당시 옛 루마니아의 성채 중 가장 견고했다. 훗날 권좌에 오른 블라드 3세는 이들과 같이 살았던 어린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또다른 색슨족의 도시인 브라쇼브를 공략하는데 써먹기도 했다.

2.1.2. 1436년(6살) ~ 1442년(12살):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의 아들로

그가 6살이 되는 해, 그의 아버지는 왈라키아 공이 되었다.

블라드는 자신이 아버지를 이은 왈라키아 공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드라쿨(Dracul)+아들이라는 뜻의 단어(a)를 붙여 스스로를 '드러쿨레아(Drăculea)'라고 불렀는데, 이 별명이 바로 블라드 가시공의 대명사가 되었다. 결국 드라큘라(드러쿨레아)란 Dragonborn'용의 아들'이 되는 셈이다.

2.1.3. 1442년(12살) ~ 1443년(13살):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의 동생으로

그가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왈라키아 공의 직위를 그의 둘째 아들에게 넘기고 퇴위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형의 치세는 1년밖에 가지 못했다. 후녀디 야노시의 후원으로 바사랍 2세가 즉위하게 된 것이다.

2.2. 볼모 생활(아버지의 2차 왈라키아 공 재임기): 1443(13살) ~ 1447년(17살), 5년간 오스만 제국에서

결국, 블라드 가시공의 청소년기인 1443년(13살), 아버지가 정적인 '바사랍 2세'를 물리치고 왈라키아 공에 복위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조약을 맺게되고, 셋째 아들이었던 '블라드 가시공'과 넷째 아들인 '라두'를 오스만 제국의 황실에 인질로 보네게 된다.

당시 왈라키아는 블라드 3세의 증조할아버지였던, 공작 라두 1세(재위: 1377~1383)의 장남 댄 1세의 후손을 지지하는 파(다니스티)차남 미르체아 1세(이 사람이 가시공의 조부)의 후손을 지지하는 파(드라큘레스티)로 갈려, 수시로 정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발칸 반도의 두 강국인 오스만 제국헝가리는 왈라키아를 서로에 대한 완충지대로 인식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공작을 즉위시키려 하고 있었기에, 과장을 조금 보태면 자다가 일어나면 공작이 교체되어 있는 것이 예사였다.

블라드 가시공의 아버지 블라드 2세 또한 1436년(그가 6살)에 즉위하여 7년의 통치기간 후인 1442년(그가 12살)에 퇴위하여 둘째 아들, 미르체아에게 자리를 넘겼으나, 1443년(13살) 헝가리 왕국의 섭정으로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보이보드로 임명된 야노슈 후냐디의 공격을 받고 축출되었다가, 같은 해 오스만 제국과 조약을 맺어 지원을 받는 대가로 블라드 3세(13살)와 라두 3세(7살)를 오스만 제국에게 보내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아버지 블라드 2세는 복위(1443 ~ 1447)에 성공했지만, 이 아버지의 2차 재임기간인 5년 동안 블라드는 한 살 어린 오스만 제국의 황태자인 메흐메트(훗날 메흐메트 2세가 된다)와 그의 아버지 무라드 2세에게 많은 희롱을 당했고[9] 감옥에서 감금 생활을 당하는 등, 어린 나이에 잔혹한 일을 많이 당했기에 그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염세주의자가 된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2.2.1. 바르나 전투(1444)

이시기 블라드 3세(14세)는 오스만 제국의 황실에 온 지 1년이 지난 때였고, 이곳에서 바르나 전투의 소식(오스만 승, 바르나 십자군 패)을 들었다. 이 때 블라드 3세의 형인 미르체아 2세가 이 바르나 전투에 당시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이었던 아버지 대신 참여했지만[10], 큰 손실 없이 퇴각할 수 있었고, 되려 패한 후, 도망가는 후녀디 야노시(38세)를 아버지와 함께 잡아 감옥에 가두기까지 한다.

2.2.2. 1444, 알바니아에서 제르지 카스트리오티(40세)의 반란 시작

2.3. 가시공 1차 재임기, 1447(17세)

더구나 그가 청년이 된 후 동생 라두는 철저히 '골수 오스만 빠돌이'가 되어 관직까지 얻게 되고[11], 인질 생활을 하던 중인 1447년에 헝가리와 반대파 귀족들의 공격을 받은 아버지와 형 미르체아 2세가 참살[12]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블라드 3세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를 얻어 왈라키아로 진군하여, 공작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해 헝가리의 반격으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2.4. 도피생활: 1447(17살) ~ 1456년(26살), 10년간: 후녀디 야노시의 제자

2.4.1. 몰다비아에서

헝가리의 공격으로 폐위된 뒤 블라드 가시공은 외숙 보그단이 있던 몰다비아 공국으로 피난했다.[13] 블라드는 이 곳에서 외숙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이후 거의 영구적으로 동맹 관계가 될 사촌 슈테판 3세와 친교를 쌓은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몇년 뒤 숙부가 암살되고 몰다비아가 혼란에 빠지자 블라드 가시공은 몰다비아를 떠났다.
2.4.1.1. 코소보 전투(1448)

2.4.2. 트란실바니아에서

몰다비아에서 사라진 블라드 가시공이 다시 나타난 곳은, 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였다. 헝가리에 온 그는 헝가리의 섭정이자 "기독교 세계의 방패", "백색 기사"로 불린 명장 후녀디 야노시를 찾아갔다. 후녀디 야노시는 실패로 돌아간 바르나 십자군의 뒤처리 과정에서 블라드 가시공의 아버지인 블라드 2세과 다투었고, 결국 그가 귀족들에게 살해당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즉, 후녀디 야노시는 아버지의 원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찾아간 것이다. 이는 가시공이 오스만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보여준다. 찾아온 블라드에 대한 후녀디의 반응도 놀라운데, 그는 블라드를 환대하고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이 시기 동안 블라드는 후녀디 야노시에게 전략, 전술을 배울 수 있었다.
2.4.2.1. 1453(23살), 콘스탄티노플 함락
1453, 메흐메트 2세(22세)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성공한다.
2.4.2.2. 1456(26살), 베오그라드 전투와 합동작전
1456년, 블라드 가시공에게 드디어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당시 3년전의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의 성공으로 기세등등한 메흐메트 2세와 싸우려 베오그라드 전투에 참전하는 후녀디 야노시(50세)에 의해, 헝가리가 공작으로 세웠지만 오스만 측으로 배반한 블라디슬라프 2세를 토벌하고 왈라키아 공에 오를 것을 명받은 것이다. 블라드 가시공은 군대를 이끌고 왈라키아 공국으로 가 블라디슬라프를 죽이고 공작에 올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녀디 야노시(50세)는 베오그라드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전염병에 걸려 죽게된다.

2.5. 가시공 2차 재임기: 1456(26살) ~ 1462(32살), 7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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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정착촌을 습격한 뒤 포로들을 살해하고 있는 블라드 가시공을 묘사한 그림. 1460년.

2.5.1. 집권 당시의 상황

상술한 바와 같이, 블라드 가시공이 즉위했을 당시는 말 그대로 내우외환의 절정이었다.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자리는 툭하면 귀족들(보야르)이 공작에게 반란을 가해 죽이는 하극상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던 상황이었고, 경제 상황 역시 상당히 좋지 못했는데 특히 상권을 쥐고 있는 잉글랜드계와 독일계 상인들이 자기 배만을 불리고자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물건을 팔고 있었기에 물건을 제대로 살 수가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주민들의 괴로움은 극에 달해, 범죄율도 엄청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난리법석하고 썩어빠진 상황에 골머리를 썩힌 블라드 3세는 큰 그림을 그리고 하나씩 계획을 실행해나가기 시작한다.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블라드 3세의 할아버지 미르체아 1세 이후 공작의 임기가 7~8년이면 오래 집권한 쪽에 속했고 심하면 1, 2년만에 갈려나가기 일쑤였다. 년도상으로 보면 1~2년이지, 파벌 다툼으로 인해 실제로는 두세달도 못채우고 쫒겨나거나 죽기 일쑤였던 상황. 아무튼 집권하면서 블라드 3세는 보야르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열었는데, 그 뒤 수백년에 걸쳐 블라드 3세의 악명을 드높일 사건(그리고 드라큘라를 위시한 여러 창작매체에서 그를 묘사하는 '가시공'으로서의 사건 등)이 일어나게 된다.

이 때 블라드는 잔치에 초대한 보야르들에게 지금껏 왈라키아를 다스린 공작이 몇 명이였냐고 물어보았는데, 가장 연로한 귀족이 50명이라 말했고, 대체로 30명 내지는 수십명의 공작이 왈라키아를 다스렸다고 말했고 가장 젊은 귀족이 7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보야르들은 새로 즉위한 블라드를 능멸하고 조롱한 것으로 보이는데 블라드는 이 언행에 대해 잔치에 참여한 약 500여명의 귀족들을 모조리 말뚝에 박아 죽여버리고, 관련된 다른 귀족들마저 부활절 만찬 도중 모조리 붙잡아 요새를 짓는데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2.5.2. 요새 축조: 수도(타르고비슈테)의 남쪽 성채로서의 부쿠레슈티 축조

가시공의 치세는 성채 축조와 함께 시작한다. 스스로의 왕궁부터 요새급으로 중축했고, 수도 타르고비슈테의 방어를 위해 남방에 부쿠레슈티 요새를 건설하기도 했다.

2.5.3. 권력 강화: 1457(27살) 부활절 500명의 보야르 처형

또한, 강력한 세력으로 공국의 내정을 농단하면서 가시공의 아버지와 형제를 죽인 보야르 세력들에게도 잔인하게 복수했다. 그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무덤을 파게 하고 거기에 묻어죽였다고 한다. 관련된 남은 귀족들은 포에나리 성터로 잔치의상을 입은 그대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부과해가며 포에나리 성을 세웠다고 하는데, 성이 건설되는 마지막 순간엔 옷이 아주 해지다 못해 나체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해, 그는 슈테판 3세를 도와 그가 몰다비아 공국의 공작에 오르게 한다.

또한 이 해, 알바니아스칸데르베그(53세)가 알불레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 8만명 중, 3만명을 죽거나 사로잡음으로서 최대의 성공을 거둔다.

2.5.4. 핵심 통로 장악: 노예들의 강제노역을 이용한 트란실바니아 지역, 포에나리 요새 축조

트란실바니아와의 접경지대에 포에나리라는 요새를 축조한 것도 가시공이다. 이는 히스토리 채널다큐멘터리 '사라진 문명' 에서도 다룬 바 있다.[14]

2.5.5. 공정한 공포정치

블라드 가시공은 가혹한 인질 생활로 인한 성격파탄 증세주변의 더러운 상황이 더해져, 전쟁포로와 범죄자, 행실이 바르지 못한 주민들을 항문을 꼬챙이에 끼우고 서서히 죽게 만드는 형벌을 도입하며 잔혹한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체페시(Ţepeş, 가시)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인류에 도움이 안 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하라고 했다고...

다만 이렇게 잔혹하기는 해도 공정함 또한 극히 강조하였다. 사소한 범죄나 하다못해 게으름이라도 엄단했으므로 그 공포심 때문에라도 범죄율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 시대의 일화에서는 황금컵을 마을 광장에 놔두어도 가져가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15] 대표적인 일화로 어떤 상인이 금화를 한가득 싣고 가시공의 영토를 지나가던 적이 있었다. 그는 가시공이 시키는대로 궁 앞에 마차를 대놨는데, 밤중에 누군가 금화를 훔쳐갔다. 이에 가시공은 도둑을 잡아오라 하였고, 도둑이 잡히지 않자 포고를 내려 상인의 짐을 돌려놓지 않으면 마을 전체에 벌을 주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렇게 간 큰 도둑이 붙잡혀서 금화가 돌아왔는데, 가시공은 금화 하나를 슬쩍 거기에 넣어놨다. 상인은 되찾은 짐을 확인하고 금화를 잘 세어본 다음, 가시공에게 그의 사건 처리를 찬양하면서 그런데 금화가 한 잎이 더 있더라면서 내놓았다. 그러자 가시공은 "네가 그 금화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널 그 도둑 다음으로 가시에 꿰어 죽였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가서 자신의 공정함에 대해서 널리 알리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이 양반의 똘끼를 보여주는 일화로 지나가던 3명의 영국인 수도자들을 구금한 뒤 면담을 하였다. 이때 한 명 한 명에게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거 같냐, 지옥에 갈 거 같냐?-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고 물어봤다고 한다. 첫번째 수도자가 "공작께서는 나라를 안정시키시고 투르크의 침략으로 부터 유럽을 보호하셨으니 천국에 가실 거다" 라고 대답하자 바로 죽여버렸다. 2번째 수도자가 "당신은 폭군이자 악마다. 네놈의 영혼은 분명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라고 분노에 차 말하자 블라드는 이 수도자도 죽여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1명에게도 똑같이 물었는데 이 마지막 수도자가 한 대답은 알려지지 않았다.[16] 이 수도자는 블라드를 영접하고도 살아 남았고 그가 영국으로 돌아가서 쓴 블라드의 이야기로 서유럽에도 이 양반에 대한 전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2.5.6. 정교회의 수호자

블라드 가시공의 종교적 신앙심은 대단해서지나가다 죽은 수도자 : ? 그런데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얘들이 잘못한 거 맞다[17] 대부분의 정적들을 죽인 후에는(설령 미워했던 원수라 하더라도) 그들이 천국[18]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뤄주었으며 곳곳에 정교회 성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를 자신의 악행을 신앙심으로 메꾸려는 시도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당시 동유럽은 동로마 제국 멸망(1453) 이후, 불가리아 제2제국(1371)과 세르비아 공국(1456) 마저 무너져 왈라키아 공국이 동방 정교회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Curtea de Argeș)'라는 도시는 콘스탄티노플 이후 동방 정교회 사상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동로마 제국이 망하고 러시아의 부상하기 전 흔치 않은 16세기에 지어진 유서 깊은 정교회 성당들이 많은 곳이다.

2.5.7. 높은 방어력의 트란실바니아의 '브라쇼브' 침공

당시 왈라키아 공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트란실바니아 '브라쇼브', '시비우'의 색슨족, 독일계 상인들도 공격했는데, 이는 '브라쇼브'가 단 3세(블라디스와프 2세[19]의 형제)를 지지하고 있었고, '시비우'는 그의 배다른 형제인 블라드 수도공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싸움은 1458년 헝가리 왕국의 왕에 오른 마차시 1세는 곧 '시비우'의 시민들에게 블라드와 평화를 유지하라고 중재한면서 일단락 되는듯 했다.

하지만, 1459년에는 브라쇼브에서 왈라키아 공국의 상인들이 사려던 철을 압수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년 후에는(1460년 4월 22일, 30세), 브라쇼브에서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자리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킨 단 3세와 싸워서 이긴 후 그를 처형하고, 브라쇼브에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다. 이후, 7월 26일 브라쇼브 시와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순간에 특권을 잃은 독일계 상인들은 이후로 가시공을 증오하게 되어 그의 만행을 과장하거나 날조하여 선전하였고, 관련 인쇄물로 적극적으로 만들어 퍼뜨렸다. 이후에 생겨난 잔학한 가시공의 이미지는 실제로 가시공이 잔인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기인하는 바 또한 크다.

2.5.8. 오스만 제국과의 대결(1461, 31세 ~ 1462, 32세):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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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1. 전쟁 이전: 사절단 처형(1459, 29세)
한편 블라드는 즉위하자마자 헝가리 왕국과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아버지 블라드 2세가 오스만 제국에 바치기로 약속했던 연공을 바치지 않았는데, 결국 복위 4년째인 1459년에 오스만 제국 쪽에서 연공을 바치지 않는 이유를 따지고 메흐메트 2세가 그를 만나고싶다는 명령을 전하기 위해 사절 두명을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가시공은 수도였던 타르고비슈테에서 사절들과 만나면서, 감히 공작인 자신의 앞에서 '모자'를 벗지 않는다는 이유[20]로 모자를 쓴 채 머리에 대못을 박아 죽이라고 명령해 사절들은 전부 이렇게 처형된다.

터번을 벗는 것은 이슬람 관습에 어긋난다는 말에 "벗기 싫거든 평생 안 벗게 해줄게"라면서 터번 위에 신발을 같이 못질해서 그걸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까지 떡하니 실어 보냈으니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안 빡칠 리가 있나. 이슬람에서 '신발'이 어떤 의미인지는 신발투척 참조.
2.5.8.2. 오스만 제국의 1차 원정(1461): 승리, 전멸시킴
분노한 오스만 제국은 2년 후 쳐들어왔고, 그로써 오스만 제국과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그리고 1차 원정을 온 함자 파샤의 군대를 매복한 뒤 일제 사격하여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 대승을 거둔다. 이때 함자 파샤를 비롯해 포로로 잡힌 오스만 제국군을 이번에는 모조리 꼬챙이에 꽂아 죽여버렸다. 이때 오스만 제국군의 총사령관인 함자 파샤는 지위에 걸맞게 특별대우하기로 결정하는데, 꼬챙이 가운데에도 가장 높은 꼬챙이에 꽂으라는 것(…)이 그것.

이 전투로, 블라드는 유럽의 군주들 가운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총기를 사용한 최초의 군주가 된다.
2.5.8.3.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침입: 성공
같은 해, 가시공의 선공에 의해, 도나우 강 남쪽 너머의 불가리아 일대의 오스만 진지가 파괴되고, 불가리아 기독교도들이 왈라키아 공국으로 이탈했다. 이때 그는 헝가리 왕국의 왕이 된지 4년차였던 마차시 1세(19세)에게 자신이 23,884명 이상의 오스만 군과 불가리아 군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왈라키아의 항구 파괴를 목적으로 나선 오스만 제국 재상 마무드 파샤도 실패하자, 결국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 메흐메트 2세는 15만명을 동원해 친히 왈라키아를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2.5.8.4. 메흐메트 2세의 친정과 청야전술(1462, 32세)
결국 1462년 6월 4일, 15만명의 오스만 제국군이 다뉴브 강을 건너왔다. 하지만 이에 맞선 블라드 가시공의 전략은 매우 뛰어났는데, 청야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했고, 본인이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진지를 기습해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는 '공포의 밤' 전투로 불렸으며 1462년 6월 17일에 벌어졌다. 루마니어어로 Atacul de noapte(영어로 해석하면 The Night Attack)라고 불리는 전투이다. 이날 하룻동안에만 1만 5천여 명의 오스만군이 죽었다고 한다. 이 야습의 목적은 메흐메트 2세의 목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실패한다.

또한 오스만군이 진군하는 곳마다 오스만 포로들의 시체를 걸어놔[21] 용맹스러운 예니체리(오스만 정예 보병대)와 시파히(오스만 기병대), 실라흐타르(술탄의 용기병대)들도 겁을 먹게 만들었다.
2.5.8.5. 토르고비슈테 점령
애초에 전투 양상 자체가 소부대를 습격해 잡아다 꼬챙이에 꽂아놓는 식이라 오스만군이 초대형 대열로 뭉치기 전에는 정상적인 전투 임무 수행을 하기 어려울 지경이 됐다. 그 절정은 트르고비슈테 성채를 둘러싼 꼬챙이 무더기였다. 잡을 때마다 시체고 산 사람이고 다 꽂아서 전시해 대니 ISIL이나 매일매일 고어물이나 보는 하드코어 성향의 중2병 환자가 아닌 이상 질리는 게 당연지사. 물론 술탄이 겁먹은 병사들을 줄줄이 목 쳐가며 대응해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저항하는 결과를 낳긴 했지만, 이번에는 전염병에 걸린 병사나 시신을 오스만 군 진영에 보내어 병을 퍼트리는 일종의 생화학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오스만 제국군은 블라드의 전술로 피해가 커지고 부대가 갈수록 소극적으로 변해가자, 왈라키아의 수도 토르고비슈테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퇴각하기로 결심했다.

이 때 블라드의 동생 라두 3세는 왈라키아의 영토에 남아있게 된다.
2.5.8.6. 1462년, 포에나리 요새에서의 패배
하지만 이러한 블라드 가시공의 노력도 '역사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한 차례 패배했다고는 해도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후일 헝가리를 넘어 빈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했으며[22], 블라드가 동원한 왈라키아군은 외국 용병에 보통 징집 대상이 되는 나이의 남자는 물론 아녀자들까지 긁어모아도 3만 명에 불과했다.[23][24] 그런데다가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오스만군에게 수도까지 함락되어 파괴되었던 만큼 왈라키아 공국의 피해도 적지 않았고, 동생인 라두를 앞세운 오스만 군이 가시공의 요새이던 포에나리를 함락하자 이번엔 왈라키아 귀족들이 블라드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25]

결국 블라드는 1462년, 귀족들의 반란 + 동생 라두 3세[26]를 앞세운 오스만 제국의 3차 원정군 앞에 무너지고 말았고, 라두가 라두 3세(Radu III)로서 후임 왈라키아 공작으로 취임했다.[27]

2.6. 포로생활: 1462(32살) ~ 1476(46살), 15년간 트란실바니아로의 피신

결국 블라드는 동맹이었던 헝가리로 피신하여 자신과 동맹을 맺었던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인 마티아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지만, 마티아슈는 그를 돕기는커녕 포로로 잡아 장기간[28] 감옥에 가두었다. 이는 당시 헝가리 왕국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어서, 양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일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 한 후, 두번째 아내를 맞이한다.

2.6.1. 1468(38세), 알바니아의 지도자,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사망

그가 일로나와 결혼해서 감옥에서 풀려난지 2년이 지나 38세가 된 해, 오스만 제국에 20여년이 넘도록 맹렬히 저항하여 매번 알바니아를 방어하는데 성공해왔던 제르지 카스트리오티(62세), 일명 스칸데르베그가 메흐메트 2세의 3번에 걸친 총력전을 모두 막아낸 후, 말라리아에 걸려서 사망한다.

2.6.2. 1475(45세), 몰다비아 공국슈테판 3세의 요청에 의해 풀려남

2.7. 가시공 3차 재임기(1476)

그 후[29] 마티아슈의 친척 일로나와 결혼하는 등의 노력을 한 끝에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과 왈라키아 귀족들 가운데 일부의 협력을 얻어 당시의 공작 바사랍 3세를 물리치고, 다시 왈라키아 공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때 라두 3세는 이미 치세 말에 '바사랍 3세'와 공작 자리를 빼앗고 빼앗기는 내전을 벌이다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2.8. 1477(47세)죽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블라드는 오스만 제국군과 싸우다 죽었는데이때 그의 나이는 향년 45세. 서기 1476년 12월. 또는 1477년 1월의 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오스만 제국군이 그의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내 꿀에 절여서 이스탄불까지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가 죽은 곳은 부쿠레슈티와 지우르지우(Giurgiu) 사이의 어느 지점이라고 추정될 뿐, 죽음에 대해서도 오스만 제국군에게 살해당했다는 것부터 사냥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이야기, 협력하기로 약속한 귀족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야기, 부하의 실수로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3. 왈라키아 공작 재임기 정리

블라드 가시공의 왈라키아 공 재임기는 다 합쳐봐야 7년도 채 되지 않으며(약 6년 반 가량 된다.), 그마저도 세 차례에 걸쳐 집권하고 쫒겨나고를 반복했다.
  • 1차 재임기 : 1448년 가을의 약 2달 가량. 오스만 제국의 지원으로 즉위했으나, 곧바로 헝가리에 의해 쫓겨나 몰다비아로 도망쳐왔다.
  • 2차 재임기 : 1456년~1462년. 헝가리의 지지를 얻어 복위에 성공했으며, 블라드 가시공의 원조 전설이나 말뚝형에 관한 설화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가장 긴 재임기간이였지만 겨우 6년 밖에 다스리지 못했고, 오스만 제국에 밀려나 실각하고 헝가리에게 배신당해 감옥에 갇혔다.
  • 3차 재임기 : 1476년 가을. 헝가리와 몰다비아, 왈라키아 일부 귀족들의 도움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곧 오스만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죽었다고 알려졌는데, 위의 각주와 같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므로 못박지는 말자.

4. 가족관계

아버지: 블라드 2세
배다른 큰 형: 블라드 수도공
둘째 형: 미르체아 2세
막내 동생: 라두 3세

첫번째 부인: 후녀디 야노시의 서출 딸, 아나스타시아 홀산스카Anastasia Holszanska[30]
첫째 아들, 사악공 미네아 1세(생몰년: 1462 ~ 1510, 왈라키아 공 재임기: 1508 ~ 1509)
두번째 부인: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인 마차시 1세의 사촌, 실라지 유스티너horogszegi Szilágyi Jusztina[31](1455 ~ 1497, 43년)와 1475년(블라드가 45살, 유스티너가 21살때)에 결혼

5. 평가

현대까지도 블라드 3세에 대한 평가는 외부의 적들을 상대한 것과 내부를 관리한 것 중 초점이 어디로 가냐에 따라 극도로 갈린다.

단 평가가 갈리는 건 루마니아가 아닌 타국에서의 이야기로, 루마니아 내에서는 현재까지도 잔혹한 면을 부정하진 않지만 항상 서민들의 편에서 외적 오스만을 상대로 대항했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세상을 잃더라도 옳음을 실행하라라는 의미의 라틴어 격언인 'Fiat justitia, Pereat Mundus'의 상징이자 그것을 실천에 옮겼던 인물로 여기면서 그가 통치하던 시기를 (공포정치라곤 하지만) 부정적이고 오만한 사람(부패관리)이 존재하지 않은 '정의의 시대(루마니아어: un timp al drepatatii)'라고 극찬하고 있다.

루마니아 이외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에 반발하는 의견으로는 결국 공포정치는 공포정치일 뿐이란 것과 사적인 분노[32]를 정치에 상당히 끼워넣었다는 것에 대해서 지적된다.

다만 블라드공의 잔인한 일면 또한 왈라키아를 지키기 위한 방책이라고 보기도 한다. 당시 왈라키아 공국은 소국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침략 위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블라드공이 포로들과 죄수들을 잔인하게 죽임으로서 적들에게 하여금 "나는 마귀와도 같이 잔인하며 사악하다, 네놈들이 날 죽이려면 말뚝형을 당할 준비를 해야할거다" 식으로 공포감을 심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주장도 있다.

6. 트리비아

  • 러시아의 폭군이자 현군이었던 이반 뇌제가 그를 존경하여 블라드 가시공의 잔인한 통치방식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 '드라큘라 전설'은 크게 독일어권, 슬라브어권, 루마니아어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독일어권의 전설은 주로 잔혹한 행동과 통치를 강조하는 내용이 많으며[33], 슬라브어권의 전설은 거기에 더해서 드라큘라가 말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 섞여있다. 루마니아 지역의 전설은 상대적으로 잔혹함보다는 공정함과 엄격함[34], 민족주의를 더 강조하는 편이다.
  • 생애 내내 투르크와 맞서 싸운데다가 무자비한 면모까지 보인 덕에 양웹에서는 이슬라모포비아 성향의 유저들이 자주 들먹이는 편이다.
  • 드라큘라 성이라고 불리며 그와 흔히 관련되어지는, 그러나 실제로는 관련이 없다시피 한 브란 성은 세계 13대 마경의 하나인데 그런 반면 2018년 현재 세계에서 2번째로 비싼 건물이다.

6.1. 흡혈귀 이미지

블라드 가시공이 죽은 후 얼마 뒤 공교롭게도 인쇄술이 발달하였다. 대체로 블라드 가시공의 잔학함을 비난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을 담은 민담집이 독일 일대에서 인쇄술의 초기 저작물로서 퍼졌다. 사실 이때만 해도 유달리 잔혹한 폭군 정도의 이미지 정도만 있었다. 굳이 독일에서 이런 민담이 퍼진 것은, 가시공에게 된통 당한 독일 상인들의 피해 사례(…) 보고집의 이미지도 없잖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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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챙이로 꿴 희생자들의 시신 사이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는 블라드 가시공을 묘사한 당대 독일의 판화. 1499년.

단 웃긴점은 루마니아 민담에서의 블라드 가시공과 흡혈귀전혀 관련이 없다. 현재 드라큘라성으로 유명한 루마니아의 '브란 성'은 사실 블라드 가시공 본인이 살았다는 기록이 일절 없는 곳으로[35], 그냥 소설드라큘라》에 나오는 드라큘라성의 모티브가 되었을 뿐이다.

블라드 가시공이 흡혈귀 전설과 연관된 건 1897년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가 처음이었다. 스토커의 초고에서는 제목과 흡혈귀의 이름도 왐피르 공(Prince Wampyr)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브람 스토커가 작품을 위해 조사를 하다, 블라드 가시공의 별명 드라큘라가 간지폭풍이라고 여긴 나머지(...)[36] 흡혈귀의 이름을 드라큘라로, 출신지를 루마니아로 정해버린 것. 그래서 그런지 소설 드라큘라의 흡혈귀와 블라드 가시공간에는 공통점은 거의 없다. 작위부터 공작(보이보드)이 아니라 백작(카운트)이며, 소설에서 언급되는 성장과정도 블라드 가시공과 딴판이다. 무엇보다 유명한 말뚝형이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중에서 반 헬싱이 조사를 한 후, "이 놈은 오스만 제국과 싸운 그 드라큘라인 것으로 보인다."라는 언급을 했다.[37] 다만 드라큘라 백작 항목에서도 언급되듯이 백작은 블라드 3세가 아니라 그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 드라큘라가 엄청난 대박을 치고, 기존의 흡혈귀 소설, 민담들을 완전히 뛰어넘어 흡혈귀의 전형이 되어버린 것. 이 상황에서 드라큘라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블라드 가시공에게 이 이미지가 덧씌워져 버렸다. 결국 1975년 프레드 세이버헤이겐(Fred Saberhagen)이라는 작가가 소설 《드라큘라 테이프》에서 "블라드 가시공이 바로 그 소설 드라큘라의 드라큘라다!"라고 한 후에 동시다발적으로 블라드 가시공=드라큘라 백작이라는 창작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 중 유명한 것만 봐도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 영화, 히라노 코우타의 만화 《헬싱》, TV 드라마 《영 인디아나 존스》에서의 한 에피소드,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소설 《히스토리언》의 '체페슈'라는 캐릭터 등등이 있다.

이것 뿐이라면 모를까, 중세때부터 드라큘라는 흡혈귀로 유명했다거나 스토커가 철저한 조사를 통해 드라큘라를 흡혈귀로 설정한 것이라는 역사왜곡 수준의 학설이 나오는 판이 돼서 골머리를 앓는 학자들도 있었다. 오죽하면 오역된 시를 두고[38] "거봐, 블라드 체페슈는 흡혈귀였어!"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나온 판이었다. 드라큘라와 체페슈 백작을 동일시하는게 왜 말이 안되는지를 설명하는 글

당연히 루마니아인들은 서구의 온갖 매체들이 만들어낸 흡혈귀로써의 블라드 가시공의 이미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절에는 소설 《드라큘라》나 드라큘라 관련 영화가 출판금지되는 등, 서구권의 왜곡에 맹렬하게 항의했던 적도 있었다. 허나 1980년대 루마니아가 외채난에 빠지면서 결국에는 차우셰스쿠 패거리도 드라큘라 호텔의 건설허가를 내주었다. 80년대 소년경향 지에 이걸 다루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공산국가 루마니아는 금기시하는 상황임에도 다뤘을 정도. 해당 기사는 이로마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종업원들이 검은 옷차림이라든지 망토 차림으로 관에 누워 나오기도 하고 주로 해외 관광객을 전문으로 하는 호텔이었다.

이후 공산주의가 망하고 《드라큘라》의 유명세를 이용해서 더 크게 관광산업을 개발하는 중... 이래저래 돈이 웬수(…).[39]

그나마 블라드 가시공에게 위안이 되는 거라면, 흡혈귀 드라큘라의 명성 덕에 덩달아 블라드 가시공의 명성도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 오늘날 블라드 가시공은 그와 마찬가지로 당대 메흐메드 2세오스만 제국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던 알바니아스칸데르베그, 메흐메드 2세에게 대승을 거뒀으며 블라드 가시공과 관련이 깊던 헝가리후녀디 야노시마차시 1세 부자, 어쩌면 메흐메드 2세 본인보다도 세계적으로 더 유명할지도 모른다. 다만 악명으로 더 남았다는 점이 문제지만... 루머로 사람을 죽여 피를 빨아먹었다든지 잡범까지 꼬챙이에 뚫어 세워둬서 천천히 죽어가는 걸 보고 술을 마신 미친 군주라느니 별별 악명도 여전히 남아있다. 퇴마록 세계편에서 그의 영혼과 대화를 하는데 "난 내 나라를 지키려했는데 후세에선 피에 미치고 학살에 미친 인물로 길이 남게 되었소...."라고 씁쓸해한다.

7. 대중문화 속의 블라드 가시공

생전의 업적들이 알려지면서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형 마왕물이나, 위악자로 재평가되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7.1. 소설

  • 드라큘라 - 현대에 블라드 백작의 이미지를 고정시킨 장본인이자, 고인 능욕 소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이 엄청난 히트를 치고, 유명해진 덕분에 이전의 사악한 폭군이던 이미지가 재평가되는 계기를 낳았으니...[40]

7.2. 다큐멘터리

  • Deadliest Warrior - Spike TV에서 방영했던 역사속 집단, 인물들이 대결하는 다큐멘터리. 시즌 2의 9번째 에피소드에서 손무와 대결하며 등장한다.

7.3. 게임

  • Deadliest Warrior: The Game - Spike TV에서 방영했던 역사속 집단, 인물들이 대결하는 다큐멘터리 Deadliest Warrior을 기반으로 만든 게임
  • 대항해시대 3 - 브라도 공[41]으로 등장하며, 발견물 중 하나인 흡혈귀에 해당한다. 게임 시작 시기가 1480년이니 이미 죽었을 시기인데 고증을 무시하고 등장. 도서관에서 흡혈귀에 대한 힌트를 얻고 육상 탐험을 통해 부쿠레슈티를 찾은 다음, 성에 들어가면 된다. 발견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백작의 제안으로 하룻밤을 지내야 할 상황에서[42] 집사의 도움을 받아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둘째는 백작과 일기토를 벌여 승리하는 것이다. 다만 백작은 체력이 100으로 대항해시대 3에서 가장 강한 상대 중 하나이며[43], 일기토에서 패하면 바로 게임 오버이므로 일기토 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발견 조건을 충족시키면 '제혈여왕'이라는 복식품을 증거물로 얻게 된다. 어차피 일기토 안 해도 발견물은 얻을 수 있는 데다, 일기토를 벌일 경우 악명이 50 올라가므로 괜히 져서 게임오버당할 위험이 있는 일기토를 할 필요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기토 하는 게 더 멋있잖아? 오밤중에 집사 따라 도망 나오는 건 아무래도 모양이 좀 빠지지
  • 대항해시대 5 - 스토리 진행 중 등장. 격진의 오스만 이벤트 스토리에서도 등장한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 어쌔신 크리드 : 레벨레이션에서 악의 조직 템플 기사단의 일원으로 설정되어있다. 흡혈귀로 나오는 다른 매체들에서 받는 대접과 다를 게 뭐야[44] 1476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당시 3번째로 집권중이었던 왈라키아 공국을 침공할 때, 오스만의 고관이기도 한 암살단이샤크 파샤에게 암살되었고 그의 목과 검은 콘스탄티노플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레벨레이션 특별판 예약구매 특전으로 그의 검과 머리가 보내진 "블라드 가시공의 감옥"에서 "블라드 가시공의 검"을 얻을 수 있다. 저 검이 좀 물건인데, 적병을 죽일 때 피니시가 잔혹하게 바뀌며, 죽일 때마다 주변 적군의 사기를 꺾어서 도망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참고로 이 감옥을 뒤질 때는 게임 분위기가 완전히 호러로 변한다...
  • 토탈 워: 아틸라: 모드(MOD)중에 'Medieval Kingdoms Total War 1212AD'의 'Voievodeship of Wallachia'에 등장한다.

7.4. 영화

  • 블라드 체페시(1979): 루마니아에서 만든 블라드 3세에 대한 영화https://www.youtube.com/watch?v=GCGeje5ut3w
  •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992) - 원작 소설과는 달리 블라드 가시공으로 설정돼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아내의 투신자살, 신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 등이 추가되었다.
  •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2014)- 어린 시절에 투르크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그 용맹함으로 '용의 아들(드라큘라)'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투르크의 메메드 2세의 전쟁 선포를 받아들이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부러진 이빨' 산에 올라 그곳의 괴물과 계약하여 힘을 얻는다. 인간의 피만 마시지 않으면 사흘 뒤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오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이용해 전쟁이 끝난 뒤 인간으로 돌아올 참이었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인간의 피를 빨아 완전한 흡혈귀로 변한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흡혈귀가 되었다는 애처로운 이야기.

7.5. 그 외

  • 닌자 슬레이어 - 4부에 등장하는 닌자 레드 드래곤이 정황상 블라드 3세로 보인다.
  • 동방 프로젝트 - 레밀리아 스칼렛이 스스로 블라드 체페슈의 먼 후예라고 칭한다. 동방홍마향 6면 필드전의 필드 배경음도 '체페슈의 어린 후예'이다. 다만 제작자인 ZUN은 '사실 체페슈의 혈통을 이어받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 샤먼킹 - 아사쿠라 하오의 부하 중 한명인 보리스 체페슈가 블라드 가시공의 후예라는 설정.
  • 시큐브 - 피아의 저주 도구 중 '블라드 체페슈의 말뚝'이 등장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더 포가튼 : 캠페인 중 하나로 나오며, 블라드 체페슈가 정권을 잡고 왈라키아의 대공이 되어 오스만과 싸우는 과정이 나온다. 이야기의 화자는 블라드의 보이보드(부관, 군사령관)였던 이스트반이 노인인 시점에서 블라드의 묘에 경의를 표하려는 여행자들에게 블라드의 이야기를 하는것인데 이를 보아 블라드 사후 오랜 시간이 흐른것으로 보인다.
  • 영웅의 군단 - 블러드 체페쉬로 나오며 브란성의 성주이지만 비중은 공기...
  • 영웅전희 - 다른 역사인물들처럼 모에화되어 등장하며 스탠딩 CG에서는 말뚝이 박힌 곰인형을 들고 있다. 황당하게도 등용할 수 있는 지역이 오스트레일리아인데, 이후 플레이어가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하면 개인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다.
  • Europa Universalis IV - 시작시점(1444년)에 왈라키아의 군주와 후계자는 아버지와 형으로 설정되어 있고, 본인은 장군(3/3/3/0)으로 등장한다. 이후 시점에는 군주로도 등장하나, 능력치는 1/0/5로 군사 능력을 제외하면 상당히 좋지 못하다. 게임 초반 시점에 행정이나 외교 능력에 비해 군사 능력은 크게 메리트가 없다는 점에서 더하다.(다만 왈라키아의 정세상, 오스만보다 군사 레벨을 조금이라도 빨리 올리는 것이 도움이 되기는 한다.)
  • 이터널시티 - 루마니아 어설트의 보스로 '블라드 체페슈'가 등장했으나, 루마니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유저의 건의를 받고 이름을 변경하였다.
  • 장국의 알타이르 - 우라도 왕국의 지그몬트 3세로 그려지지만 캐릭터 디자인과 처형 방식으로 말뚝에 꽂아 죽이는 형벌을 채용하는걸 보면 빼박 블라드 가시공이다.
  • 카사비안의 3집에 수록된 'Vlad The Impaler'
  • 크리퍼스큘 - 블러드 체페쉬
  • 퇴마록 - 세계편에서 영혼으로 나온다. 루마니아에 가서 연희와 영혼이 만나는데 미래 사람들에게 흡혈귀 대명사로 자기 이름이 알려졌다는 이야길 하며 씁쓸해한다. 연희와 대화를 하면서 연희의 눈빛을 보더니 자신의 아내와 같은 느낌이 든다며 아내의 눈빛을 보면 죄책감에서 잠시 남아 벗어날수 있다고 하다가 연희가 부르면 언제든지 도와주겠다고 하고 잠깐 사라진다. 코제트와의 싸움이 끝난후 지하동굴이 무너지려고 할때 연희가 도움을 요청하자 다시 나타나 어느 한벽을 가리키며 "흡혈귀의 관은 크로커스의 것이라오[45]"라며 말을 남기며 사라진다. 준후의 말로는 고통의 방황에 벗어나 승천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참고로 블라드 3세가 아닌 4세로 번역이 되어 있다.
  • 헬싱 - 아카드
    참고로 여기서 후반 아카드의 능력에 의해 조국 왈리키아 군대와 백성들은 물론 적국 오스만 제국의 군대까지 다 튀어나온다. 즉 메메드 2세는 비교적 별 상대도 안 되는 나라 하나 잡다가 자신의 군대 대부분이 빨려버린 셈(...)이다. 그리고 묘하게도 현실에서 블라드 가시공의 나라를 멸망하게 한 원인인 오스만 군인들이 여기선 아카드가 무적이 된 원인이라는게 아이러니. 근데 슈뢰딩거 때문에 아카드가 30년 동안 생명들을 하나 하나 족쳐주는 귀찮은 일을 하게 했으니 그나마의 복수는... 하지만 그래봤자 어차피 생명 하나가 무한급이 된지라 상관없지만
  • 흡혈마법소녀 G쨩 - 드라큘라 백작
  • Brothers Dracul - 블라드와 라두가 어려서 볼모로 잡혀있을 시절의 이야기. 이때 아직 어렸던 메메드를 따라서 처음으로 흡혈귀와 만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어렸을때 이미 흡혈귀를 한번 죽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 Fate 시리즈 - 블라드 3세(Fate 시리즈)
    • Fate/EXTRA - 랜서(Fate/EXTRA)/4회전
      광기에 빠진 광신도로서의 드라큘라를 형상화했다.
    • Fate/Apocrypha - 흑의 랜서
      루마니아의 영웅으로서의 블라드 가시공을 형상화했고, 그 때문에 바로 위의 문서의 랜서로 대표되는 흡혈귀로서의 이미지를 부당하게 여긴다.[46] 오죽하면 힘줄을 띠운 채로 "어이쿠, 무심코 찢어버렸군 하하하."라고 말하며 억지로 웃으면서 드라큘라 책을 찢는 일러까지 있겠는가.
    • Fate/Grand Order - 블라드 3세(Fate/Grand Order)
      Apocrypha와 동일한 면모지만 보구에 의해 흡혈귀 드라큘라가 되어 현현하고 만다.
  • MELTY BLOOD - 왈라키아의 밤
    별개의 인물이지만 설정상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 워해머 - 블라드 폰 칼슈타인
  •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
    378화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형인 미르체아에 이어 제국에 인질로 오게 된다. 그의 성격이 비뚤어진 이유를 알고 있던 드라가시스가 잘 교육시키고 예우해준 덕분에 원 역사의 비뚤어진 성격은 없이 지극히 정상적이다.[47] 드라가시스는 본디 가시공을 헬레네와 이어줄 생각이었지만 헬레네는 미르체아를 선택한다. 그래도 블라드가 헬레네가 자신이 바란 여성상이 아니었다고 고백하면서[48]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왈라키아로 돌아갈 생각이냐는 황제의 물음에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제국의 군인으로 남겠다고 말할 정도로 제국이 마음에 들은 상태. 주인공도 블라드 2세가 허락하면 토마스 밑으로 보내주겠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왈라키아 대공 블라드 3세가 아닌 로마 제국의 명장인 블라드로 역사에 남을듯 하다.

8. 참조 서적

  • 드라큘라 그의 이야기 (레이몬드 맥널리 & 라두 플로레스쿠)
  • 신화의 나라 드라큘라의 나라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 영어로 Impale은 '(말뚝)'에 꿰뚫다' 또는 '박아놓는다'란 의미이다. 단순히 찌른다란 의미가 아니다.[2]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어 표기인 '발라히아(Valahia)', 혹은 '문테니아(Muntenia)'라고 부르는 것이 옳으나 지명도등으로 유명한 '왈라키아'로 표기한다.[3] 그의 아버지의 별명이 용공, 즉 용 공작이란 별명이었던 만큼 그에게서 태어난 블라드 3세는 별명대로라면 용의 아들이 되는 셈.[4] 성 자체는 크게 대단하지 않은데 드라큘라성이란 별명을 갖는 바람에 관광객에게 잘 알려진 곳들 중 하나. 높은 가격대비 만족도가 낮아 비판을 받는다.[5] 외딴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해서 찾는 이가 적다. 입장료는 저렴하지만 볼 건 별로 없다.[6] 헝가리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헝가리어식으로는 지그몬드)가 1408년에 창설한 기사단으로, 오스만 제국에 맞선다는 명분을 내걸고 설립했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상서롭게 여긴 동물이지만 유럽에서는 사악한 존재로 여긴 용을 상징으로 삼은 것은 조금 의아한 부분이지만, 15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번영했다.[7] 혹은 용의 사악함에 빗대어서 악마공(惡魔公)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고 하나(실제로 현대 루마니아어에서 'Dracul'은 '악마'를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설득력은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블라드 2세 자신은 딱히 '사악' 하다고 볼 수 있는 행적을 남기지 않았을 뿐더러, 드래곤 기사단에 가입하면서 지기스문트로부터 드라쿨이라는 별명을 하사받은 것인데 만약 악마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었다면, 지기스문트는 자신의 신하이자 한 기사단을 맡는 기사단장이자 공국의 군주에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욕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8] 블라드 3세와 동명이인으로 이 사람은 수도공이라는 별칭을 갖는 사람이다.[9] 가시공은 죄수를 항문에 말뚝을 꽂아 죽이는 형벌로 유명해지는데 이 형벌은 사실 양성애 성향이 있던 메흐메트에게 성폭행, 즉 항문성교를 당했던 기억이 남아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형벌로 발전한 것이라는 설.[10] 블라드 2세는 이 전투를 반대했었다. 아마도 아들 때문이었으리라[11] 라두가 형인 가시공과 사고관이 조금 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매국노'라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다. 실제로 그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왈라키아인의 지위 상승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즉 오스만의 지배는 기정 사실이므로 저항해 봐야 무의미하고, 제국 내에서 왈라키아인의 지위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15세기는 민족주의가 생기기 한참 전이었기에, 타협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봉건적 계약 관계 아래 불리하다 싶으면 주군 갈아치우며 한 나라 안에 상류층과 평민들은 언어 자체가 다른게 일반적이었던 유럽에선 상식적인 판단이었다[12] 형 미르체아가 특히 끔찍한 죽음을 당했는데, 산 채로 눈이 뽑히고 매장당했다. 형의 무덤을 이장하려고 파봤더니 관 속에서 관뚜껑을 손으로 마구 긁은 자국이 발견되었다는 카더라도 있다.[13] 상술했듯 가시공의 친모는 불명이다. 그러나 이런 가시공의 행동이 그의 친모가 몰도비아의 귀족 여성이 아닌가 추측하게 하는 근거이다.[14] 이후 왈라키아투르크에 복속되면서 성채축조는 금지당했다고 한다. 칼사냥?[15] 다만 그 처벌 강도가 너무나 높았으므로 제대로 된 의미의 치안 확립이라고 하기는 조금 힘들다. 게다가 한 사람이 잘못해도 마을 전체가 책임져야 하는 면도 있었기에 더더욱. 스탈린 치하 소련이 안정됐던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16] 공식적으로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록이 없다. 굳이 추측하자면, 그 수도자는 가시공이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는 주님만이 아실 뿐 자신은 알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는 죽은 이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아실 뿐 우리가 쉽게 재단하고 판단할 수는 없고 다만 죽은 이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게 자비를 구할 수 있다는 정도로 선을 긋는다. 때문에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장례 때 그러한 기도를 올리며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부정하고 지옥으로 가는 자는 사후에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자 뿐이며 이미 원죄가 예수에 의해 사함 받았기 때문에 어떤 죄인이라도 하느님 곁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17] 기독교에 따르면 인간을 천국에 보낼지 지옥에 보낼지는 하느님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천국에 갈거라고 말한 수도자나 지옥에 갈거라고 말한 수도자는 교리상 잘못한게 맞다.[18] 정교회연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인정한다. 죽은 이들을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청원하는 기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19] 블라드 기사공이 죽인 이전 보이보드[20] 여기에서의 '모자'는 당연히 터번을 가리킨다. 터번을 술탄 앞에서도 벗지 않는 게 우리네 관습이라고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는데도…[21] 그것도 자국민들에게 행한 형벌을 그대로 채용, 꼬챙이에 꽂아 죽을 때까지 전시해 놓는 잔혹한 방법을 사용한다.[22] 황제가 친정하면 최대 10만까지 나올 정도였다. 당시 유럽은 군주가 친정해도 많아봐야 수 만이지 10만이 동원된 적은 없었다.[23] 현대 루마니아의 역사가 라두 플로레스쿠(Radu Florescu)에 따르면[24] 왜냐면 15세기의 왈라키아 인구는 50만명 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25] 이 시기 블라드의 귀족 탄압과 무자비한 법 질서 확립에 귀족들의 불만이 가득 쌓여있었다.[26] 블라드의 동생이자 예니체리 군단장[27] '라두 셀 프루모스(Radu cel Frumos)'. 즉 '미남공(美南公) 라두'라고도 한다.[28] 정확히 몇년 동안.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인 추측으로는 피신한 1462년부터 가시공이 일로나와 결혼하는 1466년(36살)까지.[29] 또다른 설화에 의하면, 유폐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용서를 받아서 감옥을 빠져나와서 헝가리 왕가와 인척관계를 맺는데 성공하였다. 왈라키아로 복귀하기 전까지는 부다페스트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30] 루마니아식 이름임. 헝가리식 이름은 추가바람[31] 헝가리식 이름임. 루마니아식 이름은 추가바람[32] 아버지와 형을 죽인 귀족들에 대한 대처.[33] 아이를 죽인 다음 요리해 그 어머니에게 먹인다든가, 여자의 젖가슴을 잘라 남편에게 먹인다든가 하는 흠좀무한 내용도 많다.[34] 한 농민이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불러서 너 부인 없냐, 부인이 건강하지 못하냐, 하는 걸 물어보더니 "남편이 가족들을 굶기는 것도 아니고 자기 몸이 약한 것도 아니면서 왜 니 마누라는 자기 남편한테 허름한 옷이나 입고 돌아다니게 놔두냐?" 면서 그 아내를 잡아다 양손을 잘라 처형해 버리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게 했다고.[35] 차라리 브란 성은 블라드 3세의 정적과 크게 연관이 있다고 말하는게 좋을 성이다.[36] 사실 드라큘라 초반에 "드라큘라의 손님" 챕터가 짤린게 너무 일찍 흡혈귀의 존재가 드러난다는 이유도 있는데, "왐피르 공"이란 이름은 나 흡혈귀요하고 광고하는 이름이라(왜냐면 밤피르를 살짝 변조한 건지라....) 괜찮은 대체제로 드라큘라란 이름이 여겨진 것이다. 더불어 이 왐피르 공은 오스트리아의 스티리아 출신으로 되어 있었는데, 드라큘라보다 이 전의 히트작 흡혈귀 소설 카르밀라의 무대가 오스트리아의 스티리아다. 즉, 왐피르 공이라는 초반 설정으로 갔다가는 카르밀라 짝퉁 취급 당할 위협도 있었다. 실제로 스토커의 노트를 보면 집필 초반에는 왐피르 공이라고 쓰다가 드라큘라로 이름이 바뀌고, 캐릭터 리스트에서도 왐피르 백작이란 이름에 줄을 긋고 드라큘라로 바꾼다.[37] 드라큘라 챕터18, He must, indeed, have been that Voivode Dracula who won his name against the Turk, over the great river on the very frontier of Turkey-Land.[38] 시의 내용이 "블라드 체페슈는 적의 피에 빵을 적셔 먹었다"고 오역된 것. 그러나 실제 내용은 "블라드 체페슈는 적의 피로 손을 씻었다"였다고[39] 만화가 이원복은 자신의 만화 현대문명진단에서 이 모습을 드라큘라를 보면서 무서워하기는 커녕 $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도리어 드라큘라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흡혈귀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가 드라큘라의 피를 빨아먹으려 드라큘라를 쫓아다니는데 드라큘라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 좀 그만 빨아먹어라"라고 도망다니면서 신세한탄을 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40] 상술한 바와 같이 블라드 가시공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드라큘라를 그저 괴물이 아닌 '세태와 당시 사회의 부조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되고 말았다'란 설정을 첨가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또한 블라드 3세와 드라큘라는 사는 곳만 같을 뿐, 드라큘라와는 동일인물이 아니란 이야기 역시 존재하며 무엇보다 브람 스토커는 드라큘라란 이름 자체를 알기 전에 그저 '언데드(Undead)'란 이름으로 제목을 구상했었다.[41] 일어판을 발음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42] 처음 성에 들어가려고 하면 낮에는 손님을 받지 않으니 밤에 다시 와달라고 하는데, 두번째 방문했을 때 백작이 이왕 손님으로 왔으니 저녁식사를 대접하겠으니 같이 먹자고 권하는 선택지가 뜬다. 식사를 먹는다고 선택하면 주인공은 그날 밤에 백작의 야식으로 전락하며 바로 게임오버(...)가 뜬다. 저녁을 거절하면 왜 찾아왔냐고 물어보며 세가지 선택지가 뜨는데, 백작을 쓰러뜨리러 왔다는 선택을 하면 바로 일기토로 넘어간다.[43] 부관을 시켜 싸울 경우 천하의 로꼬라도 멈칫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력까지 감안하면 체력 100에 무력 98인 바르바로사 하이레딘이 가장 세다. 물론 롱기누스의 창에 신전기사단 갑옷이면 둘다 그냥 눕는다[44] 내러티브적으로 어쩔 수 없는게 이 게임에서 비잔틴 잔당이 템플러고 오스만 제국에 암살단 협력자들이 있다. 그리고 쉴레이만 1세와 친분이 있다.[45] 참고로 크로커스는 블라드공이 죽인 보얄중의 한명. 그런 크로커스의 영혼을 코제트가 크로커스의 관을 찾아 옮겨놓아 흡혈귀로 만든 것임[46] 자신이 생전에 한 행동으로 인한 악명은 긍정하지만 19세기 영국에서 뜬금없이 뒤집어 쓴 오명이라 혐오한다. 게다가 흡혈귀 드라큘라로서의 기억이 강제로 섞여있다보니 더더욱.[47] 다만 옳은 길이라면 절대 타협하지 않는 원 역사에서의 원리원칙적 성격은(잔혹함과는 별개다.) 그대로 있다.[48] 내용을 보면 헬레네가 미르체아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자(자신을 사생아라 안 불러서) 바로 안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인은 헬레네 같은 여장부 스타일보다는 현모양처가 좋기 때문이라고.